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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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⑦ 성도간의 법정소송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는 권징의 권위가 사라지고 법정소송의 광장이 되었다. 개교회에서부터 연합기관까지 소송으로 얼룩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우리들의 바른신앙 자세일까?문제의 탐색어느 신학대학에서의 일이다. 총장은 학과 과장직을 임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교체하였다. 그 교수는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으로 대응하였다(결국 기각되었다).개교회의 분쟁도 법원으로 가고, 노회나 총회 그리고 연합기관의 최종 결정권자는 판사가 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 세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도 ‘성경에서 떠나가는’ 오늘의 현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자.사례의 탐구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많은 연구서를 낸 신재철 목사(초원교회 담임, 한국교회송사연구소장·큰사진)의 의견을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한국교회의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확장되는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신재철(이하 신): 교회분쟁이란 의견의 충돌, 신학적 대립, 교권적 대립, 혹은 재산상의 문제로 쌍방 간의 대립이 심화된 상태를 말한다. 과거에는 교회내부에서 분쟁이 생기면 교회와 지도자들이 성경에 입각하여 해결되는 미덕을 보여 왔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대소 간에 불문하고 바로 불신사회법정으로 비화시켜 판단을 구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는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도약해야 하는 시점에 중대한 위기로 보아야 한다.김: 성경은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가?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출17:14)이후부터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사자들을 세워 그의 율법을 중심으로 사법과 행정 일체를 관할하여 통치하셨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불신법정이 아닌 신정법정으로(신1:17-18, 16:18-20: 민11:16 :대하19:5-8: 사59:2) 성도간의 소송이 모두 교회법 안에서 이루어졌다.신약시대에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용서라는 교훈을 통해 해결을 원하셨다(마6:12-15, 18:23-36:요13:34,36).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1절로 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성도간의 법정 소송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다.김: 한국교회 역사에서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신: 한국교회는 1951년 예배당 명도소송으로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이 촉발되었다. 곧 기존총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문제로 분열된 고신교단을 향해 재산권 소송을 시작한 것이다. 이에 소송을 당한 고신교단 내부에서는 송사불가론(박윤선)과 송사정당론(송상석)으로 양립되었다. 이에 한상동의 견해는 대단히 중요한 결론을 내려 줄 수 있었으나 그는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설립함으로 소위 건덕론의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후에 이 건덕론은 송사정당론에 가까운 견해임이 역사노정에서 드러났다. 이후 한국교회에서는 교회의 문제를 성경원리에 따라 교회의 내부기구를 통해 해결하지 않고 곧바로 세상법정에 가는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이들은 정통개혁신학을 가진 고신교단도 불신법정고소를 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어 고신교단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 역사적 책임과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김: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신: 교회에서의 모든 분쟁이나 대립은 성경적 가르침과 교회가 정한 권징규정에 준하여 처리하는 것이 바른 절차이다. 우선 상호대화를 통해 이해를 넓혀야 한다(마18:15) 먼저 권고하는 목적은 형제를 판단하고 질타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형제로 얻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두세 사람이 찾아가서 화해를 중재한다(신19:15:마18:16). 이는 법적 처리의 전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경우로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법에 호소하여 해결한다(마18:17) 이는 당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라는 단계의 절차가 있다. 그럼에도 상호대화와 두세 사람의 중재로 마무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불가피한 경우에만 교회법에 호소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는 교회의 최종판결에 순종해야 하며 이에 불응하면 출교처벌을 받아(롬16:17:고전5:9-13), 불신자로 간주하기에 불신법정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김: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을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가?신: 한국교회의 신학의 초석을 다진 박윤선은 송사불가론자였다. 그는 자교단이든 타교단이든 성경원리를 붙어 절대불가를 주장했다. 소송정당론의 송상석도 자교단일 경우는 소송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결국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은 불가함을 보인 것이다. 전술한대로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은 성경이 엄하게 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를 가르쳐야 한다. 더욱이 불신법정 소송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신학교에서는 물론 교회와 목사들이 이를 가르쳐 소송문제를 말씀에 대한 신앙으로 대처해가도록 무장시켜야 한다.기본에의 회귀필자가 아는 어느 목사는 같은 교단의 목사에게서 130여 건의 고소를 당했다. 이 말을 들으면 고소당한 사람이 굉장히 나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전연 반대현상이다. 고소를 직업삼아 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목사’라는 이름을 달고.이제 기본으로 돌아가자. 비록 억울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믿자.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이 소송비용이 되고 교회의 분쟁은 전도의 문을 막고 있다. 좀 바보 같을지라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라가자.교회, 교단, 신학교, 연합기관이 법정소송의 회오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자.
