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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최근 모 언론사가 설문조사한 자료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가장 존경하는 역대 목회자와 차세대 지도자 설문이었다. 성도들은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역대 한국교회 목회자 중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는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한경직(11.2%)·옥한흠(10.6%)·주기철(9.9%)·손양원(9.2%) 조용기(4.7%)·장경동(4.6%)·문익환(2.8) 목사 순으로 7인을 꼽았다. 하지만 28.5%는 ‘없음·모름·무응답’이라 답했다. 역시 주기철·손양원 목사는 한국교회의 자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 한경직·옥한흠· 조용기 목사 이후 주목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 교계에서 30여년을 다양한 계층의 지도자들을 만나다보니 혹 대중의 인기가 꼭 좋은 리더십이라고 말하긴 뭐하다. 인기발언으로 인기만 얻고 한국교회를 위한 공공성과 헌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단체나 두 가지 부류의 리더가 있다. 하는 일은 없어도 시간만 때우며 자리와 인기만 차지하려는 사람과, 반대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존경받는 리더는 후자이다. 이런 리더가 없으면 조직은 결국 쇠퇴하고 망하는 길을 걷게 된다. 리더는 한 순간의 인기와 자리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먼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 그가 리더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설문조사에서 빠졌지만 장종현· 이영훈· 정성진· 윤보환 목사 등과 같은 좋은 지도자들도 있다. 오랜 교계 생활에서 만난 사람 중 이들을 보면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인지 그들을 오해하거나 평가절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설문조사에서는 ‘한국교회 목회자 중 공적 교회를 지향하며 사회와 교회 연합, 일치를 만들어 낼 차세대 지도자(60세 이하)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성도 62.1%, 목회자 74.2%가 ‘없음/모름/무응답’이라 답했다. 이렇듯 ‘한국교회’라는 모판에서 좋은 지도자 나오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다. 최소 10년 아니 2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좋은 지도자로 세우기가 어렵다. 설문조사에서 미래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 부분에서 가능성을 보인 소수 답변으로 성도들은 이찬수 목사(5.8%), 목회자들은 소강석 목사(8.1%)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 외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자천 타천 거론 되었지만 검증이 안되어 낮설고 생소한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에 뚜렸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지도자가 나지 않는 한 교회의 번창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리더십과 리더의 한계가 있다면 상대가 나와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있다.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하다. 교회는 지금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 마땅한 지도자가 없는 리더십 공백의 상황이다. 개 교회나·기관·연합기관까지 지금 당면한 문제는 일회용 이벤트대행 지도자가 아닌 미래를 이끌 리더십을 지닌 차세대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는가 이다. 그런가하면 지도자로 거론되는 이들도 교회가 조금만 성장하면 나홀로 독자생존의 길을 가려한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가 당면한 현실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자신들이 쳐놓은 교회담과 울타리를 넘어서질 못한다. 그것이 주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안팎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대사회적 역할 수행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개인기에 취해서인지 ‘연합’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 진다. 그래도 가끔은 ‘연합’을 하기도 한다. 각자의 이해타산이 맞을 때만 말이다. 앞으로 미래지도자의 필수 전제조건은 ‘연합을 실천할 능력‘이다. 이런 마인드가 없으면 대표나 총회장, 대표회장이라는 자리를 그만 둬야 한다. 연합할 줄도 모르면서 존경받는 지도자란 먼 나라 이야기이다. 개인기 말고 동역자의식이나 형제애를 가지고 교회와 역사의 시대정신을 읽으며 팀웤을 이룰 수 있는 자이다. 이번 조사에서 ‘젊은세대의 이탈’로 대변하는 다음세대 문제와 더불어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풀어 나가야 할 과제중 하나로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간 양극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다’(92.3%)고 응답한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다음세대’와 ‘양극화’의 문제는 교회와 동역자의 생존이 걸린 목회생태계의 최우선의 과제이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필자가 교계생활에서 만나보고 생각나는 가장 존경할 만한 목회자라면, 고인이 된 이중표 목사, 현재 원로인 장차남· 림인식 목사나 나의 멘토 박종구 목사처럼 신앙인격과 삶이 아름답게 조화된 목회자를 꼽고 싶다. 또 오랜 세월 연합운동에서 섬김으로 분열된 교회의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며 소외된 자를 품은 한경직 목사처럼 그런 통합형 지도자를 요즘처럼 갈급해 한 적도 없다. 한국교회 전체를 읽고 사회와 소통시키며 다음세대를 이끌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역사와 미래, 세상과 사람을 품고 양극화를 치유하며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보려는 리더십도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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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19-03-12
  • [이효상 칼럼] 독립운동, 그 치열했던 삶의 여정이여!
    드라마같지 않은 삶의 여정 얼마전 구한말 의병 조직의 태동과 확산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항일 무장투쟁사가 재조명되었다, 드라마를 보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며 총을 쏘는 선구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독립된 나라의 꿈을 오늘 우리는 맛보고 있다. 이 드라마는 위기의 나라를 구하러 나선 민초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재소환하여 의병 활약과 선교사들의 역할을 본격 다루며 개화기 주체적 여성의 모습과 함께 친일·매국 문제를 오롯이 새겨 젊은 시청자에 강한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였다. 이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이나 영화 ‘밀정’처럼 결코 멋진 일이 아니었다. 일제의 핍박에 맞서 쫓겨 다니면서 한시도 편히 잠들 수 없는 상황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으며 36년 이상을 버텨야 하는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이었다. 항일의병운동의 시작 19세기 일제는 대한제국의 개항을 강요하고 불평등 조약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그분만 아니라 우리의 자원과 식량을 실어 날랐다. 이런 경제수탈만이 아닌 정치 군사적 식민지화는 더 노골화되어 갔으며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도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항일전선의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분명 ‘항일의병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895년 일제는 낭인들의 손에 칼을 들려 궁중을 침입하게 하고 명성황후를 죽이고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꼭두각시 정권의 하수인들을 통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단발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유림이 중심이 되어 의병들이 확산되었지만 유림이외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그 이유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평민들의 피해가 워낙 컸고 이들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힘의 결집을 가져오지 못하였던 탓이다. 1095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까지 박탈하고 이어 군사·경찰권까지 앗아갔다. 대한제국은 이름뿐인 껍데기가 되었다. 쌀같은 식량은 빼앗아가고 대신 기계로 짠 옥양목을 수입케하므로 농민경제는 식민지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의병들은 예전과 달리 유림을 비롯하여 벼슬아치, 농민지도자, 포스 등 다양한 모든 계층이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의병들은 단지전이 아닌 지구전을 벌였다. 도시에 출몰하기도 하였지만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유격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제의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병들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중심지로 삼아 활동을 다양화 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무기와 식량부족과 일제의 강력한 화력과 포위작전에 버티거나 더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병들은 전국적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한때 남한산성에 모여 서울 침공 작전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수많은 의병들은 문경세재와 지리산 골짜기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고, 임진강과 낙동강 물에 시체가 내던져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나 둘씩 의병부대가 해체되거나 이동하면서 일부는 의병운동의 기지를 만주일대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가장 극렬한 저항운동이 일어난 곳이 강화였다. 