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기획Home >  해설/기획 >  학술
실시간뉴스
실시간 학술 기사
-
-
특별기고/ 종교학자가 본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단상 2
- 성경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 정초의 원년으로 종교학자이자 목사인 이찬수 교수는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이란 책에서 ‘격의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현주소를 비평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그는 한국 신학과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화는 ‘한국적인가’에 진지하게 문답하고 있다. 우리는 인도불교가 중국에 수용될 때 노장사상을 빌어 불교사상을 해석한 격의불교의 과정을 통해 중국 불교가 탄생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문화는 성경 해석학적 전통에 비추어 보면 헬레니즘으로 격의 해석된 성경해석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이에 바탕을 둔 ‘격의 그리스도교문화’이다. 진정한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는 존재하는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에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론을 빌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원시 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중세패러다임,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이란 범주로 고찰하며, 오늘날은 탈교파 일치운동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또한 개신교 신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역사 시대의 복음을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가톨릭으로 발전해가는 그리스도교, 그리스 가톨릭 시대의 그리스도교, 로마 가톨릭 시대의 그리스도교, 개신교 시대의 그리스도교 다섯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지구촌의 다종교 문화현상을 고려하지 않은 지극히 가톨릭 중심, 개신교중심의 패러다임 분류법이다. 한국 신학사상을 연구한 유동식은 한국의 그리스도교사를 태동시대(1885-1930), 정초시대(1930-1960), 그리고 전개시대(1960-1980)로 구별하며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은 길선주와 박형룡, 사회 역사 참여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의 윤치호와 김재준, 자유주의 사상은 최병헌과 정경옥이 그 맥을 잇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유동식의 신학적 경향 분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교(감신)의 학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지만 김흡영은 유동식의 지론인 박형룡, 김재준, 정경옥을 한국신학의 삼대 초석으로 인정하는 것은 한국신학을 “서구신학의 전래사”로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이 서구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한국의 독창적인 신학을 수립했다기보다는 서구신학을 한국의 종교적 토양에 이식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신정통주의의 이종성을 거론하며 한국 최대 교단인 예수교장로회(통합)을 대변하는 장신(광나루)학맥을 포함한다. 또한, 김경재는 파종모델로서 보수주의 정통신학인 박형룡의 근본주의, 발효모델로서 김재준의 진보주의 신학, 접목모델로서 자유주의 신학의 유동식의 토착화 신학, 합류모델로서 급진적인 한국 개신교의 민중신학과 선교신학으로서 서남동 신학을 조명하며, 이상적인 선교신학의 모델로 유동식의 풍류신학을 주창한 접목모델을 들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 신학자의 분류법은 그리스도교의 일원적 세계관을 중심에 둔 ‘그들만의 리그’이다. 특히 한국 교계의 주류를 점하고 있는 보수근본주의 신앙은 서구교리를 한국에 전파하는 데만 관심을 경주한 호교론적이며 선교론적인 관점의 접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구에서 형성된 교회 전통과 신학적 전통을 한국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은 도외시하고 ‘씨(복음)’와 ‘토양(한국종교문화)’의 관계에서 토착화(문화)신학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신학자들은 복음의 씨는 그대로 두고, 한국 종교문화인 토양의 상태만 연구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유영모, 함석헌, 변찬린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주체적 신학을 한 이들은 서구적 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고, 이들의 신학적 접근 방법은 관념적이지 않고 한국적 경전읽기의 전통에서 성경읽기를 시도한 공통점이 있다. 일부 학자는 이미 유영모, 함석헌, 변찬린 등을 조명하면서 한국 신학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흡영은 구성신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프락시스 신학과 로고스 신학의 패러다임으로 범주화된 희랍적 이원화의 신학체계를 ‘도의 신학’으로 서구신학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며, 유영모를 조명하여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 가온찍기』란 부제로 세계 학계에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정배의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다석 신학의 얼과 틀 그리고 쓰임』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김경재는 함석헌을 새 시대의 새 문명이라는 시각에서 함석헌을 조명하는 논문이 다수 있으며, 박재순은 함석헌과 유영모의 사상을 동시에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유영모와 함석헌은 다경전적 종교적 문화전통에 바탕을 두고 성경을 통전적으로 해석한 저술을 발간하지는 못하였다. 유영모의 경우 단편적인 성경이해에 대한 독자적 체험을 『다석일지』와 『다석강의』에서 풀이해 놓았으며, 함석헌의 경우 『이사야』 등의 예언서와 요한복음에 치중한 성경이해의 단면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유영모와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체험을 통한 성경이해를 바탕으로 주체적 신앙을 하며 이미 탈(脫)그리스교적인 사유를 한다. 이들의 유·불·도에 바탕을 둔 성경이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런 측면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인물이 바로 변찬린(1934-1985)이다. 아직껏 학계에서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였던 변찬린은 한 종교학자에 의해 종교개혁 500주년에 맞추어 “한국의 종교사상가 변찬린 - 『성경의 원리』와 성경해석학(가제)』으로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한 단행본이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종교개혁의 성경해석적 전통을 계승하는 기본정신을 이어받았으며,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의 학맥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자의식으로, 유·불·도의 종교경전을 회통하여 이를 성경 66권을 통전적으로 해석한 『성경의 원리』(상·중·하)와 『요한계시록 신해』이라는 저술이 있다. 한국의 다종교적 상황을 수용하기 위해 교단 내에서 토착화(문화) 신학을 위해 노력한 유동식, 변선환, 윤성범, 나운몽 등의 신학적 작업과 교단 밖에서 주체적 신앙을 한 변찬린, 유영모, 함석헌 등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종교개혁 500년은 그동안 교단신학에 의해 조명을 소홀히 하였거나 배척된 성경해석에 대한 자료수집과 이들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한국신학을 재정립하는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 전통은 창조적으로 계승되어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게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여야 한다. 오래된 것이 전통이 아니며, 숫자가 많은 것이 정통이 아니다. 언제나 새롭게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면면히 흐르는 살아있는 성경해석의 새 물결만이 세상을 정화하고 의 영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훗날 한국신학이 서구신학의 전통을 포월하여, 다경전 종교전통에서 그리스도교를 회통시켜, 새로운 한국신학을 창출하는 원년으로 세계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기록되어야 한다.
-
- 해설/기획
- 학술
-
특별기고/ 종교학자가 본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단상 2
-
-
학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 본고는 지난 1월 13일 영락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월 월례회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에서 허문영 박사가 발제한 ’복음통일과 영성대국을 향하여‘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갈릴리바다에서 광풍을 만난 제자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다. 필자는 2012년부터 한반도를 향해 절대폭풍(Perfect Storm)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해왔다. 절대폭풍은 3가지 폭풍이 동시발생해서 한곳에서 충돌하여 존재했던 모든 것을 풍비박산나게 만든다. 북한의 핵무기개발과 북한정권의 붕괴 가능성으로 인한 북한폭풍, 동북아의 영토분쟁·역사분쟁·군비경쟁과 미·중 패권충돌로 인한 제3차세계대전가능성에 따른 안보폭풍· 세계경제위기와 한국경제의 침체(양극화, 청년실업, 노인빈곤 등)등으로 인한 경제폭풍 3가지 폭풍이 동시발생해서 한반도를 강타하는 것이다. 2017년에도 이 흐름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북한 지도부는 지속적으로 핵무기 개발의지를 천명하고 있고, 마초(strong man)의 시대 중국 시진핑주석, 러시아 푸틴대통령, 일본 아베총리, 미국 트럼프대통령당선자 등은 계속 애국주의에 기초한 자국중심의 정책을 강경하게 밝히고 있으며, 세계경제는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탈퇴)와 미국 트럼프대통령당선자의 미국우선주의로 인해 보호무역주의가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절대폭풍을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고사하고,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근혜정부 국회탄핵 및 헌재 심판과 특검 조사과정에서 현안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국론이 사분오열되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주님께서 살펴주시고, 폭풍과 파도를 꾸짖어 잠잠케 해주셔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통일의 길 통일 3.0 패러다임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때다. 분단 71년 동안 우리는 분단질서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해왔다. 지금까지 우리의 통일노력은 크게 2가지 통일패러다임 시기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통일 1.0 패러다임 시기로 전쟁통일론이다. 1950~60년대 냉전기 적대적 대결통일론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고, 그 결과도 통일이 아닌 분단고착화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둘째는 통일 2.0 패러다임 시기로 대화통일론이다. 1970년대 긴장완화기부터 시작되어 1990년대 탈냉전기를 거쳐 2017년 현재까지의 유화적 대화통일론이다. 대화를 통해 남북긴장완화까지는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5차례 핵실험과 60회 이상의 미사일발사를 통한 대량살상무기개발이라는 결과에 봉착하고 말았다. 1990년대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어 온 햇볕론(온건론)과 바람론(강경론)은 그 주장의 강열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제 정·반·합 완성단계인 통일 3.0 패러다임을 모색 수립해서 실천해야 할 때다. 창의적 균형통일론으로서 복음통일론이 되어야 한다. 그 기본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본다.창의적으로 : 한민족형 복음통일 제2차 세계대전이후 동서 냉전체제 하에서 분단 대립해 오던 나라는 모두 5 나라였다. 그 중 3나라는 통일을 실현했다. 베트남은 1975년 북베트남에 의해 ‘무력에 의한 흡수통일’을 이뤄냈다. 그러나 전쟁에 의한 공산주의 무력통일은 국토의 황폐화, 생산시설의 파괴, 막대한 인명피해와 적대감을 증폭한 채 부자유와 빈곤의 통일후유증을 심각하게 초래했다. 독일은 1990년 서독을 중심으로 ‘합의에 의한 편입통일’을 이뤘다. 분단기간 서독은 통일을 외치지 않았지만, ‘제2인자 외교 (No. 2 Diplomacy)로 우호적 통일환경과 지속적 교류협력으로 동독주민의 ‘친서독화’를 이뤄내 평화통일을 달성했다. 그러나 통일이후 통합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반성케 한다. 정치통합은 1년 내 잘 이뤄졌고, 경제통합도 10 여년에 걸쳐 성과적으로 이뤄졌으나, 사회통합은 26년이 지났음에도 향후 30년이 더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예멘은 ‘합의통일(1989) 후 내전과 재통일(1994)’ 방식으로 통일을 이뤄냈다. 그러나 통일이후 통합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세력들에 의해 정치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내전에 돌입했다. 우리는 분단국 통일사례 검토를 통해 통일준비를 위한 ‘후발주자’ 이점을 누릴 수 있다. 타산지석일 뿐이다. 우리가 반드시 따라 가아야 할 모범사례는 아니다. 