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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종교계의 정치적 시국선언을 보면서’
    최근 우리는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희한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통령이 똑같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이 공동목표인 ‘검찰개혁’을 한다면서, 연일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눈만 뜨면 그 얘기가 그 얘기인데, 결론은 없고 듣기 민망한 모습들만 난무한다. 국민들은 식상하고 짜증난다. 이를 좋게 포장하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진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과연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밖에는 안 되는 것인가? 주제는 ‘검찰개혁’인데, 정작 검찰개혁의 핵심은 어디 가고, 자존심과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다는 생각은 나만의 판단일까? ‘검찰 개혁’이 필요한 것은, 검찰의 지나친 권력에 대한 힘 빼기와 또 검찰이 비록 살아 있는 권력이라도 그 잘못이 있다면 이를 견제하고 차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검찰개혁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바이러스로 매일의 삶이 불안하고, 먹고 살기가 팍팍한 서민들에게 불안한 부담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신문에서는 이런 살벌한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싸움에서 검찰총장이 5전 5승을 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는 평검사들의 의견, 법무부 감찰위의 결정, 서울행정법원의 판결, 법학교수들의 의견, 판사 회의의 결과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를 평가하면서 ‘우격다짐의 무리수...추 장관 판정패’라는 주제도 달려 있다. 즉 정치 대 법치의 싸움에서 법치가 이기고 있다는 평가일 것이다. 국민들의 생각도 검찰 개혁에 대하여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지난 8월 모 지상파 방송사의 여론조사에서 보면, 검찰개혁의 방향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52%로, ‘잘하고 있다’는 41%보다 높았다. 또 비슷한 시기 4개의 여론조사기관이 공동으로 조사한 것에서도, 52%가 ‘검찰 길들이기로 변질되는 등 당초 취지와 달라진 것 같다’는 응답이 높았다. 지난 12월 10일 검찰개혁과 괘를 같이하는 ‘공수처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잘못한 것’이라는 응답이 54.2%로 ‘잘한 것’이라는 39.6%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뭔가 국민들의 생각과 여론과는 다른 방향으로 ‘검찰개혁’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종교, 학계, 시민단체들은 앞 다투어 검찰개혁에 대한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일부의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이 시국선언에 동참하고 있는데, 대부분 정부(법무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불교 단체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검찰은 스스로 개혁을 완수할 힘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이 윤석열 총장과 최근 검찰 조직의 행태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됐다. 이 싸움에서 검찰이 이기면 대다수 국민은 그들에 의해 언제고 누구라도 간첩이나 범죄자로 내몰릴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 원불교의 교무들도 ‘촛불정부라면 마땅히 개혁을 완수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반대하는 야당을 비난하고 있다. 천도교인들도 ‘대표적인 적폐 기득권, 검찰을 개혁해야 합니다’라며, 검찰은 공수처가 답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NCCK도 ‘검찰 개혁이 적폐기득권 구조를 청산하는 분수령이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역에 걸친 검찰의 기형적 과잉권력 행사를 중단시키는 시민사회의 명령임과 동시에 정의, 평화, 생명을 펼쳐나가라는 하나님의 선교 과제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며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종교계도 정치적 현안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에 관한 시국선언을 할 경우에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한결 같이 법무부와 큰 권력을 가진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국민들의 다수는 그것이 지나치고 잘못되었다는데, 종교계는 한쪽의 입장만을 지지하니, 국민들이 종교계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개혁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있는 것을 뜯어고친다고 모두 개혁은 아니다. 또 개혁의 방향과 목표가 정당하다하여도, 그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하고,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시대는 아니다. 절차와 방법이 제대로 되어도 이를 준용하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본래의 목적에서 빗나가는데, 그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도외시한 종교계의 시국선언은 정의와 공정 입장에서 위태롭게 보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12-19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잘못했습니다” 하고 떠나는 것이···'
    요즘 나는 조금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다소 놀라게 되었다. 어떤 한 승려가 다른 한 승려를 조금은 심하다싶게 나무랐는데, 그 꾸지람을 당한 승려가 너무도 쉽게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과를 해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이 사태를 지켜보고서 상당히 놀랐다. 물론 그 사과를 한 승려가 꾸지람을 당할 만한 일을 했었기에 잘못했다고 사과를 한 것이라고 본다면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비록 누가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적당하면 그냥 당하지만은 않는다. 반드시 나무란 상대를 되받아쳐 상대를 그로기 상태로 몰거나, 아니 걸핏하면 명예훼손이니 무어니 하며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덤벼든다. 우리 현실 가운데서 익히 보아온 바이다. 그런데 이런 볼썽사나운 현실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지금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현각 선사(禪師)와 혜민 선사이다. 푸른 눈의 수행자로 불려온 미국인 현각 선사가 요즘 한창 구설수에 오른, 베스트셀러 명상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선사를 가리켜 “속지 마 연예인일 뿐이다. 