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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㉒ 원로목사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목회자의 길은 헌신의 길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역경과 고통을 이기는 인내의 삶을 산다. 젊음의 열정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하나의 열매가 되어 교단이 정한 법에 따라 은퇴하게 된다. 일정한 자격과 절차에 따라 ‘원로목사’로 추대된다. 목회자에게 큰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만 않다.문제의 탐색존경과 감사로 시작된 ‘원로목사’제도가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의 리더십 승계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이 심하면 교회분열로까지 치닫는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그 여파로 원로목사 제도 폐지론이 공공연히 운위될 정도이다. 존경과 감사보다 경제적 계산이 앞서는 오늘의 세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사례의 탐구원로목사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현재 원로목사로 있는 분을 만났다. 예장고신측 소속의 경주 경일교회 배기웅 원로목사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배 목사는 나이 20에 전도사로 시작하여 70에 은퇴하였으니 꽉찬 50년을 목회하였다. 그러면서 계속 공부하여 신학교 강의도 하고 책도 여러 권 저술하였다.김남식(이하 김): 평생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되었는데 보기에는 아직도 팔팔해 보인다. 원로목사에 대한 규정이 어떤 것인가?배기웅(이하 배): 은퇴한 지 5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원로목사에 대한 규정은 각 교단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정년제를 실시하는 교단에서는 만70세에 은퇴한다. 원로목사는 보통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 중 교회 공동의회의 결의를 거쳐 추대한다.김: 한국교회에는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만70세가 정년이 많다. 배 목사의 사역에 대해서 말해 달라.배: 나는 일찍부터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20세에 전도사로 첫 사역을 하여 70세에 정년퇴임하였으니 50년을 사역하였다. 그러니 내 인생의 전부가 교회였다.김: 지금 원로목사로 추대된 교회는 배 목사가 개척한 교회인가?배: 부산, 대구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경주에 경일교회를 개척하여 30년간 섬기다가 은퇴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교우들의 사랑으로 대과없이 지난 것을 감사한다. 김: 원론적인 질문을 하겠다. 원로목사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배: 원로목사의 입장에서 말하기 조심스럽다. 나도 원론적인 답을 하겠다. 교회는 원로목사에 대해 존경과 사랑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한 주의 종에 대한 예우이다. 이것은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안에서 존경과 사랑이 우러나야 한다는 말이다.김: 그러면 원로목사가 교회에 대해 어떤 태도여야 하는가?배: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자세이다. 오랜 세월 같이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우관계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떠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흔히 말하는 ‘내려놓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갈등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김: 한국교회에서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교회가 많다.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하면 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배: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에 원로목사나 담임목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원로목사의 태도는 앞에서 말한 ‘내려놓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고생하며 개척한 교회가 이만큼 성장했고 아직도 목회할 힘이 있는데 교회법에 따라 은퇴하게 되니 아쉬움 또는 억울함(?)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교회 일에 관여하게 되고 이것이 간섭이 될 수 있다. 은퇴했으면 그 교회와 연을 끊고 가지 말아야 함이 하나의 방법이다. 담임목사의 관점에서 보면 원로목사의 목회 방법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이 보이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뜯어 고치고 심지어는 주보 내용부터 바꾸고 있다. 이것이 갈등의 출발점이 된다. 교인들 가운데는 원로목사에게서 훈련받은 사람이 더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김: 아름다운 리더십의 승계를 위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일까?배: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으나 두 가지로 정리하자. 첫째, 원로목사의 내려놓음이고, 둘째, 담임목사의 계승과 보완이다.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과 보완을 통해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원로목사가 되고나니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인데 중요한 것만 말하라.배: 교회마다 사람마다 형편이 다를 것이다. 주변의 형편을 모아서 대답하겠다. 첫째, 경제적 어려움이다. 교회에서 예우가 있기는 하지만 은퇴 후의 경제적 고통은 모든 원로나 은퇴목사들이 겪는 문제이다.둘째, 건강 문제이다.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은퇴 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는 것을 보는데 평소의 건강관리도 중요하고, 은퇴 후에도 꾸준히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경제적 여건과 맞물리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셋째, 처신 문제이다. 은퇴자들의 한결 같은 고민은 주일에 갈 교회가 없다는 점이다. 처음 가면 반겨주지만 두세 번 가면 눈치를 받는다. 나도 경주에 살면서 대구의 은목교회(은퇴목사들의 교회)에 주일마다 가서 피아노 반주자 노릇을 한 경험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다.김: 그러면 요사이는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가?배: 대구의 은목교회 피아노 반주자를 하다가, 한동안 경주의 목회자 없는 교회에서 설교자로 섬겼다. 그러다가 한 그룹의 성도들이 모여 교회를 개척하고 나를 그들의 목회자로 정하였다. 지금은 은퇴 후의 제2 사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까지 할지 모르나 주일마다 말씀선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기본에의 회귀‘원로목사’,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 원로목사 제도 폐지가 논의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몇몇 원로목사로 인해 교회가 소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제도의 소중함을 지켜 나가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 쌍방의 노력이 필요하다. 원로목사의 ‘내려놓음’과 담임목사의 ‘계승과 보완’이 있어야 한다. 원로목사의 문제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교회 윤리의 문제이다. 원로들의 남은 세월이 아름다워지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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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5
