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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교과서 폐지에 관하여-김 영 한 박사
    역사교과서 논쟁은 해방 이후 역사를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역사’라고 보는 사관을 가진 역사서술이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서술하면서 북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중립적으로 서술하는 문제에서 발생하였다. 그와 함께 교학사 교과서가 처음으로 교육 현장에 도입되었을 때, 기존의 교과서들과 다른 입장을 가진 교과서의 사용 자체를 물리적으로 막는 역사교과서의 독점체제의 문제점이 현재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개정 반복의 악순환 없는, 정권에 독립적인 역사교과서 연구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문 정부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대한민국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공정한 역사서술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유럽에서 전쟁을 했던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 같은 나라들은 서로가 합의한 역사적 사실을 함께 가르치며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같은 나라의 국민들 사이에서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교육의 내용에서 너무나 날카롭게 대립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관에 입각한 내용을 가르치고자 가히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교과서 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진보와 보수의 시각을 가진 학자들 사이에서 상호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집필 기준을 작성할 것을 제안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명확하게 서술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서 해방 이전의 독립운동을 다루는 단원의 제목은 “국내외의 건국 노력과 국제적인 움직임”으로 되어 있고 해방 후의 첫 단원의 제목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되어 있다. 국내외에서 건국 노력으로 태어난 것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결론은 부자연스럽다. 3.1운동과 그 영향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이라든지 건국 노력이 건국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서술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자유민주국가 건설, 산업화, 민주화 과정들이 사실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서술되어야 한다. 역사교과서 집필에서 저항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역사 발전의 긍정적인 면들이 소홀하게 서술되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한국사 교과서에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의 긍정적인 부분은 거의 서술되지 않고 부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역사교과서에서 해방 후 한국사 서술에서 공과를 균형 있게 서술해야 할 것이다.△ 검인정 통과 교과서들은 내용과 집필자들의 신상을 인터넷 공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국정교과서 집필과정에서 시행된 것 같이, 역사교과서의 검인정 과정이 끝나고 인쇄되기 전에 검인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이 출판된 이후에 내용의 수정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오히려 인쇄하기 전에 다양한 사람들의 검열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내용의 오류들도 수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과서의 집필 방향과 함께 집필진들이 공개될 경우에 학교에서의 채택과정에서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교과서 채택이 개별 학교의 결정권이라면, 역사교과서의 내용과 집필진이 공개적으로 알려져야 채택과정에서의 투명성도 높아질 것이다. △ 역사교과서의 검인정에서 역사해석의 다양성이 명확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교과서 종류는 다양하지만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검인정제도 도입의 취지가 제대로 살려질 수가 없다. 현 정부가 내세우는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역사교과서 서술에서 다양한 입장의 교과서들이 채택되는 것을 보장해야 한다. △ 역사교과서에서 기독교의 역사적인 역할이 공정하게 기술되어야 하겠다.지금까지 개항 이전까지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각 종교가 했던 역할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 불교와 유교의 역할, 조선시대의 성리학의 역할, 조선 후기의 천주교와 동학의 역할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개항 이후에 들어온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러한 기준이 적용되지 못했고, 다른 종교와 동일한 분량으로 서술되었다. 최근에 기독교계의 노력으로 개항 후의 기독교의 수용에 대하여 설명하라는 집필기준이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한국사 교과서들이 그러한 집필기준을 지키지 않고 있다. 기독교는 개항 이후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렇게 기독교의 독자적인 역할을 서술할 때, 역사교과서에서 각 종교가 시대마다 담당했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공정한 서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6-09
  • ‘6.15’ 17주년을 맞이하며-홍 성 표 목사
    5.16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구상하며 민족분단 상황을 악용하려는 발상을 하게 된다. 그것이 곧 민족의 통일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보부장 이후락을 밀사로 하여 북한을 방문케 한 다음 1972년 7월 4일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고 김영주를 대신한 박성철 제 2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한다. 이 회담들에서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공통의 염원을 안고 허심탄회한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효과를 이루었다.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의 원칙에 합의를 하였다. 1. ①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간섭을 받지 아니하는 자주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② 통일은 서로가 무력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하며, ③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키 위한 상호비방을 중지하고 작은 무장도발이라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를 미연에 방지키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자는 합의를 하였다. 2. 