일체 석가모니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도둑놈일 뿐”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혜민 선사에게 우리가 보기에도 승려 같지 않은 구석이 다소 엿보이기는 했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같은 불교계 인사가 상대를 ‘속지 마 연예인’이라고 평한 것이야 접어둔다고 치더라도 ‘도둑놈’이라는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를 써서 비난한 것까지 참아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혜민 선사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나온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혜민 선사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인물만은 아니다, 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본다. 동시에 불교계도 일단 한숨 돌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문화계의 기린아들이라고 할 두 인물이 맞붙어 티격태격한 일이 있었다. 조정래 작가와 진중권 평론가였다. 이들의 언쟁을 옆에서 지켜본 우리로서는 뒷맛이 매우 떨떠름했다. 문단의 대선배를 무시하기냐 하는 식으로 나온 조정래 씨나, 어디 고소할 테면 해 봐라 멋들어지게 붙어줄 테니까, 식으로 나온 진중권 씨나 옆에서 보기엔 고집불통들 간의 진흙탕 싸움 같이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현각과 혜민 두 승려들의 멋들어진 결말과 같이 시원하게 끝난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결말도 무엇도 없이 흐지부지 돼버린 꼴이어서 뒤끝이 개운하지 못한 결과만을 낳았다고 보겠다. 어떤 계기만 만나면 둘이 또다시 폭발할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만 남겨 놓은 모양새라고나 할까. 미국의 2020년 대선의 결과는 이미 발표된 232 대 306이란 선거인단의 확보수가 말해 주듯이 바이든의 압도적인 승리로 장식됐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결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옆에서 보기에,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인 미국인 투표권자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속된 말로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겠다. 마치 백(白)을 백이라 인정하지 않고, 흑(黑)을 흑이라 인정하지 않는 꼴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트럼프는 그러면 어쩌자는 말인가. 이번의 선거를 그는 마치 한판의 트럼프 놀이쯤으로 치부하자는 말인가. 이게 어떻게 한판의 마작놀이나 화투놀이나 트럼프 놀이로 돌려놓은 수 있는 판이란 말인가. 지금 그는 이 선거판에서 마치 “한 수 물려줘”라고 떼쓰는 장기나 바둑판 놀이의 선수들처럼 극도로 유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속된 표현처럼 아더메치의 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바이든이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그가 꼭 잘나서(잘해서) 그랬다, 라고는 보지 않는다. 트럼프가 형편없어서 그 반대급부로 이득을 본 결과 바이든이 이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나의 판단은 결코 나만의 판단만은 아니고 거의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 형편이 없었다. 더구나 미국의 대통령으로서는 더욱 형편없었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리드해 오던 관행을 그는 거의 걷어차 버렸다. 대신 강자(강대국)의 자리를 이용해 약자(약소국)의 돈이나 탈취해 보려고 애쓰는 장사치의 수준으로 제 나라를 격하시켜 버렸다. 그가 수준 미달로 보이게 만든 큰 증거는 바로 코로나19에 대처한 그의 무(無)대처, 무능력의 실상이었다. 지금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는데도 그는 노(no)마스크만을 자랑하듯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더 일러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짐짓 선거부정을 날조해 미국(인)을 여와 야, 또는 좌와 우의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이전투구들로 만들려 하고 있으니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결국 그는 혜민 선사처럼 “잘못했습니다” 하고 떠나는 게 상책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12-14
  • [토요시평] 도를 넘은 사제(司祭)의 기독교 비난
    며칠 전 모 중앙일간지에 가톨릭의 어느 사제가 ‘우상 숭배와 이단’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언젠가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이 ‘우상숭배’라며 가톨릭의 성모상에 흙칠을 했다는 것과, 모 신학대학의 교수가 성도 가운데 불교의 사찰에 ‘우상숭배’라며 피해를 준 것을 보고, 그 것을 보상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했는데, 그를 그 신학대학에서 표창하기는커녕 이단으로 몰아 교수직을 박탈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선행과 교리적인 문제는 별개인데) 뿐만이 아니라, 불교의 부처상이나 가톨릭의 예수상이나 성모상, 성인상을 이단이며, 우상숭배라고 하는 기독교인의 생각은 옳은 것이 아님을 들면서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불자(佛者) 가운데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그들을 가톨릭에서는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익명의 크리스천이라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제는 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며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비난일변도이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의 목회자들을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제는 어떤 목사를 이단으로 보고 있는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도시간보다 헌금 내는 시간에 기뻐하는 목회자들, 십일조 안 내면 암에 걸린다고 종교적 협박을 하는 목회자들, 신도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머리 당 얼마’라며 수입원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현대판)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이고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안티기독교 언론이 보도하는 수준의 것들을 귀 담아 듣고서, 이를 편집한 듯하다. 가톨릭의 영성심리의 중요 직함을 가진 사제가 중앙일간지를 통하여 이렇듯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은, 그 사제 나름에는 기독교에 대한 상당한 반발심과 불편함이 있는 듯하다. 아니면 가톨릭을 대신하여 기독교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제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 타종교의 극히 일부 문제를, 영향력 있는 언론에 공개적이며 거칠게 그리고 지독히 부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양식(良識) 있는 종교인으로써는, 그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사회적 책임감이 있는 언론도 종교간 비난을 하는 내용을 여과 없이 그대로 신문 지상에 게재한 것도 이상하다. 