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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6
    성경에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라고 지칭되는 구절이 많다. 이것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사용되는 입양 용어이다.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자식이 없는 노부부는 노경에 자기들을 공양해주고, 자신들의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입양한다. 입양은 노예들 가운데 자기 마음에 드는 자를 선택한다. 당사자는 입양문서를 작성하고, 왕이나 그 대리인 앞에서 입양문서에 서명하는 입양 계약을 한다. 입양은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계약이기 때문에 이러한 법적인 절차를 밟은 것이다(하무라비 법 185:34-35; 186:41). 입양계약서에는 입양 관계가 이루어짐으로 당사자가 해야 할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입양 관계가 깨어졌을 경우에 관한 규정을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양부모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너는 내 아들이다.”고 말하고, 입양아는 양아버지를 향하여 “당신은 내 아버지입니다.”라고 선언한다. 입양아는 이제 신분이 달라진다. 그의 양 아버지는 그의 신분을 노예에서 아들로 바꾸어 주고, 그의 이름을 그의 가계의 이름을 따라 부르게 한다. 따라서 입양아는 이제 새로운 아비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반면 양아들은 그의 새 부모의 말년에 그를 정성껏 공양하고, 그의 양부모가 죽으면 그들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대신 그의 양부모의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다. 따라서 양자는 양부모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형편이 바뀌어 입양관계가 철회될 때가 있다. 그 때는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고 선언하면 양아들도 “당신은 제 아들이 아닙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비는 그의 귀를 뚫어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그에게 주었던 재산을 몰수하고, 집 밖으로 내보낸다.성경에서는 이러한 입양 제도를 차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묘사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대하 7:14)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입양 풍속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 의 이름으로 불리다”라는 말은 입양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관용어이다. 히브리어구를 직역하면 “그들 위의 (내)이름으로 불리우는 (내 백성), over whom my name is called) 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둔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신 28:10; 대하 7:14; 렘 14:9; 15:6) 이외에 하나님의 언역궤 (삼하 6:2; 대상 13:6)와 성전(렘 7:11,14,30; 34:15), 예루살렘 성읍 (단 9:18)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성읍이나 성전에 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신이 그곳에 계시며, 그곳에서 말씀하시며, 그곳에서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그의 이름을 두었다는 것은 입양의 의미이다.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로 삼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며, 바로에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출 4:22)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 4:23) 명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은 후 이들을 “유업의 백성”이라고 부르신다(신 4:20).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유업의 땅”(개역: 기업의 땅)이라고 칭한다.히브리어로 “암 나할라”라는 말은 “유산”(inheritance)을 받을 백성이라는 뜻이다. 유산은 아들이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아들로 삼고,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산의 땅으로 주신 것이다.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백성 위에) 올려놓으셨으니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짊어지고 다니는 백성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짊어진 자(the bearer of YHWH’s name)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이름이 함께 간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내 부모가 주신 “손”이라는 성이 함께 간다. 나라는 존재와 내 성의 관계는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여호와와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관계이다.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은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계명의 정신이다(출 20:7).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자는 그를 반드시 죽이도록 명하고 있다(레 20:3; 24:16). 아울러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할 경우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을 빼앗아 양자의 관계를 끊으실 것이다.“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여 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신 28:58-64).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여호와와의 부자 관계가 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다(갈 4:4-5; 고전 6:9,10; 15:50; 갈 5:21; 엡 5:5; 계 2:17; 9:12-15). 우리는 이 땅에서 그의 이름을 짊어진 아들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10-1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5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처음 전쟁을 벌인 곳이 여리고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전쟁을 위하여 매일 언약궤를 멘 제사장의 뒤를 따라 성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엿새 동안 돌다가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무엇이라고 크게 외쳤는지 알 수는 없다.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와 싸울 때에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삿 7:18), 혹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삿 7:20)라고 외쳤다. 아마도 비슷하게 외쳤을 것이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불고, 큰 소리를 외쳤을 때 과연 여리고 성읍은 무너지고 말았다.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 주위를 돈 까닭은 무엇인가? 설교가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여리고 성읍 사람들을 향한 일종의 심리 작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바로 군대를 무찌르고 여리고를 향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녹아있는 상태였다. 이들이 성을 말없이 돈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는 작전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해석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를 함락하기 위하여 공격 경사로를 만든다든지 직접 칼과 창을 들고 성을 돌격하여 여리고 사람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무너진 성읍에 들어가 힘없이 주저앉은 여리고 사람들과 그들의 재산을 진멸하는 일만 했다.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여리고 전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고대 근동 세계의 전쟁이 많은 경우 “성전”(Holy War)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성전”은 신이 자기를 섬기는 민족의 전쟁에 개입하여 자기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전쟁을 말한다. 오늘날 무슬림 교도들도 성전, 곧 “지하드”라는 말을 쓰는 데, 이것은 신도들이 자기의 신, 알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싸우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의 역사에 침투하여 사람을 위하여 싸운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신화로 취급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셔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고,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할 때 마다 여호와의 뜻을 묻고, 여호와의 지시를 받아 출전한다. 