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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끼리와 소라게 이야기
    코끼리는 순전히 초목만 먹고 사는 동물이다. 그런데도 몸무게가 보통 1톤을 훌쩍 넘는 육지에서는 가장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천하의 호랑이나 사자들도 두려워한다. 이 거대한 코끼리와 어찌하다 충돌하면 몸에 큰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코끼리들이 꼼짝 못하는 존재가 있다. 호랑이, 사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약골인데도 이들이 명령한대로 한다. 바로 코끼리 조련사들이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코끼리를 어렸을 때부터 말뚝에 묶어놓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답답한 코끼리가 몸부림을 쳐보지만 이내 포기하고 만다. 해봤자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란 코끼리는 장성해서도 이 작은 말뚝을 빼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생각 자체를 못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무던하게 해봤지만 안되더라는 것이다. ‘말뚝’이 정신과 몸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아예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학습된 무력감’ 이라고 한다. 코끼리만의 이야기 일까? 아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그러니까 못해. 안 해’ 라고 하면서 불가능한 이유를 찾아내고는 안도하는 사람이 있다. 또 한 사람은 ‘그러니까 어쩌면 될지도 몰라. 한번 해보자’ 라며 가능한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눈앞에 일어난 변화를 보고 불안해하고 걱정을 하는가, 아니면 기대를 갖고 소망을 거는가에 있다. 그런데 긍정적인 사고는 나를 알차게 만들어 준다. 이 세상은 싫다고 하면 싫은 곳이고, 즐겁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또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종종 망각할 때가 많다. 미국과 베트남이 전쟁 중 1965년 베트남의 한 포로 수용소에서 있었던 실화이다. 포로들에게는 내일이 없었다. 포로들은 모진 고문과 열병 속에 하나 둘 죽거나 미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인 ‘조지 홀’은 달랐다. 그는 7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꿋꿋이 버터내고 1973년 귀국했다. 그리고 불과 그 한 달 뒤, 유력한 우승후보를 제치고 뉴 올리인즈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우승 상급은 125,000달러.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을까? 그는 지난 7년 동안 상상 속에서 메일 4000여회의 라운딩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작은 감방에 갇혀서 골프공도, 골프클럽도 없이 상상만으로 필드를 누빈 것이다. 그는 처참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꿈과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결과는 보는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했다. 우리들에게는 모두 작든 크든 자기만의 꿈이 있다.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저마다 꿈이 있고 미래의 자기 모습이 있다. 그래서 날마다 노력을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걸 성취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이루지 못하고 절망 한다. 그럼 왜 그럴까? 성공한 사람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서 뚜렷한 목표를 정해 지독하게 몰두하고 버틴다. 한 가지 목표가 성취되면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남다른 길을 찾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에 개의치 않고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뒤쳐진 사람은 좋아하는 일이나 목표가 분명치 않고 몰두하거나 버티는 시간이 짧다. 작은 성과에 쉽게 만족해 안주하기 십상이며 모르는 일을 두려워하고 과거에만 매달린다. 따라서 작은 실패에도 방향을 잃어 쉬게 낙심하고 절망한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바다에 사는 소라게는 태어나자마자 갑옷 같은 소라껍데기 속에 들어가 사는 아주 작은 게이다. 소라게라는 이름도 여기서 생겨났다. 신기해서인지 요즘 애완용으로 많이 키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몸이 커지면 ‘집’이 작아져 옴짝달싹 못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라면 새로운 ‘큰집’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바로 이 순간이 문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 만일 적이 온다면 속수무책이다. 작은 집에 그대로 있으면 안전하겠지만 성장할 수 없고, 나가자니 온 천지가 위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소라게들은 과감히 작은 집을 버리고 큰 집을 찾아 떠난다. 이것이 그 많은 생명체들이 사라져갔음에도 지금까지 작은 소라게가 살아남아 있는 이유라고 하니 신기하다. 거듭남은 ‘하던 대로’를 과감하게 떠나는 모험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다보면 잘해도 굴러 떨어져 헤매거나 실패할 수도 있다. 처음이라 서투르기 때문이다. 당연한 시행착오다. 그러기에 지금 내게 닥친 이 좌절과 절망은 우리를 더 큰 성공으로 인내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빌게이츠처럼 ‘ 왠지 오늘은 나에게 큰 행운이 생길 것 같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크게 외쳐 보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9-03-08
  • 소설 같은 이야기
    남편을 사별하고 가난하게 살던 한 과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섬에서 나는 해산물을 사다 뭍에 내다 팔면 꽤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 했다. 그녀는 어렵게 빛을 내 섬을 향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나루터에 도착하기도 전 그만 돈 보따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장사는커녕 빚만 잔뜩 지게 되었다 싶어 그녀는 하늘이 노래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그때 마침 길을 가던 한 노인이 그 보따리를 주웠다. ‘이렇게 거액을 잃었으니 무슨 사연이 있을 거다. 어떻게든지 주인을 찾아줘야겠구나’ 노인은 그 자리에서 꼬박 반나절을 기다려 길을 되찾아 온 그녀에게 돈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노인에게 감사의 절을 올린 뒤 되찾은 돈 보따리를 품에 안고 다시 나룻터로 가서 승선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쯤 나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한 청년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너무 깊은 바다여서 아무도 청년을 구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애가 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당장 청년의 목숨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크게 소리쳤다. ‘누구 저 청년을 구할 사람 없어요? 