    • 해설/기획
    • 특집
    2018-04-1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4
    시편 27:4에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내가 여호와께 청한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할 것이니, 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 성전에서 간구하는 것이다.”이 시를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청하는 한 가지 기도가 바로 여호와의 집에서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한 가지를 청한다고 했는데 얼핏 보면 세 가지를 구하고 있다. 다윗은 그가 구하는 것은 그가 지금 처음으로 구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 구해 왔던 것처럼 보여진다. 그래서 본문은 문맥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번역상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경우에는 히브리어 성경을 대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브리어 성경과는 번역상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내가 여호와께 청한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할 것이니, 이는 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 성전에서 간구하기 위함이다.”(One thing have I asked of the LORD,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inquire1 in his temple. (ESV, KJV, NIV, NAS 참조)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여호와께 청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그 한 가지를 구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다. 그 한가지를 구하는 목적이 그가 사는 날 동안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구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현재 그의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5-8). 그는 여호와의 긍휼을 구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떠나지 마시고, 나를 버리기 마소서”라고 간구한다. 다윗이 구하는 것, 그 한 가지는 바로 구원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다윗은 누 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도 여호와를 가리켜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며 간구한 기도 제목이 바로 그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절대로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알고 믿는 자들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믿음과 더불어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입양 관계에 들어간다. 우리는 죄인의 멍에를 벗고, 이제 아들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것이다(출 4:22).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크신 구원으로 홍해를 건너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같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다시는 이집트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 하나님의 창조 때의 상황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대리통치자 (vicegerent)로 세우기 위하여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대왕으로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시 8). 고대 근동의 봉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대왕과 왕 (suzerain and vassal) 사이에 볼 수 있는 계(언)약 관계를 맺으신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만물 사이에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되고 생사를 같이 하는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물의 왕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의 대왕,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했지만 사탄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권위와 존엄성을 짓밟아버렸다. 결국 아담은 그와 생사의 연대성을 가진 만물과 함께 언약적 저주를 받아, 가죽 옷을 입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인의 신세가 되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계속 그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놔 둘 수 없어,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다. 그것은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아래 있는 만물을 정죄하셨던 똑 같은 원리로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아담을 대신하여 새아담을 세우고, 그가 아담이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함으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롬 5:14).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의 아들을 새아담으로 보내시고 구원을 완성하셨다. 새아담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왕이 되셨다. 그동안 아담과 연대성을 가졌던 피조물들은 이제 새 왕이 되신 그리스도 앞에 나와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으면 새 아담 그리스도와 함께한 연대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받은 새로운 신분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예수께서는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죄의 굴레를 쓰고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들에게 그가 이루신 새로운 왕국, 새로운 연대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시고, 계속하여 말씀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 15:4).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 가운데,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 17:21)라고 간구하신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이 땅에서 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관계이다. 사도 요한의 계시록을 보면 종말에 우리 성도들이 어린 양 예수님과 혼인식을 갖고 하늘에 있는 궁전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늘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임하는 것을 보지만 그 성 안에 성전이 없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내가 그 성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으니, 주 곧 하나님,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계 21:20) 라고 말한다. 구원이나 천국이란 저 세상 어느 곳에 있는 특별한 장소에 들어가는 개념이 아니다.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관계를 갖고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시에 사람을 그의 교제의 대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그의 곁을 떠난 죄인들을 다시 예수님의 언약의 울타리 안으로 모아 들이시고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왕과 백성과 같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4-1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3
    바울은 예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제 삼일에 살리심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혹은 하나님과의 언약대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고, 언약대로 살아나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바울이 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에도 수 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말한다. 예수님 부활의 역사적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약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이고 언약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한 속죄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다 죄인들이고, 우리는 죄의 삯을 지불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죄 값을 예수께서 그의 죽음으로 대신 치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창조물을 관리하고 다스릴 왕으로 세우셨다(시 8:5-6).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 생명을 담보한 위계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고대 근동 세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계약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과 언약적 관계를 맺으신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언약적 연대성을 가졌고, 아담은 이 언약적 연대성의 대표자가 된 것이다. 