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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신종교
    ◇우리 사회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세계적 클래식 종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파생되었거나 만속신앙 또는 무속에서 유래한 신종교(新宗敎)가 수도 없이 많다. 2018년 한국신종교사전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신종교사전'에는 “자생 신종교” 423개, “불교계 신종교” 151개, “기독교계 신종교” 89개를 소개하고 있다. 해외에서 들어온 “외래계”도 50여 개나 된다. 참으로 대한민국은 ‘다종교사회’를 넘어 종교백화점이라 할만하다. 그래도 종교인구는 전체 국민의 43.9%(2015년 통계청 조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가운데 기독교가 19.7%(967만명), 불교가 15.5%(761만명), 천주교가 7.9%(389만명)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세 종교를 뺀 나머지 종교인구는 10.8%이다. 이들이 수백 개에 이르는 한국 신종교 신도들인 셈이다.◇자생신종교에는 한말 개화기에 전통사회의 해체과정을 배경으로 나타난 천도교와 증산교와 단군교 계열이 제일 많고, 불교계신종교에는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밀교적 무속 계열이 많으며, 기독교계신종교에는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혼돈 가운데서 나타난 신비주의나 교주우상주의 계열이 많다. 기성교회가 흔히 이단이라고 부르는 섹트들이다. 그리고 산업화 시기에 나타난 신종교들은 대체로 돈과 건강, 가족의 안녕 등 현세적 기복주의나 종말론적 구원론을 지향하는 것들이 많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이미 사라진 것들도 있지만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자생신종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를 떨치고 있는 것으로는 증산계의 ‘대순진리회’와 ‘원불교’ 정도이고, 불교계로는 대한불교 천태종을 비롯 상당한 세를 규합한 종단이 여럿 있으며, 기독교계는 하나님의교회와 신천지 등이 있다. 한 때 크게 세를 떨치던 통일교와 전도관 등은 많이 위축되었 다. 그리고 외래계 중에 활발히 움직이는 것들은 한국SGI불교회(국제창가학회),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이 있다. 특히 일본의 일련정종이나 입정교성회, 천리교 등은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을 억압하던 왜색종교들인데, 오늘날에는 문화운동을 빙자해 우리사회를 파고 들고 있다. 그 가운데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주문으로 하는 일본계 ‘나무호렝게이교’가 가장 활발하다. 한국 SGI 불교회가 바로 ‘나무호렝게이교’이다.◇신종교란 제도화 된 기성종교에 대한 불만에서 또는 시대 정신이나 삶의 문제를 담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새로 일어나는 신흥종교운동을 말한다. 신종교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회구현을 위한 민족운동을 지향하는 성격을 띤 경우도 있고, 순전히 영성적이고 구세적인 구원관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신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성종교가 내세구원을 지향하는데 비해, 그들은 현세적 구원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종교들은 때때로 천년왕국적 사상을 제시했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이비종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특히 한국사회에 이처럼 많은 신종교가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사회가 그 만큼 불안요소를 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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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4
  • 전광훈 목사는 과연 이단인가
    한 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한때 보수적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연합단체였다. 이 한기총이 분열하여 이제는 유명무실 하지만 그래도 한기총은 우리사회에서 NCCK 다음으로 기독교 대표기관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지난 9월 장로교 총회에는 이 단체의 수장을 지낸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가 있었다. 예장고신, 예장합신, 예장합동 교단 등에서 전광훈 목사의 이단성 조사가 진행되었다. 청 교도영성훈련원이란 교계 단체를 만들어 일부 목회자들을 움직여온 전광훈 목사는 소위 '광화문 태극기 부대'라는 반정부 투쟁 단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코로나 19 방역 지침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부대가 대규모 집회를 계속하자 정부는 전광훈 목사를 공적 1호로 삼고 온갖 억압을 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계도 덩달아 전광훈 때문에 교회 대면 예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비난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 러면 과연 전광훈 목사가 이단인가. 한 마디로 전광훈 목사는 '이단'은 아니다. 한국교회 주변에는 여러 형태의 이단 및 사이비적 집단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요약하면 다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교주우상주의 이단집단이다. 교주우상주의는 그 집단의 지도자를 특별한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경우이다. 둘째는 교리적 이단집단이다. 교리적 이단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이다. 셋째는 신학적 이단집단이다. 신학적 이단은 신학연구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거나 보편적 기독교의 교리와 전통적 성경해석을 왜곡하는 경우이다. 그 러면 전광훈은 이 셋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가. 그는 교주도 아니고, 교리적 이단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단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그의 행태에는 다분히 '사이비적' 요소가 있다. 그의 발언과 행동에는 어떤 형태의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당 창당, 이승만 영화, 선교은행 등등, 심지어 한기총 대표회장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공적 차원에서 추진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사랑제일교회와 자신이 중심에 있었을 뿐이다. 즉 전광훈 목사는 보편적 한국교회라는 공교회적 개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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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2-14
