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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제59회 총회장 최동진(崔東鎭)목사
    경북 월성 건천 출신최동진목사(崔東鎭 1920.3.6(음)~1996. 12. 14)는 1920년 3월 6일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에서 부친 최임순씨와 모친 이귀란씨 사이에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 태어난 동진은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6년 건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 1937년 2월 28일에 졸업하였다. 아직 정식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계성학교에서 배운 신앙훈련 덕택에 경주지방에 있는 모량교회에서 조사(助師)로 전도인의 일을 하다가 총회신학교에 진학했다. 6·25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1951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동노회(慶東老會)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경주 모량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 목회자로 정식 출발하였다. 1954년 전쟁이 끝난 이듬해 대구 근교의 경산군 경산읍에 소재한 경산읍교회(慶山邑敎會) 담임목사로 전임해 지도자로서, 목회자로서의 본격적인 수련을 쌓게 된다.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 경산읍교회 시무최근에 간행된 경산교회 100년사 기록에 보면, “…1946년 10월 모량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51년 7월 5일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54년 1월 1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경산교회에 부임하였다. 경산교회에서는 새 교역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12월 31일 많은 교인들이 나와 교회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였다. 교회 마당에 모래를 뿌리고 환경을 미화하여 최동진 목사를 기다렸다. 도착할 무렵에는 교회종을 쳐서 도착을 알리며 온 교회가 환영을 하였다. 곧 예배당에 모여 부임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 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참석한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최동진 목사는 1954년 9월 5일 공동의회를 거쳐(경산읍교회 제225회 당회록 1954. 8. 29) 1954년 12월 17일 위임식을 거행하여 경산읍교회 제9회 위임목사가 되었다(경산교회100년사, 설천복 편 2010. p.288-289). 최동진 목사는 이 경산읍교회에서 목회의 안정이 서서히 익어가는 중 생각지도 못했던 주기철 목사가 섬기었던 영남지방의 모교회 부산초량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된다. 경산읍교회 성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목사는 1957년 10월 1일 초량교회로 임지를 옮겨 30년 목회 황금기와 일생을 바쳐 초량교회에서 은퇴(1987. 10. 5)하기까지 심혈을 기울여 승리로운 목회의 장을 펼쳐나갔다.부산 초량교회로 옮겨 은퇴 때까지 섬겨1994년 11월에 출간된 <초량교회100년사>에서는 최동진 목사(1957. 10. 5-1987. 10. 5) 성역기간을 초량교회의 회복기와 성장기로 설정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량교회 100년사의 후기 30년간을 장식한 최동진 목사는 젊은 시절에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져 뛰어난 현실감각으로 6·25전쟁을 전후 한 시기에 청년운동에 관여하였다. 그는 비교적 늦게 신학을 마치고 교역자로 활동하는 동안 우리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부임직후 확고한 목회계획을 수립하여 당회원들의 지지하에 착실하게 초량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교회가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여 성장의 잠재력을 갖게 되면서 시야를 넓혀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최초로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아시아복음선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해외선교의 선구자로 선교비젼 제시2차로 일본에도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이철우 목사), 또 스스로 해외 각국을 순방하며 수십 차례 걸쳐 선교집회를 가졌고, 국내 전도를 위해서도 전국 각 처에 부흥강사로 활약을 하였다. 한국교회가 지반이 취약하여 개교회 중심의 사고를 떨치지 못하고 있을 시절에 이와같이 선구적으로 해외선교와 국내전도에로 방향전환을 모색하였다. 또 합동교단의 총회장으로서 1만교회운동을 주창하여 이를 교단의 방침으로 정한 뒤 이의 달성을 위해 온갖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초량교회를 시무했던 혁혁한 역대 목회자들의 맥을 이은 그 위에 한국교회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는 다른 입장에서 초량교회(草梁敎會)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초량교회100년사. 이태언 박사 1994 부산 p.227).최동진 목사의 부산 초량교회 시무기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최목사가 역사깊은 초량교회를 담임하게 됨으로써 1951년 한상동 목사 이후 좁게는 1955년 구영기 목사 이후의 과도기적 어려움을 과감히 극복하고 초량교회가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교회 내부의 침체된 요소들을 일소하고 활력소를 불어넣어 한강 이남의 어머니교회로서 위상을 재정립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초량교회가 상당한 발전의 잠재력을 마련한 바탕 위에서 최목사는 국내외 각처에 부흥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초량교회의 위상정립이 확실히 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에도 전력을 기울여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선교 초창기에 남미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일본에도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나아가 아시아선교회를 조직해 나중엔 파키스탄 등지의 현지인을 교육하여 선교사로 활용하여 선교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어서 대만과 월남 선교에도 진력하게됨으로 초량교회는 아직 한국교회 전체가 세계선교에 대해 본격적 깊은 관심을 가지기 이전부터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제59회 총회장으로서 1만 교회운동 전개최목사는 부산에서 목회를 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여 초량교회 부임 후 얼마 안되어 국립 부산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학해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가꾸어 나갔고, 1969년 4월엔 제88회 부산노회장에 피선 노회를 위해 봉사하며 교정(敎政)의 능력도 키워나갔으며, 1974년 9월 서울 평양교회에서 모인 제59회 예장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 교단의 수장으로써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 뜨거운 봉사를 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시에 이룩한 대표적인 일들로는 ① 군목후보생들은 국방부의 방침 변경에 따라 신학교 졸업 후 즉시 고시부로 넘겨 고시케 하고, 합격자를 임원회에 보고케 한 후 각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해 임관하도록 하는 제도를 확립했으며, ② 전국 산하 노회는 노회 직후 10일 이내에 총회 총무 앞으로 예산 결산서 2통을 제출하도록 한다. ③ 지방신학교로 인천신학교를 총회 인준 인재양성기관으로 결의하다. ④ 미주노회를 중부·미주서부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하다. ⑤ 교회 내의 성화(聖畵) 사용여부에 대하여서는 예배 대상으로 하지 않는한 우상이 아니지만 우상화할 우려가 있으므 사용하는 것을 삼가하기로 결의하였다. 은퇴 후에도 연구에 몰두최목사는 1987년 10월 5일 초량교회를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같은해 10월 14일 개최된 부산노회로부터는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초량교회를 은퇴한 후에도 향학열에 불타 1993년 한해 동안 미국 LA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대학원에 가서 1년간 수학을 하기도 했으며, 침례교계통의 린다비스타 신학대학원으로부터는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1996년 12월 14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 그의 장례는 초량교회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蔣)으로 사랑하는 초량교회의 성도들과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여기에 당시 설교자로 나선 그의 애제자 전 총신대학교 총장 정성구박사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평가했다.“목사님께서는 초량교회의 어진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의 어르신이었고 한국교회의 어른이셨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목회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을 떠나 보내면서 사도 바울께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남긴 간증이 생각나는군요. 딤후 4:7-8에 내가 선한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신 어른이셨습니다. 첫째, 최목사님은 참으로 신덕(信德)을 겸비하신 어지신 목자였습니다. 둘째, 최목사님은 대설교가요 대부흥사였습니다. 셋째, 목사님은 선교의 비젼을 가진 선교의 프론티어(Fronteer)였습니다. 넷째, 최목사님은 위대한 교정가(敎政家)이며 행정가(行政家)였습니다. 초량교회의 행정을 쇄신하여 장로교회의 전형적인 교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총회장이 되신 후에 목사님이 벌리신 1만교회운동은 오늘 우리교단의 성장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총회목회대학원을 개설 목회자 자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찬하하였다(정성구 박사의 조사, 고 최동진 목사님을 보내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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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7-30
  • 16. 제17회 총회장 염봉남(廉鳳南)목사
    충청도 괴산 출신염봉남 목사(1875. 9. 27-1036. 11. 17)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1833년 한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1804년 기능참봉(冀陵參奉)이란 말직(末職)을 받아 봉직한 적도 있는 그는 대구로 내려와 우연히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남성정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결신해 1911년 10월 13일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대구 선교지부에 나와있는 어도만(Rev. Walter C. Erdman 魚도万)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연봉남이 대구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미국인이 서투른 우리 말로 전도하는 것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말로만 듣던 미국인을 직접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미국놈 물러가라”며 욕설을 퍼 붓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간단한 열설을 하고 난 후에는 쪽복음을 나누어 주면서 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조물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선교사가 바로 공식 선교사로 영남지역의 최초선교사로 부산에 파송 받은 후 대구를 거쳐 나중 평양선교부 교육담당 선교책임을 맡은 안의와(Rev. James E. Adams, 安義窩) 목사였다. 그는 배위량(William M. Baivd, 裵偉良) 선교사의 처남이다.안의와 선교사로부터 쪽복음 받아염봉남은 청중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되었다. 선교사로부터 쪽복음을(마태복음) 한권 얻어 가지고 와서 그 책을 1장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복음 제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읽는 순간 이 종교는 양반들이 믿을 종교라고 생각이 들어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는 쪽복음으로 된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이 책은 양반 뿐만 아니라 천민들도 꼭 읽어야 할 귀중한 책임을 알고 선교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나섰다. 남문 안에 있는 남성정 선교사집을 찾아가서 대담하게 대문을 노크하였다. 누구요?라는 큰 소리가 대문 안에서 들렸다. “저는 선교사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온 염봉남이라는 사람이외다.” 아담스 선교사는 신기해 하며 문을 열어 주고 염봉남 청년을 반가히 맞아 드렸다. “선교사님 저에게 쪽복음을 팔게 해 주세요. 저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와 성경 쪽복음을 팔게 해 달라고 하는 염봉남에게 아담스(Adams)는 쪽복음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염봉남은 안의와 선교사의 선교구역에서 일할 수 있는 조사(助師)로 임명을 받고 권서로 활동하였는데, 옆에서 주의깊게 지켜본 안의와는 염봉남의 열심에 놀라고 말았다. 쪽복음 파는 권서로 출발한편 그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해 개설되는 달(月)성경학교에 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꼭 참석하여 3년간의 모든 과정을 다 이수하였다. 