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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코로나19’를 품은 올해의 성탄절
    2021년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유난히도 ‘코로나19’로 인해 시달리고 타격을 받은 해였다. 그래서 우리가 보낸 2021년 한 해를 ‘코로나19의 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하거나 어색할 리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올 한 해는 코로나19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해였다. 앞서 두어 차례 백신을 접종했을 때만 해도 무언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후 델타 변이니 오미크론이니 하는 변종들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 지금은 너나없이 이른바 부스터샷이라 불리는 추가접종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이 3차접종이란 관문의 통과 없이는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맞을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고, ‘맞아야 할 의무’이기도 한 이 부스터샷 접종의 과정을 넘기기만 하면 모든 게 풀리리라고 기대하는 일 자체도 그렇게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다. 보건행정 당국에서는 앞으로 ‘하루 2만 명의 확진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우려를 이제 공공연히 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그만큼 사회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예고이기는 하겠지만, 이 일을 당하는 우리 시민들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각종의 통제가 시민들의 숨통을 그야말로 숨 막히게 조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럽 등의 어떤 나라 국민들처럼 “통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그런 나라들에서 확진자나 사망자들이 더욱 늘어나는 엄연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접종을 거부하거나 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시(거부)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통제를 가해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기울이는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두기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영업자들, 또는 소상공인들, 그리고 기타 열악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크면 클수록 좋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매우 열악한 형편에 놓여 있는 이 나라에 예수께서 오신 날 곧 성탄절을 우리는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날에는 성탄절이라고 하면 무조건 기분이 좋은 세계적 명절로 생각하고 즐겼던 것이 사실이지만 올해의 성탄절은 전혀 예년 같지 못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기 예수께서 오신 날이라고 하여 특히 아동들이 더 좋아하곤 하던 성탄절이었건만 올해는 전혀 그럴 분위기가 못 되는 것이다. 어린이집이니 유치원이니, 아니 초등학교마저도 코로나19의 여파로 대면의 모임이 통제되고 있으며, 또 상당한 수의 어린이 확진자들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매우 어두운 분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우리는 (아기)예수의 힘들었던 시절들을 되새겨 보면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어떤 힘을 오히려(역으로) 얻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은 분명히 기쁜 날이지만, 탄생 이후 예수께는 기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어둡고도 어려운 날들을 많이 맞이하신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줄을 알고 가족 모두가 애급으로 피난의 길을 떠난 것은 시련의 첫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찾다가 찾아낼 수 없게 되자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일이 발생한 것은 예수께는 또 다른 의미의 시련이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을 어린아이들이 자기(아기 예수) 때문에 무기력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만일 예수 자신이 생각(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였다고 한다면, 얼마나 애통한 일로 여기셨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때문에 예수께서 공생애 때에 어린이들과 관련된 다소 혹심한 말을 발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즉 “어린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게 나으니라.”와 같은, 상당히 무서운 말씀을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러니까, 아무 죄도 없는 어린이들을 마구 학살하다니 말이 되는가, 라고 과거의 헤롯과 같은 권력자의 만행을 은근히 비판하는 말씀을 겸해서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공생애 때 예수께서 받은 수난은 극에 이르렀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그 수난의 바퀴가 굴러가는 게 마감되었다. 예수의 제자인 우리는 주님의 그런 고난을 생각하며 애써 인내하면, 오늘의 ‘코로나19’의 고난도 결국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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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21-12-19
