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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과 요섭
    시인 주요한(1900-1979)과 소설가 주요섭(1902-1972)이 형제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형제에게 “요한”과 “요섭”이라는 소위 크리스천 네임을 지어 준 이는 아마도 부친 주공삼 목사였다는 사실까지도. 그러면 주공삼 목사가 아들들에게 요한과 요셉으로 이름 지어줄 때에, 성서의 어느 요한과 어느 요셉을 염두에 두었을까? 요한과 요셉은 서양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 특히 요한의 변형, 죤(John)은 11세기 이래 영어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의 이름이었고, 16세기 후반의 런던에서는 4명 중 한 사람은 존이었다고 한다. 존 F. 케네디, 존 포드(John Ford), 존 웨인(John Wayne), 존 레논(John Lennon) 등, 오늘날에도 유명인사들 중에는 존이란 이름이 흔하다. <신약성서>에는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과,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로 불렸다는 사도 요한이 있다. 세례 요한은 젊어서 헤롯에게 참수 당한다. 반면에 사도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장수해서 95세를 누렸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의 정서에 따른다면, 아들의 이름으로는 “세례 요한”보다는 “사도 요한”의 “요한”을 따를 법한데,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은 세례 요한 쪽을 따랐다. 그것으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의식 상태를 엿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순교자였고, 예수도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로 평가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요한이란 이름은 그리스도교 전파와 더불어 유럽 각지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불려진다. 역대 교황들 중에서도 우리 시대의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모두 24명이 요한이란 이름이었다. “존”에서 파생된 이름도 많다. 영국에서는 존슨(Johnson), 존즈(Jones), 존스튼(Jonston), 잭슨(Jackson),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는 젠킨스(Jenkins), 이탈리아에서는 잔니니(Giannini), 네덜란드에서는 얀센(Jansen, 독일에서는 헨델(Handel) 폴란드에서는 야노비치(Janowicz), 러시아에서는 이바노프(Ivanov) 로. “요하난”이나 “요시아”의 “Y”가 “존”이나 “조슈아”의 “J”로 변화한 것은 라틴어 표기법의 영향 때문. “요셉”이란 이름도 그랬다. 히브리어 요셉은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Joseph이 되고, 독일어로는 요제프(Josef)가 된다. 그리고 스페인어로는 호세(Jose), 이탈리어로는 주제페(Giuseppe)가 되고, 러시아어로는 이오시프(Iosif)로 변한다. 애칭은 “조(Joe)”.그리스도교 초기에서는 “성” 요셉하면 의례히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이요 족장인 요셉을 일컬었다. 우리가 교부라 부르는 당시의 신학자들이 족장 요셉의 이름 앞에 거룩한 성자를 붙여서, (영어계열에서는 St.) 받든 것은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7장 9절, “얼마 뒤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들어 보셔요. 또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이 꿈을 두고 교부들은 “부활한 예수 앞에서, 달로 상징된 성모 마리아, 태양으로 상징된 요셉, 그리고 11개의 별(배신자 유다를 제외한 사도들)이 절을 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성”요셉이라 한 것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아니라, 아리마테 요셉을 가리킨다. 부자이고 의회의원이지만, 선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동료의 결의나 행동에 동의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았다.한 때, 유대인이 두려워 예수의 제자임을 숨겼으나(요19: 38) 예수가 처형되자, 도망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거두겠다고 나섰다.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세마포에 싸서는 자신을 위해 바위를 파서 만들어두었던 묘에 장사한 것이다(마 27: 57-60). 성모 마리아의 남편으로 예수 탄생 이야기의 주역이었던 요셉이 “성”요셉으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1870년, 교황 비오 9세 때 일. 아마도 성모의 남편 요셉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입증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것이 중론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6-01
  • 하나님의 기적