혹시 반기독교적인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든다. 종교간 비판이나 비난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자기 종교의 ‘다원주의 기준’으로 남의 종교를 이단이나 우상숭배로 비난하거나 남의 종교의 내부 문제를 일방적이며,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자세이며, 종교인의 품위의 문제이다. 누구나 잘 아는 바처럼, 16세기 가톨릭의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유가 뭔가? 로마 교황청이 비성경적인 면죄부(Indulgence) 판매를 허용하므로 이에 대한 반대로 시작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판매를 위한 사제들의 설교는 ‘연보궤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주장한 것은, 로마 교회와 교황의 부패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도 가톨릭과 기독교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구원론의 차이, 기독론의 차이, 성경관의 차이, 교회관의 차이, 예배 내용의 차이 등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이 지면에서 자세하게 나타낼 수는 없으나, 보다 성경적이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종교개혁을 하고, 그 후예(後裔)들이 기독교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관을 따르는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일부의 목회자의 목회 윤리와 건덕의 문제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는 누가 보더라도 거친 표현이며, 충분히 오해와 종교간 갈등으로 비춰져,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매우 긴장하고 고통과 불안과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 이런 힘든 때에 종교 간의 협력과 화합을 주장하지는 못할망정, 난데없는 우상숭배와 이단 문제를 들먹거리며 이웃 종교를 비난하고 그 성직자들을 모욕하는 태도는 아주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고 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10-20
  • [임영천 목사의 토요시평] 항우와 유방, 그리고 후흑학의 문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의 여파로 방콕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의 적적함을 벗어나고자 필자는 부득불 문학작품 읽는 일에 빠지게 되었다. 지난날 읽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자꾸 미루기만 했던 작품들을 이번 기회에 읽어내는 것도 괜찮은 수확이겠다 싶어서 그 미뤄두었던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럴 때 손에 잡히는 책들은 단권(單券)짜리 단행본보다는 아무래도 여러 권(券) 형식의 대하소설 같은 게 취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이 지금껏 읽기에서 미뤄져 왔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딘 속도로 다섯 권짜리, 또는 세 권짜리 장편 역사소설류들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 네댓 가지 국내외의 것들 가운데서 필자가 특히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작품이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항우와 유방>이란 것이었는데, 이는 원래 <초한지>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여러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느끼게 되는 첫 번째 감정이 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뛰어난 용장인 항우(項羽)가 별 볼일 없는 용렬한 장수 유방(劉邦)에게 최후 참패를 당하게 되었느냐 하는 의문이었다. 이 의문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서자 거개가 일으키는 반응이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항우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패하고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오강포(烏江浦)에까지 도달해 그가 최후로 탄식하는 말을 발한 뒤 자결을 하는 장면에 이르러 가슴이 쓰렸다고 해야 할까, 공허감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정상적이지 않은 미묘한 감정에 스스로 빠져버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항우에 대한 독자로서의 미련이 계속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의미이다. 나는 항우가 마지막으로 자결을 감행할 때, 적장인 유방 앞에서가 아닌, 단지 현상금을 욕심내어 뒤쫓아 온 이름도 없는 졸개들 앞에서 그가 자결을 감행해야만 했던 처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적장 유방 앞에서라도 떳떳하게 마지막까지 자웅을 결하다가 역불급(力不及)으로 전사하기라도 했었다고 한다면 차라리 독자로서도 덜 분하다는 감정이 일어날 법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사체(死體)가 욕심(재물욕과 출세욕)으로 가득 찬 적진의 졸개들에게 찢겨져 하나의 현상(懸賞) 전리품으로 다섯 동강으로 나눠진 식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독자로서의 마음이 절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점과 관련해 그 안타까움을 표현한 이들 가운데 아래와 같은 뜻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음을 보면 그 안타까운 심정을 알만도 하다. 항우는 오강포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반대편 강안(江岸), 곧 고향 가까운 강남땅으로 달아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때는 배가 그 단 한 척밖에 없었으므로 뒤쫓아 온 적병들이 항우를 따라잡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가 강을 건너간 뒤 충분히 재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중국의 천하통일이 유방에 의해서가 아닌 항우에 의해서 이루어졌을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다. 배의 주인인 오강(烏江)의 정장(亭長)도 항우에게 빨리 이 배를 타고 도강하면 추적자들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며, 건너편 추종자들은 당연히 많아질 것이라고 재촉했지만 항우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이렇게 응수하였다. “설령 강남의 어른들이 나를 가엾게 여겨 다시 왕으로 추대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겠소? 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일이겠소?” 