이에 감동한 안의와 선교사는 염봉남을 1912년 자신의 순회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잠시동안 달성지방 내에 있는 3개처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의 일을 하였다. 염봉남은 이와같이 안의와 선교사의 따뜻한 보살핌과 후원으로 1915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치자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던 경산읍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1920년 9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1921년 1월부터 1923년 1월 6일까지 경산읍교회 제1대 위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잠시 떠났다가, 1925년 2월에 임시목사로 다시 부임 그 해 말에 사임하고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로 전임하였다(경산교회 100년사, 김광남, 2010 대구 pp.196-202). 염봉남 목사는 경북노회 안에서 이름난 양반목사로 존경 받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대구서문교회(구 신정교회) 당회에서 청빙서를 작성해 한 부는 염봉남 목사에게, 또 한 부는 경북노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염봉남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시절에 매월 생활비를 보태주고 학비를 보조해 준 경산읍교회를 떠날 수 없어서 처음엔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거절하였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2005. 장로교출판사 p.79). 그러나 재차 신정교회로부터 강력하게 청빙해 오므로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新町敎會)를 방문하여 당회원들과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장로님들의 뜻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경북도청이 있는 대구로 목회지를 옮기고 싶지만 목사가 기본적인 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진중한 속마음의 거절의사를 전달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정교회 당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설득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회원들 마음 속에 약속이나 한듯,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똘똘뭉쳐 염봉남 목사를 적극적으로 모셔야겠다는 강한 의중을 갖고 염목사를 설득하였다. “예! 목사님의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경산읍교회도 하나님이 세운 교회이고, 대구 신정교회도 하나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렇게도 우리 신정교회 당회원들의 마음과 신정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이렇게 얼마동안 서로간 대화를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상면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대구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경산읍교회 목사 사택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염목사 모르게 모여 의논하게 되었다. 당회원들 가운데 어떤 장로는 우리 교회 염봉남 목사를 보다 큰 도시에 가서 목회할 수 있도록 하게 하자고 제안하여 누가 강권한 것도 아닌데 당회원들이 뜻을 모았다.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당회장 염봉남 목사 사택을 방문해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수락하시어 더 큰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권유를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게 되자 염봉남 목사의 대구 신정교회로 부임하는 문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아무 어려운 문제없이 경북의 중심지 대도시인 대구 신정교회로 은혜 가운데 부임하게 되었다. 염봉남 목사가 부임한 1922년 신정교회 교인수는 4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33년 교인총수는 1988명으로 성장하였고 1928년 5월 6일 대지 569평 건평 294평의 새 예배당을 건축 헌당 하였으며, 염목사는 신앙인격과 리더십도 겸비하여 경북노회 노회장으로 두번이나(1920년, 1921년) 역임하였고, 1928년 9월 7일에 모인 (대구신정교회당)총회에서 교단의 수장격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7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대구 신정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총회장으로 당선된 염봉남 목사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정교회 성도들과 경북노회 전교회가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그가 사회석에서 총회를 진행하면서 뜻있는 몇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만 7년이 되면 1년씩 안식년을 주기로 하다. ② 총회산학 각 노회는 농촌부를 설치하고 동시에 총회는 농보(農報) “농민생활”지를 간행하기로 하다. ③ 조선주일신보 “아이생활”지를 출판하도록 하다. ④ 장로교 감리교가 협동하여 12월에 “신정찬송가”를 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를 부흥시킨 목사이고 신정교회 정통성을 이어받은 제2교회 90년 역사에서 노회와 총회에서 많은 공헌을 한 위대한 목사로 역사에 길이 남긴 교회의 지도자로 승리한 주의 종으로 길이 기억해야 할 영남지역의 초기 지도자였다고 하겠다. 1936년 1월 17일 염목사는 조용히 주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박사 저 2015, p.159).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7-23
  • 17. 제38회 총회장 명신홍(明信弘)목사
    평안도 평원출신명신홍목사(1904. 4. 14~1975. 10. 14)는 평안남도 김제면 원장리 145번지에 명진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께서는 무식했고 딸만 셋이나 낳다가 네 번째 장손인 신홍을 얻어 어떻게 해서라도 교육을 해야겠다는 열심히 있어 나이 5살 때 집에서 4리쯤 떨어진 리인리(里仁里)에 교회가 들어서고 또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학교 관란학교에 입학시켰다. 신홍은 생애 처음으로 배움의 터전에서 자랐다. 9살 되었을 때 합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데 다른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산술만은 아직 아라비아 숫자도 익히지 못한 터라 3학년의 산수를 따라 갈려니 어려워 학교 가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손위 누나가 위안을 주며 친히 가정교사 노릇을 해주어 점점 공부성적이 뛰어 올랐고 얼마 후에는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하였다. 집에서 5리가 넘는 교회도 주일 낮 예배만 아니라 칠흙같은 어두운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다닐 정도로 신앙생활에도 열성적이었다.이렇게 합성학교를 마친 후에는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그때 마침 숭실중학교에서 우호익선생을 중심으로 한 시험관이 합성학교에 와서 입학시험을 치루는데 부모님께서는 장사 밑천을 대서라도 공부를 시켜보고자 해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합격이 되어 그해 4월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15세의 소년으로 숭실중학교 기숙사의 찬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며 1년간 다섯 명이 한 방에 살면서 때로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모두들 거리로 뛰쳐나가 처음으로 조국이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 조선도 어서 속히 독립국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음에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한 30리쯤 떨어진 평원군 덕산면 봉도리로 이사를 했다.18세가 되던 해에 다시 숭실중학교 4학년에 복교해 졸업하고, 1929년 겨울 김제면 원양리에 살던 차도정(車道正)씨의 장녀 차덕실(車德實)을 만나 결혼하였고 1남 3녀를 낳았다.명신홍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변화의 계기가 왔는데,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세계와 내일을 준비하는 유학의 길이 트인 것이다. 여러 어려움을 겪은 생활이었지만 내일의 한국교회의 큰 일꾼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기도 했다.동경에 있는 일본대학(日本大學)에 들어가 고학으로 공부했다. 정식 졸업은 못하였으나 수료과정을 마치고 같은 지역에 있는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 본과에 진학하여 3년 과정을 이수하고 수료하였다. 그때만 해도 일제하라 더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일본에서의 생활을 접고 1933년 귀국선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1937년까지 평안북도 평원군에 있는 진지동교회에서 처음엔 전도사로, 나중엔 목사로 장립을 받고 목회를 하였다.미국에서 신학공부, 한때 미 군정 통역관 활동명신홍목사는 보다 먼 미래의 조선교회를 위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1937년 도미 계획을 실천, 태평양을 건너 보수정통신학의 명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하여 그곳에서 신학석사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마친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칼빈신학교로 가서 대학원과정을 이수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대동아 전쟁의 여파로 귀국할 형편이 못되어 뉴욕으로 가서 귀국 기회를 엿보면서 뉴욕에 있는 비브리칼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다시 신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졸업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귀국할 형편이 또 미루어지면서 잠시 동안 미 국무성 우편물 검열국에서 검열관의 자리를 얻어 1945년 8월 귀국하기 직전까지 근무하였다.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에 항복하게 되어 광복이 되자 즉시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자마자 미쳐 정부수립 작업의 과도기로 유엔 감시 하에 총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정부격인 미 군정청(美軍政廳)에서 고문관으로 봉직,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이승만)가 정식 발족되기까지 해방공간 2년간의 환란기를 통역관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국가발전에 일시적이었지만 크게 이바지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서 목회1946년부터 1957년까지 만 10년이 넘는 인생 황금기에 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에 부임, 담임목사로 지역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써 리더십을 십분 발휘한 기간이기도 했다. <서문교회 100년사>를 쓴 이혜정박사는 정재순목사가 사임함에 따라 1946년 명신홍목사가 신정교회(新町敎會)에 부임했다. 명신홍목사는 1946년 7월 24일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8·15 해방과 6·25 전쟁 등 한국 격동기 11년간 시무하면서 교회 창립 40주년 행사 등 교회를 안정시킨 목회자이다. …명신홍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신 목회자로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1947년 2월 16일 위임받아 1957년까지 11년간 담임목사로 헌신하면서 특히 미 군정청 고문관 시절에 영어 통역관의 역할을 하면서 대구시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1948년 10월 17일부터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교육기관으로 ‘유치원’을 개원 운영했고, 1950년 6월엔 ‘중등부’가 조직되었고 1952년엔 전쟁의 와중에서도 교회 설립 4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했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편 p168).총회신학교 교수 및 학장 역임명신홍목사의 인생 후반부 사역과 활동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교단의 인재양성 기관이요, 목회자 양성기관인 총회신학교 교수사역과 학장의 활동이라 하겠다. 그가 총회신학교와의 인연은 6·25전쟁으로 인해 총회신학교가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잠시 운영되고 있을 때부터 교단의 요청으로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본다.그는 이미 경북지역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목회자로 서문교회만 섬긴 목사가 아니라 경북노회(1951년)와 전쟁이 한참 전개되고 있던 1953년 4월 자기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3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이미 교계에 익히 알려질 정도로 지도자상을 나타내 보여주었다.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되자 총회신학교도 자연히 정부를 따라 수도 서울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명신홍목사도 교수자격으로 서울로 이거하게 되었다. 그가 상경한 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1953년 4월엔 화란 왓스코텐 개혁교회 동부대회에 한국대표로, 이듬해 1954년 8월엔 미국 프린스톤 개혁교회세계대회, 1955년 8월 미국 에번스톤 세계기독교연합회, 1959년 3월 미국 미주리 주 타키오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D.D), 1962년 9월 총회장으로부터 교단과 신학교에 끼친 공로로 표창, 이외에도 여러 기관의 이사(H.L.K.X 방송), 장로교와 개혁교회 소속 세계대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드디어 1965년 2월엔 그가 평생 몸담아 가르치던 총회신학교 수장(교장)의 자리에 올라 1969년 2월 퇴임하기까지 봉사하였다. 