  • 학술/ 한복협 ‘성화된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9월 14일 개최한 9월 월례회 ‘성화된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중 채영삼 교수가 발제한 ‘공동서신의 저자들에게서 배우다’를 발췌·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성화는 평생 이루어져 가는 것이고, 그 누구도 스스로 ‘성화된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신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책임이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어떤 공동체이든 ‘지도자’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주께서 교회를 위해 세운 지도자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지혜, 그분의 성품과 인도하심은, 그분께서 양 무리 위에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글에서는 특별히 공동서신의 저자들인, 주의 형제 야고보, 사도 베드로 그리고 사도 요한이 공동서신을 기록하면서 초기 교회를 위해 어떤 역할과 책임을 다 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거울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공동서신의 저자들인, 주의 형제 야고보, 사도 베드로, 그리고 사도 요한은 모두 초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들이었다. 세 분 모두, 성화의 문제에 대해 깊은 경험과 식견을 갖고 있었고, 서신들도 남겼는데 그것이 공동서신이다. 초기 교회에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바울의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다른 쪽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런 교회의 어른들이 초기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전체 교회를 이끌었다. 이분들은 성화된 건강한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초기 교회 전체에 대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첫째, 그들의 인생의 처음보다 끝에서 더욱, 예수를 닮은 삶의 본(本)을 교회 앞에 남겼다.그들은 화려한 경력의 교회 최고 지도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결 같이 그들의 인생의 끝에서 그 높은 지위를 떠나, 지역 교회의 장로들로서 봉사했거나, 가장 중요하게는 인생의 끝에서 결국 그들의 만났던 예수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삶의 본을 그들을 따르는 양 무리 된 교회 앞에 남겼다. 먼저 야고보서를 쓴 ‘주의 형제 야고보’는, 두 번째 총회장으로 초기 교회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실질적 권위자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가난한 자의 방벽’이요 ‘의인’으로 칭송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사두개인의 총수 안나스 2세에게 죽임을 당한다. 순교했다. 야고보서 2장을 보면,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를 외모로 보고 차별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살았을 때 영광의 주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철저한 변화이다. 그는 끝까지 대부분 가난했던 초기 교회 성도들을 끌어안고 죽었다. 젊었을 때 예수를 ‘외모로 보고 판단’한 실패를, 그의 신앙의 노년에 온전히 회복했을 뿐 아니라, 이런 점에서 초기 교회에게 ‘세속적 가치관에 따른 차별’이 없는 ‘순전한 교회,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긍휼의 교회’라는 이정표를 남겼다. 베드로전후서의 저자인 사도 베드로는 어떠한가? 그는 초대 총회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초기 총회장의 자리를 일찍 내려왔고, 아나톨리안 반도 쪽으로 나가 선교 생활을 오래 했다. 베드로가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는데, 그는 오랜 목회 생활을 통해, 결국 그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했고, 베드로전서를 통해 세상을 맞닥뜨린 교회를 위한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한 찬연한 십자가의 신학을 남겼다. 그는 또한 세속적인 거짓 교사들에게 농락당하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신적 성품과 바른 성경해석을 천명하는 베드로후서를 남겼으며, ‘함께 장로 된 자’로서 지역 교회들을 지키다가,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본(本)받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벧전 2:21)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또한 초기교회를 위해 요한서신과 계시록을 남긴, 사도 요한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요 예수님의 어머니까지 맡은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그 역시 로마 변방으로 나아가 에베소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오래도록 선교 사역을 했다. ‘함께 장로 된 자’라든지 자신을 ‘장로’로 부르는 표현은, 베드로나 요한이 자신을 지역교회의 장로들과 동일시하며 그들 속으로 들어가 섬김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벧전 5:1; 요이 1; 요삼 1). 초기 교회에서 예루살렘의 주요 총회장이요 지도자였던 이들은 모두 그 인생과 사역의 끝에서, 선교 사역, 지역 교회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생애에서 처음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고 온전하게 알게 되었고, 바로 그들이 평생을 걸쳐 알게 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본을 온 교회에게 남기고 떠났다. 둘째, 교회의 ‘온전한 신앙(Regular Fidei)’의 균형과 보완을 위해서 힘썼다. 또 한 가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었던 이분들은 당시 흩어져 있던 전체 교회가 ‘온전한 신학과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신학적, 신앙적 균형을 잡아주며 새로운 도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그 신학과 신앙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에,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오해했던 자들이 많았다. 율법의 정신과 요구는 거부하는 무율법주의, 반율법주의자들이 생겼고, 더러는 신비체험을 주장하면서 거짓교사로 발전해 갔다. 초기 교회는 이처럼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잘못 이해하고, 세속적인 거짓 가르침들과 빗나간 성령운동, 말씀을 떠난 은사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전체 교회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이들은 온전한 신학, 온전한 신앙을 위해, 설교하고 가르치고 서신들을 남겼다. 또 한편으로 초기 교회는, 유대교 뿐 아니라, 로마라고 하는 거대하고 무서운, 유혹과 핍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교회는 이를 대처해야 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그 막중한 과업을 바울에게 맡기지 않고, 그들 자신이 감당했다. 그 결과가 바로 공동서신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유대교 특별히 율법을 중심으로 한 옛 언약 구조와 씨름했다. 복음을 그렇게 전달하고 정리해서 서신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로마에서 순교했다. 상징적이지만, 그 이후로 로마 세계 속에 남겨진 초기 교회가 당면했던 세속주의의 거센 공격, 그 갈등과 비난, 오해와 핍박, 그리고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의 공격, 무엇보다 점점 더 황제숭배에 빠지며 적대적이 되어가던 세속 국가와의 갈등과 충돌이라는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성화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서, 말씀 계시에 합당한 분별력과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공동서신을 통해 초기 교회를 로마라는 세상으로부터 지켜냈고 ‘세상을 이기는 교회’로 세워나갔다. 기존의 문제와 새로운 도전 앞에서 교회를 위한 신학적, 목회적 지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교회를 온전케 했던 것이다. 셋째, ‘솔로’(solo)가 아니라 ‘코러스’(chorus)로 함께, 온전한 교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갔다. 예루살렘의 초기 지도자들은, 안디옥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사도 바울을 잘 세워주면서, 그의 약점을 보완하고, 전체 교회의 신앙의 균형을 위해 ‘함께’ 일했다(행 15장). 