곧 면목 없는 일, 부끄러운 일,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항우는 나이 비록 어렸지만 지금껏 그런 기백으로 살아온 청년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목숨 부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항우는 대하역사소설의 인물군(人物群) 가운데서 장렬한 비극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뛰어난 인물로 보인다. 요즘 출세주의가 판을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쳐서 이기고 보자, 또는 어떤 식으로든 최후 승자가 되고 보자는 식의 처세술이 횡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 말기의 리쭝우(李宗吾)가 제창한 마키아벨리식 후흑학(厚黑學)의 영향도 적잖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후안(厚顔)과 흑심(黑心)을 숨긴 채 어떻게든 상대를 꺾어야 한다는 배포다. 항우를 무너뜨린 유방의 처세술이다. 뻔뻔함[厚顔]과 음흉함[黑心]을 무기로 내세우는 이 처세술이 정계, 재계, 문화계, 종교계… 어느 분야에서든 만연할 때, 이 나라의 질서는 혼란해질 것이며 나라의 앞날도 총체적으로 위태로워질 게 아닐까 우려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8-31
  • 삐라의 추억과 현실
    올해로 6·25전쟁 70주년을 맞는다. 70년 전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과 소련의 지원 하에 3·8선 전역에서 남침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1달 만에 전국토의 90%를 공산군에게 뺏기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미국과 유엔군이 참전하여 나라를 지키게 되고, 완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됨을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70년 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 세계의 독립국 90여국 가운데 60여 개국이 이 전쟁에 참여하거나 협력했으니, 가히 세계적인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성경에서처럼,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 70년 만에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는 기쁨이 한반도에도 올 것을 기대했는데, 느닷없이 북한의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6월 초에 ‘삐라’ 담화를 발표하면서, 남북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다. 탈북민들이 보낸 소위 ‘삐라’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북측이 드러내면서, 개성 공단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시키는 어이없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연락사무소뿐만 아니라, 뒤편의 건물 등 우리 돈으로 지은 건물과 재산 700여억 원의 물적 손해를 유발시키고도 북한은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그럼 김여정이 말하는 ‘삐라’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강수를 두고, 그 동안 쌓인 남북 간의 신뢰까지 폭파시키는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나는 어렸을 때, 우리 마을과 학교 가는 길에서 심심찮게 북한에서 보낸 삐라를 본적이 있다. 이것을 주우면 곧바로 학교로 가져가거나 지서(지금은 지구대, 경찰)에 갖다 주면 연필이나 공책(노트)을 받곤 하였다. 이제는 수십 년이 지나서, 삐라를 주을 때의 두근거림은 추억처럼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삐라 때문에 남북 간에 초긴장이 빚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한반도에서의 삐라의 역사는 꽤 길다. 우선 삐라라는 말은 영어의 ‘전단지’에 해당하는 ‘Bill’과 일본어의 비속어인 ‘비라’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이는 오래 전에 남북 간에 심리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서로가 적진에 뿌렸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 상태에서도 쌍방은 삐라를 뿌린 것으로 나타난다. 1960~1970년대 한국과 유엔군 측에서는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는 사연과 월남(越南) 방법과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내용을 보냈다. 반면에 북한 측은 유엔군을 대상으로 가족들이 기다린다는 식으로, 외국 병사들의 향수를 자극하여 전의를 상실하게 하고 내부를 이간질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 1980~1990년대에 한국에서는 수영복을 입은 미인들을 내세워 북한 병사들의 귀순을 유도하는 내용이 많았다. 반면에 북한 측은 미군은 살인마, 흡혈귀 등 부정적인 존재로 부각시키고, 김정일은 추켜세우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88년 한국은 올림픽을 개최하여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약적인 경제 발전, 정치 민주화를 가져오면서, 체제 경쟁에서 북한은 밀리게 되고, 삐라 살포도 주춤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들어와 탈북민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에 의하여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내용들이 다양하게 북한 지역에 살포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한국은 북한과 다르게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또 폐쇄된 북한 체제의 특성상 북한의 문제점을 잘 모르는 북한 주민들에게는 삐라가 상당한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져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번에 삐라 사건을 지적하면서 김여정은 탈북민들을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까지 싸잡아서 비난한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공산·독재주의에 대한 비교는 끝난 것이며, 그 결과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한보다 경제력이 앞섰던 북한이 이제는 한국과 비교하여 50배의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이번에 발끈한 것은 비단 ‘삐라’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인한 유엔의 대북제재는 북한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고, 내부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이제는 삐라가 추억 속에 남아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남북 간 예측하기 어려운 대치 국면이 되고, 작은 삐라 앞에서도 흥분할 수밖에 없는 북한 측의 절박함은 어느 정도일까? 북한은 세계와 공산 국가에서도 유일하게 3대 세습으로 72년 이상 독재·공산 정권을 끌어오고 있다. 그 동안 주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 속임수와 인권 유린의 혹독함을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될 때, 그것은 심리전에서 사용하는 삐라의 문제가 아니라, 김일성 3대가 그 동안 공들여 만들어온 독재정권에 가해지는 위력이, 핵폭탄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7-07
