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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 [18]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변화(metamorphoo)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 가르쳐 준다. 즉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는 자니라”(골 3:9, 10)라고 가르친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이 주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참된 지식(앎)과 의와 거룩성을 그 속에 포함시킨다. 따라서 새 사람의 성품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지식과 의와 거룩'이 된다.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갈 4:19), 우리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갈 5:24),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롬 6:6).따라서 우리의 영성훈련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해야 하고(롬 6:6), 우리 속사람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마 4:4) 자라고,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신적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벧후 1:3), 범사에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엡 4:15).그리하여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요, 새 사람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벧후 3:18) 사람이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는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벧전 1:16)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되어 가는 사람이다. 교회의 과제: 복음의 회복기독교의 본질: 복음오늘날 한국교회는 전환기로서 위기이자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과제는 교회다움의 회복이다. 기독교의 본질과 기본은 복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롬 1:1) 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복음의 형식은 천국이며, 복음의 내용은 구원이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본질적 내용은 의(義)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롬 10:3)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다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라고 말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라고 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진리를 믿음 곧 '칭의(중생)'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신 곧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성화를 포함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들 되기’를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은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혁을 가져오는 힘이다. 그리하여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구원론적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넓은 의미의 의의 복음이다.이 의(dikaiosune)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자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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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1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7
    따라서 영성의 회복은 성령님의 지배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한다.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라고 하신대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언하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가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말한 대로, 성령님께서는 말씀 없이는 말하시지 아니한다.따라서 현대교회에서는 신앙(faith)과 신념(belief, 믿음)이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logos)을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rhema)을 들으면서,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예수님의 변형과 성도들의 변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롬 8:29)다 라고 하면서, 자기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갈 4:19)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목적을 가져야 한다.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는데(마 17:2, 막 9:2), 여기서 ‘변형 되셨다’는 말이 헬라어로 ‘메타모르포오(metamorphoo)’로서 예수님의 변형과 같이 영적인 것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한 대로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것은 신자의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한다. 예수님의 변화산에서의 변형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그러므로 사람이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하지만 또한 주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것이고, 주의 영 곧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고후 3:18).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세계관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머리에서 이루어지고,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며, 생각과 마음이 변화되어야 비로소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은혜와 훈련사도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 7)라고 말한 대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자라나게 하심으로 자라기 때문에, 사람의 영적 성장 곧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고 권면하는데, 이것은 영적 성장, 곧 변화는 ‘은혜와 훈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그리고 영적 성장, 곧 변화가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봄으로 변화를 받는 것을 말하고, 변화가 훈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말씀에 의한 변화가 훈련을 통하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변화가 은혜로 주의 영광을 봄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계신 말씀이시고(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새롭게 함은 말씀이신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 16: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고 하신 대로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주의 영광을 보고 변화를 받는 것은 성령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변화를 위해서는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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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03
