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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 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61]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골 1:24)
    바울은 골로새에 가 본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의 글은 비교적 수준 높은 성경지식과 신학적 이해가 요구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당대에 풍미했던 영지주의 이단 사설이나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골로새 성도들에게 확실한 복음진리를 알려주고 심어주기 위한 변증적인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인 글을 썼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너희를 위하여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아마도 1:19에 언급한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이 아들 안에 있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목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골 1:19).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신 것은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화평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랏소”(ἀποκαλλάσσω), 화목이라는 말은 “에이레노포이에오”(είπηνοποιέω)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아포칼라쏘”(화평)이라는 말은 사실 서로 화해한다(reconcile)는 의미이고, “에이레노포이에오”는 평화를 만든다, 곧 화목한다는 의미이다. 13절과 2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향하여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 “전에 악한 행위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던 너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반역과 죄 안에 있던 자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어둠과 죄 아래 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값으로 내주고 이 죄인들과 화해하고 화목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화해와 화목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경륜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 경륜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주신 것이 바로 계시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ESV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알려지게 하기 위하여” (to make the word of God fully known)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경륜”이라는 말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마치 연극의 연출자처럼 역사의 무대 위에 시대와 세대에 따라 그가 계획하신 사건과 그 사건의 주인공을 배분하고 배치하여 역사의 흐름을 인도하고, 관리하며, 감독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ίκονομία) 라는 말은 “분배”(distribution)라는 말로도 번역한다. 역사에서 역할을 분배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두신 경륜은 무엇인가?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고 복음을 증거한 예루살렘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였다.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빵을 같이 떼고, 함께 기도하였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되고 평화로운 교회, 결코 떠나고 싶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잊은 것 같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킨다. 사울은 젊었으나 정통 유대인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당대의 저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성경과 신학에 뛰어난 학식을 가진 종교 지도자였다. 그의 언행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으며, 열열한 유대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는 나사렛 예수와 그를 쫓는 자들은 반 유대주의자로 간주하고 이들을 소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으로 아는 자였다. 결국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인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고, 그 사건에 이은 그의 교회에 대한 핍박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난 온 제자들은 피난처에서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스데반의 순교가 제자들의 복음사역을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로 확장시켰다. 그런데 사울은 제자들에 대한 핍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제자들이 피신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이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망나니 짓을 중지시키고, 그의 눈을 멀게한 가운데, 그를 그의 일꾼으로 부르셨다. 아나니아의 입을 빌어 “(가라) 이 사람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파하도록 내가 택한 그릇이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을 고난을 겪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행 9:15-16).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이 살인자를 그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으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 “고난의 종”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기의 제자를 죽이고, 자기의 교회를 파괴하고, 핍박하던 이 원수를 오히려 자기의 이름을 전파하는 그릇으로 택하시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어 고향을 떠나 전 세계의 나그네로 내 몰았던 이 폭력배의 우두머리를 이제는 반대로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고난의 종으로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 이름을 붙들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결국 변하여 새 사람되고,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때에, 이제 그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골 1:24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위하여 당하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 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오히려 괴로움을 기쁘게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입장이 예전과 완전히 바뀐 상황이 되었다. 헬라어 원문은 “파데마”(παθημα)라는 말은 “괴로움”이라는 의미보다는 고난(suffering)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바울은 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인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그의) 육체에 체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를 그분의 몸이라고 말한다. 앞에 18절에서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으로서 충분하지 못하여 그것을 바울이 대신 채운다는 말인가? 그것은 말이 안 되는 해석이다. 바울이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모진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시며, 심지어 그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당한 그 고난이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마치 바울이 예수님의 부족한 것을 자기가 당하는 고난으로 계속 채우는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2-24)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예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하실 일이 없다. 또한 히브리서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하여 더 이상의 예수님의 고난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는 “단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을 통하여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 제물을 드리지만 그것들은 결코 죄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오른 쪽에 앉으셔서 이후로는 자신들의 원수들이 자신의 발 받침대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분은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다.”(히 10:10-14. 참조 히 9:11-12, 24-26). 그리스도의 속죄는 흠없고 점없은 그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해서 고난을 당해야 필요가 없고, 예수님 이외의 다른 어느 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덧붙일 것도 없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하여 한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섬김에 관한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하여 하실 일을 다 하셨다. 이제 남은 일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몫이다. 예수께서는 바울을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르실 때에, 땅에 엎드린 사울을 향하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고 물으시고, 그의 정체를 묻는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이 자기를 핍박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울이 핍박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지, 예수님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울이 예수님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바울은 앞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하며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일뿐만 아니라 “또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골 1:18)고 말하고,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교회는 그분은 교회의 머리리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이라고 가르친다(엡 1:22-23). 따라서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가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셨다(마 28:16-20). 선지자적 사명을 주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대언한 말씀을 해석해주고, 해석한 말씀을 적용하여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이다. 오순절이 되어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선지자로 세운 제자들의 입에 성령으로 인치심으로 그들을 선지자로서 인증하시고, 선지자의 직분을 위임하셨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를 세우는 위임식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새 아담을 통하여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새 백성을 모으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사단의 사주를 받은 아담의 후예들은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새나라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에 뒷짐찌고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최후에 백기를 들 때까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대적할 것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행진에 바울을 부르신 것이고, 우리 성도들을 부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막 9:34).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한 부르심은 꽃방석을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고난을 향한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한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 전염병을 구실 삼은 그리스도에 대한 핍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바울의 심정으로 이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 교회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7-17
  • [성경의 바른 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60] 선하신 하나님(엡 2:10) 아담, 오실 분의 모형