예장총회장을 지낸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명신홍목사를 “목회자, 교회행정가, 뛰어난 교육행정가”로 평한 바 있으며(신학교육과목회, 정성구, 1997. p.47), 대성교회 원로요 총회장을 역임한 서기행목사는 “…명(신홍)박사님은 오늘의 우리 예장통합 측을 있게 한 공로자요, 오늘의 총신대학교의 기초를 쌓은 분”(같은 책 p.50)이라고 했다. 박형룡·박윤선·명신홍 3대 거장그의 제자요 총신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김의한 박사도 “명(明)목사님은 명(名)목사님이셨다. 목회에 대성하셨고 총회장도 역임하셨고, 총신의 교장으로도 봉사하셨다.”(같은 책 p.201)<신학교육과목회>라는 제목으로 명신홍박사의 전기를 펴낸 전 총신대학교 총장 정성구박사는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우선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학체계를 세웠던 일이고, 나의 영적 아버지였던 박윤선 박사님으로 부터 선경신학의 맥과 신앙의 참모습을 전승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신홍 박사님으로 부터는 설교의 신학과 실제의 참뜻을 배웠다. 세 분 모두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기에 후일 편자가 칼빈주의 사상을 정리해서 20년 이상 가르칠 수 있게 된 동기가 되었다”(같은 책 서문, 정성구의 글 p.37-38 참조)1953년 4월 24일~28일에 있었던 대구서문교회 총회에서 결의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① 통일 없는 휴전 반대하기로 하다. ② 10월6일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교 설립허가를 받다(교장 감부열 선교사). ③ 경안노회를 경안·강동 노회로 분리 허락하다. ④ 예배당에서 성극과 유희하는 것은 가히 합당치 못함으로 각 당회가 신중히 처리하기로 하다. ⑤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 결의 위반 및 성경 유오설을 주장했음으로 목사직(牧師職)을 파면하고 그 직분 행함을 금하다. ⑥ 기독교장로회 측이 분열해 나가다(제98회 총회 찰요, 예장총회 2014. 3 p.18 참조).현재의 사당동 총신대학교 종합관 새 건물 이전의 본관건물은 학교발전계획에 따라 철거되었지만 본관 구건물은 명신홍목사가 육신의 질병을 몸에 지닌 채 본관건물 신축을 위해 미국에 가서 교통비(비행기를 타지 않고 선편으로 귀국함)를 아끼고 숙식비를 아끼며 모금한 미국교회의 후원으로 건축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는 전설처럼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명신홍 학장의 총신사랑의 열정을 후학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7-23
  • 15. 제50회 총회장 정규오(丁奎五)목사
    전남 나주 출생정규오목사(丁奎五, 1914. 10. 14~2006. 1. 19)는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용동)에서 정효순(丁孝純)씨와 강누동(姜樓洞)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1907년 9월 18일엔 조선장로교 7인의 목사가 탄생했고, 목사 장로가 중심이 되어 노회(老會)가 형성되었고, 또 1912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이 총회가 조직된지 2년째 되는 해인 1914년 장차 그 총회를 위해서 사역할 한 주의 종이 조선의 남쪽 끝 나주(羅州) 땅에서 태어났다. 나주는 공교롭게도 이 지역을 선교지로 위임받은 배유지(Rev.Bell Eugene 裵裕址)목사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배유지 선교사가 그토록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몸 바치고 헌신했던 그 땅에 앞으로 그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헌신할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심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던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정규오가 태어난 1914년의 방산(芳山)지역은 이미 1896년(고종 33년)에 한반도에 13도 제도가 시행되어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어졌는데, 전라남도로 나누어진 1896년에 전남지방에 최초로 복음이 전래된 지역은 당시 전남의 행정중심지였던 나주였다. 그해 11월에 당시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였던 이눌서(Rev. Reynoles William. D)와 배유지 선교사는 함께 전남지역의 나주를 답사하고 복음을 전했다. 주일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아정규오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고 주일학교에서 철저한 보수주의 신앙훈련을 받았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겨울이나 여름휴가를 이용 성경을 집중연구하는 부흥사경회로 교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는데 치중하였다. 나아가 새벽기도회, 가정예배, 금요구역예배도 거의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정규오는 동내에 세워진 교회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한국인 목사 장로들을 통해서도 교육을 받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보수적인 가르침과 신앙교육은 후일 그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누구보다도 확신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때 갈고 다져진 철저한 주일학교 교육과 사경회를 통해 얻은 신앙적인 확신에서 였다고 하겠다. 정규오는 당시 방산교회 안에 사립 사설강습소가 있어서 2년동안 학습하였고, 후에는 다도면 판촌에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어린 정규오에게 평생을 좌우할 선물이 주어졌는데,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책(冊)이었다. 당시 당산교회 송복순전도사님 남편 남복우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많은 책들이 그에게 넘어왔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동서양의 지식과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책 중에는 일본에서 간행된 중학 강의록과 와세다대학 강의록이 있어 지식의 기초를 쌓았고, 엔사이구로베지아 일본대사상전집, 법학, 철학, 윤리학에 관한 서적과 칼 맑스가 쓴 자본론 전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이론 중에 맑스의 사상을 연구한 이유는 그의 생질 이민호와 이론투쟁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문학·법학·철학·신학 등 사상 섭렵그는 1945년 9월 신학교에 진학하기 전부터 독학을 통해 여러 학문 세계를 접하면서 신학연구를 위한 인문소양의 지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이미 한 시대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비단계로 미리 많은 책들을 통해 그의 사상기반을 다지신 것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 생애의 큰 사명이기도 했다. 좌·우익 대결 속에 6·25라는 참상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상과 허구를 직접 눈으로 체험한 자로써 공산주의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변호할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규오목사 생애 가운데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신학교에 입학 하기 전에 이미 박형용박사가 쓴 한국의 정통 기독교 변증서라고 할 수 있는 1935년판 <신학난제선평>(평양신학교 간행)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을 신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시 조선교회에서 유행하던 이사상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고 비평한 전 18장 850페이지에 달하는 변증서요, 급히 몰아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한 경고를 시도한 신학서적이었다. 딱딱하고 어려운 학술서적이지만 그는 일본에서 나온 많은 사상서들을 읽은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그가 1934년 11월부터 1940년 초까지 광양진상금융조합 서기로 6년간 일할 때에 출석했던 당시 광동중앙교회 담임목사(김순배)로부터 서제에서 선물로 받았던 애장품이었는데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그 책의 저자 밑에 강의를 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책을 열심히 읽었던지 그 책의 내용을 저자 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 책만큼은 저자 박박사님보다 제가 신학난제선평을 더 잘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년 정규오가 박형룡박사의 책과 만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규오는 드디어 1945년 9월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8선이 그어져 남북간의 통행이 막히게 되고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산 당하고, 8·15 광복 직후 <남부총회>라는 이름으로 복구되었으나, 총회직영신학교로 자유주위 신학을 대변해 온 ‘조선신학교’가 김재준을 중심으로 일부 교수들이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정통보수신학에 반(反)하는 성경관과 신학을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그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투쟁함으로 장로교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자 일어난 그룹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였다. 51인 신앙동지회 규합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당시 남부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은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보수신학을 사랑하는 동지 51인을 규합하여 1947년 4월 18일~22일에 대구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되는 제33회 총회로 내려가 진정서를 제출,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고 그 주동자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진정서 안에는 (전문) 조선신학교에 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울 때 우리는 우리의 유시(幼時)부터 가지고 오는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정규오 목사의 신앙관과 정통보수신학과 정의감이 얼마나 투절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여기서 잠시 정규오 목사와 박형룡 박사의 관계를 짚고 가자. 이미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만나기전 그의 저서를 읽고 만난 점과, 해방 후 박형룡 박사는 10년여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목숨을 건 모험끝에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박박사는 고려신학교 초청도 있었지만 51인 신앙동지회 탄원서에 용기를 얻어 엘리야 선지자를 생각하면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여관)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간 51인 신앙동지회를 대표한 정규오 회장과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탄원서한이 없었던들 귀국의 결심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한국교회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칠 때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고백하였다(정규오 생애와 삶 p.34. 2011).정규오 목사를 이야기 할 때는 W.C.C 반대 투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동지회는 1953년 7월 미국복음주희협회와 같은 소속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N.A.E)를 조직했다. 이 세력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일정한 교권을 형성하면서 WCC에 대항하였다. 에큐메니칼운동은 세계교회들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1차 총회(1948)와 2차 총회(1955)에 대표를 파송하였는데, 이 WCC문제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1955), 42회 총회(1957) 43회 총회(1958)에서 양측이 충돌하고 말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에큐메니칼연구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지지측에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반대측에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였다. 이 두 그룹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반대에 박형룡 정규오였고, 지지측엔 한경직 유호준이었다. 이렇게 정규오 목사는 언제나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함께 갔고 오늘의 보수신학을 지키는 선구자로 남게 되었다. 1979년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제64회 총회시 이끌고 나갔던 개혁측을 자신이 죽기전 합동으로 환원시키고, 그는 2006년 1월 19일 주님의 품에 안기웠다.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제50회 총회의 결의 안건들을 보면 ①교단지<기독신보>를 당국으로부터 인가받아 간행했고, ②교역자 사례비의 5%를 적립해 은급제도 시동을 걸었으며, ③총회신학교 신축건물을 기공했고, ④WCC와 NCC와 관계되는 단체와는 협력 않키로 결의를 했다.김남식은 해원 정규오를 가르켜 <그는 우리 시대의 거목이었다>면서, 고 정규오 목사의 인간됨과 일생을 농축한 말로 쉼표를 찍었다(「해원 정규오목사」 새한기획 출판부 2007. 서울 p.45).