  • 개혁자 루터와 두 가지 개혁운동(2)-이효상목사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교회 음악개혁도 성취한 인물이며 그의 종교개혁은 찬송으로 이뤄졌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종교개혁은 교회음악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의 모든 의식은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성가도 모두 라틴어로 불렀다. 루터는 예배에서 일반 신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 자기 나라 언어인 독일어 사용을 권장했다.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음악 양식은 오늘날의 찬송가에 해당되는 코랄(chorale)이다. 그전까지 예배의식은 모두 라틴어로 진행되었으며, 노래는 성가대만 불렀다.교인들은 그냥 자리에 앉아서 성가대들이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기만 했지 직접 교회음악에 참여하지 않았다. 부르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해도 아마 한정된 사람만이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래가 너무 어려워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루터는 일반 교인들도 음악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코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게 되었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성가의 능력을 믿었다. 성가는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창안한 개신교회의 코랄은 음악을 통해 교인들이 직접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루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리고 루터나 칼쟁, 그리고 츠빙글리 모두 다성음악의 화려한 음악의 모든 부산물들을 과감히 교회 밖으로 던져 버리고, 경건히 그레고리오성가를 부르듯 단선율에 가사를 실어 찬송하게 했다. 코랄이라는 형식을 통해 처음으로 교회음악의 대중화를 실현했다. 그동안 예배의식에서 소외되었던 교인들을 예배찬송으로 끌어들인 것이다.이렇듯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음악을 정비하였다.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이고, 웅장하면서도 복잡했던 음악들을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단선율 찬송으로 정리했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몇 백년, 아니 아예 처음의 상태로 되돌리는 결과 같았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이 그렇듯이 잘못된 것을 한번에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을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다움과 예배의 회복인 것이다.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교회력에 맞추어 모든 주일에 부를 수 있는 코랄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코랄이라는 양식을 창안한 후 20년동안 찬송 117편이 수록된 찬송가를 발행해 보급했다.종교개혁 이후 마르틴 루터가 만든 독일 코랄(Chorale)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의 효시가 된다. 코랄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찬송가가 된다. 현대의 찬송가는 모두 4성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최초의 코랄은 화음도 없고 반주도 없이 제창으로 불리는 단순한 노래였다. 하지만 화성과 대위법을 통해 얼마든지 큰 형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사는 찬송가의 역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음악사의 역사는 바로크음악, 고전음악, 낭만음악, 근대음악, 그리고 현대음악으로 이어진다.종교개혁 이후 찬송가는 교회음악의 전부이며 교회음악사의 중심적 흐름이다.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은 찬송가 외에 특별한 음악 양식을 생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양음악은 오페라, 합주곡, 교향곡 등 수많은 음악 양식을 생산하며 음악계를 주도해가고 있다.루터의 의해 기초가 세워진 개신 교회음악은 그 후 바흐에 의해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특히 바흐는 코랄을 기반으로 코랄 전주곡, 코랄 환상곡 등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루터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음악적 성과였다. 루터는 모든 회중이 함께 찬송 드리기를 원했다. 이런 토양에서 <코랄>이 나오고 하인리히 쉬츠나 요한 세바스찬 바하, 팰릭스 멘델스존, 요하네스 브람스가 배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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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03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6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학으로는 종교개혁의 5솔라들, 즉 ‘오직 성경’을 뜻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tura), ‘오직 그리스도’를 뜻하는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은혜’를 뜻하는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믿음’을 뜻하는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뜻하는 “솔라 데오 글로리아”(Sola Deo Gloria)가 있다.그리고 회복해야 할 교리로는 복음주의가 주장하는 5대 근본 교리, 즉 성경의 무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의 부할, 그리스도의 재림이다.우리는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받고 있음(마 28:19)과 동시에, 또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는 명령을 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오늘날 우리는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의 하나로 주신 이성도 있어야 하고, 철학의 하나인 실용주의도 있어야 하고, 과학의 하나인 심리학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이성’으로 올바르게 깨달아 알아야 하고, 사람들의 심리 상태도 ‘심리학’적으로 잘 알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도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효과적으로 이루어야 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이성과 실용주의(철학)와 심리학(과학)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서 모든 것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계시(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실용주의와 심리학이 그 한계를 넘어설 때 그 폐해가 매우 심각하게 되는데, 현대사회와 현대교회의 실정이 그러하다.