아담은 언약적 연대성의 대표자가 됨으로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말하자면 아담의 범죄는 모든 피조물의 범죄가 되고, 아담에게 내린 죄와 형벌은 모든 피조물에게도 함께 적용되는 죄벌이 된 것이다(창 3:17; 롬 5:12). 우리 모든 인간이 아담과 함께 죽음을 선고 받은 받은 것은 바로 이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족해하셨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때 마다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의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창조에 대한 큰 만족감을 표시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언약적 반역으로 언약적 저주가 임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편하실리가 없다. 그래서 롬 3:26에는 하나님께서 “이때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자신도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분이심을 보여주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도 의로우시려고” 하신 일이 무엇인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통하여 아담과 아담의 연대성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말을 쓴다.”(롬 5:14). 여기서 모형은 “원리”의 모형을 말한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죄인이 되는 언약의 원리를 적용하여 새 아담을 세워 그로 아담을 대신한 속죄를 하게하고, 그를 살려, 그를 새 언약의 대표자로 세우고, 그의 연대성 안에 들어오는 자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살리고, 그들을 통한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연대성의 원리를 모형으로, 한 사람의 속죄와 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고 자유와 생명을 얻는 원리를 적용하여, 모든 죄인들을 살리려 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원리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type)이다”라고 말한다. 이때에 실형(antitype)은 물론 새 아담,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바로 언약적이고, 대속적인 것이다.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언약적이고, 필연적이다. 새 아담이 아담의 실형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여야 한다(창 3:15). 또한 그는 뱀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의 발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라야 한다. 그리고 그는 아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죄가 없어야 한다. 이 세상에 이러한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피조물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결국 이 세상에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조건에 맞는 존재를 새롭게 창조하실 수는 있겠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여자의 후손”으로 지목하셨다. 따라서 새 아담을 아담처럼 흙으로 새롭게 창조하실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이 온 우주에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밖애는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새 아담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을 빌려 성육신 하신 이유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담의 실형으로 인간 세계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은 아담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죽은 후 부활할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치시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고 설명해 주셨다(막 8:31-38; 마 16:21-28; 눅 9:22-27). 심지어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도 예수님의 죽음의 필요성을 말하며 그것이 개인의 범죄에 대한 죄 값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족과 백성을 살리기 위한 희생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예언하고 선포했다(요한 11:49-52).물론 이것은 로마 사람들이 반역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꾸민 음모였다.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아담의 죄 값을 치렀다면 이제 죄와 죽음은 더 이상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세력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새 아담, 예수님부터 살려야 하고, 이어서 새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따라서 새 아담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인것이다. 만일에 예수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우리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그 죄 값으로 죽게 되었다는 원죄의 원리가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원죄도 없고, 우리 죄인들의 부활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핑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예수님을 살려 내시어 사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살리심으로 아담과 더불어 그의 새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려 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왕이 되셨듯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아담이 되셨다(골 1:15), 그리고 만물의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가 되셨다. 우리 성도들은 이 새 아담, 새로운 왕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왕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충성 맹세를 함으로 예수님의 새 왕국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은 새 백성이 되는 것이다(골 3:10).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담의 죄를 대신 지고 속죄의 피를 흘리신 새 아담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고, 새로운 왕이 되어, 옛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 새 언약을 세우고, 우리 신자들을 새 언약의 연대성 안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들이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언약적이다. 언약적 틀 안에서 이해하고 설명하고, 믿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3-30
  • 기획 / 부활절에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설교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재림과 심판이 증언되어야설교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매개설교자가 기복주의 강조해선 안돼 설교인가, 종교강화인가설교는 기독교의 복음을 증거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히 선포하는 것임으로 ‘말씀의 증언’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객관적 진리인 성경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또 역사적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들리는 말씀"이라고 하고, 청중들은 설교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에서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다.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는 성경 본문 몇 줄 읽어놓고 그 본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온갖 세상 이야기를 다 끌어다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것은 일반종교에서 신도들을 도덕적 윤리적으로 가르치려는 ‘종교강화’(宗敎講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것은 종교강화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덥잖은 ‘잡담’도 많다.설교에서 말하는 객관적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과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인류 앞에 밝히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설교는 결코 개인의 주관적 종교 경험을 극대화 하여 미려한 수사로 내뱉는 말이나, 현실의 정치적 동향을 설명하거나 신문이나 TV 등에서 얻은 정보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설교는 설교자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런 설교에서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영감이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감동이 전달될리 없다. 거기에는 기껏 종교적 흥분과 심리적 감동이 있을 뿐이다. 교인들은 때때로 이런 흥분과 감동을 은혜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생명을 살리는 ‘은혜’는 아니다.설교는 생명을 살리는 매개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그러므로 당연히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말씀’을 제켜놓고 그 아까운 시간을 세상의 자랑거리로 채우려 하는가. 