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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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변에서 출생
최훈목사(催薰 1926. 9. 26~2008. 4. 28)는 평안남도 평양시 유리(柳里)에서 부친 최병록(催炳錄)과 모친 황병선(黃炳善) 사이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위로 누님이 한분 계셨고, 조부님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로써 일찍 개화한 어른이었다.
최훈목사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의 최남단이며 대동강 한 가운데 있는 양각도를 건너가는 나룻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최목사는 월남하기 몇년 전까지는 거의 고향에서 살았다. 조부님(최재식)은 고향마을에 ‘송산리교회’를 세웠는데 이 마을 출신 명사로는 연세대 김형석교수와 총신대 김득룡박사가 있다.
부친 최병록은 숭실대학 출신이었으나 최목사가 7살되던 해에 53세의 일기로 작고해 최목사는 어머니와 조부의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고향 송산리에 있는 국민학교였던 신망학교(信望學校)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성상업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 평양철물조합에서 근무했다.
일제 말엽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평양서기산 밑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44부대 군속이 되어 부대가 직영하고 있던 자활농장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교사직 사면하고 재건교회 설립
최목사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5년 8·15광복이 되자 고향 송산리에 돌아가 송산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평생 신앙동지로 함께 활동했던 김창인(金昌仁)전도사와 이창환전도사를 신앙의 선배로 만났다.
최목사는 교사직을 사면하고 고향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가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전도사가 재건교회 전도사가 된 배경을 보면,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교회는 사실상 영력(靈力)을 상실하였다. 교회가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게 되자 뜻깊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일제당국의 갖은 압박과 시련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투옥되기도 했다. 적게는 몇개월씩 길게는 6,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겐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출옥한 성도들이 볼 때 이미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은 기댈 만한 지도자가 아니고 변질된 사이비지도자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로 일제와 영합한 교권주의자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당신들은 옥에서 고생했지만, 우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교회밖에서 여러분 못지 않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노라고 큰 소리치는 것이었다. 해방을 맞은 청년 최훈에게도 몹시 실망스러운 현실이었다.
정의감이 남달리 강했던 그는 성경대로 믿고 살아야겠다는 순수한 신앙을 갈망하였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출옥한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재건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일성 일당이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 시작하자 교회에 대한 탄압과 핍박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1947년 최훈은 고향 망경대에서 숙청 당한 후 평안남도 순안 원일리 28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재건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었다. 청년 최훈전도사는 그 곳에서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로 생각을 굳힌다.

공산당에 체포돼 집행유예 2년
당시 청년 부흥사로 서북지방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창인전도사도 고향 평북을 떠나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재건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을 떠나 서울로 월남하게 되자 그 교회는 후임으로 최훈전도사를 청빙하게 되었다.
최훈전도사가 황주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는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권력이 강회되고 있던 때였다. 동시에 공산당이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회에 대하여 가일층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훈전도사는 강단에서 소신있는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온한 전도사로 사상이 다른 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의 설교를 필기해 상부에 보고한 정치보위부 요원의 고발로 1949년 2월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법정에 선 최훈전도사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때의 경험이 그후 그의 목회생활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당국의 감시 속에서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언제 다시 영어의 몸이 될지 모르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가지고 평북 강계(江界)로 가서 장백산맥 줄기에 위치한 향내산에서 50일간 산기도를 하면서 영적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던 참에 정말 예기치 못한 6·25동란이 발발해 황주의 재건교회는 지하로 숨어들고 말았고, 최훈전도사도 교회를 사임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그냥 버티다가는 인민군대의 입대에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로 산속으로 피난했는데 그곳에 숨어든 내무서원에게 발각되어 총살 직전에 UN군의 공중 폭격기의 폭탄 투하로 구사일생으로 4개월간 산속을 헤매면서 생사의 가름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떠나 서울로 월남
1950년 12월 5일 평양을 떠나 12월 9일  서울에 도착해 재건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있던 재건교회에서 고흥봉(高興鳳)목사를 만났다. 고목사는 한상동 이기선 목사와 함께 옥고를 치룬 동지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남으로 다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고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이끌고 항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평생 신앙을 함께 할 멘토로 믿음의 선배 이순남권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권사 역시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신앙인이었다. 이권사는 최훈보다 일찍 월남하여 고흥봉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사였다. 이때 최훈전도사를 만나 부산 영주동교회에서부터 서울수복 후엔 서울 충현교회 그리고 동도교회에 부임하여 이권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믿음의 어머니로 함께 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김해시내에 재건교회 개척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고려파 교회와 직·간접으로 목회적인 접촉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 재건교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김해재건교회는 나중에 고려파에 가입해 김해중앙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자신은 부산 영주동에 새로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면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 수립
당시 고려신학교에는 한상동목사와 박윤선목사가 개혁신학의 수립과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었고 그동안 받은 은혜와 신앙생활에서 쌓은 경험을 조화시켜 가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었다.
1956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최전도사는 그해 4월 6일 신앙의 선배이며 과거 재건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친분관계가 있던 충현교회 김창인목사의 부름으로 담당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충현교회는 서울에 고려파 교회로써 큰 건물을 가진 유일한 교회였다. 맡은 부서는 중·고등부와 대학부 학생회였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야를 좀더 넓혀야겠다고 느꼈다.
나이 많은 최전도사는 자존심을 버리고 숭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이것은 최전도사가 학문을 더 배우겠다는 겸손과 향학열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한편 역사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싹트기 시작한 그의 예리한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가 숭실대학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면 후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학위논문으로 ‘한국재건교회교회사’를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숭실대학에서 우호익교수, 김양선교수, 서양사의 대가 김성식교수 등의 강의와 지도로, 재건교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렀고 단단한 학문의 기초도 쌓을 수 있었다. 1961년 2월 숭실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졸업 5개월을 앞두고 평생 몸담아 목회한 동도교회로부터(당시 강도사) 청빙을 받아 1960년 10월 25일 동도교회로 부임하여 원로가 되기까지 뜨거운 충성을 다한 모범적인 목회자였다.
그의 교계 활동으로는 모교의 강사를 비롯 숭목회 회장, 한국외항선교회 회장 및 이사장,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사무국장(1982)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대한민국평화통일자문위원, 한국항공선교회 이사장, 미주총신대 이사장, 평양노회 공로목사, 숭실대 모교를 빛낸 숭실인상, 국민일보 선교대상(1997),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1998) 등이 있고, 이를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은 그가 몸담아 사역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수장 자리인 총회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지난 2015년 4월 28일에는 그가 섬겼던 동도교회 예배당 본당에서 그가 떠난 후 7번째로 동도교회 성도들과 생시에 함께했던 많은 추모객들이 모여 그의 유지를 기리고 있는 모임에 참석, 새삼 고인의 신앙과 덕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7주기에 설교를 맡은 대전중앙교회의 원로요 증경총회장 인 최병남목사는 추모설교에서 로마서 14장 7~8절을 읽은 후, 최훈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① 순교자적인 삶을 산 사람 ② 생명을 건 목회와 신앙 ③ 최선을 다한 삶 ④ 믿음과 성령에 의존했던 삶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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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69회 총회장 최훈(催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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