    바울은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type)이라고 가르친다(롬 5:14). 아담이 모형이라면 오실 분은 실형(antitype)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살게 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본문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는 않은 자에게도 사망이 다스렸으니 ...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거역하여 결국 죽게 되었지만, 아담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본적도 없고,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그것을 먹은 적도 없는 자들이 아담처럼 죄인으로 취급되어 아담처럼 죽게 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왜 세상 사람들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결국은 죽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1-2장은 이 사건에 대한 배경과 그 구체적인 전말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접근하기 전에 창세기 1-2장은 만물의 기원을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 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창세기 1:1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첫째 날에는 빛을, 둘째 날에는 궁창을, 셋째 날에는 땅과 식물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어 첫째 날 지으신 빛의 세계를 주관하게 하시고,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에 창조하신 궁창의 하늘을 나는 새, 물에서 살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에는 땅위서 살 갖가지 짐승을 창조하신다. 따라서 1-3일에는 빛과 궁창과 땅이라는 영역을 창조하시고, 4-6일에는 이 영역을 다스리고 보살펴야 할 해와 새와 물고기, 그리고 짐승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대신하여 그가 창조하신 모든 세상을 다스릴 그의 대리통치자로 그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위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만물을 볼보고 다스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사람이 있고, 그리고 사람 아래는 만물이 있다. 특히 창세기 2:1에 “하늘과 땅과 그 만물이 완성되었다”라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끝맺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물”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콜 츠바암”이라는 특별한 어휘를 쓰고 있다. 이는 “모든 군대”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지으신 세계를 일종의 군대 조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와 책임과 의무가 동반되는 연대성 원리가 작용되는 조직이다. 따라서 이 창조 기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도 하나님-사람-만물이라는 상명하복의 철저한 권위 체계가 있는 조직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어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시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따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시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명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의 위계질서를 세우시는 것이다. 사람이 비록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해서는 안 되며 그 명령을 거역할 때는 죽음이라는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실과를 따먹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시는 것을 보면 사람과 만물 사이에도 대리통치자로서의 권위와 관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수반되는 연대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3:17-19). 이와 같은 연대 책임이 수반되는 위계질서는 고대 근동의 종주와 속주 사이의 계약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위체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사람-만물의 관계를 특별한 언약관계로 간주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무시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아담뿐만 아니라 아담의 수하에 있는 모든 만물이 다 아담과 함께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담과 만물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왜 우리 인간이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아담이 받는 죄벌을 똑같이 받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우리가 창조 시부터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죄의 피를 물려받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아담처럼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담과의 안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고, 사망의 권세 아래 갇히고, 결국은 아담과 함께 죽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 안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으며, 그리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롬 5:12)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담을 본적도 없고, 아담이 지은 죄를 지은 적도 없지만 아담처럼 죄의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것은 억울하지만 우리는 태생부터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억울한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일을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죽음이라는 언약적 저주를 그가 창조한 만물에게 퍼붓는 것이 어쩌면 너무 잔인하신 잔인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을 희생시키며 죄인들을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죄는 벌하시지만 죄인을 살리시는 그의 정의와 사랑과 인애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게 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살리는 원리를 적용하여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려고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여 새 아담의 순종하는 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계획을 염두에 두시고, 아담과 여자와 뱀을 불러놓고, 이들에게 불순종에 대한 죄를 문책하고 죽음을 선포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원복음을 주시는 것이었다(창 3:15-19).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를 역사 가운데 점진적으로 보여주시고, 결국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아담과 그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또한 목숨을 내놓기만 하면 그가 과연 아담의 죄 값을 완벽하게 대신 치렀는지를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부활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지는 가운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마 27:51-53). 예수님의 죽음이 죄인들의 죄 값을 온전히 치르고 죄로부터 해방시켰음을 증명하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죄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지고, 거두어지고, 회복되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무덤에 있는 자들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과 장사가 확인되기까지 예수께서는 무덤에 사흘간 더 머물러 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과 부활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새 아담으로 세워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세상을 여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는 이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염두에 두며, 아담을 가리켜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성경에서 “모형”(type)이라는 말은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이나 사람 혹은 물건이나 원리 등을 가리키는 말이고 실제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실형”(antitype)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아담이 모형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형이고, 새 아담이 되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왕이었듯이, 이제 새 아담 예수님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이 되시고, 모든 만물의 우두마리가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골 1:15-20). 우리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담과 같은 죄인이 되고, 아담처럼 죽는 것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 새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롬 8:5).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바로 언약적 연대성이라는 틀 안에서 믿고, 이해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7-12
  • [성경의 바른 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45] 선하신 하나님(엡 2:10)
    나는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선”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어로 “토브”(טוב)라고 하는 말은 성경에서 흔히 “선하다”(good), 혹은 “좋다”는 의미로 번역되고 쓰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만, 그의 “선,” “선하심”도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성품이다. 누가복음 18:18-19에 보면 한 유대교 지도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 받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기 자신도 선하다고 칭함 받는 것을 거절하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유일하게 선하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새겨보면 우리 인간들이 함부로 “선하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염두에 두신 선이란 어떤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 곧 손이 오그라든 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좋은 예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막3:1-6). 안식일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모든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함께 모인 가운데,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고소 거리를 찾고 있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가 안 고치시는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고치시는가 못 고치시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고치시는가 안 고치시는가 문제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황이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두고 회피하시지 않고 오히려 도전하셨다. 이들을 향하여 질문을 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나?”고 물으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선과 악”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이라는 대칭되는 병행구를 사용하여 선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악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악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속에서 바로 선과 악의 개념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창조 기사는 6일 동안 매일 창조를 마치시고, 계속 “하나님 보시기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신다. “God saw that it was good.”(וירא אלהים כי טוּב). 여기서 “좋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토브”라는 말은 “좋다”는 의미도 있지만 “선하다”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어휘이다. “선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다 선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동산의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죄와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이고 파괴되는 곳에는 악이 있는 것이고, 살리고 살아 있는 곳에는 분명 선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살리는 것이 선이라면, 생명을 주시고 살리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선하신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우리는 그가 만드신 작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들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은 나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만들었을까? 엡 2:10을 보면.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한 일”이 무엇인가? 