우리 통일방식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우리민족의 통일은 무력통일이 아닌 평화통일로, 일방적 편입통일이 아난 쌍방적 합의통일로, 지도부만에 의한 통일이 아닌 국민적 통일로 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합의통일에 있어서도 그 수순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통일이 아닌 문화·사회→ 경제→ 정치 통일 순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온 민족구성원이 참여할 수 있고, 분단 70여년 이상 남북이 각각 축적해온 제 분야의 역사적 유산들을 융합·승화·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선 국가통일, 후 국민통합 방식이 아니라 선 국민통합(Integration), 후 국가통일(Unification) 방식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변혁적으로 : 성경적 영성대국동서독대결에서 서독중심의 통일을 이뤄낸 브란트식 대북정책과 미소냉전대결에서 소련의 붕괴를 이끌어낸 레이건식 대북정책의 한계를 극복한 변혁적 통일정책을 수립 추진해야 한다. 햇볕정책은 전자를, 강경정책은 후자를 모방한 정책이다. 모두 한계를 노출했다. 새로운 통일(대북)정책방향은 협력과 압박을 통한 변화가 되어야 한다. 목표로는 인구대국 중국, 영토대국 러시아, 경제대국 일본, 유일초대국 미국을 넘어 통일대한민국이 영성대국(Great Spiritual State)이 되도록 해보자. 평화대국을 지향하되 군사적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팍스코리아나가 아니라 영성적 섬김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샬롬코리아나(Shalom Koreana)를 지향해보자. 전략에 있어서는 북한 변화의 모든 상황에 대한 대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희망적 사고에 기초한 북한조기붕괴설이나 극단적 증오에 기초한 ‘김정은참수부대’의 공개적 창설 등은 자제해야 한다. 북한의 지속적인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는 주변국의 핵심국익(vital interest)를 고려한 협조 하에 단호한 정책을 계속 추구하되, 북한정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기초로 우리의 통일역량을 제고하며 상황반응적 대책이 아닌 상황주도적 정책을 수립해서 변혁(transforming)적 통일을 이뤄가야 한다. 남한체제 확산론이나 남북한체제 수렴론을 넘어, 정의·사랑·평화중심의 남북한변혁론적 접근을 적극 모색하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2017년에 우리 기독인들은 상대방 북한을 변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부터 정의·사랑·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도록 노력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복음통일을 내려주실 것이다수단에 있어서는 제재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관여를 병행하자. 북한의 반응을 얻어내며, 주변 4국과도 협조를 이뤄가야 피흘림없는 통일이 가능하다.미래적으로 : 상생적 세계평화우리분단은 4중적 의미가 있다. 한반도 차원에서 남한과 북한의 민족분단선, 동아시아 차원에서 해양세력인 미일 대 대륙세력인 중러의 지정학적 대치선, 세계적 차원에서 유일초강국 미국대 도전국가 중국의 패권대결선, 영적 차원에서는 하나님나라를 믿는 영역 대 불신하는 영역의 영적 전쟁선이라 할 수 있다. 4중적 해법이 제시될 때, 우리민족과 한반도분단문제와 직·간으로 연결된 열방이 함께 살게 된다.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대륙과 해양 세력의 대결구도는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미국의 21세기 세계패권 유지전략과 중국의 21세기 소강사회건설을 위한 일대일로전략의 충돌, 그리고 일본의 정상국가를 표방한 군사력강화전략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에 기초한 패권회복전략으로 인해 마찰이 더욱 심해질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결과 전쟁으로 퇴락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기독공동체에 의해 평화와 공동번영으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민족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에서 대결 상태 가운데 대상적존재로 더이상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이끌었던 ‘로마제국’처럼 “해륙국가”를 이뤄 한반도문제를 해결 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5대양 6대주 인류의 공동발전에 이바지하려는 의지를 갖고 통일문제를 진취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G-8과 G-5를 넘어 G-3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마초 정상들이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것과 미국과 중국이 패권전쟁을 벌이는 것을 방관할 것이 아니라, 복음통일로 영성대국을 이뤄 미국·중국과 함께 세계 평화와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대를 열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통일한국은 OECD 국가중 4위 인구인 8000만 독일과 같은 나라가 된다. 절대폭풍 도래와 준비못한 국가와 무기력한 지도부만 비난할 것이 아니다. 통일비용만 우려하고, 분단을 지속하려 할 때가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성경사적·인류사적 소명을 생각해야 할 때다. 세계적으로 종교개혁 500주년(1517)에 국내적으로 민주화 30년(1987년)과 IMF 외환위기 20년 (1997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가 복음 앞에 온전히 서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자. 그리고 사명감당을 위해 복음통일 영성대국 세계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하며 국내 ’87정치체제와 ’97경제체제 한계와 북한의 핵도발과 국제 마초 철권외교를 비롯한 절대폭풍을 극복하도록 노력하자.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
-
특별기고/ 종교학자가 본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단상 1
- 머리말종교개혁 500주년의 해가 밝았다. 한국 개신교는 다양한 행사 준비로 어느 해보다 바쁜 한 해가 될 것에 틀림없다. 다채로운 행사의 정점에는 종교개혁 정신의 재조명에 종교적 역량이 집중되어 있다. 종교학자로서 축하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면 당시 비텐베르크대학 신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로마 교황청이 베드로성당의 수리비 충당을 위해 판매한 면죄부에 항의하여 1517년 95개조의 의견서를 발표한 사건에서 촉발되어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혁되어 온 다양한 종교 사회문화적 현상의 확대된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개혁은 영어로 ‘reformation’이지만, 가톨릭 개혁만이 아닌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포함한 중세 유럽 사회 전체의 큰 변혁의 물결을 끌어 낸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Reformation’으로 쓰며, 우리는 종교개혁이라고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필자는 종교개혁의 세 가지 단상의 주제로 ‘단상1) 기복신앙과 맘몬신앙을 탈피하여 풍류신앙의 실천적 개혁의 원년, 단상2) 헬레니즘의 격의적 성경해석을 포월한 다종교적 전통을 회통한 새로운 성경해석의 원년, 단상3) 유럽 가톨릭 개혁 500주년에서 진정한 지구촌 종교개혁의 원년’이라는 소제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하기로 한다. 기복신앙과 맘몬신앙 등 의타신앙을 탈피하여 한국적 풍류신앙 실천의 원년으로 개신교가 전래한 이래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짧은 역사임에도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 더구나 세계 최대의 신자를 가진 단일 교단, 신자의 양적 신장률, 그리고 종교인구 대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한국 개신교가 세계 기독교계에 내세울 수 있는 자랑할 만한 양적 지표임이 틀림없다, 반면에 한국 교계에 만연하고 있는 기복신앙과 맘몬신앙은 양식있는 종교인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부정적인 종교적 현상이다. 종교개혁이 새로운 성경해석과 실천적 전통의 바탕위에 세워져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와 사도들의 종교적 행적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종교의 기초석은 고난과 희생의 터 위에서 세워진 살신성인의 행위의 탑이지 결코 사익을 취하는 기복의 바벨탑이 아니다. 더구나 ‘예수의 몸 된 교회’를 일부 직업종교인이 매매하고 세습하는 행태는 스스로 종교적 타락을 실증하는 징표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현상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왜 이런 어두운 현상이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되었는가? 이는 낡은 중세시대 정신을 고발하고 저항(protest)하는 프로테스탄트의 본래 정신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괴리된 사회적 현상과 타협하며 자기 삶의 좌표를 정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정한 세속의 자본과 권력과 명예를 떨치고 광야의 삼대시험을 이겨낸 ‘구세주’이며, 죽은 후 사망까지도 극복한 우주적 그리스도로 신앙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상실한 무늬만 신자인 그리스도인, 희생과 사랑이 결핍된 예수 팬들이 일요일마다 교회당에서 직업종교인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에게 찬양과 찬송을 올리지만, 사회적 공간에서는 비(非)그리스도교인과 같은 속세적 원리로 살아간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본질적 의미가 무엇이며, 교황중심의 가톨릭의 틀을 깨고 나온 개신교의 종교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현재적 시점에서 되물어보아야 한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구호가 한국교회가 계승한 구호라면 이 구호 자체를 다시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돌아가 되새김해 보아야 한다. 전통은 창조적으로 계승되어 정통이 되어야 하며, 고답적이고 고식적으로 신앙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 되기에 십상이다. ‘오직 믿음’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행위적 실천은 도외시 하지 않았는가?‘오직 성경’이라고 하면서 한국교회현상이 정말 성경적인가?‘오직 은혜’라고 하면서 기복적이며 맘몬적인 세속적 현상과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직업종교인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대리영광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만일 그 대답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올바르게 승계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교회현상이라면 그 근본원인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한국의 종교적 심성을 잃어버린 것 때문이 아닌가? 우리에게 흐르는 조화롭고 상생하는 종교적 포용성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기인한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우리의 종교적 역사에는 외래종교를 창조적으로 포용하는 풍류(風流)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즉, 서구신학의 전통을 교조적으로 답습하는 것을 탈피하여 ‘기독교의 고운(孤雲),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을 찾아야 한다. 한국의 종교적 도맥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풍류정신을 발현하여야 한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연원을 둔 풍류는 이미 동아시아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신선의 역사를 기록한 선서(仙書)로 현대적 의미의 영성적 인간(Homo Spiritualis)을 조명하고 있으며, 유·불·도의 종교적 종지를 회통하고 융합하여 새롭게 경전을 해석해 내는 인식론적 체계를 담고 있으며, 성(聖)과 속(俗)을 넘나드는 자율적이며 자발적인 실천적 사회운동을 담지하는 신행일치의 규범이 우리 종교문화의 전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외래종교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기층에 자리 잡고 있는 풍류의 신앙과 조화를 이룰 때 새로운 종교문화를 창조한 것이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흐르는 맥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단지 마르틴 루터를 기념하고 그 종교개혁의 길을 답사하며, 서구 신학자와 그 교리를 조명하는 학술행사와 기념주화를 발행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서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발굴하여 조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구촌의 사유체계가 합류하며, 종교와 과학이 대화하는 시점에 진정한 종교개혁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진정한 회개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죽은 인물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정신으로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며 기복신앙과 맘몬신앙에 젖어있는 타성적 믿음을 깨고 풍류의 혼으로 깬 풍류체가 되어 사회 구석을 밝히는 참다운 종교로 거듭나는 원년(元年)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를 위해 다 경전적 전통의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을 성경의 바탕에서 재해석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실천적 행동을 선보이는 진정한 인격의 발굴과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의 행사이념이 되어야 한다.