누구든 저 청년을 구하면 내가 이 돈을 다 드리겠어요’ 그녀는 사람들 앞에 돈 보따리를 내보였다. 그러자 누군가 나서 청년을 구해냈다. 그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사도 할 수 없고 빚쟁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힘없이 뱃전에 기대 망연히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그녀가 구해준 청년이 다가와 함께 집으로 가자고 간곡히 권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청년의 뒤를 따라갔다. 놀랍게도 청년은 그녀의 돈을 찾아준 노인의 3대 독자였다. 청년은 자초지종을 다 말하고 아버지를 권유해 그녀를 새어머니로 삼고 극진이 모셨다고 한다. 필자는 소설 같은 이 선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욕심을 버릴 때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만일 돈 보따리를 주운 노인이 눈앞의 이익만을 먼저 좇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한 여인이 돈만 생각하고 청년의 목숨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결국 노인은 3대 독자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여인은 행복한 재혼의 가정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물욕을 버리므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물욕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는 옛 격언이 있는 것도 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황금 곧 재물을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재물에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재물로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야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세상의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얻을 수 있고 적당한 문화, 생활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돈이 없으면 불편을 겪어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돈은 이 땅에서의 안락한 삶을 누리는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까지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요소인 재물을 버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재물욕을 버려야 하는가? 재물욕은 독이기 때문이다(약 1:15). 그런데 그 독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우리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일을 벌리고 실패하면 남을 탓하고 원망한다. 실례로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자. 어떤 성직자들, 정치인들, 법조인들, 기업인들과 상인들, 공직자들, 체육인들, 교수와 교사들, 군인들, 일개 필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심을 버려야 한다. 탐심이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그릇된 욕망이다. 또 소유했어도 더 소유하려는 과도한 욕심이 탐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에 대한 탐심, 성에 대한 탐닉, 세상의 명예와 소유에 대한 집착 등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어떻게 탐심을 버릴 수 있을까? 선한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주위에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자들에 대한 관심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능의 마음, 탐심의 눈으로 본다. 좀 더 배운 사람들은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들은 무지한 눈이나 이웃에 대한 비정한 눈을 지닌 자들이 되지 말고 모든 것을 선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 철가방 기부천사 김우수님의 나눔의 이야기이다. 2011년 9월 54세의 중년의 나이로 사망한 그는 철가방을 들고 오토바이를 타고 중국음식을 배달하는 3유의 인생이었다. 그가 잠자는 곳은 1.5평짜리 고시원 쪽방이었으며, 받는 월급은 70만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6년 동안 많게는 6명, 적게는 1명에 이르기까지 매달 10만 원씩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오늘 하루 종일 후원 아동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었지, 읽고 또 읽었어, 그 편지를 읽는 시간이 너무 행복한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9-02-22
  • 도전한 사람들이 아름답다
    미국의 커무니케이션 이론가인 폴 스톨츠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역경의 지수>에서 역경에 대처하는 모습을 3가지로 표현했다.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그냥 등반을 포기하는 겁쟁이(Quier), 장애나 어려움을 만나면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로 적당히 안주 하는 야영자(Camber), 역경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해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등반가(Climber), 폴 스톨츠 박사는 역경을 만나면 혼신을 다해 맞서라고 말한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한다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여기서 도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전’ 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경신 따위에 맞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인지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낸 인물들의 이야기는 하나 같이 우직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우직함이 꿈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원동역으로 삼아 성공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역경에 도전하려면 ‘불가능’이 사실이 아닌 의견 일뿐 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공의 법칙의 저자 맥스웰 몰츠 박사가 한 말이다. ‘어릴 적 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우리 집에 돈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의견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대학원을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젊은 성형외과 의사가 뉴욕에서 간판을 걸고 개업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해냈다. 