단순히 “좋은 일”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나쁜 일 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으로서 히브리어 “토브”라는 말은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적인 의미보다는 동사로 “살리다”는 의미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다스리다”는 말의 의미는 정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유형 무형의 만물이 각각 그 목적에 따라 그 생명이 유지되고 그 기능이 작동하도록 살피고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세계의 조직과 질서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지켜지도록 돌보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정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창조와 출생부터 정치하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살고, 살리기 위하여 정치를 한다. 따라서 모든 정치는 살리는 것이 목표이고, 모든 정치 행위는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목적은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기”위함이고, “다스리는 일”이 바로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살리기 위하여 돌보고 가꾸는 일을 하도록 지으시고, 사명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선”이라는 것이다. 모든 정치 행위는 그 목적이 “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드셨는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살리는 일을 하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리는 일을 하도록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아담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이 있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언야적 연대성이 있다. 아담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은 아담 한 사람의 죄와 불순종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만물이 다 죄인이 되고, 죽음 가운데 있는 존재들을 말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은 아담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나라를 이루게 된 존재들을 의미한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뜻을 두시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뜻이 선하다는 이 사실은 내가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야 할 고귀한 목적을 부여하고, 내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나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결코 하찮은 존재,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다. 꼭 필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태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한 일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다.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한 손이 마른 지체 장애자를 고쳐주신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면 붙잡아 고소하여 죽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데도, 그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시고, 살리는 일을 하신 것이다. 살리는 일은 희생이 필요하다. 희생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 예수님은 이 손 마른 자를 고쳐주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그의 목숨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한 뜻을 두시고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 속에는 근본적으로 선을 사모하고, 선을 행하고자하는 소원이 있다. 그러나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 곧 사탄의 왕국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하고 죽이는 악을 행하며 살다가 결국은 자기도 죽게 될 것이다. 관계를 잘 못 맺은 것이다. 아담과 연대성 안에 있는 한 그는 사망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연대성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선한 뜻을 두시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들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모든 것을 살리는 선을 행하실 수 있고, 선을 행하게 하실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의 악행과 실패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그래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다(말 3:6; 히 13:8). 하나님의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두신 그 창조의 목적은 선한 것이다.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그들이 지향하여 나갈 길은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서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관계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희생을 치르더라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고, 살리는 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3-29
  • [손석태 칼럼] 새 나라의 새 백성(롬 3:21-25: 골 1:12-20)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4에서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type)”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실형” (Antitype)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히브리서의 저자는 9장에서 성막의 모양과 제사법을 자세하게 설명하며, 첫째 장막이 서 있는 한 성소에서 제사 드리는 제도를 가리켜 “비유”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비유”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보래”(παραβολή)를 번역한 것인데, 대부분의 서양 역본에서는 “상징”(symbol)이라고 번역하고 있다(히 9:9). 아울러 9:24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것들의 모형인 손으로 지은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하늘 성소 그 자체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온 백성을 대신하여 지성소에 홀로 들어가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이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이 대제사장의 실형으로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에 있는 성소로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성전과 제사제도가 다 그리스도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형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가 실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이스라엘의 성전, 그리고 그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 제도가 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대한 모형이고, 더 나아가서 구약 성경의 모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아담을 머리로 세워진 세상의 구조와 조직과 질서도 역시 앞으로 새 아담이 이루실 새 세상의 모습,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새 아담의 모형이다(롬 5:14).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후 4:4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Χριστός ὅς ἐστιν 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이라고 가르치고, 빌립보서 2:6에는 예수께서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본래 하나님”라는 말은 “이미 존재하셨던 하나님”( θεος ὑπάρχων)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골 1:12-20에는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분 안에 계시고, 만물의 으뜸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왕으로 세우셨듯이, 이제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모든 피조물의 왕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무릎 앞에 꿇게 하셨다”(빌 2:10)는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고 왕이 되신 것이다. 이 세상은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대왕)-예수님(왕, 그리스도)-만물로 이루어진 조직과 질서로 새롭게 재편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머리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시다.”(골 2:10). 그래서 새로운 세상은 이제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새로운 언약 체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왕이시고, 예수께서 그의 피의 언약으로 구원하신 자들이 그이 백성이고, 세상 만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새로워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 예수님의 백성들은 옛 아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높고 영광스러운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의 백성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새사람을 입게 된다. 아담 이후 계속 죄인으로서 가죽 옷을 입고 반역자라는 죄명을 붙이고, 사형 집행을 앞두고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온 우리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이 된 것이다(골 3:10).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왕을 모시고, 새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왕을 섬기며, 새로운 왕과 함께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새 출발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은 순서가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아담 안에서 온갖 죄를 짓고 살았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다 죄로 물든 죄인이다. 죄인이라는 신분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이제 “새 아담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아담의 나라”에서 “새 아담의 나라”로 들어와야 한다. “아담의 백성”이 “새 아담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아담의 옷을 벗고, 몸을 씻고, 새 아담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새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의 왕이 아담이 아니라, 새 아담,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고백해야 한다.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고백적 서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몸의 지체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새 아담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제 새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인생을 새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죽은 영혼을 일깨우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호흡을 들이쉬게 되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눈이 뜨이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 영혼의 젖을 주시고 그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하고 고백해야 한다. 자신이 아담의 연대에 속한 자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새 아담의 나라에서,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는 서원을 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의 종을 통하여 그의 머리에 상징적으로 물을 붓게 하신다. 이제 그는 새로운 새 아담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의 신분이 변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아담의 옷을 벗고, 새 아담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온 군사가 되었으며, 새 아담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물세례를 받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 것이다. 우리 죄인들이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엄청난 신분의 변화와 특권과 은혜와 축복을 받은 새로운 생명체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받은 특권과 이 영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우리의 신분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지만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의 피로 세운 새 아담의 나라,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과의 안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 아담, 예수께서 우두머리이시고, 왕이신 새 언약의 연대성 안에 있는 새 아담의 나라의 나라 백성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언약 백성이다. 만물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지체이다. 