쌍방의 긴장상태 완화 신뢰분위기 조성 비방중지, 무장도발과 충돌사고 방지의 적극적 조치를 위한 합의. 3. 끊어진 민족적 연계회복을 위한 이해증진의 다방면 제반교류. 4. 남북적십자 회담 개최, 군사충돌방지를 위한 서울과 평양 사이의 직통전화 설치. 5. 이러한 제반 합의사항을 잘 지키도록 남의 이후락 부장과 북의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합의. 6. 이런 상항들이 잘 이행되도록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러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민과 민중, 민족과 역사를 속이고 철권통치를 모색하고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등을 만들어 종신 대통령을 모색하다 심복인 김재규 장군에게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경 궁정동 안가에서 심수봉의 기타와 노래 소리를 뒤로 한 채 최후를 맞게 된다. 경제개발을 앞세우며 수출주도형 정책을 중심에 두고 농민과 노동자의 저곡가 저임금을 통한 민중의 착취로 하여금 역사를 속이는 일을 영구히 획책하고 절대 권력을 구사하다 절대 부패한 결과로 무참하고 허망한 죽음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3대 세습을 하고 있는 북한의 세습정권은 영원한 것은 되지 못한다. 지구상의 어떤 권력도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인가 정의와 민중의 힘에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모든 권력자들이 깊이 새겨야 될 것이다. 민중을 섬기고 봉사하는 권력만이 정당성과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모든 불의한 권력들, 교만하고 오만하며 자만에 빠지는 권력들은 패망의 열매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 역사의 진리이다. 분단과 통일을 이용하여 전대권력의 영원화를 꾀하기 했지만 남북 7.4공동 성명의 제3원칙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합의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를 수 없이 겪으면서 분단 이후 마침내 남북정상 회담이 성취되는 역사의 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 결과물이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에서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다. 분단 50년 반세기 만의 그리움과 기다림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다. 민족 전쟁으로 인한 숱한 죽음들과 이별과 헤어짐, 말 못할 한과 억울함, 배고픔과 굶주림, 서리서리 맺힌 한들이 억만겹 쌓인 후에 만나는 티끌만한 희망이었다. 6.15 선언의 골자는 이것이다. 1. 남북의 자주적 통일. 2.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연방제 통일. 3. 인도적 만남 실행(이산가족 등). 4. 남북의 경제협력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의 경제적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 5. 이러한 사항들의 조속한 시행을 위한 실천 등이다. 자주, 평화, 우리민족들끼리 진정한 협력과 교류를 촉진하고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상호 이해를 넓히며 우리의 분단의 벽을 좁혀가고 궁극적으로는 그 벽을 헐어 통일에 이르게 하자는 것이다. 만남과 교류가 없으면 관계는 단절된다. 분단의 벽을 허물고 통일의 길을 여는 것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만나고 먹고 마시며 서로 도와주고 생각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며 거짓된 계산과 이해의 껍질을 벗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6-02
  •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교회에 바란다-장 헌 일 목사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전임 대통령이 탄핵·구속되는 정치적인 혼란기 가운데 보권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다. 이번 대선 투표과정은 어떤 정치 지도자일지라도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서 벗어나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교훈을 보여주었다. 또한 높은 투표율은 상식에서 벗어난 오만과 독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대통령선거는 끝났지만 제19대 대통령은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분열된 국민과 장기간 공백기로 인해 무너진 국정을 수습해야하는 중책을 안고 있다. 새로운 대통령에게 주어진 국정운영 전반에 관해 해결해야 할 산적한 국가현안이 기다리고 있고, 국민들과 약속한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대통령은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조국의 미래운명을 결정하는 많은 일들이 새 대통령 뿐만 아니라 유권자인 국민 모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가 종식되고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적 대통령의 모범으로 남도록 새로운 시대를 향한 국민 대통합을 위해 기도하고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하버드경영대학원 셰인 그린스타인(Shane Greenstein) 교수는 대통령의 업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으로 대중과의 의사소통 능력, 정책에 대한 비전 제시, 조직운영 능력, 정치적 기술 등을 지적한바 있다. 필자는 이를 토대로 새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국정운영의 리더십을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제안하고자 한다.첫째, 새 대통령은 역사의식과 정치철학을 토대로 국민과 소통하는 통합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서 탄핵이라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받은 분열이라는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국민 통합 의지를 밝혔다. 이는 전 국민을 향한 대통령의 진정성을 보일 때 가능하며,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깊은 포용력을 가지고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뛰어넘어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국민통합에 전력을 다하는 소통과 통합의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둘째, 확고한 정치철학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구태를 과감하게 결별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가겠다는 재조산하(再造山河) 즉 “대한민국 대개조에 나서야 할 때”라는 시대정신에 입각한 비전을 제시해서 국민에게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변혁적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지도자는 강한 도덕성과 정직성,그리고 책임성을 갖고 예리한 역사의식 그리고 설득력과 분명한 미래의 비전을 통해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다음세대에게 나라다운 나라를 물려줄 수 있는 희망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셋째, 국민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주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 정경유착이 사라지고 일자리 창출을 실천하는 신뢰의 복지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특히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양극화가 초래한 민생불안을 해결하고 불공정한 시장 만능주의 경제체제를 교정하는 경제 민주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인적자본의 강화를 위한 적극적 복리,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 모든 국민에게 삶의 안정성과 패자부활의 기회를 보장하고 사회적 자본을 강화하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을 열어 모든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넷째,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를 분석하고 조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며 외교역량을 갖춘 통일 대통령이 필요하다. 