강제 해산 당한 이곳의 구 대한제국의 진위대가 일본군과 조직적인 저항을 벌였던 것이다. 이곳 의병운동을 지휘한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은 과거 이동휘 장군 휘하에 있던 장교들이었다. 강화읍 잠두교회 교인이었던 김동수와 그의 동생 김영구, 그리고 사촌인 김남수 등 삼형제가 일진회원의 지목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기도 이천 지역에서도 민심이 술렁대기 시작하자 일본군 헌병대가 즉각 진주하였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덕뜰교회와 24개 예배처소를 돌보는 구연영 전도사와 그 아들 전도사 구정서를 체포 주민들이 보는 소시장 미루나무에 묶고 공개 총살하였다. 1907년 8월 24일 구연영 44세, 아들 구정서 25세였다. 성직자로 첫 순국자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또 안중근의사는 27세에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이었으며, 스스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의병전쟁을 감행한 의병대장이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과 만주 분할지배를 협의하려고 1909년 10월 만주를 방문하게 되자, 자기의 활동 지역에 들어온 적 수괴에 대한 의병 작전의 일환으로 이토를 처단하였다. 이런 민족적 수난에서 기독교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다. 경제적 ‘납세거부운동’과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등만이 아니라, 한글운동, 야학, 농촌계몽, 여성운동 등 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곳이 기독교 교회와 사립학교였다. 당시 교회가 망국의 울분을 달래는 구국기도회 등은 종종 열었으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교회를 보호 유지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선교사들은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려 했고 ‘정교분리’를 내세움에 따라 무력항쟁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 민족과 조국을 재발견한 열사들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 군병'이라는 구국적 신앙으로 결단하고 무장한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독립투사들의 치열한 독립운동의 전개 1910년 8월, ‘병합’으로 대한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어 한민족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하였다. 이때부터 독립투사는 그 이전의 의병과 확연히 구분된다. 또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삼천리 금수강산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라는 노래를 부르며 옷고름을 다잡았다. 이렇게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립운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와 일제의 관청과 군부대를 습격하는 일이었다. 1920년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은 두만강 건너 봉오동에서 일본군 수백명을 유인하여 몰살시켰고 이어 백두산 줄기인 청산리와 어랑촌에서 홍범도, 김좌진, 이청천 등의 연합독립군으로 일본군 천 여명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연출한 청산리전투의 영웅적 활동상을 알고 있다. 이들은 무장활동에 그치지 않고 국내의 인재들을 모아 군인양성의 무관학교를 열고, 탄압을 피해 넘어온 동포들에게 농토를 개간하게 하였고 가르칠 학교를 세워 나운규, 윤동주, 문익환 같은 인물들이 명동학교를 통하여 배출되었다. 이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생업을 꾸리고 생업을 결과를 가지고 독립항쟁을 동시에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만주의 괴뢰정권과 손잡고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을 무수히 죽였다. 남은 독립군들은 산 속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싸웠고 나머지는 러시아 땅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부는 중국본토인 북경과 상해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먼저 독립운동의 기지를 만든 이가 신규식, 박은식과 같은 독립투사들이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이 급진적인 무력항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을사조약 이후부터다. 그러나 교회조직에 매이지 않은 개별적 인물들의 테러활동이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정순만 등은 평안도 장사들을 모아 수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암살을 기도했고, 평양교인 최재학 이시영은 격문을 뿌리고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강화도에서는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온 연희전문학교 출신 황도문과 대한제국 군인이었다. ‘갑곶전투’후 의병이 된 유봉진 권사는 ‘길상전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태동하게 된다. 이래서 상해는 우리 독립운동 투사들이 모여 들었다. 임시정부의 요인 외에도 이회영, 신채호, 여운형, 김창숙, 정인보 같은 지사 학자들도 모여들었다. 이때에는 3.1운동에 힘입어 독립운동 자금이 그전보다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몇 년이 못 되어 그 방향성을 가지고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임시정부에서 나온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적 독립운동을, 안창호는 하와이 등지에서 시민운동으로 독립심 고취를, 박용만은 미군 사관생도의 양성과 군사교육에 열중하였다. 이때에 의열단이 만주 길림성에서 본부를 옮겨오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테러를 위해 국내에 침투하여 총독부와 경찰서 그리고 농민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가하면 일본으로 진출해 천황이 탄 수레에 폭탄을 던지는 등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이런 흐름에 맞게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대장 등 여러 명을 폭살시키므로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소련에서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았다가 러시아로 가서 독립자금을 끌여 들였고, 홍범도는 만주에서 다시 망명하여 러시아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3.1운동과 6.10만세사건이 있은 후 일제의 탄압은 간혹했다. 이런 상황을 신채호 선생은 “강도 일본이 헌병 정치, 경찰 정치를 행하여 우리 민족은 조그만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가 일체 없어 고통과 울분,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 냉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눈뜬 소경이 되고 말았으며, 자식을 낳으면 일어를 국어라, 일본글을 국문이라 가르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라고 하며 ‘조선혁명선언’을 하게 된다. 해외의 항일 독립운동 1930년 신간회를 발족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방향성이 달랐다. 또 분열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신간회는 체포된 독립투사의 무료변론을 비롯하여 일제의 불법을 고발하고 농민, 노동자의 보호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모든 운동단체를 불법화하고 친일단체를 육성시켰다. 이런 탓에 조선 공산당이나 건국동맹과 같은 단체들은 지하운동으로 나갔다. 이러면서 중국쪽도 지지부진하였다. 간도나 북경, 상해도 독립군의 기지가 될 수 없었다. 일제는 용정의 우리 동포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주민을 모조리 죽이기도 하였고 첩자들을 풀어 독립투사들을 검거하였다. 그래서 임시정부도 중경 등지로 옮겨 갔으며 의열단도 남경 등지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항일 독립운동 투사들은 1940년 9월 17일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우리 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광복군)를 조직하였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도 1941년에 여기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쌓으면서 2차대전 참전을 준비하였고, 중국 오지인 연안이나 태항산 지구에서 항쟁을 벌였다. 이렇게 끝까지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겪은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 고난받는 민초들과 함께 항일 독립투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나그네 신세가 되었고 온갖 학대와 수모, 굶는 일, 노상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지내야만 했다. 이뿐만 아니라 헤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떨어야만 했고, 체포되면 팔 다리가 부서지는 고문을 겪으면서도 ‘독립 조국’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회영과 신채호는 이렇게 대련의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창숙은 다리가 부러져 앉은뱅이가 되었다. 이렇게 ‘독립조국’의 꿈을 가진 민중들도 만세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빚더미에 쌓였을 적에 ‘국채보상운동‘으로 여성들은 금비녀를 뽑아 바쳤고, 상인들도 독립투사들이 군자금을 모으면 몰래 돈을 거두어 주었다. 여기에 지주도, 자본가도, 양반도, 양반도, 백정도 있었다. 독립투사들이 피신하면 목숨을 걸고 숨겨주는 일이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도리가 되었다. 만주와 상해의 동포들도 밭을 갈거나 노동을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원하였다. 이렇게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세계대전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나라와 민족정신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원동력은 잃었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항일운동,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을 되새기면서 민족의 정신를 회복하여 그 에너지를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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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19-02-20