예수님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예수님 계신 곳에 우리도 있고, 예수님 가신 곳에 우리도 가고, 예수님 하신 일을 우리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서 자라듯이 우리도 점차 자라며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옛 사람을 그 행위와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라.” (골 3:9)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가 지식에까지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빌 3:7-8).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지식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방식이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뇌를 바꾸어야 한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틀에 맞추어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손발을 움직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새 아담의 새 사람들은 신자로서의 신분에 걸 맞는 정체성과 인생관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이다. 둘째로 새 아담의 나라의 새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소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리와 어린양, 송아지와 젊은 사자, 암소와 곰, 어린아이와 독사 등 도저히 공생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약육강식의 태생적인 적대감을 버리고,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사 11장). 바로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시고, 이 나라를 위하여 새 백성을 모으시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마 23:37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자기 병아리를 자기 날개 아래 모으려 하는 것과 같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하였느냐?”고 울부짖으셨다. 새 나라의 새 백성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에스겔 34장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는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시고, 우리를 그 백성 삼으셨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백성을 모아 하나님의 새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God’s fellow worker), 곧 동역자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세우셨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미 다 선택하여 준비해 놓으셨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만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 앞에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인도자의 노릇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선지자 노릇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지자로 세우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주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새로운 나라의 새 사람으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각박한 세상에서 몸부림치며 살지라도 세상 나라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세상 나라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탐욕을 쌓게 한다. 우리를 파멸의 길로 빠지게 한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오로지 하나님 나라, 새 아담의 나라를 바라보고, 새 나라의 백성을 모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1-2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42
    “엘리야아,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들린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는 상황이라면 엘리야는 여호와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하고서 별 효과가 업는 것 같아서 두려움과 좌절감에 빠져 있는 그의 종에게 찾아오시어 위로와 용기와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말씀이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가 실망하여 주저앉아 있는 그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엘리야는 주전 9세기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남북이 나누어진 나라에서 북왕국 오므리 왕조의 반복되는 구테타로 말미암은 위정자들의 악행과 왕권과 결탁하여 여호와의 종교를 탄압하는 바알 선지자들의 권세에 대항했던 대표적인 선지자였다. 열왕기 저자는 엘리야와 가장 큰 대결관계를 가졌던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전임 왕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여호와 보시기에 더욱 악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30). 그가 행한 악행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은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의 아내를 따라 바알을 섬기며 그에게 경배한 것이다. 이세벨은 북왕국 아합 왕과 결혼하며 바알 종교를 지참금으로 가져온 셈이 된 것이다. 아합 왕은 바알 사당에 아내와 바알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바알의 아내, 아세라 신상도 만들었다. 18:19에는 엘리야가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400명의 아세라의 선지자를 모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무려 1000여명의 이방신 선지자들이 왕실의 녹을 먹고 있는 바알 종교가 국교화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세벨은 왕후라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여호와 종교를 탄압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섬멸하는 정책을 밀고 나가, 북왕국에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숨어 살거나 남왕국 유다로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바알은 여호와의 백성들을 짓밟고 온 세상은 바알의 수중에 들어가 바알의 천지가 되었지만 여호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구나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3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난세에 목숨을 걸고 바알 세력에 대항하여 일어난 사람이 바로 여호와의 종, 엘리야 선지자였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여호와와 바알 중에 누가 참 살아있는 하나님인지 알아보기 위한 대결을 청했다. 갈멜 산에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 제물을 얹어 놓고, 각자의 신에게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를 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신이든자 자기의 선지자가 기도할 때 불을 내린다면 그가 참으로 살아있는 능력의 신이라는 것이 증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알 선지자들은 그들의 바알 신이 구름을 타고 다니며 번개를 치며 불을 내리고, 때를 따라 비를 내려 농사를 짓고 양떼들의 번식을 촉진시키는 신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주저 없이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바알에게 불을 내려주도록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그러나 불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자마자 하늘애서 불이 내려와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불사르고, 제단 주위에 넘치데 부어놓은 물을 다 핥아 마르게 하였다. 이 일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그분이 참 하나님이십니다.”(왕상 18:39)라고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연호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3년 동안이나 계속된 가뭄을 해갈해주시도록 기도하자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 일로 엘리야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 눈앞에 보여주었고, 여세를 몰아 850명의 바알과 그의 아내 아세라의 선지자 도합 850명을 갈멜 산 밑으로 흐르는 기손 강으로 끌고 가서 모두 도륙해버렸다. 이 일은 당시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들 중에 신으로 종주 노릇하던 바알에 대하여 치명상을 입힌 결과를 초래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물과 비를 제어하시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만방에 선포하고 증명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북왕국의 왕후,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고 엘리야에 대한 체포령을 전국에 내렸다. 엘리야는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엘리야는 이스라엘 서북쪽에 있는 갈멜 산에서 내려와 유다의 가장 남단에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러, “여호와시여, 이제는 충분합니다. 제 목숨을 거두소서, 제가 조상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19:4)라고 죽기를 청했다. 자기가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하는 말은(19:4) 그의 속마음을 다양하게 표출하는 말인 것 같다. 자기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냈는데, 이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말한다. 엘리야는 지쳤다. 주님을 향한 열심과 특심이 사라지고, 이제 좌절과 실망만 남겼다. 아무것도 변환 것도, 남은 것도 없다. 여전히 이세벨은 자기 목숨마저 노리고 있어서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깨워 일으키셨다. 심신이 기진하여 누워있는 그에게 먹을 것을 먹여 주셔서 기운을 차리게 하셨다. 엘리야는 이후 다시 40여일을 밤낮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여전히 죽기를 청하며 굴속에 들어가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이 물음은 마치 엘리야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는 것을 묻는, 일종의 문책성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엘리야는 이세벨이 온 나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엘리야 자기 혼자만 남아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때에 엘리야는 굴속에서 나는 세미한 소리를 들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다시 물으신 여호와의 음성이었다. 그러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자기만 남았다는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기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를 기름 부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다. 엘리야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근동 세계의 정치 판세를 새롭게 짜려고 하고 계셨다.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로서 엘리야에게 명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칠천 명을 이스라엘에 남겨놓을 것인데, 이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그에게 입을 맞추지도 않은 사람이다.”(18)라고 말씀하셨다. 왜 하필 칠천명일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에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고 울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심지어 그의 지도자 모세마저도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민 11장). 이때 모세는 자기 혼자 이 백성을 다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같은 하나님의 영을 주시어 선지자로 세우고, 모세의 동역자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70명을 주셨지만, 엘리야에게는 그의 100배인 7,000 명을 남겨 두겠다고 말씀하신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많은 동역자를 주실 것을 말씀하시며,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기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를 기름 부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죽게 해달라고 청하는 엘리야에게 세계 정치는 물론 북왕국 정치 판도의 재편 사명을 주신 것이다. 여호와꼐서는 이스라엘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정세를 재편하는 이 막중한 일에 엘리야를 쓰시려고 한 것이다. 엘리야는 혼자서 이방 출신의 왕후, 이세벨 하나 때문에 온 세상이 바알 천지로 변해가는 상황을 혼자 대항하다가 지치고 좌절하며 심지어 목숨을 버릴 작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며,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두 번이나 물으신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사냥하기 위하여 추격하는 이방 계집 하나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려고 있는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북왕국 원수, 아합의 나라를 보게 하시고, 이웃 종주국 아람을 보게 하시고, 그의 후계자, 엘리사를 생각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7천명의 선지자를 동역자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방의 한 계집 때문에 주저앉아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엘리야에서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은 바로 이 힘든 코로나 세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음으로 들려온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40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전쟁이 없을 날이 없다. 