-
- 해설/기획
- 학술
-
특별기고/ 종교학자가 본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단상 1
-
-
학술/ 정의로운 사회와 한국교회: 김영란법의 효율적 집행
- 본고는 지난 11월 11일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기독교학술원 제26회 영성포럼에서 장헌일 목사(생명나무숲교회)가 발제한 ‘정의로운 사회와 한국교회’의 일부를 발췌·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정의로운 사회와 한국교회1. 대한민국 부정부패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공정하고 청렴한 사회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정청탁 금지와 금품등의 수수 금지에 관한 김영란법 제정 배경에는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고위층 부정부패 문제가 있었다. 손봉호 교수는 부정부패 원인으로 우리나라 세계관을 차세(此世) 중심적 세계관으로 내세도 인정하지 않고, 초월신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고 말했다. 신의 감시가 있어야 거짓말을 못 하고, 못된 짓을 하면 내세에서 처벌받는다는 생각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특히 김영란법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교계 단체와 한국교회를 겨냥해 기독교인이 먼저 정직해야 하고, 뇌물을 주고받지 않아야 한다. 단순히 자기 양심만 중요하다는 생각은 이기적이다. 성경은 다른 사람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가 이런 데 제일 앞장서야 한다며 기독교가 이번에 김영란법을 확실하게 지지해 잘 실천 되도록 하자고 말했다.김영란법으로 부정부패가 줄어들면, 사회적 약자가 받는 고통도 감소할 것이다. 지금 청년들도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부정부패는 우리 국가 장래와도 관련 있다. 김영란법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출발이 달라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위로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경에 부합하는 법이 될 것이다. 이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부정부패의 여러 가지 원인들을 분석하고 하루빨리 이를 청산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야한다는 공통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제는 선진국이라는 개념이 다만 경제적인 수준만을 척도로 하는 시대가 지나 국민들의 의식수준이나 삶의 질적인 요소, 부패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 등을 국제적으로 매년 평가하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오래전부터 부패단속법(Gesetz zur Bekampfung der Korruption)이란 제도를 만들어서 청렴한 사회가 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으며 일본을 비롯한 싱가포르, 뉴질랜드, 덴마크, 홍콩 등은 세계에서 매우 청렴하고 정직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대부분의 선진국뿐만 아니라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몽골 등 개발도상국들도 오래 전부터 종합적인 이해충돌 방지 제도를 구축․운영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또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공직자들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청렴한 사회 만들기 프로젝트에 앞장을 서야할 때이며 국가는 국민들의 법 시행에 따른 혼란을 피하고 청탁금지법이 하루빨리 정착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2. 청탁금지법과 한국교회 효율적 집행인간은 죄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김영란 법 같은 사회법이 강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부패의 사슬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법이 없다면, 우리가 그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락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김영란법이 궁극적 목표로 삼는 정직 사회와 공평 사회야말로 교회가 추구하는 사회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해야 할 역할이 소금과 빛의 사명이다. 교회는 부패한 사회에서 짠맛이어야 하며, 어두움을 내쫓는 등잔불이어야 하고, 숨길 것 없는 투명한 교회여서 세상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모여드는 대안적인 사회여야 한다.바로 한국교회가 공교회성 회복과 공공성의 역할을 감당 할 때 교회와 성도의 삶은 공의와 정의를 삶에서 실천 하는 참된 예배자로서 살게 되며 부정과 부패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지금 시행되고 있는 김영란법은 종교인이나 종교단체를 감시하는 주요 대상은 아니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목회자나 교회가 김영란법보다 더 우선적으로 부정부패와 청탁금지를 가장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김영란법의 시행은 한국 사회의 도덕성을 몇 단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며 김영란법이 잘 정착될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크리스천이라면 김영란법은 법 시행 이전부터 지켰어야 할 중요한 가치로 김영란법이 잘 정착되면 고질적인 접대문화와 청탁문화가 근절될 것으로 기대된다.교계에서는 많은 교단들이 신학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교과부에 등록된 학교의 교수, 교직원, 이사회 임원 등으로 이름이 등재돼 있을 경우 사립학교법에 따라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이밖에 교단이나 교회로부터 해외로 파송된 이들 중에서도 학교 또는 언론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국내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적용을 받게 된다.또한 정기간행물로 등록한 언론사를 갖고 있는 교단 또는 대형교회도 언론사 종사자로 구분이 돼 적용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방송사 관련자도 마찬가지다. 방송사 이사나 관계된 직함이 있는 경우 이 법에 적용될 수 있다. 이와 함께 교회에서 발행하는 교회신문도 간혹 정기간행물로 등록이 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교회의 업무를 보는 사람도 김영란법에 적용을 받을 수가 있다. 또한 등록이 된 대안학교나 초중고등학교 운영을 하는 교회의 목회자들도 이 법에 적용을 받는다. 이와 함께 유치원이나 사회복지와 관련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위탁교육 혹은 복지사업을 하는 경우도 해당될 수 있다.문제는 교회의 구성원 중에서 김영란법에 대상되는 공무원, 교직원, 언론사에 관계된 성도가 있으면 교회에서도 김영란법에 따라 대응을 해야 한다.또한 크리스천은 경조사가 많아 김영란법 저촉을 주의해야 한다. 교회의 정관에 이러한 기준을 만들어서 경조사나 그 외에 식사나 선물 등에서도 정관에 따라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김영란법에서는 김영란법을 관리하는 담당자를 두어야 한다고 나와 있지만 이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태료를 부과 하지는 않는다.김영란 법 시행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공동체를 세우는데 깊은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부정 청탁 금지에 대한 윤리적 모범과 정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특히 매번 교단과 연합 기관의 회장 선거에서 뇌물 형식의 돈봉투가 일부 선거 협잡꾼에 의해 요구되기도 하고 대의원에게 제공된다는 소문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영란법 시행 초기과정에서 현재 겪고 있는 부작용과 시행착오들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접대문화를 뿌리 뽑아 바르고 공정한 사회로 가기 위한 성장통으로 봐야 한다. 지난 10월 4일부터 6일까지 한국갤럽에서 우리나라 성인 1천9백 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1%가 김영란법 시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우리사회가 이렇게 불공정하고 부패하다고 인식하고 있기에 이러한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적 인식은 부패한 태도와 행동양식을 가져와 대한민국은 부패공화국임을 자인하는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천박한 나라로 전락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나가는 말김영란법은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오랫동안 잘못된 관습과 문화를 바꾸기 위한 생활의식혁명의 시도이다. 우리국민 스스로가 부정부패와 청탁사회를 근절하는 바른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기독교가 앞장서 성경적 세계관을 토대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우리사회를 정화해 나가야 한다.무엇보다 이 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도록 오랫동안 당연시 여겨진 우리나라의 청탁·접대의 잘못된 문화를 바꾸는 데는 공의와 정의에 대한 의식변화와 함께 시간이 필요하다. 청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김영란법의 본래 취지를 떠올리며, 보완책을 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다만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건전한 활동과 교류가 제한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법 취지에 충실하게 법의 내용을 정확하게 숙지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 소요되는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는 자세가 갖춰져야 할 것이다.김영란법의 시행은 한국 사회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며 이법이 잘 정착될 수 있도록 한국교회와 크리스천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김영란법은 성경에서 말하는 공의와 정의의 최소한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중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 정의로운 한국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야 하는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교회성 회복과 공공성 실천으로민주적인 정치적 책임을 행사할 수 있는 정의롭고 민주적인 양심 세력이 되어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이 나라 공의와 평화를 지키는 정의로운 민주시민이 되어야 한다.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이 같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회개와 결단으로 사회 앞에 바로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불의와 타협한 우리의 죄를 철저한 회개하고 국가와 사회를 선도하는 제자도를 실천하는 예언자적 교회로서 다시 대한민국의 희망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정의로운 사회와 한국교회: 김영란법의 효율적 집행
-
-
학술/ 미래를 준비하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고촌교회