  • [사설] 한국교회 신학교 구조조정 시급하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샬롬나비)은 지난달 말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아 논평을 통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정신을 회복하여 이웃사랑의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물질만능주의에 근거한 번영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하고, 또한 교인 감소에 따른 신학교 구조조정을 통한 목회자 수급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샬롬나비는 "지난 10년 간 한국교회 교단들의 교인 수는 꾸준히 감소하여 왔다. 2020년 기준 전년보다 예장 합동측이 17만 명, 통합측이 11만 명, 고신이 1만 명, 감리교가 6만 명, 기성이 3만 명, 기장이 8천여 명 감소했다. 이처럼 교인 수가 감소했다면 목회자 수와 교회 수도 감소해야 하는데, 하지만 교인 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수와 교회 수는 오히려 늘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시대적 공신력의 하락과 현대 한국인들의 세속적 행복주의가 있다. 이에 맞추어 신학교의 목회자 수급도 조정해야 하는데, 아직도 시대의 요구에 대한 교단들의 적응이 따라가지 못해 해마다 신학교 졸업생들이 쏟아지고 있다. 종교개혁주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에 대한 신학교 구조조정과 목회자 수급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예장 합동과 통합, 두 교단에서만 해도 2020년 한 해 동안 줄어든 교인 수는 200명씩 모이는 교회로 치면 160개 교회가 줄어들었고, 100명 교인이라면 320개가 사라진 셈이다. 아주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샬롬나비의 이 지적은 한국교회 대교단들이 당장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급한 사안이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이 60개가 넘고, 각 군소교단에서 무인가로 운영하는 신학교까지 합하면 300여 개나 된다. 그리고 이들 신학교에서 연간 배출되는 예비 목회자 수는 줄잡아 7000여명에 이른다. 교인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목회자 수도 필요하지만, 교인 수가 줄어드는데 교회 수와 목회자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기성 교회가 그만큼 영세해 진다는 뜻이다. 이는 민족복음화와 선교정책에 오히려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군소교단에서는 목회자 양육을 위한 하나의 교단직영 신학교가 필요하지만, 대교단에서는 여러 개의 지방신학교를 운영하여 필요 이상의 신학생을 배출하고 있다. 때가 늦기 전에 구조조정을 통해 신학교 운영현황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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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12-18
  • [사설] 창간 30주년에 붙이는 감사의 인사
    본보는 1991년 11월 16일,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편집 목표로 창간된 지 이 달로 30주년을 맞았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마 5:37)는 사시로, 어느 교파나, 어느 교단의 도움 없이 순수한 교계연합지로 30년을 쉬지 않고 발행해 왔다. 이는 첫째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독자와 광고주들의 지원 덕분에 있다. 심지어 30년을 한 해도 빠짐 없이 후원한 광고주도 있다. 이 모두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문서선교로서 언론의 사명을 중요시 했다. 1897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만들었고, 같은 해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기독신문'을 발행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1946년 '기독교공보'가 창간되었다. 이후 이 기독교공보는 '기독공보'가 되었다. 이것은 모두 교단의 회보적(會報的) 성격을 가졌다. 또 부산 피난지에서 '한국기독신보'라는 새로운 신문이 나왔다. 이어 민주당 정권의 출범과 함께 '보도의 중립과 교회의 일치'를 사시로 새로 창간된 신문이 '크리스챤신문'이었다. 그리고 이어 '교회연합신보'가 나왔다. 이 시기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과 NAE의 소위 복음주의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큰 분열 속에 휘말려 있을 때이다. 이들이 초교파 신문의 효시를 이루었다. 지금의 교계신문 전성시대는 제6공화국의 언론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교단마다 교단지의 발행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연합지가 발간되었다. 본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 연합지들은 언론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으로 인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명멸했다. 더욱이 이 기간 IMF도 겪었고, 코로나19도 겪고 있다. 그래도 본보는 이제까지 살아남아 30주년을 맞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본보는 그동안 기사를 쓰 온 필자들과 광고로 후원해 온 광고주들을 초청해 조촐 하게나마 기념 감사예배라도 드리려 했으나, 아직 코로나가 가로 막고 있어 기념 행사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본보의 앞으로 또 한 번의 30년을 기대하면서 <교회연합신문>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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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12-18
  • [연지골] 소시오패스
