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교황을 가리켜 “친애하는 당나귀”라며 신랄하게 비판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또 루터는 교황제도를 “레비아탄”에 비유하기도 했다. 욥기에 나오는 짐승 말이다.
종교개혁운동에 등 돌린 에라스무스를 향한 루터의 <투쟁의 서>나 <노예의지론>에서 읽을 수 있는 설득력은, 날카로운 논리에 풍자적인 웃음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루터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가 큰 몫을 했다고들 말한다.
그가 동지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쓴 수많은 편지들을 읽노라면 안팎으로 닥쳐오고 있는 위험으로부터 불안과 긴장을 풀어보려는 그의 마음씨가 배어난단다.
“이 성 창문 아래 있는 작은 숲에서, 큰 까마귀 작은 까마귀들이 회의를 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드나들며 술주정뱅이 모양 떠들어 댄다.....까마귀들은 마치 설교를 하고 글을 쓰는 스콜라 학자들이나 교황파 사람들과 흡사하다. 다만 시간을 보내고자 형편없이 땅을 더럽히면서 떠들어대고 숨을 내뿜어대다니 진정 유익한 종족이 아닌가.”
익살꾼 루터의 집에는 언제나 방문객들이 그치지 않았고, 그들은 음악에 더해 루터의 유머도 즐겼다. 함께 했던 학생들 중에 루터의 이야기나 함축 있는 언급을 기록해두는 이들이 있어서 훗날 <탁상담화>로 출판되었다.
이런 글이 있다. “당나귀는 유언장에서, 교황들에겐 머리를, 추기경들에겐 귀를, 가수들에겐 목소리를, 농민들에겐 똥을, 배우들에겐 다리를, 군인들에게는 큰 북과 작은 북을 만들 가죽을 남겼다!”
어느 날, 루터가 기르던 개가 식탁 곁에서 주인이 던져 줄 한 조각의 고기에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가만히 주인을 바라보면서. 개의 모습을 가리키며 루터가 말한다. ‘던져줄 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개처럼만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직 한 쪽의 고기를 간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바랄 수도 없어하는 저 개처럼 말이다.’ “
루터의 집에는 지베르거라는 도우미가 있었다. 그에게는 새를 잡는 취미가 있어서 틈이 날 때면 그 일에 열중했다. 루터는 새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싫었다. 자신이 솔직하게 지베르거에게 그 일을 그만두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루터는 유머러스한 경고의 문서를 그에게 보냈단다. 문서 겉봉에는 “도우미 지베르거에 대해서, 루터 박사에게 보내는 새들의 호소” 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문서의 양식과 내용도 흡사 고발장과 같았다. “우선 새들이 지베르거에 의해서 자유를 빼앗기고, 생명과 신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는 바이다. 그에 더해서 루터에게 새들에 대한 지베르거의 행위를 중지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오전 8시까지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게 함으로, 새들이 안전하게 비텐베르크의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할 것을 탄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루터가 중지시키지 못할 경우라면 새들은 대항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반 협박조의 말도 이어진다.
또 하나님에게 부탁해서 지베르거가 새들 대신 낮에는 개구리나 메뚜기들을 쫓아다니고, 밤에는 쥐나 벼룩이나 모기나 빈대에게 둘러싸이기를 빈다는 저주성 발언으로 끝을 맺는다.
결론적으로 이 호소문은 지베르거로 하여금 “땅에 떨어진 작은 곡식알을 찾을 뿐인 작은 새들 대신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는 까마귀나 시궁창 쥐를 잡는 것은 어떨까 하는 권면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지베르거가 잠꾸러기어서 아침 여덟시까지 일어나지 말기를 바란다는 청원은 그러니까 야유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명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악마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라 했다는 루터의 말이 모든 그의 기행의 참 뜻을 설명해줄 수 있으리라
루터가 발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성서번역에 열중하고 있을 때, 나타난 악마를 향해서 잉크병을 던져서 쫓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성서가 민중의 언어로 번역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악마가 루터의 일을 방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란 것. 오늘 날 그 방 벽에서는 잉크 흔적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이미 그 옛날에 사람들이 회벽을 긁어갔기 때문이라나. enoin3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