    • 지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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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9
  • 14. 제43회 총회장 노진현(盧震鉉)목사
    부산 구포에서 출생노진현목사(1908. 8. 28~1998. 10. 15)는 부산 구포에서 아버지 노원필과 어머니 장소개씨 사이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명학교(동래고보 전신)에 진학하였으나 당시 이 학교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면학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상경(上京)하였다. 그가 소학교를 마치고 동래고보를 다닐 때 친구를 따라 구포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서울에서의 노진현은 몇군대 학교를 알아보다가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입학 허락을 받게 되어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때 마침 보성학교(普成學校)에 다니는 고향 친구를 만나 종로 YMCA 뒤에 있는 중앙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고향 구포(口浦)소학교 여교사로 있었던 분을 만나게 되어 계속 그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방학이 되어 귀향하면 옛날 다니던 구포교회에 출석하곤 하였다. 노진현은 구포교회에서 학습을 받았다. 그를 집례한 목사는 호주장로회 소속 예원배(Rev.A.C. Wright 芮元培)선교사였다. 예원배 선교사는 1912년 내한해 1942년까지 30년간 주로 마산과 진주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간섭과 핍박이 극에 달하자 다른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혹은 추방당하였음에도 예목사 부부는 다른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다가 강제연금 끝에 출국당한 선교사였다.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받음세례(洗禮)는 구포교회에서 주기철목사로부터 받았다. 주목사는 1926년 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부산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처녀목회를 시작했는데 당년 30세의 청년목사였다. 주목사는 노진현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구포교회의 당회장을 맡았음으로 종종 사무행정을 집행 하거나 성례식 거행을 목적으로 구포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 그의 설교를 가끔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진현 목사는 생시에 자기가 순교자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 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지인들에게 이야기 하곤하였다. 노진현이 세례를 받은 시기는 주기철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한 후 구포교회 당회장을 맡은 1927년 1월부터 노진현이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하기 전까지로 보는데 이 당시에 있었던 비화가 하나 있다.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사람이 없어서인지는 모르나, 노진현은 학습교인으로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목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으나 세례를 베푼 후 집사직을 계속토록 했다고 한다.그러던 중 노진현은 장질부사에 걸렸다. 당시 장질부사는 염병이라고 해서 친척들도 외면하는 고질병이었다. 정진희 영수가 은행업무를 마치고 귀가 길에 자주 들려 간절히 기도해 주어 죽을 줄 알았던 노진현 청년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어 몸을 추수릴만큼 회복되었을 때 진주에 있는 광림학교(廣林學校)로부터 교사로 부임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회 선교부에서 1906년에 세워 운영해 오고 있는 소학교로써 학생이 100여명, 교사가 7~8명 가량 되었다. 이 일을 정진회 영수를 찾아가 의논했더니 그에게 목사될 꿈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으로 그곳은 미션스쿨이니 신학교에 갈 수 있는 길도 열릴 수 있을지 모르니 진주로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노진현은 광림소학교에 부임하였다. 부임하고 보니 그 학교 교장이 자신에게 학습을 준 예원배 선교사였고 노집사는 광림학교에서 동료교원 중 훗날 출옥성도로 고신 교단을 세운 한상동(韓尙東)을 만났다. 당시 한상동은 노진현보다 3세 연상이었고 기혼자였다. 그후 노진현과 한상동은 일본 고배(神戶)와 한국 평양에서 각각 신학공부를 하였고, 부산이 고향인 이들은 광복 후에도 부산에서 목회를 하며 때로는 동료로, 때론 서로 이견(異見)을 보이면서도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역사를 엮어 갔다(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p.20~21 참조).광림학교시절 황봉예와 결혼노진현은 광림학교에 재직하는 1928년 10월에 역시 미션스쿨인 진주 시온여학교 교사로 와 있는 황봉애를 만나 결혼하였다. 황봉애 사모는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고배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 즈음 광림학교는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하여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어 노진현은 예원배 교장에게 일본에 가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의 소개로 일본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의 입학 허락을 받아 도일하게 되었고, 재직했던 광림학교는 1929년 폐교의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는 보수적인 칼빈주의 신학사상에 기초한 5년제 학교로 1년에 10명 이상을 받지 아니한 고로 전교생 수가 50명을 초과하지 않았다.전원이 기숙사생활을 하되 크게 규제 하지는 않았다. 이 학교출신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유력하게 일한 지도자들이 많다.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가가와 도요히꼬가 있고, 한국인으로써는 김우현 전필순 김치선 유호준 김만제 김광현 한명동인데 거의 장기목회자로 혹은 각자 속한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노진현은 특히 풀턴 교장의 조직신학과 그의 신앙인격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4학년일 때 학생들이 매년 2회씩 실시하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폐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교수회에서 집에 돌아가 1년 쉬었다가 오도록 결정했으나 교장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울 때 카나다 선교사 영재형(Rev. L.L.Young) 목사가 그를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영재형목사는 노진현을 독일인이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 맡겨두어 치료받게 한 후 치료가 끝난 다음부터는 선교사 서기일을 보게 하여 졸업할 시에는 비교적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고배 중앙신학교에 유학영목사는 원래 함경도 지역에서 선교했으나 카나다 장로교회가 타교파와 연합하게 됨으로 합류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건너와 선교하고 있었는데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목사의 양 아버지로도 알려진 분이다. 노현진목사의 목회사역에 대해 고찰해 보므로 그의 지도자상을 살펴보자. 노진현목사는 일본에서 10년동안 3개 교회를 담임한 적이 있고, 조국 대한민국에서 1975년 은퇴하기까지 30년간 승리로운 목회사역과 교정(敎政)의 일생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첫 사역으로 신학교 재학 중 와까야마 교회를 맡아 전도사로 봉사하였고, 후에는 교토(京都) 한국인 교회로 임지를 옮겼는데 이는 고베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대구출신 최경학목사의 임지와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노진현목사는 교토로 목회지를 옮긴지 6개월이 지난 1935년 6월에 목사 임직을 받았다. 목사 안수는 잠시 귀국했을 때 경남노회에서 주기철목사의 안수로 목사장립을 받게 되어 더욱 감격적이었다. 일본에서의 목회가 평탄치는 못했다. 일본 현지임에도 조선인과 조선인 교회에 대한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를 건축하면서도 헌당식이나 입당허락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노목사는 말했다. 그후 노목사는 오사까(大阪) 니시나리 한인 신앙공동체인 대판서성교회(大阪西成敎會)에 부임하며 귀국하기까지 7년간 사역하였다. 이곳에 있을 때는 일본말로 사회하고 일본말로 설교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일본말로 하고 없으면 조선말로 설교했다.부산 YMCA 재건사업1945년 6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기의 공습이 강화되고 일본이 패색이 짙어갈 무렵 노진현목사는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3개월만에 8·15 광복을 부산에서 맞이하였다. 초량교회 양성봉장로의 요청으로 청년의식의 중요성을 인식 YMCA 재건사업에 양장로는 회장으로 노목사가 총무로 Y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2일 첫주일에 노목사는 부산중앙교회를 설립했다. 감리교회였던 대청동의 교회를 그 교회목사로부터 안수받아 교회를 시작했다. 노목사는 이 중앙교회에서 평생목회의 과정을 영광스럽게 마치게 되었다. 이 날은 서울에서 한경직목사가 베다니교회를 영락교회로, 송창근목사가 바울교회를 성암교회로, 김재준목사가 야고보교회를 경동교회로 바꾼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2015. p.788~798참조).그의 목회를 요약하면 ①신학적 바탕 위에 설교하라. ②모든 목사는 다 부목사(주님의)이다 ③예절과 유머를 겸비하라. ④기도와 심방을 게을리 하지 말라 ⑤일치와 화합하는 일에 투신하라. 노진현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된 것은 1959년 9월 제44회 대전총회의 분리사건을 예견이나 한듯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1958년 9월 25일 서울 영락교회에서였다. 총회장 당시 결의된 중요 안건들을 보면 ①지금까지 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행된 주일공과를 총회이름으로 개편, 아동들의 연령계층에 맞게끔 계단식공과 발행을 정책적으로 결의한 것, ②계류중이었던 경기노회를 경기노회와 한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 ③월남에 선교사 파견하는 안건 결정, ④각 신학교수들은 3년마다 해 이사회에 서약하게 하는 것 등이다. 노진현목사의 목회와 교정(敎政)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경총회장 장차남목사는 그는 목회자이면서 뛰어난 교정가(敎政家)였다고 한마디로 결론짓고 있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p.803).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6-18
  • 13. 제36회 총회장 권연호(權連鎬)목사
    경북 안동 이조판서 준(俊)의 증손권연호목사(1898-1979. 1)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 양반가문으로 알려진 안동 권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김인서는 이에 대해 “권연호목사는 이조판서 준(俊)의 증손으로 예수 믿는다는 죄명하에 안동 권씨 족보에서 할명(割名)되었다가 이즈음 복보(復譜)되었다”(신앙생활 1954. 5·6월호 참조)고 쓰고 있다.권목사의 형제가 처음 기독교를 접한 때를 1908-1910년쯤으로 생각되며 안동지역의 최초교인으로 국곡교회를 세운 권수백 조사(1923년 장로가 됨)가 1908년 사랑방 사숙(私塾)을 개설하고 강낙원을 교사로 초빙하여 신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공부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권연호, 권건호, 이장윤, 이부돌, 이삼돌, 이태술 제씨가 일직면 경내의 장사리교회의 교회학교를 설립한 것이 나타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짐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고향을 떠 경성으로 올라가 경성사범학교 구기과(球技科)를 1914년에 졸업하고, 잠시 소학교(오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미국 북장로교 안의와(Rev. James Edward, Adams, 安義窩) 선교사를 만나 객지생활에서 일시 중단되었던 신앙을 되찾게 되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경성 사범 출신으로 교사생활1916년 평양으로 간 그는 숭실대학에 입학하였고, 함일톤(Rev. F. E. Hamilton 咸逸頓) 선교사 댁에서 고학하며 공부하였다. 당시의 급우들로는 현재명, 김무생 등이 있었다. 고학과 과로로 폐결핵에 걸려 잠시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하였다. 완쾌된 후 윤산온(Rev. G. S. Mccune, 尹山溫) 교장으로부터 “병약한 몸으로 대학 졸업은 아니 해도 좋으니 신학(神學)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기독신보 1969. 7. 26.). 그래서 1918년 대학을 2년 수료한 채, 다시 잠시동안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몇 해 동안 교편을 잡고 일하던 중 교사직에 회의가 들어 사임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조선인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제국주의 교육을 하는 것이 마음에 번민과 괴로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서울창신교회 70년사. p.77).이 무렵 1921년 2월 5일, 안동 주재 미 북장로교 안대선(Rev. W. J. Anderson 安大善) 선교사가 안동읍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처음 조직하였는데 당시 이 모임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기독신문 2009. 