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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위 먹은 천사론
    라파엘로(1483-1520)의 걸작 <시스티나의 성모>를 감상하노라면, 화폭 아래쪽에서 당돌한 모습으로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아기천사들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이미 광고로 우리에게 친숙해지긴 했지만, 당장이라도 ‘포탈’에 <시스티나의 성모>를 입력해보시라. 녹색 커튼이 열리면서, 성 식스투스와 성 바르바라 사이, 성모자가 구름을 헤치고 나타나 있는 광경이 퍽이나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성모자를 쳐다보고 있는 아기천사의 모습에 멈추어지지 않을 수 없다. 난간에 손을 얹고 있는 쪽이나, 턱을 고인 채로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쪽이나, 곧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함부로 화살을 겨냥하는 큐피드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는 아기천사의 장난기를 보며, 천사들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걱정이 들긴 하지만. 잠시 눈을 그림 위쪽으로 돌려보시라. 구름과 범벅이 되어있는 진짜(?)천사들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을 터이니. 천사는 흔했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기 까지 서양의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천사가 없는 작품을 골라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 천사들이 모두 어디로 가버렸느냐며 탄식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마도 천사들이 화면을 벗어나 우리들 주변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망령된 생각을 해본다. “천사는 육체를 지녔다.” “아니다, 영적 존재다.”하는 주장들 사이에서 천사는 흔들리며 스스로의 역사를 엮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시스티나의 성모> 아래쪽에서 장난기를 뿜고 있는 아기천사들처럼, 현실적으로 우리들 곁에 실재하는 천사들은, 신학적인 논의들과는 관계없이,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한숨을 곱씹기는 해도, “천사는 죽었다.”하고 단언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릴케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는 천사들이 날개를 단 귀여운 어린이가 아니라, 중년의 남성들로 성장하여 등장하고 있다. 혹 <시스티나의 성모> 하단에서 눈망울을 부라리고 있던 아기천사들이 타락해서 이 땅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약간의 배려를 더해서 “타락”이란 말 대신 “정착” 혹은 “귀화”라는 표현을 써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영화에서 천사 다미엘이 스스로 이 땅에 귀화할 것을 결단한다. 밀턴의 <실낙원>의 루시퍼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다미엘은 영웅을 흉내내려하지 않는다. 그가 지상으로 떨어질 때, 천상에서는 필수품이었던 갑주가 함께 떨어진다. 다미엘은 그것을 고물상에 팔아 체크 무늬 점퍼를 사서 입는다. 떨어지며 입은 머리 상처의 붉은 피조차도 기쁨의 자료가 되어준다. 색이 없는 세계를 살아왔던 천사에게 선명한 원색이 갖는 의미를...지상에는 귀화해서 인간이 된 천사들이 꽤나 많단다. 그 중의 하나가 <형사 콜롬보>로 우리에게 친숙한 ‘피터 포크’. 이미 30년 전에 뉴욕에 정착했단다. 자신의 욕망을 동료 천사들에게 고백한 다미엘은 서커스에서 만난 마리온의 뒤를 좇아 그녀의 트레일러로 들어간다. 그녀는 천사를 볼 수 없지만, 천사는 그녀의 마음의 소리마저 들을 수 있다. 고독한 그녀가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이미 마리온은 다미엘이 불어넣어준 영을 지니게 된 것일까... 천사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거나 고무할 수는 있다 하지 않는가. “사랑하고 싶다!”하고 그녀가 두 번 중얼거리자 화면은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변환한다. 영화의 중반, 삶에 지친 젊은이가 높은 빌딩 옥상에서 자살하려한다. 측은히 여긴 카시엘이 가만히 다가간다. 그럼에도 청년은 뛰어내리고 만다. 그 순간 카시엘은 통곡한다. 젊은이를 붙들어 줄 수는 없었을망정 그의 마음을 움직여 자살을 멈추게 할 수 는 있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 우리 곁에도 원래는 천사였는데, 이제는 대한민국에 적을 두고 있는 인사들이 적잖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들 중 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더위를 어떻게 나는지 물어보아야할 것 같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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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18
  • 코끼리에게 아버지를 부탁하는 사육사 이야기
    동물 사육사 야마가와 고지(山川宏治)와, 역시 사육사였던 선친 세이죠(淸藏) 2대가, 한 코끼리를 두고 40년에 걸쳐 엮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 아들 사육사 고지가 한 잡지에 실은 수필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난 밤 늦은 시간, ‘하나코’가 쓰러졌는데 일으켜줄 일손이 부족하니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과장의 메시지를 받고, 나는 곧 ‘이노가시라’ 자연문화원으로 달려갔다.” ‘하나코’는 야마가와 부자가 돌보아주던 코끼리. 고지가 ‘하나코’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5년만이다. 5년 전 그날, 고지는 이빨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하나코’의 입에 손을 넣어 좋아하는 오렌지를 짜서 먹여주며 “잘 있어요!”하고 작별인사를 남기고는, 새 임지 ‘다마’로 전출된 것이다. “사육사가 담당을 벗어난 동물에게는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있어, 하나코를 만나러 ‘이노가시라’에 올 수는 없었단다. ‘하나코’가 타이로부터 ‘우에노’에 오게 된 것은 1949년, 두 살 반이었을 때. 1954년에는 ‘이노가시라’로 옮겨지는데, 사람을 밟아 죽인 사고를, 그것도 연속 두 차례나 지질러버린지라, ‘살인 코끼리’라는 낙인이 찍혀 앞뒤다리를 쇠사슬에 묶여서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하나코’를 코끼리답게 길러준 것이 아버지 사육사 야마가와 세이죠. 