그럴듯한 영적 언사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3).초대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그리고 재림과 심판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임을 알고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생명을 깨달았다. 초대교회가 무서운 박해 아래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생명있는 설교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심판이 없는 설교는 아무런 생명도 능력도 없는 울리는 괭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이런 가짜 설교가 난무하고 있다. 특히 예수를 무슨 기복신(祈福神)으로 전락시켜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만사형통만을 강조하는 설교는 기독교의 복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기복주의 설교는 복음이 아니다성경에는 ‘축복’(祝福)이 있다. 민수기 6장 22-27절과 열왕기상 8장 22-53절에는 제사장의 축복, 마태복음 5장 3-12절(산상보훈)과 6장 9-15절(주기도문), 요한복음 14장 10-14절(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예수의 축복,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는 사도의 축복이 있다. 축복은 다른 사람의 앞길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기를 비는 것이다.그러면 설교자가 추구해서는 안되는 ‘기복’(祈福)은 무엇인가? 기복은 세속적 욕심을 종교적 방법으로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육적 기복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욕망이고, 영적 기복은 인간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영가천도재, 천주교의 면죄부, 무속의 무당굿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설교는 과연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신학을 기초로 한 참된 설교를 하고 있는가. 교인들의 저급한 감정을 이용하여 흥미본위의 세상 이야기나, 개인의 주관적 종교경험을 극대화 하여 자기 넋두리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설교자는 성경본문 한절 읽어놓고 그 본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성경이나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전혀 언급하는 일도 없이, 일상의 애매한 세상사를 중언부언 하거나 기복주의를 부추기다가 끝내고 만다. 이런 설교는 설교자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런 설교에서 어떻게 창조적 영감과 성령의 감화감동이 전달될 수 있겠는가. 참된 설교자는 일체의 불순한 조화와 타협을 배척하고 진리의 말씀 그 자체만을 신자들에게 제공할 때, 감동과 영감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신학이 가는 길을 목사가 가고, 목사가 가는 길을 교회가 가고, 교회가 가는 길을 사회가 간다는 말이 있다. 목사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 목사의 설교는 그 설교를 듣는 성도와 그 교회만이 아니라, 그 교회가 속해있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목사가 설교에 생명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사의 업무가 어찌 설교뿐이겠는가마는 그래도 설교가 목사의 본업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목사가 다른 것은 좀 서툴러도 생명을 건 설교를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존경을 받아야 할 참된 목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목회야말로 즐겁고 행복한 직업이다.선지자 아모스가 일찌기 자기 시대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고 했던 것처럼, 이 시대는 말씀이라는 설교는 많은데 감동을 일으키고 사람을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흔치 않다. 이왕에 목사가 되었다면 자신의 주관적 기복적 종교경험이 아니라, 역사적 공동체적 신앙경험에 터잡은 참된 복음적 설교를 하는 열정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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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30
  • 부활절 메세지/어디에 부활이-유 종 만 목사
    부활절 저녁 예배를 드리는 어느 교회에 짖궂은 동네 청년들이 장난을 치기로 했습니다. 완벽하게 소품을 준비해서 무서운 마귀의 모습으로 분장을 했습니다. 검은 망토, 뿔이 난 머리, 흉측한 얼굴에 드라큘라 이빨, 삼지창을 들고 교회로 몰려갔습니다. 전기 스위치를 내려 버리자 예배당 안이 캄캄해졌습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마귀의 무리들이 실제 상황처럼 되었습니다.붉은 빛을 띠고 검은 망토를 쓴 마귀가 앞으로 나아가니 모든 교인이 비명을 질러 대며 겁에 질려 떨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목사가 내려왔습니다. 기도 잘하기로 소문난 권사는 두 손을 모아 마귀 앞에 섰습니다. 목사가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내가 언제나 당신 편이었다는 것을 아시지요?” 이는 불신앙을 조롱하는 유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다급할 때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겠지요.우리는 예배시간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할 때는 청산유수로, 설교할 때는 불을 토하듯이 하지만, 막상 위험이 닥치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현대인들은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믿느냐, 안 믿느냐는 고사하고, 모든 일에 신앙인답게 살지도 못합니다. 기독교인들조차도 부활신앙이 능력이 되고, 내 안에서 동력화가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내면화보다 처세술이 앞서고, 모략과 패거리 정치가 교단과 연합사업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성경이 가르치는 십자가, 헌신, 희생, 배려, 관용, 인내, 온유, 겸손, 자비, 나눔은 오히려 생존에 지장이 된다고 여기는 듯 합니다.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는 그 몸과 그 피를 우리의 양식되게 하셨고, 음료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 33, 35). 주님은 천하 만민이 다 먹을 수 있고도 남는 식탁을 주셨습니다.뿐만 아니라, 빈들에서 굶주린 육신을 위해서도 한 사람이 먹을 것으로 오천 명에게 나눠주셨고, 한 분 그 자신이 온 인류가 먹을 수 있는 영적 양식 되게 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48-51).그런데 오늘날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은 오천 명이 먹을 것을 한 사람이 먹으려는 것입니다. 나 혼자 먹어야 되니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도 가리워야 되고, 덮어야 하고, 숨기려고 합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사람도 밀쳐 내야 하고, 짓밟아야 하니, 그 어디서도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찾을 수 없고 인정은 메말라가고 있습니다.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싸움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사회통합은커녕 분열과 갈등만 깊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분쟁과 갈등과 폭력이 교회당 안에까지 밀려들어와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우리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병든 자를 고치고 약한 자, 소외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약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에게 애타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병든 자에게 부모의 마음같이 애처로운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며 다가가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좇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교회는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며 죽은 자를 살릴 능력도 의지도 없는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지금 한국교회에는 부활이 없어도 괜찮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말씀으로 뜨겁게 되지 아니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부활신앙이 대관절 어디에 필요합니까? 길을 묻는 자도 없고, 길을 인도하는 자도 없으니 주님은 통곡하고 계십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아 ~ 한국교회여.
    • 해설/기획
    • 특집
