• 최종편집 2024-05-14(화)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김지호)잡은 손
    잡은 손 문 진 환웬만해야이웃 눈길이라도 머물지지독한 가난가까운 촌수만 멀어져고웬만해야지긴 병치레사랑만 있으면 된다던 사람도언제냔 듯귓전에다 대놓고저승사자 나무라는 소리너덜너덜웬만한 영혼이래야세상천지그럼에도 불구하고차마잡은 손 놓지 못하시고또다시날 품어 주시는 아버지 사랑사람이 살면서 자기 뜻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뜻대로 잘 되지 않기에 때로는 힘겨울 때가 많다. ‘가난’이라는 것도 열심히 산다고 해도 헤어나오지 못하면 슬픔과 절망이 될 수도 있다. 가난에 허덕이다보면 친척이나 지인들마저도 거리감이 생겨 속상한 일이다. 또한 오랜기간동안 병치레를 하는 것도 서러운데 따듯한 말대신 화살같은 말을 쏘아 붙이면 환자는 정말 괴롭다. 잠언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다. 이왕이면 우리는 상대의 상황에 따라 지혜로운 말을 할 필요가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상대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지나친 독침같은 언어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스트레스가 되어 좋지않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잠언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도 상대의 상황이나 처지를 고려하며 지혜롭게 말을 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그러한 애처로운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손을 잡아 주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가 넘쳐 마음의 눈물을 흘린다.“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신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이 병약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이 되길 바란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6-17
  • 선교지의 인권 옹호
    어쩌면 선교지 만큼 인권이 유린된 곳이 없다. 특히 이슬람 지역에서의 선교사들의 운명은 파리 목숨처럼 위태롭다. 어떤 사람은 산채로 불태워 죽였고, 다른 사람들은 토막난 채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어떤 선교보고에 의하면, 한 전도자는 머리가 잘리고 공공장소에 아무렇지 않게 버려졌다고 했다. 이처럼 고통을 받는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은 “왜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까?”이다.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천년 전 기독교가 탄생한 이후부터 핍박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먼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생존권과 인권옹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지구촌화 되어 있는 지금은 우리의 관심과 기도가 급속한 시간에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만약 생존권이 위협 받고 있을 때에 우려를 포명하고, 관계 당국에 부당한 처사를 교정 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즉 세계 연합인 UN을 통해서 함부로 생명에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촉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오늘 선교사와 기독교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의 결속이다. 우리는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한 형제요 자매임을 온 천하에 보여 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와 있다. 이웃의 곤경을 무시하고 모른다고 지나치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통을 받기까지 함께 나누라는 부름을 받았다. 갈라디아서 6:9-10절에 의하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인권 옹호이다. 인권 옹호는 정치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현지의 선교사들은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인종차별을 외부세계에 알려야 한다. 종교 탄압이나 차별에 대한 정보를 인권단체들에게 조용하게 제공하여야 한다. 다만 선교지 체류에 해가 되지 않도록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지혜이다. 세 번째는 인권 옹호를 위한 지침서를 만들고 필요시 행동해야 한다. 지침서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하라. 가능한 모든 정보출처를 알아내라. 인권 옹호를 위해서 무슨 행동을 취할 것인지 적임자와 논의하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관련자들과 의사소통을 하라. 만약 구류자가 있다면 현지 변호사와 접촉하라.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교관이나 인권그룹들에게 접근하라.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보호하라.”이다.네 번째는 만약 핍박이나 인종차별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간구해야 한다. 이는 선교사나 기독교교인들이 투옥되었는지, 폭력을 당하고 있는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농락을 당하고 있는지, 재판 없이 사형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정신병동 같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지에 대한 것들을 정보로 입수하여 대책을 간구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인권 옹호를 위해서 핍박을 당한 자나 가족들로부터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법적 위임을 분명히 받아두어야 한다. 