사실상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야전 총사령관 역할을 하신다. 이 때 여호와께서는 “올라가라 ...를 네 손에 붙였느니라”고 말씀을 하신다. 개역성경에는 “네 손에 붙였다.”고 번역하고 있으나 여기에 사용 되는 히브리어 동사 “나탄”()은 “주다”(to give)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성전을 신화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성전이라는 개념과 구별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대 근동 세계에서 지상의 전쟁이란 천상의 전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천상에서 신들이 싸우기 때문에 지상에서 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끼리 전쟁을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천상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신의 백성이 지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근동 세계의 전쟁이란 신의 주도권 아래서 이루어지며, 신과 그의 백성이 함께 참여하는 입체적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민들은 전쟁에 나갈 때 그들이 믿는 신상을 앞세우고 나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신상이 없었다. 따라서 신상을 대신할 수 있는 “언약궤”를 메고 나갔다. 언약궤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도는 것은 성전(holy war)의 선포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여리고 작전이 여호와의 전쟁, 곧 여호와께서 싸우시는 전쟁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퍼부어 이집트의 신들을 심판하시고, 이집트의 군대를 홍해에서 수장시키셨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60만명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출 12:51)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시혼과 옥을 물리치게 도우셨으며, 마른 땅을 밟고 요단을 건너게 하셨다. 이런 권능의 하나님이 이제 여리고를 침공하고자 한다고 들었을 때 여리고 사람들은 간담이 녹았을 것이다.여리고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는 이스라엘이 여리고 작전을 벌이기 전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칼을 빼어들고 금방이라도 전쟁을 시작할 태세이다. 그의 정체를 묻는 여호수아에게 그는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고 대답한다(수 5:13-15). 여리고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고자하는 이 상황에서 여호와의 군사령관의 출현은 분명 여호와의 군대가 이스라엘과 함께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여 그들과 함께 싸우실 것을 다짐하고 약속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돌았던 것은 단순한 심리전이라기 보다는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대항하여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용감하게 전쟁에 임하도록 그의 백성을 단련시키는 일종의 믿음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리고 작전은 결코 이스라엘이 싸워서 승리를 쟁취한 전쟁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승리한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다만 여호와의 전쟁에서 뒤처리를 담당한 여호와의 군대요 종들이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9-2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4
    창세기 12:1-3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로 아브라함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되고, 그의 이름을 크게 하며, 그를 통하여 세상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 그의 고향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을 향하여 갔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 된 것이다. 이 말씀도 중요하지만 창세기 18:17-19 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그의 자식과 그 가족들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려 하는것이다.”(창 18:17-19)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악행의 살피기 위하여 오신 김에 먼저 아브라함에게 들르셨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신 아들을 내년 이맘 때에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의 장막을 떠나시며 아브라함을 향하여 입을 여시며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가깝게 생각하고 신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호와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감출지라도 아브라함에게 만은 자기의 비밀을 감출 수 없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이어서 여호와께서는 이미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주셨던 약속, 아브라함이 크고 강한 민족을 이루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꼭 이행하실 것을 재차 다짐하고 아브라함에게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꼐서는 그가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하고 그가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을 설명하시는데 히브리어로는 “내가 그를 아는 것은”()이라고 쓰고 있다. “야다”라는 말의 기본 의미 (primary meaning)은 “알다”(to know)이다. 그러나 이 어휘는 관계어로 남녀의 성관계를 기술하는 데 많이 사용하고 있는 데, 이 경우는 “동침하다”(to have a sexual intercourse) 라고 번역하고 있다(창 4:1).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인격적인 부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관계어는 단지 부부와 관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빗대어 은유로도 많이 사용학 있는 데 이때는 선택용어(election term)나 언약 용어(covenant term)로 쓰이는 경우이다(암 3:2). 본문에서는 이를 선택용어로 많은 역본들은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본래의 의미는 “내가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도 번역인 선택 용어로 번역하였지만 의미상으로는 관계어로 “내가 그를 알고 있는 것은” 혹은 “내가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등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잘 어울린다.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함으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히브리어 성경은 “그의 가족들에게”라기 보다는 그의 “후손들에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여호와 도”란 말은 “여호와의 길”(the way of the Lord) 라는 말인데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도라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더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호와의 도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하여 발견되고, 구성된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도리나 소신, 혹은 철학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호와의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이나 후손들에게 여호와의도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의라는 히브리어 “체댁”()이라는 말은 보통 “의” 혹은 “공의”(righteousness)로 번역하고 있는 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졌을 때 의롭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justice)라고 번역하는 “미쉬팟”()이라는 히브리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옳고 바른 원리에 근거하여 나누는 바른 관계를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의와 정의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관계를 갖는 것은 그의 자식들과 후손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롤 가르치고 행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게 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것이다. 