  •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영어에서 '크리스챤'(Christian)이라고 한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에 'ian'이라는 어미가 붙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크리스챤의 삶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가 가르친 복음으로 죄로 인해 영적으로 해방되고,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이 존중되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즉 크리스챤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전하는 것이 그 사명이다. 그것이 종교적이든, 문화적이든 인간을 억누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안식일에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안식일에도 선한 일을 행하고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 해방시킬 것을 역설하고 있다.예 수님의 사역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포로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또 제자들에게도 온 동네를 다니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였다(마 10:8). 오늘날 목사의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도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정신을 전파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있는 크리스챤은 이 가르침을 따라 세상에서 모든 억누르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이 자유를 얻도록 도우는 사명을 받았다. 곧 세상을 바꾸는 사명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복음증거이다. 복음이 증거되면 세상은 반드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세상을 바꾸는 것은 말씀이다. 그 말씀을 가진 크리스챤은 세상에 복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서나 사람들이 복을 받고 살도록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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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2-14
  • 홍수전의 태평천국
    ◇19세기 중엽, 만주족의 청나라 제국이 한창이던 중국에서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 신앙의 날개를 달고 태어난 홍수전(洪秀全, 홍슈취안)의 태평천국운동은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며,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정복자인 만주족 요괴들을 중국땅에서 제거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며, 이를 위해 1840년대부터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하나님을 숭배하는’충실한 군대를 모집해, 1853년 남경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하고, 지난 여름 홍수로 큰 물난리를 겪은 지역인 중국의 남부와 중부를 휩쓸며 파괴적인 전투로 승리를 쟁취하다가, 1864년 청나라 군사에 패할 때까지 14년간 전투와 기근으로 약 2천만명 이상의 목숨을 잃은 재난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무엇이 홍수전과 그의 신도들을 이처럼 엄청난 파국으로 이끌었는가? 그것은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이 전한 전도문서에 실린 기독교 복음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자신의 계시적인 환몽(幻夢)에서 비롯되었다. ◇본명이 홍화수(洪火水, 홍훠슈)인 그는 고향에서 고을의 현시(縣試)에서는 몇 차례 과거에 합격했으나 그보다 한 단계 높은 부시(府試)에서는 매번 낙방하여 몹시 낙담해 있을 때, 어느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잠자리에 든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침상 주위에 모여들어, 자기에게 염라왕을 만나볼 것을 권하는 꿈을 꾼다. 시종들이 그가 탄 가마를 어깨에 메고 동쪽을 향해 가는데 주위에는 많은 행렬이 따른다. 그 행렬이 커다란 문 앞에 멈췄을 때, 군중들이 빛을 받으며 그를 환영하고 있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시종들은 모두 용포(龍袍)를 입고 뿔로 테를 두른 각모(角帽)를 쓰고 있다. ◇그는 이어 어미라고 불린 한 여인의 안내로 아버지를 만난다. 그 아버지는 흑룡포를 입고 상단에 앉아 홍훠슈에게 말한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지상에 많은 사람들이 본래의 성품을 상실했다. 지상에 있는 사람 중 내가 부여하지 않은 생명이 누가 있으며, 구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내 음식을 먹고 내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한탄하고,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그들에게 부여한 것들을 모두 요괴들에게 바치는 공물로 써버린다. 인간들은 이 요괴들이 어떻게 그들을 속박하고 파괴하는지 조금도 알아차라지 못한다. 그들은 내가 느끼는 분노와 연민의 정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홍훠슈가 요괴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 사람들이 동해용왕(東海龍王)이라고 부르는 지옥의 염라왕이 대표임을 알게 된다. 그는 아버지께 요괴와 싸우는 전투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여 허락받고, 금으로 만든 인장과 큰 칼을 받아 요괴들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이름을 ‘火’자 대신 완전함을 뜻하는 ‘全’자를 넣어 홍슈취안으로 바꾸고, 직함을 “천왕대도군왕전”(天王大道君王全)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자신의 환몽을 따라 요괴인 청나라 군대와 싸우기 위해 군사를 모아 태평천국운동을 벌였다. 오늘날 중국이 종교문제에 민감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특히 기독교의 이단이나 사이비에 민감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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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4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잘못했습니다” 하고 떠나는 것이···'