- 본고는 미래목회포럼 주최로 지난 11월 7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열린 2017 새해목회준비 기획목회사역설명회 ‘문화목회! 미래교회 길을 열다’ 중 박정훈 목사의 발제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다음 세대’에게 꿈을 키워주는 교회 경기도 김포에 위치한 고촌교회는 1984년에 개척되었다. 전도사였던 박정훈 목사는 1988년 5월 8일 2대 담임자로 부임하여 첫 목회를 시작했다. 1980년대 고촌지역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었다. 가장 마음이 쓰였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 일도 갈 곳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꿈도 없어 보였다. 그런 동네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자’라는 비전을 갖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시편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는 말씀을 주셨다. 박정훈 목사는 ‘마음의 완전함’은 ‘믿음’을, ‘손의 능숙함’은 ‘실력’으로 정리했다. 믿음은 있지만 실력이 없으면 자신과 가정을 책임지는 어른으로 설 수 없다. 반면에 실력은 있지만 믿음이 없다면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어른으로 자라려면 믿음과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아이들에게 ‘믿음과 실력의 인재’가 되도록 비전을 제시하면서 드리워진 현실의 장벽을 걷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실력’으로 무장시키고, 더불어 하나님과 자신을 향한 강한 ‘믿음’을 통해 세상을 향한 꿈과 희망을 펼칠 수 있도록 격려했다. 다음세대인 아이들을 ‘21세기를 이끌어 갈 믿음과 실력의 인재’로 키우는 것이 고촌교회의 비전이 되었다.이러한 비전을 품고 고촌교회는 방과 후 아이들에게 영어와 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 무기력하게 세월을 보내던 아이들에게 꿈을 꾸게 하고, 꿈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했다. 악기를 살 여유가 없는 가정의 아이들에게 교회에서 악기를 마련해서 대여해주고 매주 토요일 전공자들이 집중 지도를 하게했다. 이렇게 하자 악기를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2001년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게 된다.30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다음 세대’였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지금 세대’가 되어 교회와 동네를 섬기고 있다. 이제는 어른이 된 그들이 ‘다음 세대’를 지도하는 일을 돕는 동역자들이 되어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음악 사역 1988년 어떻게 고촌지역의 다음세대를 섬겨야 할지 기도하며 시작한 음악 교육은 2001 ‘김포 체임버 오케스트라 ’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후 단원들이 김포지역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로 확대되면서 ‘김포 청소년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을 하고 있다. ‘김포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국내 연주회뿐 아니라 2006년 7월 세계감리교대회(WMC), 2006년 9월 중국 북경 21세기 컨벤션홀 연주회, 2007년 9월 미국 카네기홀 뉴욕, 워싱톤 순회 연주, 2012년 9월 일본 오사카에서 해외 연주 등도 꾸준히 해왔다. 이제는 단순히 낙후된 지역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계적인 인재로 키울 수 있다는 비전을 이루어가게 되는 거였다. 그 비전은 2012년 사단법인 고촌 아트홀 출범으로 보다 선명해졌다. 그리고 2015년 여름, 경기도 교육청 지정 ‘고촌아트홀 꿈의 관현악 학교’로 개교하면서 음악학교로 재도약하게 되었다. 현재 고촌아트홀 꿈의 관현악 학교는 웨슬리 오케스트라(대학생 30명), 김포청소년오케스트라(중고등학생 100명), 김포어린이 오케스트라(초등학생 100명), 김포윈드오케스트라(초중고생 70명), 예비학교 오케스트라(200명), 소년소녀 합창단(30명)과 교사 50명이 매주 토요일 오전과 오후 3시간, 저녁 3시간을 기본과정으로 편성하여 운영하고 여름과 겨울 방학 중에는 4박 5일의 음악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8월에는 평화음악회, 1-2월 중에 정기연주회를 하고 있다.올해 14회 정기연주회는 1월 31일(주일) 오후6시 KBS홀에서 열렸다. 그날의 수익금은 문화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쓰여졌다. 지난 5월 31일(화) 김포 농촌 지역의 7개 초등학교 400명의 학생들을 고촌교회로 초청하는 ‘자장면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개최한 것이다. 다음세대인 아이들이 또 다른 다음세대인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뜻 깊은 자리였다. 물론 김포시 교육지원청과 지역 봉사단체들과 함께 힘을 합한 음악회였다. 카네기홀 연주 10주년이 되는 내년 1월에는 미국 서부지역 순회연주회를 갖게 된다. 영유아 아이들을 위해서는 엄마와 아기가 함께 교육 받는 아기학교가 진행 중이다. 영유아들의 감성을 자극한 통합음악 예술교육 프로그램인 ‘유리드 믹스’ 과정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어린이 미래학교’가 있다. 금년에 22회를 맞은 ‘어린이 미래학교’는 우리 동네 어린이들과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꿈을 키워가게 하는 목적으로 매년 봄 방학을 이용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사회 전문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기독교인들을 초청해서 강의도 듣고 평소에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는 시간이기도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멀게만 느꼈던 꿈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스스로 자신의 꿈을 설계도 한다. 그동안 농구감독 최희암, 개그우먼 박미선을 포함해 의사, 대학교수, 과학자, 화가, 음악가, 방송국 PD, 선교사 등 많은 분들이 다녀갔다. ‘지금 세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교회다음세대인 아이들을 위해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키우는 비전을 갖게 됐다면 지금세대인 어른을 위해서는 현실의 고단함과 메마른 영혼을 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목회 초기에 고촌 지역은 여러 면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다. 지역 주민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었고, 그로인한 가정의 혼란, 자녀교육의 문제, 문화적 혜택의 한계가 지역의 큰 문제점이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위해 기도했고 결과로 주신 말씀이 마가복음 4:30-32 ‘겨자씨의 비유’이다. 처음은 작지만 나중에는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깃 들일 만큼’된다는 말씀이다. 노래를 찾아 주고 날개에 힘을 넣어주는 그늘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준비했다. 적은 수의 교인이었지만 함께 기도하고 전도에 힘썼다. 구체적으로 지역 사회의 문제를 분석하고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계획한 것이 문화, 교육 프로그램들이었다. 다음세대들에게는 ‘믿음과 실력’을 통해 세상을 향한 꿈과 희망을 펼칠 수 있도록 격려했고, ‘지금 세대’를 위해서는 ‘예배’와 ‘문화적 삶’을 통해 삶을 위로하고 새 힘을 얻기를 노력했다.음악회도 자주 열었다. 전문적인 음악가들을 초청하는 수준 높은 음악회였다. 이러한 음악회는 교인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러한 열린 음악회는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눔을 통해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다.목회초기부터 박정훈 목사는 더불어 사는 목회를 해왔다. 내 교회, 내 교인이 아닌 지역사회를 위해 열려있는 목회였다. 다음세대뿐 아니라 기성세대인 지금 세대들을 위해서도 늘 더불어 사는 목회를 해온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교회건축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교회, 이웃과 함께 가는 교회. 소통하는 교회가 박정훈 목사가 꿈꾸는 교회이다. 교회 건물도 영상, 음향, 조명시설을 갖춘 연주홀 스타일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공간들, 그리고 1,000석 규모의 공연시설과 다양한 규모의 소공연장, 접근하기 좋은 공간인 1층에는 십자가 갤러리, 테바 카페를 운영하여 다양한 문화사역을 할 수 있도록 건축해서 지역 주민들이 쉽게 마음 문을 열고 다가와 쉼을 얻을 수 있는 문화 공간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지금 세대’를 위한 사역 행복한 ‘다음 세대’가 준비되려면 ‘지금 세대’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고촌교회는 우리 동네‘지금 세대’들에게 평생교육 학습의 장과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고촌 아트홀 안에 평생 교육원을 개설했다. 그리고 지역주민 누구나 참여하여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행복 학습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평생 교육 과목은 우리 교회와 우리 교인들이 잘 섬길 수 있는 과목들이 우선적으로 개설되었다. 교육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려면 믿음으로 돕는 동역자들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성악, 지휘, 오르간 등의 음악 과정, 한지공예, 사진, 테라코타 등의 미술과정, 영어, 일어, 중국어 등의 언어과정 등의 과목들이 인기 과목들이다. 또한 노인 복지가 점차 중요해지는 만큼 노인 대학인 고촌 시니어 칼리지를 개강하여 지역 어르신들의 평생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지금세대를 위한 취미 동아리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블루엔젤스 축구팀, 고촌 슬링스 야구단, 고감 산악회, 고촌 탁구교실 등의 스포츠 동아리들이다. 교육 활동이나 취미 활동은 우리 동네 ‘지금 세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지역 모든 주민들에게 늘 열려 있다.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미래를 준비하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고촌교회
-
-
학술/ ‘목회자 은퇴문화의 현실’
- 본고는 지난 10월 27일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 공덕교회에서 열린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의 발표회에서 현해춘 목사가 발제한 ‘목회자 은퇴문화의 현실’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사람의 마음을 알기위해서, 온 세상 사람들 모두를 만나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열고, 깊이 들여다보면 세계인의 마음을 다 알 수 있게 된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다.제 자신이 40여 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를 경험하면서 은퇴가 가져다주는 상실감, 두려움, 고립감 등을 이해하게 되었고, 은퇴에 따르는 제반 문제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활동에 따르는 영향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그래서 나름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일들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고, 목회자의 은퇴 현실과 은퇴 문화를 생각하며, 몇 가지 제안을 드리려 한다.1. 은퇴 인구의 현황과 추세은퇴란 개념이 생긴 것은 서구 사회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불과 100여 년 전이다.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은퇴란 개념이 없었다. 왜냐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가족들과 함께 생산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복지란 개념도 없었다. 가족구성체 내에서, 육아와 노후부양이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그러나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 되면서 나이가 들면,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사회도 1960년 이후 경제발전이 본격화 되면서, 산업화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역군들이 직장에서 퇴직하게 되면서, 은퇴란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오늘의 은퇴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은퇴가 목전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가 경험 없이 준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은퇴를 맞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알다시피 전체인구의 7%이상이 65세가 넘으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압축 고령시대에 들어서고 있는 실정이다.