관계는 신구약 성경의 맥을 잇는 중요한 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의 교재의 대상으로 창조하시고,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 관계를 끊고 하나님을 떠나버렸다. 스스로 반역과 저주와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관계를 살리고 회복하고자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 15:4)고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 17:22)라고 기도하신다. 이 유언적인 명령과 기도를 보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신비하고 영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관계를 갖고 그를 선택하신 이유, 말하자면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도 바로 이 관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며 추구해야 할 점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성령 안에서 나누는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연합, 곧 그리스도와 함꼐 하는 삶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부터 관계와 연합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9-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3
    성경에서 남녀의 성관계를 표현하는 어휘로 “야다”라는 말이 있다. “야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알다”(to know)이다. 창세기 4:1에는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했다. 여기서 “동침하다”고 번역하는 히브리어는 “야다”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를 아니,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가 된다. 남편이 아내를 알았더니 아내가 임신했다는 말은 분명 남편과 아내가 부부 관계를 가졌다는 말이다. 우리 한국말에도 “그 여자가 그 남자를 보아서 그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표현이 있다. “알다” “보았다”라는 말이 다 남녀 사이의 성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를 번역하는 데 있어서 외국의 역본들은 문자적으로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Adam knew Eve. ESV, KJV, NKJV, RSV)라고 번역하는가 하면 “그 사람이 그의 아내 하와와 더불어 관계를 가졌다.”(The man had relations with his wife Eve. NAS), 혹은 “그 사람이 그의 아내 하와와 더불어 결혼 관계를 가졌다”(The man had marital relations with his wife Eve. NET)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 한국말도 이 경우 “동침했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야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부부관계를 기술하는 데 쓰는 말이라면, 문자 그대로 우리 한국말로 “동침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카브”이다. 이 말은 잠을 자기 위해서 “눕다”라는 말이나 롯과 그의 딸들의 관계 (창 19:32, 33), 엘리의 아들들과 성막의 여자들의 관계(삼상 2:22), 암논과 다말(삼하 13:14)의 관계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혼외의 정사나 성폭행 등 비합법적이고 비윤리적인 성관계를 기술하는 말로 “함께 눕다”(to lay with), 혹은 “성교하다”(to have sexual intercourse with)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완곡어법으로“동침하다”라고 사용하는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우리 인간들 사이에 가장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야다”라는 말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신학적인 선택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나는 오직 너희만 알았다.그러므로 너희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내가 너희를 벌할 것이다.” (아모스 3:2)여호와께서는 이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이스라엘만 알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선택적이고 독점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땅위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만을 사랑하시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죄를 범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선택하고 사랑만을 해주었는데 그를 버렸다고 해서 그를 저주하고 벌을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관계에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계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려면 서로 계약을 맺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시내 산 언약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 예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렘 31:32). 따라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부부 관계가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부부 간에 사용할 수 있는 “야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부부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에 선지서에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신을 예배하고 섬긴 이스라엘을 향하여 간음한 백성, 혹은 행음한 백성이라고 부르고, 그에 상응하는 저주와 벌로 이스라엘을 바벨로니아에 끌려가게 한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정숙하지 못한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집에서 내쫓는 당대의 이혼 풍습에 비유한 것이다.호세아는 “여호와를 힘써 알자”(6:3)고 권면한다. 여호와와 부부처럼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를 갖자는 의미이다. 시편 1:6에는 의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인정하다”는 말도 “야다”를 사용하고 있다. 의인은 여호와께서 아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인은 여호와와 부부와 같은 깊은 관계성을 갖는 자라는 것이다.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의미를 가진 헬라어는 “기노스코”(γιν、ωσκω)이다. 마태복음 1:25에서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 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구절이나 누가복음 1:34에서 마리아가 천사에게 자기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도 다같이 “기노스코”(γιν、ωσκω)를 사용하고 있다. 구약이나 신약의 세계에서 “안다”는 말은 성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나 인간 세계의 가장 밀접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기술하는 관계어이다.신약의 산상 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했다고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외치신다. 이때 “알다”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개념을 가진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ωσκω)라는 말을 쓴다. 큰 일을 많이 해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가장 긴밀하고 고상하며 신비한 관계성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 영생이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한 17:3).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9-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32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정통적인 마소라 사본이라 할지라도 본문이 손상되고, 필사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필사 과정 가운데 오류가 있어서 원 저자가 의도하지 않는 엉뚱한 번역이나 해석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사무엘상 13:1에 보면 개역 성경에서는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년에”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마소라 사본에는 “사울이 한 살에 그의 왕이 되었고, 이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사울이 한 살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필사자의 오류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ESV는 “사울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는 그가... 