    언젠가 동아일보에 실린 크리스마스의 기적의 이야기이다. 식물인간으로 투병해 온 사람이 돌연 회복했다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이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다. 그날은 정확하게 크리스마스인 25일 아침 이었다. 16년 반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 온 미국 뉴멕시코 주의 패티 화이트불(42세)의 병실에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가 침대 시트를 갈려고 다가가자 화이트불이 ‘괜찮아요’라고 말을 건넸던 것이다. 뇌사 상태에 빠졌던 환자가 의식을 되찾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대게는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이 남는다. 화이트불처럼 ‘전기가 나갔다가 들어오듯’ 갑작스레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은 드물다고 미 ABC 방송은 전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화이트불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녀는 병원 침실에 누워 있는 동안 어느새 40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6세인 1983년 넷째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들어왔으나 제왕 절개 수술 후 혼수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으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부축을 받으며 병상에서 일어난 그녀는 그간의 일을 전해 듣곤, 이내 환자복을 벗었다. 그리고 친정어머니께 안부 편지를 썼다. 나흘 뒤인 29일, 연말연시를 맞은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쇼핑을 나갔고 저녁에는 처음 얼굴을 보게 되는 넷째 아이를 포함해 자녀들과 남편을 만났다. 가족들은 그녀의 이러한 기적 같은 회복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탄절 선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 누가 오랜 세월 동안 누워 있었던 식물인간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의 능력과 자연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오늘날도 행 하신다. 즉 이천 년 전에 쇠약한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지금도 병든 자들을 치유하신다.(히13:8) 예컨대 한국에 복음이 처음 들어와 오늘날처럼 교회가 성장한 경우만 보더라도 주께서 허락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해 역사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대표적인 실례로 김 익두 목사님을 보자. 그는 무려 5천 건 이상의 질병 치유의 이적을 행했다. 또 이기풍 목사도 제주도 선교 초기에 동네 신으로 숭배 받던 큰 뱀을 죽이는 기적을 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탁월한 사역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병마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을 믿고 교회가 갑작스럽게 성장하는 교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오늘날 안타깝게도 기적이 그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비복음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주께서 주신 기적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배만 불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 증거를 위해 주어진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챈 것이다. 밝히 드러나야 할 복음은 사라지고 오직 인간만 남아 높아지려 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지 않겠지만 매스컴 보도에 의하면 실제로 ‘성령 치료’나 ‘신유 집회’ 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일부 음성적인 기적의 행위들이 돈이나 명예와 같은 불손한 목적들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 조차 누군가에 신비한 지혜와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마음이 혹하여 넋 놓고 맹목적으로 따라 다닌다. 여기 있어서는 많이 배웠다고 하여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많은 지혜가 그 사람을 속여 더 쉽게 헛된 지혜에 빠져들 수도 있게 한다. 고로 성도들은 병 고치는 능력이 있고 신비한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소문만 듣고 무조건 좇아가면 안 된다. 능력을 행하는 이들 중에는 사단의 영을 받고 능력을 행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그의 하수인에게 역사하여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는 기적의 현상보다 그 기원이 중요함을 깨달아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가 사단에 속한 자라면 절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의 기원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기적을 행하는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마7:23)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종의 삶이 아닌데도 능력을 행한다면 그들은 분명 거짓 선지자이며 노략질 하는 이리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마7:15~18) 즉 열매로 나무를 아는 법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에게는 분별 곧 열매를 통해 악한 것에서 온 것과 선한 것에서 온 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즉 원숙한 농부가 그 열매를 따라 악한 나무와 선한 나무를 가려내듯 성도들은 늘 영적인 눈으로 그 열매를 따라 냉철하게 검증해 보는 성숙함과 지혜를 가져야한다. 따라서 세상의 사람들처럼 누군가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 무조건 몰려가 추종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참된 복음을 전하는지의 여부에 더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나아가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도 이적과 기사가 신앙의 기초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어느 특정 기도원 또는 특수한 집회를 선호하는 것보다 내가 섬기고 있는 지역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바른 신앙 자세라는 것을 유념하자.