전쟁은 살상과 파괴만 남긴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황폐함뿐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도 전쟁에서 패배한 피정복자도 다같이 평화를 갈망한다. 사람은 유사이래 지금까지 평화를 추구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평화가 없다. 로마의 황제 Caesar Augustus는 자기가 세계를 정복하고 이룩한 평화를 기념하고, 그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리석으로 “The Ara Pacis Augustus” 라는 평화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 제단은 지금도 로마에 가면 재건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전쟁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는 없다. 우리는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하든지 마음을 진정하고 평안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전쟁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피난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들 사이에 비뚤어진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한 평화는 없다. 우리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의 길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 인생들의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주시고자하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끼친다” 는 헬라어 “아피에미”(ἀφίημι) 라는 말은 “용서하다” (forgive) “떠나다”(leave, depart), “계속 남아있도록 남겨둔다”는 의미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이 죽으면서 자식을 남겨둔다, 혹은 유산을 남겨둔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래서 평안을 끼친다는 말은 평안을 남겨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평안을 너희에게 남겨두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언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는가? 바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주신 말씀이다. 보혜사 성령을 주시고, 또한 평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 주니,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27).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마치면 그의 제자 가룟 사람, 유다의 배신으로 군병들에게 체포되고, 공회와 빌라도 앞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을 앞둔 분이 자기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다는 것이며, 또한 그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평안이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며, 그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죽음처럼 두려운 것이 없다. 사람은 죽음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ㅅ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만,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은 죄인이고, 죽으면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평안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 곧 거룩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아들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바르고 인격적이며 거룩한 관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그 마음이 평안한 것이며, 그러한 평안을 오히려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그가 낙원에 들어갈 것을 아셨고, 같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낙원을 약속하셨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눅 23:46)고 마지막 말을 남기시고 평안히 숨을 거두셨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자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평안이다. 죽음을 초월한 평안은 이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빌라도도 두렵지 않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인 군중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예수님은 그의 내면에 더 깊은 평안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어떻게 주시는 것인가?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이 세상에서 평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후, 부할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처치하셨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리셨던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남겨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결과적으로 그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여시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진정 우리 속에 평안을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평해야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사람들과 화해하고 평화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자기의 가정이나 자기 자신의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려면 기본적으로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힘이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학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는 것이다. 힘과 돈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큰 힘과 많은 돈을 가져도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정 반대의 길을 택하셨다. 강자에게 져 주고, 아예 가난하게 되신 것이다.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먼저 내 주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어떻게 하든지 이웃과 더불어 공생공존을 이루려고 힘쓰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원수를 맺고 사는 사람이 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상처를 주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만 있으면 온 세상이 시끄럽다. 이러한 사람과 맞서면 설령 이겨도 마음에 평안이 없다. 사람이 사람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평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평안을 가지려면 예수님처럼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먼저 사람을 살리려고 해야 한다. 먼저 져주고, 양보하고, 비켜주는 것이다. 사람들과 싸우면 이겨도 기분 나쁘다.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져주면 마음에 찌거리가 남지 않는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목사와 장로, 교수와 학생, 사장과 사원, 대통령과 국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관계가 비뚤어지면 결국 모든 것이 파국으로 빠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관계”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간과 돈과 마음을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손해보고, 먼저 양보해야 한다. 이웃을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내 자존심만 내 세우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도 없다. 성경의 중심주제는 “관계”이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의 관계가 하나님의 법대로 잘 유지될 때, 그곳에 평화가 임한다. 우리는 관계를 잘 맺고, 그것을 잘 유지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아무 일도 안하고 관계가 잘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손해도 보고, 무시도 당하고, 배신도 당해 봐야 한다. 관계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처럼 희생을 해야 한다. 관계는 자기가 손해보는 가운데 상대방을 살릴 때, 참 순수한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살리셨다. 평화를 남기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후임이나 후손들에게 평화를 남겨주는 선배, 부모, 선조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형제와 원수 갚음을 물려주고, 분열과 분쟁의 씨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한번 원수 갚음을 대물림해주면 그 원수 갚음은 대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땅에 한 번 와서 한 번 살다가 가는데,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까? 평화를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8-03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9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살면서 받은 상처가 많은 존재라서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슬픔도 많고, 눈물도 많고, 한도 많아서 세상의 어느 나라 백성들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백성이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이 한국 동포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는 축복에 관한 메시지 보다는 위로의 메시지여야 한다. 마음에 상처받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갖다 주며 먹으라고 해도 마음에 한이 맺혀있고, 심령이 상해있으면, 그것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사 40: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로부터 시작된다.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였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 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고.”라고 말한다. 얼마나 심한 환난과 고난을 당하였으면 힘에 겨워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을까 상상하기가 힘들다. 9절에는“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10절에는“이같이 큰 사망에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아마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살아난 사람들 같다. 사도 바울과 그의 형제들이 아시아의 어디에서 이처럼 처절한 환난을 당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바울은 항상 고난과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 사람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말씀을 전하느라고 이러한 환난을 당한 것이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매맞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었고, 데살로니카, 에베소 (행 19:23-41; 고전 15:32) 등에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매를 맞고, 심지어 원형극장에서 맹수와 더불어 격투를 했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아 법정에 끌려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은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있다.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고난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내 인생에 고난이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고난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만 그 값이 다를 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물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고난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답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 모든 인생이 다 고난이기에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그런데 바울 사도는 4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하고 비방을 받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죄를 대속하여 매 맞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많은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바울에게 넘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고난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 지셨던 예수님의 그 거룩한 고난을 바울 자신도 당하고 있으며, 아주 넘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고난당하시고, 바울도 고난당하고, 우리도 고난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첫째는 아담과의 언역적 연대성 때문이요, 둘째는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5:14에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라고 했다. 