살이었으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역자는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를 마소라 본문 상으로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필사자의 오류로 간주하고 그냥 빈칸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는 어쩌면 정직한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의 독자들은 그래도 확실한 나이를 알기를 원한다. 따라서 역본마다 각각 다른 숫자를 제의 한다. 본문에 대한 대표적인 다른 역본들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KJV “사울은 1년을 통치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2년 통치하였을 때에...”ESV “사울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는 그가... 살이었으며... oo 이년 동안(... and two years)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RSV, NAB)LUT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살이었고,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 다.”NASV “사울이 통치를 시작하였을 때 40세였고, 그는 3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NET “사울이 통치를 시작하였을 때에 30세였고,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렸다.”NIV “사울을 30세에 왕이 되었으며, 42년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대 역본 가운데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를 대부분의 칠십인역은 아예 13:1이 없거나 일부 칠십인역(LXX)은 30세, 그리고 시리아어 페쉬타 역본(Syr)은 21세로 번역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사무엘상 13:1은 고대로부터 본문에 대한 끊임없고 다양한 의견 제시와 토론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킹 제임스 역본(KJV)은 마소라 사본의 정통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필사자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보수적인 ESV, RSV, 그리고 NAB는 마소라 사본의 파손이나 오류를 인정하고, 마소라 전통에 따라 이를 수정하거나 임의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 역본(LUT)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공란으로 두고 다음 문장 통치 기간은 2년이라고 마소라 사본을 따르고 있다. 문제는 NASV는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를 40, NET는 42세, NIV는 30세로 번역하고 있는 점이다. NIV의 30세는 칠십인역 (LXX)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NASV과 개역한글판이 40세로 번역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엉뚱하다. 그리고 그의 통치기간에 대하여 대부분 2년으로 언급된 것은 13장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 때문이지만, 40년을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사도행전 13:21에 “그 뒤에 그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 동안 주시다가”라는 구절에 맞추어 사울의 재위 기간을 40년으로 마소라 본문을 수정하여 번역한 것 같다. 그러나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한글 표준 새번역 1993년 판을 보면, 앞부분은 칠십인 역을 따라 사울은 삼십세에 왕이 되었다고 번역하고, 다음 문장은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마흔두 해가 되었을 때에”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상 13장의 사건은 사울이 72세가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는 삼상 13장 본문의 상황과 맞지 않는 번역이다.우리는 여기서 어느 번역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최초의 원본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 교회의 오랜 전통은 사울이 40세에 왕이 되었고, 그가 다스린 지 2년에 삼상 13장의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의 역자들이 이와 다른 자기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위에서 열거한 역본들의 번역을 넘어선 새로운 것이 될 수도 없고, 또한 그러한 주장이 옳은지 확인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평신도들의 성경에 대한 혼란과 불신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개역성경의 번역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이와같이 전승의 과정 사운데 본문이 훼손되었거나 서기관들의 필사 과정 가운데 비의도적인 실수로 말미암은 오류가 있다. 이러한 오류를 교정하고 가능하면 원문에 가까운 독법(Reading)을 찾기 위한 본문 비평작업은 불가피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성경 번역은 역자의 신학과 신앙, 그의 활동 배경과 히브리어나 헬라어 본문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나 국어의 숙련도에 따라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번역자의 신학과 능력이 번역을 Control하고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성경 독자들은 여러 필사본과 번역본을 비교 대조하여 읽을 수 있다면 원래의 본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사본을 읽을 수 없는 경우 다양한 번역본이라도 비교하여 읽을 수 있다면 원본의 의미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번역본은 많을수록 좋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9-0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1
    제사장 엘리와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비리가 극에 다달아 이들을 방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이미 무명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고하신 대로 제사장 엘리 가문을 숙청하기 시작하셨다. 블레셋과 전쟁을 붙여 이스라엘이 대패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해 싸워주시기를 바라고 언약궤를 메고 전장에 나갔다. 이때에 언약궤를 맨 사람들은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다. 그러나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패로 끝나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고, 여호와의 언약궤마저 빼앗겼다. 이 소식을 들은 제사장 엘리는 놀라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그의 며느리 는 해산하던 중 여호와의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낳은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고, 죽었다. “이가봇”이라는 말은 문자대로 “영광이 없다”는 뜻인데 비느하스의 아내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의미로 그렇게 붙였다는 것이다. 고대 근동 세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천상에서 신들이 싸우기 때문에, 지상에서 그 신을 섬기는 백성들도 싸운다. 그래서 전쟁에 나갈 때는 신상을 앞세우고 나갔다. 이스라엘에는 신상이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를 메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패배하였다. 여호와가 패배한 것이다. 여호와가 블레셋 사람들의 신, 다곤에게 패배하여 그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여호와의 궤는 다곤 신당으로 옮겨져 다곤 앞에 놓여졌다.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신, 다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심판을 시작하셨다. 다곤이 엎드려지고, 결국은 다곤 신상의 목과 팔다리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아스돗으로부터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가드, 에그론 등의 성읍에 악성 종기가 퍼져 황폐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의 궤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는 안되겠다.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다.”고 말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당하고 있는 재앙의 원인을 나름대로 추측하고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금으로 각종 종기와 쥐의 형상을 만들어 속전으로 준비하고, 새로운 수레를 만들어 여호와의 궤를 싣고, 아직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송아지가 딸린 암소 두 마리가 그것을 끌도록 하여 벧세메스로 보냈다. 물론 이 때에 송아지들은 어미로부터 떼어 놓았다.