6. 24.). 중요활동으로는 청장년들의 신앙생활훈련, 회원상호간의 친목, 교양 함양과 절제운동이 핵심 사안들이었다. 얼마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을 위해 안동을 떠나 평양으로 갔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과 더불어 평남 강서의 기양교회 조사(助師) 일을 보면서 한 학기 공부하고 1년간 목회실습을 하며 다니다 보니 10년만인 1936년에야 졸업하고, 평서노회(平西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목회사역을 보면 한 마디로 훌륭한 목회자상을 보여준다. 그가 가는 임지마다 아무탈 없이 승리했다. 그의 중요한 사역지로는 신학교 시절의 기양교회(1928-1937), 평북 철산읍교회(1937-1940), 만주 안동제일교회(1940-1945), 경성 창신교회(1946-1969) 등에서 착실하고도 타의 본이 되는 목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초기 목회지였던 기양교회에서의 장기목회(9년), 철산읍교회(4년), 만주 안동교회(6년), 경성 창신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24년가까운 자기목회를 한 것을 들 수 있겠다. 권연호목사와 동사목회를 한 바 있었던 부산 온천제일교회의 원로목사요 예장합동 증경총회장(91회)을 역임한 장차남목사는 최근 간행(2015. 3. 20 쿰란)한 그의 목회회고록(p. 772-775 참조)에서 권연호목사의 목회특징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① 이성문제 철저, ② 물질적 청렴, ③ 도시목회에는 설교를 짧게. 이같은 목회철학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늘 되새겨 주곤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도생활의 특징으로서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개인기도를 보통 3시간씩 드리며 하루에도 틈틈이 기도하는 시간 5-6시간은 되었다. 다음으로 그의 설교의 특징이 있는데 성경적이며, 반드시 원고 설교를 하며, 짧으면서도 시간을 엄수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을 비롯 결혼예식이나 장례예식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일 뿐만 아니라 장중미가 넘쳤고, 당사자들만 아니라 모든 참여하는 회중들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게 하는 정중미가 있었다고 한다. 권연호목사의 개교회 목회활동은 창신교회에 부임하고 난 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주(滿洲) 땅에서 목회하다가 해방된 조국의 중심지 수도서울에 귀환한 입장이었음에도 여기저기에서 권목사를 필요로 하였고 불려다니다 보니 주어진 소임들이 자연히 많아지게 된 것이다.1946년 형목제도, 6·25때 군목제도 실시에 기여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① 오늘의 교도소 목사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해방후 미 군정 시대에 감리교인이었던 군정장관 러치 장군을 만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의 교도를 위해 형목제도를 실시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일은 당시 천주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단체들이 죄수들을 상대로 교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각 종교단체장들이 명예를 걸고 추진하고 있었는데 장로교 대표로 권연호목사가 합세하여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1946년 1월 군정청령 제70호를 발령, 전국 18개 교도소마다 형무소 소장을 임명했는데 장로교 13명, 감리교 5명이 교무과장으로 부소장급 대우로 임명되어 오늘의 교도소선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② 주일에 실시하려는 선거를 평일로 바꾸는데 큰 소임을 다 하였다. 당시 미군정청 사령관 핫지 중장이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최초의 총선일자를 주일(主日)인 1948년 5월 9일로 결정 공포하였다. 이에 마음이 아팠던 권목사는 핫지 중장을 방문해 항의하였다. 핫지 장군은 이승만박사와 상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갔다. 처음엔 “주일예배 후에 교인들은 선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권목사는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항변해 이해를 시키고 다시 핫지 중장에게 갔더니 그날이 주일인줄 몰랐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즉석에서 이승만박사에게 전화해 5월 10일 월요일로 연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박사는 권연호목사를 달리 대우했다고 한다. ③ 해방 후 혼란기에 문교정책을 맡았던 안호상 문교부장관은 국가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배례(拜禮)를 강조했다. 권목사는 여러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신앙적인 문제라 이승만박사를 찾아가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바꾸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회고했다. 주일성수 문제와 국기배례 문제는 이미 북한에서도 문제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많이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④ 6·25 당시 서울로 내려온 북한피난민 교우들을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활동했다. 이같은 일은 김구선생으로부터 찬하를 받을 만큼 동족구원에 앞장섰던 것이다. 미군 당국에 청원해 얻은 천막을 창신동 고지대 언덕받이에 치고 월남한 교우들을 수용해 구제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북으로부터 계속 피난민이 내려오자 미 북장로교선교회에서도 안두화, 권세열 목사 등과 이인식, 권연호, 선우훈 장로 등이 합세해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⑤ 또 권연호목사는 신생 대한민국 군대에 장병들의 신앙과 정신지도를 위해 오늘의 군목제도의 원형인 군속군목제도를 설치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 했을 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후원했다. 문필가요 목사였던 김린서는 그의 잡지 신앙생활(信仰生活)지에 6·25 전후 지송암, 김영환 두 목사가 제3육군병원에 가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병원장 정희섭 대령이 종군목사란 직분을 정한 것이 군목제도의 시초가 되었다고 썼다. 종군전도의 시작과 동시에 권연호목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삼 진언하고 각 교파와 선교회가 연합청원을 해 대통령령으로 정식 군목제도(軍牧制度)가 실시되었다. 이는 1884년 선교승인과 함께 조선역사상 최고로 귀중한 축복이었다고 김린서는 쓰고 있다(신앙생활 1953년 성탄호 기사). 교회언론에 관심가진 선비다운 목회자⑥ 권목사는 장로교 정통신학교육 방면에도 크게 기여했다. 원래 선비문화 속에서 자랐고 자신이 또한 교사(敎師)요 문사(文士) 출신인 연유도 있었겠지만, 고향 안동 장사리교회 안에 교회학교를 설립한 일로부터 만주 안동제일교회 재직시 고등성경학교와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성경학원에 김인서를, 봉천신학교엔 박형룡박사를 초청하여 가르치게 한 것 등은 그의 교육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뿐만 아니라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일괄 취소하고 총회직영 단일신학교(현 총신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한 당시의 총회장이었으니 교육적인 관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총회장 권연호목사는 총신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의 신학정로를 계승해야 할 것이라고 개혁신학전통에 선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⑦ 권목사는 1954년 4월 안동에서 모인 제39회 총회에서 교단 안의 기독공보와 신앙생활 잡지 등 언론활성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권연호목사는 목회자로써 교정(敎政)을 맡았어도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서도 선비다운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은퇴 후 자녀들이 사는 미국으로 거쳐를 옮겨 쉬지않고 공원에서 로상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개인전도를 하며 건강한 삶을 살다가 1979년 1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6-10
  • 12. 제69회 총회장 최훈(催薰)목사
    평양 대동강변에서 출생최훈목사(催薰 1926. 9. 26~2008. 4. 28)는 평안남도 평양시 유리(柳里)에서 부친 최병록(催炳錄)과 모친 황병선(黃炳善) 사이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위로 누님이 한분 계셨고, 조부님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로써 일찍 개화한 어른이었다. 최훈목사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의 최남단이며 대동강 한 가운데 있는 양각도를 건너가는 나룻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최목사는 월남하기 몇년 전까지는 거의 고향에서 살았다. 조부님(최재식)은 고향마을에 ‘송산리교회’를 세웠는데 이 마을 출신 명사로는 연세대 김형석교수와 총신대 김득룡박사가 있다. 부친 최병록은 숭실대학 출신이었으나 최목사가 7살되던 해에 53세의 일기로 작고해 최목사는 어머니와 조부의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고향 송산리에 있는 국민학교였던 신망학교(信望學校)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성상업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 평양철물조합에서 근무했다. 일제 말엽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평양서기산 밑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44부대 군속이 되어 부대가 직영하고 있던 자활농장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교사직 사면하고 재건교회 설립최목사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5년 8·15광복이 되자 고향 송산리에 돌아가 송산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평생 신앙동지로 함께 활동했던 김창인(金昌仁)전도사와 이창환전도사를 신앙의 선배로 만났다. 최목사는 교사직을 사면하고 고향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가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전도사가 재건교회 전도사가 된 배경을 보면,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교회는 사실상 영력(靈力)을 상실하였다. 교회가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게 되자 뜻깊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일제당국의 갖은 압박과 시련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투옥되기도 했다. 적게는 몇개월씩 길게는 6,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겐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출옥한 성도들이 볼 때 이미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은 기댈 만한 지도자가 아니고 변질된 사이비지도자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로 일제와 영합한 교권주의자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당신들은 옥에서 고생했지만, 우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교회밖에서 여러분 못지 않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노라고 큰 소리치는 것이었다. 해방을 맞은 청년 최훈에게도 몹시 실망스러운 현실이었다. 정의감이 남달리 강했던 그는 성경대로 믿고 살아야겠다는 순수한 신앙을 갈망하였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출옥한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재건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일성 일당이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 시작하자 교회에 대한 탄압과 핍박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1947년 최훈은 고향 망경대에서 숙청 당한 후 평안남도 순안 원일리 28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재건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었다. 청년 최훈전도사는 그 곳에서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로 생각을 굳힌다. 공산당에 체포돼 집행유예 2년당시 청년 부흥사로 서북지방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창인전도사도 고향 평북을 떠나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재건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을 떠나 서울로 월남하게 되자 그 교회는 후임으로 최훈전도사를 청빙하게 되었다. 최훈전도사가 황주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는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권력이 강회되고 있던 때였다. 