    ◇정신병리학적 개념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적 성격장애 또는 품행장애 현상을 드러내는 사람을 '소시오패스'(Sociopath; 반사회적 성격장애)라고 부른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감정 따위는 상관없이, 거짓말을 일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도 이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평소에는 학교나 직장에서 평범해 보이고, 사교적으로 보이지만, 때때로 비정상적으로 잔인하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자신의 잘못이 발각되면, 즉각 잘못을 시인하고 임기응변적인 변명과 말재주로 반성하는 듯하지만, 곧바로 같은 행동을 일삼는다. 이런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전 인구의 약 4% 정도라고 한다. 그것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밖으로 드러내 사회적 영향을 크게 끼칠 수도 있고,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내년 3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이재명 씨를 향해 한 정신과 의사가 '소시오패스'의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후보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는 장기를 가졌지만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무자비하게 타인을 이용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정신병리학적 용어 중에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있다. 사이코패스는 자기 감정에 미숙하고 때때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충동적 감정을 드러내지만,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감정 조절에 뛰어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순한 양처럼 행동하며 미소를 지으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다가 어느 날 충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하며 반사회적 행동을 드러낸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이코패스는 생물학적, 유전적 원인에 의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소시오패스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유년 시절에 학대나 방임 등을 겪으면서 자신이 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면서도, 그 사람이 느끼는 기분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예사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어떤 종류의 자신의 실패도 인정하지 않는 '독재자'가 되고, 나라와 사회를 미증유의 혼란과 분열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같은 유형을 대표적 소시오패스로 진단한다. ◇또 전문가들은 고급두뇌집단이나 종교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소시오패스가 활동할 수 있고, 나아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과 같이 이런 유형의 인간들끼리 하나의 집단이 형성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교계에도 소위 '이단 감별사'들 중에 이런 인사들이 더러 있다. 그로 인해 교계의 분열을 자초했다. 저들은 자신들의 판단은 모두 옳고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멸시하는 오만을 가진다. 자신들이 가진 얄팍한 지식의 잣대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학적 신앙적 경험은 진리로 믿으면서, 다른 사람의 신앙적 체험은 무조건 이단으로 매도해 버린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의 분열은 이런 소시오패스의 기질을 가진 이단감별사들의 농간에 놀아난 교단지도자들의 미숙한 판단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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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기자수첩] 한교총은 깨지지 않는다
    ‘정회’ 자체가 아닌 ‘정회’로 번 시간을 주목해야 정관개정 보류 시 신 임원 추대에 심각한 모순 발생 ‘한교총, 5년 만에 깨지나?’ 지난 12월 2일 열린 한교총의 제5회 정기총회를 지켜본 한 교계언론 기사의 타이틀이다. 혼란과 대립, 고성 그리고 ‘정회’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그 날의 정기총회를 바라본 기자의 눈에 한교총의 모습은 분명 불안했고, 막연했다. 무법과 불법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절차와 원칙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은 분열에 익숙한 한국교회에 있어 결코 놀랍지도 않기에 오히려 씁쓸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 ‘한교총, 5년 만에 깨지나?’란 제목처럼 한교총의 분열을 염려하는 언론들의 의문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한교총은 깨지지 않는다. 그 과정이 수월할지, 복잡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교총은 결코 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가 이를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한 가지. 바로 ‘정회’다. 한창 분위기가 끓어오르던 정기총회를 한순간에 멈춰버린 고퇴 소리, 그 ‘정회’가 한교총을 살린 것이다. 이날 한교총의 정기총회는 여러모로 불안을 안고 있었다. 정관개정의 기본인 대차대조표가 제공되지 않았고, 사무총장 연임이 걸린 사무처 규정 개정에 있어 대대적인 반발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총대들 간의 충돌은 당연했다. 물론 그 안에는 정치적 이권과 한교총 내 보이지 않는 대립이 큰 이유를 차지했지만, 그렇다고 눈에 뻔히 보이는 논란의 여지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그 날의 혼란은 매우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진짜 문제는 치열한 혼란도, 대립도 아니었다. 