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은 초이성적인 것이다. 심리학은 사람의 심리 곧 혼에 관한 것이지 영적인 것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에 기초한 일반 상담은 심리적인 문제, 예를 들면 우울증의 치유 자체가 그 목적이 되지만, 말씀에 기초한 기독교 상담은 우울증의 치유가 아니라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곧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된다. 실용주의도 철학의 하나에 속하지만 그것은 수단이나 방법에 관한 것이지 본질이나 목적에 관한 것은 아니다.그러므로 이성은 초이성적인 것에 대한 한계를 지켜야 하고, 심리학은 영적인 것에 대한 한계를 지켜야 하고, 실용주의는 방법론으로서 본질적인 것을 훼손하지 않도록 그 한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정하는 것은 물론 그러한 한계를 지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다.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우시고 이땅에 오셔서 참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예수님과 성령님의 합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론과 함께 성령론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님은 신학을 나타내고 능력이신 성령님은 영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말씀과 능력이 함께 역사하는 것과 같이 신학과 영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그런데 계몽주의 이래 이성 중심의 사상이 발달함으로써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학은 발달했으나 영성은 퇴보했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서는 영성은 신학과 함께 결국 실종되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가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성의 회복이 시급하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존재이고, 영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면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저 유명한 ‘참회록’에서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그러므로 신학과 영성은 다시 회복되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신학의 실종과 영성의 상실을 가져온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교회가 신학과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통합해야 한다.사도 바울이 사용했던 것처럼 영성의 개념은, 첫째 인간의 전 존재에 대한 성령의 지배를 의미하고, 둘째 인간의 전체 경험의 측면에서 관계 형성의 능력이며, 셋째 영적인 성숙의 목표를 함축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바울이 말하는 영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엡 5:18),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요 16:13), 성령으로 살면서 성령으로 행하는 것(갈 5:25)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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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0
  • 개혁자 루터와 두 가지 개혁운동(1)-이 효 상 목사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교회성가대에서 노래하였으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모금하여 학비를 보충하였다. 그러다 귀족부인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음악적 재능을 눈여겨 보고 수양아들로 데려다 키우며 음악을 가르쳤고 대학까지 보내주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악에도 뛰어났으며, 류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또한 화성법과 대위법에 대한 약간의 기술이 있어 다성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몇 개의 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서 음악의 힘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교육적이며 도덕적인 힘도 굳게 믿고 있었다.여러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루터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의 음악관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음악을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말로 음악의 영적인 힘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음악을 멸시하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이라고 부르며 없애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 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고 역설했다.“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음악은 가장 높은 칭송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다. …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 슬픈 자에게 평안을,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 차분함을,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 유화(宥和)한 마음을 주는 데 음악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사제가 된 마르틴 루터는 시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1534년 간행되는데 이후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런 성경번역에서 영감을 받아 시편 46편을 기초로 작사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은, 대부분 단조 가락이 많던 시절에 강한 장조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확신 속에 노래하고 있다. 이 찬송은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던 때 지은 것으로 수많은 ‘시편명상’은 그의 신학과 삶의 그루터기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루터의 찬송가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대에 유명한 음악가인 요한 발터(Johann Walther, 1496-1570)와 루프(Konrad Ruoff) 등 지지자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루터의 첫 찬송가 <새로운 영적찬송가,1523>(Neue geistlich Gesange)는 4부로 되어 있는데, 현대의 악보와 같이 통합된 피아노 보표는 아니다. 루터가 만든 4부 찬송가는 각 성부가 따로 묶여 있기 때문에 각 권은 각각 해당 성부를 부르는 사람이나 그룹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쉽게 말하면 ‘파트별 찬송가’라 하겠다.