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만일에 이 암소들이 벳세메스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자기들에게 내린 모든 재앙이 여호와께서 내린 것이라고 믿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에게 내린 재앙은 우연한 것으로 돌리기로 했다. 젖 먹는 송아지가 딸린 어미 소가 아직 한 번도 메어보지 못한 멍에를 매고 순순히 길을 따라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도박임에 틀림없다.결과는 뜻밖에도 이 암소들은 “벳세메스로 향하여 똑바로 갔으니 큰 길을 따라 갔으며, 울음소리를 내면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벗어나지 않았고, 블레셋의 군주들은 벳세베스 경계까지 그들의 뒤를 따라 갔다.”(삼상 6:12). 그리고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이 그것을 보고 그 날 에그론으로 돌아갔다.”(삼상 6:16).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임한 모든 재앙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자기에게 임한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한편 벳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돌아오자 이를 맞아 기뻐하였고, 사람들은 이 소들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한 후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고 생각하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그의 아들 이름을 “이갓봇”이라고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블레셋 진영에서 그들의 신, 다곤과 싸우시고, 블레셋 백성들과 싸워 승리하시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는 개선장군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짐승의 발걸음마저 제어하시어 이 모든 일을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일임을 스스로 증거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여호와, 말 못하는 짐승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더 나아가서 엘리의 가문을 심판하시고 언약궤를 엘리의 집에서 궁극저으로 다윗 성으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을 볼 수 있다.그런데 일부의 떠돌이 설교자들은 “벳세메스 암소”라는 제목으로 이 본문을 설교하며 암소들을 언약궤를 멘 제사장에 비유하며, 우리 제사장들은 이 암소들처럼 좌로나 우로 치지 말고, 심지어 자식들이 울어대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마지막에는 자신을 불살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한다. 이런 식의 설교는 얼핏 수긍이 가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지만 이것이 영해(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다. 영해란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숨은 뜻(hidden meaing)이나 깊은 뜻(deeper meaning)을 찾는 것이다. 오리겐이후 중세시대까지 이러한 성경 해석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는 이러한 영해를 마귀의 장난이라고 정죄했다. 성경 해석은 기본적으로 성경저자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찾고, 그것을 설교해야 한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설교해야지 벳세메스의 암소를 설교해서는 안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8-1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0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과 골리앗이 맞붙어 서로를 저주하며 수장대결을 벌리는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개역성경은 사무엘상 17:4에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히브리어나 한국어 의미상 모두 적절한 번역이라 말할 수 없다. “이쉬-합베나임"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두 (편대) 사이의 사람”(the man between the two)이다. 두 대적들이 전쟁하기 위하여 마주 대하고 있는 전열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각 자기 진영의 대표자이며, 최고위의 장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자기 진영이나 나라를 대표하여 상대편의 장수와 결투를 벌여 상대방을 죽임으로 전쟁을 끝내는 단판 승부사들이다. 이러한 수장대결(首將對決)을 영어로는 “단판 전투”(a single battle)라고 하며 이러한 전투는 고대 셈족 사회에서는 드물지만 블레셋에서는 자주 있었던 일인 것 같다(Cf. R. de Vaux, “Single Combat in the Old Testament,” in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 trans. D. McHugh (Garden City: Doubleday, 1971), 122~35, who cites numerous examples from the ancient world in which such contests took place.). 따라서 개역성경의 “싸움을 돋우는자”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표준새번역”이나 “바른성경”의 “장수”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서양 역본은 거의 “전사” 혹은 “우승자”라는 의미를 가진 “Champion”이라고 번역하며, “대표자”(Representative)라고 번역하는 곳도 있다. 문제는 이 수장대결에서 누가 골리앗을 죽였느냐는 것이 문제이다. 삼상 17장에 보면 말할 것도 없이 다윗이 무릿매로 돌을 던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 쓰러뜨리고, 다윗은 칼이 없으므로 쓰러진 골리앗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의 머리를 자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삼상 17:49-51). 골리앗이 쓰러지자 블렛사람들은 다 도망하였고, 다윗은 이스라엘을 구한 전쟁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사무엘하 21:19에 히브리어 성경은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쳐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니고 엘하난이 죽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두 사람으로 기록된 것은 분명 문제이다. 따라서 ESV, RSV, NASB, TNK 등은 마소라 사본을 그대로 읽고 있지만, 다른 역본들은 이 불일치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골리앗” 대신에 “골리앗의 아우”(KJV, NET, NIV)라고 고쳐 읽고, 심지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개역성경, 바른성경)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한글 성경은 역대상 20:5 “다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다.”는 구절대로 “라흐미”라는 이름까지 덧붙인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골리앗을 죽인 자가 다윗인지 아니면 엘하난인지? 다윗과 엘하난이 같은 사람인지? 혹은 골리앗이 둘인지? 혹은 엘하난이 죽인자가 골리앗인지?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인지? 혼란스럽다. 이 점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러한 사본상의 불일치는 서기관들의 무의식적인 오류에 기인한 것으로 여기고, 성경 안의 다른 기록이나, 다른 사본, 혹은 역본 등을 비교 대조하여 가능한한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재구성하고, 뜻이 통하는 번역을 하려고 노력한다.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 사무엘서에 서기관들의 오류로 인한 본문의 손상이 가장 많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사무엘상 17장의 기록대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21:19과 역대상 20:5의 본문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먼저 역대상 본문은 사무엘상 본문의 “베들레헴 사람, 엘하난이 가드사람 골리앗을 죽였다”를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역대서는 사무엘서에 비추어 볼 때, “라흐미”(lakhmiy) 앞의 목적어를 인도하는 전치사 “엣”(et, ..을)은 분명 “벳”(bet, 집)을 대치한 것으로 사무엘서대로 “엣-라흐미”(et-lakhmiy, 라흐미를)는 “벳 할라흐미”(bet hallakhmiy, 베들레헴 사람)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무엘서는 “라흐미”라는 이름이 없다. 또한 사무엘서는 “아우”라는 의미의 “아흐”(akh)를 목적어를 인도하는 전치사 “엣”(et)으로 읽음으로 마치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를 죽인 것이 아니라 골리앗을 죽인 것처럼 본문이 수정되었다. 다시 정리하면 사무엘서나 역대서나 다같이 사무엘상 17장의 이야기에 비추어 볼 때 그 본문이 손상된 것이다. 역대서는 “베들레헴 사람”을 “엘하난의 아우 라흐미”로 고쳐 읽고, 사무엘서는 아우를 의미하는 “아흐”를 목적어를 인도하는 “엣”으로 읽음으로 마치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인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사무엘서하 21:19은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를 쳐죽였는데...”라고 읽고, 역대하 20:5은 “베들레헴 사람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를 죽였는데...”라고 읽어야 옳다. 그렇다면 골리앗은 다윗이 죽였고, 엘하난은 골리앗의 아우를 죽인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일점일획이라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전승과정 가운데 서기관들의 무의식적인 실수나 무지로 성경 본문이 손상되고 잘못 번역되어진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성경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성경의 필사작업은 아무리 정확하게 할려고 노력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에 완벽한 역본도 없다. 어느 역본이 원문의 의미에 가깝게, 그리고 읽기 쉽게 잘 번역되었는지 정도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역본을 대조해가며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8-1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9