만약 관계자들로부터 위임을 받았으면, 함께 일할 전문가나 변호사와 함께 소통하면서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 이 부분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가족들을 접촉하는 과정에 서방인이나 외부인들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정치 세력을 전복하려 했다는 빌미를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섯째는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해서 재정적 보조나 법적 지원을 고려해야 한다. 재정적 보조를 할 경우에는 수혜자에게 직접 전달할 것인지, 현지교회나 지도자와 함께 할것이지 잘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법적 지원은 희생자가 변호사에게 직접 지불하도록 돕는 것 보다는 후원기관이 변호사에게 직접 지불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필자는 오늘 세계 각처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와 선교사라고 하는 신분 때문에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서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6-17
  • '창세기'로 읽는 예술론
    미학자요 철학자이면서 가톨릭신자인 이마미치(今道友信,1922-2012)는 예술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창세기>에서 찾아낸다.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7대째가 되는 라멕이 세 아들에게 족장권을 물려주면서 삼권분립 방식을 취했다며 운을 뗀다. 물론 우리시대가 이해하고 있는 삼권분립과는 그 내용과 형식이 다르기는 해도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삼권분립을 시도했다고 해석한다. <창세기> 4장 19-22절을 요약하면, 라멕의 장남 야발은 목축의 조상이 되고, 차남 유발은 음악을, 셋째 두발가인은 무기나 농구를 제작하는 권한을 받게 되었다는 것. 이는 목축이라는 생산업과, 예배와 축제에서 집단적 의식을 한데 아우르는 음악예술이, 그리고 농업과 군사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는 기술이 고대 유목민족의 삶에 필요불가결한 세 요소였고, 라멕은 그 요소들을 세 자손에게 골고루 나누어 위탁했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음악으로 대표되고 있는 ‘예술’이란, 인간이 족장제도를 유지하고 있을 적부터, 목축과 군사와 더불어, 3대 지주의 하나로써 당시의 현실 생활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이 확실하게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바로 그 무렵, 그 지역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인격신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창세기> 4장 26절,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예술을 생활의 한 기둥으로 여기기 시작할 즈음, 다른 한편에서는 윤리적으로 엄격한 일신교의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는 내면적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원시적 주술이나 계절적 집단행사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정 그 이름값을 하는 ‘종교’가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외부에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면에서 이를 찬양하고 영구화하려는 생각이 뒷받침하지 않는 한, 예술행위는 발생할 수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인간의 작업으로 이룩하려 하는 내적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 한, 예술이 성립될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인간 내면의 심화작용과 예술의 성립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인간의 내적성장에 따라 예술자체의 수준도 높아졌을 것이고, 그로 해서 예술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인정받으면서 산업 군사와 더불어 발전해가는 예술은 그 이후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 예술은 항상 예배와 축제의 한 부분으로만, 언제나 그 시선을 신에게만 돌리고 있었을까. 이마미치는 <창세기>에서 그 후일담을 찾아가는데, 그것은 “바벨탑 건축 설화”로 귀결된다. “유대인은 아름답고 높은 탑을 건조했다”는 그 유명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로 부터의 인용(역사 1권 180)을 보조 자료로 첨가하는 열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어떤 동기로 건축된 것일까.“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기 11장 3-4)비약적인 기술력의 발전은 주거나 군사적 방어와 같은 실용적 범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 건축행위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을 넘보게 된 것이다. 지평위에 우뚝 솟아오른 아름다운 탑. 그것은 새로운 기술이 일구어낸, 그러나 실생활의 필요한도를 넘어서는 예술작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인간 의지는 성역으로만 여겨오던 ‘하늘’마저 넘나들 수 있는 범위 안에 편입되었다고 큰 소리 치게 된 것일 지도 모른다. 마침내 예술은 인간의 종교적 경건을 장식하는 부속물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판단을 따라, 인간이 신에게 예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역을 꽤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인간내면의 표현이 된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6-17