루터의 둘째 찬송가는 <몇 편의 그리스도교노래, 1524>(Etlich Christriche Lieder)인데 흔히 <성가8곡집>(Achtliederbuch)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루터가 지은 찬송 4편을 포함해 8편의 코랄이 들어 있다.루터의 셋째 찬송가는 <영적찬송가, 1529>(Enchiridion geistlicher Gesenge)인데, 여기에는 26편의 코랄이 들어 있으며, 가정이나 교회에서 쉽게 사용하도록 만든 회중 찬송가로서 단선율의 곡조찬송가이다.또한 루터를 도왔던 발터는 <신령한노래,1524>(Geistliches Gesangbuchlein)라는 작은 찬송가 모음을 내었는데, 30곡 중 23곡이 루터가 작곡한 것이다. 이 책은 흔히<비텐베르크 찬송가>(Wittenberg Gesangbuchlein) 라고 부른다. 이것은 찬양대를 위한 다성부 코랄집으로 플랑드르악파의 모테트 양식으로 편곡되었고, 주된 가락은 테너 성부에 있다.클루크(Joseph Klug)도 루터의 공인하에 50곡을 담은 <개편 찬송가>(Geistliche Lieder auf gebessert,1529)를 출판하였는데, 앞서 나온 찬송가들보다 많이 불려졌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되어 있다.마지막으로 루터의 손을 거쳐 출판된 찬송가<Geystliche Lieder, 1545> (Valentine Bapst)에는 120편의 찬송 가사와 97편의 곡조가 들어 있는데, 루터의 찬송이 28곡 수록되어 있다.마르틴 루터는 신학자이자 음악가였다. 그런 루터는 찬송을 철저히 복음과 연관을 지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복음찬송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복음주의 찬송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에게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에서 비롯된 찬송이라 말할 수 있다.-이 효 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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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0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5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그의 나이 35세 때에 올드스게이트 가에서 성령의 감화를 받는 체험을 한다. 그는 그 전에는 성공회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은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올드스게이트 이후에는 행위 대신에 은혜와 믿음의 방법을 강조했다. 웨슬리의 체험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웨슬리는 올드스게이트에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다. 그것은 웨슬리에게 구원의 확신과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넣어준 사건이었다. 그는 6월 11일 그가 새로 발견한 신앙의 골자가 들어있는 이른 바 ‘복음 선언’(evangeli cal menifesto)를 발표한다. 그 첫 내용은 구원으로 가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그의 대속과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웨슬리는 4대째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대와 2대는 청교도 목회자였으나 3대째 웨슬리의 아버지가 영국 국교회로 개종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영국의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지만, 올드스게이트 체험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복귀해 영국 국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교리’를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칼뱅의 예정론은 반대하였지만, 신교주의(Protestantism)가 마땅히 루터와 칼뱅에 의하여 마련된 기초 위에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웨슬리는 스스로를 ‘한 책의 사람(Man of One Book)’으로 천명하면서 신학의 권위에 있어서 성경의 최고의 우위성을 인정하지만, 성경, 전통, 이성이라는 당시 영국교회의 신학적 권위 외에 경험을 추가한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체험의 신학자라고 불리우고,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웨슬리의 4변형’(감리교회 신학의 사중표준)이라고 한다. 즉 성경에서 증언된 교리는 이성에 의하여 해석되어지며, 초대교회 시대부터 강조되어 왔으며(전통), 최종적으로 오늘 신자의 경험으로 확증된다는 것이다.웨슬리는 뛰어난 설교자였다. 동시에 웨슬리는 약 250여 권의 책과 전도 책자를 저술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평신도 설교자들을 임명하고, 이들에게 개인의 영적 각성이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성실하게 가르쳤다.또한 웨슬리는 복음을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하지 않고, 사회의 구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 교인들에게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를 사회적 영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신학의 최종 목표는 성결에 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원래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과정을 의미하고, 성결은 그것이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의 내적 변화를 의미하는 성화 과정은 하나님의 성화 은혜에 대한 인간의 동참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신인 협력설’이다.신학과 영성의 회복신학의 회복신학은 우리가 무엇을 왜 믿는가를 밝혀 준다. 그리고 신학은 단지 객관성만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또한 그가 행하신 일을 아는 인격적 지식이고, 신학자의 역할은 단순히 종교적 공식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의 삶을 신앙적 관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신학이 회복되어야 교리가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귈 때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이는 그 사람과 인격적 관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예수님 곧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인격적인 앎으로서 신학을 포함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신학의 회복은 곧 성경의 권위에 대한 회복이다.기독교 정통신학은 종교개혁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교의는 신앙고백으로 작성되고 있다. 장로교의 신앙고백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든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와 함께, 이를 문답식으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신앙교육서도 만들었다. 성인용으로는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문답’이 있고, 자녀용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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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2
  • (특별기고) 570돌 한글날과 한글민족