    요즘 나는 조금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다소 놀라게 되었다. 어떤 한 승려가 다른 한 승려를 조금은 심하다싶게 나무랐는데, 그 꾸지람을 당한 승려가 너무도 쉽게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과를 해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이 사태를 지켜보고서 상당히 놀랐다. 물론 그 사과를 한 승려가 꾸지람을 당할 만한 일을 했었기에 잘못했다고 사과를 한 것이라고 본다면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비록 누가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적당하면 그냥 당하지만은 않는다. 반드시 나무란 상대를 되받아쳐 상대를 그로기 상태로 몰거나, 아니 걸핏하면 명예훼손이니 무어니 하며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덤벼든다. 우리 현실 가운데서 익히 보아온 바이다. 그런데 이런 볼썽사나운 현실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지금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현각 선사(禪師)와 혜민 선사이다. 푸른 눈의 수행자로 불려온 미국인 현각 선사가 요즘 한창 구설수에 오른, 베스트셀러 명상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선사를 가리켜 “속지 마 연예인일 뿐이다. 일체 석가모니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도둑놈일 뿐”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혜민 선사에게 우리가 보기에도 승려 같지 않은 구석이 다소 엿보이기는 했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같은 불교계 인사가 상대를 ‘속지 마 연예인’이라고 평한 것이야 접어둔다고 치더라도 ‘도둑놈’이라는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를 써서 비난한 것까지 참아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혜민 선사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나온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혜민 선사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인물만은 아니다, 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본다. 동시에 불교계도 일단 한숨 돌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문화계의 기린아들이라고 할 두 인물이 맞붙어 티격태격한 일이 있었다. 조정래 작가와 진중권 평론가였다. 이들의 언쟁을 옆에서 지켜본 우리로서는 뒷맛이 매우 떨떠름했다. 문단의 대선배를 무시하기냐 하는 식으로 나온 조정래 씨나, 어디 고소할 테면 해 봐라 멋들어지게 붙어줄 테니까, 식으로 나온 진중권 씨나 옆에서 보기엔 고집불통들 간의 진흙탕 싸움 같이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현각과 혜민 두 승려들의 멋들어진 결말과 같이 시원하게 끝난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결말도 무엇도 없이 흐지부지 돼버린 꼴이어서 뒤끝이 개운하지 못한 결과만을 낳았다고 보겠다. 어떤 계기만 만나면 둘이 또다시 폭발할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만 남겨 놓은 모양새라고나 할까. 미국의 2020년 대선의 결과는 이미 발표된 232 대 306이란 선거인단의 확보수가 말해 주듯이 바이든의 압도적인 승리로 장식됐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결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옆에서 보기에,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인 미국인 투표권자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속된 말로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겠다. 마치 백(白)을 백이라 인정하지 않고, 흑(黑)을 흑이라 인정하지 않는 꼴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트럼프는 그러면 어쩌자는 말인가. 이번의 선거를 그는 마치 한판의 트럼프 놀이쯤으로 치부하자는 말인가. 이게 어떻게 한판의 마작놀이나 화투놀이나 트럼프 놀이로 돌려놓은 수 있는 판이란 말인가. 지금 그는 이 선거판에서 마치 “한 수 물려줘”라고 떼쓰는 장기나 바둑판 놀이의 선수들처럼 극도로 유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속된 표현처럼 아더메치의 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바이든이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그가 꼭 잘나서(잘해서) 그랬다, 라고는 보지 않는다. 트럼프가 형편없어서 그 반대급부로 이득을 본 결과 바이든이 이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나의 판단은 결코 나만의 판단만은 아니고 거의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 형편이 없었다. 더구나 미국의 대통령으로서는 더욱 형편없었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리드해 오던 관행을 그는 거의 걷어차 버렸다. 대신 강자(강대국)의 자리를 이용해 약자(약소국)의 돈이나 탈취해 보려고 애쓰는 장사치의 수준으로 제 나라를 격하시켜 버렸다. 그가 수준 미달로 보이게 만든 큰 증거는 바로 코로나19에 대처한 그의 무(無)대처, 무능력의 실상이었다. 지금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는데도 그는 노(no)마스크만을 자랑하듯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더 일러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짐짓 선거부정을 날조해 미국(인)을 여와 야, 또는 좌와 우의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이전투구들로 만들려 하고 있으니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결국 그는 혜민 선사처럼 “잘못했습니다” 하고 떠나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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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20-12-14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One’과 한국교회의 ‘Win’