동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넣은 포괄적 동아시아 구상의 바탕위에서 미국과 대화를 전개해 나가야 하며 한미관계는 더 이상 양자관계에 한정될 수 없는 지역 동맹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미관계의 적절한 관리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 한반도 주변 국가와의 다각적인 외교관계가 국가의 안위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깊게 인식하고 그 바탕위에 대외전략 전반을 조정해 나가야 한다. 다섯째, 소통과 통합,시대정신 그리고 복지와 평화 통일의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타협(Compromise), 협조(Co-operation), 합의(Consensus)’라는 ‘3C 정치’를 통해 ‘성숙의 민주주의’의 틀을 기반으로 국가적 재난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위기관리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며 국민과 함께하는 든든하고 믿음직한 대한민국호 선장이 되어야 한다. 새롭게 출발하는 19대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역대기에 나단 선지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곧 한국교회가 중요한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를 위해 격려와 채찍으로 예언자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함에 따라 교회와 국가는 교황과 황제의 지배구조 속에서 연방합일체로 묶여 있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정치적 힘과 경제력은 강화되었으나 복음이 갖는 영적인 힘은 약화되어 복음이 세속화, 물량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정치권력은 감시와 견제, 그리고 비판이 없으면 반드시 부패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주님께서 한반도를 통치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5-19
  • 또 어린이날을 맞고 보내며-임 영 천 목사
    올해에도 어김없이 ‘가정의 달’이 돌아왔다. 이 ‘가정의 달’엔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도 있으며, 또 스승의 날도 있다. 그래서 이달은 사랑과 효성과 사은(師恩)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되는 달이다. 자연히 가정에 훈기가 돌고 따라서 생기도 넘치게 된다. 그런데 올해엔 예기치 않게 대통령선거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바로 뒤에 치러지게 되어서 이런 가정 내의 훈기와 생기가 제대로 살려지지 못하고 크게 잠식되어 버린 것 같다. 이번 대통령선거 열풍이 너무 거세다 보니 잔잔한, 가정 내의 사랑과 효성과 사은 등의 문제는 그 선거 열풍에 거의 묻혀버리고 말았다고 보겠다. 매우 아쉬운 일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이날(5월2일)까지는 투표 결과를 알 수 없지만, 이제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가정’ 관련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가정의 구성원인 어린이(영유아)와 그들의 보육 및 의료 문제, 사교육과 저출산 대처 문제, 직장인들의 육아 휴직 문제, 자녀들과 부모 사이의 관계 문제, 그리고 다수 가정의 고액채무 및 재정결손 문제, 이런 것들과 연관해 부득불 발생하는 아동학대, 노인(부모) 학대, 그리고 다문화가정 및 탈북민 가정 관련 제반 문제 등 한국인의 각 가정의 문제는 헤아리기 힘든 여러 난제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노라고 나선, 이번 대선의 당선자는 그 대국민 봉사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그렇다고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좁은 이 지면에서 다 다룰 수는 없으므로 필자는 마침 이번 어린이날을 맞고 보내게 된 김에 어린이 관련 문제들(만)을 중심으로 몇 마디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얼마 전 어느 대선 후보가 사립유치원 운영자들의 모임에 가서 그들에게 앞으로의 어린이 교육기관 관련 제반 계획을 발표한 뒤 다수로부터 지탄을 받고서 무척 당황해 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만큼 어린이(영유아) 보육 및 교육 문제는 학부모들의 초미의 관심사라는 사실을 그 사건이 입증해 주었다는 점만을 필자는 여기서 강조하려고 한다. 자신들의 자녀가 국공립유치원(어린이집)에 가느냐 사립유치원에 가느냐 하는 문제가 그렇게도 엄청난 관심의 표적이란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경제적인 여유가 빠듯한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국공립유치원(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내려고 한다. 그곳이 여러 관점에서 최소한의 보장은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녀를 비교적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뜻이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부담과 기타 교육 여건이 괜찮다는 일반적 판단에서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공립유치원(어린이집)은 숫자 면에서 한계가 있다. 결국 그곳에 들어가는 길이 막혀버린 어린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사립유치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비교적 높은 비용부담과 학부모로서 안심할 수 없는 불여의한 교육여건 등, 학부모들은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정부는 앞으로 병설(확충)이든 단설(신설)이든 사립의 공공형 전환이든, 국공립 형태의 어린이 교육기관을 적절히 늘려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국공립 유치원 이용률이 겨우 24% 안팎에 불과하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그러나 이런 기구 확충 조치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어린이 보육 현장에서의 실제적(세부적)인 문제점들은 그 나름의 절실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보호 아동들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 즉 나약한 어린 아동들에 가해지는 교사들의 신체적 폭행 행위 및 특정 아동들에 대한 차별적 왕따 행위 등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또 뜨거운 통학 차량 속에 장시간 갇혀서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 병원에 입원했으나 완전치유가 불가능해 이젠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어느 아동 문제… 등에서 보게 되듯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그런데, 불법 행위로 적발된 보육 기관은 처벌을 받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정상 운영되고 있어서 학부모들의 빈축을 사는 경우도 있다. 