담당을 맡은 지 나흘 만에 ‘하나코’의 사슬을 풀어준 아버지는 아침마다 몸을 만져 주며 말을 건넨다. 더러 손님이 ‘살인 코끼리’라며 욕설을 퍼부을라치면 그녀에게 다가가 지켜준다. 곧 ‘하나코’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끼리가 된다. 아들 고지가 처음 ‘하나코’를 만나게 된 것은 중 3 때, 저녁 무렵 아버지를 기다려 우리 앞에 서있는데, ‘하나코’가 긴 코로 그의 옆구리를 치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이었다. ‘코치기’로 이름 붙여진 ‘하나코’ 특유의 위협행위가 담당사육사의 아들과 치른 첫 인사였다. 고지는 고교를 졸업하면서 경찰관이 되지만, 서열이 뚜렷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퇴직했고, 도쿄도 직원이 되어 부임 받은 곳이 ‘다마’ 동물원. 세 마리의 코끼리를 담당하게 되면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의 충고는 단 한마디, “막대기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연장이 아니라, 사육사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란다.” 막대기란 끝에 쇠칼구리가 달린 연장인데, 많은 사육사들은 이것으로 코끼리를 두들기며 길들이는 것이 예사였다. 아버지는 코끼리가 가족이라 했다. 아버지 ‘세이죠’가 1990년 동물원을 퇴직할 때까지 ‘하나코’와 함께한 세월이 무려 30년. 그리고 1995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아들이 ‘하나코’의 담당이 된다. 중3 때 첫 대면을 치른 지 30년만의 재회였다. 당시 ‘하나코’는 몇 차례 더 사고를 저질러 다들 무서워하는 코끼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지는 ‘하나코’의 속마음은 유순하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대해주면 반드시 알아줄 것이라고. 둘의 관계는 서서히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렇게 ‘하나코’와 지난 세월은 10년 남짓. 헤어진 지 5년 여 만에 만난 69세의 ‘하나코’는 우리 속에 누워있었다. 쓰러져 누운 지가 10시간. 폐가 짓눌려 호흡 불능이 될 지도 모란다는 두려움에 사육사들은 그녀를 돌아 눕히려고 안감힘을 쓰고 있다. ‘하나코’는 긴 코로 방해를 놓고...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듯, “그만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하나코’가 오른 쪽으로 돌아눕자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참에, ‘하나코’는 크게 숨을 내쉬더니 다시는 들이 쉬지 않는 것이었다.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야마가와 고지’와 부친 ‘야마가와 세이죠’ 부자 2대가 40년을 매달렸으니, ‘하나코’의 일생은 곧 그들 부자의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아들 고지의 말 “‘하나코’에게 ‘지금 누굴 만나고 싶지?’ 한다면 ‘야마가와 세이죠’ 하고 대답할 것은 틀림없다. 이제 아버지와 ‘하나코’는 하늘나라에서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을 터. ‘아버지를 부탁해요!’ 그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 그의 소박한 내세관을 나무라기에는 40년에 걸친 부자 사육사와 코끼리의 의 스토리가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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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8-12
  •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자들을 구름위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는 저널리스트 레브레히트(Norman Lebrecht)의 <거장신화(The Maestro Myth, 1991)>에는 “카를로스는 아마 자신에게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카를로스(Carlos Kleiber, 1930-2004)가 남긴 음반이 아주 희소한 터라, 음악애호가들이 그의 연주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인데도, 그를 우리시대의 진정한 마에스트로로 받드는 팬들이 적잖다는 사실로 보아, 레브레히트의 멘트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영상물이 나돌면서 그의 팬들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확신을 더하게 되면서. 지휘자였던 부친 에리히는 아들이 현실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바랐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이 나치스의 탄압을 받자 베를린을 떠나, 십년 넘게 남미에서 절망적인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지휘자로서의 험한 과거 때문이었을 터.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21살 나던 해, 아버지가 친구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은 팀파니를 익히고 있지만 귀가 뛰어나기 때문에 곧 접게 될 것이라 믿소.” 아버지 클라이버는 독재자 스타일의 완벽주의자. <보체크>를 초연하면서는 무려 34회의 풀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을 요구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으니. 또 시즌이 끝날 무렵이면 보수를 곱으로 올려달라고 으르렁거리기도 하는 인물이었던 아버지가 1956년에 작고하면서, 카를로스는 독일의 여러 오페라극장에서 본격적인 지휘수습을 시작한다. 디스부르크와 뒤셀도르프를 거쳐 츄리히에서 기반을 다지던 그가 36세에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이 된다. 그러나 겨우 이태를 버티다가 사임했고, 이후로 다시는 그런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 1973년까지는 레코드회사가 제안하는 작업도 기피했다. 57세가 되어서야 메트로에 등장했고,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선 것은 거의 60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베를린이 카라얀의 후임으로 지목했을 때에는 이를 거절했다. 카를로스를 “진정한 천재”라고 했던 카라얀은 “그는 냉장고가 빌 때에만 지휘한다.”는 말로 그의 됨됨이를 평가했다. 