    얼마 전 「사민필지」를 접하게 되어 130여 년 전의 감동을 받으며 읽게 되었다. 「사민필지」는 고종황제가 1884년 육영공원을 세우고 미국정부에 교사를 초청해 헐버트선교사가 조선에 온 지 3년 만인 1890년 출간된 한글전용 교과서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한글의 과학적인 구조와 그 편리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았고 또한 이렇게 뛰어난 한글이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홀대받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세계의 지리지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지리총서로 세계를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세계를 알리고, 한국을 모르는 세계인들에게 책으로 한국과 한글을 알린 것이다. 한글로 편찬하여 배포한 결과 한글보급은 물론 육영공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인기가 높았지만 순한글로 기록했다는 이유로 순한문으로 다시 출판되기도 했다. 한글 보급 역사상 최초의 「한불자전」과 「한영자전」 등을 만든 것도 선교사들의 역할이었다. 특히 1884년부터 펴낸 쪽복음과 「예수성교전서」를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선교사 중에는 언더우드와 게일의 역할이 컸다. 그들의 한글사용이 오늘날 한글민족과 문맹 제로의 국가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1894년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도 순 한글 신문을 제작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인 경술국치를 맞았다. 이런 시대상황에서도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 당시 주시경 선생의 「국어문법」과 「말의소리」는 우리말의 체계를 정립한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반도에 대한 문화 정치 시대에 우리말을 연구하는 내국인 학자들이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말 사정, 외래어 표기법 등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연구 기관일 뿐만 아니라, 우리말과 우리글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나아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우리 민족 모두에게 알린 실천 기관이며 민족 기관이기도 했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 선생 등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전에 창립되어 식민지 기간을 거쳐 오면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큰일을 감당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란 기구를 만들어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가장 어려운 고통은 정신문화를 말살하고자 한 창씨개명과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특히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신사참배는 교회핍박이었다. 일본은 한글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다. 교과과정에서 한글 교육은 사라졌다. 특히 찬송가와 예배순서에도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기미가요를 부르게 했으며 일왕이 있는 곳을 향해 절하도록 했다. 전국의 학교와 면소재지에 신사를 세워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세계 문자 가운데 한글, 특히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한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이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다. 그래서 한글은,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은 진즉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실 한글은 우리 민족이 창조해낸 위대한 문자이며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의 미래이다. 한글은 표음문자(사람의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문자)로서,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음절구성의 원리가 간단하여 배우기가 쉬운 문자로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금년은 570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이자 오늘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1443(세종 25)년에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모두 28자로 이루어졌다.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했는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 된다고 한다. 이 때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에 찍어 낸 판각 원본으로 전권 33장 1책으로 되어 있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서문인 예의(例義)와 정인지 등이 지은 해례와 정인지 서(序)로 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이자 현재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국보 제1호는 남대문이다. 남대문은 1933년 조선총독부가 국보(당시 명칭 보물)를 지정하면서 그 첫 번째 목록에 올렸다. 숭례문은 광복 7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국보 1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얼마 전엔 화재와 부실시공 논란에 휩싸이면서 국보 1호로서 품격 등에 큰 손상을 입었다. 더 이상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 1호로 자격도 없어 보인다. 이제는 건축물에서 정신문화의 상징인 훈민정음으로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한글의 투쟁」 서문에서 최현배 선생은 쓴 길이 기억난다. “한글은 우리 겨레의 정신문화의 최대의 선물이며, 세계 온 인류의 글자문화의 최상의 공탑이다. 이는 우리의 자랑인 동시에 또 우리의 무기이다. 이를 사랑하며 이를 기르며, 이를 갈아 이를 부리는 데에만, 우리의 생명이 뛰놀며, 우리의 희망이 솟아나며, 우리의 행복이 약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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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6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4
    칼뱅의 신학은 칼뱅 사후 1618-1619년에 도르트 회의에서 칼뱅주의 성격을 규정하는 5대 교리로 정의되고, 이것을 흔히 첫 글자를 따서 ‘Tulip’(튤립)으로 알려진 ‘도르트 신조’로 발표되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들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 그것이다. 이 도르트 신조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다시 확인되며, 이후 장로교주의의 신학과 신앙을 규정하게 된다.하나님의 영광은 초월적인 대상이며 칼뱅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전제로 삼아온 목적이다. 그리하여 칼뱅의 영성적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있다는 그의 표현 속에 요약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주의의 결정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심이다.