    한동안 정체 되었던 한국교회의 대통합 운동에 또다시 불이 붙을 태세다. 현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꼽히는 소강석 목사가 지난 9월 총회에서 ‘원 리더십- 원 메시지’라는 시대의 구호를 발표한 뒤, 하나됨에 대한 교계의 열망은 다시 들끓어 오르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교총의 차기 공동대표로서 내년 자신의 모든 역량을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재건하는데 매진할 것이라고 수차례 공언하며,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기대까지 한껏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으로, 그리고 다시 한교총으로 이어지는 연합운동의 3단 분열 속에서 한국교회가 받은 상처는 실로 엄청났다. 물론 하나됨을 위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편승해,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그들만의 욕심은 결국 또다른 분열만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교계에 있어 ‘통합’이란 말은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처럼 아무런 신뢰도, 별다른 기대도 주지 못한다. 통합에 대한 의지나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말로만, 문서로만 반복되어 온 ‘통합’이란 두 글자는 어느순간 한국교회에 있어 ‘거짓’의 또 다른 표현이 됐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 ‘One’의 절대성을 주창하는 소강석 목사를 향한 들끓는 기대의 한 편에는 여전히 트라우마 가득한 불신이 자리함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소 목사가 말하는 ‘One’의 뒷면에 무엇이 새겨져 있을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미 바닥 깊이 추락해 앞뒤를 돌아볼 여력조차 없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과연 그 의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반복된 거짓말에 진력이 난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외면한 순간, 늑대는 나타났다. 그리고 양들은 몰살 당했다. 연합단체의 ‘하나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앞선 그들의 행태가 꽤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됨’의 사명을 외면한다면, 결국 양들을 잃는 것은 우리 한국교회일 뿐이다. 현재 각종 유튜브와 SNS, 온라인을 통해 쏟아지는 소강석 목사에 대한 비난은 단순 ‘유명세’라고 하기에는 심히 도가 지나친 감이 크다. 더 안타까운 점은 그 대부분이 한국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총질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외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동시에 정부에 굴복했다는 비난을 가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지독한 모순일 뿐이다. 냉정히 한국교회가 가진 지금의 힘을 과연 크다고 볼 수 있나? 분열을 반복한 한국교회의 현재의 모습은 차·포 떼인 장기판이자, 무기와 갑옷을 잃은 군대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 그나마 이룬 최선의 결과였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은 바로 그 힘을 되찾는 결정적 방편이다. 반 기독교정책에 몰두하는 정부에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기독교의 예배와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당장 눈 앞의 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 없이,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회복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한 곳을 모으는데 집중해야 한다. 적어도 2021년, 한 해 동안만이라도 한국교회 전체가 지난 트라우마는 덮고, ‘하나됨(One)’을 통해 반드시 ‘승리(Win)’하겠다는 절박한 소망을 쏟아내기를 기대해 본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11-24
  • [토요시평] 도를 넘은 사제(司祭)의 기독교 비난
    며칠 전 모 중앙일간지에 가톨릭의 어느 사제가 ‘우상 숭배와 이단’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언젠가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이 ‘우상숭배’라며 가톨릭의 성모상에 흙칠을 했다는 것과, 모 신학대학의 교수가 성도 가운데 불교의 사찰에 ‘우상숭배’라며 피해를 준 것을 보고, 그 것을 보상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했는데, 그를 그 신학대학에서 표창하기는커녕 이단으로 몰아 교수직을 박탈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선행과 교리적인 문제는 별개인데) 뿐만이 아니라, 불교의 부처상이나 가톨릭의 예수상이나 성모상, 성인상을 이단이며, 우상숭배라고 하는 기독교인의 생각은 옳은 것이 아님을 들면서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불자(佛者) 가운데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그들을 가톨릭에서는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익명의 크리스천이라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제는 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며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비난일변도이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의 목회자들을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제는 어떤 목사를 이단으로 보고 있는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도시간보다 헌금 내는 시간에 기뻐하는 목회자들, 십일조 안 내면 암에 걸린다고 종교적 협박을 하는 목회자들, 신도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머리 당 얼마’라며 수입원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현대판)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이고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안티기독교 언론이 보도하는 수준의 것들을 귀 담아 듣고서, 이를 편집한 듯하다. 