  • 기독교인의 성공과 출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상인에 얽힌 열 개의 두루마리에 관한 전설이다. 예수님 탄생 당시 ‘하피드라’는 어린 낙타지기 소년이 부유한 상인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피드는 부유한 상인의 딸 리자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낙타지기라는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는 위대한 상인인 그의 주인 파트로스에게 상인이 되고 싶다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다. 파트로스는 하피드에게 새 겉옷 한 벌을 주면서 가난한 동네 베들레헴에서 팔라고 하였다. 하피드는 베들레헴에서 사흘 동안이나 옷을 팔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였다. 결국 고급 새 외투는 베들레헴 근처의 동굴 속에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주어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아기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하피드는 가난해 보이는 갓난아기에게 동정심을 느껴 옷을 주고는 힘없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별 한 개가 그의 머리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하피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파트로스는 하피드를 비추면서 따라오는 별을 보고 그것이 그 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신호임을 깨달았다. 자신 역시 가난한 청년이었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성공’을 위한 열 개의 위대한 두루마리’를 물려줄 적임자를 찾았다는 것. 파트로스는 죽기 전 그 두루마리를 하피드에게 넘겨주었다. 하피드는 두루마리의 원칙들을 습득하여 자신의 주인과 같이 위대한 상인으로 성공하였고 큰 부자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목마르게 성공을 원하고 출세를 원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성공이고 출세인지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갖지 못 한다. 통상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위, 명예, 권세, 재력을 얻으면 성공이나 출세를 했다고 말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렇게 되기 위해서 개인의 능력 외에도 주변의 여건이 많이 갖추어 있다고 생각 한다. 명문 가문이어야 하고 명문 학교를 나와야 하며 특히 지역의 연고를 최대로 이용해야 한다. 한마디로 ‘줄’을 잘 잡아야 성공이나 출세가 수월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관념이 되어 있다. 이에 사람들은 성공과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불법적인 행위도 사양하지 않는다. 결국 교회와 사회의 악과 부조리는 이런 잘못된 성공과 출세주의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지역갈등이나 교육문제나 사회 파벌이나 사회 지도층의 부조리는 다 이런 연유에서다. 이런 성공과 출세지상주의가 우리 교회와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 되어 선진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성공과 출세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성공이자 출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영어로는 ‘Will’ 이고 헬라어는 ‘테레사’ 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테레마’의 동사 ‘테로’는 개역 성경에 원하다(마 8:2), 하고자 하다(마(마 19:21), 소원하다(마 15:28), 기뻐하다(마 27:43)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여 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뜻을 행하고 있을까? 예컨대 지식을 다루는 책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출세하며 부자가 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책들 가운데는 ‘줄을 서도 부자 뒤에 서라’느니 심지어 거지 노릇을 해도 부자 동네에 가서하라는 말까지 하며 부자 중심으로 살 것을 권하고 말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권력을 등에 업고 소위 성공하고 출세했던 사람들의 호가호위가 일장춘몽처럼 되어 버리는 것을 보면 인생의 참 성공이나 출세가 아닌 것을 볼 수가 있다. 실례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주님의 재판 장면을 통해서 생각해 보자(요 19장). 이곳을 보면 한 쪽에는 오직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역 죄인이 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서 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상대가 무죄인 것을 알면서도 백성의 소리와 자기 이익을 위해 무고하신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하는 빌라도 총독이 서있다. 그리고 재판이 종결 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채찍을 맞으며 끌려갔고 빌라도는 총독의 보좌에 앉아 재판에 만족하는 무리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자기의 뜻과 백성의 소리를 따르는 자는 가장 위대하고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며 하나님의 뜻을 추종하는 예수님은 가장 어리석고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후 결말은 어떻게 되었던가?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몇 년 후에 여러 가지 실책에 의해 소환됨으로 총독의 자리에서 퇴진하고 말았고 천추의 역사적 죄인으로 남게 되었다. 반면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주님은 이후 부활 승천하셔서 천지 만물의 경배를 받는 귀한 자리에 오르셨다(빌2:9~11). 이처럼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잠시 성공하고 형통하는 것 같으나 실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는다.