통계청(2015b)의 장래인구 추계에 따르면, 203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가 5,216만 명에 이르게 될 것이며, 2017년이 되면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14%를 넘어 고령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중이 2030년에는 24.3%로 정점에 도달할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2040년 우리의 기대 수명은 89.3세로 예측되고 있으며, 그야말로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이것은 출생이후 사고로 죽지 않는다면, 누구나 100세를 살수 있는 시대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우현 박사의 은퇴학 개론.2016.6.3.)2040년이 되면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90세가 될 것이란 연구 결과가 나왔다.(성균관대 하이브리드 컬처연구소, 2040년 한국인의 삶의 질) 이런 연구 결과로 추산해 볼 때, 우리는 우리 할아버지 세대보다 30여 년은 충분히 더 살아야 한다. 엄청난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런 귀한 선물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시간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두려움 마저 느끼게 한다. 이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여기 필요한 재화를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돈 없는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라는 말을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이런 문제들이 은퇴와 맞물려 일어나는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들이다.2. 한국교회 목회자의 은퇴 현실한국교회는 선교1세기 안에 1천만을 육박하는 거대한 교회로 성장해 왔다. 국민의 25%에 가까운 숫자다. 세계 선교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세계에서 큰 교회들이 한국에 등장해서 한국교회의 위상을 자랑해 왔다. 또한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한 만큼, 각 교단들은 저마다 목회자 양성에 붐을 이루었고, 수많은 목회자들을 길러냈다.그러나 선교 2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성장이 급격히 둔화되고, 산적한 문제들을 않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의 많은 문제들 때문에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직자의 권위가 실추되어 가고 있고, 목회자들에 대한 우리사회 인식이 달라져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이 많은 은퇴 목회자들이 대책 없이 은퇴를 맞이하게 되는 일이 오늘 교회문제 중의 하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는 목회자의 은퇴가 문제되었던 것 같지 않다. 사도들은 대개 순교함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그들의 노후를 시대의 환경에 순응하여 극복해 나가야 했다.가톨릭교회 시대는 신부와 수녀의 독신 제도로 성직자의 노후 문제는 별로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개혁교회 안의 목회자 은퇴문제는, 교회가 사회에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선진 기독교 국가들은, 공무원의 공적 복지제도에 준하는 제도적 균형으로 이어져, 목회자도 어느 정도 사회적인 밸런스가 유지되어온 실정이지만, 한국교회의 목회자 은퇴문제는 대책없이 여기까지 밀려 왔다.많은 은퇴 목회자들이 공적연금 제도나, 복지 혜택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은퇴 후의 삶을 나름대로 준비하거나, 대책 없이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유복한 부모의 유산을 받거나, 성공한 자녀들의 경제적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예는 그리 많지 않은 형편이다.또 하나의 경우는 은퇴 이후, 은퇴이민 신청을 하여 멀리 떠나거나, 귀농, 귀촌을 하는 것이다.어떤 이들은 노후에 갈 곳이 없어, 여기저기 방황하거나, 반퇴를 해야 하는 경우와, 다양한 노후 준비들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또한 성직의 대를 이어 교회의 세습을 도모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미자립 교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중대형 교회는 성직의 세습이란 이유들 때문에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또 하나의 경우는 소수의 기관 목회자들이 연금 혜택을 받게 되고, 어떤 분들은 다행히 은퇴한 교회에서 노후 생활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수혜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고, 대다수 은퇴 목사의 6-70%가 대책 없는 은퇴를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그래서 한국교단 안에 교단 나름대로, 뜻있는 분들이 긴급하게 은급제도를 만들기도 하고, 은퇴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초 교파적으로 목회자 연금제도를 추진하는 일들도 시도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도, 현재 실정으로는 만족할 만한 대책이 되지 못한다. 예장통합 전국 목사회의 자료에 따르면, 68%가 노후의 대책이 어렵다고 말하고 있고, 현재 은퇴자의 35%가 자녀들의 열악한 후원으로, 20%가 정부 빈민 지원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한 교단의 통계를 예로 든 것이다.) 주요 교단들의 은퇴목사는 약 6500명쯤이라 추산한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될 수도 있다.그렇기 때문에 각 교단마다 은급제도에 부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는, 부족한 은급제도에 준한다기보다, 개 교회적 입장에서 목회자들의 노후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교회 안에 심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은퇴 시기가 되면, 개 교회는 물론 은퇴 목회자들 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3. 목회자 은급 제도의 방향우리나라는 해방이후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국가 사회의 여러 부문에 걸쳐 많은 질서를 찾아 왔다. 많은 국가공무원, 교육공무원, 직업군인, 그리고 산업 전선에서 일하는 분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처음부터 퇴직금이나 연금이 충분히 준비되어온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끝없는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차 제도화되고, 오늘 우리 사회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오늘 한국교회도 뒤늦은 감은 있지만, 목회자 은급 문제에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한국 종교연구 실태에 의하면 은퇴 및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는 순서는 종단별로 원불교, 불교,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 순이라 한다. 각 종단들이, 그 단체의 은퇴와 복지를 위해, 부단히 힘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한국 개신교회도 막차를 탄 셈이다.목회자 은급제도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의 생각이지만, 지금 이 일에 참여하여 애쓰시는 분들의 수고만큼 실효성을 거두기 어려운 반면, 힘겹고 어려운 장애 요인들이 많이 가로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이일을 포기하거나 좌시할 수 없다. 지금은 벅찬 일이지만, 한국교회가 좀 더 기도하고 힘써 나가면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방안들이 제시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세대 뿐만 아니라, 차세대 목회자들이 안심하고 목회 활동을 계승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목회자들의 안녕과 질서는 앞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 모두의 기도가 절실하다. 그리고 여기 따르는 재정 문제, 전문 인력의 문제, 은급제도 문제, 국가 지원문제 등 다방면에서 제도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연구와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개 교회들도 평생 외길인생을 살아온 성직자들의 노후와, 은퇴 계획에 대하여, 더 깊은 배려와 성직의 권위와 존엄성,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영적 책임을 위해, 공통체적 책임을 가지고, 기도와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4. 새로운 은퇴 문화요사이 서점에 나가면 은퇴설계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대개가 금융계통에서 오래 활동하던 분들의 경험 있는 저서들이다. 목회자들의 은퇴설계를 위해서도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이 많이 있다.한국은퇴설계연구소 회장인 두진문 회장은, 2015년 ‘은퇴혁명’이란 책을 내놓았다. 그의 책 가운데서 “은퇴! 은퇴는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로 시작해서 은퇴 후 생존전략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제안은 “재무자산에서 비 재무자산으로”라는 대안을 말한다. 물론 그의 말은 재무자산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재무자산을 뛰어넘을 만한 자산이, 은퇴하는 모든 이들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자산을 포기하고, 은퇴 계획을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은퇴를 맞게 되는 이들에게, 중요한 위기관리의 지침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자산이란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유무형의 가치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현금, 부동산, 증권, 기계 설비 등이 있다. 또한 영업권, 특허권, 상표권, 저작권 등의 비 재무자산도 있다. 그 외에도 기술역량, 인력 관리, 기업 문화, 이미지 평판 등이다. 그러나 개인자산이란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금, 예금통장, 부동산, 자가용 등 개개인 에게도 보이는 자산이 있다.그러나, 개인의 신앙, 그의 인품, 경험, 연륜, 지식, 건강, 가족, 친구, 인간관계 등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우리 인생을 지키는데 정말 중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비 재무자산들이 수두룩하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중대한 것들을 놓치거나, 아주 쉽게 포기해버리고, 재무자산에만 몰입하거나, 편중된 은퇴계획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란 것이다.우리 모두가 “나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무슨 대안이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무심하게 놓치기 쉬운 부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진문 회장의 “은퇴 혁명”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고, 그 자신을 파산에서 재기로 일어나게 된 힘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풍족한 재산을 가지고 있고, 노후 연금이 든든하다 하더라도, 그 외에 가진 것이 없다면 당신은 가난뱅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두고 있으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어느 부자”(눅12:21)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노후를 설계하는 은퇴자들이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지혜라고 생각한다.