    2018-03-30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⑥ 해외선교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는 세계가 놀랄 정도이다. 2017년말 현재 파송선교사가 3만 명을 육박할 정도이다. 여기에 등록되지 않는 자비량 선교사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많은 한국교회들이 선교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직접 파송하지 못하면 협력선교를 하고 있고, 평신도들의 단기선교도 서서히 정착되고 있다.문제의 탐색선교사역에는 헌신, 정책, 지원 등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단순한 열심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교사 후보생을 선발하고 훈련해야 하며, 교단이나 선교본부의 선교정책이 수립되고, 여기에 따라 지교회 또는 교인들의 물심양면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개교회의 차원에서 선교사역을 묵묵히 실천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헌신이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를 바랄뿐이다.사례의 탐구선교사역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한 사례를 살핀다. 소속 교단의 특성상 선교사 파송은 선교회 차원에서 하지만 현지인을 위한 선교사역을 하는 순복음강남교회 최명우 목사를 만났다.김남식(이하 김): 대형교회들이 자기 교회 이름을 건 파송선교를 하는데 강남교회에서는 현지인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어 감사하다. 해외선교사역의 의미를 어디에 두는가?최명우(이하 최): 선교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축복이다. 선교는 교파나 교회확장이 아니라 복음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확장에 그 목표를 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우리가 받은 축복을 나누는 헌신의 사역을 하고자 한다.김: 여러 분야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 특성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최: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선교사역을 몇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선교사 파송은 선교회에서 일괄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첫째는 의료선교이다. 지금까지 7년째 이 사역을 하고 있는데 네팔, 인도 벵갈 지역, 필리핀, 캄보디아 등지에서 사역하였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가장 정성 쏟는 사역이다.둘째는 해외 성회이다. 교단의 특성상 우리는 성회를 소중히 여긴다. 대만,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에서 성회를 인도하고 현지 목회자들을 재교육하고, 지교회를 설립한다. 셋째는 국내 외국인 사역이다. 우리 교회가 시내 도심지에 있기 때문에 다민족을 대상으로 한 사역을 한다. 외국어 예배를 드리는데 현재 영어, 중국어, 일본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또 어린이들을 위한 영어주일학교(English Sunday School)을 개설하여 외국인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김: 의료선교가 핵심이라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가?최: 우리 교회는 7년째 의료선교팀을 파송하고 있는데 매년 4월에 간다. 참가인원은 약 40명 정도인데 의사, 약사, 간호사, 한의사 등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병원에서 휴가를 내고 이 사역에 헌신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여기에 미용선교팀이 동행하여 현지인들의 머리 손질, 지압 등을 한다. 또 어린이 사역팀이 함께 가서 어린이 주일학교를 개설하여 가르친다.김: 이들의 경비는 어떻게 감당하는가?최: 현지 체류비는 교회가 지원하고 여비와 기타 경비는 본인 자비량이다. 의사나 약사, 간호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재능을 기부하는 자세이다. 수많은 의료장비를 싣고 가고 열악한 현지 여건 속에서 섬김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볼 때 무어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또 현지에서 빈민가 선교를 실천하는데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다.김: 올해의 사역 계획은 어떠한가?최: 올해는 작년에 갔던 인도 벵갈룰러 지역으로 간다. 작년에 이 지역에서 사역하였더니 그 인근 지역에서 자기네 지역에도 와 달라는 요청이 여러 곳에서 있어서 앞으로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섬기려고 한다. 감사한 것은 작년에 이 지역에 지교회를 세워 지원하고 있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올해는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40여명이 현지에서 섬기게 된다.김: 청년들의 단기선교도 활기있게 실천되고 있는 줄 아는데 이들을 어떻게 훈련하는가?최: 교회 청년부를 중심으로 매년 10개의 단기 선교팀이 선교현장에 투입된다. 이것은 복음선교와 선교사 후보자 예비훈련이라는 차원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의료선교를 위해 교인들의 기도 후원과 각종 물질 지원은 선교사역에 큰 힘이 되고 있다.김: 앞으로 복음선교의 방향을 어떻게 계획하는가?최: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으나 우리는 간단한 원리를 택한다. 예수님의 삼중 사역을 본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성회), 병든 자를 고치고(의료선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주일학교). 부족하지만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려고 하며, 현지 선교사들을 지원하려 한다.기본에의 복귀선교의 의미가 변질되어 가는 세태이다. 목사와 장로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외에 나간다고 다 선교가 아니다.우리는 선교와 관광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 병든 자를 치료하는 진정한 사역에의 복귀가 필요하다.우리의 삶이 복음적이어야 하고 우리 교회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 변하여야 한다. 이것은 물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헌신과 열정으로 되어져야 한다.문제 많은 한국교회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선교사업가’도 있고 ‘선교모금가’도 있다. 선교비를 번다고 국내에서 까페를 경영하는 선교사(P.)도 있다.우리는 이들을 보지말고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선교현장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적은 정성이라도 모아 지원해야 한다.선교사역은 한국교회의 축복이요 희망이다. 해외여행이 아닌 선교, 관광이 아닌 진정한 선교가 되어지도록 우리 모두 모든 족속을 제자삼기위해 땅 끝까지 가자(마 28: 18-20, 행 1:8).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3-2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이 대답을 만족하게 여기시고 이때부터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것과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과 제삼 일에 살리심을 받을 것을 밝히기 시작하셨다(마 16:21).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 그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옮기시는 것을 보면 교회력의 사순절은 바로 이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거룩한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하여 이 기간 동안이라도 금욕, 금주, 금식, 참회, 희생, 봉사를 하며 고난을 체험하고 부활절을 기다리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닫고 사순절이나 고난절이나 부활절을 맞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 대답을 왜 만족하게 여기셨을까? “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의미를 성경 신학적으로 고찰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물의 왕으로 삼으시고, 아담에게 그의 창조 세계와 그가 만든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왕권을 부여하시고 그의 왕국을 관리 감독하게 하셨다(시 8편). 그러나 아담은 그의 왕이신 대왕, 하나님을 반역하였다. 그리하여 언약적 원리에 입각하여 아담과 그의 범죄에 가담한, 말하자면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가운데 있는 모는 그의 피조물에게 죽음이라는 심판을 선언하셨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다고 기뻐하셨던 하나님께 이제는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비뚤어지고 타락한 세상을 구출하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것은 아담을 모형으로 새아담을 세우시는 것이다(롬 5:14). 아담을 정죄하신 그 언약적 원리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아담을 세워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살리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아담 대신에 새 아담을 세우시고, 그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새아담 안에서 새롭게 살리려 하시는 것이었다(계 21:5). 그 새 아담은 어떤 분이어야 하는가? 새 아담은 첫째로 하와에게서 낳은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을 문책하시며, 하나님을 불순종하도록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실 때에 “그는(여자의 후손)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죄와 죽음의 사슬을 풀 수 있는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은 여자의 후손, 곧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로 새 아담은 신적 존재(Spiritual Being)여야 한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뱀은 사탄이 사주하고 사용하는 대리자, 사용자이기 때문에 그는 영적 존재이다. 그 영적 존재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여자의 후손은 영적인 세계를 제어할 수 있는 사탄보다 더 힘센 영적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새 아담은 여자의 아들로서 인간이자, 영적 존재여야 한다. 신성과 인성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존재는 아담의 연대성 안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존재를 새롭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아담으로 뱀의 머리를 짓밟을 자로 여자의 후손을 지목하셨다. 