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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지골] 신장 위구르
    ▲ 미군이 떠난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반군 탈레반이 접수했다고 한다. 탈레반(Taleban)은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를 정책으로 내세우는 군사조직으로 '학생들'이란 뜻이다. 1980년대 탈레반이 처음에 이슬람 신학교 마드라샤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접수하자 제일 먼저 위험에 빠진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재빨리 탈레반과 손을 잡았지만, 수도 카불이 너무 빨리 무너지고 탈레반이 완전히 정권을 잡은 이상 중국과의 밀월은 그리 오래 갈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신장 위구르'가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 중국의 새국경을 뜻하는 신장(新疆, 신강)은 본래 위구르 제국과 준가르 제국을 비롯 수많은 왕국이 있었던 곳으로, 근세에는 동투르크스탄(East Turkstan)이란 위구르족의 나라였다. 이를 중국이 청나라 강희제 때 점령해 합병했다.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와 국경을 맞대어 있는 신장에는 위구르족, 한족, 하사커족, 후이족, 키르기스족, 몽골족, 타지크족, 시보족, 만주족, 우즈베크족, 러시아족, 타타르족 등 47개 민족으로 구성된 2,300만명 정도가 그들 오아시스 도시에 살고 있다. 이 중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족은 전체 인구의 절반에 채 못 미치는 약 1,100만명이다. 중국정부가 한족 이주정책을 진행해 위구르족보다 한족이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 한반도의 약 8배 넓이가 되는 신장은 남쪽에 그 크기가 남한의 약 4배쯤 되는 '타클라마칸'(塔里)이란 사막이 있고, 그 사막 북쪽에는 길이 약 3000Km, 너비 약 350-480Km의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지나 우즈베키스탄까지 뻗어 있으며, 사막 남쪽에는 티베트에서 시작되는 '곤륜산맥'(崑崙山脈)이 서쪽으로 뻗어 히말리야에 이른다. 이 산맥들은 1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는 설산이 첩첩으로 쌓여 있다. 그리고 천산산맥과 북쪽 알타이산맥 사이에는 계곡과 분지와 '준가르'라고 부르는 평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기름을 비롯한 온갖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 성도(省都)인 우루무치와 유전지대인 커라마이 등 2개 지급시(地級市), 21개 현급시(縣級市), 62개 현(縣), 6개 자치현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장에는 도시마다 삼자 기독교회가 설립돼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위구르족은 찾아보기 어렵고, 기독교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한족이다. 신장지역에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그것은 중국에서는 '경교'(景敎)라고 부르던 네스토리우스 교파이다. 이 교파는 페르시아 바그다드에 선교본부를 두고 5세기 이후 중국과 중앙아시아 전역에 선교했다. 이후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기독교는 심한 박해를 받았다. 신장이 다시 이슬람 국가가 된다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족을 위한 기독교 선교도 어려움에 처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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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7
  • [사설] 목사세계에 '색계'라니?
    최근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225국)에 포섭된 충북지역 사회활동가들의 간첩단 사건이 드러나자, 탈북자들이 중심이 된 유튜브와 일부언론에서 통일전선부 산하의 225국에 포섭된 한국목사들이 있다고 보도하고 나섰다. 이들 목사들은 김대중 시대와 노무현 시대에 북한을 방문한 자들로서 소위 북한의 '색계 작전'에 포섭돼 친북활동이나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색계 작전에 포섭된 170여명의 한국목사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며, 이들 목사들 가운데는 공작금을 받고 친북활동을 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이 명단이 지난 정권 때에 청와대에 보고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기독교 목사들은 성적으로 타락했음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국가안보 저해집단으로 비난 받을 수 있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목사들이 '색계'에 걸려 친북활동과 간첩활동을 한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방북 목사들 중에 일부라도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한 행동이나 오해를 살만한 일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 교계와 사회 앞에 이실직고 하고, 그 직에서 은퇴함이 옳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공안당국이 나서서 이들 혐의자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낱낱이 밝힐 것을 요구한다. 만약 유튜브나 일부언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같은 주장은 이미 드러난 간첩사건에 대한 물타기거나, 한국교회에 분열과 불신을 조장하려는 악의가 있음이 분명함으로 교계가 나서서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줄잡아 약 15만 여명에 이르는 목사가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하에 북한을 이해하려는 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이상한 시각으로 봐서는 안된다. 그런데 과연 한국교회 목사 중에 이들의 주장처럼 북한의 색계에 걸려 양심과 신앙에 반한 친북활동 내지는 간첩활동을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이다. 이 문제는 다시 강조하거니와 국가안보가 걸린 문제임으로 공안당국에서 철저히 조사해 밝혀야 한다. 왜 이런 의혹을 방치해서 윤리와 도덕을 생명으로 여기는 교회를 욕보이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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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8-17