그때 나는 ’불가능‘이란 단지 사람들의 의견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되뇌이곤 했다. 나는 목표를 위해 나 자신을 관리했을 뿐 아니라 의학 서적을 사기 위해 코트를 전당포에 맡기고 해부용 시체를 구입하기 위해 점심을 거르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성공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다. 만일 성공이 갑자기 찾아오기를 기다리거나 다른 사람의 것쯤으로 생각한다면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인도 비하르주의 가야에 사는 주민 람찬드라다스 씨의 이야기이다. 다스씨의 집은 산 넘어 있는데 길이 없어 매일 수km 떨어진 곳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걸어가야 했다. 그는 당국에 터널을 내달라고 했다. 자동차를 너무 멀리 세워두면 도둑을 맞을 수 있어 겁이 난다고 분명한 이유까지 댔지만 당국은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에 그는 자신이 결국 스스로 터널을 뚫기로 마음 먹었다. 도구는 망치와 정뿐이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터널 뚫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터널을 뚫고야 말았다.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고사에서만 읽을 수 있는 있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터널을 뚫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14년이었다. 비록 망치와 정으로 뚫는 것이지만 폭 4.2m 규모의 반듯한 터널이 완성됐다고 한다. 가여의 당국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터널을 뚫을 수 있을까? 절박함은 선택의 여지를 없앤다. 아무리 거대한 장애물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절박하게, 절실하게, 원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지 않을까?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절망이 너무 커서 숨쉬기조차 어렵다면 이 터널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뚫겠다고 하면 뚫릴 것이다. 무엇인가 이루기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 질 것이다. 평생 배우로 살던 한 연기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져 의사로부터 남은 인생은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의 말은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거의 30년 동안을 열정적으로 배우로서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일어설 수 없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혼자서 끊임없이 걷기 연습을 하고 재활 치료를 위해 집안에 방 한 칸을 오로지 혼자서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그리고 그는 10년 만에 다시 배우로서 무대에 섰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용기야말로 좌절을 넘어 희망을 바라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 패배자로 살라는 법도 없고 평생을 걸쳐 잘나가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달려들어야 한다. 그러니 현실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끈임 없이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도전은 항아리에 넣어져 묵혀야 제 맛인 된장 고추장이 아닙니다. 오늘 무엇인가를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지금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막 딴 과일처럼 신선한 성공을 맛볼 수 있지요’
    • 칼럼
    • 목회자
    2019-02-15
  • 노력은 성공의 씨앗이다
    영국의 일간지인 더 타임스는 2008년 1월 21자 인터넷판에서 어릴 적 영재 소리를 듣던 이들의 상당수가 40대엔 ‘보통 인간’이 된다고 했다. 미국 뉴욕의 헌터대학 부속 초등학교 출신 중 IQ가 아주 높았던 아이들을 추적한 또 다른 연구에서도 어린 시절의 재능과 이후 성공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왜 신동이나 영재가 장성하면 천재성이 사라질까?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 캐럴 드웩은 어려서 ’매우 똑똑하다, 커서 반드시 성공할 것’ 이라는 칭찬을 듣다보니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고 결국 인생을 망쳤다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다면서 ‘대부분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천재를 유지하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의 교육심리학 교수들이 40년 가까이 미국의 수학 영재 5,000여명을 추적한 결과도 비슷하다. 1971년부터 시작한 연구에서 교수들은 영재들이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하거나, 노력을 게을리 할 경우 평범하게 되는 현실을 비일비재하게 목격했다. 재능도 좋지만 교육 기회와 성실성이 ‘천재’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할까? 이들 교수들이 낸 보고서에는 33세 정도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영재들은 대부분 일주일에 65시간 이상을 연구와 일에 쏟아 부었다고 적혀 있다. 65시간이면 일요일을 제외할 경우, 매일 10시간 이상 일한 것이다. 천재들의 노력이란 어쩌면 지저분한 진창 같은 곳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나의 천재성을 믿고, 매사에 게으르지 않았던가? 서울 신림동 고시촌은 청운의 꿈을 품은 젊은이들이 모여 한 동안 공부에 정진한 곳이다. 이곳에는 대게 나이 40세를 전후한 고시 경력 10년이 넘어 고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자칭 ‘고시도사’ 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과거의 고시의 출제 경향부터 시작에 올해 출제위원과 경향에 관해서도 예상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시험 결과 낙방하고 이 도사의 이야기를 경청 했던 신출내기들은 합격했다. 고시원을 운영한지 25년쯤 됐다는 주인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출제 경향을 알면 뭐해? 노력을 안 하는데, 그러니 저렇게 허구한 날 한량처럼 지내는 거지’ 목표를 세우고 처절한 노력의 결과로 성공한 이들을 보자. 미국의 전 국무장관 라이스. 한 교수가 강의시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서양 문명은 유전적으로 우수한 백인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 그러자 흑인이지만 머리가 좋아 15세에 미국 덴버 대학에 입학한 라이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저는 프랑스어를 할 수 있고 베토벤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교수님보다 문화적 수준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리곤 교실을 나갔다. 그녀는 어머니가 항상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너에게 어디 하나 흠(덧말:欽) 잡을 데가 없다는 말을 하게끔 해야한다’ 발군의 실력을 지닌 그녀는 흑인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했다. 