한 어린이집은 25개월 된 아이를 최소 47차례(!)나 학대한 장면이 CCTV에 고스란히 찍혔으며, 그 아동학대 건으로 지난해 평가인증이 취소된 어린이집인데, 최근 그 입구에 ‘평가인증’ 로고가 다시 붙어있음이 확인돼 논란이 되고 있다. 알고 보니, 원장과 해당 교사만 갈아 치우고 보육 기관은 그대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기만 해서는 아동 보육 기관에 대한 학부모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최근엔 어린이들의 질병치료 문제로 사회적으로 부끄러운 일, 다수의 낯을 뜨겁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 주도의 소위 ‘달빛 어린이병원’ 사업이 지역 소아청소년과 의사회의 방해로 그 존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야간진료 순번제 등의 대안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자기네 병원수입이 줄어들 것만을 염려해 국민적 호응을 받는 정부의 ‘달빛-’ 정책마저 흔들고 있다. 의사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건강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다면, 특히 연약한 어린이들의 건강 문제에 대해선 부끄럽지 않은 개방적 처신을 해야 하리라고 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5-02
  • 통일 대통령-홍 성 표 목사
    우리는 지금 조기대선을 통해서 대한민국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고대국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제도의 집합과, 영토적 단위, 철학적 이념, 강제와 압령장치로만 규정될 수 없다. 관념과 기능, 조직적인 것으로만 국가를 이해할 수는 없다. 헤겔은 가족과 시민사회, 국가를 정확히 규정하였다. 국가의 여러 가지 종류, 다원주의, 자본주의 리비어던 형의 국가, 가부장적 국가 등이 존재해 왔다. 역할적 의미에서 최소국가와 발전국가, 사회민주국가와 집단국가, 전체주의 국가 등이 있다. 오늘 날 지구화 시대에 있어서의 국가 ‘소위 탈주권의 거버넌스’로서의 권력은 국가로부터 벗어나서 세계적 시장과 다국적, 초국적 기업 경제국가가 흥행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화 국가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단일국가를 초래하면서 세계적 양극화를 이루고 있다. 국가는 역사적 제도로서 16세기 유럽에서 일련의 특별한 환경에 대응하여 출현하였다. 결국 국가란 일정한 영토 내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결사체이며, 이러한 국가의 행태는 수많은 경쟁적 이론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국가에 대하여 민족이란 오랜 일정지역 내에서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이 있다. 삶의 총체적 표현의 방식들을 문화라고 본다면 오래 동안 같은 언어사용과 함께 생활을 같이 해온 문화적 존재를 민족이라 일컫는다. 이러한 민족은 또한 정치공동체로서의 민족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의 이해는 문화적 정체성보다는 시민적 충성과 정치적 동맹을 강조한다. 민족이 인종적 공동체가 아니라 정치공동체 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은 다양한 민족주의를 양산한다. 자유민족주의, 보수적민족주의,, 팽창적민족주의, 반식민지민족주의 등이 있다. 세계정치의 형태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다원주의와 이상주의, 막스주의 등이 있다. 21세기 들어 세계질서는 냉전으로 인한 분단과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양극체제에서 단일체제로의 이행이 주를 이룬다. 탈냉전을 벗고 다극체제의 출현이 등장한 현실이다. 오늘 날 우리는 경제적 지구화와, 문화적 지구화, 정치적 지구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구화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눠지고 중심국가와 변두리 국가는 자본의 착취 구조악을 통해서 극단적 자본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 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자국의 이익 추구에 따라서 이익의 지역화를 낳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연합군에 의해서 해방되고, 해방되자 미소 냉전의 강요로 인한 분단국가로 출발하였다. 해방은 더 큰 민족의 비극인 분단을 낳았다. 미소 강대국의 점령하의 해방공간과 미군정 아래서 대한민국의 신생국이 탄생된 것이다.우리는 분단의 70년의 세월을 지나고 있다. 동서독이 하나가 되고 베트남이 하나 된지 오래이며, 지구상의 분단국가는 오직 대한민국 하나뿐이다. 그리고 분단된 우리 한반도의 통일시계는 중지되었다. 금강산 길을 막고 개성공단의 길을 막아버렸다. 1961년도 존. F. 케네디는 동서독의 통일의 동서독의 문제라고 하였다. 한반도의 통일 역시 남북 자체의 문제이다. 외세를 의지하는 한민족의 통일은 어렵고 분단의 벽을 허물기는 어렵다. 외세의 해방이 분단을 가져왔듯이 외세를 등에 업은 통일은 또 다른 분단과 분열의 시작일 뿐이다. 분단의 현실이 우리에게 준 아픔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다. 분단의 아픔을 빗겨 간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우리에게 풀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은 산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의 중심이 분단에 있다. 우리 앞에 다가 선 선거에서 기도하고 바라는 것은 이러한 분단을 푸는 통일지도자를 기다린다. 단순한 역사적 명예의 대통령이 나니라 이 시대를 책임지는 존재의 대통령, 그것은 통일철학을 확신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통일대통령이어야 한다. 진정한 안보는 분단을 끝내고 통일을 이뤄가는 지도자이어야 한다. 정치적 평론가들이 만들어 가는 지도자는 위선자가 되기 쉽다. 거룩을 앞세워 민중을 속이고 착취하는 사이비 종교가처럼 민중을 속이고 자기의 정치적 야망을 추구하는 지도자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촛불시민혁명’을 통해서 조기대선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 민족의 운명이 전환기에 서 있다. 미중의 신세계 질서의 패권싸움으로 동북아, 특히 남북의 역사는 긴장이 높아가고 민족의 운명이 희롱당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기 없다. 자주적 의견을 제시할 수 없고 자주권이 없다. ‘우리끼리의’ 자주적 분단해결과 통일의 문제를 논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 남과 북, 동과서의 분열을 털어내고 정의로운 통일을 실천해 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지도자는 통일대통령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4-21