    • 칼럼
    • 목회자
    2016-06-17
  • 기도의 힘
    기도는 위대한 힘을 가진다.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성공의 비결을 물으면 한결같이 기도의 힘이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기도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가 예배 따마다 드리는 “주기도문”이 바로 그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부여 주셨다. 인류의 구속을 앞두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밤을 새우면서 기도하셨다. 기도에는 네 가지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찬양, 감사, 고백 그리고 간구이다. 이를 흔히들 ACTS 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교회와 한국인에게는 유난히 열정적인 기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유학시절 외국인들로부터 든는 소리는 “한국인처럼 주여 라고 외치며 소리 내어 기도 합시다”였다. 필자가 글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에 안자서 인터넷 신문을 검색하는 동안에 흥미 있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조선일보에 게재된 김철중의 생로병사 코너에 실린 ‘수술 환자를 위한 1분 기도가 만드는 작은 기적들’ 이라는 글이다. 이 글이 가진 논지는 기도는 종교와 사상을 뛰어 넘는 위대한 힘을 가진 도구라는 것이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 강남터미널 뒤쪽에 자리 잡은 서울성모병원. 5층 수술실에서는 매일 아침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전신 마취 수술에 임하는 모든 환자에게 수녀가 다가간다. “제가 환자를 위해 기도해 드릴까요? 종교와 상관없이 환자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환자들 백이면 백 기도해달라고 답한다. 수녀는 환자 옆에서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쾌유를 빌고, 의료진의 정성 어린 손길이 환자에게 닿기를 기원한다.그 1분 기도에 뜻밖의 광경이 벌어진다. 40대 가장이 울음을 터뜨리고, 60대 엄마가 흐느끼고, 80대 할아버지가 눈시울을 적신다. 1분 동안 그들에게 수십년 인생이 지나갔으리라. 수녀의 기도를 듣는 환자의 절반 이상이 눈물을 흘린단다. 찌르면 아프고, 건드리면 무너지는 것이 환자의 심정이지 싶다. 이들을 위해 수녀 8명이 번갈아 가며 수술실 기도 당직을 선다.기도로 수술을 시작한 원조는 세브란스병원이다. 수술 준비실에서 목사와 전도사가 기도를 시작한 데 이어 4년 전부터는 수술대에 누운 환자를 위해 마취과 의사나 수술 의사가 기도를 주도한다. 수술실 의료진 모두 수술포를 덮은 환자의 몸에 손을 얹고 1분 기도를 드린다. 사전에 기도 동의를 얻고, 환자가 ‘아멘!’을 거북해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를 빼고 기도를 마친다. 매일 100명 안팎의 수술 환자에게 쾌유를 빌고, 의료진의 손길이 실수 없이 아픈 곳을 잘 어루만지게 해 달라고 빈다. 한 스님 환자가 기도를 제안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의료진을 향해 먼저 “나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목사가 환자였다고, 스님의 기도를 마다했겠나…. 수술실 기도를 주도하는 의사 중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경우가 절반 정도 된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남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한다. 자신을 위한 기도나 남을 위한 기도나, 같은 영적 에너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고,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 그럼 중보기도는 실제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여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차이가 있다는 쪽과 없다는 측으로 나뉜다. 수술 전 기도가 환자 회복에 도움이 됐다는 논문이 있는가 하면, 심장병 수술에서 기도를 받은 그룹과 받지 않은 그룹 간에 결과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도 있다. 시험관 아기 시술에서 중보기도를 받은 여성의 임신 성공률이 2배 높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물론 의료의 본질은 세심하고 꼼꼼한 진단과 치료이고, 기도가 그것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어찌 됐건 누군가 기도 혜택을 입었다는 주장은 있어도 기도가 질병을 악화시켰다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지금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할 시간이다. 남북이 극한 대치 상황이라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밑에서 사는 것 같다. 정치적으로는 기득권을 앞세운 정당들에 의해서 합치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그들을 보면서 실망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미래 세대인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어서 식당일을 하는 알바로 내몰리고 있다. 대중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할 종교인들마저 거룩하고 이타적인 삶 대신에 세속적인 것들에 취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럴 띠일수록 기도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도 깨어서 기도할 시간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6-10
  • (김지호)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
    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 조 성 권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보석 같은 불빛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보석같은 불빛에 내 눈빛을 잃어그대가 보석임을 잊을까 봅니다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쪽빛 가득 머금은 하늘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쪽빛 하늘에 갈 길을 잃어그대를 잃어 머물고 싶을까 봅니다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보랏빛 향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보랏빛 향기에 취해 내 마음 무디어져그대가 향기 임을 잊을까 봅니다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그대로 가득하고그대만 가득하여그대를 향한 달음박질이었으면 합니다.세상에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그 유혹이 너무 강해 한 번쯤 이탈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 유혹에 마음을 빼앗겼음을 깨닫고 회개하기도 한다.하늘 가는 여정은 협착하여 쉽지가 않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이 값비싼 보석처럼 빛이 난다면 거기에 현혹되어 자신이 가야할 바를 잊은채 정로를 이탈할 수가 있다. 세상은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 등이 처처에 깔려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추구하기 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절제의 습관이 몸에 베어야 한다. 하늘 가는 길이 때로는 고단하고 나그네와 같이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견딜 수 있다.이 시에서 화자는 보석같은 불빛, 쪽빛, 보랏빛과 같은 세상의 화려하고 매혹적인 것보다 오직 예수님의 향기만이, 오직 예수님만이 가득하여, 오직 예수님만을 향하여 달음박질 하기를 원하고 있다. 누가 이 화자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리지 못할까요.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화자와 같다면 이 세상은 새로운 에덴으로 재창조 될 것 같네요.