  • 삐라의 추억과 현실
    올해로 6·25전쟁 70주년을 맞는다. 70년 전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과 소련의 지원 하에 3·8선 전역에서 남침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1달 만에 전국토의 90%를 공산군에게 뺏기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미국과 유엔군이 참전하여 나라를 지키게 되고, 완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됨을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70년 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 세계의 독립국 90여국 가운데 60여 개국이 이 전쟁에 참여하거나 협력했으니, 가히 세계적인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성경에서처럼,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 70년 만에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는 기쁨이 한반도에도 올 것을 기대했는데, 느닷없이 북한의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6월 초에 ‘삐라’ 담화를 발표하면서, 남북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다. 탈북민들이 보낸 소위 ‘삐라’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북측이 드러내면서, 개성 공단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시키는 어이없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연락사무소뿐만 아니라, 뒤편의 건물 등 우리 돈으로 지은 건물과 재산 700여억 원의 물적 손해를 유발시키고도 북한은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그럼 김여정이 말하는 ‘삐라’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강수를 두고, 그 동안 쌓인 남북 간의 신뢰까지 폭파시키는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나는 어렸을 때, 우리 마을과 학교 가는 길에서 심심찮게 북한에서 보낸 삐라를 본적이 있다. 이것을 주우면 곧바로 학교로 가져가거나 지서(지금은 지구대, 경찰)에 갖다 주면 연필이나 공책(노트)을 받곤 하였다. 이제는 수십 년이 지나서, 삐라를 주을 때의 두근거림은 추억처럼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삐라 때문에 남북 간에 초긴장이 빚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한반도에서의 삐라의 역사는 꽤 길다. 우선 삐라라는 말은 영어의 ‘전단지’에 해당하는 ‘Bill’과 일본어의 비속어인 ‘비라’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이는 오래 전에 남북 간에 심리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서로가 적진에 뿌렸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 상태에서도 쌍방은 삐라를 뿌린 것으로 나타난다. 1960~1970년대 한국과 유엔군 측에서는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는 사연과 월남(越南) 방법과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내용을 보냈다. 반면에 북한 측은 유엔군을 대상으로 가족들이 기다린다는 식으로, 외국 병사들의 향수를 자극하여 전의를 상실하게 하고 내부를 이간질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 1980~1990년대에 한국에서는 수영복을 입은 미인들을 내세워 북한 병사들의 귀순을 유도하는 내용이 많았다. 반면에 북한 측은 미군은 살인마, 흡혈귀 등 부정적인 존재로 부각시키고, 김정일은 추켜세우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88년 한국은 올림픽을 개최하여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약적인 경제 발전, 정치 민주화를 가져오면서, 체제 경쟁에서 북한은 밀리게 되고, 삐라 살포도 주춤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들어와 탈북민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에 의하여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내용들이 다양하게 북한 지역에 살포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한국은 북한과 다르게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또 폐쇄된 북한 체제의 특성상 북한의 문제점을 잘 모르는 북한 주민들에게는 삐라가 상당한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져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번에 삐라 사건을 지적하면서 김여정은 탈북민들을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까지 싸잡아서 비난한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공산·독재주의에 대한 비교는 끝난 것이며, 그 결과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한보다 경제력이 앞섰던 북한이 이제는 한국과 비교하여 50배의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이번에 발끈한 것은 비단 ‘삐라’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인한 유엔의 대북제재는 북한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고, 내부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이제는 삐라가 추억 속에 남아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남북 간 예측하기 어려운 대치 국면이 되고, 작은 삐라 앞에서도 흥분할 수밖에 없는 북한 측의 절박함은 어느 정도일까? 북한은 세계와 공산 국가에서도 유일하게 3대 세습으로 72년 이상 독재·공산 정권을 끌어오고 있다. 그 동안 주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 속임수와 인권 유린의 혹독함을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될 때, 그것은 심리전에서 사용하는 삐라의 문제가 아니라, 김일성 3대가 그 동안 공들여 만들어온 독재정권에 가해지는 위력이, 핵폭탄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7-03
  • 미 흑인들의 문제에 관한 단상
    “일반적으로 아녀자(兒女子)란 말 속에는 약자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지 않나 여겨진다. 이는 미국사회에서 흑인(黑人)이란 말 속에 약자라는 뜻이 깃들어 있는 경우와도 유사하다. 흑인들 가운데서도 약자 아닌 강자, 이를테면 위대한 스포츠맨이나 이름난 연예인처럼 몇몇의 흑인들은 확실히 강자임에 틀림없지만, 일반적으로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힘없는 약자들로 인식된다.” 이는 필자가 지난 토요시평 <아녀자들의 문제에 관한 단상>이란 제목의 글 속에서 썼던 구절의 일부이다. 그때 필자가 아녀자들의 문제에 관해 다루는 글 속에서 왜 갑자기 흑인의 문제를 끄집어들였던지 잘 모르겠지만, 결과는 오히려 시의 적절한 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관해 다루기 시작했다면, 아녀자들의 문제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특히 요즘 크게 문제시되고 있는 미국의 사회적 약자들인 흑인 문제에 관해서도 다루어야 할 계기를 만들어주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나마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즘 특히 미국 흑인 피의자들(범죄 혐의를 받는 자들)에 대한 미 경찰들의 대응 자세가 일정한 한도를 벗어나고 있는 문제와 관련된다. 