따라서 새아담으로서 자격을 갖춘 존재는 만세 전부터 존재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는 것 만이 새 아담의 자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그렇다면 이 새 아담이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죄로 말미암은 죽음을 선고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창 2:17; 롬 6:23). 아담의 범죄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값을 치러야만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새 아담이 아담을 대신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려면 그는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새 아담은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서 죽음을 선고받은 모든 피조물들의 죄를 속죄하는 속죄물로 죽어야 하고, 그 속죄의 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새 아담의 죽음으로 죄 값이 완전하게 치러졌다면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사람들과 만물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고, 붙잡고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담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죄와 죽음의 사슬이 풀리고 해방된다. 새 아담 그 자신도 살아나고, 새 아담의 연대성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살게 될 것이다.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의 왕국은 새 아담의 죽음과 부활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새 아담의 부활이 없다면 그의 죽음은 무용한 것이고, 아담의 속죄도 없다. 그러나 새 아담이 죽고 부활한 후에, 그 때에는 아담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위에 왕 노릇했던 것과 같이, 새 아담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새 아담을 통하여 새롭게 하신 새 왕국의 왕으로 세움을 받을 것이다. 곧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분명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비밀을 스스로 깨닫고 말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마 16:17)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이제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새 왕국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의 연대성 안에 있던 자들은 어떻게 새 아담의 새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그는 새로운 왕에게 나아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왕, 곧 그리스도라고 인정해야 한다. 베드로처럼 “당신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새 왕이 그를 그의 새 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절차는 필연적이다. 새 왕국의 시민은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시작되고, 이 고백을 한 신민들을 통해 이제 새 왕국이 시작될 것이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은 앞으로 새 왕국 신민이 되기 위한 자들이 반드시 고백해야 할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이것을 “반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새 왕국은 교회이며, 그 왕국의 머리인 왕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고, 그 왕국의 신민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새 왕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로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다. 우리 죄인들은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함으로 이제 새 아담, 새로운 왕과 새로운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자들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으라는 뜻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과의 연대성을 맺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존재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새로운 존재임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세례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예식이다(롬 6:4-5). 우리 죄인들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이며, 새 왕국의 새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언약적 연대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3-22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⑤ 예배의 개혁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교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배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예배의 개혁’이 필요하다.문제의 탐색현대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의 변질을 염려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기보다 인간들의 이벤트가 되었고 심지어는 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다. 사람들을 향한 경배와 축하의 시간이 되는 모습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사례의 탐구예배의 개혁과 회복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 중 김남준 목사를 만나 본다. 그는 안양의 평촌이라는 지역에서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이다. 한때는 신학대학의 교수로 전념하며 살았으나 잃어버린 양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품고, 1993년 지금의 열린교회를 7명의 성도들과 함께 시작하였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그를 5천여 편이 넘는 설교를 한 설교자로, 또 어떤 사람은 교수로 기억하나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한 마리 어린 양이다.”김남식(이하 식): 바른 목회를 실천하며 예배의 개혁을 외치고 또 실천하는 김 목사가 본 현대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김남준(이하 준) : 한국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이단이 아니라 세속주의이다. 현상적으로는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저하되는 것을 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예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예배가 좀 더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길고 지루해요”, “이런 예배는 시대에 뒤떨어져요” 라는 성도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예배개혁(?), “착하게 살면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 받습니다.”라는 설교단의 선포는 인간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로인해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만족이 그 목적이 되어 버렸다.식: 그러면 바른 예배란 어떤 것이라고 보는가?준: 예배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방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더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는 분이 아니기에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그 일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자신의 추악함에 절망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 앞에 엎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바른 예배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에야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을 수 있다. 그리고 받은 바 은혜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식: 바른 예배를 회복하는 방안이 무엇이라고 보는가?준: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먼저,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알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 시간에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져야 한다. 또한 예배는 성령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 예배당에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 말씀은 신자들의 마음 안에 들어와 능력 있게 역사하기 때문이다.식: 이러한 바른 예배가 우리 교회들에 확산되어야 하는데 그 길이 어떠한가?준: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위해서는 예배 시간에 장엄한 진리가 선포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설교자는 성경 진리를 부지런히 탐구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은 죽고 진리는 살게 함으로써 온 몸으로 진리를 선포하여야 한다. 