의장의 재량에 따라 혼란은 수습하면 되고, 대립은 중재하면 그 뿐이지만, 당장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불법’의 가능성이었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가장 쟁점으로 대두된 문제는 바로 ‘정관개정’, 내용도 내용이지만, 기본적인 대차대조표조차 총대들에 제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그대로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분위기 상 정관개정을 보류할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사실 정관개정 보류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뒤에 따라올 임원인선으로 엄밀히 말하면 개정될 정관에 맞춰 조각된 ‘신 임원’이었다. 신 임원 추대는 정기총회의 가장 핵심인 만큼 당연히 이뤄질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되면 개정이 보류된 정관으로 뽑힌 신 임원이 추대되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당연히 이에 따른 불법시비는 피할 수 없다. 만약 별다른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이날 회의가 그대로 강행되어 신 임원 선출이 이뤄졌다면, 이를 둘러싼 총회 파행은 물론이고, 추후에는 비상대책위원회의 발족과 함께 총회무효 혹은 대표회장직무정지 등의 가처분까지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한국교회 연합단체들이 숱하게 반복해 온 분열의 수순과도 같다. 이날 의장을 맡았던 소강석 목사의 ‘정회’가 한교총을 살린 ‘신의 한 수’ 였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열의 수순을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정회’ 자체를 두고 “일방적인 독단”이라는 식의 비난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나무가 아닌 숲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본다면, ‘정회’ 자체의 정당성은 결코 아무런 시비거리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정회’를 통해 한교총이 ‘시간’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상위정관과 하위규정이 충돌하고, 정관개정 자체의 모순도 발견된 상황에 한교총에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강행보다는 이를 바로잡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정회’를 통해 확보된 시간동안 한교총은 내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해결에 있어 상당한 진척을 이룬 것으로 보이고 있다. 필자가 앞서 “한교총은 깨지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교총은 이제 오는 20일 속회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한국교회가 기대고 기대하는 한교총의 위엄과 신뢰를 보여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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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1-12-16
  • [기자수첩] 한기총의 화합을 가로막는 ‘윤리위원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임시대표회장 김현성 변호사)가 근래 임원회를 통해 단체 내부를 재정비하며, 재도약을 약속했지만, 이에 따른 잡음 역시 끊이지 않고 있어 우려가 일고 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논란의 핵심은 바로 윤리위원회다. 한기총 내 ‘검찰’을 자처하며, 이번 임원회에서 회원들에 대한 대규모 치리를 주도한 곳인데, 이들의 조사와 치리가 결코 공정치 않다는 일부 회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당시 임원회는 윤리위의 조사와 구형을 토대로 4인에 대한 제명과 3인의 자격정지 2년, 총무협 소집금지 2년 등을 최종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잡음이 일고, 회원들의 반발이 거센 것은 윤리위가 문제 삼은 사유들이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회원정지 2년이 선고된 박OO 목사에 대한 사유는 비상식을 넘어 매우 충격적일 지경이다. 앞서 박OO 목사는 한기총 전 대표회장이었던 전OO 목사로부터 한기총 운영비 횡령 등의 혐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윤리위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이 사건의 내용 자체는 한기총 운영비 횡령을 다룬 만큼 치리의 충분한 사유가 될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죄가 인정됐을 때의 경우다. 허나 윤리위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단순히 ‘피고소’ 자체를 문제 삼아 회원 자격 2년을 구형했고, 임원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총무협과 총무협 회장 김OO 목사는 한기총 명의를 불법 사용해 합동측에 서신을 발송했다는 혐의로 회원자격이 정지됐다. 총무협이 한기총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 한기총 명의로 합동측에 서신을 발송했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총무협 회원들의 반발이 매우 거세게 일고 있다. 이들은 먼저 한기총의 명의를 불법으로 사용했다는 혐의에 대해 공문의 주최가 ‘한기총’이 아닌 ‘한기총 총무협’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애초 이를 한기총 명의 도용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총무협은 출범 이후 그간 자체적인 공문을 수시로 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치리가 매우 객관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공문 내용 자체가 ‘한국교회 통합을 위한 합동교단의 한기총 복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오히려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벌을 줬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한국교회 통합은 한기총도 적극적으로 임했던 상황, 이런 윤리위 모순된 판단에 교계 언론들도 나서서 이를 비판하는 실정이다. 