  • [기자수첩] ‘선(先)조율 후(後)통합’의 함정 “우리는 시간이 없다”
    예배회복, 반성경적 악법 대처 등 ‘대통합’ 시급 ‘선(先) 통합’ 후 하나된 단체에서 이단 문제 해결해야 모두의 기대 속에 대차게 첫 발을 뗀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가 또다시 제동이 걸릴 태세다. 당장 예배 회복을 필두로 차별금지법과 평등법 저지 등 한국교회에 있어 단 한 시도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사안이 즐비한데 이런 현실은 무시한 채 ‘선(先)조율 후(後)통합’이라는 느긋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한교총은 교계 대통합을 위한 ‘미래발전위원회’와 실무협상을 책임질 ‘기관통합준비위원회’를 동시에 구성하고 한기총과의 본격적인 통합에 나섰다. 상임위는 소강석 목사(한교총 이사장, 예장합동)와 김태영 목사(한교총 전 공동대표, 예장통합)를 각 위원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하고, 교계 대통합을 시급히 완수키로 중지를 모았다. 그러나 통합 실무를 맡은 김태영 목사가 최근 소속 교단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기총의 이단 해제, 금권 선거 등의 문제를 언급하며, 해당 문제들의 해결 없이 통합 협상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김 목사의 발상이 한국교회 대통합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난을 듣는 것은 그것이 한국교회가 분열한 지난시간 간간히 추진됐던 통합 시도를 매번 무산시킨 단골 레퍼토리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단문제는 서로간의 첨예한 이견이 부딪치는 극히 예민한 사안으로, 단순히 조율과 협상으로 이를 해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언제부터인가 이단 문제는 통합 논의에 있어 선결 조건이라기보다는 통합 무산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 김태영 목사가 기관통합준비위원장에 오른 직후, 또다시 이단 문제를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은 오히려 통합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김태영 목사가 주장하는 ‘선(先)조율 후(後)통합’이란 형태는 통합에 있어 매우 이상적임은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단체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해결하고, 조율해야 할 문제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런 느긋한 여유를 허락치 않는다. ‘원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상황에 정부의 방역정책에 끌려다니기 바쁘고, 급기야 예배 인원을 방역당국이 정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여기에 일부 정치계에서는 교회와 사회의 전통 규범을 위협하는 독소조항을 다수 포함시킨 비슷한 법안(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이상민 법), 건강가정기본법 수정안, 평등법(박주민 법))들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과거 하나된 한국교회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사분오열된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위급한 현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선(先)조율 후(後)통합’이 아닌 ‘선(先)통합 후(後)조율’이 해답임을 알려주고 있다. 현 한국교회에 있어 ‘예배회복’이 가장 시급한 난제라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고, 분열된 힘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모두가 공감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해묵은 문제는 일단 뒤로 잠시 넘겨두고, 예배 회복과 코로나 대처라는 대의적인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당연히 통합이 먼저다. 이단 문제는 통합된 단체에서 회원들의 다수결을 통해 이를 처리하면 될 뿐이다. 그게 법이고, 원칙이다. 오히려 현 상황에서 이단 문제의 해결을 강조하는 것은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단’의 기준은 각 교단마다 다르고, 서로가 이단으로 정죄한 집단, 인물, 단체가 매우 상이하다. 예장통합측의 기준에서 판단한 한기총 내부의 이단 문제와 합동, 기성, 기침, 기감 등 여타 한교총 회원교단들의 입장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김태영 목사가 단순히 자기 교단의 이단 기준만 들이대 한기총을 판단한 것 자체가 애초에 모순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자칫 한교총 스스로가 자가당착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한교총 회원교단 사이에서도 상대 교단의 인물이나 단체를 이단 혹은 교류금지 등으로 정죄한 사례가 많은데 그런 상황에 굳이 한기총을 향해서만 이단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한교총 자체의 이단 기준이 서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더욱이 한교총이 ‘선(先) 통합’ 없이 ‘이단 문제’를 선결과제로 고집한다면, 한기총 역시도 WCC를 선결과제로 끄집어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WCC는 한국교회가 지난 숱한 분열 속에서도 60년간 전혀 의견을 좁히지 못한 사안, 만약 이번 통합 논의에 WCC가 등장한다면, 이 통합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단 문제는 하나된 통합 단체에서 이를 논의하고 해결해야 함이 옳다. 논란이 되는 교단이나 인물이 있다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잔류, 퇴출 등을 결정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오직 한국교회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장 무너져 가는 예배를 회복하고, 반성경적 악법을 저지키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일의 선제조건은 당연히 대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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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1-08-16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언젠가 나는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고백록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읽을 그때는 매우 감동 깊게 읽은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회고해 보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다소 안타깝다. 