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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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월성 건천 출신
최동진목사(東鎭 1920.3.6(음)~1996. 12. 14)는 1920년 3월 6일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에서 부친 최임순씨와 모친 이귀란씨 사이에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 태어난 동진은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6년 건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 1937년 2월 28일에 졸업하였다. 아직 정식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계성학교에서 배운 신앙훈련 덕택에 경주지방에 있는 모량교회에서 조사(助師)로 전도인의 일을 하다가 총회신학교에 진학했다.
6·25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1951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동노회(慶東老會)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경주 모량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 목회자로 정식 출발하였다.
1954년 전쟁이 끝난 이듬해 대구 근교의 경산군 경산읍에 소재한 경산읍교회(慶山邑敎會) 담임목사로 전임해 지도자로서, 목회자로서의 본격적인 수련을 쌓게 된다.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 경산읍교회 시무
최근에 간행된 경산교회 100년사 기록에 보면, “…1946년 10월 모량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51년 7월 5일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54년 1월 1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경산교회에 부임하였다. 경산교회에서는 새 교역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12월 31일 많은 교인들이 나와 교회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였다. 교회 마당에 모래를 뿌리고 환경을 미화하여 최동진 목사를 기다렸다. 도착할 무렵에는 교회종을 쳐서 도착을 알리며 온 교회가 환영을 하였다. 곧 예배당에 모여 부임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 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참석한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
최동진 목사는 1954년 9월 5일 공동의회를 거쳐(경산읍교회 제225회 당회록 1954. 8. 29) 1954년 12월 17일 위임식을 거행하여 경산읍교회 제9회 위임목사가 되었다(경산교회100년사, 설천복 편 2010. p.288-289).
최동진 목사는 이 경산읍교회에서 목회의 안정이 서서히 익어가는 중 생각지도 못했던 주기철 목사가 섬기었던 영남지방의 모교회 부산초량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된다. 경산읍교회 성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목사는 1957년 10월 1일 초량교회로 임지를 옮겨 30년 목회 황금기와 일생을 바쳐 초량교회에서 은퇴(1987. 10.  5)하기까지 심혈을 기울여 승리로운 목회의 장을 펼쳐나갔다.

부산 초량교회로 옮겨 은퇴 때까지  섬겨
1994년 11월에 출간된 <초량교회100년사>에서는 최동진 목사(1957. 10. 5-1987. 10. 5) 성역기간을 초량교회의 회복기와 성장기로 설정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량교회 100년사의 후기 30년간을 장식한 최동진 목사는 젊은 시절에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져 뛰어난 현실감각으로 6·25전쟁을 전후 한 시기에 청년운동에 관여하였다. 그는 비교적 늦게 신학을 마치고 교역자로 활동하는 동안 우리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부임직후 확고한 목회계획을 수립하여 당회원들의 지지하에 착실하게 초량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교회가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여 성장의 잠재력을 갖게 되면서 시야를 넓혀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최초로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아시아복음선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해외선교의 선구자로 선교비젼 제시
2차로 일본에도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이철우 목사), 또 스스로 해외 각국을 순방하며 수십 차례 걸쳐 선교집회를 가졌고, 국내 전도를 위해서도 전국 각 처에 부흥강사로 활약을 하였다.
한국교회가 지반이 취약하여 개교회 중심의 사고를 떨치지 못하고 있을 시절에 이와같이 선구적으로 해외선교와 국내전도에로 방향전환을 모색하였다.
또 합동교단의 총회장으로서 1만교회운동을 주창하여 이를 교단의 방침으로 정한 뒤 이의 달성을 위해 온갖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초량교회를 시무했던 혁혁한 역대 목회자들의 맥을 이은 그 위에 한국교회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는 다른 입장에서 초량교회(草梁敎會)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초량교회100년사. 이태언 박사 1994 부산 p.227).
최동진 목사의 부산 초량교회 시무기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최목사가 역사깊은 초량교회를 담임하게 됨으로써 1951년 한상동 목사 이후 좁게는 1955년 구영기 목사 이후의 과도기적 어려움을 과감히 극복하고 초량교회가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교회 내부의 침체된 요소들을 일소하고 활력소를 불어넣어 한강 이남의 어머니교회로서 위상을 재정립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초량교회가 상당한 발전의 잠재력을 마련한 바탕 위에서 최목사는 국내외 각처에 부흥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초량교회의 위상정립이 확실히 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에도 전력을 기울여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선교 초창기에 남미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일본에도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나아가 아시아선교회를 조직해 나중엔 파키스탄 등지의 현지인을 교육하여 선교사로 활용하여 선교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어서 대만과 월남 선교에도 진력하게됨으로 초량교회는 아직 한국교회 전체가 세계선교에 대해 본격적 깊은 관심을 가지기 이전부터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제59회 총회장으로서 1만 교회운동 전개
최목사는 부산에서 목회를 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여 초량교회 부임 후 얼마 안되어 국립 부산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학해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가꾸어 나갔고, 1969년 4월엔 제88회 부산노회장에 피선 노회를 위해 봉사하며 교정(敎政)의 능력도 키워나갔으며, 1974년 9월 서울 평양교회에서 모인 제59회 예장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 교단의 수장으로써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 뜨거운 봉사를 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시에 이룩한 대표적인 일들로는 ① 군목후보생들은 국방부의 방침 변경에 따라 신학교 졸업 후 즉시 고시부로 넘겨 고시케 하고, 합격자를 임원회에 보고케 한 후 각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해 임관하도록 하는 제도를 확립했으며, ② 전국 산하 노회는 노회 직후 10일 이내에 총회 총무 앞으로 예산 결산서 2통을 제출하도록 한다. ③ 지방신학교로 인천신학교를 총회 인준 인재양성기관으로 결의하다. ④ 미주노회를 중부·미주서부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하다. ⑤ 교회 내의 성화(聖畵) 사용여부에 대하여서는 예배 대상으로 하지 않는한 우상이 아니지만 우상화할 우려가 있으므 사용하는 것을 삼가하기로 결의하였다.

은퇴 후에도 연구에 몰두
최목사는 1987년 10월 5일 초량교회를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같은해 10월 14일 개최된 부산노회로부터는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초량교회를 은퇴한 후에도 향학열에 불타 1993년 한해 동안 미국 LA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대학원에 가서 1년간 수학을 하기도 했으며, 침례교계통의 린다비스타 신학대학원으로부터는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1996년 12월 14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 그의 장례는 초량교회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蔣)으로 사랑하는 초량교회의 성도들과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여기에 당시 설교자로 나선 그의 애제자 전 총신대학교 총장 정성구박사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평가했다.
“목사님께서는 초량교회의 어진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의 어르신이었고 한국교회의 어른이셨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목회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을 떠나 보내면서 사도 바울께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남긴 간증이 생각나는군요.
딤후 4:7-8에 내가 선한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신 어른이셨습니다. 첫째, 최목사님은 참으로 신덕(信德)을 겸비하신 어지신 목자였습니다. 둘째, 최목사님은 대설교가요 대부흥사였습니다. 셋째, 목사님은 선교의 비젼을 가진 선교의 프론티어(Fronteer)였습니다. 넷째, 최목사님은 위대한 교정가(敎政家)이며 행정가(行政家)였습니다.
초량교회의 행정을 쇄신하여 장로교회의 전형적인 교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총회장이 되신 후에 목사님이 벌리신 1만교회운동은 오늘 우리교단의 성장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총회목회대학원을 개설 목회자 자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찬하하였다(정성구 박사의 조사, 고 최동진 목사님을 보내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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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59회 총회장 최동진(崔東鎭)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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