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사는 유지로 만든 양초가 희미하게 비추고 있고, 숨 막힐 듯 무거운 냄새로 가득한, 길고 좁고 후텁지근한 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내가 이곳에서 10여년을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평상 위 나의 몫이란 세 장의 판자뿐, 방안의 평상에만도 30명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겨울에는 일찍 빗장을 지르는 까닭에 모두들 잠들 때까지 네 시간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웃음, 욕설, 쇠사슬 소리, 악취와 그을음, 삭발한 머리들과 낙인찍힌 얼굴들, 남루한 의복, 이 모든 것들이 욕설과 혹평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료중의 한 사람(귀족출신)이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감옥 안에서 쇠해가는 것을 공포를 느끼면서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렇게는 되지 않아야지. 나는 살고 싶다. 그러니 살아 보일테다 하고 노역에서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감옥에서 그 저주스러운 삶의 불편들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육체의 힘이 정신력에 못지않게 필요했다.” 그렇게 주인공은 어느 듯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어떻게 10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익숙해진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익숙해진다는 사실은 살아있다는 실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익숙해지려 애쓰다 익숙해져 버리고 나면 익숙해진 환경이 참을 수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역설적 구도이고 보면, 인간은 다시 그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
“죽음의 집”에서의 처음 3일간, 주인공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나는 감옥에 들어왔어! 나는 감옥에 들어왔어! 여기가 나의 삶의 터전이야...진정 인간이란 그 때 그때 어울리는 삶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어떤 일에도 익숙해지는 생물이다. “
주인공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완전히 익숙해진 상태를 꿈꾼다. 이리하여 유형수는 어느덧 “죽음의 집”의 삶에 익숙해져서 그 형기가 십년이 되건 이십년이 되건 결코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 그가 거기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익숙해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이번에는 “삶”의 충실감을 잃어버리게 되는 법. 나날의 단조로운 반복이 인간의 영혼을 침식하기 때문이다. 살고 있다는 안도가 이제는 살아있다는 실감을 앗아가고 있지 않는가. 주인공은 정신적 부식과 새로운 전투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희망을 불태워 그 권태를 이겨나가려 안간힘 했다.
“나는 감옥생활 첫 날부터 벌써 자유를 공상하기 시작했다. 나의 옥중생활이 언제 끝나게 될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었다 그일 말고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인공만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유형수들이 그런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바보스런 짓거리로 비칠 수도 있으리라. 누구라도 곰곰이 생각하노라면 그건 바보스런 짓거리라는 결론을 얻게 될 일. 그러나 그 바보스러운 생각이야말로 그의 영혼을 부패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유형수들은 죽음의 집에서의 삶에 익숙해짐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한편 그 삶을 부정함으로서도 살아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훗날 “안심과 불안의 이상한 변증법”이라 술회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의 일기>에서 “감옥은 길고 긴 학교였다.”하고 술회했다. 그에게 있어 옴스크감옥에서의 삶은 생각하기도 싫은 그래서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혐오스럽기만 한 그런 체험만은 아니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인간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지긋지긋한 강제공동생활과 귀족출신인 자신이 평민죄수들의 적의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었다. 같은 감옥에서 거의 폐인이 되어버린 귀족친구 두루프와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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