초기 사도들의 정신은,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보완과 협력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역사하시는 놀라운 구속 사역을 눈으로 보고 확인한 이상, 그들은 복음과 교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는 정신으로 일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거나 그에게서 친히 배운 사도들이 운집해 있었던 예루살렘의 권위와, 그를 보지 못했으나 부활하신 주의 명령을 따라 이방으로 나아갔던 전초기지였던 안디옥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연합하는’ 초기 교회의 두 캠프였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첫 번째 예루살렘 총회에서 보듯이,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은, 안디옥에서 올라온 사도 바울과 협력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일을 함께 이루어갔다. 또한 점차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 생기자,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을 비난하거나 바울에게 모두 책임지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각기 교회를 위해 서신을 쓰고 가르침으로 ‘협력과 보완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단지 바울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함께’ 교회 전체의 신학적, 신앙적 건강과 균형을 위해 힘을 합쳐서 일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공동서신이다. 초기 교회의 정신은 ‘나 홀로’가 아니라, ‘함께’였다. 그것이 또한 공동서신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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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8-10-0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8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며, “내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메시야이다.”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자신을 감추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를 들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신적 존재,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했고,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지낸 요한의 제자 안드레는 그의 형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메시야”라고 말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들은 것은 아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신랑-하나님”으로 희미하게나마 암시하신다.예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많은 설교자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결혼잔치와 같이 흥겨운 종교, 결혼식장에서 물처럼 무색, 무미, 무취, 무용한 자들을 포도주와 같이 색깔이 있고, 냄새가 있고, 맛이 있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아주 유용한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종교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 아주 적절한 본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다. 또한 신학자들에게는 그곳에 유대인의 정결의식에 따라 놓여 있는 돌항아리에 물을 채웠기 때문에 이 사건이 신자들의 구원과 연관이 있는 새로운 율법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그럴듯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처음 일으키신 기적이기 때문에 기독교란 것이 어떤 종교인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아주 적절한 서론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이 주제를 택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들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의 정체를 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독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찾으려고 해야 하고, 설교자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믿도록 해야 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본문에 나타난 대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분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가히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혼인집에 온 사람들은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물 떠온 하인들 외에는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인들도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과정을 안 것은 아니고 결과적으로 물이 포도주 맛이 났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순간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적은 오로지 창조두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범인들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적 존재, 곧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마치 신랑의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이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결혼이란 계약이었다. 그래서 결혼하는 당사자는 반드시 계약서를 썼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는 데 있어서 신랑은 이웃 친지를 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포도주를 내놓아야 했다. 이 두 가지는 법으로 정해져 있다. 에쉬눈나 법 27, 28조, 함무라비 법전 128조를 보면 계약서를 쓰고, 잔치를 베풀어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아마도 잔치를 베풀고 신랑은 여러 축하객들 앞에서 신부를 옆에 세워놓고 “오늘부터 이 여자는 나의 아내이고, 나는 이 여자의 남편이다”라고 결혼 선언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통하여 두 젊은이는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부부로 인정받고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포조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예수께서 포도주를 공급해주고 계신다. 예수께서 신랑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적 능력을 가지시며, 신랑역할을 하는 예수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구약성경으로 잠간 돌아가야 할 것 같다.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그의 신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시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시내 산 이르러 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고자 계약을 맺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예식을 올리고,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 장로들과 결혼 잔치를 가졌다(렘 31:31-34).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짓게 하여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들의 거처로 주어 살게 하셨다. 마치 신랑이 그의 신부의 거처를 마련해주는 것과 같다. 이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남편으로 맞아 아내의 도리를 지켜, 순종하며 살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남편,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섬겼다. 영적인 간음과 행음을 행한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이들과 이혼하셨다. 이들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시라아, 이집트, 바빌론으로 내쫓아 버리고 결국 망하게 내버려 두었다(렘 3:8). 