  • [이효상 칼럼] '2018년 한국의 종교현황'을 보며
    ‘한국교회, 대책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한국교회는 진정 1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를 실천할 인재가 있기는 한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단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지속 가능한가? 한국교회는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과 레퍼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전략적 이어야 한다. 교회가 더 이상 머뭇머뭇하기엔 시간이 없다. 한국교회 싱크탱크가 필요한 이유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을 지난 해 연말 발표했는데 발간 자료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문체부는 2015년 통계청 기준 내국인의 종교 인구가 43.9%(2,155만3,674명)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중 개신교가 374개 단체 967만5,761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는 불교가 482개 단체 761만9,332명, 천주교가 1개 단체 389만311명으로 뒤를 이었다. 자치단체별로는 경기도와 서울시가 단연 종교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서울시, 인천시, 광주시, 대전시, 세종시, 경기도, 강원도, 충남, 전북, 전남에서 개신교 인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불교는 부산시와 대구시, 울산시, 충북, 경북, 경남에서 가장 많았고, 천주교는 인천시에서만 2위에 올랐을 뿐 모두 3위권에 머물렀다. 1985년부터 한국의 종교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왔으나 2015년에 이르러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1,720만명에서 1995년 2,259만명, 2005년 2,497만명으로 증가해왔으나 2015년에는 2,155만명으로 줄었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개신교는 1985년 648만명, 1995년 876만명, 2005년 861만명, 2015년 967만명으로 한 때의 출렁임도 있었지만 다시 반등하여 꾸준히 증가세로 돌아선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1985년 805만명, 1995년 1,032만명, 2005년 1,072만명에서 2015년 761만명으로 크게 감소했고, 천주교도 1985년 186만명, 1995년 295만명, 2005년 514만명에서 2015년 389만명으로 떨어졌다. 이래서인지 각 종단마다 비상이 걸린 것 같다. 어찌보면 한국사회는 오랜 시간 종교 간의 평화적 공존을 유지해 왔으며, 격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법체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국가인권위가 미션스쿨의 신앙교육을 공격해온 종자연에 용역을 맡기고 지원하면서 종교간의 갈등을 유발시키고 기독교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종교편향의 행보를 해왔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미 개신교는 국민들 가운데 19.73%를 점유했고, 종교인구 내에서는 44.8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불교(15.53%/35.35%)와 천주교(7.93%/18.05%)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종교 규모 1위를 차지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견인하는 ‘주류종교’라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만큼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기울였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문체부의 발표에서 정작 문제는 종교인구 전체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40~50대 중장년층에 비해, 어린 나이로 갈수록 점차 종교인구가 감소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개신교에서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한 ‘40~44세’ 구간 인구가 82만7,744명(불교 59만5,004명, 천주교 30만6,325)인데 반해, ‘5~9세’ 구간은 51만1,294명(불교15만7,285명, 천주교14만4,180명)에 불과했다. 이는 저출산 사회문제와 결부되어 있기도 하지만 갈수록 위기에 처하고 있는 다음세대의 감소에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며 이 현실은 앞으로도 언제든 반토막 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교회가 고령화로 가고 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과 전략은 이제 필수가 아니라 전쟁과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포기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40%를 넘고, 그나마 있는 교회들도 겨우 유지하거나 몇 교회들이 모여 연합 교회학교를 운영해야만 할 정도로 인원이 줄어든 상태. 이런 교회학교를 위한 다음세대 사역은 도전적이고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여야 할 것 같다. 다시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자. 10년 아니 100년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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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19-01-30
  • [이효상 칼럼]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 무엇을 전할 것인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을 전후로, 시기는 그해 5월말까지 또는 그 이듬해 3월말까지 전국방방곡곡에서는 물론 해외에 이주해 있던 동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던 운동이다.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1,500여회를 넘었고, 참여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천 800만 정도였으니 총 인구의 10%가 넘는 참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 근대화를 여는 시민혁명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3·1운동은 한국교회의 적극적 참여로 이루어 졌다. 당시 총인구의 1.5%에 불과하였던 기독교인은 총 피검자의 17.6 나 차지하였던 것을 보아도 얼마나 적극성을 띠었는지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 운동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가 되었으며, 지도력과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기여했다. 3·1운동은 한국교회가 현실참여를 위한 결단을 내린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교회가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세워 기독교인들의 현실참여를 철저히 막은데 반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신앙적 결단에 의해 참여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치적 기능을 제거하려 노력하였지만 교회는 저항과 투쟁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3·1운동은 이런 기독교적 ‘애국’, ‘애민’의 기초에 기인(起因)하였다. 한국교회는 만세운동 이전에도 독립운동의 싹은 트고 있었던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 독립선언을 후원하였고, 3·1독립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이 고백한대로 3·1독립선언의 기초이념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바가 컸다. 3·1운동은 한국교회가 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3·1운동 전개과정에서 보면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의식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 시위를 벌인 경우도 적지않게 발견된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모든 흐름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확산과정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다. 교회와 학교, 기독청년, 여전도회와 선교회 등 기독교 조직이 운동의 연락책과 동원책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1운동은 그처럼 신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래 지속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3·1운동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지불한 댓가는 참으로 컸다. 교회는 평신도들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들까지도 적극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많았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에 헌병,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였다. 이러한 탄압과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그 대표적 사례가 1919년 4월 15일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방화사건이다, 3·1운동 참여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장로교는 체포된 자:3,804명(목사:134명, 관계지도자:202명, 남신자:2,125명, 여신자:531명, 매맞고 방면된자:2,162명, 사살된 자:41명, 수감자 1,642명, 매맞고 죽은 자:6명)과 파괴된 교회 12개 등이다. 