이 말은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수님이 아담의 실형이라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죄의 벌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고난당하고, 죽는 것과 같이, 이제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과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원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원리를 바울은 모형과 실형의 원리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이 되었다. 이 연대성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언약적 연대성”이라고 한다. Covenantal Bond 혹은 Covenantal Union이라고 말한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은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왔다. 죄인의 명패를 우리의 이마에 붙였고, 사형수의 가죽 옷을 우리에게 입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며, 인생을 저주하며 살다가 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다. 우리는 이제 죄인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언약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상처 받으며, 억울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난과 상처와 눈물과 한 숨은 예수님과 함께한 상처이고 고난이다. 마치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잠간 고난당하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우리의 상처는 예수님과 함께 한 영광스러운 상처이고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한 고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고난도 없고, 상차도 없고, 눈물도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분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분과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롬 6:5).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자녀이면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다.”(롬8:17). 따라서 우리 신자의 고난과 상처와 눈물은 영광의 상처요, 은혜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다 자기 죄와 자기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난당하고 환난 당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고난당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과 환난을 당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상처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이고 상처이기에, 영광의 상처이고 은혜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고난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죄값을 치르기 위한 고난이 아니다.우리 신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바울은 “찬송하자,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고, 인애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며 우리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케 하시는 분이시다.”(1:3-4)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애”로 번역하고 있는 “오이크틸모스” 라는 말을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4절에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이 특히 의미 있는 말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그에게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던 그의 자녀들과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위로의 힘”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는 위로 받아야 할 형제에게 무슨 말로 위로해 주어야 할지, 내가 무엇을 해서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인간을 위로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위선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이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의 힘”을 가지신 분이시다. 따라서 환난 당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할 때에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많은 고난 가운데 그를 위로하시고, 더 나아가 그를 위로의 사도로 세워 고린도 성도들이 그를 통해 위로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의 고난과 환난과 위로를 하나님의 복음 빛 가운데서 이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로서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환난당하고 고난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을 살 힘을 준다. 하나님은 구원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이 자녀이고 백성인 우리들의 고난과 환난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시다. 계시록 21:4에서는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당한 자들을 하늘에서 맞으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모든 눈물을 그의 눈에서 닦아 주신다고 적고 있다.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 나라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로 이 땅에서 살면서 상처 받고 눈물 흘리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할 수 있는 위로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위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여 힘과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위로의 샘터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인생들이 교회에 오면 위로 받고,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 오면 평안을 얻고, 인생을 살아야 할 희망과 의미를 찾고, 연약한 다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7-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8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고, 우리의 죽음과 부할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연대성 원리”이다. 칼빈은 이를 “본드”(Bond)라고 했고, 전통신학에서는 “언약” (Covenant)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인간은 아담과 연대성, 그리고 새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서 아담과 함께 죽고, 새 아담과 함께 살아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이 사실을 부인한다고 해도 죽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다시 살고 싶다는 희망은 버릴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이 죽음과 내세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만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믿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믿지 못했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 우주적인 비전과 소망을 보여주시고, 사명을 주신다.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막달라의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들은 각각 예수님을 잃고 슬퍼 울고 있는 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0절에 나오는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 나셨고, 그 여자에게 보이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했다. ESV에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They would not believe it)라고 번역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도 같은 심성으로 “이 말들이 사도들에게는 허탄한 듯이 들려서 그들은 그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눅 24:11). 두 무리들은 다같이 믿고 싶은 마음이 없고, 의도적으로 믿음을 회피하려는 부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말이다. 이 여자들의 말이 진정성이 없어 보여, 그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12-13절은 아마도 누가 복음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두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부르셨고, 그들도 처음에는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따른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의 마음은 변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알고 그가 성공하는 날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에 앉는 꿈을 가지고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이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뒤부터 제자들에게 자신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메달려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일러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싸웠다. 예수님은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예고하셨지만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말씀대로 그가 부활하신 사실을 일러 주어도 이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이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꾸짖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사실을 다른 제자들로부터 들었지만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마음이 완악한 것이다. 여기서 완악하다는 말은 우리 사전에는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고 모질다”로 정의하고 있는데, 헬라어로 “스크래로카르디아”()라는 말은 그런 의미보다는 영역본에서처럼 “hardness of heart”라는 의미이다. 헬라어 “스크래로스”( 굳다, 딱딱하다)라는 말과 “카르디아”(καρδια, 심장)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사람의 심장이 굳고 딱딱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유연성이 없고 자기 생각이나 고집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받아들일 융통성이나 여유가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라 굳은 빵이 돌처럼 딱딱하여 잇빨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믿음의 씨가 싹이 나거나 자랄수 있는 마음 밭이 안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는 데도 이들은 믿음이 없고, 마음이 굳어서 이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나 편견이나 주장과 지식이 자기 머리에 박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여백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책망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눈을 온 우주로 향하여 뜨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바라보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온 세상에 다니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꾸짖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사명을 주셨다. “온 세상을 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이 본문을 헬라어 본문대로 번역해보면 “모든 우주()에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이다. 한글 성경에는 “온 세상에 나아가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 온 세상과 온 우주라는 말은 의미가 다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우주, 그러니까 해와 달과 별 등 지구를 벗어난 모든 항성과 유성까지도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유의 세계에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달에도 가고, 화성에도 가는 문이 열리고 있다. 그곳에게 가서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인가? “모든 피조물”이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물들,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에게 내린 저주는 아담은 물론 모든 피조물, 동식물 모두에게 내리는 저주였다. 