데뷔 초에는 제법 폭넓은 레퍼토리를 다루는가 싶더니, 곧 장기로 하는 작품만을 고집하기 시작한다. <보체크> <라 보엠> <오텔로> <장미의 기사> <엘렉트라> <박쥐> <춘희> <트리스탄과 이졸데>. 교향곡으로는 베토벤, 브람스와 모차르트의 후기작품들로 한정했다. 아버지가 즐기던 곡들과 겹치고 있다. 프로의 패를 내건 이상, 요구하는 모든 레퍼토리를 가늠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진정으로 자기만이 다룰 수 있는 작품만을 갈고 닦겠다는 것이 그의 자세였다. 비평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질적이랄 수 있는 반응을 보였다. 혹 실수로 거슬리는 말을 하거나 글로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기색이라도 비치는 날이면, 곧 공항으로 가겠다며 프로모터를 패닉 상태로 몰곤 했다. 다루려는 작품이 <라 보엠>처럼, 오랜 세월 익숙해진 작품일지라도, 최소한 2주간의 리허설을 필요로 했다. 연출이 새롭지 않을 경우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한다는 자세로 임했던 것이다. 변덕에 가까운 그의 성격이 때로 연기자에게 심한 긴장을 주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철저한 준비에 보조를 맞추게 되면서 단원들이 그에게서 친근감을 느끼게도 된다. 출연진이 입을 모았다. “현존하는 지휘자 중에서는 가장 잘 알아차릴 수 있도록 지휘한다.”라고. 코벤트 가든에서 갑자기 프라시도 도밍고의 대역을 맡게 되어 전전긍긍하는 가수에게는 “내가 그대를 따라 갈 것이니 안심하고 노래하라” 면서 긴장을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남기고. 영상을 통해 그의 지휘를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노블(noble)”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뿜어내는 그의 품위가 빈의 아낙들을 사로잡은 동기였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이게도 되고. 그의 “노블”은 자가용 제트기를 몬다거나, 가족들을 이끌고 항공기 일등석에서 으스대는 노불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시대의 마에스토로가 풍기는 “노불”은 그의 당대에 가꾸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2004년 7월 13일, 그의 연주를 아끼던 팬들은, 그를 그의 아내의 고향 슬로베니아의 시골 교회 묘지로 보내주어야만 했다. 아내가 1년 전부터 터 잡고 기다리고 있는...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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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7-29
  • 엘리 비젤의 부음을 접하면서
    며칠 전 외신에서 엘리 비젤(Elie Wiesel, 1928-2016)의 부음을 접하게 되었을 때, 30년 전 그 날 밤의 전율이 다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것을 느꼈다. 서가를 뒤져 그의 연작시리즈 <밤> <새벽> <낮>을 찾아내면서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그동안 멀리하고 있었던 것은 이제 그날 밤과 같은 아픔을 견딜 수는 없는 나이가 된 탓이라고. 그의 삼부작 <밤> <새벽> <낮>을 읽은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고 기억한다. 새로 ‘목회업’의 판을 벌리면서, 갈등과 회의로 고민하고 있을 즈음, 우연히 외서전문점에서 훑고 있던 잡지에 실린 서평에서 만나게 된 <밤>의 한 장면이 일으킨 전율이 동기가 된 것. 어른 두 사람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지는 어린 아이의 죽음의 장면 말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하는 물음에 엘리에젤은 마음속에서 대답한다. “여기, 이 교수대에 목매 달려서” 약 보름이 지나 주문한 책이 도착한 그 날 밤, 나는 한 숨도 못 잤다. 떨리는 몸을 가눌 길 없어 몇 번을 책을 덮었던가. 나로서는 그 전율을 나의 말로 재생산할 수가 없다. 몇 곳을 인용하는 수밖에. 마지막 부분, “ 자유인이 되어 우리가 맨 먼저 한 짓거리는 식량에 덤벼드는 일이었다. 이 짓 말고는 생각할 것이 없었다. 복수에 대해서도 양친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빵에 대해서만. 배를 채우고 나서도 복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이튼 날, 몇 젊은이가 바이마르로 달려가서 감자와 의복을 쓸어 담아왔다... 그리고 매춘부와 잤다... 생사를 헤매던 끝에 간신히 일어난 나는 벽에 걸려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게토이후 내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울 밑바닥으로 부터 시체 하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눈 속 그 시체의 눈동자는 그날 이후 한 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 또 한 장면, 25대나 몹쓸 매를 맞은 친구 바이올린 주자 유리에크의 이야기: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 위에 쌓여있는 캄캄한 바라크 속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이곳, 자신의 무덤가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미치광이는 누구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유리에크가 틀림없을 것이다. 베토벤 협주곡의 일부를 켜고 있었다. 그렇게도 맑은 음색을 들은 적은 없다. 이 고요 속에서... 깜깜한 밤, 들리는 것은 오직 그 바이올린 소리뿐. 마치 유리에크의 혼이 활이 된 것 같았다...그는 다시는 연주할 수 없는 무엇을 연주했다. 절대로 유리에크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날이 새면서 유리에크가 엎드려 죽어있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곁에는 짓밟힌 그의 바이올린이 작은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삼부작이라고는 해도 줄거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는 각각의 이야기. <밤>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자전적 소설이고, <새벽>과 <낮>은 픽션이다. 그렇다고 두 작품이 강제수용소에서의 작자의 체험적 증언이 될 수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리라. 오히려 픽션이란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엘리 비젤은 15세 때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감돼 왼팔에 ‘A-7713’이 새겨진다. 