그런가하면 감리교는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교사의 합수가 160명이었다. 총 피검자 19,525명중 기독교인이 3,426명으로 17.6%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직업적 종교인, 즉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와 불교의 두배에 이른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 471명이었는데 그중 기독교인이 309명으로 65.5%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구한말부터 여성 인권과 지위향상, 계몽에 힘썼던 기독교의 영향이 3·1운동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이근 3·1운동에서 역할 못지않게 피해도 컸다. 이러한 피해는 교세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장로교는 교회수가 1,705개소, 신자가 144,062명이었으며, 감리교는 교회가472개소, 신자가 35,482명으로 이 두 교파의 합수가 교회 2,177개소, 신자가 179,544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세는 3·1운동의 피해로 인해 전년도인 1918년에 비해 교회수 88개소, 신자수 22,409명이나 줄어들었다. 여기서 그동안 교인의 자연증가 추세까지 고려해 볼 때 교회는 3·1운동참여로 엄청난 피해와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항일민족저항운동의 한 방편이자 ‘민족교회’로 인식되었다. 3·1운동 당시와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당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그 의무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민족화합을 이루는 일에 적극적이었다.우리 민족의 공공성에 대한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하였다. 그렇게 하며 복음과 정의를 위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변질되어 분열된 모습을 극복하고, 어떤 이유로도 하나된 모습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하겠다. 3·1운동의 바람을 다시 불어오게 한국교회가 나서야 한다. 아니, 3·1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시키고 계승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3·1운동의 정신은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갈망하던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지킨 정신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먼저 3·1운동의 정신을 다시 새롭게 되살려내 교회가 이 민족을 향해 어떤 희생을 치루며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여 왔는지 정확한 메시지를 사회에 전달해야 한다. 또한 그런 모습을 재현 하므로 다시 민족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히 일어섰던 신앙의 선배들,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특히 기독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연합기관, 그리고 각 교단이 하나된 모습으로 100주년대회를 치뤄 8천만을 섬기며 통일시대를 열고 다시 도약하는 기념비적 사건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룩한 교회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다짐하는 원년이 돼야 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9-01-15
  • [이효상 칼럼] 성탄절을 맞으며 동역자님께
    샬롬(평화)!, 성탄의 절기에 얼마나 바쁘십니까?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나는 하루입니다. 차 한 잔의 온기를 나누듯 역사의 지평을 넘어 우리에게 다시는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동역자님과 교회와 북녘동포, 그리고 민족과 세계 곳곳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며 편지를 써봅니다. 동역자님. 성탄절은 그분을 반기고 행동으로 뜨겁게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성탄을 맞을 때마다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처음 예수님이 오신 곳은 특급호텔 파티의 상석이 아니라 ‘마굿간’이었습니다. 오늘 한국에 오실 예수님도 서울역의 노숙자로, 거리의 나사로로, 죄수의 옷을 입고 아니면 병자의 몸으로 오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행사에 정신없어 그분을 쫓아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마굿간’을 부담스러워하고 오히려 외면한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그렇게 세상의 명예와 출세ㆍ성공을 얻기 위해 줄서고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몸부림치고, 영원한 하늘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사역자였으면 합니다. 그런데 온갖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가려는 것을 너무도 갈망하기에,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한 희망의 불씨가 꺼져가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비판의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동역자님 다시 야성과 영성을 회복하고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 사랑을 실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진다면, 그래도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리고 언덕에서 강도만나 경제적으로, 육신적으로 소외당하는 이들의 억울한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나누며 붙들어 주므로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기쁨을 되돌려주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역자님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추운날씨입니다. 따뜻한 말과 작은 배려가 큰 힘이 됩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성탄, 바쁘다는 핑계로 달려가다 놓쳐버린 우리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나 서울역이나 시청지하도에서 또는 달동네 냉방에서 겨울을 나는 독거노인들과 그동안 함께 하지 못한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나누며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붙돋아 줄 수 있는 가슴이 따뜻한 신앙인, 그런 성탄절 말입니다. 동역자님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오늘 이 시대에 주시는 성탄의 의미를 다시 깊이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오심이 왜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하는지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동역자님에게 더 이상 성탄이 ‘앎’이 아니라 ‘삶’으로 느끼고 체감 되도록 했으면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같이 마굿간으로 내려갑시다. 슬픔이 있는 그곳이 기쁨의 성지가 되게 합시다.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기 위해선, 신앙의 깊이와 가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선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만날 때 부끄럽지 않도록... 동역자님.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의 화해자로 오신 뜻을 시대상황에서 깊이 이해함으로, 갈등과 분열, 분단을 넘어 샬롬의 전파자로 서기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재확인 하였으면 합니다. 하나된 교회가 분단된 조국의 평화를 위해 피스메이커(Peacemaker)로 뛰겠다는 각오로 저 낮은 곳을 향해 나갔으면 합니다. 동역자님.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뜨겁게 사모하다 그분을 만난 신앙의 선배들처럼, 그런 ‘예수쟁이’들로 인하여 2019년에는 한국사회가 더욱 밝아지고 건강해지기를 소원해 봅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회건강연구원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도 베풀어 주신 관심과 사랑,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날씨는 쌀쌀하지만 마음은 훈훈하게, 눈빛은 따뜻하게 전하시길 빌며 주님의 평화를, 샬롬!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12-19
  • [이효상 목사 칼럼] 문화 복음으로서 ‘성탄절’
    ​부산시에선 지역교회들이 연합하여 ‘부산시민 트리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10년째 성탄축제를 열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도 예상외로 반응이 너무 좋다. 서울에서는 시청과 국회앞에 트리를 점등하였고, 청계광장에는 등불축제인 ‘크리스마스 페스티벌’을 열어 관심을 끌었다. 이런 성탄축제가 더 활성화되고 서울, 경기,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지역마다 더 확산되었으면 한다. 역사의 지평을 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전하고 그 분의 오심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그분을 만나도록 전하는 문화로서의 복음이 ‘성탄’이 아닐까 싶다.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문화 복음으로서의 ‘성탄절’은 참으로 소중하다. 우리나라의 첫 성탄소개는 서재필박사에 의하여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만들어진 그해였다. 1986년 12월 24일자에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는 성탄 소개 기사가 처음으로 실렸다. 한민족 역사에서 최초로 성탄절을 소개하고 기념한 곳이 <독립신문>이었고. 당시 크리스마스를 ‘휴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듬해 10월에 첫 한국교회인 정동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각각 설립된 후, 1987년 12월 25일 언더우드 선교사는 성탄절 주일 예배에서 한국인을 위한 첫 장로회 성찬식을 거행했다. 