제3자인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흑인 피의자를 다루는 미 경찰들이 적법(適法)한 대응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에 앞서, 과연 그들(경찰)도 인간인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당사자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범법 문제)를 다루는 일선 실무자가 먼저 인간이어야 하는데 그들(경찰)이 전혀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그 문제의 심각성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보겠다. 법을 집행하여 범법자(피의자)들을 취체함으로써 사회적 안정 유지(또는 치안 유지)에 기여하겠다는 자세로 공적(公的) 위치에 임해 있는 사람들이 불법과 탈법을 마치 밥 먹듯이 자행하고 있다면 이들이 과연 공인으로서의 경찰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민간(흑인) 피의자들이 불법을 행하는 것과 공인으로서의 경찰이 탈법을 자행하는 것을 같은 레벨에서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모로 보나 경찰은 민간 범법자(피의자)보다는 한 수 위여야 한다. 그만큼 윤리적인 면에서 비교적 우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미 흑인 조지 플로이드(46세) 압살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그 경찰의 만행이 극에 이르렀음을 부정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플로이드의 목을 무려 8분46초 동안이나 무릎으로 누르고 있었던 경찰은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경찰이)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주었다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는 아예 그(플로이드)를 죽이겠다고 작심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이 졸려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피의자를 그렇게 오랫동안 누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살인죄이다. 피의자를 잡아 법정에 세우겠다고 하는 경찰이 그러기 전에 자기 일개인 선에서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작심했다면 그것은 엄연한 살인행위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도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 그들의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 어떤 인종인가를 불문하고 동등한 차원에서 존귀하게 생명을 부여하셨으니, 생명에 대한 인식에 그 어떤 인종차별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이 사건에 대한 전 세계의 비판적 여론이 비등해지자 미 검찰이 그 가해 경찰을 몇 급의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고 하며, 그 현장 주위에 있었던 서너 명의 경찰들도 방조자들로 함께 기소했다고 한다. 그 흑인의 목을 그렇게 오랫동안 무릎으로 짓누르고 있었던 경찰도 문제였지만, 그 옆의 경찰들 어느 누구도 그 만행을 말려보려고 노력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게 그 현장을 바라본 제3자인 우리들에게는 분통터질 일이었다. 그만큼 미 경찰들이 그런 잔인한 일에도 무신경한 지경에 처해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미 경찰이 피의자에 대한, 또는 부당함에 항의하는 이들에 대한 그 목누르기 행위를 그친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플로이드 사건 며칠 뒤에도 어느 여인이 그와 똑같은 만행에 걸려들어 이젠 나도 플로이드처럼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다 했었다고 보도되었다. 그리고 플로이드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그로 인해 정상인 아닌 상태로 돼버린 이들이 무수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미 경찰의 통렬한 자기반성과 그에 따른 인도주의적 실천만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6-12
  • 동성애 문제, 새로운 도전 앞에서
    지난 18일 총신대학교(이하 총신대) 재단이사회는 이 모 교수(조직신학-생명윤리)에 대하여 ‘해임’처분 결정을 내렸다. 이는 이 교수가 지난해 가을 학기 동성애의 문제점을 강의하는 가운데, 일부 여학생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껴 이것이 ‘성희롱’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다. 총신대의 “성희롱·성폭력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에 보면, ‘성희롱이라 함은 성범죄 행위의 구성여부에 관계없이 교육, 업무, 고용, 기타 관계에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일체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준은 ‘피해자의 합리적·주관적 판단을 원칙으로 한다’고 정한다. 이 문제가 지난 해 불거져 나오자 총신대에서는 <성희롱·성폭력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책위원회에서는 이를 ‘성희롱’으로 보지 않아 징계하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재단이사회는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난 3월 총장의 제청을 얻어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것이다. 이 결정을 함에 재단이사회는 ‘성희롱 발언과 그에 따른 2차 피해 유발, 학내 문란 등의 이유로 해임 한다’고 명시하였다. 학내 문란 못지않게 총신대의 정체성 문제도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이번 재단이사회의 결정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결정을 하였다기보다, 동성애 반대에 입을 틀어막겠다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의견들도 있는데, 현재 총신대의 재단 이사는 관선 이사로 구성되어 있어 신학대학의 독특성과 특수성, 그리고 고유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는지 궁금하다. 이미 학내 대책위원회에서 결의한 것을 무시하고, 재단이사회가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민감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결정을 다르게 한 것은,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의 기준이 되고 성경에 근거한 ‘동성애’ 문제와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다른 측면에서의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해 1월 합동교단 56명의 노회장들의 입장문과 <동성애동성혼반대국민연합>의 이 모 교수 징계 반대 집회를 ‘진영 논리로 학교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본 것은 과잉 대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계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19일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에서는 총신대에 공문을 보내, 이상원 교수에 대한 해임 결정 취소를 요청하였다. 