윤리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애초 윤리위가 객관적인 조사나 판단이 불가능한 집단이라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전임 대표회장 시절, 윤리위로부터 수차례나 제명당한 인물이 위원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임원회에서 윤리위원장은 자신이 전임 윤리위로부터 7차례나 제명 당했다는 사실을 수차례나 얘기했었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이날 제명당한 이들 중에는 전임 윤리위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기총은 지난 2년 가까이 임시 체제를 유지 중이다. 최근 가까스로 2차례의 임원회를 구성하며, 정상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비상적 조치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시급한 사안 외에 용인될 수 있는 안건은 없다. 누군가를 치리코자 한다면, 임시 체제가 아닌 정상 체제에서 이뤄져야 함이 옳다. 지금은 안으로는 한기총의 정상화, 밖으로는 한국교회의 통합을 위해 모든 전력을 기울어야 할 뿐, 시기에도 맞지 않는 이러한 치리는 밖에서 볼 때 그저 허울좋은 칼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한기총은 전임 대표회장 시절, 이미 숱한 내부 분쟁을 겪었다. 그 와중에 지금의 윤리위원장처럼 무려 7차례나 제명당하는 매우 불의한 일도 일어나고 말았다. 허나 그것이 불의한 일이었다면,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장담컨대 이대로 가면 또다시 칼부림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한기총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발목이 메이지 말아야 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2-04
  • [기자수첩] “한국교회, 제2의 펜데믹을 대비하라”
    일일 확진자 최대, 오미크론의 등장 ‘제2의 펜데믹’ 확실 ‘원 리더십’ ‘원 메시지’ 없는 한국교회, 위기 앞에 여전히 불안해 분위기가 다시 심상치 않다. ‘위드코로나’를 기념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현재,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증가 수치가 ‘위드코로나’ 전환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전 국민 백신 접종률이 80%에 달하며, 사실상의 집단면역이 이뤘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믿었던 해법이 무너진 매우 절망적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결정적으로 ‘델타’ 변이의 전파력에 500%에 달한다고 알려진 신종 변이 ‘오미크론’의 등장은 결코 상상키 싫은 제2의 펜데믹을 현실로 이끌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꿈꿔왔던 일상회복은 또다시 수면 위로 가라앉고 있다. 방역당국은 다시 최고수준의 방역강화를 검토하고 있다. 마땅한 해법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 일단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시 일상의 모든 것을 묶는 것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의 시선은 당연히 교회의 예배로 쏠린다. 그토록 원하고 갈구하던 ‘예배회복’이 고작 한 달 만에 다시 무너질 우려가 크다. 텅 비어진 예배당, 찬양을 부르지 못하는 찬양대, 결코 떠올리기 싫은 펜데믹의 기억은 한국교회에 있어 되돌아갈 수 없는 잔혹한 트라우마가 됐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예배의 자유를 빼앗길 수 없다. 목숨보다 귀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아픔을 기억하기에 이제 우리는 예배를 수호키 위한 전향적인 자세를 갖춰야 한다. 일단 지금의 상황 앞에 냉정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남 탓은 또다시 찾아온 위기를 타개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비가 필요하다. 한교총 대표회장 소강석 목사는 한 달 전 한국교회에 ‘예배 회복’에 대한 소식을 전하며, 동시에 제2펜데믹을 대비할 것을 강력히 주문한 바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이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결코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미리 대비해, 교회와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교회는 이미 펜데믹에 대한 경험이 있어, 이에 대한 대비책 역시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확실히 아는 만큼 제대로 대비한다면, 결코 펜데믹이 예배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허나 이러한 바램과 달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2년 전 코로나 초기와 여전히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된다”는 듯 폭풍전야의 고요함에 그저 평안히 안주하려는 안일함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일각에서는 여전히 상대를 구분치 않는 비판과 내부총질에만 열을 올리는 있다. 남에 대한 비난 속에서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입증하는 행태는 당장의 위기 앞에서도 이성적 판단을 불능케 할 뿐이다. 지난해 초 신천지 사태가 터질 당시, 소강석 목사 등의 일부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선제적 대처를 강조했었다. 당장 방역 체계를 완벽히 구축치 못하면, 언젠가 정부의 통제가 교회 안으로 뻗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리고 그 일은 현실이 되어, 지난 1년 넘게 한국교회의 예배를 탄압해 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는 현명함이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통해 선제적 대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당장 이번 한 주간이 앞으로의 교회 예배를 사수할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다시금 씁쓸해지는 것은 9부 능선에서 멈춰버린 한국교회의 대통합이다. 