재무자산만이 인생 행복의 전적인 해결사로 알고, 편중하고 있는 은퇴자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 재무자산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깊이 인식하고, 생각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노후의 경제적 안정과, 재무자산만을 기대하는 은퇴설계보다, 우리의 풍부한 인생 경험과, 비재무자산들을, 남은 생에 다시 한 번 우리 사회에 환원하자고 하는 Retire(타이어를 바꾸어 새출발하자)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두진문의 은퇴혁명은 한사람의 인생고백 같은 것이고, 신앙고백 같은 책이다. 은퇴 후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받아야 할 예우나, 대접을 생각하기보다, 생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자산을 개발하여, 생의 활력을 되찾아보자는 말이다. 아주 중요한 제안이라 생각한다.5. 목회자의 은퇴 문화“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삼상7:15) 했다.바라기는 목회자들의 노후 문제를 위해, 한국교회 전체가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고, 좀 더 새로운 대안을 위한 전문 인력을 투입해 연구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교단의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합리적인 제도 수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그러나 오늘 우리의 환경은, 더욱더 성직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떻게 성직을 지켜낼 것인가? 어떻게 한국교회의 영성을 지켜야 할 것인가? 더 시급한 과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나는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은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가 살던 시대라고 오늘 우리시대 같은 어려움과 애로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1. 그가 은퇴 후 자기 고향 라마에 내려가,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백성을 다스렸다 는 것이다(삼상7:16). 은퇴 후에도 영적 권위를 잃지 않았단 말이다.2. 사무엘은 성소에서 뿐 아니라, 은퇴 후에도 자기고향 라마에 내려가, 거기서도 제단을 쌓았다는 것이다.(삼상7:17) 나라와 민족 위해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다는 말이다.(삼상12:23)3. 더욱 중요한 일은 사무엘이 살아서 뿐 아니라, 그의 사후에도 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사무엘이 죽은 후에도 사울왕은 엔돌에 신접한 여인을 동원하면서까지, 죽은 사무엘 보기를 소원했다 는 것이 이것을 입증한다.(삼상28장)이미 죽은 사무엘 이었지만, 그의 사후에도 사울왕의 가슴 속에, 그리고 이스라엘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잊지 못할 스승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퇴임 후의 사무엘 !’ 그의 생애가 목회자의 은퇴 문화의 지침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목회자 은퇴문화의 현실’
-
-
학술/ 한복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10월 14일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에서 개최한 10월 월례회에서 김영애 선교사가 발제한 ‘암미선교회 사역 보고’를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1. 사역의 계기나는 21년 전인 1995년도에 서울 구로공단에서 노엘이라는 필리핀 형제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주민선교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오늘 복음주의협의회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표어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인데 당시 노엘이라는 한 사람 외국인근로자를 만난 것이 내게는 획기적인 사역의 전환 내지는 생애전환기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형제는 임금체불 문제로 여러 공장을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건강 문제로도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사역의 공백 기간을 갖고 있던 때여서 자연히 그 형제가 나의 모든 관심사가 되었다. 계속 일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해 결국 교통비조차 없어서 교회출석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위로차 남양주시 진접읍 소재의 노엘 공장을 찾아갔다. 그 때가 1995년 12월 초였는데 처음으로 공장지대를 방문하며 긴장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노엘을 위로하고 주변 교회에 연결해 주려는 의도로 그를 찾아갔을 때, 두 가지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엘이 있는 주변이 공장지대여서 외국인근로자들이 아주 많다는 것과, 또 하나는 외국인근로자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아무 교회도 그들에게 손길을 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주말에 가서 노엘과 주변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고,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라도 갖자고 제의해서 5명의 외국인들과 주일 오후에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첫 모임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된다. 성탄 의미의 노엘이란 이름을 가진 필리핀 형제를 따라가 성탄 이브에 모임을 가진 것이 암미선교회(이하 암미)의 시작이 된 것이다. 2. 사역의 내용 요즘은 이주노동자들의 근무조건이 많이 향상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인권의 사각지대여서 그들에게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 모른다. 선교라고 해도 그저 그들의 긴급한 현실적 문제를 돕는 일이 전부였다. 그런데 여성인 내가 3D 업종의 거친 남자들 속에서 그런 문제들을 대하는 일은 너무 버거웠다. 악덕 기업주들뿐 아니라 질이 나쁜 외국인들도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래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선교가 자리를 잡아가더니 지하 50평의 공간이 생겼고, 10년 후에는 선교센터도 짓게 되었다. 2012년부터는 이주노동자들 외에 다문화가정들이 생겨나면서 암미 다문화센터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주민들(이주노동자 및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면서 암미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주관의 사회통합 프로그램(KIIP) 일반 운영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KIIP는 주말에 50-60의 이주민들이 참가해 한글교육과 한국사회 적응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암미에서 선교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또 상담, 의료진료, 이,미용 봉사, 스포츠 행사 등을 통해 그들이 건강하게 한국 생활에 적응하도록 돕고 있다. 주일 예배는 11시이며 현재 필리핀 등 7개국 90여명의 다국적 이주민들이 예배와 국가별 소그룹을 통해 믿음을 키우고 있다. 필리핀과 남미(페루, 온두라스) 그룹은 자체적인 토요 기도모임도 있다.지난 20여년 동안 암미를 통해 130여명의 많은 다국적 외국인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선교가 지극히 어려운 이슬람권(이란, 방글라데시)과 힌두교권(인도) 출신이 15%가 된다. 사역자도 페루, 인도 등지에 5명이 나왔다. 페루의 한 자매는 속만 썩이는 남편을 버리고 한국에 돈을 벌러 왔다가 복음을 듣고 가정을 세우고자 다시 돌아가 남편을 주님께 인도했는데 그 남편이 목사가 된 일도 있다. 사실 나는 89년 초에 터키에 갔다가 선교의 도전을 받아서 이주민선교를 시작하고부터 이 선교를 통해 회교권 선교 열매를 하나라도 얻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사역을 통해 이란인들 6명과 방글라데시 한 명이 세례를 받았다.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어도 복음에 열린 마음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다. 선교사역에서 헌신된 사역자들이 나오는 것만큼이나 회교권선교의 열매들을 볼 수 있었음이 내게는 큰 기쁨이요 보람이었다. 여기서 이슬람권 선교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힘쓰고 있는 이슈 중에 이단문제, 동성애 문제와 더불어 이슬람확장 저지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고려해 볼 점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슬람권 선교가 어려워도 이주민들 가운데 이렇게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나서서 이슬람 확장저지 운동을 펼 경우, 그나마 이주민선교까지 위축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가 이슬람확장 저지를 계속 부르짖는다면 이슬람선교는 더 어려운 현지에서나 해야 하는 선교인지 묻고 싶다. 이슬람확장이 테러위험을 가져올 수 있어서 걱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부가 책임질 일이다. 교회로서의 첫째 사명은 선교적 사명인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오히려 이슬람에 대해 선교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열심히 연구하며 이슬람 선교의 기회를 포착해야 해야 옳다. 이런 점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이 문제를 연구주제로 삼아 발표를 해줄 것을 이 자리에서 제안하고 싶다. 나는 이주민선교를 하면서 오늘의 주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신 마25:40의 말씀을 항상 실감하고 있다. 아무리 인간이 죄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관심이 있으시다. 오래전 남양주시 진접읍 시골 동리에 나의 발걸음을 간섭하셔서 그곳의 곤고한 외국인 나그네들에게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닿도록 일하신 것을 보라! 암미선교의 규모가 별로 크지 않아도 중요한 선교의 인프라가 거기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사역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바, 하나님은 소외된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른다. 불법신분의 외국인들이 단속에 걸려 외국인보호소에 붙잡혀 들어가는 일들이 있어서 남양주에서 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얼마나 많이 갔는지 모른다. 최근에는 다문화가정 외국인 자매가 이혼을 당하고 방황하다가 유치장에 가고 감옥에 들어가는 일도 있어 돕고 있다. 그럴 때마다 갇힌 자를 돌보는 발걸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숙연해지고 한편으로 감사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인데 외국인 나그네들과 함께 살면서 결혼한 사람들 못지않게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 이 달 마지막 주간에 페루 귀국자 선교여행을 다녀 올 계획인데, 페루에는 10년간 사역을 같이 해서 꼭 아들과 같은 선교사가 있다. 이처럼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각국에 많이 있다. 이란의 한 형제는 “어머니, 이란에는 언제 오세요? 너무 보고 싶어요.”라고 또렷한 한국말로 카톡 문자를 보내오곤 한다. 암미의 특징 하나는 초교파 선교단체로 책임있는 후원처 없이 주로 협력선교로 동참하는 교회들와 개인 후원자, 그리고 소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 협력선교의 모델이 되고 있는 점이다. 이렇게 이주민선교를 통해 더욱 협력운동(연합운동)이 일어났으면 한다. 암미가 20주년을 마지한 지난해 12월 그동안 쓴 칼럼들을 책으로 펴냈다. ‘이주민선교 현장 리프트’라고 부제를 달았고 책 제목은 “말은 안통해도 선교는 통한다”이다. 이 책이 한국교회가 보다 이주민선교를 이해하고 이 선교를 위해 교회들이 협력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한다. 21년 전, 어떤 선교계획도 없이 단지 노엘이 처한 어려운 형편에 관심을 좀 가져준 것 뿐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계기로 이렇게 선교 역사를 일구어 내신 선교의 하나님이시다. 과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한 케이스라 하겠다.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한복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
학술/ 예배, 어떻게 개혁할까?