이유는 ‘한국에서 성경적 개혁신학에 가장 충실해야 할 학교 중의 하나인 총신대학교가 더 이상 성경적 입장에서 생명윤리를 말하지 않고, 세상 방식으로 윤리 문제에 접근하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1일 <성산생명윤리연구소>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동성애의 문제점을 의학적·과학적으로 강의한 내용을 성경적 기준이 아닌, 사회적 성 인지 감수성 기준으로 해임을 결정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이다. 또 23일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25인은 입장문을 통하여 ‘이 교수가 지난 20여 년 동안 수천 명의 후학을 가르치며 보여준, 신학의 교훈과 신앙의 귀감을 생각할 때 해임 결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며, ‘학교의 신학적 정체성, 신학교육의 일관성을 고려해 이번 중징계를 고려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 총신대 신학대학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도 졸업생과 재학생 등 300여명이 이 모 교수의 해임을 철회해 달라는 의견을 내고 있다. 이 교수에 대한 해임 결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신상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동성애 문제에 대한 응전의 변수가 될 것으로 본다. 지난 21일 총신대 이 모 총장은 “교원 징계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했는데, ‘총장인 저를 비롯하여 총신의 모든 교수들은 결코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용인하지 않으며, 일관되게 그리고 확고하게 그러한 입장을 유지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총신대 교수로서 거의 유일하게 드러내 놓고, 반동성애 진영에서 싸워온 이 모 교수의 해임에 대한 책임과 철회를 위해 힘쓰는 것만이,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증명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이 모 교수의 해임은 ‘반동성애’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온 것에 대한 공격이 아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총신대가 성희롱으로 촉발되어 동성애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로 바뀐다면,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대학의 정체성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인바, 이는 성경적, 신학적, 신앙적 관점에서도 큰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5-28
  • 아녀자들의 문제에 관한 단상
    영국 배우 리처드 버튼이 16세기의 영국 왕 헨리8세로 분장, 출연한 영화 <천일의 앤>을 오래전에 보았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영화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는 것은 비운의 왕비 앤이 마지막 단두대에서 망나니가 칼을 휘두르기 직전 그(망나니)를 향해 얼굴을 비호같이 빠르게 돌리던 때의 그녀의 그 번쩍이던 눈빛과, 그리고 그 처형이 끝나고 난 직후 짙푸른 하늘 아래 처형장의 잔디밭을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는 세 살짜리 어린 딸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왜 그 장면이 지금도 나의 머리에서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선명하게 각인돼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나는 거기에서 이른바 아녀자(兒女子)들의 서글픔 같은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린이와 여자들’의 서글픈 삶의 역사, 그게 바로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던 것 같다. 왕 헨리8세는 후계자가 될 왕자를 낳지 못한 죄(?)에다가 엉뚱하게도 딸의 왕위계승권까지 주창한 앤을 간통죄로 누명을 씌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다. 그 결과가 어린 딸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이후(일생 동안) 어머니 없는 아이가 되어 홀로 외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주로 방콕 신세가 되어, 막강한 리모콘 운영권을 지닌 나의 내자가 즐겨 시청하는 중국 역사드라마를 나도 모르게 그냥 따라보는 시간이 많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도 흥미를 크게 느끼게 된 중국 사극이 ‘사마의2-최후의 승자’란 TV극이었다. 이 극이 끝나고 났음에도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선명하게 각인돼 있는 장면이 위나라의 세 번째 황제 치하에서 ‘대장군’직을 지녔던 조상 장군과 그의 어린 아들이 모반죄로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때의 모습과, 특히 처형장에서 어린 아들이 죽어가던 때의 그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당시 모반죄는 3족을 멸한다는 법에 의해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린 아들까지 함께 처형장으로 압송해 갔던 것이었는데, 자기가 무슨 일로 손이 묶이어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세 살의 어린 아들이, 길가에서 민요를 부르며 따라오는 동네 어린이들의 그 흥겨운 노랫가락 때문이었는지 자기도 흥이 나서 개구쟁이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따라가고 있는 장면이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더욱 시청자들을 울렸던 결정적인 장면은 어린 아들이 참형을 당할 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그의 어미가 옆에 놓인 약사발을 들어 아들에게 먹여주려 애를 쓰고, 아들은 그 물이 역해서인지 그걸 거듭 뱉어내고 하면서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처절한 장면이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야만 했던가? 한마디로 ‘욕망’ 때문이었다. 대장군 조상이 나이 어린 황제를 퇴위시키고 그 자리를 자기네가 빼앗고 싶어 했던 그 권력욕이 부른 참극이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모반죄로 참형을 당하는 일이야 자기 책임 때문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더라도,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의 목숨까지 희생시켜야만 했는가 물었을 때 그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그 욕망 때문에 죄 없는 그의 ‘아들과 아내’가 함께 극단의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니, 나는 여기서 예의 그 ‘아녀자(兒女子)들의 서글픔’ 같은 것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녀자(兒女子)란 말은 한마디로 약자라는 말과도 같다. 약자라고 표현하기가 무엇한 아녀자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녀자란 말 속에는 약자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지 않나 여겨진다. 