또한 성도 개개인은 예배 중에 울려퍼지는 말씀을 깨달으려 힘쓸 뿐 아니라 진리대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진리를 따라 살 때 그 진리는 진정으로 그 사람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노력만으로 바른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배에 하나님이 임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의 삶과 존재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빚지만 여전히 불결한 죄인일 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그 예배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사모하여야 한다.식: 예배의 소중함이 퇴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을 살려나가야 한다.준: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다. 예배를 통해서 위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뿐 아니다. 내가 이 땅에 있는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또 올바른 삶을 살아갈 힘도 예배를 통해서 얻는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삶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니, 예배는 신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그래서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은 교회의 재산이 아니다. 모이는 교인의 수도 아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곳에 모였을 때 하나님이 잊지 않고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주시는 것, 이것이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교회의 영광이다. 그때 그 교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한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기본에의 회귀김남준 목사의 예배에의 애절한 열망을 들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스스로 돌아보자.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개혁될 때 한국교회가 살아난다. 우리 모두 마음모아 참예배를 드리는 기본에의 복귀를 실천하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3-21
  • 학술/ 동아시아 역사와 기독교의 역할 - 3.1운동과 기독교
    본고는 지난 3월 9일 종교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회에서 이만열 교수가 발제한 ‘동아시아 역사와 기독교의 역할’ 중 중요부분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동아시아의 기독교 전통동아시아 국가 중 중국과 일본이 기독교와 관련을 맺는 것은 한국보다 훨씬 이르다. 중국은 당(唐, 618~907) 제국 초기(635)에 페르시아로부터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경교(景敎)를 받아들임으로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다. 경교는 그 뒤 경정(景淨)이라는 경교승에 의해 781년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워 경교의 교리와, 경교가 중국에 유행하게 된 내력 등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천주교는 1581년 마테오리치(利瑪竇)의 중국 도착으로 본격화되어 명청(明淸)대를 거쳐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는 1842년 남경조약에 의해 문호개방이 이뤄지면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72년 요동반도 영구 우장에 도착한 로스(John Ross 羅約翰)에 의해 1882년 3월과 5월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순 한글로 번역 출판되어 한국 복음화에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유럽의 ‘반동종교개혁’의 여파로 자비엘(Francisco de Xavier)이 1549년 일본에 천주교를 전파시킨 이후, 임진왜란 때(1592)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영세명을 가진 고니시(小西行長)이 천주교 부대를 끌고 한국을 침략했다. 그 뒤 1853년 일본이 본격적으로 미국과 서양에 개항함으로 개신교도 들어오게 되었다. 뒷날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도 일본에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합교회는 특히 침략세력에 편승하여 한국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설득, 일본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다. 3.1운동과 기독교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천도교 불교와 제휴하여 이 운동을 선도했다. 그러나 기독교계가 당시 선도적으로 참여했음에도 역사의식의 결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나아가 3.1운동 후에 훼절한 기독교 인사들 때문에 기독교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3.1운동은 준비·점화 단계에서 전국적인 만세운동 단계, 그리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모색하는 '정리 단계' 혹은 국가건립 단계로 넘어갔다. 우선 준비(점화) 단계에서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은 거사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고 거사에 따른 업무도 분담했는데,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맡고, 지방 분송은 기독교측과 협력키로 했고,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귀족원에 전달하는 업무는 천도교 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이 맡았다. 독립선언서명자를 모집키로 하여 16명의 기독교인이 서명했는데 5명이 더 서명자로 지원했으나 시간이 늦어 취소되었다. 점화단계의 48인 중 24명이 기독교인이다. 천도교와의 합작에 앞서 기독교계는 적어도 세 갈래(서북 장로교, 북감과 남감, 2.8독립선언에서 보이는 재동경Y 등)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첫날 봉화를 든 것은 기독교계였다. 그러나 중앙조직이 약한 기독교계가 천도교로부터 5천원을 빌렸지만, 5천원의 용도는 대부분 여행경비(중국 일본 만주와 국내 3,170원, 수감자 가족생계비 640원, 독립선언서 발송비 250, 기타 경비 80원)에 사용되었다. 지방화·전국화 단계의 기독교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8곳이 대부분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하였다. 천도교측과의 합작도 보이는데, 운동의 주동세력이 뚜렷한 지역이 311개로 나타나는데, 기독교(78지역)·천도교(66지역) 그리고 양교 합작지역이 42개 지역이다. 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인의 참여정도와 관련, 체포·투옥자를 통해서만 숫자를 파악할 수 있다.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고,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통계는 바로 기독교인의 운동량을 계량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방 자료를 보면 기독교인 여부가 빠진 경우가 많다. 이 통계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기독교인은 1918년 현재 20만(장: 160,913, 북감:41,044, 남감:10,740, 계:212,703)을 상회하여 한국 인구의 1.3〜1.5%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세력면에서 25〜38%, 체포·투옥면에서 17〜22%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당시 1.3〜1.5%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제암리교회당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가운데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총회에 보고한 노회의 보고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그러나 운동이 전국화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3월 1일 선언 당일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 불참하였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또 당일 서울의 선언발표 장소를 명월관[泰和館]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다. 끝으로 당시 장로교·감리교 연합기관지인〈기독신보〉등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 검열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고 지적된다.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 이유 이처럼 기독교가 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기독교의 민족관이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교육이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한말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민족운동의 전통을 적극 참여의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기독교 국가의 침략을 당하였으나, 한국은 일본이라는 비기독교국가에 의해 침략을 당함으로써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가능했다.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을사늑약이 이뤄진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으로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또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화가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점은 앞에서 간단하게 지적했다. 또 일제가 강점한 후 기독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적인 자유마저 박탈하려 했다. 특히 금주·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다 강점한 지 얼마 안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이었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학교의 성경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을 위협한 데다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끝으로 우리는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행동에서 그들의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사적 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3.1운동의 만세시위가 한창일 때, 기독교회가 작성한〈독립단 통고문〉을 뿌렸다. 내용은, ① 매일 3시에 기도하고, ② 주일은 금식하고, ③ 매일 성경을 읽는데, 월요일-사 10(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렘 12(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 수요일-신 28(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약 5(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 금요일-사 59(죄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롬 8(성령이 주시는 생명,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등이었다. 여기서 민족운동을, 신앙고백 위에서, 신앙운동과 함께 진행시킨,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것을 엿보게 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8-03-21