- 본고는 지난 9월 9일 화평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9월 월례회에서 지형은 목사가 발제한 ‘예배, 어떻게 개혁할까?’를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종교개혁은 무지와 오류로 왜곡된 중세의 예배를 참된 성경적 예배로 회복시키기 위한 예배 개혁으로부터 촉발되었다. 깔뱅은 중세 예배의 비성경적 요소들을 타파하고, 성경적 원리 위에서 단순하고 열정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기를 원했던 초대 교회의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개혁자들이 열망했던 성경적 예배의 이상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진지한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며 교통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자리에 임재하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더욱 견고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린다. 그와 같이 예배는 신인 사이의 상호적인 행위이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향적 행위들에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예배를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 행위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예배를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응답의 행위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이해 가운데서는 자연히 인간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설교자가 설교를 잘하고, 인도자가 은혜롭게 기도를 인도하고, 찬양대가 아름다운 찬양을 해야 은혜로운 예배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인간 편의 기능을 강조하면 결국 은혜로운 예배를 찾아 교회들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또한 교인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각종 문화적 도구들과 소통의 기법에 집중하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예배가 회중의 만족을 위한 영적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은 예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신적 행위들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예배를 통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예배의 매 순서를 통해 하늘의 입맞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가 예배 가운데 “오!” 라는 경이에 찬 탄성을 잃어버린 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오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 아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를 놓쳐버린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신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예배의 몇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자. (1) 설교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회중에게 주께서는 말씀으로 은혜와 복을 주신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인간 설교자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그 이면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설교자(The Preacher)는 하나님이시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것은 설교 중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 선지자와 사도들을 감동시켜 말씀을 선포케 하셨던 성령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도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설교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을 따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계시가 선포된 계시로서 우리를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으로 세움 받은 설교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엎드려야 한다. 설교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왕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믿음이요 겸비함이다(고전 2:3 참조). 만약 설교자가 들은 것이 없이 들은 체 하거나, 사람의 칭찬을 위해 청중에게 아첨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메시지를 이용하거나, 남의 메시지를 표절하는 부정직을 남발한다면 그는 왕의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한국 교회 강단의 회복은 설교자들이 설교사역의 고귀함과 영광에 대해 얼마나 자각하느냐에 달려있다. 과거 위대한 부흥의 시대보다 오늘날의 설교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된 것은 설교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뒤쳐져서가 아니라 설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확신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례성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성례는 은혜계약의 거룩한 표와 인침으로서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라고 규정한다. 세례는 우리의 죄 사함과 거듭남을 확증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며, 성만찬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증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다. 표(signs)는 상징(symbol)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개념이다. 표는 영적인 실체가 실제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을 뿌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구원의 상징을 받는 것이 아니고 표를 받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인 쳐주시는 일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다.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상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합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성례를 이러한 신적인 ‘표와 인침’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인간 중심의 행위로 이해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예를 들면 세례의 핵심을 참된 교인으로 살겠다는 수세자의 결단과 서약에 둔다. 그래서 세례 받을 수 있는 자격 여부가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수세자를 교육시키는 일에 열중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없는 교인들은 세례 받기를 주저하는 현상마저 나타난다.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세례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 외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세자를 교육하는 것은 세례 후에 풍성하고 복된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세례를 위한 자격 기준은 아니다. 세례는 값없이 구원을 인 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세례를 하나님의 거룩한 표와 인침으로 이해하면 세례 받기를 열망하게 될 뿐 아니라 세례식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놀랍고 은혜로운 의식이 된다. 한국 교회는 성만찬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상징적 의식 정도로 생각한다. 성만찬이 상징이 되면 그것을 자주 거행할 필요가 없다. 너무 자주 거행하면 면역력이 생겨서 상징의 약효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떡과 포도주는 고난을 묵상하는데 효과적인 매개물은 아니다. 떡과 포도주보다는 차라리 대못이나 가시 한 토막을 나누어주는 것이 고난을 연상하는데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가 내 속에 녹아들어 나와 일체가 되듯이 주님과 우리가 뗄 수 없는 생명적 연합을 이루고 있음을 인 쳐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 사실을 믿으면 성만찬은 가장 은혜롭고 감격스러운 의식이 된다. 매 주일 성만찬 받기를 열망하게 된다. 설교가 없는 예배를 상상할 수 없듯이 성만찬이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3) 입례와 축도설교 전의 여러 가지 입례의식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가며 행하던 의식을 본받은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예배를 위해 하늘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입례의식의 여러 항목들은 단편적인 별개의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가진 연결된 순서들이 되어야한다. 즉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회중의 기쁨과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축도는 예배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 편에서 올려드리는 기도나 기원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와 같은 축도의 본질적 성격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축도’라는 용어보다 ‘복의 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눈을 떠서 축도자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감격스럽게 받아야한다. 축도는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끝말도 당연히 “있을지어다.”가 되어야한다. 맺는 말근래에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간이 주인이 된 예배,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엔터테인먼트 예배,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 예배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고 있다. 그 모든 문제의 뿌리는 예배를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인 행위로만 생각하는 목회자들의 잘못된 예배 신학에 있다. 예배를 인간이 주도하는 행위로 이해하면 예배가 기능화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예배를 찾아 사람들이 쏠리게 될 것이며, 교회 성장에 명운을 건 목회자들은 성장에 득이 되는 예배를 기안하고 싶은 유혹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회중 간에 교통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이라는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해야한다.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예배의 매 순서 가운데 친히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회중이 그 같은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거룩하신 임재 앞에 서는 영광을 갈망할 때 우리의 예배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회복은 구경하시는 하나님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의 전환에 달려 있다.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예배, 어떻게 개혁할까?
-
-
학술/ 무섭게 중심으로 그리고 외연(外延)을
- 본고는 지난 9월 9일 화평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9월 월례회에서 지형은 목사가 발제한 ‘무섭게 중심으로 그리고 외연(外延)을’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개혁은 창조, 타락, 구원의 흐름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다. 현재의 한국 교회가 병들고 타락해 있어서 개혁이 필요한 것이 분명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개혁은 교회의 근본 구조에 뗄 수 없이 연관돼 있다. 개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돼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근본 과제다. 그래서 교회는 본디 시작될 때부터 늘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다. 그리고 개혁의 기준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 곧 기록된 말씀이다.1. 제도의 개혁한국 교회가 성서적인 교회로 거듭나려면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터하여 끊임없이 제도의 개혁에 애를 써야 한다. (1) 교회연합 기구들이 하나의 조직이 되도록 또 더 넓은 범위에서 한 지붕을 씌우도록 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하나의 기구를 만드는 일에 현실적인 제반 여건을 세심하게 살펴서 결과를 끌어내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이로써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고 영향력도 커질 테다. (2) 각 교단 신학교육 기관의 입학생과 졸업생 수를 교단 내의 일할 자리와 연관하여 조절해야 한다. 목회자를 길러내는 질적인 수준을 대폭 높여야 한다. 기독교 안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성직의 지도력’을 갖춘 목회자를 길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 신학교육 기관이 자본주의적 대학 경영의 논리를 탈피하고 혁신적으로 시각의 전환을 결단해야 한다. (3) 총회장(또는 감독회장)을 중심한 개 교단의 선거 및 치리 구조가 세속 정치와 거의 다를 바 없이 돈과 파벌 싸움으로 얼룩진 현실을 어떻게든 개혁해야 한다. 제비뽑기 선거, 총회장의 임기를 1년보다 길게 하는 것, 총회장, 노회장, 지방회장 등을 지낸 후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줄이는 것 등 여러 방안을 검토하여 권력 구조를 바꿔야 한다. (4) 평신도 지도력 특히 장로 직이 계급의식에 물들어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몇 가지 큰 문제 중 하나다. 이런 상황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계급과 권력 의식을 없애는 방향으로 교단법 개정을 치열하게 연구하여 실행해야 한다. (5) 지역 교회에서부터 교단의 총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기독교 관련 모든 기구에까지 돈의 사용에서 적어도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관례’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게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이론’보다 더 높은 기준을 정하고 시행하여 돈 문제에 대하여 거룩한 청렴성을 가져야 한다. 이로써 크든 작든 눈먼 공금을 노리는 정치꾼들이 교회 및 교계 활동에서 배제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2. 심령의 개혁현실적으로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면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이 작동되면서 발생하는 심령의 변화가 절실하다. 일반적인 용어로는 의식의 개혁이다. 특히 이 점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본질과 연결돼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섭리가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뜻을 보이셨다.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우리가 사는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두 가지 방식으로 계시되었다. 하나가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 다른 하나가 특별계시다. 특별계시의 중심이 기록된 성서의 말씀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말씀으로써 지속적으로 보이셨다. 