동시에 공산당이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회에 대하여 가일층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훈전도사는 강단에서 소신있는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온한 전도사로 사상이 다른 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의 설교를 필기해 상부에 보고한 정치보위부 요원의 고발로 1949년 2월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법정에 선 최훈전도사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때의 경험이 그후 그의 목회생활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당국의 감시 속에서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언제 다시 영어의 몸이 될지 모르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가지고 평북 강계(江界)로 가서 장백산맥 줄기에 위치한 향내산에서 50일간 산기도를 하면서 영적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던 참에 정말 예기치 못한 6·25동란이 발발해 황주의 재건교회는 지하로 숨어들고 말았고, 최훈전도사도 교회를 사임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그냥 버티다가는 인민군대의 입대에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로 산속으로 피난했는데 그곳에 숨어든 내무서원에게 발각되어 총살 직전에 UN군의 공중 폭격기의 폭탄 투하로 구사일생으로 4개월간 산속을 헤매면서 생사의 가름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평양 떠나 서울로 월남1950년 12월 5일 평양을 떠나 12월 9일 서울에 도착해 재건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있던 재건교회에서 고흥봉(高興鳳)목사를 만났다. 고목사는 한상동 이기선 목사와 함께 옥고를 치룬 동지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남으로 다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고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이끌고 항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평생 신앙을 함께 할 멘토로 믿음의 선배 이순남권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권사 역시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신앙인이었다. 이권사는 최훈보다 일찍 월남하여 고흥봉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사였다. 이때 최훈전도사를 만나 부산 영주동교회에서부터 서울수복 후엔 서울 충현교회 그리고 동도교회에 부임하여 이권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믿음의 어머니로 함께 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김해시내에 재건교회 개척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고려파 교회와 직·간접으로 목회적인 접촉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 재건교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김해재건교회는 나중에 고려파에 가입해 김해중앙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자신은 부산 영주동에 새로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면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 수립당시 고려신학교에는 한상동목사와 박윤선목사가 개혁신학의 수립과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었고 그동안 받은 은혜와 신앙생활에서 쌓은 경험을 조화시켜 가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었다. 1956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최전도사는 그해 4월 6일 신앙의 선배이며 과거 재건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친분관계가 있던 충현교회 김창인목사의 부름으로 담당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충현교회는 서울에 고려파 교회로써 큰 건물을 가진 유일한 교회였다. 맡은 부서는 중·고등부와 대학부 학생회였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야를 좀더 넓혀야겠다고 느꼈다. 나이 많은 최전도사는 자존심을 버리고 숭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이것은 최전도사가 학문을 더 배우겠다는 겸손과 향학열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한편 역사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싹트기 시작한 그의 예리한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가 숭실대학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면 후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학위논문으로 ‘한국재건교회교회사’를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숭실대학에서 우호익교수, 김양선교수, 서양사의 대가 김성식교수 등의 강의와 지도로, 재건교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렀고 단단한 학문의 기초도 쌓을 수 있었다. 1961년 2월 숭실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졸업 5개월을 앞두고 평생 몸담아 목회한 동도교회로부터(당시 강도사) 청빙을 받아 1960년 10월 25일 동도교회로 부임하여 원로가 되기까지 뜨거운 충성을 다한 모범적인 목회자였다. 그의 교계 활동으로는 모교의 강사를 비롯 숭목회 회장, 한국외항선교회 회장 및 이사장,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사무국장(1982)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대한민국평화통일자문위원, 한국항공선교회 이사장, 미주총신대 이사장, 평양노회 공로목사, 숭실대 모교를 빛낸 숭실인상, 국민일보 선교대상(1997),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1998) 등이 있고, 이를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은 그가 몸담아 사역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수장 자리인 총회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지난 2015년 4월 28일에는 그가 섬겼던 동도교회 예배당 본당에서 그가 떠난 후 7번째로 동도교회 성도들과 생시에 함께했던 많은 추모객들이 모여 그의 유지를 기리고 있는 모임에 참석, 새삼 고인의 신앙과 덕망을 느낄 수 있었다.필자는 7주기에 설교를 맡은 대전중앙교회의 원로요 증경총회장 인 최병남목사는 추모설교에서 로마서 14장 7~8절을 읽은 후, 최훈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① 순교자적인 삶을 산 사람 ② 생명을 건 목회와 신앙 ③ 최선을 다한 삶 ④ 믿음과 성령에 의존했던 삶이라고 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5-27
  • 11. 제71회 총회장 안중섭(安仲燮)목사
    황해도 황주 출신, 단신 월남안중섭목사(1918-2004)는 1918년 7월 9일 황해도 황주군 청수면 원정리(중동) 210번지에서 아버지 안용수(安容洙)와 어머니 김사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생 승섭(承燮, 1920. 8. 15), 팔섭(八燮, 1026. 3. 16), 봉섭(鳳燮, 1929. 1. 5)이와 여동생 화섭(花燮, 1923. 3. 15)이 있었으나, 단신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생사는 알길이 없다. 가족 중에는 아무도 교회에 나가는 형제들이 없었고 혼자 유년주일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젊었을 때에는 중화장터의 씨름판에 나가 황소 한마리를 상으로 타 집으로 몰고 왔을 정도로 우직한 성품이었고 건장한 청년이었다. 이같은 성품이 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나 성경말씀과 배치되는 일은 절대로 타협 못하는 올곧은 성격을 평생 유지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안목사는 처음 예수 믿었던 시절에 겪은 사건에 대하여 안재정목사가 출판한 <원로 목사행전>(목양사 1977. p.127-129)에 보면, 어느 해인가 한번은 조상기일이 하필이면 주일이었다. 보통때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올 수 있었는데, 이 날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백부(伯父) 댁 식구들과 안목사 가족들 그리고 숙부(叔父)님 댁 식구들까지 대소가 가족들이 모여 차례대로 조상의 신위 앞에 절을 하고 제사가 끝나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제사지낸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식들의 도리이니 우상숭배가 아니겠지 하는 생각과, 다른 한편에서는 아니야 하나님 외에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하고 섬기면 우상이야 하는 생각으로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과 상의할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 순간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 예배당으로 달려가 엎드려 기도했다. 몇 시간이 지나 집에 왔을 때는 제사가 이미 다 끝나고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중이었다. 어른들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음으로 쫓겨나던 말던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는 제사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치고는 냅다 대문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따라 나오신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할머니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셨다고 했다. 안목사는 “이 날이 내가 예수 믿고 처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린 날이고 하나님께 감사한 날이었다”고 고백하였다.서당에서 한문공부해 한시 즐겨안중섭목사는 일찌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과 동몽선습(童蒙先習)과 명심보감(明心寶監)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마치고 시경(詩經)을 배우다가 신학문이 들어와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그는 생시에도 한시(漢詩)를 좋아하고 즐겨 외웠으며 설교에 응용하기도 했다. 당시 학교생활이란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당시 시국상황이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한 야심으로 철도부설과 도로공사 비행장 신설에 혈안이었고 심지어는 군수품 공장과 염전에까지 학생들을 동원 1년 중 절반은 보국대란 명분으로 노동판에 끌고 나갔으니 학교생활이 재미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만이 쌓여갔다. 안목사는 이러한 한심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살맛나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도 버티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영접한 예수님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는데 나도 우리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시대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판국에 예수를 믿으며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데 기독교 지도자의 길, 목사가 된다는 결심은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버려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거느리고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아내(이섬녀, 1920. 3. 19)와 첫아이 은신(恩信, 1942. 1. 5)이까지 있는 한 집안의 장남으로써 가사(家事)를 포기한다는 것은 보통 결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상황이 아니었다. 더우기 일제 말엽이라 평양신학교가 이미 휴교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던 안목사에게 드디어 상상하지도 못했던 8월 15일 민족해방의 날이 다가 온 것이었다. 한때 경찰에 지원 순경생활도안목사(당시 집사)는 우선 사회질서 확립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동안 경찰에 뛰어들어 순경이 되었다. 고향 중화지서에서 근무할 때 동리에서 해방을 맞이해 기념하는 동네 굿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변 모래밭에 멍석을 깔고 천막을 치고 유명한 무당 다섯을 데려다가 큰 굿판을 벌여서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동리에 있는 각 기관과 유지들이 기부금을 낸다고 야단이었다. 일제 때 천황을 섬긴 것도 억울한데 이제 막 해방이 되어 자유를 찾았는데도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무당을 데려다가 굿판을 벌리며 미신에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각 기관에서까지 이를 권장하며 기부금을 내고 백성들에게 우민정책을 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안중섭 순경은 지서장에게 이번 동네 굿은 못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러나 지서장은 백성들이 해방을 기념해서 기쁘게 놀아보자는 것인데 반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가버렸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마당에는 온갖 음식들이 차려지고 제사상에는 돼지머리가 올라와 웃고 있었다. 무당들은 돼지머리에 돈을 꽂은 사람들을 위해 한바탕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안순경은 총을 들고 굿판에 나가서 굿을 못한다고 큰 소리쳤으나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안순경은 총을 공중을 향해 한발 쏘았으나 여전했다. 안되겠다 싶어 총구를 무당을 향해 걷어 치우지 않으면 쏘겠다고 했더니 무당과 모인 무리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쳐 굿판은 막을 내렸다. 사실 8·15의 감격은 잠시였고 2~3개월이 지나자 북쪽엔 붉은 군대 소련군이 신의주와 만포로부터 진주하게 되더니 갑자기 공산주의(共産主義)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경찰서가 내무서(內務暑)로 바뀌게 되자 안순경은 사직하였다. 