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그분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는 일이며, 또한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 즉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일이며, 동시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교리를 제일 원리로 하는데, 칼뱅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을 예정이라고 부른다. 칼뱅의 마음은 항상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하고, 여기에는 자연질서와 도덕적 존재들의 활동 모두를 포함한다.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인격적 통치를 모든 형태의 비인격적 결정론과 구별하고, 범신론적 결정론에 맞서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칼뱅의 예정론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다.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충돌(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같은 차원인 평면(2차원)에서 마주 오는 기차는 충돌하지만, 공중(3차원)에서 마주 오는 비행기는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지 아니한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는 3차원 세계에 속하지만, 하나님의 예정은 4차원 이상의 무한 차원에 속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지 아니한다.칼뱅의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칼뱅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에 대한 핵심 사상이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 주석, 신학 작품 전반에 골고루 스며들어 있다. 그리하여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 신비로운 연합(Mystica unio)을 우리는 최고로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통하여(갈 2:20),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갈 4:19) 우리가 거룩하게(성화) 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갈 2;20),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골 3:23), 그리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빌 1:21)을 말한다.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오직 교리를 보존하여 교회에 유익되게 하는데 있다. 따라서 칼뱅의 영성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그 목표는 경건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경건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연합에 뿌리를 두며 그 본질은 무조건적 순종에 있다. 그리하여 칼뱅은 기독교적 삶 전체를 경건을 통한 끊임없는 영적 훈련이라고 여겼다.또한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자기 부인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딛 2:12)을 자기 부인의 세 가지 요소로 보았다. 여기에서 근신함이란 검소와 정절과 절제 등 자기 통제를 의미하며, 의로움이란 모든 공평의 의무 곧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경건함이란 참된 거룩으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의미한다. 자기 부인은 두 가지 관계에서 우리를 올바르게 만드는데, 먼저는 이웃에 대한 태도로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헌신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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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9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 -13
    성령을 받으라셋째로 성령의 감동은 성령님에 의하여 완전히 붙잡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본 환상을 말하면서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계 1:10),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계 4:2)라고 했다. 여기에 나오는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는 ‘성령 안에서 (어떻게) 되다’라는 뜻이다.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령 안에 있으면서 성령님의 영향하에 있어야 하고, 둘째로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져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고, 셋째로 성령에 붙잡혀져 있어야 한다.루터의 신학과 영성 : 십자가 신학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모든 현상적인 것들의 본질을 회복하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율법이 복음으로 바뀌었고, 제사가 예배로 바뀌었고,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보다는 본질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현대교회 성도들이 영성훈련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내용은 외형적인 현상인 세상적인 축복을 받고,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서 거룩함을 이루는 본질적인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 성도들의 행복한 삶은 세상적인 축복보다 본질적인 영적인 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만성절을 기하여,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라틴어로 쓴 ‘95개조 항의문’을 비텐베르그 성 교회문에 게시함으로 시작되었다.루터가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개인적인 구원 문제로부터 얻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 교리는 신앙의 기본적이고 주된 조항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요약이고, 또 종교개혁은 기독교 회복의 기초가 된다. 이것은 은총에 의한 신앙을 통한 득의(得義)라고 요약된다.이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을 루터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불렀다. 부분적으로 의인이고, 부분적으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죄인이고 완전한 의인인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루는 놀라운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특성은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이 칭의 신학은 루터 신학의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십자가 신학으로 가는 길이 된다. 그것은 이신칭의(以信稱義)가 이루어지는 기초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에서 진정한 신학의 본질을 십자가의 신학으로 서술하고, 그 반대는 영광의 신학이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의 선행과 교회의 조직과 부를 의지하는 것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또 루터는 성경 말씀과 선포되는 말씀을 다 ‘외적인 말씀’이라고 한다. 