    • 칼럼
    • 목회자
    2016-06-01
  • (김지호)아름다운 수화
    아름다운 수화 김 윤 도지하철 통로의 현란한 몸짓들 앞에서요란하며 가난한 나의 언어는반성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나타내고 전하기 위해너무나 쉬웠던 시간과 규칙들이허물어져 버렸다최선의 눈빛과진지한 손짓 앞에선,어떤 소음도 속도도지금은경건해야 할 시간이다.지하철 통로에 마치 구경거리가 생긴것처럼 시작하는 도입부. ‘현란한 몸짓들’까지만 읽으면 마치 무엇인가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몸짓 앞에서 반성을 모색중이라고 한다. 그것도 자신의 언어가 요란하고 가난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흔히 청각장애인을 보면 그냥 장애인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거나 자신의 귀가 잘 들린다는 것에 감사할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화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깊은 성찰을 한다. 그들이 눈빛을 서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주고받는 손짓들은 자신의 살아온 삶의 이력들을 허물어 트리고 있다. 그들의 수화로 주고받는 대화의 진지함속으로 빠져들어간 화자는 그 순간이 경견해야할 정도로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가난한자, 병든자, 소외당하는 자, 앉은뱅이, 그밖의 장애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도움을 주셨다. 화자는 비록 예수님처럼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측은지심’을 통해 자기성찰을 하고 있다.언젠가 수화를 배우면서 청각장애인들과 접할 기회도 있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봉사도 한 적이 있었다. 비록 오랜기간은 아니었지만 청각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껴보았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외관상 불편하지만 사고는 훨씬 밝고 긍정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5-20
  • 가정을 지키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과 이벤트성 행사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필자의 나이도 이제 상당한 것 같다. 얼마 전 동사무소의 선물이 집으로 도착했다. 받고 보니 노인잔치에 대한 초대장과 아울러 작은 봉지에 담겨진 쌀 한 부대가 배달되었다. 이러한 행사들도 가정의 달이 갖는 의미라고 본다. 이러한 이벤트성 행사들이 주최자와 참여자에게 세속적 행복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가정의 존재와 유지 그리고 발전의 요소들은 생략된 것 같다. 이는 바로 성경적 가정이 무엇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최초의 가정을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만드셨다. 창세기 1:27-28과 2:18-25과 3:1부터 5:32절은 인류의 최초의 사람인 아담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크게 나누어 보면, 1장은 인간 창조이며, 2장은 1장에 창조된 아담을 통해서 하와와 함께 가정을 만드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3장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그리고 그 후로는 타락의 결과로 오는 다양한 문제들에 관해서 성경은 설명 하고 있다.하나님은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성경의 가장 첫 머리에서의 중심 주제는 가정인 것을 볼 수 있다. 가정은 인간의 삶 속에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건물로 보면 마치 기둥과 같다. 기둥이 무너지면 건물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가정이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것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가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 첫째로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과정을 보면 흙으로 만들고 생기를 불어 넣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인간의 몸은 하나님에 의하여 흙으로 만들어 졌으며, 이러한 비물질적인 형태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었다.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두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정을 파괴 시키는 사단의 전략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창세기 3장 1-6절이 될 것이다. 불행스럽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을 통해서 거부 하였다(창 3:1-24). 인간 속에는 살인(창 4:8)과 함께 각종 어두운 죄의 결과가 유입 되었고,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도구들을 저주 하셨다. 인간 타락의 결과는 아담 한사람에게만 그 영향이 미치지 아니한다. 아담과 인류는 유기적 통일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영향을 미친다. 아담의 자유 행위 속에서 인류의 의지는 하나님께 배반 하였으며, 인류의 성품은 부패하게 되었다(롬 5:12; 고전 15:21).세 번째 중요한 요소는 가정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참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타락의 결과 즉각적인 저주를 받았음에도 생명을 연장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구속 사역의 성취의 모습을 예시하심을 볼 수 있다.창세기 3:15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출현을 말씀해 주셨다. 모든 사람은 남자의 후손 이지만 예수님만이 여인의 후손 이며 예수님만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다. 