크게 보면 (1)모세 이전까지는 구술의 말씀으로, (2)모세 때부터는 기록된 말씀으로, (3)그리고 존재하는 시간의 흐름 한가운데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으신 성육신의 말씀으로, (4)마지막으로는 성령 하나님이 사람 안에 사시면서 기록된 말씀의 성취를 이끌어 가시는 내주(內住)의 말씀으로다.창세 이래의 하나님 신앙을 잇는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말씀으로 본질을 유지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맺으시는 말씀의 약속 곧 언약(言約)이 성경 전체를 꿰뚫는 굵은 선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맺은 언약,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시내산 언약, 모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갱신된 신명기 언약,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전체 이스라엘을 불러놓고 맺은 세겜 언약, 사무엘 시대의 미스바 언약, 포로기 이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받들어 이끈 성전 봉헌식 때의 언약, 예레미야가 예언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써 완성되는 최종적인 언약.말씀이 삶에서 작동함으로써 발생하고 진행되는 개혁은 교회 역사적으로도 아주 분명하다.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시작인 사막교부들의 간절한 염원은 ‘한 치도 어김없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다. 중세 초기의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의 중심이 성경 말씀이었고 중세 한가운데서 일어난 페트루스 발두스의 말씀 운동과 귀고2세로 대표되는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말씀묵상)가 그러했다. 14, 15세기의 존 위클리프와 요한 후스,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쯔빙글리와 존 칼빈 등의 16세기 종교개혁, 한국 땅의 초기 선교 등 기독교의 개혁 운동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심장이었다.3. 무섭게 중심으로 그래서 외연(外延)을제도적인 개혁이 현실적으로는 먼저일 수도 있겠다. 교계 현실에서 이 면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말고 여러 모양으로 애써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혁에서 중심은 늘 심령 곧 속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터를 바꾸는 일 말이다. 이 일에서 말씀이 중심이다. 여기에 대한 집중력이 무섭게 강화돼야 한다. 강조해서 표현해 본다면, 현재 한국 교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종류의 말씀 운동들보다 순도(純度)와 강도(剛度)가 말할 수 없이 높아야 한다.말씀이 삶이 되는 운동은 종교성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며, 어느 출판사나 어느 집단의 자본주의적 홍보 전략이 아니다. 어느 한 교회의 목회적인 성취를 위한 것도 아니고 어느 교단의 교세 확장이나 교계 단체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개혁은 성령 하나님이 주도하면서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이 주연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조금이라도 불순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깊이 살펴 회개해야 한다.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거룩한 운동은 해보다가 안 되면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할 일이 절대로 아니다. 사람이 보는 시각에서 열매가 없더라도 해야 한다. 사회적인 성취가 없어도 계속돼야 한다. 효율성과 성과로 따질 일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개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은 삶과 죽음을 바쳐 오로지 순종할 따름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나약한 생각이 있다면 처절하게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이 무서운 중심(中心)으로부터 비로소 외연(外延)의 힘이 생길 것이다. 한 10년은 잠잠하게 중심으로 들어가야 할 테다. 물론 위에서도 말한 대로 제도의 개혁을 늘 살피면서 말이다.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무섭게 중심으로 그리고 외연(外延)을
-
-
학술/ 한목협 제34차 열린대화마당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2)
- 본고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김경원 목사)가 지난 9월 6일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에서 연 제34차 열린대화마당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에서 이세령 목사가 발제한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을 일부 발췌한 글이다. <편집자 주> 8. 교회 일치,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이명증은 공교회성을 나타내는 작은 실체이다. 주님의 교회가 서로 서로 연결되었음을 확인하는 표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무시하고 기형적으로 자라가는 대형교회들은 복음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를 경멸한 것이다. 이런 형태의 교회들은 개교회주의라는 고질적 질병 속에 있게 된다. 이런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과 하나가 되고 배려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질적인 지원을 말하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 물질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 참된 배려는 함께 서는 성도들이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성장이 목표가 된 교회는 개교회주의로 가고, 이런 교회들은 하나가 되기가 어렵다. 서로 자신의 성공과 성장을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공한 교회 목사들의 명예 욕심과 교단들의 집단적 권리주장 때문에 일치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 자신이 교계에서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은 성장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대형 교단들은 자신들의 힘을 포기할 줄 모른다. 개교회주의적인 현상은 섬김마저도 개교회적인 방식으로 진행한다. 천주교회의 방식과는 아주 대조된다. 절대적으로 많은 섬김의 사역을 함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들에게서는 공교회성이 결여된 형태의 모습을 본다. 교회들이 운영하는 복지 시설들이 건강하게 운영되는가를 질문할 때 긍정적인 답이 어렵다. 한국교회가 공교회성을 회복하고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길은 이명증을 주고받는 가장 기본적인 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복음을 가진 교회로 여기면서 협력해야 한다. 특정 교회가 성장을 배경으로 교회 연합 기구에서 실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결코 연합운동은 생명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교회연합운동이 마치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의 놀이터처럼 여겨지는 경우는 없는가? 공교회의 근거인 복음에 충실함이 교회적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9.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의와 공평의 복음: 선한 세상에 대한 소망성공과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는 종말적인 소망을 바라보면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의 삶을 바라보기도, 보여주기도 어렵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로 창조의 회복이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의와 공평의 복음을 들고 선한 세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지향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경제적 양극화, 인구 절벽, 남북의 갈등과 함께 이념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목회자들의 생활비도 심각한 불균형을 보인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최저 임금 기준도 보장받지 못하는 목회자, 교회의 사역자, 선교단체의 간사들이 적지 않다. 의와 공평의 복음이 삶의 다양한 자리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10. 가정에서 복음을 담아내야 한다: 가정 기도시간이 필요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신실한 성도들의 식구들은 주일새벽이나 아침 집에서 헤어진 후에는 밤늦게 각자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주일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정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신앙교육은 철저하게 교회의 몫이었다. 물론 불신가정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관계로 교회의 프로그램이 가정 중심적일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어쨌거나 예배의 날이 안식의 날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주일 밤 예배가 사라지고 주일 오후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숫자가 주일 낮 참석자의 20~30%에 그치는 현실은 가정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할 것을 말해준다. 가정이 복음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우리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가정의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은 형국이다. 오늘의 교회는 가정에서 식구들이 복음으로 결속되고 유지되게 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 있는가? 성도들이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하도록 권고 받고 있지만 가정 기도회를 통해서 식구들 간에 사랑과 친밀함을 복음으로 확인하도록 인도하는 일은 썩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정의 식구들이 각자의 삶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서로 격려하는 기도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바쁜 도시 문화 속에서 교회당 중심의 신앙생활도 약해지고 있는데, 가정에서 기도로 격려하는 일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앞선 세대가 가졌던 가정예배 문화를 회복하여야 한다.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서로 배우고 믿음의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면서 의와 공평의 복음을 담아내는 못자리 사역을 복원하여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길이다.11. 인구 절벽 상황: 낙태를 허용한 죄부터 회개하여야 한다인구 절벽 앞에 서게 된 한국사회, 그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교회 모두 다음세대 문제로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한마디로 다음 세대가 사라져가고 있다.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들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다. 농촌교회의 주일학교 붕괴현상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도시교회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왜 그런가? 산업 발전기에 정부 정책에 따라서 산아 제한에 기꺼이 동조하면서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던 노력의 결과이다. 물질적 성공신화에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다. 자녀를 얻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이다. 생명의 복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런데 이런 참된 복을 예사로 여기고 물질적인 복만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추구한 목사들과 교회의 잘못이 오늘 이런 결과를 빚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갱신은 생명을 경시한 것을 회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영아살해 행위인 낙태를 방치하고 생명의 복보다 물질적인 축복을 더 사랑한 일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 양육의 수고를 회피할 목적으로 저출산 사태가 확산되는 오늘의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따라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번성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어 다시 한 번 생명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교회는 개인의 모임이라기보다는 가정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초대교회의 중요 메시지였다. 가정에서 예배와 기본적인 양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를 위한 교육에만 관심을 보일 것이 아니라 복음의 용사들이 되도록 양육해야 한다. 의와 공평으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로 공부하고 일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 12. 성도들의 거룩성을 높여야 한다교회는 물질적 성공의 복음에 경도되면서 직분자를 세울 때도 소위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서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가르치고 설교해야 진정한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공평의 나라이다. 거룩한 나라이다. 힘과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의로움과 공평이 있는 성도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이를 방해하는 죄의 세력들과 싸우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실패하였다.오늘날 벌어지는 사회적 비리와 부정의 현장에는 교회의 장로들이 빠짐없이 함께 거론된다. 방산 비리, 성완종 리스트, 롯데 비자금 등 곳곳마다 신자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복음은 거룩한 삶, 의로운 삶,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한 동력이어야 한다. 이웃의 삶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성공만 추구하는 태도는 복음과 상관없는 일이다. 정직하게 세금을 납부하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불의와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도록 싸우는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다. 복음으로 불의한 사회를 갱신하는 일이 종교개혁 500주년에 교회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13. 교회 내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는 양극화로 요약된다. 부의 편중,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학벌의 차이가 소득의 차별을 심화시키는 현실, 대학 입학조차 부모의 소득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구조는 사회를 양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계층 간 이동 수단 역할을 해왔던 교육조차 기득권 세력이 독점하는, 닫힌 사회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들 간에도 사례비의 차이는 엄청나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최저 생계비도 보장받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의 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교회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목회자의 생활비가 평균케 하시는 복음(고후8:1-15)을 따라 주어져야 하지 않는가? 장로교 기장과 통합총회처럼 점진적으로 목회자의 최저 생계비를 총회적으로 보장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
- 해설/기획
- 학술
-
학술/ 한목협 제34차 열린대화마당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