따라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행음한 백성, 간음한 백성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애하신 분이시기에 언젠가 다시 이혼한 그의 아내를 다시 데려와 재혼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선지서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이혼한 아내를 다시 불러 아내로 불러들이는 것이다.그런데 가나 혼인잔치 집에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그 예수님은 보통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아자 신랑이다.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다(요 1:34).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오신 예수님은 바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불렀는데 이는 비록 마리아가 그의 육신의 어머니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자 관계가 아니라, 창세기 3:15에 나오는 뱀의 머리를 짓밟을 후손을 낳을 여자를 암시하는 말이다. 마치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듯이, 아담의 아내 하와, 뱀의 머리를 짓밟을 후손을 낳을 여자, 그는 마리아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는 바로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신랑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가 신랑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내 안에 거하라”(요 15:4)고 말씀하시고, 성경에서는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의 신부로 부르고 있다.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 사건 가운데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계신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많은 이때에 예수께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수께서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자신의 정체를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놓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때는 죽고 부할하신 후에야 온전히 드러난다. 참 신랑이시지만 자신의 신랑 됨을 감추신 메시야 예수님은 바로 우리 모두의 신랑이시다. 요한문서의 시작은 가나 동네의 혼인 잔치집에서 감추인 신랑으로 나타나시지만, 그 마지막은 요한계시록 19 장에서 어린 양과 그의 성도와의 장엄하고 찬란한 결혼식으로 끝나고 있다. 그때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어린 양, 예수님의 신부들이 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9-21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㉑ 교회연합운동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혼자하기 보다 힘을 합하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 교회 역시 교단이 다르고 주장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복음 안에서 힘을 합하면 그 열매가 증식된다.문제의 탐색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어떠한가? 협력의 아름다운 전통은 사라지고 파벌과 분열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이것을 어이해야 할까?사례의 탐구연합운동에 대해서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말들을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정일웅 박사와 이야기를 나눈다.김남식(이하 김): 현재 한국교회연합운동은 어떤 상태에 있다고 보는가? 정일웅(이하 정):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진보교회와 보수교회로 분리되어 각각 따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이다. 진보교회의 연합운동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통하여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그간 산업화시대에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이루는 일에 역할이 참으로 컸다. 그리고 인권보호운동에 앞장서는 일은 진보교회 연합운동의 특징이었으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한국교회다수인 보수교회와의 교제는 외면한 채, 타종교와 어울리며,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KNCC의 신학정체성을 의심하게 하였다.그렇지만, 보수교회의 연합기관으로 알려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도 역시 현재,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유는 지난 10년 이래로, 한기총은 보수교회로부터 그 대표성이 불신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단성을 의심받는 단체들을 회원교단으로 영입한 일로 인하여, 기존 회원교단들이 대거 탈퇴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합동교단을 비롯하여 통합, 고신, 합신, 성결교, 침례회 등은 모두 회원자격을 스스로 유보해 놓은 상태에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회원은 여의도순복음교단을 비롯하여 약 200여개의 군소교단과 각종 선교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보수교회의 연합기관으로서 명칭만 유지할 뿐, 그 참된 역할은 거의 정지된 상태에 있는 모습이다.김: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연합운동은 어떤 장점이 있었는가? 정: 되돌아보면, 한창 조선 땅에 복음 선교가 진행될 때,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의 협력관계를 위하여 1905년에 개신교선교부통합공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인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가 창립되었다가, 1923년에 해체된다. 그리고 1924년 조선선교부연합공의회와 장감연합협의회가 통합하여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설립되었고, 교파를 뛰어넘어 복음선교사역을 도왔던 것이다(선교지역 분활). 그리고 초기의 한국교회연합운동은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도 힘을 모았고, 특히 독립선언문발표에서도 교파를 초월하여 기독교지도자 16인이 참여하게 된다. 비록 8.15해방과 더불어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가 새 출발을 했지만, 역사를 정확히 들여다보면, 그 당시 첫 대표회장을 비롯하여 연합회를 주도한 인물들이 친일파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교회역사연구가 밝혀주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선교사들에 의한 연합운동은 한국교회를 위한 복음전파와 선교사역에 집중했던 것 분명하다. 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 무엇보다 먼저, 한국교회연합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원하시는 일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있다(요 17:22-23, 엡 4:1-6, 고전 1:10-13). 되돌아보면,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끼리 서로 교파끼리 경쟁하느라고 지쳐있다. 교회가 연합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을 잊고 있는 모습이다. 비록 세상의 인간적인 삶은 경쟁과 불가피한 관계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경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경쟁을 뛰어넘어 서로 돕고 협력하는 형제자매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김: 앞으로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참된 방법론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정: 교회연합의 방법론은 오늘날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삶의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지나친 소유욕과 경쟁심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적인 사고와 태도에 익숙한, 참으로 성숙한 신앙적 사고가 요망된다. 