이는 미국사회에서 흑인이란 말 속에 약자라는 뜻이 깃들어 있는 경우와도 유사하다. 흑인들 가운데서도 약자 아닌 강자, 이를테면 위대한 스포츠맨이나 이름난 연예인처럼 몇몇의 흑인들은 확실히 강자임에 틀림없지만, 일반적으로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힘없는 약자들로 인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우리 사회에서 아녀자들은 일반적으로 약자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강자인 성인(成人) 남성 중심의 지배 사회가 오래 지속되어온 결과라고 보겠다. 그런데 요즘 들어 미투(me-too)운동의 여파 때문에서인지, 어떻든 여성들의 파워가 점차 강해져가고 있는 현 추세라고 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일반적으로 아녀자들 모두가 강자로 인식될 정도로의 환경 변화가 그렇게 빨리 다가올 것 같지는 않다. ‘박사방’이니, ‘n번방’이니 하는 디지털 성범죄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타산지석으로 가르쳐 주었듯이, 우리는 강자인 성인 남성 중심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약자인 아녀자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그런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이 ‘가정의 달’을 맞아 새로이 다짐해야할 것 같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5-15
  •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위 표제어는 1970년대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자매 트리오인 ‘쿨씨스터즈’가 부른 유행가 가사 가운데 하나이다. 내용은 공부해야 할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데이트만 하다가 시험 준비를 못하고, 낭패스럽다는 내용이다. 지난 4월 15일, 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났다. 이번 총선을 보면서 이 말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 국민들은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거대 여당을 만들어 주었을까? 이번 총선에서 여당은 300의석 가운데 무려 180석을 얻었다. 국민들이 표를 준 비율로 따지면 여당에 5, 야당에 4를 줬지만, 실제적인 의석수로는 2:1로, 여당이 압승을 거둔 것이다. 소선거구제가 갖는 현상이다. 오직 1등만 당선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여당의 180석에 친여적(親與的)인 진보성향의 의원까지 합하면 190석이 된다. 국회에서 한 당이 180석이 되면, 어떤 법안도 다른 당의 도움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지게 된다. 이번에 여당이 180석이 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번도 없었던 처음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동안 국민들은 대통령이 속한 정당을 견제하기 위하여, 지방선거나 총선에서는 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거나, 집권 여당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야당의 세력을 만들어 주었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집권 여당에게 마음만 먹으면 헌법 개정 외에, 어떤 법안이라도 통과시킬 수 있는 큰 권한을 쥐어 주게 되었다. 현재 문재인 정부는 중앙정부, 지방정부는 물론, 사법부를 장악하고 있다. 거기에다 집권당이 거대 여당이 되어, 이번에는 입법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제4부의 권력이라는 언론도 손에 쥐었고, 제5부의 권력이란 주요 시민단체도 대부분 현 정부에 우호적이다. 이렇게 되면 현 여당은 국무총리, 대법관, 헌법재판관을 뜻대로 임명할 수 있고, 국회의장과 국회의 주요 상임위원장을 대거 차지할 수 있다. 엄청난 권력이 현 정권에 부여되는 것이다. 이제는 민주국가의 핵심인 삼권분립도 무색하고, 그 힘에 의한, 어떤 모습이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현재도 정부 여당에 대하여 ‘오만하다’는 평가가 있어왔다. 그런데 여기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으니, 국민들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은 아닌지? 힘이 한쪽으로 쏠릴 때 나타나는 현상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독선’ ‘독주’ ‘독단’ 심지어 ‘독재’까지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국민들도 이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집권 3년이 된 지금 시기는 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심판 성격을 띠어야 했는데,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더 해 보라는 식의 밀어주기는 뭔가를 불안하게 한다.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여·야간에 건강한 견제와 균형, 협치(協治)와 통합이 마땅한데, 이것을 절묘하게 맞추지 못하다니. 사실 이런 거여 구도는 현 여당에도 오히려 많은 짐을 안겨 주리라고 본다. 그동안 여당은 정치가 뜻대로 안 되면 야당의 탓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푸념(?)이나 부정도 통하지 않게되었다. 또 어떤 법안을 만들었을 때에도, 그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집권당이 져야 한다. 이제 걱정되는 것은 한국교회이다. 아마도 21대 국회가 개원되면,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교회를 옭죄는 법안들을 대다수 만들려고 할 것이다. 지난 2013년 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66명의 국회의원들이 발의했을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당시에도 더불어민주당(당시는 민주통합당)의원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의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차별금지법 속에는 ‘독소 조항’이 있었는데, 성적지향(동성애)과 성 정체성(트랜스젠더)이 있었고, 전과(前科)에 대한 것, 사상과 정치적 견해, 그리고 종교에 대한 것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차별금지’조항에 넣을 경우, 우리 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윤리, 도덕, 가정해체, 양심과 종교에 대한 제한과 모독, 국가 정체성의 파괴 등 다양한 면에서 많은 혼란이 올 것으로 예견된다. 그래서 기독교계에서는 그 동안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것이 아닌가!한국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교의 가치관과 성경 말씀이 무시되고, 폄훼될 것이 뻔한데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정치와 권력에 의하여 기독교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훼절될 때, 한국교회는 정말 어떻게 할 것인가?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후회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단단한 결의와 결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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