그 결과 명문 스탠포드 대학의 최연소 첫 흑인 부총장을 거쳐 백악관으로 향했다. 부시 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몇 년 후 흑인 여성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을 넘치도록 한 덕분이었다. 이어 작곡가 모짜르트. 그는 공히 천재였지만 28세때 손이 기형이 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너무 오랜 시간 연습하고 연주하고, 늘 펜을 쥐고 작곡하느라 그랬다. 모차르트의 인기 있는 초상에서 빠진 부분이다. ‘사람들은 내가 쉽게 작곡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사실 나만큼 작곡에 많은 시간과 생각을 바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유명한 작곡가의 음악을 수십 번에 걸쳐 하나하나 연구했다는 것을 누가 알까?’ 소설가 김훈.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의 저자로 유명한 김씨는 2007년 미국 LA문학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 2학년때 난중일기를 읽고, 언젠가 이순신의 절망과 고독을 쓰고 싶었어요. 35년 만에 문득 연필이 잡혔고 두 달 만에 썼죠. 그 사이에 이가 8개나 빠져 나갔습니다. 입 안에서 이가 오물거리면 툭 뱉어버리고 글을 썼어요’ 마지막으로 월트 디즈니이다. 디즈니랜드를 만든 월트 디즈니는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내야 하는 고통을 겪다가 8번이나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최소한 3번 이상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헛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미키 마우스, 백설 공주, 피노키오’ 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성공한 사람들은 세상이 하나를 필요로 할 때 두 개를 했고, 두 개가 필요할 때는 네 개를 했다. 또 이를 위해 매일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에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편안하게 쉬고 싶은 유혹이 찰랑거린다. 이 정도쯤 했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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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9-02-01
  • 부메랑의 법칙
    20대 중반의 한 사람이 사장이 낡은 트럭 한 대를 끌고 미군 영내에서 청소를 하청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운전을 했다. 한번은 물건을 싣고 인천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한 외국 여성이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사정을 물어보니 차가 고장이 났다며 난감해 했다. 그는 무려 1시간 30분 동안 고생해서 차를 수리해 주었다. 외국 여성은 고맙다며 상당한 금액의 돈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정도의 친절은 베풀고 지냅니다” 주소라도 알려달라는 간청에 그녀에게 주소만 적어 주고 돌아왔다. 다음날 외국 여성은 남편과 함께 찾아왔다. 그 남편은 바로 미 8군 사령관이었다. 그 여성이 미 8군 사령관의 아내였던 것. 미 8군 사령관 역시 돈을 전달하려 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 대신 그는 “명분 없는 돈은 받지 않습니다. 정히 나를 도와주려면 명분 있는 것을 도와주시오”라고 말했다. 미 8군 사령관은 “명분 있게 도와주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나는 운전사입니다. 그러니 미 8군에서 나오는 폐차를 내게 주면 그것을 수리해 사업을 하겠소. 폐차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시오”라고 밝혔다. 사령관은 쾌히 승락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업이 바로 대한항공이라고 한다. 대한항공을 거느린 한진그룹은 이런 우연한 인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중훈 회장의 실화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를 살릴 수도 있다. 조 회장이 이름도 모르는 외국 여성의 차를 고쳐준 것이 상상치 못한 인맥으로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우려고 하면 몇 번을 고민하고, 이 사람이 나에 대한 보답을 어떤 식으로 해올까, 내가 굳이 이 사람을 도와 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기를 수 십 번 했었던 지난날이 몹시 부끄러워진다. 베푼다는 것이 무엇인가? 보답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빌려주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베풀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고 행복한 느낌을 얻는다. 아마도 베품으로 인해서 감사를 느끼는 것은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보면 못 본 척 얼굴 돌리고 베풀지 못할 때가 많다. 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속담에 ‘돈이라면 죽은 사람도 눈을 뜬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에게 돈이 최고의 관심거리임을 말해주는 속담이다. 하지만 돈만큼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도 없다. 때로는 돈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고 사기를 치고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강도짓을 하고, 심지어는 자살을 한다. 죄에 대한 유혹을 받기도 하고, 종종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세계의 각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도, 사상의 대립보다는 경제적인 문제가 대부분이고, 사회적 범죄의 대부분도 돈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분쟁과 범죄를 일으키는 돈은 과연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아마도 쉽게 답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돈에 관한 정의를 ‘남이 가지면 나쁜 것이고 내가 가지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왜 돈을 좋아하는가? 돈이 있으면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예도, 지위도, 권력도, 쾌락도 얻을 수 있고, 원하는 시간에 일 할 수 있으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베풀 수도 있다. 이처럼 돈 자체는 귀하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도 장사나 직장이나 공장, 논, 밭 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번 돈은 고귀한 돈이다. 또한 음행이나 방탕함에 사용되는 돈은 죄의 근원이지만 극빈자나 이웃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되는 돈은 참 아름다운 돈이다. 이 같이 돈이란 그 자체에 문제 있다기보다는 어떻게 벌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것도 되고 악한 것도 된다.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하나님의 뜻대로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도 돈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서지 않고 벌기만 했지 정작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수전노가 아니었을까? 오늘도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명심하자.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돈을 가지고 못하는 일이 많다. 이런 말이 있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식욕은 살수 없다.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수 없다.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책을 살 수 있지만 지식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의사를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직위를 살 수 있지만, 존경을 살 수 없다. 돈으로 피를 살 수는 있지만 생명은 살 수 없다. 하다못해 평화롭게 잠드는 일조차 해주지 못하는 것이 돈임을 인식하고 돈의 수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9-01-18