즉,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파괴된 가정을 진정으로 회복시키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세속주의적 가르침과 포스트모던적 사조들이 가정을 회복시킬 수 없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적 발전이 일그러진 가정을 회복시킬 수 없다. 다만 예수님만이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다. 예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목소리가 가정에서 울러 퍼져 나와야 한다.이제 글을 마치려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가정을 만드셨다.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도구 이다. 가정이 사단의 공격을 받아서 점점 파괴되는 상황을 보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가정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어야 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5-20
  • 폭쿠리데라
    일본어 “폭쿠리(ぽっくり)“는 ”물건이 힘없이 부러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副詞)로, 사람이 갑자기 죽는 모양을 빗대어 쓰이기도 한다. 장수 일등국 일본에는 운영하는 절의 별명을 “폭구리데라(寺)”로 내걸어 성황을 누리는 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 오랜 병앓이로 자식들의 짐이 되지 않고 죽어주는 복도 시주하며 빌어야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가와사키(川崎)의 한 유료 노인시설의 양호요원이 87세, 86세, 96세의 입소자들을 3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내던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는 26세 청년. 도쿠오카(德岡)는 86세된 저명한 저널리스트. 한 잡지에 자조적인 필체로 그 청년에 대한 변병 아닌 변명을 쓰고 있어 자극이 되었다.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치매를 앓거나 듣지도 움직일 수 도 없는 노인을 간호하는 젊은이의 현실인즉 변변찮은 보수와 잦은 야근에 희망이라고는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라는 것. 누워있기만 하는 늙은이를 더 살려두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명색이 도우미들이, 목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늙은이를 더 살려준다고 해서,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확실한 터에, 한밤 중에 10분이 멀다하고 초인종을 눌러대는 그들의 용변이나 거들어주며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노인을 연명시켜 주는 짓으로, 나는 이 세상을 위해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허무감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프로페셔널한 일이라며 자부심을 가져 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에는 자포자기에 이르게 마련. “쓰레기는 버려!”하는 결단(?)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까지를 극복할 수 있는 젊은이가 많아지기를 바란다는 일 자체가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 삶에 대한 보장은 물론, 목적도 해답도 없는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함부로 말하기가 그래서 그렇지, 이 젊은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 아닌가. 목적도 없이 보람도 없이 오래만 사는 사람들이 증가하면 그들을 간호하는 사람도 덩달아 목적이 없어지는 것. 간호하고 양호하는 일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힘든 일인 것을.이런 일도 있었다. 치매를 앓는 91세 노인이 선로에서 전차에 치어죽자, 철도회사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나. 일심에서는, 망자의 부인과 장남이 “감독의무를 소홀했다”는 책임을 물어 청구액 7백20만 엔을 지불하라고 명했고, 이심에서는 부인에게만 360만 엔의 배상을 명한 바 있었던 사건. 철도회사가 소송한 피고는 부인과 4 자녀. 사고당시 85세로 요간호대상자였던 부인이 순간적으로 조는 틈에 영감이 빠져나가 일으킨 사고였다. 그러니까 간호하다 졸았던 85세 부인의 과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일심과 이심의 판결이었고, 또 4남매 모두 부모와 동거하고 있지 않았지만, 유독 부친의 간호에 헌신적이었던 장남만이 배상책임을 져야한다는 판결이기도 했다. 그나마 최고판결기관이 “가족에게 보호감독의무는 없었다.”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쿠오카는 5, 6년 전 자신의 일을 회상한다. 역 플랫폼을 가로질러 걷다가 실족하여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마침 역무원 셋이 달려와서 구해주었다. 역무원의 인도로 역장실에 인도되었을 때, 역장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하는 위로의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역장의 침묵은 훗날 후유증이 발생했을 때 돌아올지도 모르는 책임을 면하기 위한 자기방어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화가 치밀었다는 것. 치매환자 가족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철도회사로부터 손해배상청구를 받은 가족의 분노와 슬픔이 어떠했을 지를 미루어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었다고 노 저널리스트는 술회했다. 넷에서 “폭쿠리데라“를 입력하자 다음과 같은 글이 떴다. “이웃 ‘폭쿠리데라’는 한때 북적대더니, 주지가 뇌졸중으로 드러눕자 효험이 없다는 소문이 돌아 참배객이 쑥 줄어들었다.” 오죽했으면, <창세기>는 최고장수기록보유자 무드셀라가 노아의 홍수에서 익사했음을 암시하고 있을까.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5-20
  • 한국 여성의 거룩한 가정 사역