아마도 읽은 지가 꽤 오래되어서 그러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다음 부분만은 너무도 뚜렷이 나의 기억에 남아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하면 우선적으로 그 장면부터 떠오르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다른 데가 아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직 ‘히포의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이전, 그러니까 그가 밀라노 시에서 수사학 교사로 일하던 시절 갑자기 강력한 회심의 체험(386년)을 하고 나서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직후 그의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잠시 고향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려고 여행길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 도중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신병이 악화돼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글픈 일이었지만,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통해 아주 귀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모니카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아들이 그녀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반해 장사지내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은 어디나 다 같은 처소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게다가 모니카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별게 아니라는 듯, 자신의 죽음을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심정으로 맞겠다는 식으로, 무서우리만큼 확고한 그녀의 신앙심을 드러냄으로써 또한 아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모니카의 이 확고부동한 신앙심은 당시의 그녀의 아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필부필부들에게도 같은 비중의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음이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죽음을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심정으로 맞겠다는 결연한 자세, 아니 확고부동한 신앙심이 필요한 그런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때 나는 다른 계기로 고(故) 김성한 작가의 단편 역사소설 <바비도>를 다시 읽게 되었다. <바비도>는 15세기 초엽의 영국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는데, 그때의 영국 왕이 헨리4세였다. 그는 1399년 사촌형인 상왕 리처드2세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악명 높은 자였다. 그는 왕좌에 오른 2년 뒤 ‘이단 분형령’(1401)을 통과시켰다. 이는 기독교의 이단자들을 골라내 불에 태워 죽이라는 법령이었다. 또 1407년 이후엔 개혁자 위클리프의 영역성서 비밀 독회(讀會)를 법으로 막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비도는 1410년 이런 조치에 의해 ‘이단 분형령’에 따른 화형을 당하게 된, 재봉직공 신분의 기독 청년이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이 상식 밖의 일들을 다 저지르면서도 평신도에게만은 각종의 규제들로 그들의 목을 조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강압적 규제에 대하여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법이 만들어졌든 말든 오직 자기의 신앙 노선만을 굳게 지키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법 때문에 제 신앙노선을 쉽게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 결과 그는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종교재판정에서 사교가 심문을 시작했다. “밤이면 몰래 영역복음서를 읽었다지?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복음서를 읽구 듣구 했지?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느냐?” 무슨 심문에도 바비도는 사교의 뜻과는 반하는 말만 해댔다.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사교는 그에게 분형에 처하라는 판결을 내리고, 그는 스미스필드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헨리 태자가 나타나 그를 달래 보았다. “바비도, 누가 옳고 그른 것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하여간 네 목숨이 아깝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마음을 돌렸느냐?” 바비도가 대답했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내 스스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떠나는 길이니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바비도는 불길 속에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말았다. 죽음에 임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떠난다고 하는 표현을 한 데서 바비도의 초연(超然)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은 임종의 모니카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심정으로 죽음을 맞겠다고 한 것과 같은 결연(決然)함이라고 하겠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우리는 지금 바비도나 모니카에게서와 같은 초연함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초연함, 결연함이 아무렇게나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바비도나 모니카에게서와 같은 확고한 신앙 위에서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1-07-17