지금까지 신학적인 명분 없이 분열된 교단들은 겸손하게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기존 교단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다(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하에 나누어진 200여개의 군소교단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기존 교단들의 신앙역사와 전통을 존중하여 이 시대에 요구되는 더 큰 복음 사역의 대의를 위하여 양보하며, 연대(연합)하여 큰 힘을 발휘하도록 협력하는 일이다. 그간 한국교회가 분열하면서, 항상 내세운 명분은 신앙교리의 신학적인 이해의 차이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그간 좁아진 신학적인 사고의 지평을 활짝 넓히는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고후 6:13). 보수신학도, 진보신학도, 보수교회도, 진보교회도, 양 연합회를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도 각자의 기득권 지키기 논리를 중지하고, 복음적인 시각에서 주님의 말씀을 성찰하고, 순종을 실천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한국교회연합에 대한 대응과 방법을 거기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김: 한국교회연합운동의 대 사회적인 역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정: 한국교회의 대사회적인 역할은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그것은 교회가 이민족과 국가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주된 역할이며,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가시화하는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모든 인간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까지 한국교회연합운동이 보여준 대사회적인 역할은 그간 한국정부들(보수와 진보정부)의 대변인 역할에 준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의 분열은 한국사회의 정치를 혼란하게 하고, 사회여론을 분열시키는 일에 공헌한 것뿐인 셈이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역할은 언제나 사회적 가치관(이념)의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성경적이며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사회적인 이념들을 바르게 통찰하여, 진리로 섬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실현을 중심으로 사회와 정치와 인간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올바른 지혜와 진리를 제시하는 역할이어야 한다.김: 이번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가 주최한 제3회 목회자컨퍼런스의 취지와 목적은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정: 저희 목회자컨퍼런스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회복하자”란 주제로 준비되었다. 취지와 목적은 현재 경험되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의 위기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답과 지혜를 찾으려는 교회개혁운동이다. 지금 흔들리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불신받는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방안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회개운동의 불씨가 되기를 원한다. 또한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가 만나는 연합운동의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랍니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9-2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7
    요한복음의 서론에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장엄한 팡파례가 울리는 데 이어 이를 증언하는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 안드레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그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신 계시의 말씀과 말씀대로 성령이 예수님위에 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그의 제자 안드레는 스승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그와 하룻밤을 보낸 후 그의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물세례를 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설명을 하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풀을 뜯는 양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면 이 경우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양이라는 의미가 가능하겠지만 사람을 가리켜 양이라고 말한다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양이란 식용이나 성전에서 제사용으로 사용되는 동물이다. 양은 사람들의 부를 가늠하는 척도도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빈부를 가늠하는 상황도 아니다. 세례 요한은 이 양에 한 마디 부가 설명하는 말이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죄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에서 사용하는 속죄양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위한 속죄물로 봤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생각이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제물로 신에게 바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시고 금하는 일이다. 여기서 세상 죄라는 말은 어느 한 개인의 죄를 위한 속죄물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죄양이라는 표현은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아무에게나 사람을 가리켜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세상 죄를 지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는 세상사람 모두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세상사람 모두가 죄인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지고 가며,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을 어떻게 보고 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점들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러한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로 세우기 위하여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곧 왕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대왕께 불순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물론 그의 통치권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담은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초래한 자였다. 결국 아담과의 그의 통치권 아래 있어서 어담과 연대성을 형성한 모든 만물은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심판 아래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아담이 망쳐놓은 세상의 모습이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함께 다 쓸어버려야 존재들이다. 이 세상을 살리려면 누군가 아담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값을 지불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의 언약적 통치권 아래 있는 어떤 피조물도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대표자로서 죄 값을 치를 자격이 없다. 죄인이 자기 죄 값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새아담으로 세워 그를 통한 대속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죄인들에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로부터 교육을 시작하신 것이다. 