    ‘가장 아름다운 손’ 이라는 이야기이다. 명절을 맞아 자녀들이 부모의 집에 모였다.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누구의 손이 가장 예쁜가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의 손이 제일 예쁘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각자 손을 보인 후 투표를 해 가장 아름다운 손을 선정하기로 했다. 큰딸부터 막내까지 메니큐어를 바른 길고 고운 자기의 손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놓았다. ‘자 어머니도 손을 보여 주세요’ 모든 자녀들이 어리광을 부리듯이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말했다. ‘얘들아 내 손은 늙어서 쭈글쭈글하고 흉해서 너희들의 손과 비길 수가 있겠니? 그만 두자꾸나’ 그래도 자녀들이 자꾸만 졸라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쭈글쭈글 한 손등, 거칠어진 손마디, 닳아 없어진 손톱, 그것은 몹시 흉한 손 이었다. 자녀들의 매끄럽고 고운 손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딸들은 일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게 너희 어머니의 손이다. 너희들을 기르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한 손, 너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봉사한 사랑의 손, 그러나 저 마디마디에 맺힌 어머니의 사랑을 너희들은 외면하는 구나’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자녀들은 숙연해졌다.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투표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펴자 거기에는 한 결 같이 이렇게 써 있었다. ‘어머니의 손’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 이었다. 그렇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 일을 해온 어머니의 손만큼 아름다운 손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요즘 서구에서는 자녀는 낳되 결혼을 통해 가정을 갖는 일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또 최근 미국에서는 여성 해방론자들의 모성 아니다(Maternity no) 라는 현수막이 심심찮게 걸리고 결혼과 가정을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알콜 중독으로 표현하는 여성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남편에 대한 여성의 순종을 마치 노예 도덕으로 생각하여 한국에서 이민을 간 여성들 까지 이를 거부하는 경향이 늘어 미국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은 한국 젊은이들의 결혼을 주례하며 신부가 아내의 순종을 서약하는 부분을 빼달라고 해 몹시 당황했다는 이야기 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서구나 미국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기 때문이다. 남자들 사회에서도 ‘집에 가서 애나 보라’ 는 말은 그 사람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당사자인 여성들도 집안일을 하라고 말하면 내가 집 안 일이나 할 정도의 여자로밖에 안 보이느냐고 화를 내기 일쑤라고 한다. 하지만 여성들이 집안일을 천시하는 것 심각한 오해이자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고로 이제 우리 여성들은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가 담겨져 있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컨대 출산만 하더라도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태아의 뼈의 개수가 성인의 그것에 비해 약 1/5 정도가 많다고 한다. 좁은 어머니의 산도를 빠져나오기 위해 많은 뼈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도를 빠져나오면 다시 서로 붙어 그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불과 한 시간도 못되어 얼굴을 엄마한테 돌리는데 이 때 산모의 유방에서는 초유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명 황금의 액체로 불리는 이 초유에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분을 담고 있어 이를 먹이면 태변이 쉽게 배출되어 유아 황달도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면역력도 놀랍게 증가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로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를 비롯한 모든 가정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남자들의 대부분이 결혼 후에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쩌면 가정의 실질적인 중심은 여성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가정을 경제적으로 꾸려가고 지혜와 정성이 담긴 식단으로 가족의 건강을 도모하여 홈스쿨링(Home schooling)개념을 도모하여 자녀들을 효율적으로 교육하는 것과 여기에 더하여 올바른 믿음까지 전해주는 일 등 가정을 돌본다는 것은 전문가적 관점에서 보면 ‘그깟 집안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가정 사역(home ministry)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여성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돌보는 일이야 말로 여성에게 주신 거룩한 직분이요, 하나님의 소명임을 기억하며 가정 사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진리와 사랑으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가정은 복음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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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5-20
  • (김지호)영혼의 건강검진