  • [사설] 언론의 기능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국정과제는 오로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이다. 정치권의 위협이 되는 검찰은 '검수완박'으로 손발을 꽁꽁 묶고,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언론은 ‘가짜뉴스’로 몰아 징벌적 처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여당은 언론의 비판 기사가 오르면 자신들이 뭘 잘못한 것인가 돌이켜 볼 생각은 않고, 오로지 언론을 통제하고 규탄하려고만 한다. 그러는 동안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잃고 민주당도, 청와대도, 정부도 망가져 가는 줄은 모른다. 지금 국민의 여론은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30% 대로 내려앉고(최근 리얼미터 38.3%),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도 20% 대(29.7%)로 야당인 국민의힘(38.0%)에 뒤지고 있다. 한국기독교계에도 집권여당과 똑같은 짓을 하는 교단이 있다. 예장통합측의 경우이다. 한국기독교에서 그래도 진보진영을 대변한다는 에큐메니칼 교단을 자처해온 통합측은 자신들의 교세만 믿고 수없이 많은 타교단 인사들에 대해 ‘이단시비’를 해왔다. 자기네 교단과 신학이 달라도 이단, 신앙 형태가 달라도 이단,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아도 이단, 귀신을 쫓아내도 이단으로 몰아 교계를 분열시켜 왔다. 통합측의 이런 황포를 보다 못해 ‘이건 아니라고 봐’라고 몇 마디 지적하는 교계언론이 있으면 가차없이 ‘이단옹호언론’으로 매도하고, 총회 결의라며 아예 교단 행사에 그 언론의 기자의 출입을 막고 보도자료도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통합측은 교계에서 왕따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언론은 그것이 사회적 기능이든, 교계적 기능이든 그 사회의 거울의 역할을 한다. 그 거울에 비친 피사체가 더럽게 보이면 거울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그 피사체 자체가 더러운 것이고, 깨끗하게 보이면 그 피사체 자체가 깨끗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당도 교단도 자신의 얼굴이 더러워져 있는 줄은 모르고 거울 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꼴 보기 싫다’며 그 거울을 깨뜨려버리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얼굴에 묻은 더러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울에 비친 더러워진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고 깨끗이 닦고 다시 거울 앞에 서면 되는 것이다. 정부도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거울은 다만 거울일 뿐이다. 언론을 탓한다고 자신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홍보든, 비판이든 언론 기능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21-07-12
  • [사설] 매년 늘어나는 ‘예장 교단’
    교회연합신문이 매년 발간하는 ‘교회연합주소록’ 2021년 판에는 271개의 교단이 등재되어 있다. 그 중에 220개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이다. 예장교단이 처음 하나의 총회를 결성한 것은 1912년이다. 예장은 1938년 일제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이 원죄가 되어 해방과 함께, 1952년 신사참배 반대파(고신측)의 분열로부터 시작해 1953년 기장측의 분열,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 그리고 1979년 합동측의 ‘주류측’과 ‘비주류측’의 분열이 가져온 결과가 오늘날 220개 예장교단간판이 내걸리는 참으로 부끄럽고 놀라운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외에도 주소지를 확인 못해 누락된 교단이 여럿 있다. 그런데 이 220개 교단은 개혁주의 칼빈주의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하는 그 신학과 신앙이 동일하다. 그럼에도 무지하고 어줍잖은 지도자들이 ‘ 저 쪽은 우리 하고 다르다’면서 교단을 따로 차리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신학이나 신앙이 달라서가 아니라, 교단 지도자들의 세속적 욕심으로 인한 타락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그것도 예장교단 220개 가운데 기껏 20여 개 교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단 설립자가 노망이 들거나 관 속에 들어가는 날까지 평생 총회장을 하는 군소 1인 독재교단이다. 그래도 그들이 교계연합단체에 가입하여 정통성 가진 대교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국교회를 논한다. 그러다보니 연합과 일치를 논하는 연합단체가 교단분열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있다. 코로나 정국인 금년에도 몇 개 교단이 더 늘어났는데, 교단 창립과 동시에 ‘교계연합단체’에 가입해 임원이 된다. 그 단체의 임원 명함 한 장 들고 다니기 위해서 자기네 끼리 교단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본은 전혀 다르다”는 뜻의 사이비(似而非)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이비’적 현상을 한국장로교회 지도자들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교회가 아무리 다양성을 추구하는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신학이 달라 갈라지는 ‘교파’(敎派)가 아니라, 신학과 신앙이 똑같은 ‘교단’(敎團)을 갈갈이 찢어놓는 행위는 비윤리적이고, 비양심적이고, 비신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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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7-12