  •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춘추전국시대 당시 위나라 왕이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때다. 위나라의 참모 계량이 여행 중 이 소식을 접하고, 급히 위나라로 돌아와 서둘러 왕을 접견하려 입궁 했다. 그를 본 왕이 ‘자네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는가?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급하게 돌아 왔는가?’ 라고 물었다. 계량이 대답했다. ‘제가 여행 중에 아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기에 폐하께 급히 알려드리려 왔습니다. 제가 조나라의 태행산에 있을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자가 초나라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초나라로 가려면 남쪽으로 가야한다고 일러주었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상관없어요. 말이 워낙 좋고 빠릅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이 아무리 좋아도 그쪽은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했지요. 그 사람은 “또 걱정이 없어요. 여비를 많이 챙겨왔으니까요”라고 대답 했습니다. 제가 또 “여비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길이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닌데”라고 하자 그 사람은 “제 마차의 마부는 실력이 매우 좋아요”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조건이 다 좋다고 해도 북쪽으로 가면 초나라와 멀어만 집니다”라고 했습니다. 계량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 참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러자 계량이 말을 이었다. “폐하의 대업은 천하통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강대해져야하고 군을 정예화해야 합니다. 조나라를 친다면 약간의 땅과 명망을 얻을 수 있겠지만 어찌 하시겠습니까? 섣불리 전쟁을 치르면 대업과는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제가 여행 중 만난 사람과 같습니다” 계랑의 말을 들은 위나라 왕은 결국 조나라를 공략하는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남원북철(수레의 끌채는 남으로 향하고 바퀴는 북으로 향한다는 말로 마음과 행위가 모순됨을 이름)이라는 고사 성어를 남긴 이 이야기는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본 예화의 주인공처럼 가야할 바른 길을 버리고 명예, 권력, 물질, 쾌락, 때문에 종종 돌아가기의 유혹에 빠지고, 혹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길을 곡선으로 빙빙 돌아가 버린 참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돌아가기’를 싫어하면서도 간혹 뒤를 돌아보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일컬어 ’길 잃음의 현상‘이라고 칭한다.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체력과 시간을 낭비하면서 어떤 효과도 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오늘 날 신앙으로 가는 길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의 행복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기독교 안에 있는 이단들과 미신적인 사이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인성을 부인하고 또 절대적인 성경의 교훈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으며 일부를 왜곡 해석하거나 다른 무엇을 성경에 첨가해 해석 한다. 또 어떤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믿으면서도 자기들의 지도자가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거짓 교훈으로 미혹해 기존 교회를 떠나 자신들에게 와야만 구원받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단들은 사도베드로의 경고처럼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벧후 3:16). 지금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의 눈을 바로 뜨고 이단적인 가르침에 경계해야 한다. 혹시 어떤 성도가 부지중에 사악한 이단에 빠진 자가 있다면 먼저 그들을 사랑과 긍휼과 인내로 경고하고 훈계함으로써 떠나도록 권고해야 한다(마 18:15~20). 그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교회의 순결을 위해 그를 징계해야 한다(고후 13:2).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의 이야기이다. 그가 전에 사회사업기관인 월드비전을 돕고 있었을 때 그 기관의 한 선생이 이렇게 고백을 했다고 한다. 선생은 고등학교 상급반에 있을 때 예수 재림을 강조한 휴거집단에 들어가 그들이 지시한대로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에만 열중했다. 그곳에는 선생의 전도를 받고 온 자매가 있었다. 그들은 학교를 포기하고 그 집단에서 찬송과 기도는 물론 전도대를 따르는데 열중했다. 긴 세월이 지나면서 대학에는 가야하겠다고 생각해 이화여자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에 있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신앙이 잘못됐고 예수의 임박한 재림은 성경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기가 전도했던 자매를 찾아가 그 집단에서 나올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매가 자기를 배신자라고 욕하면서 지옥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 책망하더라는 것이었다. 선생은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되면 자신이 불행해질 뿐 아니라 다른 선량한 사람에게도 죄를 짓는 안타까운 사실을 깨닫고 과거를 뉘우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 집단의 책임 목사라는 자는 여러 개의 적금 통장을 갖고 있었는데, 예수의 재림이후에 찾기로 되어있는 통장까지 숨겨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발견하는 사태들이라고 했다.
    • 칼럼
    • 목회자
    2019-01-04
  • 나만의 생존 무기가 있는가?