    영혼의 건강검진 김 형 애건강검진을 위하여새벽 시간 그분을 찾았다.검진을 시작하신 그분은 말씀하신다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고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야 하는데 지나쳤고애통哀痛하는 이들과 함께하지도 않았다나를 알리지도 않는구나너는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말씀 속에 너의 영혼을 적시고육신으로 물기를 말리거라건강검진을 하려면 병원을 찾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화자는 지금 주님을 찾는다. 그것도 낮시간이 아닌 새벽에 말이다. 그것은 육신의 건강검진이 아닌 영적인 건강검진을 위한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 조용히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순간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치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무리중에 염소의 무리에 속하여 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우리는 살면서 내 주위의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져봤으며 따스한 눈길이라도 줬었는지 생각게 한다. 우리는 편견없는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작 도움을 줘야할 이웃들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심령을 적시라고 하신다. 그것은 성령의 단비로 가슴을 적시고 아주 작은 자에게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 주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은 냉소적이고 교만과 아집이 팽배한 소동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기를 원하고 계신다. 정화가 되면 좋겠다. 예수님은 분명 말씀 하셨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말이다. 우리는 영혼의 건강검진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겠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5-11
  • 뿌리 깊은 신앙
    골로새서 2:6-7을 보면 우리의 신앙이 주님 안에서 견고해져야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하신다. 생명을 가진 모든 만물은 그 특징이 자라는 것이다. 이를 흔히 자연법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고 나면 봄이 되고 나면 다시 싹이 나서 성장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정통믿음을 가지면 환경이 어떻든지 그 사람은 계속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벧 2:2에 있는 말씀처럼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해야한다. 그래서 엡 4:13에 바울은 성장하되 얼마나 성장하느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느니 말씀했다. 우리의 육신은 어느 정도 자라다가 머물지만 우리 영혼은 계속적으로 성장한다.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첫째는 뿌리깊은 신앙은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즉 뿌리가 깊어야 한다. 왜냐 하면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림 없이 나무를 지탱해 주면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디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우리 신앙인들이 잘못 인식하기 쉬운 것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세속에 주어진 현상에 너무 안주하는 기분이 든다. 즉 세속적인 명예나, 돈이나, 권력이나, 부유함이 곧 신앙 성장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영적인 문제도 그렇다. 잘못된 계시와 예언 그리고 지나친 감정주의는 주님의 사역과 말씀을 왜곡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변화 받고 주님 앞에 바른 성령을 받았다면 섬기는 교회를 통해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뿌리가 바로 박혀야 한다. 뿌리는 땅속에 들어가서 땅과 부딪쳐서 땅속에 있는 모든 영양이나 수분을 뿌리가 빨아들이는 것이다. 즉 정통신앙 속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다. 두 번째는 뿌리 깊은 신앙은 교훈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교훈대로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 교훈대로라고 하는 말은 내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님 속에 뿌리를 박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평상시에 밥먹듯이 사모하고 앙망해야 한다. 우리 한국이 이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일 낮밤과 수요 예배를 통해서 말씀에 거하는 습관이 중요하다.세번째는 뿌리 깊은 신앙은 열매 맺는 신앙이다.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는 감사입니다. 사실 감사가 감사를 낳습니다. 즉 넘치는 감사입니다. 간신히 억지로 감사가 아니고 넘치는 감사입니다. 이와같은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손양원 목사님의 갖는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그분의 두 아들은 공산주의자들 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와 같은 극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 두 아들 미국 유학 가서 주의 일꾼 삼으려 했지만 하나님 나라로 유학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집에 하나도 아니고 두 아들을 순교자로 내게 했으니 여호와여 영광을 받으옵소서.”라고 했다. 성경 속에서 뿌리 깊은 신앙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욥일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시험대에 올라 섰지만 신앙을 지킨 사람이다. 욥은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었지만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올지라 주신이도 야훼시오 거두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라고 고백했다. 사실 롬8:28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자들에게는 모든 합력하여 유익을 이루느니라”라고 기록되었다. 우리의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시류와 세속에 휩싸여 중심을 잃고 방황 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일수록 중심을 잡아야 하겠다. 결국 모든 성도들이 세상 살아갈 때에가 믿음의 뿌리만 바로 정하고 바로 믿고 바로 참된 신앙만 걸어가면 하나님 앞 에서 만사형통의 삶이 될 것이다. 오늘 그런 축복의 은혜가 독자들에게 넘치기를 기도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5-11