이와같이 아펜젤러 선교사도 아이들을 모아서 성탄절에 대해서 전했고, 양말에 선물을 담아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소년들은 산타클로스가 준 선물로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이날 김명옥에게 첫 여성 세례를 베풀었다. 성탄절기가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의 집으로 평소 고마웠던 분들이나 교인들을 초청하여 성탄절기를 보내며 성탄의 의미를 초대받은 이들에게 전하고 음식을 베풀며 즐거워했다. 그때에 스크랜턴 선교사도 이화학당 소녀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고 한국의 첫 산타클로스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고 전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첫 번째 성탄절 모습이었다. 그런가하면 언더우드 선교사와 결혼하여 부부선교사가 된 릴리아스 홀턴 의료선교사가 쓴 <상투의 나라>에는 첫 성탄트리를 1894년 궁중에 설치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종황제의 왕비 명성황후를 치료하며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명성황후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홀튼 선교사는 매번 가마를 보내어 궁정으로 초대하는 황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소나무와 촛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궁에 설치하며 크리스마스를 선물했다. 그녀는 기독교전파의 가장 적절한 문화적 방법으로 성탄절을 알린 것뿐만 아니라, 진료소를 설치하여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였으며 여성성경반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계몽하기도 했다. 1896년 <대한 그리스도인회보>에 보면 최병헌 목사는 “대한 천지에도 성탄일에 기념하는 정성과 경축하는 풍속이 점점 흥왕할 줄로 믿노라”며 성탄문화의 확산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다. 그 이듬해, 1897년에는 배재학당의 성탄절이<독립신문>과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소개되는데, 이 행사는 대한제국 첫 공식 성탄절 행사라 할 수 있다. 주로 연등을 달고 성탄극을 공연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이렇게 전파된 성탄절은 1898년 12월27일자 <대한 그리스도인회보>에 따르면 크리스마스가 한국인에게 중요한 축일로 정착했다는 평가가 이뤄진다. “서울 성 안과 성 밖에 예수교 회당과 천주교 회당에 등불이 휘황하고 여러 천만 사람이 기쁘게 지나가니 구세주 탄일이 대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더라” 성탄절기 행사를 교회교육에 적용하고 전파하는데 앞장 선 이가 정동감리교회 한석원 목사이다. 그는 성탄 성극을 만들기도 하였고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성탄을 널리 가르쳐주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1900년대에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성탄절에 사람들이 교회당에 몰려드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선교차 방한했던 노블 부인의 일기 <승리의생활>에는 ‘회당문이 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라고 밝혔다. 백성들은 성탄절에 교회당에서 행해졌던 성탄극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전통적인 명절과는 다른 축제일의 성격을 띠어갔다.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구세군 자선냄비는 1928년부터 성탄절기에 맞춰 모금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첫 크리스마스 씰은 카나다 의료선교사로 온 셔우드 홀 박사가 결핵의 예방과 계몽을 위해 도입하였다. 그는 1932년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에 조선인의 자랑 거북선을 그려 넣었다. 그는 거북선의 포를 결핵마크에 조준하여 결핵을 무찌른다는 의도로 디자인을 만들었으나 일제치하에 저항정신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남대문으로 교체되는 수난을 겪으며 발표되었다. 이런 성탄절기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인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로 자리 잡기 시작됐다. 1936년, <매일신보>에는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간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러던 크리스마스는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규제하에 철퇴를 맞으며 수그러들었고 크리스마스에 자유와 기쁨을 잃어버리고 우울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은 평소 야간통행 금지를 실시했으나 성탄절과 12월 31일에는 예외를 적용했다.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성탄절을 휴일로 법제화했다. 6·25 전쟁 기간 중에는 미군들로부터 그 의미가 새롭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전쟁의 영향은 성탄절을 일제강점기의 소비와 여흥의 문화에서,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을 위한 기쁨과 축복의 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쟁이후 경제발전과 유신정권이 들어서며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기에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새벽송은 자유와 기쁨의 상징이었으나 1982년 1월, 야간통행금지가 풀리면서 그 의미도 크게 퇴색되어 졌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연말연시엔 춥고 배고픈 이웃에게 나눔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이어졌다. 이렇듯 한국교회가 전할 문화 복음의 콘텐츠는 ‘성탄’과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성탄과 그분의 부활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 중 복음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12-12
  • [이효상 칼럼] 순교, 그 영광스런 발자취를 따르며
    얼마 전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신사참배 80년을 보내며 일천만기도대성회를 열었다. 회개하고 기도하며 영적대각성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신사참배라는 민족적 죄를 회개기도를 하고 순교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신(女神) 숭배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이 침략에 나서며 일왕을 신(神)으로 삼아 숭배하게 된다. 그래서 한일병합을 자국의 신문에 한복입은 조선인 일본의 여신에게 절하는 그림을 묘사하며 대대적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1920년부터 일제는 건국신과 메이지신을 모시는 경성 남산에 신사 신궁을 건립,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신사참배’와 창시개명한 기부자들의 명부를 돌계단으로 만들어 ‘친일’과 ‘신사참배’를 영웅시하고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신사참배의 역사는 식민통치와 궤를 같이 한다. 일제강점기 자행된 신사참배는 민족적으로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와 동방요배, 우미유카바를 부르며 ‘국민의례’라는 명목으로 진행되었고, 학생들의 일기장에는 매일 검열받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깊게 생각하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신사참배 강요는 1937년까지 학교에 대해서는 강경하면서도 교회에 대해서는 강요할 생각이 총독부에는 없었다. 이는 교회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말부터 종파에 따라 쉽게 따르며 지도자들이 자신의 지위와 명예의 보존에 연연하여 친일에 영합하는 자와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학교에 대한 폐교와 몰수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이때, 한국교회가 학교와 각 교파들이 연합하여 ‘일사각오’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했더라면 이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신사참배에 대해 마지못해 용인하거나 도피하는 도피형과 타협을 하고 수용하는 타협형과 순교를 각오로 적극 불참하는 항거형 등 세가지로 이상규 박사는 분류했다. 타협형은 일제와 타협하여 교회를 지키고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는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례문제로 이해했다. 천주교와 감리교가 먼저 신사참배를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규정했고, 장로교도 대부분 수용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일부분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교회나 성도들이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황국신민서사>당시 일제의 탄압에 200여 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성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당했다고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밝히고 있다. 이 숫자는 당시 장로교의 3,000개 교회 35만 성도의 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타협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런 행동이 교회의 부흥이나 복음 전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환멸을 느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도피형도 있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그것이 불법인 줄 알지만 육신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서 마지못해 동참하는 척하면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을 지켜 나가려는 이들도 있었고 아예 학업을 이유로 해외로 나가려는 이들도 있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뜻있는 인사들은 지하로 숨어 한때 70만이 이르던 개신교인이 그 절반으로 줄어들기도 하였다고 역사학자 김인수 박사는 전한다, 한국교회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해외로 떠나므로 다른 대안이 없는데 일부러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 중 신학자 박윤선 박사도 있었다. 