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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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이조판서 준(俊)의 증손
권연호목사(1898-1979. 1)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 양반가문으로 알려진 안동 권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김인서는 이에 대해 “권연호목사는 이조판서 준(俊)의 증손으로 예수 믿는다는 죄명하에 안동 권씨 족보에서 할명(割名)되었다가 이즈음 복보(復譜)되었다”(신앙생활 1954. 5·6월호 참조)고 쓰고 있다.
권목사의 형제가 처음 기독교를 접한 때를 1908-1910년쯤으로 생각되며 안동지역의 최초교인으로 국곡교회를 세운 권수백 조사(1923년 장로가 됨)가 1908년 사랑방 사숙(私塾)을 개설하고 강낙원을 교사로 초빙하여 신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공부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권연호, 권건호, 이장윤, 이부돌, 이삼돌, 이태술 제씨가 일직면 경내의 장사리교회의 교회학교를 설립한 것이 나타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짐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고향을 떠 경성으로 올라가 경성사범학교 구기과(球技科)를 1914년에 졸업하고, 잠시 소학교(오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미국 북장로교 안의와(Rev. James Edward, Adams, 安義窩) 선교사를 만나 객지생활에서 일시 중단되었던 신앙을 되찾게 되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경성 사범 출신으로 교사생활
1916년 평양으로 간 그는 숭실대학에 입학하였고, 함일톤(Rev. F. E. Hamilton 咸逸頓) 선교사 댁에서 고학하며 공부하였다. 당시의 급우들로는 현재명, 김무생 등이 있었다.
고학과 과로로 폐결핵에 걸려 잠시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하였다. 완쾌된 후 윤산온(Rev. G. S. Mccune, 尹山溫) 교장으로부터 “병약한 몸으로 대학 졸업은 아니 해도 좋으니 신학(神學)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기독신보 1969. 7. 26.). 그래서 1918년 대학을 2년 수료한 채, 다시 잠시동안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몇 해 동안 교편을 잡고 일하던 중 교사직에 회의가 들어 사임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조선인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제국주의 교육을 하는 것이 마음에 번민과 괴로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서울창신교회 70년사. p.77).
이 무렵 1921년 2월 5일, 안동 주재 미 북장로교 안대선(Rev. W. J. Anderson 安大善) 선교사가 안동읍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처음 조직하였는데 당시 이 모임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기독신문 2009. 6. 24.). 중요활동으로는 청장년들의 신앙생활훈련, 회원상호간의 친목, 교양 함양과 절제운동이 핵심 사안들이었다.
얼마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을 위해 안동을 떠나 평양으로 갔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과 더불어 평남 강서의 기양교회 조사(助師) 일을 보면서 한 학기 공부하고 1년간 목회실습을 하며 다니다 보니 10년만인 1936년에야 졸업하고, 평서노회(平西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목회사역을 보면 한 마디로 훌륭한 목회자상을 보여준다. 그가 가는 임지마다 아무탈 없이 승리했다. 그의 중요한 사역지로는 신학교 시절의 기양교회(1928-1937), 평북 철산읍교회(1937-1940), 만주 안동제일교회(1940-1945),  경성 창신교회(1946-1969) 등에서 착실하고도 타의 본이 되는 목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초기 목회지였던 기양교회에서의 장기목회(9년), 철산읍교회(4년), 만주 안동교회(6년), 경성 창신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24년가까운 자기목회를 한 것을 들 수 있겠다.
권연호목사와 동사목회를 한 바 있었던 부산 온천제일교회의 원로목사요 예장합동 증경총회장(91회)을 역임한 장차남목사는 최근 간행(2015. 3. 20 쿰란)한 그의 목회회고록(p. 772-775 참조)에서 권연호목사의 목회특징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① 이성문제 철저, ② 물질적 청렴, ③ 도시목회에는 설교를 짧게. 이같은 목회철학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늘 되새겨 주곤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도생활의 특징으로서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개인기도를 보통 3시간씩 드리며 하루에도 틈틈이 기도하는 시간 5-6시간은 되었다. 다음으로 그의 설교의 특징이 있는데 성경적이며, 반드시 원고 설교를 하며, 짧으면서도 시간을 엄수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을 비롯 결혼예식이나 장례예식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일 뿐만 아니라 장중미가 넘쳤고, 당사자들만 아니라 모든 참여하는 회중들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게 하는 정중미가 있었다고 한다.