    어느 날 둥지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된 까치 한 마리가 넓은 풀밭에 두 눈을 끔벅이며 앉아 있는 두꺼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시장하던 차에 먹잇감을 발견한 까치는 공중을 한 바퀴 휙 돌아 두꺼비 앞에 내려앉았다. 넓은 풀밭이라 두꺼비가 도망갈 곳이 없다고 판단해 바로 공격하지 않고 약간의 여유를 부렸다. 까치가 나타나자 두꺼비는 너무도 놀란 듯 그대로 넘어져 하얀 배를 드러냈다. 까치가 공격하기도 전에 사지를 하늘로 뻗어버리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쉬울까? 까치는 두꺼비를 톡 쏜다. 그런데 그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몸이 비틀거렸다. 몸을 세워보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 왜 이렇게 어지러울까? 까치가 정신을 차리려다 안되겠다 싶어 그 자리를 피해 어디론가 날아가자 기절한 듯 누워있던 두꺼비가 벌떡 일어나 조용히 숲 속으로 사라진다.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한 것인데 세상 경험이 없던 까치가 두꺼비 살갗에 흐르는 독을 아무 생각 없이 덥석 삼켰던 것이다. 멋모르고 달려들었다 혼난 까치는 두 번 다시 두꺼비를 건드리지 않았다. 한번 쪼았다 비틀 거렸으니 두번 쪼았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 모르기 때문. 경험 많은 까치는 두꺼비가 눈 앞에 있어도 못 먹는 떡이라는 사실을 알고 못 본체 한다. 두꺼비만 그럴까? 아니다. 동물과 식물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무기를 갖고 있다. 실례로 어떤 동물들은 발이 빠르거나 나무타기에 능하거나 땅속에서 생활하는 등등. 아니면 경이로운 번식력을 갖고 있다. 그래야 일부가 포식자에게 당하더라도 종족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 역시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있다. 밤톨에 무수하게 붙어있는 가시와 억새의 칼날 같은 잎사귀는 함부로 접근하다간 ‘피’를 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다. 떫은 감과 신 앵두는 맛이 없으니 먹지 말라는 의미다. 마늘과 양파는 공격자의 눈을 아프게 해 방향감각을 잃게 한다. 대마초는 더 독특한 방법을 쓴다. 자신을 먹이로 삼는 동물이 다시 찾지 못하도록 하는 강한 환각 성분을 갖고 있다. 정신을 몽롱히 만들어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연한 풀들도 무기가 있다. 초식동물에 뜯어 먹인다 싶으면 먼저 희생된 풀이 고약한 냄새를 분비한다. 이 냄새는 주변 풀에게 ‘공습경보’가 되어 모든 풀이 일제히 쓰디쓴 냄새를 퍼뜨린다. ‘맛이 쓰니 더 이상 뜯어 먹지 말라’ 는 의미다. 겨울, 야산에 흔한 조릿대는 희한하게도 그 지역에 내리는 평균 눈의 양만큼만 자란다. 그 이상 자라 소복히 쌓인 눈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먹이가 궁한 초식동물에게 뜯어 먹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칙은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살아남고 약자는 뒤로 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현대 문명은 초원과는 달라서 단순히 힘으로만 지배되는 사회는 아니다. 그래서 지성, 체력, 기술력, 정신력 등 생존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꼭 완벽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든 좋으니 한 가지 무기 즉 장점만 있으면 된다. 결점이 있어도 다른 장점으로 대체하면 된다. 그러니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통 받기보다는 장점을 더 강하게 특화시키는 편이 훨씬 났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만의 무기인가? 첫째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 무기이다. 확실한 목표, 구체적인 계획은 그만큼의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무기라고 해서 항상 뭔가를 찌르고 방어하는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양적으로 계획하고 바보스럽게 일하면서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까닭에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고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곧 바로 일어나 그곳에서 부와 성공을 얻는다. 이에 세계적인 발명가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학교에 가는 대신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읽다시피 하면서 광범위한 지식을 얻었다. 내가 남들과 똑같은 것을 배우는 학교를 다녔다면 어떻게 이런 연구결과를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대학에서 공부한 과학자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연구 대상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의 비밀을 놓치고 말죠” 둘째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무기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다. 즉 삶의 이유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오랫동안 돕고 있는 탤런트 김혜자 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연기를 할 때는 괜찮지만 연기를 하지 않을 때는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죽음을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고 나서는 제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애들을 구해준 게 아니라 애들이 저를 구원해 준겁니다”. 고로 아직도 자신만의 무기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서둘러 찾아보자.