사실 말 못하는 식물이나 동물들이 무슨 죄가 있으리요마는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서 아담과 함께 불순종의 죄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자연만물에 대하여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것”(롬 8:18-25)을 바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분봉왕, 인간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의미없이 사탄의 종들을 어쩔 수 섬기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처음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에 동참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썩어짐의 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이들의 간절한 소원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는 비록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함께 들어야 할 복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제자들이 온 우주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었다.제자들은 사람이 한 번 죽으면 살아날 수 없다는 이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아무리 보고 들은 사실을 말해주어도 믿지도 않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고 있다. 이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신다. 이 지구를 넘어 우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눈앞에 있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나가서 “유앙겔리온”(), 곧 복음, 복된 소식, good news를 알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가 무너져 아담의 언약적 저주가 풀리고, 새 아담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자유와 생명과 평화의 세상이 열였다는 복된 소식을 온 우주에 나가,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온 우주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바라보게 하신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여 사망 권세를 다 깨뜨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셨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대단히 심각한 말씀을 하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16).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만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 그래서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됨을 인증하는 인증식이다. 아울러 이들을 저 우주에까지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선지자임을 성령으로 인치시는 성령세례, 곧 선지자 위임식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죄 가운데 남아있고, 썩어 없어질 피조물들의 종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또한 믿고 세례받는 자에게는 표적을 주겠고 약속하신다. 악령을 몰아내는 권세, 모든 사람과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방언, 심지어 뱀과 같은 피조물과도 어울리는 평화,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 이 모든 선물을 표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마지막 날의 비전을 연상케 하시는 말씀 같다(사 11장).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전이 높이 들린 산 위에 서고, 그곳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그곳을 향하여 말씀을 받으러 나간다, 이때에는 온 세상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쳐, 마치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암소와 곰, 어린 아이와 뱀들이 함께 어울려 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으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것과 같은 세상, 곧 평화의 세상, 평화의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다. 마가는 바로 제자들이 온 우주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이루어질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종말의 비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6-12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7
    에스겔서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관심을 갖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예언일 것이다. 골짜기에 쌓여있는 마른 뼈들을 보며 생각나는 것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가는 코로나 전염병에 희생되어 넘쳐나는 시신들의 모습이다. 화장장이 넘치고, 매장지가 모자라 심지어 무인도에 땅을 파고, 시신을 장작더미 쌓듯이 쌓아서 묻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의 비참한 모습이 남의 일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에스겔서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우리에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망하여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세워 바빌로니아에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그의 말씀을 대언하게 했던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고 골짜기로 가셨다. 거기에는 온통 뼈로 가득하였고, 그 뼈들은 다 말라 있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공동 묘지였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가매장을 하여 살이 썩기를 기다린다. 살이 다 썩은 후 뼈만 남았을 때 그들은 대대로 그들의 조상들의 뼈들 쌓아둔 무덤으로 가져온다. 그래서 지금도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가족의 뼈를 안치하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성경에 아무개가 죽어서 그의 백성에게 합류했다는 표현들이 있는데 (창 25:8), 이는 물론 그의 영이 그의 백성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지상에서 그의 뼈가 조상들의 뼈가 있는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의미도 된다.에스겔이 본 뼈들은 우선 그 수가 심히 많았고, “아주 말랐더라”(2)고 했다. 생명이 다시 소생할 여지가 없는 그야말로 깡마른 뼈다귀였다. 생명이 움틀 틈이 없는 뼈들이었다. 뼈는 사람의 몸을 떠받치는 받침대이다. 하나님께서는 뼈를 먼저 만드시고 그 뼈에 살을 붙이시고, 핏줄과 신경을 연결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뼈는 사람의 몸을 이루는 틀이고, 기본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뼈를 부수는 것은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부서진 뼈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뼈를 불태우거나 뼈를 파헤치는 일은 모독이며, 특별한 수치를 주기 위한 벌이었다. 죽은 자의 뼈는 항상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취급해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관습이었다.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왜 에스겔에게 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뼈를 보여주신 것일까? 11절에 보면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상태를 이 마른 뼈에 비유하고, 이들이 말라서 이제 소망이 없고, 멸절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이제 이들에게는 다시 회복될 소망이 없다. 이들에게는 나라도 없고,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도와 줄 자도 없다. 자유도 없고, 기쁨도 없고,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이들은 마른 뼈가 쌓여 있는 공동묘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있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죽은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신다. 에스겔은 여호와에게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자기는 모르고 주님은 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고 믿는 선지자라면 그 대답을 몰랐을 리가 없다. 에스겔의 대답은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나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의 문제입니다라는 의미로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이제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를 살리시는 환상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이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하신다. “내가 너희 안에 영(생기가 아님)이 들어가게 할 것이니,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이 올라오게 하며, 피부로 덮고, 너희 안에 영( 생기가 아님)을 줄 것이니 너희가 살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것을 알 것이다”(5-6)고 명하시었다. 그래서 에스겔은 그대로 이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선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지자 에스겔이 말씀을 마른 뼈들에게 선포하고, 하나님께서는 영을 불러 그 속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러면 살게 된다는 것이다.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했다. 그러자 그가 대언할 때에 뼈들 가운데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와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맞추어졌다. 그리고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었다. 선지자의 대언하는 말씀을 받은 뼈들이 살아나서 사람의 형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마른 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심으로 뼈들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생기가 아니라)이 없었다(8)고 했다. 말씀이 이들의 육체를 살아나게 했지만 아직 이들에게는 영이 없었다. 여기서 한글 역본이 “생기”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는 “영” 혹은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진 “루아흐”()이다. 이 루아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할 때에 사용하고 있는 “영”이다(창 1:2). 개역성경의 하나님의 “신”을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고쳐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아담에게 불어넣은 것은 루아흐”()가 아니라 “니쉬마트 하임”()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창 2:7). “생명의 호흡”(a breath of life)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그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을 때, “내패쉬 하야”( living being, 생명체)가 된 것이다. 한글 성경에 “생명체”( living being)를 “생령”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잘 못된 것이다. 생령이 아니라 생명체이다. “내패쉬 하야”라는 말은 사람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함께 쓰여졌다(창1:21, 24, 30; 2:19). 9절에 영()을 마치 (바람을) “불어넣다”()는 말과 연계하여 “생기”로 번역하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는 “니쉬마트 하임”()을 “생기”로 번역하고, 여기 에스겔에서는 “루아흐”()를 “생기”로 번역하고 있으므로 마치 “루아흐”(영)와 “니쉬마트 하임”( 생명의 호흡)이 같은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혼란스럽다. 루아흐와 니쉬마트 하임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영”이라고 번역해야 히브리어 본문과 맞다.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영을 향하여 예언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9절을 다시 번역해보면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영에게 예언하라, 인자야 예언하라. 너는 영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영()아, 사방으로부터 영들()을 데려오라. 그리하여 이 죽임을 당한 자들 안에 불어라(). 그러면 살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영에게 사방으로부터 영들(복수)을 데려오라고 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에스겔이 그가 명하신대로 예언을 했더니 10절에 그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들이라는 복수는 한번 사용되고 있고, 죽인자들에게 들어간 영은 단수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에게 예언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방의 영들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이 영들에게 대언하자 영이 그 사람들에게 들어가 사람들이 살아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수가 매우 매우 큰 군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10).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받아야 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재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씀과 영이 진흙과 같은 인생들, 마른 뼈와 같은 인생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이 둘은 항상 함께 일한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 하신다. 