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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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쯤인 지난 2월 중에 독일 나치 주도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관련된 90대 노옹(老翁)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을 박해한 일로 2월 11일 법정에 출두하게 된 94세의 라인홀드 하닝이란 전직 나치 친위대원이었고, 또 한 사람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뒤 이스라엘로 건너가 살다가 2월 19일 향년 93세로 생을 마감한 사무엘 빌렌베르크란 이름의 유대인 조각가였다. 
폴란드 출신의 빌렌베르크(S. Willenberg)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갓 스물의 나이로 두 명의 누이를 포함해 총 6천여 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나치의 점령지, 곧 ‘죽음의 수용소’ 트레블링카(Treblinka)로 끌려와 수용되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당시 악명 높던, 같은 폴란드 내 아우슈비츠 수용소 다음으로 악명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다른 수용소가 강제노역 후 병약해져 쓸모없게 돼버린 유대인들을 폐기처분했던 경우와는 달리, 이 수용소는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즉각 가스실로 보내 희생시켰다. 이 수용소에서 87만5천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함으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110만여 명) 다음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악랄한 곳으로 알려졌다.
당시 스무 살의 청년이었던 빌렌베르크는 어떤 이웃 사람이, 벽돌공이라고 자신을 위장하면 생존할 수도 있다고 하여 경비병을 속여 운좋게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고 노역자로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943년 8월 무기를 탈취한 수백 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봉기를 일으켜, 또 운 좋게 그곳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무장봉기에 가담한 수백 명의 수감자들 중 겨우 67명만이 살아남았으니 그가 어떻든 행운아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후 그는 일단 바르샤바로 잠입했다가, 종전 뒤 이스라엘로 건너가서 측량사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다가, 후년에 자신의 수난의 체험을 표출하는 조각가로 변신하였다. 그의 조각 작품들 중 이름난 것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만행을 고발하는 <가스실로 들어가는 아들의 신발을 벗겨주는 아버지>란 제목의 청동 조각상이다. 이는 세계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준 생동감 넘치는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또 한 사람, 라인홀드 하닝(R. Hanning)은 21세 때인 1943년 초부터 1944년 중반기까지 나치 친위대(SS)의 감시요원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복무했다. 이 일로 그는 90대 노년기에 이르러 데트몰드 시에 차려진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최근 독일 사법 당국은 90대 노령에 접어든 나치 친위대원 네(4) 명에 대한 공판을 열기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날 하닝이 첫 번째로 심판대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1940년대에 최소 17만여 명의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된 일에 대한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되었다.
검찰은 하닝을 아우슈비츠의 살인 기계(murder machine)라고 부르며 그를 기소하였다. 2011년 나치 부역자 존 뎀잔추크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었는데, 당시 판사는 점령지 폴란드의 나치 수용소 근무자로서의 활동만으로도 학살 공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요지로 판결한 바 있었으며, 지난해(2015) 아우슈비츠의 전(前) 회계장부 관리인이었던 오스카 그뢰닝(94세)에게도 징역 4년형이 언도된 것에 비추어볼 때 하닝의 경우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건을 담당한 도르트문트 검찰은 당시 하닝이 수용소 내의 수용자들 중에서 강제노역이 가능한 인원과 가스실로 보내야 할 인원을 구별해 내는 일과,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해 주기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총살 및 수용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아사(굶겨 죽이기) 작전을 그가 방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량 학살을 도왔다고 지적하였다.
그 재판정에는 다국적 고소인단(38명)의 일원인 레온 슈바르츠바움(94세)이란 베를린 거주의 노인도 증인으로 참석했는데,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발가벗겨져 가스실로 향하던, 트럭에 탄 수용자들의 비명(悲鳴)을 떠올리며 당시를 ‘생지옥(living hell)'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시체를 태우는 곳에서는 굴뚝 연기가 그칠 날이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2월 11일에 행해진 나치 부역자 라인홀드 하닝에 대한 공판진행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그 일주일쯤 뒤인 2월 19일 유대인 조각가 사무엘 빌렌베르크는 평안한 영면(永眠)에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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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홀로코스트, 그 명과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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