  • 설교/ 실패에서 성공으로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성공의 내용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이 버는 것, 많이 배운 것, 사업의 번창 등 육신적인 것으로만 판단하여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 성공은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요삼 1:2).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것이 최고의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첫째가 생명을 주시는 것이요, 둘째가 풍성한 삶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요 10:10). 오늘의 본문 말씀 가운데 어부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완전한 실패의 모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주님을 만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은 완전한 성공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더 깊은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본문 8절)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전능자이시며, 메시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본문 10절)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자마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완전한 실패가 완전한 성공으로 바뀌게 된 비결을 깨닫고, 우리의 삶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성공적인 삶으로 변화되기를 축원드립니다.Ⅰ.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는 자에게 주님이 찾아와 주십니다.(본문 2-3절)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내일을 준비하며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도우셨습니다. 성도는 미래를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특히 주님을 맞을 준비해야 합니다(벧전 4:7-11).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대접하되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봉사하되 선한 청지기 같이 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에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봉사할 때에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기도 준비, 말씀 준비, 영적 준비를 해 놓아야 합니다.베드로는 실패했어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한 중풍병자 친구를 고치기 위해 네 친구는 지붕까지 뜯고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막 2:3-4).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까지 올라가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눅 19:4-6). 여리고 성을 7일 동안 끝까지 돌아서 무너지게 했습니다(수 6:15-16).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하여 병을 고침 받은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왕하 5:14). 120명의 사람들은 끝까지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과 은사를 받았습니다(행 1:14-15).Ⅱ. 주님께서 계셔야 기적이 일어납니다.시몬의 배에 주님이 오르셨습니다(본문 3절). 성도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 15:5). 주님이 내 안에 계실 때 무엇이든 기도하면 응답주십니다(요 15:7). 성도는 가까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 가까이 가야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가까이 해야 합니다(요 19:25). 성전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눅 2:37).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행 17:11). 사도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딤후 4:11). 믿음의 성도와 가까이 해야 합니다(행 2:44). 예배와 가까이 해야 합니다(히 10:25). 찬송과 기도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엡 5:19)(살전 5:17).성도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멀리 떠났을 때 거지가 되고 병들고 굶어 죽게 되는 신세까지 되었지만, 아버지께로 왔을 때 회복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눅 15:19-20).Ⅲ. 육지에서 배를 띄게 한 것처럼 세상과 구별할 때 성공의 길이 열립니다.(본문 3절)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끊을 것을 끊어 버리고, 버릴 것을 버리고, 고칠 것을 고치고, 절제할 것은 절제하는 삶이 구별된 삶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육신의 일로 베들레헴에서 이방 땅인 모압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남편과 두 아들 모두가 다 죽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룻 1:1-5). 롯의 처가 육신의 것에 미련이 남아 뒤를 쳐다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창 19:26).세상과 구별된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시편 1:1-2).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Ⅳ. 주님께서 배안에 앉았습니다.(본문 3절)서 계시지 않고 앉으신 것은 주님께서 머무르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성도들도 서성거리지 말고 교회관, 목자관, 신앙관, 가정관 그리고 사명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본문 3절)말씀에 은혜를 먼저 받아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말씀에 은혜를 받지 않고 먼저 그물부터 던지라는 말을 들었다면, 베드로는 순종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예수님께 혈기를 부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순종한 것입니다.그리고 성도는 말씀에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순종에 깊어지고 그리고 축복에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깊어지기 위해 말씀 듣는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롬 10:17). 말씀을 듣고 읽어야 합니다(신 28:1-6).Ⅵ. 깊은 데로 그물을 내려야 합니다.(본문 4-5절)말씀에 깊어지니 순종에 깊어지게 됩니다. 밤새도록 수고를 해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인간의 생각, 방법, 지식 다 버리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고(마 14:19-21),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요 2:5-9). 모두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독교는 과학의 종교, 이론의 종교, 상식의 종교, 지식의 종교가 아니라 기적의 종교입니다. Ⅶ.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본문 6-7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습니다(본문 6절). 두 배에 가득 실을 정도로 고기를 잡았습니다(본문 7절). 다른 배의 동무를 손짓하여 도와달라고 했을 때 거절치 않고 돕다가 자기 배에도 가득 실었습니다. 성도는 남이 잘 될 때 배 아파 하지 말고 협력하면 자기도 은총을 입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서로 돕고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결 론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한 실패가 완전한 성공으로 바꿔지게 되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깨닫고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함을 통해 영적인 축복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 즉 주님의 참 제자로 삼아 크게 쓰신 것입니다. 육신적인 고기를 잡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 더 성공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참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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