이 둘이 함께 마른 뼈 속에 들어갈 때 비로소 진흙이나 뼈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나라가 망하여 바빌로니아에 죄수로 끌려와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에 비유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과 영을 불어넣어 다시 살리실 것을 약속하고 예언한 말씀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회복하여 그들의 고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살게 할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특히 12절에 보면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여호와께서는 바빌로니아를 이스라엘이 묻혀있는 무덤에 비유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마른 뼈가 쌓여 있는 이 골짜기가 다름 아닌 바빌로니아인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무덤을 열고 이스라엘을 그곳으로부터 구출해내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포로로 갇혀있는 상태, 그래서 자유를 잃고, 주권을 잃고, 종이 되어 있는 상태를 무덤에 갇혀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다만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들, 곧 심령이 메마르고 그의 영혼이 곤비한 가운데 무기력하게 주저 앉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의 종이 된 우리는 비록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혼은 하나님을 떠나 모두가 마른 뼈가 되어 무덤에 갇혀 있는 존재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살아날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반드시 재생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말씀하셨다.“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그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 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 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듣는 자는 살아 날 것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생명이 있는 것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안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요한 5:24-26).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5-29
  •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6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5), 어버이날(8), 부부의 날(21) 등이 5월에 있고, 교회에서는 첫째 주(3일)를 어린이 주일, 둘째 주(10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키고 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가정 창조가 그 창조의 크라이막스이고 가정창조로 창조 사역이 끝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마치 가정 창조를 향하여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가정의 꽃,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자녀들은 대부분의 경우 낳기는 쉽지만 기르기가 힘들다. 첫째는 건강하게 길러야 하고, 둘째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시간과 돈과 에너지와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의 경우 자식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식들에게 끌려다니고, 학교 선생들에게 끌려다니고, 사회 분위기에 끌려 다니기 십상이다. 어떻게 자식을 길러야 잘 기르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이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도 자식들 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특히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가 그렇지 않는가 싶다.이삭은 나이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위하여 기도했다. 그의 부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라의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아 가정에 온갖 풍파를 일으켰는데, 그의 아들, “이삭은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의 아내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창 25:21). 기도라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이시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들 부부에게 쌍둥이 아들을 주셨다. 그러나 이 쌍둥이들이 배 속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리브가는 “이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 물었다”라고 했다(25:22). 이삭과 리브가는 자식을 주시라고 기도하고, 아이가 태속에 있을 때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그의 자식들에 관한 장래의 일을 말씀해주셨다. 그의 태속에 두 민족이 들어있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하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큰 자는 에서이고, 작은 자는 야곱이다. 먼저 나온 에서는 그의 몸이 온통 털로 덮여 있어서 털외투라는 뜻에서 에서라고 그 이름을 지었고, 나중에 나온 야곱은 그의 형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다. 여기서 볼 때 이삭과 리브가는 자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식을 주셨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의 것이 아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마치 자기의 소유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식을 자기 뜻대로 기르려고 하고, 자기의 연장선 상에서 자식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자식을 다루려고 한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 부작용을 초래하고, 자식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자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느니라”(렘 1: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사람을 그 어미 뱃속에서 지었다고 말씀하시며,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계획과 뜻이 있어서 구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이다.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두시고 지으신 거룩한 존재, 구별된 존재이다.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귀여워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자식이기에 귀하에 여겨야 한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이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이삭이 그의 장자 에서를 축복하기 위하여 에서에게 들에 나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명한 것이다. 이삭은 이 문제를 리브가에게 말하거나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자의 대화를 뒤에서 들은 리브가는 그의 남편 이삭이 두 아들을 잉태하였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게 한 것이라서 놀라고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급히 둘째 야곱을 불러 가축 떼가 있는 곳에 가서 새끼 염소 두 마리를 잡아 오라고 지시하며 “내가 그것들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 것이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갖다드리면, 그가 잡수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축복할 것이다.”(9,10)라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은 “보십시오 우리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저는 매끈매끈한 사람입니다. 만일 아버지께서 저를 만지시면, 저는 그의 눈에 속이는 자가 될 것이며, 제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가 받겠다. 오직 너는 내 말을 듣고 가서 나에게 가져오너라”고 했다(13). 그래서 야곱은 염소새끼를 잡아 그의 어머니에게 가져갔고, 리브가는 그것으로 별미를 만들고, 야곱의 매끈매끈한 곳에 염소들의 가죽을 입히고, 그의 형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입혔다. 야곱은 별미를 들고, 아버지 이삭에게 가지고 가서 자기를 마음껏 축복해달라고 말한다. 뜻밖에 빨리 별미를 만들어 온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삭은 그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야곱은 “여호와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제게 쉽게 만나게 하셨습니다.”(20)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삭은 야곱을 가까이 불러 그를 만져보고,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22)라고 말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고, 그의 옷의 향내를 맡고, 그에게 장자의 복을 빌었다(27). 그러나 이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게 에서는 자기를 속이고 자기의 축복을 가로챈 그의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칼을 갈았다. 리브가는 형제간의 칼부림을 피하도록, 야곱을 그의 친정으로 피신시켰고, 야곱은 이로 인하여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는 이후 20년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리브가는 참으로 믿음 있는 현모양처임에 틀림없다. 남편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누를 범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을 꾸며, 바로 잡았다. 아들을 위하여 별미도 만들고, 야곱을 에서로 바꾸기 위하여 야곱에게 염소의 털을 붙이고, 심지어 이 사실이 탄로가 나서 복이 아니라 저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야곱을 달래며, 야곱이 받을 저주를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말하며 설득한다.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온갖 지혜와 능력을 동원하고 심지어 저주를 감수하는 이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운 모성애이고, 남편에 대한 헌신적인 내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정의 평화가 산산 조각 나버렸다. 분명 잘 못 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기도하며 잉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식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들 부부는 자식을 축복하는 이 문제를 두고는 함께 기도했다는 말이 없다. 이삭은 이삭대로 가장으로서 할 일을 하고, 리브가는 아내로서 남편을 돕고, 자식을 돌본다. 그러나 쌍둥이를 하나씩 나누어 편애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 아닌가 싶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은 리브가이다. 리브가는 다음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자녀 교육에 실패하고 있다.첫째는 리브가의 열심이다. 리브가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 발 앞서 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하신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게 하는 뜻을 정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리브가는 남편 이삭의 잘못을 고쳐서 자기가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혜를 짜고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리브가는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지켜보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식들의 문제를 두고 한 발자국 뒤로 물어 서 있어야 한다.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다. 하나님께서 뜻하신바가 있어서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둘째는 리브가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야 한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악하고 거짓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악을 낳는 것이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거짓을 꾸미고, 야곱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거짓을 행하게 도와준다. 어미로서 자식에게 선행을 보이고,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도록 가르쳐야 할 자가 오히려 거짓을 장려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도록 독려한다. 심지어 자식의 저주를 자기가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이 일을 조종하고 진행한다. 자식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기르고 훈련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려고 하면서 대신 스팩을 만들어주고, 이력서나 추천장을 거짓으로 만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자기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게 하는 짓이다. 자식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도록 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을 중심한 자녀 양육, 하나님을 앞서 가지 않는 자녀 교육을 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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