그때 마침 개교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북한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으로 제대로 신학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곳에서의 신앙을 유지하기란 생사를 좌우하는 지경에 이르자 안중섭은 1년의 신학을 마치는 둥 마는 둥 이젠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이르자 38선을 넘어 월남하게 되었다. 북쪽에 가족을 두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온 안집사의 삶도 평탄할 수 없었다. 6·25전쟁으로 남쪽에서 목회곧 터진 6·25전쟁으로 안목사는(당시 전도사) 경상북도 청도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 곳에서 청도신읍교회를 거쳐 동곡교회 전도사로 후엔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다가 경청노회가 설립될 때 창립노회장(1962)을 역임한 후 수원제일교회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로 목양지를 옮겼다. 수원제일교회에서(1966부임) 교회 앞에 선언한 안목사의 목회철학은 ① 주일성수 ② 온전한 10의 1조 ③ 배가 전도 ④ 교회개척 ⑤ 의로운 교육이었다. 안목사의 5대 목회철학은 바로 자기의 일생 실천하고 겪었던 신앙철학이기도 하고 목양의 지표이기도 했다(수원제일교회 50년사 2004. p.237~305).안중섭목사의 목회관을 이야기하면서 특기해 둘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 6·25동란 직전, 신학교 재학 중 강원도 횡성군 소재 공근교회 전도사로 사역할때 겪은 고난의 승리 사건이다. 오늘날처럼 국가 행사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는 식이 아니고 국기에 대한 배례라고 하면 선 자세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던 시기에 자기교회 국민학교에 다니는 김안위라는 학생이 아침조회 때 안전도사에게 배운대로 절하지 않고 그냥 서 있다가 교장 선생님이 그 학생을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낸 사건이 터졌다. 왜 국기에 대한 배례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달했을 때, 그 학생이 우리교회 전도사님이 국기에 대해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안했다고 했다. 이 일로 안전도사는 1950년 1월 20일 강원도 횡성경찰서에 연행 구금되는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었다. 춘천 구치소로 이감되어 있을 때 어떤 군목이 면회를 와서 “당신을 위해 전국교회가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를 했다. 이 일로 인해 최동진목사 이영수전도사 등의 연명으로 경무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하게 되었고 이승만박사의 지시로 국기에 대한 배례가 오늘의 국기에 대한 경례로 바뀌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안중섭목사의 투철한 성경적인 신앙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어여삐 보셨던지 하나님께서 1986년 9월 제71회 합동측 교단 총회장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시 이룩된 몇가지 사역을 열거해 보면 ① 총회 부채를 청산하였으며, ② 교단적으로 어려웠던 이영수목사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③ 손영준교수가 개인적으로 이끌어 오던 선교훈련원(M.T.I)을 오늘의 세계선교훈련원으로 정착시킨 것 등을 들 수 있다. 은퇴 후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수원제일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노회와 총회 일을 염려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나다가 2003년 10월 예상치 못한 뇌졸중으로 병상생활을 100여일 신고하다가 2004년 1월 13일 오전 1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면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5-14
  • 10. 제8회 총회장 마포삼열(馬布三悅)목사
    맥코믹 신학교 출신마포삼열(1864.1~1930.10.24, 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혹은 馬三悅)목사는 미국 인디아나주 메디슨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하노버대학(Hanovercollge)에서 자연계 계통의 공부을 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 공학도였으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의 증인으로 소명받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보수주의 계통의 맥코믹(Meomick)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에 선교사로 나갈 베이드(W. M.Baird)와 기포드(D.L.Gifford)를 만나 동기 졸업생으로 세 사람이 모두 조선에 나와 선교사역을 감당하므로써 조선선교에 큰 족적을 남겼고, 맥코믹 졸업생들의 조선선교의 문을 여는데 선구자적인 역할를 감당해 냈다. 신학교를 졸업한 마팻은 1889년 4월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조선선교사로 임명받고 이듬해인 1890년 1월, 25세의 독신청년으로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사로서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모든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 도착한 마팻도 한국말을 학습하는 것으로 한국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어학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전도사역을 감당하였는데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이 지날 즈음 그는 조랑말을 타고 조선땅 서북부지방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먼저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그가 평생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선교기지(Missionstation)가 되었다. 후에 그의 선교활동에 큰 성과가 나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그곳에 북쪽전역의 선교기지가 되었다. 이 여행길로 평안북도 의주(義州)까지 이어졌는데 이곳에서 그는 한석진(韓錫晋)을 만나게 되었고, 한석진은 마팻의 조사(Helper)가 되어 마팻의 선교길잡이가 되었다. 후에 한석진은 한국 최초 7인 목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성장하였다. 경신학교 교장으로 청소년 교육서울로 돌아온 마팻은 언더우드(Underwood)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이었던 오늘의 ‘경신학교’를 맡아 청소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서북지역에 대한 선교사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1891년 봄, 게일(James Gale)과 함께 다시 북쪽에 있는 평안도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멀리 만주(滿洲) 심양까지 가서 한국선교의 기초를 놓은 존 로쓰(Rev. John Ross)선교사를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는 함경도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는 이 선교여행에서 평양에 선교거점을 확보하기로 작정하였다. 마팻은 드디어 1893년 평양에 선교거점 허락을 받고 그해 4월 평양에 내려와 본격적인 선교를 펼쳤다. 대동문(大同門) 근처 숨막골에 주택을 마련하고 길거리에 나가 노방전도를 하던 중 후에 바다건너 제주도 선교의 주역이된 이기풍 청년이 던진 돌에 맞아 턱에 부상을 입은 일화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역사에 오래오래 회자화 되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가 이때 일어난 에피소드이다.평양 장대현교회 설립그는 평양 최초의 교인 최치량과 함께 방 한 칸을 얻어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수가 증가해 넓다리골 와가(기와집) 한 채를 구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가 평양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이다. 후에 이 교회는 장대제로 옮겨 가면서 장대현(章臺峴)교회가 되었는데 당시에 평양 한가운데 있다고 해서 중앙교회(中央敎會)로 불리기도 하였다. 장대현교회는 후에 길선주목사가 담임목사가 되어 여러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하면서 평양의 어머니교회로써의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다. 마팻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북도는 김관근에게, 평안남도는 한석진에게, 황해도는 길선주에게 맡겨 전도하게 하여 이 일대의 교회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마팻이 세운 교회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은퇴할 무렵에는 서북지방에만 1천 여개의 교회가 설립되었으니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개척설립의 공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겠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마팻이 한국선교에 끼친 공로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장차 교회를 이끄러갈 지도자 양성기관으로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세운 일이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교회와 교인들을 지도할 목자(牧者)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교부에서 신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우면서 선교사들을 리드 해 나갈 정도로 높은 학력이 되지 않도록 하며 일반 대학수준보다는 조금 낮은 위치의 학력을 갖추는 원칙을 세워 선교사 자신들의 리더십(Leadership)을 초과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하에 드디어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김종섭과 방기창 두 청년을 자기집 사랑방에서 선교사 그레함 리(Rev. Graham Lee)와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신학교육 수준은 성경(聖經)을 가르치는 성경학교(Bible School)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한국에서의 신학교육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듬해 학생수가 6명으로 늘어나자 한국에 나와 선교하던 4장로교회측, 즉 미국남·북장로회와 카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회로 구성된 ‘장로교협의회’가 평양에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정식으로 결정하고 마팻(Samuel A.Moffett)이 시작한 신학반(神學班)을 정식 신학교(神學校 Seminary)로 인정하여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4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였기에 ‘연합신학교’(Union Semimary)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장로회신학교로 불리어지게 되었고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양 장로회신학교 혹은 평양신학교라 일반적으로 불리어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양성 위한 숭실전문대학 설립마팻은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4년까지 이 직에 머물면서 초기 한국신학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초창기 신학교육 제도는 한달 공부하고 3개월 동안은 목회지에서 사역하고 다시 와서 공부하는 방법으로 5년 과정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1907년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7인의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름들이 저 유명한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서경조 방기창 양전백 송린서가 바로 그들이다. 마팻은 한국 독립노회의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교회 조직에 큰 공을 세웠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여파로 조선인 목사가 총회에서 선출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이 총회장으로(1919. 10. 4)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열린 제8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어 어려운 때에 교회를 이끌어갔다. 마팻선교사가 교육선교사업으로 한국교회에 뚜렷한 선교사역의 열매로는 대학을 지향해 세운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大學)의 설립이다. 이 학교는 1894년부터 평양 넓다리교회에서 이영언을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숭실대학교의 시작이 된 것이다. 숭실전문학교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의여자전문학교로 발전해 나갔고 이를 일컬어 ‘삼숭’(三崇)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1918년부터 1928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신학교와 더불어 숭실을 통하여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마팻선교사가 남긴 또 하나의 큰 공적을 든다면 이 땅에 보수주의 신학의 정초(定礎)를 놓았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을 보면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신앙은 주로 전천년설(pre-milhnialism)의 영향을 받아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면서 세계선교에 나선 선교사들이 많았다. 