  • 정치적 봄 생명의 봄-홍 성 표 목사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꽃소식은 봄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 오늘은 세월호의 아픔이 1082일 되는 주일이다. 건국이래 최악의 ‘국정농단’과 ‘촛불혁명’으로 5.16 쿠테타 이후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지는 탄핵정권으로 분노와 새로운 희망을 부르짖고 있다. 조기 대선경쟁으로 후보들 각자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작은 약점으로 네거티브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3년 동안 차가운 바다에 잠자고 있던 세월호는 인양되어 목포신항에 접안되어 9명의 미수습자들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꽃도 피어보지 못한 많은 어린 생명들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 미 수습 가족들의 슬픔을 누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까맣게 타버린 가슴과 마음에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벚꽃들이 바람에 날리고 산에 핀 진달래는 4월의 역사를 노래한다. 담벼락에 흐드러진 개나리는 차가운 바람을 포근하게 감싼다.한미 군사훈련은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생존의 핵을 앞세우는 북의 바람 역시 우리의 평화를 의심케 한다. 가문 땅에 생명의 단비가 내린다. 역사의 모순들로 답답해진 우리의 희망을 은혜의 단비로 적셔주기를 기도한다. 역사의 발전 동력은 정치인이나 재벌도 아니고 사회적 명망가들도 아니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땀 흘리며 묵묵히 살아가다 어느 순간 모순들을 태워버리는 뜨거운 불로 타오른다. 민초와 민중들의 힘들이 역사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민중들은 세월호의 인양과 함께 진실의 인양을 바라고 역사의 정의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계절의 봄은 북풍한설을 몰아내고 어둠을 빛으로 바꾸고 있다. 창조주를 앞세우고 생명과 부활의 믿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역사는 여전히 밥통을 지키며 밥벌이를 하는데 전전긍긍 한다. 신은 계속해서 새로운 혁명을 촉구하며 우리에게는 책임적 존재로 살기를 명령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오직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우리가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 각자의 변화를 통하여 전체의 변화를 이루어야한다.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은 무엇인가? 사람은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온전함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빌 공약을 통해서 빈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자본의 탐욕을 위하여 민중을 속이는 독점재벌을 본받아서도 안 된다. 신의 이름을 앞세워 민중을 착취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을 본 받아서도 안 된다. 전통적 기독교의 구원론은 사람들의 죄를 원죄론으로 규정하고 죄의 DNA 유전을 반복하고 있다. ‘구조악’을 원죄로 포장하고 개인의 무능력과 허물로만 몰아가고 있다. 진정한 악의 실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거나 비겁하게 피해간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섭리를 좌우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이 선물한 이성의 빛을 어둠 속에 묻히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교만을 경계하면서 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모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역사 전체의 악이나 염려가 있기 전에 한 개인의 삶의 여로와 과정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사가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다. 번영과 영광의 시간이 있고 눈물과 아픔의 세월이 있다. 희망과 도전의 순간이 있기도 하지만 고통과 비통의 행로도 있다. 희노애락과 생사화복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러한 한 개인의 삶과 같이 역사무대의 드라마 역시 단지 평탄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숱한 질곡과 고난, 모순으로 점철된 어둠과 빛의 전개가 있다. 4월은 생명의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이다. 4월은 또한 잔인한 십자가의 처형을 물리치고 모든 어둠을 떨치고 죽음의 없는 영생의 부활로 우리 앞에 우뚝 선다. 들판과 산야에 핀 노란 민들레는 우리들 곁을 지킨다. 우리가 본 받아서는 안 될 것은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이다. 우리가 닮아서는 안 될 것은 거짓과 불의의 세력이다. 우리가 바라 봐서는 안 될 것은 모든 경제를 독점하는 독점 재벌세력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 평회 통일을 지향하는 통일운동을 억압하는 세력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진정한 생명의 봄은 서로가 서로의 귀함과 존귀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함께 더불어 사는 역사의 창조이다. 역사는 모순투성이다. 이기적인 자기 탐욕의 정치는 이제 청산 되어야 한다. 일제와 지배욕의 침탈의 역사, 분단과 분열의 역사, 착취와 억압 , 학살의 역사는 청산되고 진정한 정치의 봄이 되어야 한다. 경제적 양극화와 가정의 해체, 급격한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고립이 더 이상 확대 재생산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자기 울타리만을 고비해서는 안 된다. 자기 벽을 높이 쌓고 과거의 향수와 동굴에 갇혀 있는 교회는 역사 속에 생명의 부활과 희망을 이룰 수 없다. 닫히고 굳어져 화석화 된 가슴을 열고 진정한 봄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곳에 예수그리스도가 크게 웃는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4-14
  • 김동리와 김평우, 부전자전식 내림-임 영 천 목사
    지난 탄핵 정국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국회에서 결의한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라는 외침과 그 탄핵을 기각하라는 외침이 군중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했었다. 전자를 촛불집회라 불렀고, 후자를 처음엔 맞불집회라 부르다가 곧 태극기집회란 표현으로 바꾸어 불렀다. 전자에 대한 호칭은 앞서부터 사용해 오던 터라 자연스럽게 들렸지만 후자에 대한 호칭만은 조금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무슨 3&#8228;1운동 때의 거사에 대한 명명(命名)인가 하는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어떻든 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모임을 주도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면도 없지 않았다고 보겠다. 이 두 대립적 양상의 집회는 전자가 비교적 온건하고 평화적인 집회의 모습을 지속시키고 있었다면, 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거칠고 폭력적인 양상까지 드러내기 시작함으로써 전자를 선량한 사람들의 모임, 후자는 악동과 같은 이들의 모임 정도로 보게 하는 면마저 노정하고 있었다. 