가톨릭의 영성심리의 중요 직함을 가진 사제가 중앙일간지를 통하여 이렇듯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은, 그 사제 나름에는 기독교에 대한 상당한 반발심과 불편함이 있는 듯하다. 아니면 가톨릭을 대신하여 기독교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제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 타종교의 극히 일부 문제를, 영향력 있는 언론에 공개적이며 거칠게 그리고 지독히 부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양식(良識) 있는 종교인으로써는, 그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사회적 책임감이 있는 언론도 종교간 비난을 하는 내용을 여과 없이 그대로 신문 지상에 게재한 것도 이상하다. 혹시 반기독교적인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든다. 종교간 비판이나 비난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자기 종교의 ‘다원주의 기준’으로 남의 종교를 이단이나 우상숭배로 비난하거나 남의 종교의 내부 문제를 일방적이며,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자세이며, 종교인의 품위의 문제이다. 누구나 잘 아는 바처럼, 16세기 가톨릭의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유가 뭔가? 로마 교황청이 비성경적인 면죄부(Indulgence) 판매를 허용하므로 이에 대한 반대로 시작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판매를 위한 사제들의 설교는 ‘연보궤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주장한 것은, 로마 교회와 교황의 부패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도 가톨릭과 기독교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구원론의 차이, 기독론의 차이, 성경관의 차이, 교회관의 차이, 예배 내용의 차이 등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이 지면에서 자세하게 나타낼 수는 없으나, 보다 성경적이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종교개혁을 하고, 그 후예(後裔)들이 기독교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관을 따르는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일부의 목회자의 목회 윤리와 건덕의 문제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는 누가 보더라도 거친 표현이며, 충분히 오해와 종교간 갈등으로 비춰져,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매우 긴장하고 고통과 불안과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 이런 힘든 때에 종교 간의 협력과 화합을 주장하지는 못할망정, 난데없는 우상숭배와 이단 문제를 들먹거리며 이웃 종교를 비난하고 그 성직자들을 모욕하는 태도는 아주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고 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10-20
  • [사설] ‘벙어리 개’가 된 교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견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따르며 기뻐하고 큰 소리로 찬양하며 환호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단속하지 않는 제자들을 책망하라는 요구를 받고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요즈음 우리 사회현실과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도 바라고 고대하던 메시야의 현현을 보고도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층이요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찬양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들의 환호를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그와같이 작금 우리사회 지도층과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정부의 실정을 비판키는 커녕, 오히려 그래도 '벙어리 개'는 되지 않겠다며 나서는 일부 인사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전국에 6만 개의 개교회와 16만여 명의 안수받은 목사, 수십만 명에 이르는 중직자들이 있다. 여기에 전국 70여 개의 신학대학에 언필칭 신학자만 1천여 명에 이른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파괴되고 헌법상의 종교자유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우려에 대해, 소위 스스로 정통성을 가졌다는 그 잘난 지도자들은 어느 한 사람 나서지 않는다. 그러자 정통성은 고사하고 어디서 무슨 신학을 배웠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목사들이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양 나서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돌들이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나서야 한다. 교단의 대표성 가진 인물들이 나서고, 대교단들이 나서고, 신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향한 정부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당당히 국민 앞에 드러내어야 한다. 물론 한국교회에도 진보와 보수 간에 정치적 견해가 갈라져 있음을 안다. 이는 분단사회가 짊어지고 가야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도 대한민국 건국 후 70년동안 한국기독교는 사회적 혼란기마다 중심을 잡는 일에 앞장서 왔다. 국민들 또한 대체로 그러한 한국교회의 활동을 신롸해 왔다. 그런데 작금에는 왜 이 위중한 시기에 교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코로나19 방역을 앞세워 교회의 예배조차 금지시키는 이 무도한 당국을 향해 어떤 소리도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교회의 기본사명에 대한 행정당국의 억압에 대해 항거하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 가치가 없다. 그런 교회는 문 닫아도 된다.