1차 펜데믹 당시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원 리더십’ ‘원 메시지’가 아직까지도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한국교회의 가장 큰 불안요소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무지’라고 했다. 제2의 펜데믹을 앞둔 지금, 한없이 무지한 이들에 대통합이 가로막혔다는 사실은 한국교회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통한이 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1-28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한국교회 진정으로 연합되기를’
    최근 교계에서는 세 개의 연합 단체들이 하나로 되기 위한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본래 세 개의 단체들은 하나였다. 1980년대 고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복음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하나의 단체였는데, 수년 전에 분열하여 지금의 세 개 단체가 된 것이다. 한국 교계를 보면, 분열하기는 쉬운데 연합하고 통합하기는 쉽지 않다. 교단들도 여러 개가 하나로 뭉쳤다가도 어떤 연유로 다시 분열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나로 뭉친다는 것이 상업광고(廣告)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힘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하신다. 그 하나 됨을 깨는 사람이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장로교 교단들이 분열하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교단의 숫자를 다 헤아리기조차 어렵게 나뉘어졌다. 교단들이 분열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실제적으로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교리나 신학적인 차이로 인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주로 헤게모니(Hegemonie) 싸움이었다고 본다. 누가 큰 세력을 갖느냐, 누가 교권을 차지하느냐의 지루한 분열이었다. 연합 단체도 이런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한기총이 구심점을 잃더니, 여러 개로 쪼개지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수년 전부터 연합 단체를 합동한다는 소문과, 로드맵도 나오는 듯 했지만, 실상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처녀·총각이 맞선보는 자리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했다. 마음은 있으나 결단이 없으니, 지지부진하여 지금까지 온 것이다. 이제라도 진정으로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지금까지는 분열하는 양태였지만, 이제는 복음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물론 연합하기 위해서는 선결과제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것은 인정하고, 먼저 정리해야 한다. 어찌 맞선 보는 자리에 목욕도 하지 않고 나오겠는가? 그리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성경에 보면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열렸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의 할례와 그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안디옥교회나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이나 욕심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거기에 충실하면 된다. 한국교회가 분열됨으로 여러 가지 손해된 일도 있었다. 일례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 정국에서 한국교회는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예배 문제에 있어서도 혼선을 빚었다. 어느 연합 단체는 비대면 예배를 주장하고, 다른 단체는 대면 예배를 강조하였다. 적어도 한국교회가 예배만큼은 한 목소리를 내야 했다. 그런데 분열되어 있다 보니, 목소리도 달랐다. 또 정부와의 문제나, 언론과의 문제, 그리고 사회 전반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복음적인 마음을 담아 같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하나만 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연합 정신에, 형제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빌립보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2~4)고 하신다. 연합 단체는 대외적인 일들도 효과적으로 잘해야 되지만,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것도 중요하다. 여러 개의 연합 단체를 하나로 묶는 물리적인 것만큼 중요한 것이, 형제에 대한 격려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라고 하신다. 분열하고 나뉘는 과정에는 반드시 상처와 아픔이 있다. 이것이 먼저 치유되면 좋겠다. 격려하고 섬기는 마음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지금 하나됨의 중심에 서 있는 분들로부터 이런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이제는 분열이 아닌, 하나됨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세워갔으면 좋겠다. 하나된 믿음을 통하여 주님 나라를 확장하고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회 속에서 본과 덕이 됨으로, 복음의 지경을 더욱 넓혀가는 소망스런 일들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한국교회 진정으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자!