누나 둘은 살아남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은 가스실에서 처형된다. 함께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아버지는 이질과 피로로 앓다가 1945년 4월 수용소가 해방되기 직전에 사망한다. 종전 후,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한 뒤 기자로 활동.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밤>을 출판하게 된 것은 프랑수아 모략의 권면 때문이었다. 모략의 서문을 건너뛸 수는 없으리라. 30개국 이상의 언어로 출판된 <밤>은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갖다 주었다.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시립 대학을 거쳐 보스턴 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기아와 박해 현장을 찾아 구호활동을 벌이고, 핵전저지운동에 힘을 쏟는 등 사회활동을 펼친다. 홀로코스트 위원회 의장을 거쳐, 1980년에는 미합중국 홀로코스트 추모위원회 초대 위원장, 1986년에는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후, 재단을 설립, 차별, 불관용, 불의에 맞서 싸워왔다. 노벨상 수락 연설의 명 구절 “중립은 가해자에게만 이로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은 지금에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enoin34@navw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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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7-21
  • 자리(Sito)
    <싯다르다(Siddhartha)>가 출판된 것은 1922년, 저자 헤르만 헤세(1877-1962)가 노벨문학상을 탄 것은 1946년. 그런데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싯다르다>가 붐이 된 것은 1970년대였다. “카운터 컬처”로 일컬어지던 “스피리츄얼리즘”, “뉴에이지 운동”이 불붙으면서였다. “비트닉” 세대로부터 이어지던 “선”(禪)이나 “도교”(道敎)에 대한 관심이 서구중심의 세계관을 되돌아보게 하는 한편, 새로운 인류학의 한 갈래가 배경이 되고 있었단다. 그럴 즈음, 어깨를 겨누며 등장한 베스트셀러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1925-1998)의 <돈판의 가르침, Teachings of Don Juan 1968)이었다. 페루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요 인류학자로 알려지고 있는 카스타네다는 UCLA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한 후, 야키 인디안 주술사 돈판 마투스 (카초라 기티메아 Cachora Guitimea)에게서 수행했다고 전한다. 책에는 주술사와 나눈 철학적 대화와, 약초로 의식의 변화를 체험한 이야기들이 르포르타주의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비서구적인 지혜는 독자들을 매혹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에 번져 나갔다. 중의 한 토막... “돈 판이 가스타네다에게 말한다.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자신의 자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내가 마룻바닥에 앉아 피곤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 지치지 않고 앉아있을 만한 ‘자리(Sito)’를 찾아내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그 때까지 무릎을 가슴에 대고 정강이를 안고 앉아 있던 나는 그 말로 등이 아프고 지쳐 있다는 것을 깨쳤다.” 가스타네다는 ‘약간 자리를 바꾸어 보면 어떨까’하는 제안쯤으로 이해하고, 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것은 가스다네다의 착각이었다. 돈 판은 가스타네다를 나무라면서 ‘자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복과 힘을 느끼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그렇다면서, 가스타네다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를 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스타네타는 어리둥절해졌다. 티끌만치도 힌트는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베란다는 3.6m×2.4m정도의 그리 넓지 않는 공간이기에 쉬 찾아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자리’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을. 돈판은 엄하게 충고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모든 것이 자신의 세계에 주어진 것은 아니나, 배워야할 것은 빠짐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말했다. 한 시간 가량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자리의 다름을 느끼려고 마룻바닥을 두루 조심스럽게 옮겨다녀보지만, ‘그 다름을 분별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참 만에, 두 손을 베개 삼아 덜렁 넘어졌다가는 잠시 동안 엎드려져보기도 했다. 벌렁 누었다 엎드려졌다하며 마룻바닥을 굴러다녔다. 비로소 막연하나마 문득 어떤 기준을 느낀 것 같게 된다...돈 판이 다시 나타나서,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니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했다. ‘눈이 올바르게 사물을 보고 있지 않을 때, 사람은 눈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라며 덧붙여 일러주었다. 그로부터는 자리를 옮겨가며 시야에 나타나는 색상의 변화를 관찰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느끼게 될 즈음에야, 한 곳에서 색상이 달라진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거기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다른 자리에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천천히 뒤로 기어가서는 그 바위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돈판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군!’ 가스타네다가 누운 그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다. “ ....... 