  • 정치와 종교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인간 본성이 바뀌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인 죄성(罪性)을 가지고 있어 그 본성이 양심과 도덕에 의해 바뀌지 않으면 결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인간 본성이 바뀌려면 개개인의 도덕관념이 확립되어야 하는데, 도덕관념은 철학이나 또는 정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양심과 도덕의 척도는 각기 달라 정치로는 인간 본성을 바꿀 수 없다. 중세 르네상스 이후 종교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많았지만, 인류 사회 발전에 종교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 어떤 것도 없다. 종교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근대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또는 종교를 아예 인민의 아편으로 취급한 공산주의 운동도 끝내 종교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적 가치관은 그 사회의 주류 종교에서 나온다. 종교가 사회통치 철학을 제시하고, 시민의 도덕관념을 형성시키며, 사회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그 사회의 주류 종교가 건강한 도덕성을 가지면 그 사회도 건강하게 되고, 주류 종교가 건강성을 잃으면 그 사회도 타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려면 그 사회의 주류 종교가 바른 도덕관념에 서야 한다. 또한 그 사회의 주류 종교가 다신교적 윤리를 가진 종교라면 사회가 분열하고, 그 종교가 범신론적 윤리에 서 있으면 사회 구성원의 정신 상태가 저급한 윤리의식에 빠지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일신론적 윤리를 가진 종교사회가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이끌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날 사회는 경제도, 문화도 정치가 지배한다. 그래서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 정치가 권력을 갖고 권력이 재화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종교가 끼어들어 선악(善惡)의 구분을 요구한다. 정치인들은 이런 종교가 자신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 같아 꺼림칙 하다. 그래서 주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치집단은 종교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하는 것이다. 표를 얻기 위해서 가까이 하기에는 부담스럽고, 또 멀리하기에는 표를 잃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정치를 순화시키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종교이다. 따라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무시하고 정치가 종교를 멀리할 때 그 사회는 독재화 한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방역 정국에서 정치로부터 매우 부당한 편파적 대우를 받아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회예배금지’ 행정명령이다. 극히 일부 교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전국 6만 교회에 예배금지 행정명령을 일방적으로 내렸다. 이는 정치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예배를 위한 교회의 존재 목적을 무시한 행위로서 매우 부당한 조치이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다. 정치가 교회의 예배를 금지시키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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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2
  • [사설] 어처구니 없는 교단 분열의 명분
    한국기독교는 교파주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그들 교파에서 갈라진 교단까지 300여 개에 이른다. 교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가장 심각한 분열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이다. 어떤 공동체든 그것이 분열하면 그 집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대내외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해 있다는 약점이다. 그런데 이 장로교 교단분열의 명분이 참으로 희안하다. 신사참배 문제로 갈라진 고신측과 신신학적 문제로 갈라진 기장측을 제외하고, 예장의 분열에는 모두 WCC나 NCCK가 등장한다. WCC는 1948년 결성된 국제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를 이르는 말이고, NCCK는 1924년 한국기독교의 유일한 교단연합체로 결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 이어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에 기반을 둔 순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1970년 개명)를 이르는 말이다. WCC는 세계 1,2차 대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무고히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세계교회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는 자괴감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뭔가를 해 보자고 모인 세계 교회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 참여한 한국교회는 예장통합, 기장, 기감, 한국성공회로, 단 4개 교단 뿐이다. 한국교회의 300여 개 교단 중에 단 4개 교단만 가입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WCC가 생기기 전부터 한국교회를 대표해온 NCCK에는 예장통합, 기장, 기감, 성공회, 복음교회, 루터교, 기하성, 한국정교회 등 단 7개 교단만 가입해 있다.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예장쪽 인사들은은 교단을 새로 만들 때마다 'WCC와 NCC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는지 알 수 없다. 솔직히 한국교회에서 교단 따로 차례 나가는 그들에 대해 WCC나 NCC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예장 소속 목회자들 중에 막상 WCC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다. 대부분이 '용공주의'니, '종교혼합주의'니, '동성애 지지'니 하는 남들의 비난에 그냥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WCC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용공주의도, 종교혼합주의도 아니다. 