이런 도피형 가운데는 농촌으로 내려가 농촌운동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김용기 장로로 그의 농촌운동은 의식계몽운동이자 또 다른 민족운동이었다. 그런가하면 순교의 발자취를 남긴 항거형 순교자들이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소 30여명 정도가 옥중에서 순교했거나 출옥 후 고문이나 병약함으로 순교한 최봉석 목사 같은 이들도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를 교파별, 지역별로 조사하여 펴낸 김승태 박사에 따르면, 평북에 고흥봉 목사를 위시해서 24명, 평남에 김선두 목사를 위시해서 20명, 황해에 박경구 목사를 위시해서 10명, 함북에 김무생 목사, 경남에 한상동 목사를 위시해서 31명, 경북에 이원영 목사를 위시해서 20명, 충북에 송영희 목사를 위시해서 2명, 전북에 김가전 목사를 위시해서 5명, 전남에 강순명 목사를 위시해서 46명, 만주에 계성수 목사를 위시해서 26명, 일본에 김은석 목사를 위시해서 8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감리교 강종근 목사를 위시해서 9명, 성결교 김기삼 목사를 위시해서 11명, 동아기독교 김영관 목사를 위시해서 12명, 안식교 최태현 목사 1명으로 총 229명이라고 한다. 이중 옥중에서 혹은 풀려나서 순교한 사람이 29명이며, 그중 장로교에 속한 사람이 18명이고 기타가 11명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신사참배 반대로 항거하다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옥에서 순교로 영광스런 발자취를 남긴 장로교 목사는 이기풍 목사,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허성도 목사, 박연세 목사, 양용근 목사 등 6명이며, 장로에는 박관준 장로가 있었다. 그들은 분명 거짓과 불의한 사회와 변절한 교회에 대하여 온 몸으로 경고한 예언자적인 신앙의 용장들이었다. 어떻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이런 선배들의 숭고한 순교정신을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한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터툴리안의 말처럼, 1866년 9월 5일 영국의 토머스 선교사가 북한 평양의 대동강 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이래 2,600여 명이 뒤를 이어 숭고한 삶을 살았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발전 뒤에는 이처럼 신앙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신사참배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변절’과 ‘순교’의 의미를 오늘에 다시 짚어보고, 그들의 감당했던 신앙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순교신앙’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재조명하는 일은 건강한 한국교회의 영성과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민족적 죄를 회개하고 순교정신을 다시 회복하려 한 것이나, 이번 일을 계기로 감리교가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회개대열에 앞장섰다는 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강종근 목사와 양용근 목사와 주기철 목사를 기억하고 유족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담아 순교자 추서패를 전달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11-21
  • [이효상 칼럼] 젊은교회로 가자
    한국교회는 이미 큰 변화의 물줄기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휩쓸려 들어가 표류하고 있다. 문화적 변화와 더불어 인구 변동, 저출산, 사회경제적 문제, 교회의 신뢰 하락 등으로 젊은 세대는 교회를 외면한다. 대부분의 신학대학원은 미달이다. 성직자는 늘어나는데, 교인은 줄고 있다. 그런가하면 취업과 연애, 여가 등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이른바 ‘N포세대’라는 용어는 3포(연애, 결혼, 출산)와 5포(3포에 내집, 인간관계 추가)를 넘어 꿈, 희망 그리고 모든 삶의 가치를 포기한 20~30대 세대를 말하는데, 이 신조어는 쓰인 지 수년이 지나 이제는 일상적 용어가 됐다. 청년들이 포기하는 것들은 연애 결혼 출산 등에서 출발해 희망과 삶까지 확산돼 안타까운 실정이다. 많은 젊은이와 신학생이 취업이나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알바를 전전한다. 이렇게 청년의 취업난이 심각하기에 정작 청년이 식비나 주거비를 마련하느라 제대로 취업준비를 하지 못한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주변의 가난한 젊은이들이 등록금과 생활비, 주거비를 고민하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교회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런 청년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을까. 물런 말씀과 기도로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위로하지만 구체적으로 손길을 펼쳐보면 어떨까?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웃에게 손길을 펴고 선을 행한 것처럼 청년의 회복을 위한 교회의 손길이 절실하다. 고령화의 기로에 선 교회가 ‘젊은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교회가 다음세대 문제에 구체적 행동으로 접근한다면 청년들이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건강한 일꾼으로 기여할 수 있다. 기존의 안되는 방식대로 하지말고 생각을 바꾸고, 의도적으로라도 사람을 세우고 권한을 위임해주어야 한다. 젊은 구성원들과 정보와 비전을 교회가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청년문제에 다양한 관심을 갖고 다가간다면 청년들이 교회 공동체에 지체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젊은이들을 품고 다시 뛰게 할 교회의 대안은 없는 것인가? 얼마전 여름, 교회 청년들이 수련회를 가기위하여 자선바자회를 열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청년들은 제주도 수련회를 떠나 은혜가운데 마치게 되었다. 기존 교회들이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위한 관심을 넘어 지원이나 투자에는 인색하다. 젊음과 열정만 있는 그들을 위한 투자나 기금마련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젊은교회, 청년기금’을 제안한다. 이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자선바자와 커피판매 등이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수익에 후원금을 더해 초기 자금을 마련한다.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청년이 자발적이고 민주적 토론을 통해 정관을 만들고 재정의 투명성을 높이며, 건강한 작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교회에 적극적 참여와 믿음의 계승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젊은이들을 신뢰하며 쌓은 믿음의 공동체야말로 잠든 청년도 깨우고 교회도 살리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젊은교회, 청년기금’의 청년사역 프로젝트는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모든 일을 구체적으로 따라 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젊은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길을 그대로 걷게 하자는 뜻에서 시작하면 좋을 듯하다. 청년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들을 돌보는 사역에 주력하고 있는 성복중앙교회는 청년들이 주거비와 학자금대출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을 발견하고 교회내 카페에서 얻은 수익금을 청년기금으로 사용하는데, 이른바 ‘청년 주거지원을 위한 청년기금 프로젝트’이다. 그동안 카페 수익은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와 사립대 등 지역사회를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한다. 기금을 지원받으려면 교회의 교인 자격 및 청년위원회 회원 자격을 모두 갖춰야 한다. 주거비뿐 아니라 다른 용도(학자금 등)로도 사용할 수 있으며 지원금 수령 후 지원금의 사용 여부를 담당 교역자에게 알려줘야 한다. 신청자는 지원 금액을 제약 없이 자유롭게 갚고 교회는 신청자에게 상환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10년 이상을 고시촌의 수험생들에게 매일 ‘새벽밥나눔“을 통해 무료 아침을 제공해온 노량진 강남교회도 있다. 푸른 꿈을 안고 공부하는 지체들에게 교회가 함께 꿈을 실어드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누구든지 와서 마음껏 식사하게 한다. 그래서 십여년째 오병이어의 기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프로젝트는 다양하다. ‘나눔카페’를 청년들이 운영하도록 하고 그 수익금을 청년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고, 미혼남녀의 건전한 교제의 장을 만들어주기 위해 2013년부터 ‘끌림’이라는 사역을 시작하여 500여명이 참여했고 30여명이 가정을 꾸리게 한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더 나아가 급하게 돈이 필요한 청년을 긴급 지원하는 ‘희년마을기금’을 운영하고 있는 함께하는 교회, 예수마을교회 사역은 특별하다. 교회는 청년부 소속 누구라도 SOS를 쳐 오면 한 달 50만원(1년 600만원) 한도 내에서 즉시 기금을 지원한다. 심사도 하지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청년을 믿어주는 셈이다. 이자도 따로 없다. 지원금을 상환하라고 독촉하거나 눈치를 주지도 않는다.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지도 따로 정하지 않아 사실상 무상지원이다. “믿어주고 밀어주고 기회를 만들어주고 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는 이런 ‘젊은교회, 청년기금’의 청년사역 프로젝트는 교회를 젊고 역동성있게 만든다. 교회를 건강한 미래로 나가게 만든다. ‘젊은교회 청년기금’ 프로젝트는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다. 이제라도 시작하면 미래가 좋을 듯하다. 젊은이들이 몰려오는 교회, 그래서 젊은이들이 비전을 품고 꿈을 꾸고 환상을 보는 그런 교회가 그립다. 교회의 본질은 지역 사회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 나라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인재를 기르는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 싶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11-14
  • [이효상 칼럼] 이런 종교개혁 운동을 아십니까?
