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4회 총회장 김필수(金弼秀) 목사
2016/02/04 14:5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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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호남지역 교회를 부흥시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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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성 출신
김필수(金弼秀 1872.7~1948.10.30) 목사는 1872년 7월 경기도 안성군(安城) 삼죽면 죽사리에서 출생하였다. 윤택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청운의 꿈을 품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의 지도자였던 박영효(朴泳孝) 등과의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일제 당국의 눈을 피해 일본 고베(神戶)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동안 몸을 피했다가 조선으로 다시 귀국한 뒤에는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W.D. Reydds, 1867~1951) 목사의 어학선생이 되어 전주에 머물렀다.
이후 상경하여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창립될 때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12명의 창립이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다시 전주로 내려가 완산교회(完山敎會)의 장로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2회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는 진안(鎭安), 무주(武朱), 장수(長水)를 비롯, 군산(群山)으로 개척 전도사로 파송된 후 군산 개복동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그가 전주에 있을 때는 전주서문교회를 시무하였는데, 서문교회 재임시 이눌서(李訥瑞, W.D. Reynolds) 선교사 구역인 완주(完州), 임실, 김제지방 일부를 맡아 조사(助師)로서 교회를 돕기도 했다(기독교대박과사전 제3권, 1982, 기독교문사 p.308).

‘기독신보’ 창간 편집인
1915년 장로교, 감리교 두 교파가 연합하여 <기독신보>를 창간할 때에는 이 신문의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 YMCA의 일요강사로 봉사하기도 하며, 사경회(査經會)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조직과 동시에 제1회, 제2회, 제3회까지는 선교사들이 총회장을 맡아 이끌어 갔다. 제4회 총회가 1915년 9월 4일부터 8일까지 전주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총대는 목사 60명, 장로 60명 동수였으며, 선교사 50명으로 170명의 총대들이 참석해 배유지 총회장의 사회로 제4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그동안 부총회장으로 섬김 바 있었던 제1회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들 중 길선주,  한석진, 양전백 목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회장이 선출되지 아니하고, 예상 외의 제2회 졸업생이었던 김필수 목사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총회장으로 선출 되었다.
1911년에는 군산에서 개복동교회와 구암교회의 청빙을 받아 두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기도 한 김필수 목사가 전라노회의 총대로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총회장 선거를 한 총대 자신들도 놀랐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그의 역할과 인물됨이 어떠했던가를 짐작케 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다고 했던가?(눅 13:30)
이미 부회장을 역임한 선배목사들이 있었지만 그가 총회장에 선출된 것은 그가 충분히 검증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필수 목사는 제1회 총회 때는 부서기로, 제2회와 제3회 총회 때는 서기(書記)로 각기 임원직을 경험했던 관계로 회의(會議)를 잘 진행하였던 것이다(총회를 섬긴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27).

YMCA를 중심한 민족운동 지도자
김필수 목사는 1918년 3월 26일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경성YMCA회관에서 조직되었는데, 이때도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어 조선교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선봉에 서서 지도자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1919년 3월 1일 민족독립만세운동 당시에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YMCA 청년지도자로써 언론계와 강연 등으로 민족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1920년에는 YMCA 전국순회 전도단을 조직해 활동을 했는데 그 단장으로써 크게 이받이 하였다. 또한 금주(禁酒), 금연(禁煙), 절제(節制), 물산장려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칠 때는 주강사로써 맹활약을 하였다.
아울러 YMCA에서 기관지 <靑年>지를 발행했는데, 그는 이 청년지의 주필로써 맹활약을 하기도 하면서 민족자립 갱생의 정신과 독립을 위해 뭉쳐야 산다고 외쳤다. 일제 말기에는 모든 현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남은 생을 추수리며 살았다.

당시에도 총회 공금 유용사건 있어
그가 재임했던 제4회 총회에서는 오늘날 동성애와 비슷한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총회는 ① 교회 내에서는 의동생이나 수양아들 혹은 수양동생같은 비도덕적 행위를 금지하기로 의결 하였으며, ② 당시 전도국 회계로 있던 박치록 장로가 공금 2,500원을 유용한 사건이 터졌는데, 당시 100여 두락에 이르는 답토(畓土)로 대신해 상환금을 받아낸 것,  ③ 개교회에서 장로 선출시에는 회원 3분의 2 이상을 득표해야 된다고 결의한 것이 장로회 헌법에 삽입함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④ 재임시 보고에 의하면 당시 서간도에 사는 조선인 10만명, 교회개척 53개 교회, 교인수 2,739명이라고 보고 되었음. 북간도 지방의 조선인은 14만명 교회개척 14개처, 교인수 5,000명이라는 보고를 볼 때 초기 조선교회의 전도열기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라 생각된다.  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교단지였던 <예수교회보>를 재정난으로 당분간 폐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편 일제 당국도 해마다 미션계 학교가 왕성해지자 이를 제제하기 위한 조치로 예배(chaple)와 성경(Bible)교육을 10년 후인 1925년부터는 폐지하라는 총독부의 결정이 시달(示達)되었다. 제4회 총회에서 처음으로 주일학교(主日學校)를 소아반(1~13세), 유년반(14~20세), 장년반(20세이상)으로 분류 운영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비교적으로 교세가 약한 호남지방에서 총회를 개최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호남지방 전체 교회가 총회를 계기로 분발해서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총회의 배려였다.
그의 말년에는 사역하던 군산지방의 교회를 사임하고 곧 상경하여 <기독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문서선교에 힘썼고, 친히 동 신문사의 주필로서 활동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가 고종명이란 축복 속에 살다가 노환으로 1948년 10월 30일 자택에서 가족들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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