후자의 모임의 경우 특히 그 지도자 격인 인물들의 언행이 다분히 악동적인 면을 드러냄으로써 일반인들이 태극기집회 전반(全般)을 무슨 악동들이 주도하는 모임처럼 바라보게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김진태 의원, 서석구 변호사, 김평우 변호사 등이 그 지도자 군의 트리오(三大家)였다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대형 태극기를 온몸에 칭칭 감고서 무슨 태극결사대의 충성스런 대원과 같은 비장한 모습으로 행동했는데, 그랬으면서도 그런 그들의 행동이 국민들에게 별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당시 그 탄핵이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선량(選良)들의, 국회에서의 합법적인 결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동시에 국민 자신들의 의견마저도 85% 이상이 그 탄핵을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엄연히 나와 있는 실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것에 역행하는 그런 돌출 행동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특히 그 트리오 인물들 가운데 미국에서 귀국해 제일 나중에 합류한 김평우 변호사에 대하여 보다 더한 관심이 기울어지게 된다. 아무래도 필자가 문단(평단)의 말석에서나마 활동하고 있는 문인의 처지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달리 말해 김 변호사는 고 김동리 작가의 아들(차남)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주 안된(잘못된?) 것은, 아무래도 이번에 그 아들이 고국에 입국해 한바탕의 흑색돌풍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아비 김동리는 우리에게 매우 인상적인 작가, 또는 문학애호가들이 상당히 숭모하는 작가 정도로 그 괜찮은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을 법도 하다. 다시 말해 <무녀도>와 <등신불>…과 같은 단편소설의 작가, 또는 <사반의 십자가>와 <을화>와 같은 장편소설의 인기작가로서 그의 한국 문학사적 위치가 제법 튼튼한 작가로서만 기억될 수 있었으리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그 기대는 그 아들의 갑작스런 출현과 돌출된 언동 때문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나 판단된다.좀 엉뚱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듯이 두 부자(父子)의 유명세는 이제 막상막하가 되지 않았나 여겨질 정도이다. 유명세도 부전자전 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만일 이번의 헌재 재판에 김평우 씨가 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그 이름이 지금처럼 일반대중에게까지 크게 알려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탄핵을 탄핵한다”란 책까지 내고 귀국한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유명세는 악동으로서의 유명세로 나타났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는 헌재(憲裁) 재판에서의 피의자 변호 중에 왜 헌재가 약한 여자 편을 들지 않느냐는 식의 발언을 했다가 네티즌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부친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 서영은 작가를 부친 사망 시에 재산소송을 걸어 연약한 그녀가 유산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나게 만들어놓고 나서, 그때 그 일의 주역이었던 그(김평우)가 이제 와서 왜 약한 여자 편을 안 드느냐고 따진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뜻이겠다. 그는 미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세월호 희생자들이 너무 많은 보상을 받았다고 힐난했는데, 역시 약자 옹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하겠다. 어떤 네티즌(nama)은 김동리 씨의 소설작법 강의를 수강했는데, 그가 시대착오적 발언을 해서 학생들로부터 수강 거부를 당해 대학강단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지금 그의 아들이 왜 부친처럼 시대착오적 언동을 하느냐는 식의 비판을 하고 있음이 보인다. 아마도 1988년의 서울국제펜대회에 참석한 외국문인들을 중심으로 투옥문인 김남주 시인의 석방운동이 추진되고 있었을 때, 당시 한국문협의 이사장 김동리 씨가 오히려 그 석방운동을 방해하고 나섰던 일을 꼬집어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투옥 중인 김 시인을 겨냥해 “반체제 행위는 진보에 역행하는 시대착오”라는 다소 억지스런 말까지 했던 것이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기득권층에 대한 충성과 체제옹호적인 헌신만은 부전자전 식의 내림이 아닌가 싶다. 이 사실을 온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는 의미에서 금번의 그 아들의 출현은 선친에겐 전혀 득이 되지 못한 것 같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3-31
  • 한반도와 4월의 부활-홍 성 표 목사
    계절의 봄이 왔고 ‘촛불혁명’을 통한 국정논단의 ‘탄핵’이 정치의 봄을 예견하고 있다. 또 세월호의 인양이 4월 5일 예정되어 있다. 통진당의 강압적인 해산과 함께 박근혜-최순실게이트의 고조선 이후 민족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민중피폐의 삶을 살고 있다.4월은 4,19혁명과 함께 가장 잔인한 달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의 외침처럼 이 4월에는 거짓된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와 종교의 껍데기들이 성령과 민중들의 뜨거운 불로 다 태워지는 새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종교학에서는 인간을 ‘종교적 존재’ 다른 말로 하면 ‘의존적 존재’ 라고 말한다. 이성과 정신의 존재이고 이런 것들을 통하여 역사와 문화를 창조 하는 문화적 존재로 규정하기도 한다. 강하기도 하지만 가장 나약한 존재이기도하다는 말이다. 아마도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가장 나약한 존재인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하의 국무장관 틸러슨이 일·한·중을 방문하면서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자주적 주체적 세력이 빠져버린 비통한 모습을 보고 있다. 테프트-카트라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일본에게 넘겨준 미국의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후의 민족의 역사는 일제의 침략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민족분단과 민족상잔을 겪고 남북한의 사상적 경제적 차이로진정한 통일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6.15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통하여 개성공단을 열고 금강산을 오가는 새 희망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일제 잔재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5.16 군부 쿠테타 이후 전두환, 노태우를 거치고, 이명박-박근혜의 정권을 거치면서 새 역사의 길은 휘어지게 되었다. 이제 다시 촛불민중혁명을 통해서 새 역사의 문 앞에 서 있다. 서민의 가계부체는 1340조를 넘어가고 서민경제는 파탄의 지경에 이르러 IMF와 외환위기 보다 더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교회는 4월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하여 불의한 모든 세력의 무덤의 문을 열고 다시 산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어떤 부활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부활의 모습은 무엇인가? 대교회의 세습과 썩은 교권의 세습이 자리하고 불의한 권력과 독점재벌과 공생하며 아부하는 맘몬과 우상을 섬기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를 깊이 성찰해야한다고 본다. 민중들과 민족분단에 반역사적, 반사회적, 반통일적 자리를 보수하고 있다면 교회는 조만 간 역사에서 배격당하고 배제 받는 슬피 우는 곳에 버려질 수 있다. 