    501주년 종교개혁의 달을 맞았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은 실종되어만 가고 ‘개혁’교회의 간판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싶을 정도이다, 이런 때에 ‘개혁신앙’을 논하는 이들에게 종교개혁의 첫 걸음을 내디딘 이런 교회개혁 운동을 아십니까?라고 묻고 싶다. 종교개혁을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이가 그리고리 7세이다. 그는 북이탈리아 소아나 출신으로 대장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힐데브란트이다. 그는 어린 시절 로마로 가서 친척 아저씨가 원장으로 있던 성 마리아 수도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 시대는 귀족이 아닌 계급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가 되는 길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 조반니 그라지아노가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면서 그의 보좌관이 되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면서 클뤼니수도원의 일원으로 교회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 때 세속적 지역영주와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성직의 매매와 처자식을 거느린 수도사 등이 개혁의 대상이었다. 청빈한 수도회운동은 많은 제후들과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하인리히 3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당시 왕이었던 하인리히 3세는 힐데브란트의 적극적인 개혁운동을 눈여겨보았으며, 그 왕의 손에 의해 교황자리에 오른 레오 9세는 힐데브란트를 로마로 불러들여 교회개혁운동을 맡겼다. 강직하고 완고한 성격의 힐데브란트에게 교회개혁운동에 안성맞춤이었다. 개혁단체의 핵심이 된 힐데브란트는 교황 알렉산드르 2세의 재임기간 중에 막후 실력자가 되어 교회를 위한 헌신과 눈부신 활약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알렉산드르 2세에 이어 교황에 오르게 된다. 그레고리 7세로 로마 가톨릭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도덕적 개혁을 위한 자정운동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는 교회의 안정으로 일부 성직자들이 왕권과 결탁하여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교회내의 부패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왕권으로부터 독립하여야만 하며 교회는 교회 스스로 교회됨으로서 그 자체가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통일시키고, 이를 위해서 성직자의 규율을 확립하여 세속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그런 그의 개혁의지를 담은 27개조의 교황령을 내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성직매매 금지, 사제의 결혼금지, 속인의 주교 서임권 금지 등이 포함된 것이다. 1074년, 교회의 개혁과 성직자의 자정을 위한 도덕적 개혁의 나팔을 불었으니 로마에서 소집된 공의회에서 결혼 및 첩실을 거느리고 있는 모든 성직자들은 즉시 그들의 배우자를 떠나보내어야 함과 동시에 성직 후보생들은 영원한 독신 생활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교령(敎令)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 교령 가운데 가장 주의를 끄는 핵심은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결혼 금지였다. 당시 성직자가 처. 자식과 첩 등을 둠으로 친인척에 둘러싸여 바른 성직자의 길을 가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법령집속에 오래 있지만 지켜지지 않음으로 다시 주장한 것으로 그런 관행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다시금 그런 관행을 깨고 성직자 본연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하여 결혼과 성직 매매를 교회 내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고 공격하였다. 그 당시 주교가 되려면 지역영주나 왕에게 재물을 상납하여 성직을 사므로 그 자리가 많은 특혜와 이권이 있는 자리가 되어 자신이 물러날 때가 되면 그 직을 매매하거나 아니면 자녀들이나 친인척에게 세습하여 성직이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니 교회가 공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교회가 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공교회로 만드는 작업의 일환으로 도덕적 개혁운동을 선포한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일부 성직자들의 나쁜 도덕성의 일부분을 공격하였을 뿐이었고, 그 공격은 정당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그 당시의 총체적 죄악들로 인하여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해 가는 것이었다.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신선한 대안이었다. 신부(神父)나 주교가 아내나 자매가 아닌 다른 여자를 가지는 것을 금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혁명적인 칙령이 갑자기 시행되면서 많은 부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지만 특히 일부에서는 극력한 반대가 보이며 저항했다. 사도바울의 말을 빌어 독신의 은사가 있는 자에게만 금해야 한다는 등 반발하였다. 또 독일에서는 큰 소요가 일어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도덕적 개혁에 대한 교령을 시행하려고 시도했던 성직자나 교황의 사절들은 그들에 대한 공격의 분노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삼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고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많은 나라들에서는 폭력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레고리 7세는 단호했으며 얼마간의 교령을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도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요구 사항의 일점일획이라도 줄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펼치는 도덕적 개혁운동이 비상한 처방으로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을 예상하고 처음부터 평신도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이에 대비하였다. 그는 백성들과 신자들에게 결혼한 성직자와는 교제하지 말라고 열심히 권하였으며,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그러한 성직자의 결혼과 세습이나 성직매매 등 기능 수행을 필요한 경우에 물리력으로 막도록 지령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시작한 도덕적 개혁운동의 첫걸음에 탄력이 붙은 것은 경건한 수도사들의 동참이었다. 개혁적 동지들을 발견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결단과 헌신이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는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특히 독신 생활을 위하여 결단한 교령에 충실한 지지자들인 수도사들이었다. 그러나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보면 그레고리 7세, 그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부의 축적에 관심이 없는 외골수인 경건한 수도자였으며, 도덕적 경건을 다른 성직자들에게 요구한 극단적 개혁운동가였다. 그의 도덕적 개혁운동이 그 당시 사람들의 비난도 받았지만, 수도자 출신의 경건함과 정의로움, 뜨거운 열정과 강인함은 중세교회를 어두워져가는 교회에 한줄기 빛처럼 비치어 도덕적 개혁 운동을 일으키는 힘의 원천되었다. 이렇개 도덕적 개혁운동을 일으킨 그는 이후 카놋사의 굴욕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에게 패하여 결국 유배되고, 1085년 5월 25일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였고 죄악을 미워하였노라. 그리하여 나는 추방생활 중에 죽노라’ 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 채 쓸쓸한 임종을 맞이하였지만 그의 도덕적 개혁운동의 발자취는 교회사에 길이 남아있게 되었다.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으며 교회개혁의 첫 걸음을 내디딘 그레고리 7세의 도덕적 개혁운동을 다시금 조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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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18-10-17
  • [이효상 칼럼] 한국 기독교, 한글로 소통하다