어린 양을 잡아 대속의 의미를 보여주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 때 까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워 새아담의 정체와 새아담을 통한 대속 방법을 교육하기 위하여 제사제도를 만들어 모형 훈련을 실시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적 대속 사역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이 바로 새아담, 새언약의 대표자로서 자기 몸을 옛아담과 그 언약적 연대성 아래 있는 세상의 모든 죄, 모든 죄인들을 살라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죄 값으로 바칠 제물이라는 의미로 쓴 표현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언약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의 죄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할 새아담의 속죄자 역할을 머리에 두고,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말한다(1:34).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물 많은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죄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던 선지자였다.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하여 길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왕의 행렬이 지나가기를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는 지나가는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의 하나가 안드레였다. 안드레는 에수님을 만난 후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고 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것이다. 메시야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히브리어이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며, “기름부음을 받은자”(the one who has been anointed)라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대제사장이 새로운 왕이나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손으로 머리에 안수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 인정하셨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같은 왕(메시야)을 보내시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 하룻밤을 그와 함께 머물고 내린 결론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이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어떻게 감히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는 그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을까? 안드레와 그의 친구는 그의 선생,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라 오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랍비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알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거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라. 그러면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 하룻밤 동안 그의 거처에서 머물렀다. 우리는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안드레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거처를 물었고,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처를 물었지만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자는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과의 하룻밤이 안드레가 메시야임을 깨닫게 한 것이다. 하룻밤 동안의 예수님과 함께 함, 예수님과의 동거, 예수님과의 교제,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안드레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난히 관계 문제를 많이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요한복음의 주제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이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며 시작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과 함께 하시고자 인간에게 찾아 오셨다.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밤을 보내셨다. 그분께서 머물고 계신 곳에 이 두 사람이 머물렀다고 했다. 여기서 “머물다”는 말은 헬라어 “메노”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하신 예수께서 최후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신 말씀이 “내 안에 있어라”라는 말이다. 한글은 “내 안에 있어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내 안에 머물러라”이다 (15:1-8). 똑같이 “메노”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위한 최후 기도를 하실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계속 그 안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17:21). 요한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이 “머물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마지막 승천하시기까지 “머물다”라는 말로 끝났으며, 복음서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머문 기록이다. 물론 이 말은 예수께서 성도들 안에 성령으로 “메노”, “거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 “그와 함께 머물렀다”는 말은 새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안드레가 만난 예수님은 “왕”이었다. 엣 아담이 왕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자였듯이, 새 아담도 새로운 왕으로 오셔서 아담을 대신한 새통치자로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새로 모으시려는 것이었다. 옛 아담에 안에 있던 자들은 이제 새 아담에게 와서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새 아담을 그의 왕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그는 옛 아담과의 연대성으로부터 풀려 나와 새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들어와 새 왕과 연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 아담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새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내 안에 있어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좋은 일, 희생 봉사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자신은 항상 예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지, 새언약의 연대성이라는 관계성을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안드레에게 단순하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시고 그 밤을 함께 보내셨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 새언약의 연대성 안에서의 우두머리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가서 자기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왔다. 