    • 칼럼
    • 기독시선
    2016-06-10
  • 피카소의 그림 값
    “내가 종이에 침을 뱉으면 그 종이는 액자로 장식되어 위대한 예술품으로 팔려간다” 하고 떠벌렸던 피카소의 장담은 허언도 과장도 아니었다. 일행을 거느리고 고급식당에서 진탕 먹은 후, 테이블 크로스에 사인이랍시고 내갈기면 주인은 감지덕지 했고, 수도 없이 많았던 애인들에게 이별금조로 건네 준 집값은 하룻밤 수고로 생산되는 정물화로 치렀다. 이런 금전적 호사를 누린 화가는 일찍이 피카소 이전에는 없었다. <비너스의 탄생>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보티첼리가 피렌체의 성당에 가로 세로 2미터 크기의 제단화를 그려준 대가는 오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6백만 원 남짓. 그것도 반은 재료값이었고 나머지가 화가의 품삯이었다면 믿어 줄 이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기록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미켈란젤로가 오랜 세월 천정에 매달려가며 그린 <천지창조>로 얻은 보수를 “호”당으로 계산하면 단돈 만원에 불과했다는 데야. 유럽에 화상들이 등장한 것은 17세기 렘블런트가 활약하던 네덜란드에서였다. 교회의 퇴폐와 허식을 고발하며, 교회미술을 우상숭배라며 부정하고 나선 종교개혁은 그때까지 화가들의 스폰서 노릇을 해온 교회로 하여금 미술품의 주문을 급감하게 했다. 예수상이나 성모상 혹은 성서의 장면들과 같은 종교적 주제를 그릴 수 없게 된 화가들이 시민의 초상이나 생활상을 주제로 하거나 정물이나 풍경에 손을 대게 되었고, 그 거래에는 화상이란 새 직업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인상파의 그림이 화폐대신으로 그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독일 나치가 미술의 도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었던 이차세계대전 중의 일로 나치의 고관들이 인상파의 그림을 매점했기 때문.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보수적인 작품 이외는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배척했었지만, 그것은 화가지망생이었던 히틀러 앞에서의 일이었을 뿐, 그의 고관들은 앞 다투어 인상파의 그림을 사재고 있었다. 독일통화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가는 상황에서 인상파의 그림은 국제 통화로서의 신뢰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19세기 후반에 급성장하기 시작한 화상이라는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미리 대처할 줄 알았다. 20세기 초, 폭발적으로 확대해가는 미술시장과 거기서 활약하는 화상을 활용하는데 피카소를 앞서는 화가는 없었다. 호당(160×130 ㎝)값으로 치면 피카소의 그림은 평균 10억 원을 웃돈다는 것이 상식이 된 데에는 그의 그림솜씨 못지않게 상술이 한 몫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기한 대로, 프로테스턴트국가 네덜란드에서 신흥부호들이 그림을 구입하게 되면서 미술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모네나 르노아르는 돈 몇 푼에 작품을 내놓지만, 시장 평가에 따라 거금을 벌게 되는 것은 화상의 몫이 되었다. 따라서 인기를 얻은 화가들도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이름이 나있는 화가의 그림보다는 헐값으로 살 수 있는 소위 전위화가의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되면 거액의 이익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파리 미술계에 막 신흥 경제대국이 된 미국의 재력이 들어오면서 미술시장은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19세의 피카소가 스페인에서 파리로 나타난 1900년은 그림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의 행운은 20세기 초에 신진화가로서의 평가를 확립하고 인상파에 이어 전위적인 스타화가를 대망하고 있던 미술시장의 요구에 완벽하게 응답하는 화가였기에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피카소의 행운은 천부적인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술교사였던 부친이 아들이 그린 사과그림을 보고는 스스로 붓을 던지고 아들의 데생을 돌보는데 있는 힘을 다했다는 일화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초기작품들은 그렇다 치고, 중기 이후의 작품들, 사실적 기법을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작품에서 오히려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일이며, 끊임없이 이어진 화풍의 변화를 견딜 있게 해준 것도 탄실한 데생실력이 받쳐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혹평을 능사로 삼는 비평가라 할지라도 피카소의 기본실력에 대해서 운운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 피카소가 죽기 얼마 전에 그렸다는 <자화상>에서 볼 수 있는 절망의 표정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술가를 넘어 인간의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던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을.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6-10
  • 예수님의 희생적 정신을 본받은 사람들