권연호목사의 개교회 목회활동은 창신교회에 부임하고 난 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주(滿洲) 땅에서 목회하다가 해방된 조국의 중심지 수도서울에 귀환한 입장이었음에도 여기저기에서 권목사를 필요로 하였고 불려다니다 보니 주어진 소임들이 자연히 많아지게 된 것이다.

1946년 형목제도, 6·25때 군목제도 실시에 기여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① 오늘의 교도소 목사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해방후 미 군정 시대에 감리교인이었던 군정장관 러치 장군을 만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의 교도를 위해 형목제도를 실시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일은 당시 천주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단체들이 죄수들을 상대로 교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각 종교단체장들이 명예를 걸고 추진하고 있었는데 장로교 대표로 권연호목사가 합세하여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1946년 1월 군정청령 제70호를 발령, 전국 18개 교도소마다 형무소 소장을 임명했는데 장로교 13명, 감리교 5명이 교무과장으로 부소장급 대우로 임명되어 오늘의 교도소선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② 주일에 실시하려는 선거를 평일로 바꾸는데 큰 소임을 다 하였다. 당시 미군정청 사령관 핫지 중장이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최초의 총선일자를 주일(主日)인 1948년 5월 9일로 결정 공포하였다. 이에 마음이 아팠던 권목사는 핫지 중장을 방문해 항의하였다. 핫지 장군은 이승만박사와 상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갔다. 처음엔 “주일예배 후에 교인들은 선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권목사는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항변해 이해를 시키고 다시 핫지 중장에게 갔더니 그날이 주일인줄 몰랐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즉석에서 이승만박사에게 전화해 5월 10일 월요일로 연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박사는 권연호목사를 달리 대우했다고 한다.
③ 해방 후 혼란기에 문교정책을 맡았던 안호상 문교부장관은 국가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배례(拜禮)를 강조했다. 권목사는 여러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신앙적인 문제라 이승만박사를 찾아가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바꾸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회고했다. 주일성수 문제와 국기배례 문제는 이미 북한에서도 문제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많이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④ 6·25 당시 서울로 내려온 북한피난민 교우들을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활동했다. 이같은 일은 김구선생으로부터 찬하를 받을 만큼 동족구원에 앞장섰던 것이다. 미군 당국에 청원해 얻은 천막을 창신동 고지대 언덕받이에 치고 월남한 교우들을 수용해 구제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북으로부터 계속 피난민이 내려오자 미 북장로교선교회에서도 안두화, 권세열 목사 등과 이인식, 권연호, 선우훈 장로 등이 합세해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⑤ 또 권연호목사는 신생 대한민국 군대에 장병들의 신앙과 정신지도를 위해 오늘의 군목제도의 원형인 군속군목제도를 설치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 했을 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후원했다.
문필가요 목사였던 김린서는 그의 잡지 신앙생활(信仰生活)지에 6·25 전후 지송암, 김영환 두 목사가 제3육군병원에 가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병원장 정희섭 대령이 종군목사란 직분을 정한 것이 군목제도의 시초가 되었다고 썼다.
종군전도의 시작과 동시에 권연호목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삼 진언하고 각 교파와 선교회가 연합청원을 해 대통령령으로 정식 군목제도(軍牧制度)가 실시되었다. 이는 1884년 선교승인과 함께 조선역사상 최고로 귀중한 축복이었다고 김린서는 쓰고 있다(신앙생활 1953년 성탄호 기사).

교회언론에 관심가진 선비다운 목회자
⑥ 권목사는 장로교 정통신학교육 방면에도 크게 기여했다. 원래 선비문화 속에서 자랐고 자신이 또한 교사(敎師)요 문사(文士) 출신인 연유도 있었겠지만, 고향 안동 장사리교회 안에 교회학교를 설립한 일로부터 만주 안동제일교회 재직시 고등성경학교와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성경학원에 김인서를, 봉천신학교엔 박형룡박사를 초청하여 가르치게 한 것 등은 그의 교육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뿐만 아니라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일괄 취소하고 총회직영 단일신학교(현 총신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한 당시의 총회장이었으니 교육적인 관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총회장 권연호목사는 총신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의 신학정로를 계승해야 할 것이라고 개혁신학전통에 선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⑦ 권목사는 1954년 4월 안동에서 모인 제39회 총회에서 교단 안의 기독공보와 신앙생활 잡지 등 언론활성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권연호목사는 목회자로써 교정(敎政)을 맡았어도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서도 선비다운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은퇴 후 자녀들이 사는 미국으로 거쳐를 옮겨 쉬지않고 공원에서 로상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개인전도를 하며 건강한 삶을 살다가 1979년 1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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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36회 총회장 권연호(權連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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