    성경에 보면 “기업의 백성”이라는 말과 “소유의 백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물론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께서 주로 쓰시는 말씀이다. 얼핏보면 이 말은 다같이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서로 같은 의미로 교환 사용할 수 있는 말 같다. 그러나 이 어귀가 사용되는 배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가려서 이해하고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기업의 백성”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암 나할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나할라”라는 말은 “세습적인 재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상속받은 재산,”(inheritance, hereditary property, or heritage)을 일컫는 말이다. 부모로 물려받은 것은 고대 세계의 경우 거의 땅이다. 그러나 가업이나 집과 같은 건물일 수도 있다. 따라서 “암 나할라”는 문자적으로 “상속의 백성” 혹은 “유산의 백성”이다. 기업이라는 말은 한자로 “基業”이라고 쓴다. 땅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요사이 많이 사용하는 “企業”이라는 말과 혼돈을 많이 가져오기 때문에 “유업”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다. 보통 우리가 “상속자”라고 하면 집안이나 가문의 대를 이어가며,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자식, 곧 아들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가리켜 “기업의 백성” 혹은 “유업”의 백성이라고 부른다면 그 의미가 무엇인가?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오 주인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시편 24:1은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과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것들이 다 여호와의 것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출 9:29, 19:5; 레 25:23; 신 10:14; 렘 25). 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이집트 왕 바로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말씀하신다.“너는 바로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맏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을 보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였으나, 네 가 보내기를 거절하니, 보아라. 내가 네 아들, 네 맏아들을 죽일 것이다.”(출 4:22-23)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내 맏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맏아들은 가문을 이어갈 상속자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상속자가 없는 사람은 노예들 가운데 사람을 택하여 그의 양자로 삼고 왕이나 관원들 앞에서 입양계약을 맺고 입양문서를 작성했다. 양자는 그의 양부모의 노경에 공양자 노릇을 하고, 대신 그의 양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는다. 상속자가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땅의 주인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가운데 두어, 수많은 나라들 중에 가장 훌륭한 유업인 아름다운 땅을 네게 주겠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너희는 나를 내 아버지라고 부르며 내게서 떠나지 마라.’ 하였다. (렘 3:19)이 말씀은 “너를 자녀들 가운데 둔다”는 표현은 고대 바벨론의 입양에 관한 관용구적 표현이다 (Sohn, The Divine Election of Israel, 65,7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수많은 나라들 중에서 그의 아들로 삼고, 가장 훌륭하고 값진 땅을 그에게 유업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업”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할라”를 쓰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로 삼고, 그에게 아름답고, 값진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유업의 백성,”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유업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그러나 “소유의 백성”은 이와는 다른 영역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히브리어 “세굴라”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적인 재산” (personal property)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후 언약을 제의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온 땅이 내 것이니, 이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가 모든 백성들 중에서 내 소유가 될 것이며, 또 너희는 네게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 19:5-6)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을 잘 지키면 그의 소유로 삼겠다는 것이다. 물론 “온 땅이 내 것이다.”고 전제하시지만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소유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자식과 아내가 아비나 남편의 소유의 개념으로 사용된다.특히 아내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남종이나 여종이나 집에서 기르는 가축과 같이 남편의 소유 목록에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내는 여종과는 다른 특별한 소유이다(). 그래서 여종들처럼 팔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소유는 자식보다는 아내의 개념이다. 왜냐하면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성경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 예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굳게 잡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던 때에 그 들과 맺는 언약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으나 그들은 내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여호와의 말이다.”(렘 31:32)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언약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다. 이 시내 산 언약을 맺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신부인 셈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시내산 언약은 여호와와이스라엘의 결혼식이다. 고대 근동 세계의 풍습에 따르면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며, 결혼식은 남편이 여러 축하객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결혼 계약 선언을 하는 데, 일반적으로 이 결혼 선언은 신랑의 신부에 대한 소유권 선포라고 할 수 있다. 결흔을 통해서 부모의 소유였던 처녀가 신랑의 특별한 소유, 즉 “세굴라”(hlgs)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내 산 언약, 즉 결혼식을 올린 이스라엘은 그의 신랑 여호와의 신부가 되고,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된 것이다. 이때에 사용된 어휘가 바로 “세굴라”이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암 세굴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다같이 “유업의 백성”과 “소유의 백성”이 사용되지만 그 기원과 의미는 다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산을 상속받을 자로서 “유업의 백성”이자,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 곧 신부로서 “소유의 백성”인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7-2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8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노예살이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였는가? 