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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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38절 이하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주지 않는다. 그 길이 십자가로 이어질 길인 것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누가복음서는 그에 대해서조차 함구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해야 할 이야기를 특정화해서 어떤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요한복음서에 보도되고 있는 비슷한 이야기, 유월절 엿새 전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와는 집필동기가 사뭇 다른 것 같다.

 

다만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모셔들였다에서 마르다가 그 집의 주인임을 암시한다. 어떤 해석자들은 동생 마리아를 이전에 가출한 적이 있어 가버나움 언저리에서 창녀로 있었을 때에, 이미 예수를 만난 적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로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본문에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집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를 말할 수 있는 정황이면 충분했던 것 같다.

 

다음 구절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에서는 그래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게 된 동기가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적어도 마르다 자신에게만은 나름대로의 동기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마르다의 집에 존경하는 예수가 일행과 더불어 갑자기 찾아주셨다. 발을 씻을 물을 길러오고, 잡수실 것을 준비하는 일이 어찌 수월했으랴. 마르다는 이리 뛰고 저리 뛰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만했다.

 

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all the work she has to do.” 접대하는 일은 그녀가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원어의 diakon 은 집사 혹은 봉사라고 번역할 수 있지 않는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는 그런 자신감이, 마르다로 하여금 자신이 주라 부르는 예수에게 달려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그는 예수께 물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형식으로는 의문문. 그러나 그 내용까지도 의문문이랄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는 없지 않소?” 따지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힐난하는 말투인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마르다는 예수를 윽박지른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까?” “도대체 정의감이나 균형감각은 두었다 어디에서 쓰실 것인가요?” 하는 말이다.

 

좀 더 리얼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다듬어본다면 그래 내 동생 마리아와 희희낙락하시느라 나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수고하는 모습은 안중에도 없단 말씀이에요?” “아니, 동생은 철이 없다 손치더라도, 그래 선생님까지 그래서야 되겠소?”하는 듣기에 따라서는 퍽 민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말이 된다.

 

인간의 뇌를 연구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배신자로 분류할 만한 부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소하게나마 사회적 룰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인정되는 손쉬운 공격대상자를 찾아내 벌주는 일에서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타자에게 정의의 제재를 가하노라면 뇌의 쾌락중추가 자극을 받아 도파민을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쾌락에 끼어들게 되면 쉬 벗어날 수 없어서 적극적으로 처벌대상을 찾아 나서게 될 뿐만 아니라, 대상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또 우리는 마르다가 그녀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찰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다는 그렇게도 분주한 가운데서도 시선을 동생 마리아와 더불어 희희낙락하고 있는 예수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봉사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자기를 희생하는 봉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위인이나 성자들의 희생과 봉사도 신화화되기 이전까지는 모두 마르다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랬다. 마르다는 들떠있었다. 스스로의 정의감에 중독된 나머지 들떠 있었던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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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칼럼] 마르다는 “들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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