이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인간의 영으로 오는 직접적 신비적 교통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들어오고 다른 사람에 의해 전달되고 중개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내적인 말씀’과 구별한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받아들여 믿게 되는데,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한다.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루터의 신학은 칭의의 신학이요 말씀의 신학이라 한다. 그것은 루터가 사람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데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신학은 스스로 말한 대로 십자가의 신학이고, 그리하여 루터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이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에서 동전의 앞면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 이신칭의이고, 동전의 뒷면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 숨어 계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루터의 신학의 핵심인 십자가 신학을 잘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 신학의 표면으로 나타나는 칭의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십자가 신학의 이면에 담겨 있는 숨어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루터가 찾은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 계신 하나님’ 즉 ‘십자가 신학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계시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달려 죽은 그 끔직한 십자가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도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늘 하나님 앞에(Coram Deo) 사는 사람이었다. 예배를 인도하는 설교자는 항상 ‘하나님 앞’이라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져야 한다. 더 나아가 성도들도 임재의 생활화를 이루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따라서 루터의 영성의 핵심은 ‘신전의식(코람데오)’과 ‘내적인 말씀’과 ‘십지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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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2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2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직분을 받고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누가의 성령 이해를 카리스마적(은사적) 성령 이해로 보고, 반면에 사도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됨(신분)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바울의 성령 이해를 구원론적, 윤리적 성령 이해로 본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령 충만과 비슷한 의미로 성령의 인도함과 지배를 받는 삶을,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롬 8:14, 갈 5:18), 성령으로 살라(갈 5:25),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라고 표현했다.또 사도행전에서 자주 언급된 성령 충만은 대부분 복음 전파(사역)와 밀접하게 관련된 반면에, 바울 서신에서는 성령 충만이 교회론의 맥락에서 공동체적 성화와 연관되어 있다(엡 5:18).위와 같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행 4:31), 이러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특징은 찬양과 찬송과 감사와 순종이다(엡 5:18, 19, 20). 이러한 성령 충만의 표지는 말씀 충만의 표지(골 3:16)와 같은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영(벧전 1:11)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 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은사(고전 12:4-11)가 풍부하고,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사람을 말하는데, 성령의 은사는 섬김 곧 사랑을 위한 것이고, 성령의 열매(갈 5:22, 23)는 사랑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성령 충만의 증거는 도덕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 충만의 확실한 표지는 예수님을 닮는 성품이다.성령의 기름 부음눅 4:18, 19절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epi) 임하셨으니…”라고 하여, 성령님께서 예수님 위에(epi) 임하셨음을 알 수 있고, 이어서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고 했으므로, 성령님이 위에 임하심이 바로 성령님의 기름 부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요일 2:27)라고 했기 때문에, 기름 부음은 우리의 위에(epi) 임하심만 아니라, 우리의 속에(en) 계심도 알 수 있다.성령님의 기름 부음은 사람들에게 주로 성령의 은사들을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함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는 기름 부음은 성령님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거룩하게(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성령님과의 연합을 가리키는 것이다.보혜사는 말 그대로 옆에(para) 계시는 분이시고, 기름 부음은 우리 위에 또는 속에 계시는 분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사도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한 후, 이어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기름 부음의 표지는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라고 하였고, 또한 사도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라고 했다. 우리에게 기름 부음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성령의 감동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도 우리가 특별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이다.첫째로 성령의 감동은 ‘성령님 안에’있는 상태를 말한다. 성경에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마 22:43, 막 12:36),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눅 2:27)는 모두 ‘엔 프뉴마티’ 또는 ‘엔 토 프뉴마티’로 ‘성령 안에’라는 뜻이다.둘째로 성령의 감동은 ‘성령님에 의해 움직여진(운반된)’ 상태를 말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고 했다. 여기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은 ‘휘포 프뉴마토스 하기우’이다. 즉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진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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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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