    처치 스트리트 교회를 담임하는 존 벤튼(Jon Benton) 목사의 이야기이다. 존 벤튼의 부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함께 극동으로 파견됐는데 1941년 싱가포르가 일본에 점령되자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그 때 일본군 포로 수용소의 상태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 380명 가운데 불과 27명만이 생존해 귀환했다고 한다. 그런데 콰이 강의 다리로 더 유명했던 이 극한의 포로수용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옥과 같은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물론 살인마저 서슴치 않던 포로들이 어느 순간에 훔치는 일을 중단하고 오히려 서로의 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는 것.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적은 바로 앵거스 맥길 브레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기독교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병으로 죽어가는 동료가 모포를 강탈 당하자 자기 모포를 내주었고 누군가 그 동료의 음식을 훔쳐가자 자기 음식을 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동료는 살아났으나 결국 앵거스 맥길브레이는 죽고 말았다. 이후 그의 이야기가 수용소 내에 퍼지자 그토록 동물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오히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아름다운 천사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 이상으로 행복한 일은 없다’ 라고 갈파했다. 톨스토이도 ‘죽음의 고통보다 강한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헤엄을 못 치는 아버지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드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나 이외의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는 모두 결국 희생적 사랑만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바로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알면서 진지하게 새겨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 이야기 속에는 교회 전체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서도 중요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도전 가운데 하나는 교회 성장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유럽의 교회는 무너진 지 오래고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성장률보다 이슬람교의 성장률이 앞서고 있다. 따라서 폭발적인 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교회에서 조차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 문제로 떠 오른지 오래다. 그렇다면 복음의 생명력을 본질로 하여 지금까지 놀랍게 성장해 왔던 교회가 왜 이토록 정체와 쇠퇴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필자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과 반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장을 멈춘 한국 교회가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잃고 교회가 성장을 멈추었던 이유를 그 어떤 먼 곳에서 찾지 말고 바로 우리 자신들 속에서 찾아야한다. 하지만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여전히 이 곳 저곳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여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인터넷을 검색 한다. 물론 이런 노력들이 교회를 살찌우고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노력 이전에 우리는 주님의 본 때문에(눅23:34) 그리고 그분의 명령 때문에(마 18:21~35 골 3:13)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요일 3:16). 이제 필자는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한 세분을 소개 한다. 먼저 바나바이다. 그는 주를 영접하고 이미 자기 전 재산을 교회에 희사한 인물이다(행 4:36, 37). 안디옥이라는 요즘 말로 말하면 편하고 물 좋은 대교회 목회를 마다하고 전인미답의 이방 선교에 발을 들여놓은 신앙의 인물이다. 다음 바울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다니던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주님을 만났다. 그는 히브리인이라는 선민의식, 많은 재산,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권리, 세상의 모든 지식 등을 배설물과 같이 포기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서이다(빌 3:8). 끝으로 50만 명이 넘는 군인, 공무원, 청년, 학생, 각계 각 층의 중견 인사들에게 개척자의 혼과 신앙의 씨를 심었던 고 가나안 농구학교의 김용기 장로라는 인물이다. 그의 위대한 점은 바로 한 가족 11명이 모두 기독교의 희생정신으로 평생 동안 꾸준히 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희생정신으로 인해 밥 한 톨 남기지 말라거나 열심히 일하라는 그의 가르침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이시대의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희생정신을 실천해보자.