한 개인의 영혼을 살리고 “상처받은 자의 치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 ‘나와 너 가’ 함께 살아가야할 존재로서 구조악에서 신음하는 국민과 민중을 구원해야 한다. 세월호의 상처를 싸매고, 국회의원과 민주정당이 불의한 권력에 쫓겨나며 강제 해산 되는 역사는 중지 되어야 한다. 진정한 민주국가에서는 능력위주가 아니라 기본적인 이간의 삶이 유지되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불의한 권력과 자본의 힘으로서 억울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힘에 의한 불이익과 악한 정치, 경제, 기업 구조로서의 불편부당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생명 기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해져 있는 이치에 있다. 지금 대한민국과 한반도가 처한 상황은 위기상황의 극치에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강조하고 최첨단 무기와 핵장비들을 한반도 근처에 집중하고 있다. 만일 미국의 북에 대한 선제공격이 일어난다면, 한반도에서 전면전의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상황은 전쟁이다. 전쟁과 관련한 무고한 생명들이 수 없이 학살된다. 6.25 민족세계전쟁은 세계 1-2차 대전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룬 참혹한 비극적 전쟁이다. 이제 또 다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상상할 수 없는 파괴가 이루어지고 파멸로 가는 길이다. 어떤 이유라 할지라도 다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내부의 갈등이 중폭되는 것을 외세가 조장하고 과거 청일-러일 전쟁의 대리전쟁이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방지이며, 외세를 통하여 이루어질 강압적 ‘흡수통일’의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사드를 대한민국 국민과 민중, 그리고 정치인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들여와서 강압적으로 설치를 밀어붙이고 있다. 사드는 대한민국 안보를 위한 전쟁방지책이 아니라 미중의 패권전략에 의한 제국주의의 폭력이라 생각한다. 교회는 구원을 선포하고 설교한다. 우리가 말하는 구한말의 한국과 오늘의 위기 비교는 어떤 의미를 말하고 있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의 구원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개인의 영혼과 역사의 구원 그것은 물과 기름이란 말인가? 과연 정치적 봄은 올 것이며, 민중의 삶이 행복을 사는 경제적 봄은 올 것인가? 이 생명이 약동하며 샘솟는 생명의 계절에 교회가 할 수 있는 기도, 그것은 진정한 생명들의 자유와 해방의 기도가 있어야할 것이다. 부활은 불의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부활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3-24
  • 적과 아군만 구별하는 사회인가?-심만섭 목사
    우리 사회는 최근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획일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을 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고교는 전국에 5,566개교가 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 대한 ‘편향’ 논란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2년 전부터 편향된 국사교과서를 바로 잡겠다는 의지로,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일선 학교에서 이 교과서로 가르치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연구학교’ 신청을 받았다. 그런데 이 ‘국정교과서’를 선택한 학교는 전국에서 경북에 있는 단 1개 고교 밖에 없었다. 왜 그럴까? 그 내용이 문제라서인가? 아니면 다른 일들이 있었는가? 안타깝게도 이를 반대하는 진보 교육 세력들과 외부 세력의 압력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이를 선택한 학교에서는 내부적인 반대와 방해로 3월초 입학식마저 파행되고 말았다. 이 학교가 ‘연구학교’로 신청했을 때에도, 민조노총과 전교조는 거센 압력을 가해왔고, 외부 인사들이 교장실에 찾아와 폭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단체들, 40여 개가 대책위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친다고 한다. 섬뜩하다. 마치 교육 현장을, 전쟁터에서 아군이 아니면, 죽여야 하는 적군으로 몰아가는 형세이다. 도대체 국사교과서가 무엇인가? 왜 이런 일들은 벌어지게 되었는가? 한 마디로 교과서의 ‘편향’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편향의 문제는 언제 그렇게 된 것인가? 2003년 G출판사가 만든 교과서가 검정(檢定)을 통과하였는데, 이를 ‘북한 주제사상과 동일한 시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보수 단체들이 그 출판사 앞에서 ‘폐기’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었다. 그러고 나서 2013년에는 또 다른 G출판사의 교과서가 만들어졌는데, 이번에는 전교조.민주노총 등이 나서서 그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를 찾아가서, 항의하고 그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의 이름을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채택하는 학교를 ‘친일파’ ‘매국노’ 등으로 몰아, 결국은 그 교과서를 채택하는 학교가 한 개도 없었다. 이쯤 되자, 정부에서는 의지를 가지고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을 해 왔는데, 현 대통령이 지난 해 ‘탄핵소추’를 받으면서 그 동력은 상당히 힘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 검토본을 지난 해 말 공개했는데, 야권과 진보 단체에서는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것으로, 나쁜 교과서의 이미지를 씌웠다. 뿐만 아니라, 8개 지역 진보 교육감들은 일선 학교에 연구학교와 관련된 공문을 내려 보내지 않아, 결국 신청 기한을 넘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데다 전교조 등은 연구학교를 신청한 학교를 항의 방문하는 등, 모든 것이 자신들이 뜻하는 바에 반하면, 아예 ‘싹’을 잘라버리는 강경수를 두었다. 그리고 ‘연구학교’로 유일하게 신청한 경북의 모 고교에 대하여, 연구학교 철회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기본은 ‘다양성’이다. 그 다양성을 말살하면, 획일주의와 독재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교육의 현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선택한 학교에 대해서도, 0.02%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폭압적이고 비교육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을,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이를 적극적으로 막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교조의 강령에 보면, ‘민주화’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민주화 교육’ ‘민주화 실현’ ‘민주적 권리’ ‘민주 시민’ ‘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럼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교과서 채택을 ‘싹쓸이’로 막아서고, 다른 의견은 존중하지 않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 교육’인가? 역사 해석에는 ‘사실과 객관으로서의 기록’이 있고, 또 ‘해석과 주관의 역사’가 있다. 그것이 비록 상충(相衝)한다 하여도, 이를 용인하는 것이 ‘참 민주주의 교육’이 아닐까? 