철늦게 <돈판의 가르침>을 들먹이게 되는 것은, 미처 맛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히피시대가 아쉽다거나 풍수설에 미련이 있어서도 아니다. ‘자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쩐지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움, ‘자리’란 것을 잡고 있다고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임에도, 어쩐지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허전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범람하는 정보물결 탓이라며 짜증을 부리다가 딴은 얻어낸 ‘자리’인지도 모르고.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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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7-08
  • ‘시편’에서 읽는 이스라엘의 시심
    다시 이마미치(今道友信)의 글을 소개하게 되면서, 전적으로 그의 책 <미에 대해서>를 의지했으면서도, 제목과 내용에서 본 칼럼에 걸맞도록 다듬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유명을 달리하게 된 그분께서 무례를 용서해주리라 믿는다. 지난번의 “‘창세기’로 읽는 예술론”에서는 예술이란, 일단 그 내용이 순종적이거나 도전적이거나 간에, 초월자를 향한 수직적인 방향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풀이한 저자는 “그렇다면”하고 새롭게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시편’을 들고 나선다. ‘시편’ 137편 1-2절,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이스라엘 사람들은 수금연주를 거부한다. 노래대신 눈물을 흘리며. 왜? 3절을 보자,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4절)한다. 야훼를 섬기는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노래할 수 있지만, 야훼를 모욕하는 바빌론 병사들을 위해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노래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노래는, 직접적이 되었건 수직적이 되었건 간에, 노래불러야할 대상이 초월자이냐 아니냐를 두고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의 수평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점이 종래의 인식과 달라진 것. 예술은 인간과 신과의 수직적인 관계일 뿐만 아니라, 인간끼리의 수평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 동시에, 예술이란 승자가 패자에게 요구하는 위로가 될 수 없는 대신, 뜻을 같이 하는 이들끼리의 위로와 격려라고 주장하게된 것이다. 저자는 또 다시 “그런데” 하고 어조를 가다듬으면서 “예술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호소하는 것으로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 사울왕의 발작적인 질투를 피해 간신히 광야에 도망쳐온 젊은 다윗이, 밤에 동굴 속에 홀로 몸을 숨길 때,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초라한 신세로 절망의 늪에 가라앉아 있을 바로 그때, 그는 수금을 들어 조용히 노래한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워 있어 보니, 그들의 이는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도 같았습니다. 하나님, 하늘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을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그들은 내 목숨을 노리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쳐 놓아 내 기가 꺾였습니다. 그들이 내 앞에 함정을 파 놓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그 함정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57편 4-6)슬픔을 노래한 다윗은 시와 음악으로 스스로를 격려한다. 의심과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노래한다. “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결연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 노래한다. “내 영혼아, 깨어나라.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 (57: 7-8)버림받은 몸, 의지할 것이 없어진 젊은이가, 불안과 어둠을 밀치고 새벽을 깨우려한다. 새벽을 깨우다니... 절망의 늪에서 빛나는 미래를 창조해보려는 자기회복의 노래가 아니던가. 예술을 통해 다윗은 믿음을 되찾고 새로운 인생을 구축한다. 많은 고난을 극복한 다윗, 마침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적의 손에 쓰러진 후, 그는 유다의 첫 번째 왕이 되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영광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예술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위인들의 옛이야기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들기도 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른들의 꾸중에 시달리다, 눈물에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혼자 쓸쓸하게 동요로 마음을 달랜 연후에야, 벗들에게 돌아갔던 추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말했다. 예술은 초월자나 사회조직을 향한 한 인간이나 공동체의 호소일 뿐 아니라, 좌절한 인생의 지탱이 되어주고 있다는 고전적 전형으로 기록해두고 싶다고.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7-01
  • '창세기'로 읽는 예술론
