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인간, 역사, 사회를 미래로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하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라 한다. 이는 곧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론으로 신학의 핵심이요 모든 세계관, 인간관을 일구어내는 신앙과 삶의 핵심임을 알게 한다.
몰트만은 기독론을 '위로부터' 시작하며 그런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성육신과 부활에서 제시한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존재를 '위로부터', 인간의 인식을 '아래로부터' 분류하고 이 두 내용과 방향은 상호 깊이 관계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독론으로 칼 바르트가 로고스의 성육신으로부터 기독론을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기독론의 주체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기독론을 논하는 것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방법론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바르트는 성육신은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신적 행위에 대한 개념적 해석으로서의 임마누엘은 성육신의 모든 내용과 의미와 방향을 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 라는 땅에 들리신다. 그 여리고 라는 도시는 예루살렘에서 약 80리 정도 떨어진 요단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고도(古都)로서 부강한 도시로 교통의 요지이며 요단 동편 지방과 통하는 관문으로 북으로는 다메섹 두로와 시돈이 연결하고 서편으로는 가이샤라와 욥바로 통하는 하나의 관문이고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연결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 여기에 헤롯 대왕이 그 아들과 함께 여리고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도시 계획을 세워 겨울궁전과 체육관, 극장을 지어 문화적인 삶을 구축하는 그런 도시계획에 의한 발전한 도시였다. 이 도시에서 권력과 금권을 장악한 삭개오는 당시 많은 민중으로부터의 냉혹한 비판의 대상인 화제의 인물이었다. 여기에 삭개오라는 그의 이름의 뜻이 '순결하다', '의롭다'라는 뜻과는 달리 세상이 말하는 죄 된 삶의 대상으로 그는 세리장으로 세금 징수원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권한으로서 여리고의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는 세리장으로 권력을 누리는 입장이어서 당시 권력과 금권의 실세인 것을 알게 한다. 우리는 삭개오가 돈과 권력을 가진 실세로서 세상의 것을 다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사실로 유대인으로써 그리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든 중 예수께서 이 곳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를 보고자 하였으나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아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게 된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에는 그 동안 많은 의구심과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 양심에 괴로웠던 그의 마음의 갈등은 예수님의 삶의 길, 삶의 진리,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으로 예수만남을 갈구했던 참(站)이었다. 이 관심이 예수님에 주목하게 되었던 정황을 알게 된다. 돌무화과나무에 오르는 그의 마음에는 사회적인 체면이나 자기의 생활태도를 잊은 채 예수님을 우러러 보는 가운데서 예수님과 눈이 마주칠 때 그에게 '삭개오씨 어서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 집에서 묶어야 하겠소" 하신다. 이 말씀에서 그 많은 관중들 속에서 자기 이름인 '삭개오'라는 이름을 알고 부르신다는 것은 너무 갑자기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에 것 잡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항상 마음에 가책(呵責)을 갖는 그를 비소(鼻笑)로 양심에 찔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얼른 낮은 아래의 자리로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님을 맞는다. 마음의 본향인 자리인 집에서 하루 밤의 역사는 절호의 기회를 얻는 뜻 밖의 횡재이기도 한다. 이 만남은 높고 낮음의 자리가 화해로 바꾸어지는 모양임을 알게 한다. 또한 이 예수님과 죄인 세리와의 만남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인간의 '소유'에 대한 바른 이해를 '무소유'로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전한 바는 세상의 삶에서 가진 자의 소유에 대한 세 가지 원리를 터득하게 한다(마6:19-34).
첫 번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창조자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물질을 다루기는 하지만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이 세상 것을 '다 내 것이다'로 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신탁하심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람은 물질보다 귀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며 재물을 모으면 그것은 불의한 재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 번째로 재물은 종속적인 선이지 최상의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 쓸 때 나쁜 것이요 남을 위해 쓰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재물을 가진 자는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는 자기 뜻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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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무화과나무에서 내려 온 삭개오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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