지금의 행태는 참다운 교육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볼모로, 이념과 자신들의 주장을 선점하겠다는 전쟁의 광기로 느껴진다. 나만의 과장(誇張)일까? 이런 문제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다양한 교과서로 공부할 자격이 있다. 어차피, 진보든 보수든 역사교과서가 ‘편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왜 편향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획일화되고 강요하여 규정된, 교과서로는 그런 다양성을 접하기 어렵게 된다. 또 학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이 다양한 교과서로 공부하도록 후원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교육은 학교의 자율권도 인정되지 않고 있고, 외부의 압력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학부모들이 교육의 객체로써, 혹은 주체로써의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 만약 ‘국정교과서’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데만 역점을 둔 것이라면 선택하는 학교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또 다른 편향성을 지적받는 다른 검정 교과서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되지 않을까!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3-09
  • 촛불의 혁명과 탄핵의 자주독립-홍 성 표 목사
    3월에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실천은 독립이다. 대한민국은 과연 독립 국가인가? 1991년 9월 18일에 남과 북은 UN에 동시 가입하였다. 이것은 국제사회에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현존함을 만방에 공표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분단 46년만의 일이다. 두 개의 한국이 존재하는 실체를 역사에 공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고조선을 시작으로 5천년 민족의 역사가 다시 한 번 분리되는 슬픈 날이기도 하고 서로의 적대적 관계를 평화적 공존관계로 정착시키면서 국가와 국가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언제인가 한민족의 이름으로 통일의 길을 구체화 하는 출발점을 만들어 보자는 역사적 의미를 새겨보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제의 잔재들을 청산하지 못한 죄이며 결과이기도 하고, 진정한 민주화를 성취하지 못한 현실을 대변하는 역사의 한 획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계절의 3월은 분명 새 생명이 대지의 껍질을 뚫고 소생하는 부활의 계절임에 틀림없다. 추위와 북풍한설을 견디기 위해 깊은 겨울잠을 자거나 숨 고르며 희망의 봄을 기다리는 성숙을 위한 준비와 약동의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계절을 맞이하며 역사의 봄이 이 땅에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진실이 왜곡되고 거짓된 역사를 만들어 권력과 자본의 부귀영화를 기도하는 부류들의 반란을 분명한 이성과 영적 눈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민족의 완전한 독립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토록 바라고 외치며 몸부림 쳤던 자주 독립을 다시 결행해야한다. 은총은 밖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간절히 바라고 실천하는 온전한 삶과 기도가 있을 때 온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 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아들인 예수가 그렇게 되기를 원할 때이다.자적 독립은 외세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자주 독립은 미국이나 일본, 중국이나 러시아가 저절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당사자들, 주체들이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진정한 소원과 행동, 그리고 실천이 있을 때 가능성이 주어진다. 아무도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아니한다. 아무도 우리의 진정한 자주적 독립을 이루어지도록 돕지 않는다. 내가 , 그리고 우리가 그 것을 만들어 가조 주체적으로 실천해 가야 한다. 살고 죽는 것, 생사화복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일어나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구하는 것을 주시고, 찾는 것을 허락하신다. 혁명은 전쟁 같은 혁명만이 아니다. 삶의 방향과 질을 바꾸는 것이 혁명이다. 존재의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움직이며 실천하는 기도가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혁명을 실현할 수 있는 ‘탄핵’이다. ‘도전과 응전’의 삶을 넘어서는 문명과 가치의 혁명이 필요한 시대가 지금의 시대이다. 혁명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나 회복이 아니다. 혁명은 근본을 바꾸는 새로운 역사와 문명, 가치를 심고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새로운 농사를 짓는 것이다. ‘소비와 생산’의 원리로 이루어진 자본주의나 ‘기획경제’의 ‘공산주의’ 그리고 평등의 삶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복지와 분배 등이 보다더 발전지향적인 가치로 통합 되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존중되는 가치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보다 민족의 가치가 우선이 되어야 하고 민족보다 민중들의 삶의 가치가 우선 되어야 한다. 민중이란 단순히 시대의 소외 된 특수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다. 역사를 떠 바치면서도 지배자들과 자본과 권력에 억압되고 주변으로 밀려나는 순한 양들이다. 민중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억울함과 슬픔들을 외면하는 신이란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 민중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며 공생을 추구하는 교회나 종교 세력이란 역사와 사회적 악만을 재생산 한다.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탄핵되어야 할 우선의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거짓된 종교 세력이나 교회 세력의 밥벌이들이 동시에 탄핵의 대상이다. 우리는 3월의 맞이하며 진정한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소원한다. 군작전권을 되찾는 것부터, 우리 스스로가 한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자주독립 말이다. 일제의 총칼과 형용하기 어려운 우리 조상들의 1919년 3월 기미 독립의 함성이 오늘의 진정한 자주독립의 소리가 성육화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역사와 교회 앞에서 진실을 말하고 ‘예와 아니오’.를 말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자주독립을 기다린다. 비존재가 존재를 삼키는 거짓된 기도가 아니라 존재가 비존재를 바꾸는 우리들 각자의 삶을 소원하는 것이다. 나의 탄핵으로부터 국정농단의 탄핵이 이루어지고 역사의 탄핵이 진정한 믿음의 혁명을 이루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자주독립의 봄이 되기를 기도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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