    미학자요 철학자이면서 가톨릭신자인 이마미치(今道友信,1922-2012)는 예술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창세기>에서 찾아낸다.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7대째가 되는 라멕이 세 아들에게 족장권을 물려주면서 삼권분립 방식을 취했다며 운을 뗀다. 물론 우리시대가 이해하고 있는 삼권분립과는 그 내용과 형식이 다르기는 해도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삼권분립을 시도했다고 해석한다. <창세기> 4장 19-22절을 요약하면, 라멕의 장남 야발은 목축의 조상이 되고, 차남 유발은 음악을, 셋째 두발가인은 무기나 농구를 제작하는 권한을 받게 되었다는 것. 이는 목축이라는 생산업과, 예배와 축제에서 집단적 의식을 한데 아우르는 음악예술이, 그리고 농업과 군사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는 기술이 고대 유목민족의 삶에 필요불가결한 세 요소였고, 라멕은 그 요소들을 세 자손에게 골고루 나누어 위탁했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음악으로 대표되고 있는 ‘예술’이란, 인간이 족장제도를 유지하고 있을 적부터, 목축과 군사와 더불어, 3대 지주의 하나로써 당시의 현실 생활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이 확실하게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바로 그 무렵, 그 지역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인격신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창세기> 4장 26절,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예술을 생활의 한 기둥으로 여기기 시작할 즈음, 다른 한편에서는 윤리적으로 엄격한 일신교의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는 내면적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원시적 주술이나 계절적 집단행사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정 그 이름값을 하는 ‘종교’가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외부에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면에서 이를 찬양하고 영구화하려는 생각이 뒷받침하지 않는 한, 예술행위는 발생할 수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인간의 작업으로 이룩하려 하는 내적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 한, 예술이 성립될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인간 내면의 심화작용과 예술의 성립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인간의 내적성장에 따라 예술자체의 수준도 높아졌을 것이고, 그로 해서 예술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인정받으면서 산업 군사와 더불어 발전해가는 예술은 그 이후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 예술은 항상 예배와 축제의 한 부분으로만, 언제나 그 시선을 신에게만 돌리고 있었을까. 이마미치는 <창세기>에서 그 후일담을 찾아가는데, 그것은 “바벨탑 건축 설화”로 귀결된다. “유대인은 아름답고 높은 탑을 건조했다”는 그 유명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로 부터의 인용(역사 1권 180)을 보조 자료로 첨가하는 열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어떤 동기로 건축된 것일까.“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기 11장 3-4)비약적인 기술력의 발전은 주거나 군사적 방어와 같은 실용적 범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 건축행위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을 넘보게 된 것이다. 지평위에 우뚝 솟아오른 아름다운 탑. 그것은 새로운 기술이 일구어낸, 그러나 실생활의 필요한도를 넘어서는 예술작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인간 의지는 성역으로만 여겨오던 ‘하늘’마저 넘나들 수 있는 범위 안에 편입되었다고 큰 소리 치게 된 것일 지도 모른다. 마침내 예술은 인간의 종교적 경건을 장식하는 부속물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판단을 따라, 인간이 신에게 예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역을 꽤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인간내면의 표현이 된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6-17
  • 피카소의 그림 값
    “내가 종이에 침을 뱉으면 그 종이는 액자로 장식되어 위대한 예술품으로 팔려간다” 하고 떠벌렸던 피카소의 장담은 허언도 과장도 아니었다. 일행을 거느리고 고급식당에서 진탕 먹은 후, 테이블 크로스에 사인이랍시고 내갈기면 주인은 감지덕지 했고, 수도 없이 많았던 애인들에게 이별금조로 건네 준 집값은 하룻밤 수고로 생산되는 정물화로 치렀다. 이런 금전적 호사를 누린 화가는 일찍이 피카소 이전에는 없었다. <비너스의 탄생>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보티첼리가 피렌체의 성당에 가로 세로 2미터 크기의 제단화를 그려준 대가는 오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6백만 원 남짓. 그것도 반은 재료값이었고 나머지가 화가의 품삯이었다면 믿어 줄 이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기록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미켈란젤로가 오랜 세월 천정에 매달려가며 그린 <천지창조>로 얻은 보수를 “호”당으로 계산하면 단돈 만원에 불과했다는 데야. 유럽에 화상들이 등장한 것은 17세기 렘블런트가 활약하던 네덜란드에서였다. 교회의 퇴폐와 허식을 고발하며, 교회미술을 우상숭배라며 부정하고 나선 종교개혁은 그때까지 화가들의 스폰서 노릇을 해온 교회로 하여금 미술품의 주문을 급감하게 했다. 예수상이나 성모상 혹은 성서의 장면들과 같은 종교적 주제를 그릴 수 없게 된 화가들이 시민의 초상이나 생활상을 주제로 하거나 정물이나 풍경에 손을 대게 되었고, 그 거래에는 화상이란 새 직업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인상파의 그림이 화폐대신으로 그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독일 나치가 미술의 도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었던 이차세계대전 중의 일로 나치의 고관들이 인상파의 그림을 매점했기 때문.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보수적인 작품 이외는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배척했었지만, 그것은 화가지망생이었던 히틀러 앞에서의 일이었을 뿐, 그의 고관들은 앞 다투어 인상파의 그림을 사재고 있었다. 