그리고 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삼년 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안드레에게 들었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같은 대답을 하고 이에 더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는 데, 이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안드레의 선생,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합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의 3년을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가진 후 내린 예수님에 대한 결론이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9-14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⑳ 지역사회와 교육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교회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적 기관이지만 지역사회 속에 존재하며 지역사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좋은 관계는 전도의 계기가 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문제의 탐색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심지어는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는 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에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사례의 탐구지역사회에서 사랑으로 봉사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들이 많다. 그중 한 교회의 사역을 찾아본다. 전형적인 전통교회에서 변혁을 시도하고 좋은 결실을 거두고 있는 혜성교회 정명호 목사를 만난다.김남식(이하 김): 혜성교회의 특징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정명호(이하 정): 혜화동과 성북동의 경계가 되는 서울성곽의 언덕 위에 위치한 혜성교회는 1948년에 설립되었고,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의 75~80%가 종로구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구 성북동과 삼선동 지역의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지역교회(Local Church)이다. 2005년 봄 제가 부임하기 전, 2003년부터 2004년까지의 주일 성인출석 평균 인원은 700여명이었는데, 출석인원의 연령별 통계를 보면 70대 이상이 40%가 넘는 한국의 전통적인 고령화 교회가운데 하나였다. 참고로 2005년부터 2015년까지의 신규 등록자들 가운데 70% 이상이 20~40대 성도들이었다.김: 전통적 교회의 변혁 도전의 의미가 무엇인가?정: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담임목사는 교회 갱신과 변혁을 위해 많은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역시 이전과는 다른 많은 목회 정책들을 실행했지만 “새로움”이라는 키워드 보다는 “해야 할 일들을 더 바르게”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였다. 교적의 허수 정리, 직분자의 자질 강화, 성도들의 신앙훈련 강화, 행정 체계 수립, 방만한 교회조직 정비, 투명하고 철저한 예산 수립 및 보고 등을 진행하면서도 표방하는 표어는 “누가 보아도 그러해야 할 모습의 교회가 되는 것”이었다. 전통교회의 변화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비전의 공유와 충분한 의사결정 참여를 통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더 바르게, 더 잘하는 것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리더십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다.부임 이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을 세워가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도행전적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역과 마을을 품는 외부지향적 사역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세상의 복이 되는 Blessed Blessing”의 방향성을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김: 교육목회를 통한 변화를 시도하는 줄 아는데정: 저는 총신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교육과 상담을 전공하면서 사람을 전인격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통해 목회의 중요한 골격과 방향성을 수립해나갈 수 있었다. 혜성교회의 목회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발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성도를 “신앙발달”, “인간발달”, “사역과 은사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이며 다차원적인 전인교육으로서의 평생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혜성교회의 교육목회는 단순히 주일학교를 성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어린아이로부터 성인에 이르는 삶의 전반을 포괄하는 목회 철학적인 기초를 가지고 각 연령 발달단계의 특성에 따른 정확한 키워드를 따라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구성해나가고 있다. 교육의 주체를 가정-교회-학교라는 공동체 중심으로 설정하여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통해 삶의 기초를 배울 뿐만 아니라 커리큘럼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신앙의 역동성을 공동체 차원에서 전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김: 실행중인 프로그램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정: 혜성교회 목회에서는 교육과 가정을 강조한다. 혜성교회의 교육을 간략하게 명명한다면 “전인격적 평생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일교육, 주중교육프로그램, 성인교육, 주중교육기관 운영까지 아우르는 그림을 가지고 실현해 나가고 있다. 다음세대 교육을 중심으로 한 마을, 곧 지역사회와 연계된 교육활동들을 위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1) 혜성교회 내의 가정과 연계된 교육활동은 ▶마더와이즈, ▶아빠와 함께하는 아기학교, ▶어와나, ▶교사 & 부모 가족대회 ▶전 세대 예배, 교육기도주간 등이다.2) 혜성교회와 지역사회가 연계된 교육활동은 ▶혜성교회 장학, ▶교육훈련장학, ▶우리들 세상 등이다.3) 혜성교회의 가정과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교육기관은 ▶한아름유치원, ▶러빙스쿨, ▶이야기 학교 등이다.김: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정: 프로그램에 대한 개별적인 반응을 전부 서술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소비되는 프로그램이 아닌 외연(外延)을 확장하는 외부중심적인 방향에서 설정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마더와이즈나 아빠와 함께하는 아기학교와 같은 경우에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비그리스도인들까지 참여하여 기독교 가치에 입각한 올바른 관계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어린이 축제 ‘우리들 세상’은 매해 5,000여명이 다녀가는 지역의 축제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소비 중심의 오락문화에서 건전한 즐거움의 가치를 추구하며, 가족단위의 프로그램을 지역사회에 제공함으로써 세상 속의 교회가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매김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결실을 맺고 있다. 매해 방문자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참여자들의 즐거운 반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장학 프로그램과 러빙스쿨, 한아름유치원의 운영은 교회가 지역 공동체 안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회의 울타리를 낮춤으로써 복음에 직면할 계기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건전한 지역문화의 정착을 위한 일환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정: 혜성교회는 “교회-가정-학교”라는 기본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가는 전인격적 성장을 꿈꾸며 사람을 세워나가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특별히 올해 교회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인근의 경신중고등학교에 연건평 3500평 규모의 강당과 체육관을 건립하여 기증하기로 협약하고 건축을 준비 중에 있다. 같은 지역 안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와 기독교교육기관이 협력하여 지역 안에 복음의 확장과, 하나님 나라 인재 양성과,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형성을 위한 아름다운 동역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기본에의 회귀목회자의 교육철학과 실천이 교회를 변혁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지역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이 작업은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9-1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6