    • 칼럼
    • 목회자
    2016-06-10
  • 평생 목회자의 믿음의 자화상
    오래전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때에 지방의 섬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자녀를 따라 교회 근처에 이사 온 권사님 한 분이 교회를 나오셨다. 얼마동안 교회봉사에 열심하던 분이 갑자기 교회를 그만 두겠다고 한다. 후에 들리는 소리로는 목사님도 ‘생명나무’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계시록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참 아쉽다는 말이 전해온다. 평생 목회의 길만 고집하고 걸어왔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말이 전해 오는가? 하고 본인의 믿음에 점검해 보게 되었다.20세기의 광포한 독재자 히틀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지구상에는 문화를 창조하는 우수한 민족과 문화를 파괴하는 열등 민족과 남의 문화를 모방하는 민족이 있다. 독일의 게르만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화 창조의 민족이다. 현대는 우수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 독일은 인류를 지배하고 지도할 역사적 사명과 책임이 있다. 그는 급기야 이러한 잘못 된 신념에 기초한 믿음으로 마침내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하여 죄없는 자들 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가.성경을 부분적인 것을 픽업해서 자의로 해석하는가 하면 잘못된 맹신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아야 한다.우리의 어떠한 믿음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경신(經信) 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믿는 것이다. 정규 신학훈련을 거치지 않은 지도자를 믿고 따르는 맹신주의에 빠진 경우이다. 얼마 전에 어느 세미나에서 강사의 설교 가운데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하면서 목회자들이 강단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 경우를 들면서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성경읽는 것을 자랑하면서 하루 30장 이상 읽지 않는 목회자는 목회자 자격이 없다고 몰아친다.나는 평생 그렇게 못한 목회자이기에 대꾸할 염치도 없지만 분명 그분은 자기의 의를 들어내고 있음에 마음이 씁쓸하였다. 주님은 자기의 의를 주님의 의보다 더 들어내는 바리새주의를 경계했다.둘째는 미신신앙으로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의 종교형태이다. 셋째는 맹신이다. 이성적 판단력이 없는 맹신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 놓고 믿으라고 한다. 젊었을 때 기도원의 강사가 회중들 앞에 따지지 말고 “덮어 놓고” 믿으라는 외침이 귀에 선연하게 들려온다. 한편으로 긍정적인 면도 인정하지만 폐해도 많은 것 같다넷째는 광신이다. 이것은 신앙의 가장 저급하고 가장 나쁜 형태이다. 광신주의자는 이성과 관용의 정신이 결여되어 자신의 신앙, 자기의 종교만이 옳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지나쳐 아집과 독선과 독단에 빠지는 경우는 충격적이다. 그는 절대로 남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참 믿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삶과 죽음이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요 수용이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뜻이요 사람은 결코 홀로 설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으로 평화의 도구로 거듭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신앙이란 관람석에서 무대 위에서 연출하는 배우들의 몸짓과 말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몸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있는 사람은 믿음이 깊은 사람이요 남을 사랑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보니 솔직히 낙제 점수 수준은 면한 것 같아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6-02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업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인과응보 사상이나, 적선을 통한 윤리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좋은 일과 적선을 많이 해야 극락왕생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주류가 급기야는 살생을 금지하고, 동물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는데 까지 이르기도 한다.그러나 기독교는 철저히 이신득의의 신앙이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 이다. 신약성경에 두 권의 성경에 이신득의의 신앙이 기록 되었는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이다. 갈라디아서속에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하나의 흐름은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잘못된 유대교의 교사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쓴 바울의 서신서 이다.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을 통해서 이신칭의에 대한 교리적 변증을 있는데, 특히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지위에 대해서 분명하게 논증하고 있다. 아 말씀에 근거하여 필자는 세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언급하고 있다.첫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갈라디아서 3:26-27을 근거로 보면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믿는 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율법아래 있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 1: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라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성도는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고 말씀되어 있다. 이 말씀의 근본 의미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 속에서 인간적인 차이점과 중요성을 상실한다는 뜻 이다. 당시 바울 사도가 언급한 이 선언은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비록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교리를 중시 여겼다. 이러한 교리는 자민족 중심주의가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기들만이 최고의 민족 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다른 민족들을 하나님이 없는 야만족 이라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대인들 사회 속에서 여성의 지위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 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계수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지위가 하나이다 라는 선언은 굉장한 파괴력을 지닌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교회 속에서의 성도의 지위는 남녀를 공히 귀한 존재로 보는데서 찾을 수 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 라고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라고 언급하고 있다. 자손이라야 유업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기업에 부장이 되고, 차장이 되고, 이사가 되어도 한낱 월급쟁이에 불과하지 기업의 유업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면 왜 우리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을 통해서 유업을 받게 되는가? 로마서 9:8절에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구원과 소명의 은혜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주어 졌다. 그러나 그들의 불순종은 그와 같은 특권을 상실하여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특권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 그리스도의 축복된 유업을 이을 자들로 이 자리에 모여 있다. 이 특권을 순종과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로 갚는 귀한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하겠다.이제 글의 마무리를 짖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누구든지 그를 마음속에 초청하면 그는 들어와서 함께 사시겟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를 영접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가된 우리는 진정한 유업을 받을 자들이다. 우리의 영혼을 견인해 가시는 주님의 은혜를 항상 생각하면서 슬기롭게 살아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6-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