독일통화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가는 상황에서 인상파의 그림은 국제 통화로서의 신뢰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19세기 후반에 급성장하기 시작한 화상이라는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미리 대처할 줄 알았다. 20세기 초, 폭발적으로 확대해가는 미술시장과 거기서 활약하는 화상을 활용하는데 피카소를 앞서는 화가는 없었다. 호당(160×130 ㎝)값으로 치면 피카소의 그림은 평균 10억 원을 웃돈다는 것이 상식이 된 데에는 그의 그림솜씨 못지않게 상술이 한 몫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기한 대로, 프로테스턴트국가 네덜란드에서 신흥부호들이 그림을 구입하게 되면서 미술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모네나 르노아르는 돈 몇 푼에 작품을 내놓지만, 시장 평가에 따라 거금을 벌게 되는 것은 화상의 몫이 되었다. 따라서 인기를 얻은 화가들도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이름이 나있는 화가의 그림보다는 헐값으로 살 수 있는 소위 전위화가의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되면 거액의 이익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파리 미술계에 막 신흥 경제대국이 된 미국의 재력이 들어오면서 미술시장은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19세의 피카소가 스페인에서 파리로 나타난 1900년은 그림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의 행운은 20세기 초에 신진화가로서의 평가를 확립하고 인상파에 이어 전위적인 스타화가를 대망하고 있던 미술시장의 요구에 완벽하게 응답하는 화가였기에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피카소의 행운은 천부적인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술교사였던 부친이 아들이 그린 사과그림을 보고는 스스로 붓을 던지고 아들의 데생을 돌보는데 있는 힘을 다했다는 일화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초기작품들은 그렇다 치고, 중기 이후의 작품들, 사실적 기법을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작품에서 오히려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일이며, 끊임없이 이어진 화풍의 변화를 견딜 있게 해준 것도 탄실한 데생실력이 받쳐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혹평을 능사로 삼는 비평가라 할지라도 피카소의 기본실력에 대해서 운운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 피카소가 죽기 얼마 전에 그렸다는 <자화상>에서 볼 수 있는 절망의 표정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술가를 넘어 인간의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던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을.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6-10
  • 요한과 요섭
    시인 주요한(1900-1979)과 소설가 주요섭(1902-1972)이 형제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형제에게 “요한”과 “요섭”이라는 소위 크리스천 네임을 지어 준 이는 아마도 부친 주공삼 목사였다는 사실까지도. 그러면 주공삼 목사가 아들들에게 요한과 요셉으로 이름 지어줄 때에, 성서의 어느 요한과 어느 요셉을 염두에 두었을까? 요한과 요셉은 서양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 특히 요한의 변형, 죤(John)은 11세기 이래 영어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의 이름이었고, 16세기 후반의 런던에서는 4명 중 한 사람은 존이었다고 한다. 존 F. 케네디, 존 포드(John Ford), 존 웨인(John Wayne), 존 레논(John Lennon) 등, 오늘날에도 유명인사들 중에는 존이란 이름이 흔하다. <신약성서>에는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과,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로 불렸다는 사도 요한이 있다. 세례 요한은 젊어서 헤롯에게 참수 당한다. 반면에 사도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장수해서 95세를 누렸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의 정서에 따른다면, 아들의 이름으로는 “세례 요한”보다는 “사도 요한”의 “요한”을 따를 법한데,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은 세례 요한 쪽을 따랐다. 그것으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의식 상태를 엿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순교자였고, 예수도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로 평가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요한이란 이름은 그리스도교 전파와 더불어 유럽 각지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불려진다. 역대 교황들 중에서도 우리 시대의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모두 24명이 요한이란 이름이었다. “존”에서 파생된 이름도 많다. 영국에서는 존슨(Johnson), 존즈(Jones), 존스튼(Jonston), 잭슨(Jackson),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는 젠킨스(Jenkins), 이탈리아에서는 잔니니(Giannini), 네덜란드에서는 얀센(Jansen, 독일에서는 헨델(Handel) 폴란드에서는 야노비치(Janowicz), 러시아에서는 이바노프(Ivanov) 로. “요하난”이나 “요시아”의 “Y”가 “존”이나 “조슈아”의 “J”로 변화한 것은 라틴어 표기법의 영향 때문. “요셉”이란 이름도 그랬다. 히브리어 요셉은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Joseph이 되고, 독일어로는 요제프(Josef)가 된다. 그리고 스페인어로는 호세(Jose), 이탈리어로는 주제페(Giuseppe)가 되고, 러시아어로는 이오시프(Iosif)로 변한다. 애칭은 “조(Joe)”.그리스도교 초기에서는 “성” 요셉하면 의례히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이요 족장인 요셉을 일컬었다. 우리가 교부라 부르는 당시의 신학자들이 족장 요셉의 이름 앞에 거룩한 성자를 붙여서, (영어계열에서는 St.) 받든 것은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7장 9절, “얼마 뒤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들어 보셔요. 