    • 연지골
    • 사설
    2021-06-15
  • [사설] 북한의 지금 외교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북한의 지난해(1920년) 국민소득(GNI)은 우리 돈으로 1인당 141만원이었다. 전년 대비(141만8000원) 약 2만원 정도가 줄었다. 이는 남한의 27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세계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북한의 이 같은 경제 실패는 미국이나 유엔의 제재 때문만은 아니다. 제재 이전에 이미 고난의 행군이니 뭐니 하며 대량 아사 사태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북한 인민들의 목숨을 건 탈북사태가 이어졌음을 세계가 잘 알고 있다. 원인은 북한의 외교 정책의 실패에서 온 것이다. 1945년 해방 후 남북한이 갈라질 때 북한의 경제는 남한 지역보다 월등이 앞서 있었다.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대결한 결과가 오늘의 현실을 낳은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립을 자초하며 인민의 삶을 왜 이토록 피폐하게 방치하는가. 이유는 권력 세습에 있다. 봉건사회의 왕조가 아니면서도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세습 국가는 북한 외에 사회주의 국가 어디에도 없다 북한이 과연 핵과 미사일로 무장했다고 해서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도 개혁개방 노선으로 외교 경제 정책을 바꾸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대로는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구실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유엔의 회원국이면서도 이미 외교 무대에서 정상적인 국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더 어리석은 정책은 아직도 남한에 대해 적화통일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소득 1인당 141만원으로 그 몇 십배가 넘는 경제대국인 남한을 먹겠다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한 남북한의 경제 규모는 갈수록 더 벌어지게 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국가의 국방 안보 어떤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이 사느냐 죽느냐는 핵이나 미사일 개발이 아니라 외교 정책에 달렸다. 북한은 미국의 트럼프 정부 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 이제 바이든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어놓느냐에 따라 북한의 미래가 달렸다. 지금의 반미정책과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 연지골
    • 사설
    2021-06-15
  • [연지골] 분열의 상징
    우리사회에는 ‘대한경신연합회’(大韓敬信聯合會)라는 무속집단 조직이 있다. 이 단체는 무당 등 무속과 관련해 활동하는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입한 단체이다. 그런데 본래 무속 사회는 그 어떤 조직도 없었다. 이유는 무당은 그 섬기는 신(神)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연합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단체가 한때 60만 회원을 거느리고 신한국당 직능단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자신이 섬기는 신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들의 무속 활동에 도움이 된다면 함께 모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조직된 정치단체가 대한경신연합회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집권세력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성은 매우 혼란스럽다. 섬기는 신이 다른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 공동의 목표를 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당은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무당이 지배하는 사회 역시 불신과 분열이 지배할 수 밖에 없다. 무속과 미신이 사회 발전에 위해(危害)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무속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신년이 되면 당골네나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좀 수그러 들었지만, 그래도 연초에 수 많은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 새해 운수를 점쳤다. 뿐만 아니라, TV나 대중 언론 매체들이 흥미 위주로 무당 사회를 방송하거나 또는 어떤 잘 알려진 특정 인물이 어떤 계기로 무병을 앓다가 무당이 되었다며 연예 프로 등에 소개한다. 그러나 무속 사회가 가진 분열의 속성을 안다면 이런류의 프로그램 제작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는 오직 ‘하나’의 신을 믿는다. 살아 계시고 참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6). 그런데 어찌하여 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갈갈이 분열해 있는가. 신앙도, 신학도, 교리도 모두 똑 같은데 분열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신앙적 윤리적 수준이 무속 집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로지 ‘하나’이다. 나와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자체가 곧 '이단'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이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는가. 마치 무당네처럼 300개 장로교단 부끄럽지 않은가? 아무런 힘도 없이 갈라져 있는 교단연합 단체가 부끄럽지 않나?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은 더러운 이(利)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딛 1:10,11).
    • 연지골
    • 연지골
    2021-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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