한국의 대중 설교가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노예살이 한 것이 하나님의 저주였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창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져 오라고 명하신 짐승들 가운데 새들을 쪼개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근처에 살고 있던 그의 조카 롯이 가나안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 소돔 왕과 더불어 포로로 잡혀가자 많은 군비를 들여 조카 롯을 구출하고, 적군들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소돔 왕에게 돌려 주었다. 사람을 구하는 선한 일을 하였지만 아브하함은 손에 얻은 것이 없이 군비만 많이 썼고, 전쟁에 승리는 했지만 적군들과 원수를 맺어 그들의 보복적인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소식이 없어 그의 집에서 함께 살아온 엘리에셀을 양자로 입양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물질적인 손해감, 주변 적군들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 자식이 없이 늙어가는 인생에 대한 염려 등으 로 그의 심정이 가라앉은 상태에 있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이고 너희 지극히 큰 상급이다.”(창 15:1)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 가운데 두 가지를 약속하신다. 첫째는 하늘의 별떼와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쉽게 믿었다.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10여년이 되었지만 아직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떼와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했다 (창 15:6).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약속을 주신다. 그와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의 광대한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실 때는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무슨 징표를 보여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삼년된 암소와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된 수양과 산비들기와 집비들기를 가져오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짐승들을 가져다가 쪼개놓았다. 그러나 새는 쪼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쪼개놓으라고 명하시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무슨 목적으로 가져오라고 명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 으려고 하신다는 뜻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부 설교자들은 아브라함이 새들을 쪼개놓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에서 400년 동안이나 노예살이를 하는 저주를 받게 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고대 근동세계 사람들은 계약을 맺을 때 자기들의 목숨을 담보하고 계약을 맺었다. 짐승을 쪼개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며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자기들도 이 짐승처럼 죽음을 당할 것을 피차 맹세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약을 맺을 때 항상 짐승을 쪼개는 것은 아니었다. 마리에서는 당나귀 새끼를 죽였고, 알라락에서는 양의 목을 쳤다. 새들은 작기 때문에 배를 가르지 않고 그냥 죽여 놓았다. 그래서 고대의 계약서에는 “이 송아지가 쪼개진 것같이 ...도 쪼개어 질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의 언약은 생명을 담보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비들기들을 쪼개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400년동안 종살이를 하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계약이란 목숨을 담보하고 서로 맹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꼭 사체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는 피를 썼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과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으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키 시겠다고 선언하시고 과시하신 것이다. 밤이 되자 하나님께서 횃불로 임하셔서 그 고기 사이를 지나가셨다. 만일에 아브라함이 벌여놓은 짐승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자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담보하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사백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후 손들이 하늘에 별떼와 같이 많이 민족을 이루는 방법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 후손들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스마엘이나 에서처럼 가나안 사람들과 통혼하여 다 이방의 피가 섞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믿는 이교도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전혀 이질적인 이집트 땅으로 보내어 그곳에 따로 거주지를 정하여 주고,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 록 하신 것이다. 400년 동안 그들은 노예로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장정만 60만명, 여자와 자식들을 합하면 약 200만명은 족히 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신10:22에는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께서 너를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분명 창 15:5의 여호와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이스라엘은 고난 당하고, 혹 스스로 저주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그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고난이고, 저주로 보이는 인생살이에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난과 종살이가 반드시 저주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고난과 종살이는 복을 받기 위한 징검다리이며, 통로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에 끌려가 머슴살이도 하고, 감옥에 갇혀 무의미한 인생을 산 것 같지만 만일에 그러한 과정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집트에 내려와 큰 민족을 이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요셉을 팔려가게 하시고, 감내하기 힘든 여러 과정을 통하여 결국은 이집트의 구원자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민족으로 키우셔서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을 지키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400년 종살 이 한 것을 결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징벌적 저주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민족으로 기르시기 위한 섭리이고 지혜이었다. 우리도 우리 인생을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요셉이나 이스라엘의 이집트 종살이에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과 축복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고달프고 무의미한 것같은 현실 가운데도 하나님의 심오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7-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27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는 아름다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 리는 요셉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형들의 미움을 사 장사꾼들에게 팔려가 억울한 머슴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며 갖은 고생 끝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지만 그를 괴롭혔던 형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명은 물론 이집트의 온 백성을 살리는 모습을 통하여 후진국 시골의 한 청년의 입지전적인 생애에 박수를 보내며 감동하곤 한다.