    • 칼럼
    • 목회자
    2018-12-14
  • 개미 공 이야기
    아프리카 열대 우림에서 살고 있는 개미 공의 이야기이다. 개미는 산불이 나면 여왕을 중심으로, 서로 감싸 안아 직경 1m나 되는 큰 공으로 변한 후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굴러간다고 한다. 공 바깥쪽의 개미는 ‘파삭’거리며 불에 타 죽어가지만 개미들은 여전히 꽁꽁 감싸 안고 놓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폭우가 지나고 산에 홍수가 나면 개미공은 세차게 흘러가는 물속에 뛰어들어 수많은 개미가 모두 물에 잠기지만 개미공은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빠른 속도로 앞으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드디어 강변에 도착했을 때 개미공은 큰 축구공으로 변해 있다고 한다. 수많은 개미가 죽었지만 개미 집단은 그렇게 살아남는다고 하니 참 신기하다. 생각해 보면 개미 한 마리는 너무 약하다. 사람이 손가락으로 쉽게 눌러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천 마리의 개미가 단합하면 코끼리 한 마리도 먹어치우고 산불의 위험에서도 벗어나고, 물살이 센 강물도 건널 수 있다고 한다. 개미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물론 엄청나다. 하지만 개미는 협동심을 발휘할 줄 안다. 그들이 만든 왕국은 신기하기만 하다. 개미의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편리한 개인주의를 버리고 불편하게 협동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이에 어떤 분은 ‘우리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나 사람들과 협동을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울 수도 있고 우주에도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며 협동 정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 철학자는 ‘사람의 가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완성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 그러기에 현대 사회에서 개인 영웅주의는 발붙일 곳이 없다. 개인이 혼자 싸우는 방식은 조직이나 기업이나 시장의 결정권을 장악할 수 없고 협력이라는 힘을 받아야만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조직에서나 기업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협력정신, 즉 희생정신이다. 그런데 만일 조직원들이 희생정신을 저버리면 단체로 볼 때는 개인적 이익이 잠시 보전 될 수 있겠지만 멀리 보면 이것은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단체의 이익이 개인의 근본적인 이익이기 때문에 일단 단체의 이익을 상실하면 개인의 이익은 말할 가치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장에는 두 가지 환경이 필요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이다. 사회 환경의 기본적 요소는 바로 개인이다. 즉 개인의 성장은 단체의 도움을 떠날 수 없다. 개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단체가 없고, 나라가 없이 성장할 수 있는가? 사람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고 행복한 생활과 일을 추구한다. 당연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체 이익에 손해를 주지 않는 상태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개인의 이익도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특기는 충분하게 발휘되어야 하고 개성은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단체이익은 개인이익을 합리적으로 집중하고 승화시키는 것이며 차원이 더 높은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길을 가면 안 된다. 개인의 이익을 몽땅 희생당한 채 단체 이익에만 완전히 복종하고 개인을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전체와 개인의 이익이 어우러져야 한다. 특히, 충돌이 생겼을 경우 개인은 반드시 단체에 복종하는 희생정신이 있어야한다. 자기희생의 정신은 공과 사의 관계나 개인과 단체의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 제일 높은 도덕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개인이 나라나 기업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옛날 봉건시대나 군사독재 시절에 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달성하는 희생정신은 어느 때든 필요하다. 생존경쟁에서 개인이나 국가나 한 조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옛말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한 그루의 큰 거목은 아무리 크고 굵고 우뚝 솟아 있다 해도 숲을 이룰 수 없다. 돌 하나가 아무리 커도 성벽을 만들 수 없다. 수많은 나무와 수많은 돌들이 모여 숲과 성벽을 이루는 것이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기에 개인이나, 국가나, 조직이나, 기업도 뭔가를 해내려면 자신을 집단에 융화시켜야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야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개인이나 나라, 기업, 조직은 무너진다. 실례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자원이 부족하고 국토가 제한된 섬나라 일본이 10년이 지나지 않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급기야 세계 2대 경제국가로 성장했다. 그 힘의 원천은 온 국민의 협력정신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협력 정신은 일본의 민족정신으로 이어지고, 생존과 발전에 불리한 자연환경에서도 개인을 단체로 융합시켜 단체의 지혜와 힘으로 개인의 생존과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8-12-01
  •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프랑스의 한 소녀가 암에 걸렸다. 그녀의 최대 소원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자 한 히말라야 등반팀이 소녀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소녀는 훈련을 거쳐 등반대원들과 함께 히말라야에 올랐지만 예상치 못한 눈사태를 만나 고립됐다. 통신이 두절돼 막막한 그들은 험난한 계곡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계속 기다리자는 사람, 눈보라를 헤치고 나가자는 사람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한편 소녀는 천막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두려움에 질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대원들은 논란 끝에 팀장의 ‘행동해야 한다’는 말에 따라 캠프를 떠났다. 며칠 동안 온갖 고난 끝에 베이스캠프로 귀환할 수 있었다. 대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소녀는 이제 암도 두렵지 않았고 무서운 암을 이겨낼 자신과 용기가 생겼다. 2년 후 그녀는 암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았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근심, 걱정, 나약함, 두려움을 만난다. 이때 두려움은 성공의 장애물이며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최대의 적이다. 두려움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발목을 잡고 항상 우리 곁을 따라다니며 고통을 주고, 병마를 동반한다. 우리는 이 두려움이 찾아오면 어떻게 극복할까? 먼저 두려움이란 부정적인 감정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용맹과 ‘피에 굶주린 늙은이’(Old Blood and Gus)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조지 패튼(George Patton) 장군은 언젠가 전투 직전에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자주 있으며 어떤 때는 전투 중에도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 결과 전쟁마다 승전을 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중요한 계획을 앞두고 성공하면 엄청난 의미가 있겠지만 만일 실패하면 하면서 망설여질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 결과 용기를 잃고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해 넘어 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모든 일의 실패는 부정적인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어떤 태도로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부정적인 감정에 귀를 기울인다든지, 이에 따라 행동하거나 염려하면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먼저 무엇보다 명심할 점은 두려움, 불안, 열등감 같은 실패의 감정은 하늘의 계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타고난 운명이 아니며 성스러운 진리도 아니다. 