  • “이 사람을 보라!” - 스캔들의 생리-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559)는 베를린에서 출생한 다다이즘의 거장.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그림으로 독일군국주의와 부르주아 문화를 비판하고, 종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치는 그를 퇴폐예술가로 분류했다. 1932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캐리커처 작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1923년에 펴낸 화집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현대 도시의 스캔들과 악덕을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제목 <이 사람을 보라>는 물론 <요한복음서> 19장 5절에 나오는 빌라도의 말을 비튼 것이다.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은 죄인 예수를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 하자, 증오에 불타는 군중이 주먹을 뻗으며 외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죄와 허물을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고, 그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된다.“Ecce Homo”라는 제목을 붙인 성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세 이후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렘브란트의 것이 가장 친근할 것. 오늘날에도 스캔들에 휩쓸린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라.”하는 구호에 의해서 군중 앞에 노출되고 희생제물이 되고 있다. 스캔들은 바나나 껍질이라 했던가. 길에 떨어진, 혹은 차려둔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꼴을 빗댄 것이다. 넘어진 사람이 넝마주이이거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면 동정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명사이거나 잘 차려 입은 숙녀라면 바로 스캔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넘어지는 모습이 험할수록 멋진 스캔들이 되는 것이고. ‘아차’ 하는 낭패스러움과 이어지는 공포의 표현을 대중들은 손뼉을 치며 즐기는 것이 스캔들의 생리요 법칙인 것이다.우리는 넘어진 사람을 돌팔매질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로써 우리자신을 돌팔매질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넘어진 사람에게 허물과 죄를 씌워 추방하지만, 실상 추방당하는 그들에 의해서 구제받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스스로 자기의 허물과 죄를 던져 버릴 수가 없기에...오늘날 일부 인사들에게는 남의 스캔들이 밥이 되어주고 있다. 적어도 심심풀이는 되어준다. “돌을 던지는 너희에겐 놀이이지만, 우리에겐 죽음이다.” 이솝 우화의 개구리의 항변은 흔해빠진 현실이 되어 있다. 현대는 자신의 스캔들을 역으로 이용하여 적잖이 재미를 보기도 하는 세상이다. 스캔들을 기화로 유명해지면, 그 유명해진 자신을 드러내어 확고한 명사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수법을 이용한다. 스캔들을 자료로 책이나 영상을 만들어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스캔들 산업이라 한단다. 스캔들은 인간이 이렇게도 기묘한 생물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굴러 넘어진 사람들을 다시 매질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있는 우리가 두렵다. 음행하다 들킨 여인이 예수 앞에 서있다. 예수가 누구든지 죄 없는 이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물러갔다고 신약성서는 기록한다. 만약 오늘날의 한국적 상황에서라도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무엇이 길래!”라며 부라린 눈으로 예수를 노려보며 돌을 들어 던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그 돌들은 당장에서 여인의 표피는 물론 심장까지 망가뜨려버릴 것이다. 마침내 돌은 예수에게로 향해질 것이고. 아니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고쳐 써보면 어떨까. 예수가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 하자, 끌려온 여인이 먼저 머리를 쳐들고서는 반라의 몸을 비틀어 교태를 부리면서 유유히 군중들 틈을 벗어나는 그림은 어떨까. 여인의 손가락이 V자를 그리고 있는 그림쯤은 이미 별난 그림이 아니지 않는가. “이 사람을 보시오.”하고 그 누군가가 말해줄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리는 “우리를 보시오!”하고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약성서>에서의 스캔들의 뜻은 예나 이제나 “걸림돌”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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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5-11
  • 한 젊은이의 효성