    1446년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글자임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한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천대받고 있을 때, 기독교는 한글만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전파되며, '한글'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인과관계를 가져왔다. '기독교'는 ‘한글’이라는 통로를 통해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구한말, 더군다나 구식교육 즉 한문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있던 서민대중이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므로 심령의 구원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한글을 깨치어 처음으로 글눈을 뜨고서 지식과 개화의 거듭난 기쁨을 동시에 체험하니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의 뜻이 실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복음전파는 한글로 소통하며 개막되었다. 1880년대 만주에서 시작된 존 로스의 ‘예수성교전서’나 일본에서 씌여진 이수정의 현토 신약성경이 다 한글을 사용하며 시작 되었으니 한국 기독교의 첫 사업인 성경보급이 근본부터 한글운동의 시대를 열게 된 셈이다. 그 뒤에 한자를 섞어 쓴 이른바 국한문 성경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이는 일부 한자 지식인의 요구를 수용한 것 일뿐 전체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글은 성경과 찬송가뿐만 아니라, 쪽복음과 전도지 등에도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고 1895년 기산 김준근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소설 ‘천로역정’등 기독교문학의 번역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예수교회보’ 등 신문과 ‘신학월보’, ‘신생’ 등 잡지를 내며 빠르게 대중속으로 파고들며 확장되었다. 최초의 장로교공의회는 모든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였다. 한글만으로도 넉넉히 모든 진리를 적어내며, 한글만으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소통이 되며 오히려 편리하다는 생각이 선교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성도들과 대중에게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기독교의 모든 인쇄물도 대부분 한글만으로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한국기독교는 한글의 보급을 위해 말본, 사전 등의 연구와 출판에 더 주력하였다. 그런 사례로 볼 것 같으면 1874년 프랑스 선교사 달레 선교사의 ‘조선교회사’와 파리 외방선교회가 출판한 1880년 '한불자전‘ 그리고 1877년 존 로스의 ‘조선어 첫걸음’은 한글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한글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높이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이런 노력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1880년 언더우드의 ’한영문법’과 1890년 ’한어자전‘은 한글 체계화의 기초가 되었고 이어 1893년 게일선교사의 ’한영자전‘ 등은 한글 전파의 일익을 감당하였다. 그 당시 교회는 한글로 된 성경과 교과서 등 여러 한글책자의 출판을 통하여 민족을 계몽하고 근대화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런 한글운동으로 문맹을 퇴치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나 전도자들과 성도들은 신앙과 표현의 말씀을 배우며, 글을 읽고 쓰는 방법까지 깨우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말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산간벽촌의 기독교인들은 그 마을의 유식자로 말과 글의 지도자가 되어 갔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와 게일선교사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은 한글의 과학적인 면과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외에 알리려 노력하였다. 그들의 연구는 한글의 가치를 널리 세계에 번역 소개할 것만이 아니라 완고한 한학자들에게도 이를 긍정하게 만들었고, 일반 대중에게 이 글의 효용성과 편리성을 깨우치게 하였다. 이렇게 한글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리하게 되자 한글에 대한 존중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한글을 지키려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한글을 통해 복음을 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심리라 할 것이다. 한글운동의 선구자로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친구이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주시경 장로의 경우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서재필·윤치호 등과 ‘독립신문’의 제작하였고, 상동교회에서 ‘조선어강습원’을 열어 한글을 보급했다. 또 한글이 15세기에 만들어 진 글자이기 때문에 19세기 근대에 사용하기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을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주시경 선생의 펴낸 ‘국어문법(國語文法)'이나 ‘말의 소리’는 국어 문장의 성분을 알기 쉽게 제시하기 위해 최초로 구문도해(構文圖解)의 방법을 활용하였으며, 특히 근대 언어학의 용어를 순 우리말로 고안하여 이를 체계화해 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한글보급에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38년 이전까지는 ‘조선어’를 필수로 ‘일본어’를 병용토록 하였으나 그 이후 총독부가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도록 강요하고 우리 국어를 '조선어'라고 명명하며 일본어만 상용토록 하였다. 일제강점말기에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말살하려는 악랄한 수단에 못이겨 학교에서 한글이 사라지고 심지어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는 창씨개명까지 강압하여 거리와 집안세서도 우리말, 우리글이 사용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오직 기독교 교회에서만 성경이 한글로 적히고, 목사의 설교가 우리말로 선포되고, 찬송가의 가락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파되었으니 3.1운동과 더불어, 우리말, 우리글 수호의 공으로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라는 말을 듣기에 부끄럽지 아니하였다. 사실 학교에서도 우리의 말글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교사나 학생이 주일날 예배당에서 예배전 한글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고, 또한 예배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힘차게 부름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영혼의 해방과 민족혼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의 한글운동은 또 다른 애국운동이었다. 이런 한글사랑과 연구를 통한 진흥, 출판은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글운동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만이 아니라 그 밖에도 오산학교 한뫼 이윤재, 정동교회 김윤경, 새문안교회 최현배, 정태진, 정인승, 장지영 같은 한글 학자 등은 다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였거나 기독교 학교에 봉직하며 이를 연구하였고, 이를 사랑하고 이를 지키고 선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이윤재는 교회의 장로로서 한글보급 운동에 최대의 열정을 기울였기에 “한글장로”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장로교 강병주 목사는 항상 한글운동을 전도와 함께 하였기에 “한글목사”라 불리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한글운동의 중심이었다. 이런 한국 기독교의 한글운동의 학문적 열정과 관심은 '조선어학회'의 기초가 되었고,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에 반대해 1921년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기 위한 ‘조선어 학회’를 태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어학회’는 장지영, 김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며 한글 수호의 길을 걷게 된다. 일제강점기말,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대해 온 사회가 수용하려 할 적에도 기독교의 성경의 맞춤법은 한글 운동자들의 수차례 건의와 교회의 결의가 있음에도 이를 쉬이 고치지 아니하고 6.25 동란까지 낡은 맞춤법 성경을 고수한 것은 한글을 지극히 존중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한글 덕택으로 복음 진리를 알게 되었고, 이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또 다시 한글날을 맞으며 외래어의 홍수 속에서 그래도 한글을 사랑하고 이를 진흥시키는 일이 대한민국 기독교인으로 조국에 대한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또 기쁨이 되었으면 한다. 한글창제 572돌을 맞으며 민족 얼과 혼이 담긴 글과 말을 지키려 옥고를 치룬 주시경,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 한글운동을 이끌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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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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