또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이 꿈을 두고 교부들은 “부활한 예수 앞에서, 달로 상징된 성모 마리아, 태양으로 상징된 요셉, 그리고 11개의 별(배신자 유다를 제외한 사도들)이 절을 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성”요셉이라 한 것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아니라, 아리마테 요셉을 가리킨다. 부자이고 의회의원이지만, 선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동료의 결의나 행동에 동의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았다.한 때, 유대인이 두려워 예수의 제자임을 숨겼으나(요19: 38) 예수가 처형되자, 도망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거두겠다고 나섰다.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세마포에 싸서는 자신을 위해 바위를 파서 만들어두었던 묘에 장사한 것이다(마 27: 57-60). 성모 마리아의 남편으로 예수 탄생 이야기의 주역이었던 요셉이 “성”요셉으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1870년, 교황 비오 9세 때 일. 아마도 성모의 남편 요셉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입증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것이 중론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6-01
  • 폭쿠리데라
    일본어 “폭쿠리(ぽっくり)“는 ”물건이 힘없이 부러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副詞)로, 사람이 갑자기 죽는 모양을 빗대어 쓰이기도 한다. 장수 일등국 일본에는 운영하는 절의 별명을 “폭구리데라(寺)”로 내걸어 성황을 누리는 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 오랜 병앓이로 자식들의 짐이 되지 않고 죽어주는 복도 시주하며 빌어야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가와사키(川崎)의 한 유료 노인시설의 양호요원이 87세, 86세, 96세의 입소자들을 3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내던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는 26세 청년. 도쿠오카(德岡)는 86세된 저명한 저널리스트. 한 잡지에 자조적인 필체로 그 청년에 대한 변병 아닌 변명을 쓰고 있어 자극이 되었다.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치매를 앓거나 듣지도 움직일 수 도 없는 노인을 간호하는 젊은이의 현실인즉 변변찮은 보수와 잦은 야근에 희망이라고는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라는 것. 누워있기만 하는 늙은이를 더 살려두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명색이 도우미들이, 목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늙은이를 더 살려준다고 해서,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확실한 터에, 한밤 중에 10분이 멀다하고 초인종을 눌러대는 그들의 용변이나 거들어주며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노인을 연명시켜 주는 짓으로, 나는 이 세상을 위해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허무감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프로페셔널한 일이라며 자부심을 가져 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에는 자포자기에 이르게 마련. “쓰레기는 버려!”하는 결단(?)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까지를 극복할 수 있는 젊은이가 많아지기를 바란다는 일 자체가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 삶에 대한 보장은 물론, 목적도 해답도 없는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함부로 말하기가 그래서 그렇지, 이 젊은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 아닌가. 목적도 없이 보람도 없이 오래만 사는 사람들이 증가하면 그들을 간호하는 사람도 덩달아 목적이 없어지는 것. 간호하고 양호하는 일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힘든 일인 것을.이런 일도 있었다. 치매를 앓는 91세 노인이 선로에서 전차에 치어죽자, 철도회사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나. 일심에서는, 망자의 부인과 장남이 “감독의무를 소홀했다”는 책임을 물어 청구액 7백20만 엔을 지불하라고 명했고, 이심에서는 부인에게만 360만 엔의 배상을 명한 바 있었던 사건. 철도회사가 소송한 피고는 부인과 4 자녀. 사고당시 85세로 요간호대상자였던 부인이 순간적으로 조는 틈에 영감이 빠져나가 일으킨 사고였다. 그러니까 간호하다 졸았던 85세 부인의 과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일심과 이심의 판결이었고, 또 4남매 모두 부모와 동거하고 있지 않았지만, 유독 부친의 간호에 헌신적이었던 장남만이 배상책임을 져야한다는 판결이기도 했다. 그나마 최고판결기관이 “가족에게 보호감독의무는 없었다.”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쿠오카는 5, 6년 전 자신의 일을 회상한다. 역 플랫폼을 가로질러 걷다가 실족하여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마침 역무원 셋이 달려와서 구해주었다. 역무원의 인도로 역장실에 인도되었을 때, 역장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하는 위로의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역장의 침묵은 훗날 후유증이 발생했을 때 돌아올지도 모르는 책임을 면하기 위한 자기방어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화가 치밀었다는 것. 치매환자 가족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철도회사로부터 손해배상청구를 받은 가족의 분노와 슬픔이 어떠했을 지를 미루어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었다고 노 저널리스트는 술회했다. 넷에서 “폭쿠리데라“를 입력하자 다음과 같은 글이 떴다. “이웃 ‘폭쿠리데라’는 한때 북적대더니, 주지가 뇌졸중으로 드러눕자 효험이 없다는 소문이 돌아 참배객이 쑥 줄어들었다.” 오죽했으면, <창세기>는 최고장수기록보유자 무드셀라가 노아의 홍수에서 익사했음을 암시하고 있을까.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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