    옛날 비엔나에서는 죄수들에게 감옥에서의 복역대신 시에서 청소부 일을 하게 하였다. 어느 날 수상이 우연히 창밖을 보다가 훌륭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눈을 쓸고 있는 청소부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상은 그 청소부가 위험한 살인범인지라 젊은이는 분명 그 부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장 젊은이를 불러 들여 죄수인 청소부에게 한 행동을 설명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젊은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각하! 그 분은 저의 아버지 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수상은 살인범으로 청소부가 된 아버지에게 대해 조금의 부끄럼도 갖지 않고 공경하는 젊은이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 일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 또한 이토록 자식을 훌륭히 교육시킨 사람이라면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 그 죄수를 즉시 석방시켜 주었다. 젊은이의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이 아버지에게 자유를 찾아 드린 것이다. 실로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져 간다고 말한 요즈음 그리스도인들도 본 예화의 젊은이와 같이 비록 못 배우고 나쁜 부모라 할지라도 공경해야 함은 물론이다. 요즈음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통하여 황당한 이유로 부모를 구타하고 살해하는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된다. 예컨대 남자 친구와 결혼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부모를 살해하고 심한 경우 평소 포악한 아버지를 오누이가 합세하여 살해했다는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갖가지 불효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다.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애먹이는 것도 불효막심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건만 하물며 아비 어미를 때리거나 경이 여기거나 살해한 자식은 마땅히 패륜아로 정죄되어야 할 것이다. 고로 부모님을 홀대하고 불손하게 대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일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부모 공경은 인간적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그분이 주신 명령인데(출 20:12) 이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천륜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결정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조건을 붙일 수 없다. 특히, 여기에 더하여 자녀들이 부모를 닮은 모습으로 출생한다는 사실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절대 순종해야 하듯 자녀들은 부모에게 조건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통해 부모를 공경할 것을 말씀하시며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으셨다. 즉 부모가 어떠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에게 조건 없는 순종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부모치고 자녀에 대한 사랑에 조건을 붙이는 부모는 없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자식 생각이 나면 목이 메이고 당신들은 굶어도 자녀의 입에 음식이 넘어가면 배불러하며 자녀가 아프면 당신의 아픔보다 더 괴로워 한다(삼하 12:15, 16). 또한 자녀의 실패는 곧 당신의 실패요. 자녀의 성공은 곧 당신의 성공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세상이 모두 범죄자라고 부르며 배척하는 자식일지라도 부모만큼은 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처벌받은 자의 싸늘한 시신을 두고 가장 처절하게 우는 이는 부모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부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이보다 더하다고 할 것이다. 고로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부모님을 모실 때 최선을 다해 섬기며 어떤 조건을 달지 말고 공경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일이 아니라면 설혹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그 뜻을 따라야한다.(창22:1~10) 더불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곧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당신의 대리자로 자녀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부모님을 당신의 대리자로 자녀들에게 주시고 그 부모님을 공경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 된 자녀들로 하여금 당신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으며 또한 그들이 그들의 부모님을 얼마나 공경하는 지를 통하여 그들이 당신을 얼마나 공경하는 지를 판단하려 하셨던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한다면 반드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있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 어떻게 눈에 보이는 부모님조차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또한 부모님을 공경할 줄도 알아야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섬겨야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 칼럼
    • 목회자
    20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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