실패가 이미 선언되고 결정됐음을 의미하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운명적인 암시도 아니다. 이런 감정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온다. 오직 내면에 품고 있는 마음가짐을 나타낼 뿐 자신에게 불리하게 형성된 외부적인 요인은 결코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기 앞에 놓인 어려움의 실체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에 성공했던 기억대신 실패했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부정적인 감정이 의미하는 전부다. 미래에 일어날 일과 관련된 사실을 상징하지도 않을뿐더러 전혀 관계도 없다. 다만 미래에 대해 자신이 품고 있는 정신적인 자세를 보여 줄 뿐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부정적인 실패의 감정을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이에 굴해 염려 하거나, 걱정의 유혹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고로 우리는 단 하나라도 마음속에 부정적인 두려운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두려움을 이기려면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을 몰아내면 된다. 세상에서 불가능이란 없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즉 부정적인 생각을 바꿔야 한다. 혈청을 수혈 받지 않은 환자 중 일부는 혈청을 수혈 받은 일반 환자만큼 수술에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나이, 몸무게, 맥박, 혈압 등 차이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빠른 회복을 보였던 환자에 공통적으로 보였던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낙천적이고 쾌활하며 긍정적인 사고를 지녔다.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되리라고 기대했을 뿐만 아니라, 병상을 털고 일어나야 하는 이유나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회복해야만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직장으로 돌아가 돼! 여기서 나가 내 목표를 이루어야만 해’ 그럼 낙천적이고 쾌활하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서 두려움을 가져가시고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이다’(시 3:6). 또 ‘군대가 나를 대적하며, 진칠 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 하리로다’(시 2:3). 또한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6) 그렇다. 하나님을 신뢰한 사림은 두려움이 없다.
    • 칼럼
    • 목회자
    2018-11-16
  • 전진 하는 신앙
    우리는 지나간 세월 속에서 뼈저린 실패나 절망 속에 헤매던 과거의 시간들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약 호화로웠던 과거에 집착해 감성주의에 빠진다면 미래를 위한 발전이 없게 될 것이고 재기하기도 어렵게 될 것이다.우리의 신앙은 미래를 위한 현재의 행진이요. 앞을 향한 전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하여 항상 ‘가라’고 명령하신다. 애굽의 바로의 궤계에서 해방하여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갈 길을 홍해가 가로막고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신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유럽방문때 로마 교황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대면하는 중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오직 주위를 의식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참으로 시기에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개혁은 언제나 그러해 왔듯이 방해와 기득권 세력과의 마찰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의롭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명령에는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 교훈을 본문에서 살펴보자.첫째는 뒤에 것을 생각지 말고 앞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실현 되는 미래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행하신 10가지 재앙과 그것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셨으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셨으며 믿게 하셨다.병을 치료할 때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비롯되었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그랬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또 네가 어려서 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다(딤후 3:15).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구원의 능력이다. 장애물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을 때 권능의 역사가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앙이어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앞으로 나아갈 때 권능이 임했음을 기억하자.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그들에게 절대자로 군림 하였던 애굽의 바로의 통치를 받아오는 동안 전능자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희석되어 그들이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된다.셋째는 전진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명령이다. 인간의 소망이 다 끝났다고 말하며 그래서 길이 없다고 말할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시작하는 때이다. 하나님의 가능성은 인간이 자기 노력을 멈출 때 시작은 되는 것이다.손을 들었다는 것은 ‘항복’ 또는 ‘복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도’ 한다는 의미도 있다. ‘기도의 손을 들 때에 생각 밖에 기적이 따르게 되어진다. 기도의 손을 높이 들고.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 가자.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신령한 눈을 떠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하여 싸워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비록 우리의 형편은 아무리 위기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홍해를 갈라 구원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간증한다.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답답한 일을 당하게도 하시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새로운 기회라고 믿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자들이 되자.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는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되자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이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 뜨리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1). 결론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하 나님께 있으니 그 명령을 따라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앞만 향해 전진해 나아가라는 명령이다 거기에 승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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