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한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보다 그의 생애가 더 위대하고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자주 설교하고, 주일학교에서는 요셉 이야기를 많이 가르친다. 심지어 일부 설교자들은 요셉처럼 꿈을 가지라고 권면한다. 또한 일부 신학자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독립된 단위로 분리하여 지혜의 장르로 분류하거나 영웅담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젊은이가 출세하려면 요셉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요셉에게 우리는 배울 점이 많다.그러나 창세기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과 같은 주역도 아니다. 요셉은 두 가지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실행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횃불 언약을 주시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 가서 400년 동안 객이 되어 이방을 섬기며, 괴롭힘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다(창 15:13). 따라서 창세기 15장 이후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실현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게 된 내력을 적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요셉을 통하여 실현하고 계신 것이다. 둘째로 요셉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의 배경이다. 창 37:2에 “야곱의 내력은 이러하다. 요셉이 열 일곱 살에 ...”이라고 적고 있다. 즉 창세기 저자는 야곱의 인생유전을 요셉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야곱이 어떻게 이집트에 내려가게 되었으며, 그가 죽어 어떻게 이집트에서 그의 조상의 묘실인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요셉의 이야기는 그 배경이며 원인이다. 따라서 요셉은 결코 창세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성경에는 여호와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요셉의 위치를 우리는 바로 이해해야 한다.뿐만 아니라 요셉이 꿈을 꾸었다고 해서 우리도 꿈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무리가 많다. 요셉은 자기가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에게 닦칠 일에 대하여 꿈으로 계시하셨다. 요셉이 꾼 꿈은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을 향하여 일어나 절한 것이 그 첫 번째의 꿈이고, 두 번째는 해와 달과 별들이 그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그의 부모나 형제들은 이 요셉의 꿈들을 그의 부모와 형들이 그에게 가서 절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고 이 당돌한 꿈을 꾼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요셉은 이 꿈으로 말미암아 형들에게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대신 이집트로 팔려가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요셉은 꿈과 관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던 중 왕의 신하들의 꿈과 왕의 꿈을 해석해주고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다. 요셉은 꿈만 꾼 것이 아니라 꿈을 해석도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하게 꿈을 통한 계시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이루어 가신 것이다. 이 일은 요셉 자신의 의지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요셉이 이러한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도 아니고, 자기의 능력으로 꿈을 해석한 것도 아니다. 요셉은 술 맡은 시종장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창 40:8)라고 말한다. 이집트 왕이 꿈을 꾸고 요셉을 불러 “내가 한 꿈을 꾸었는 데,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너에 대하여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더라.”(창 41:15)고 말하자 요셉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평안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창 41:16)라고 대답한다. 그가 꿈을 해석한 것이 결코 자기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해석하실 것이고 자기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그가 꿈을 꾸게 된 것도, 꿈을 해석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고 말하고 있다. 요셉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증거했다. 이집트에는 신들이 많았고, 그 신들의 제사장이나 마술쟁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바로 왕도 사실은 신격화된 사람이었다. 이들 앞에서 그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 쉽니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자기의 목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부딛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이 꿈을 꾸게하신 분이시고 해석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그런데 어떤 설교자들은 이 요셉 이야기의 본문을 읽고 “청년들이여 꿈을 가져라.”고 외친다. 그런데 그 꿈이란게 자세히 들어보면 비록 후진국 무명의 청년이라 할지라도 요셉처럼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꿈을 가지고 살면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젊은이는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이 없는 젊은이는 장래가 없는 사람이다. 꿈을 가지라고 하니까 허황된 꿈을 붙들고 인생을 낭비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요셉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고 꿈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붙들고 산 사람이었다.요셉은 그의 형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에 형님들의 후손을 보존하시고, 큰 구원으로 형님들을 살리시려고 형님들 앞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분은 형님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의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안의 주로 삼으시며, 이집트의 온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삼으셨습니다.”(창 45:7-8)라고 말한다. 이러한 요셉의 말을 유추해보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 가운데 주셨던 계시를 마음에 새기고 산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가족들을 살리려고 자기를 이집트로 먼저 보내셨다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다. 요셉은 바로 이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떠한 역경에서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형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모든 악한 행위들도 다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자기의 인생 여정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이해하고 해석하고 실행해 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하나님의 꿈은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을 살리려는 것이며, 나아가서 세상 만민을 살리려는 것이었다. 요셉은 바로 이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안고 산 사람이었다. 만일에 우리가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꿈, 곧 세상 만민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신 목적이 사람과 세상을 살리시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반드시 순퐁을 만난 배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 요셉의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못했듯이 참기 어려운 절망과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를 통하여 살리는 일을 했다는 사실이 의미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유대인들을 불러놓고 “나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이 쇠사들에 매여 있다.”(행 28:20)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소망을 가슴에 안고 로마에 죄수로 온 것이다. 우리도 꿈을 가지려면 이러한 하나님의 꿈을 가져야 한다. 세상 만민을 살리는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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