    • 연지골
    • 토요시평
    2021-11-21
  • [사설] 한국기독교의 우파와 좌파
    지금 우리사회는 정치적으로 크게 ‘극우파 세력’과 ‘보수 세력’, ‘종북좌파 세력’과 ‘진보 세력’이라는 네 가지 정치적 색깔을 가진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우파와 보수를 한데 묶어 ‘우파’라 부르고, 종북좌파와 진보를 한데 묶어 ‘좌파’라 부른다. 그러나 극우와 보수, 또는 종북과 진보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파를 ‘보수 세력’이라 하고, 좌파를 ‘진보 세력’이라고 한다. 정당도 좌파는 오랜 집권을 해온 보수 세력을 '타락한 극우파'로 보고 척결대상으로 삼고, 또 우파는 현 집권 여당인 진보 세력을 '종북좌파'로 보고 척결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기독교는 해방 후 정치권의 좌우(左右) 논쟁과 북한지역의 공산화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한 좌파의 기독교에 대한 악랄한 적대감을 체험했다. 공산주의자들인 좌파는 기독교를 반혁명집단으로 보고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혁명인사로 몰아 처형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투옥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좌파 공산주의운동을 모두 반기독교운동으로 본다. 따라서 자연히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우파 자본주의를 친기독교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사회는 우파는 극우파와 보수파로 나누이고, 좌파는 종북좌파와 진보파로 나누인다. 그런데 한국기독교 안에는 소수이지만, 극우파도 있고, 종북좌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건전한 보수파거나 건강한 진보파이다. 이 둘이 두 바퀴처럼 교회와 사회를 이끌고 있다. 우리사회는 종교적으로 ‘동불서기(東佛西基)’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동쪽은 대체로 보수적인 불교가, 서쪽은 대체로 진보적인 기독교가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동쪽 영남지역은 보수 세력이 강하고, 서쪽 호남지역은 진보 세력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극우파들의 선동적 주장처럼 한국사회가 오래지 않아 종북좌파에 휘둘릴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호남지역에 교회가 버티고 있는 한 그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기독교는 사회변화를 원하는 진보는 될지언정, 교회를 파괴하려는 종북좌파는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연지골
    • 사설
    2021-11-14
  • [사설] 닮은 꼴: 100년전 중국의 ‘비기독교운동’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2년, 중국에서는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비기독교운동’(非基督敎運動)이란 것이다. 그 뜻은 기독교가 하는 짓은 다 틀렸고, 기독교는 못된 짓을 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 운동은 먼저 베이징대학 학생들과 교수들이 시작했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치적 힘을 실은 것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좌파들이었다. 가장 열심을 낸 조직은 ‘공청단’ (共靑團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인 한 명 늘어나면, 중국인이 한 명 줄어든다”며, 중국에서 기독교가 계속 전파되면 국가도 망하고 민족도 망한다고 선동했다. 그래서 국민당 정부가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학교에서 기독교를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922년부터 소위 ‘교육권의 환수’라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가 설립한 모든 미션스쿨에서 교회를 추방하고 교육부가 직접 관할토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에 관한 필수 수업을 개설할 수 없고, 선생과 학생들에게 예배 참석 의무를 폐지했다. 그리고 이어 소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철저하게 기독교를 추방하였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종교교육으로서 선택과목이나 과외활동으로서만 기독교를 인정했다. 학교에서 교회를 축출하는 이 교육권 환수운동은 1927년 5년만에 완수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비기독교운동’과 ‘교육권 환수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반기독교세력이 모두 기독교 학교 출신들이었다. 당시 유명한 기독교 학교들이 앞장서 정부가 학교를 환수하고 서양선교사들을 축출하라고 촉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는 아직 중국이 공산화 되기 전이었다. ◇딱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미션스쿨이 바로 이 같은 위기에 처했다. 좌파들은 기독교가 학교교육에 개입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학생들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미션스쿨의 본 설립 목적인 구성원의 예배의 참석과 성경공부를 거부한다. 그로 인해 예배와 성경공부가 사라진 미션스쿨은 전교조가 장악한 지 오래이다. 좌파정부는 이 마저도 숨통을 끊으려는 ‘사립학교법’을 순차적으로 개정해 가고 있다.
    • 연지골
    • 사설
    202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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