이렇다보니 마팻에게 교육받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은 그의 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수주의 신앙 한국교회 성장 발전의 원동력마팻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신앙은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기초한 기도, 성수주일, 십일조, 엄격한 치리, 근검, 절약으로 이어지는 청교도적인 신앙으로 개척기 조선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힘을 발휘하였다. 한편 보수가 지닌 배타성이 강해 다양한 진보 자유주의 수용이 어려웠고 단순성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약점도 동시에 지니기도 했지만,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보수성에 둔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하겠다. 마팻의 이 보수적인 신학사상이 오히려 일본제국주의가 1910년대 개정사립학교법으로 성경교육을 금지할려고 할 때 적극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그는 격동기 한국 근세역사 속에서도 50년간을 조선선교에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였다. 마팻은 말년에도 투지있게 활동하였으나 예기치 못한 육신의 질병으로 치료차 귀국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39년 10월 캘리포니아의 돈노비아에서 타계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가, 서울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주선으로 그의 유언대로 그가 섬겼던 교정에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다섯 모두가 대를 이어 한국선교에 매진했다. 그중 셋째 아들 마삼락(Samuel Hugh Moffett)은 부친이 세운 장신대학의 교수로 학장으로 수고했고, 넷째 아들 마화열(Howavd Moffett 馬和悅)은 의학박사로 대구 동산의료센터 이사장으로 사역하였다. 마팻선교사의 한국선교 사역은 그가 이 땅을 떠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4-23
  • 9. 제49회·제52회 총회장 김윤찬(金允燦)목사
    평안도 대동군에서 출생김윤찬목사(1905. 8. 23~1993. 1. 3)는 평안도 대동군 청용면 산사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27대를 거쳐 광주김씨 후손들이 둥지를 틀고 내려오는 마음이었다. 약 100여 세대의 김씨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모두가 친족들로 어우러진 씨족 마을이었다. 이 고요한 산사리에 평양선교 기지의 책임자였던 마포삼열(Rev.Samuel A. Moffete 1916~2014)목사가 나타나 노방전도로 복음을 제일먼저 받아들인 부친 김락환이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온 가문이 신자가 되는 길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팻 목사가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사람들을 만드셨으며 복을 주시며 우리 인간들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에 김락환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세상 모두가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상을 만든 분(神)이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교적인 이기론(理氣論)을 믿고 있었던 김락환에게는 충격적이고도 신비로운 것이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 만나마포삼열목사 그가 어찌하여 이 먼 산사리에까지 나타났을까? 평양장로신학교 설립자요 한국선교의 대표적인 인물 미국인 마포삼열목사는 당시 나이 34세 이 땅에 와서 사역하던 중 어찌 김락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곳에서 새문물에 갈망하고 있던 김락환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니라 운명적인 진실이 섭리하였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겠다.그의 나이 7살이 되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구학문을 배우게 되는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떼고 사서삼경을 다 마쳤을 때는 소년시절이 다 지나고 18세가 되었다. 서당에서는 어느덧 모범생이 되어 어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구사상을 익혀 가며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1923년 어느날 윤찬은 더이상 구학문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고향 산사리 장로교회에서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삼성중학교(三聖中學校)에 18세의 청년의 나이로 1학년에 입학하였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일본어 산수 국어 역사 지리 등의 신학문을 배웠다. 그가 어느 정도 신학문에 심취하는 중 4년의 세월이 흘렀고 졸업을 할 때는 23살의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22세의 나이가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배필은 중화군내 상원 내동교회 영수이신 한두협의 딸 한부흥양을 맞이하였다. 아내는 28세의 나이로 믿음이 굳고 신앙생활에도 열심인 양가집 규수였고, 처가의 생활도 부유한 처지라 부모밑에서 잘 자란 처녀였다. 1927년 3월 12일 중화군 내동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윤찬 슬하에는 3남3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산 순교자 김윤찬목사의 신앙과 삶 김재연 저 2014 킴덤스 p.63-80 참고). 김윤찬목사는 1939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34회로 졸업 그해 평양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평양 숭호읍 중부교회에 부임해 목회를 하였고, 1939년 10월 1일 평양의 청룡교회로 전임, 1945년 7월 평양 연화동교회로 옮겨 시무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고, 1950년 8월 6·25 전쟁의 와중에 평양 장대현교회를 맡아 시무하였다. 그후 1·4 후퇴 당시 월남하여 1951년 6월 부산 평남(平南)교회에서 사역했다. 제49회, 제52회 총회장에 두번 피선1952년 9월엔 총회신학교 재단이사가 되었다. 이듬해 6월 서울의 평안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받아 상경하였다. 1961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페이스신학교(Faith Theo, Seminory)로 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수여받았고, 같은 해에 교단지인 기독신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2월 칼빈신학교(현 용인시 칼빈대학교 전신) 교장에 취임,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며 교육사업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1964년 9월 총회에서 교정(敎政)의 총수자리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 예장의 선봉장으로 교정을 이끌어갔다. 그의 원만한 성격과 강단있는 정치는 총회원과 전국교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1967년 총회에서 재선되는 영예로운 총회장이 되었다. 그가 한국교회와 교단 부흥과 발전, 나아가서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신앙진흥에 기여한 역사를 몇가지 정리해 보면, 김윤찬목사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 곧 한국교회에 평양장로회신학교로부터 내려온 장로교 정통의 킬빈주의신앙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다는 가장 중요한 이념에 매우 충실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유주의 신앙사조가 공존하는 한국교계에 정통개혁주의와 칼빈주의 신앙이념을 지켜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성경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신학으로부터 장로교의 정통보수 신앙을 지켜 내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자유주의 신신학에 맞서 중심적 역할 감당1930년대 당시 김재준은 성경은 구원에 관해서는 무오하나, 과학적 역사적 측면에서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였다. 또한 김재준은 이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여 교단신학의 보루였던 신학지남(神學指南) 총회신학교 기관 학술지를 장악하여 본격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중흥을 꾀하였다. 성경 무오성을 부인하는 김재준의 신학은 장로교 정통신학과의 단절을 의미하였다. 결국 예장 제38회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파면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용단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바로 김윤찬목사였다. 김목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통 장로교신학과 신앙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는 총회신학교의 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하여 매년 학기초에는 전임강사 이상의 교수에 대하여 매학기 초마다 개혁신학에 충실하겠다는 서약을 갱신하는 제도확립에 앞장섰다. 당시 그는 총신 이사장이었고 총회장 지위에 있을 때였다.한편 1959년 제44회 총회를 기점으로 통합측이 분리되어 나간 후 예장합동 총회는 교회의 영적 부흥과 영적회복에 매진하게 된다. 여기에도 김윤찬목사가 앞장서 갔다. 그는 1964년 총회장에 피선되었을 때, 제1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1964년 2월 22일부터 충현교회에서 모인 뒤 지금까지 교단의 일치와 화합 그리고 발전을 도모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난타개를 위하여 총회임원 중심의 기도회에도 앞장섰다. 그는 1964년 9월, 제49회 총회장 시절 주일학교사업을 통한 100만 신도부흥운동 10개년을 계획실행하였으며, 교단설립 80주년 기념 교육대회 개최, 아울러 총회자립운영을 위해 세례교인의 의무제도를 처음 시행하고, 교단성장을 위한 장기계획으로 1968년에는 10의1조 통일안을 마련 시행하여 총회자립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초를 닦았다. 무엇보다도 김윤찬목사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갈망하는 합동운동에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통합측과 WCC 신학사상 문제로 분열 이후 고려파와의 합동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고려신학교 설립 후 분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보수적 신학을 지켜 가려는 고려파와 반 WCC 에큐메니칼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총회와의 연합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 제45회 총회에서는 고신측과 합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합동추진위원을 10명 선정하였는데 그 중에 김윤찬목사가 있었다. 고신측과의 합동에도 중심양측의 합동결의 상항을 보면 양측은 5인씩 헌법수정인원회를 선임하여 합동을 위해 헌법을 수정하기로 하였다. 합동측 5인 가운데 김목사가 자리했음은 물론이었다. 그결과 1960년 12월 13일 오후 5시30분 서울 승동교회에서 고신측 총대 131명, 합동측 총대 233명이 참석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김윤찬목사가 있었다. 그후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분리해 나간 통합측과 재통합을 위한 모임었는데 이때 제시된 세가지 합동원칙을 보면 ①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하고 NCC를 탈퇴할 것 ② 신학교를 보수적이며 복음적 정통신학을 고수 경영하며 ③ WCC적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선교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통합운동의 시기가 바로 김윤찬목사가 총회장이였던 1964년과 1967년 어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통합측과 분열 후 합동측을 추스른 공로자마지막으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은 신학교 재건을 위하여서도 김윤찬목사가 끼친 공헌이 있다. 총회가 분열된 후 소위 통합(W.C.C. 지지파) 측은 막대한 자금의 보고인 미국 남북장로교회의 힘을 빌려 전국노회와 교회를 향한 물량공세로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선교부와 단절된 합동측은 자금줄이 막히게 되자 김윤찬목사가 국제기독교협의회(I.C.C)회장 칼 메킨타이어에 도움을 요청, 당시 미화로 12만불을 지원받아 용산역 부근에 신학교 교사로 활용하기 위해 건물 1동을 매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 성취한 이가 바로 김윤찬목사였다.그는 신학교 발전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총회가 운영하는 총신대학 진흥과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자신이 또 총회산하 평신도 및 기독교지도자 양성을 위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 선생의 이름을 딴 칼빈대학교의 모체 칼빈신학교를 당국에 허락받아 설립, 교단적으로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좀더 자유로운 개혁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칼빈대학교를 설립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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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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