    • 연지골
    • 사설
    2020-09-28
  • [사설] 지금 한국교회는 정부 통제체제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2019년 10월 3일 개천절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에 모여들었다. 조국 사태를 감싸는 문재인 대통령을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이후 매주 토요일 대정부 규탄집회는 계속되었다. 일명 '태극기부대'가 그들이다. 그 중심에는 우파 한국교회가 있었다. 소위 전광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 갈래의 기독교 우파조직들이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정부 여당은 매우 놀랐다. 그리고 그 해 말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연초 언론과 방역 전문가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중국과의 왕래를 통제하지 않아 코로나19가 순식간에 퍼졌다. 그런데 마침 대구에서 신천지 교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정부는 신천지를 모든 신코로나19 진원지로 몰았다. 국민들은 신천지를 향해 손가락질 했다. 한국교회도 역시 이단이 문제라며, 이 기회에 신천지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동조했다. 그런데 2020년 8월 15일, 서울 광화문에 다시 문재인 정권을 규탄하는 광복절 집회가 열렸다. 오비이락(烏飛梨落), 그 집회에 참가한 일부 교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정부가 이번에는 방역지침을 잘 따르고 있는 한국기독교 전체를 향해 아예 '예배금지' 행정명령을 내리고 코로나19 진원지로 교회를 지목했다. 신천지 때 해보니 한국교회도 통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자 국민들은 밖에서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안에서는 교인들끼리 서로를 탓하며 갈라졌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대면 예배파'와 '비대면 예배파'로 나뉘어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정부가 코로나19를 빙자로 교회예배에 간여하려 할 때부터 강하게 저항했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역을 핑계로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도 제한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바로 헌법의 기본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위협임을 각인시켰어야 옳다. 지금 한국교회는 국가 명령 통제체제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최소한 예배금지 행정명령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을 제기해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20-09-16
  • [기자수첩] 기독교는 좌도 우도 아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초장기전으로 접어들며, 국민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설상가상 갈수록 고조되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이념갈등은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신음하는 국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는 중이다. 사실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갈등이야 늘상 있었던 일로 그리 새로울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보지 못한 극단적 이념간의 충돌은 조금의 타협점 없이 서로의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충돌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양 끝에서 그 어느 집단보다 강력한 행동으로, 각자의 진영을 주도하고 있다. 단순히 교회만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한 이념 주입에 몰두 중이다. 주사파, 빨갱이 등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반공이념들이 지금 이 시대에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라는 거대한 매개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이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극단적일지는 몰라도 엄연한 하나의 정치적 신념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이 세상을 진짜 우려케 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선동하는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기 이념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소위 극우, 극좌로 불리는 이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 사고와 발상으로 교계와 사회, 국민을 가르고 있다. 일부 극우 기독교 세력은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빨갱이, 주사파, 종북주의라는 험한 말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부 극좌 기독교 단체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대다수의 교회를 향해 ‘근본주의 개신교 집단’이라는 낙인을 씌웠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 사고에 얽매이다 보니, 어처구니 없는 사태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교계에서 익히 알려진 골수 보수 목회자들을 향해 광화문에 나오지 않고, 정부에 대해 적극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주사파’로 매도해 버린다. 마찬가지로 교계를 대표하는 진보 교단들인 예장통합과 감리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함으로, ‘근본주의 집단’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기독교는 중립의 종교다. 각자의 정치적 개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보수도 진보도 모두 복음 안에 품는 포용의 자세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잘못된 생각으로 규정하거나, 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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