    다윗은 그의 시 23편을 여호와의 선함과 인애하심이 자기를 따르실 것이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토록 거할 것이라고 그 끝을 맺고 있다. 여호와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그를 인도하시는 것이 아나라 그를 따른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일대푸니”라는 말은 “라다프”는 “추격하다”(pursue)의 미완료형으로 전쟁용어이다. 전투에서 도망가는 패잔병들을 추격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 자칫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망가는 다윗을 붙잡기 위하여 추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 문맥을 살펴보면 그러한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뒤를 따라가며 보살피신다는 의미가 더 맞을 것 같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양치는 목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목자들이 아침에 양들을 몰고 초장을 향하여 나갈 때는 대개 양들 앞서 나간다. 그러나 저녁이면 양들이 앞서고 목자와 목자의 개가 뒤따르며 양들이 곁길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양들을 좌우로 그 방향을 조종하여 집에 도착하여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6절은 귀향 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그의 말년을 생각하며, 그의 귀향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곁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의 선함과 인애하심으로 그를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셔서, 그가 영원토록 여호와의 집에서 거하는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다윗은 이 땅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이 땅에 묻힘으로 그의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야 할 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적인 신앙은 다윗뿐만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진 소망이고 신앙이었다. 아브라함은 본향을 생각하고 찾았으며, 만일에 그가 떠나 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곳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 11:13-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액면 그대로의 그곳이 가나안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모세가 쓴 “바다의 노래”(출 15장)를 보면 “주님의 인애로 주께서 구원하신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으로 그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십니다.”(출 15:13)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고, 방금 홍해를 건넌 상황인데,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가는 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처소”이다. 히브리어 “나바”라는 말은 “거처”(dwelling place), 특히 유목민들이나 양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가,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거하며 양들을 먹이다가 다시 자기 본 집으로 돌아올 때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출 15:17에도 “주께서 주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주님의 유업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시여, 그 처소는 주께서 거하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오 주님, 그 성소를 주님의 손으로 만드셨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주님의 유업의 산이라는 말은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유업(유산)으로 주실 산이라는 뜻이고, 바로 주께서 거하시려고 만드신 곳이란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은 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할 성막을 만들라고 명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궁극적인 뜻은 그의 백성과 동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이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편기자들은 항상 주님이 계신 곳과 주님을 사모하고 살았다. 시편 26:8; 27:4; 84:1-2 등은 시편 저자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거처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바라며 쓴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신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 그보다 하나님 그 자신이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애하심이 무엇인가? 먼저 선이란 무엇인까? 히브리어 “톱”()이라는 말은 “좋다”(good), “즐겁다”(joyous), “적절하다”(suitable), “바람직하다”(desireable)등 그 사용 범위가 다양하고 넓은 말이다. 윤리적인 면에서 사람의 성품을 가리켜 “선하다” ‘착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이 어휘는 한 마디로 그 의미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그 어휘가 사용되는 그 문맥을 살펴 그 의미를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예를 살펴보면 성경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진 자를 고치는가 엿보고 있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나?“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선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 악은 목숨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 생명이 육신의 생명이든, 영혼의 생명이든 그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선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살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젊은이가 그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영생의 길을 묻자,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막 10:17, 18). 하나님 한 분 외에 사람을 살리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에게도 선하다는 말을 피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한 분 외에서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선하신 것이다. 선이란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지고의 선이다. 하나님이 지고의 선이시다. 다윗은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그를 지켜 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살렸고, 자기를 지켜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인애라는 말은 개역성경에서 “인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헤세드”()라는 말은 “변함없는 사랑” “한량없는 사랑” “faithful love” “steadfast love”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많은 경우에 언약적 문맥 속에서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언약적 사랑”(covenantal love)이라고도 지칭하는 자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의 반역적이고 배신적인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 사랑을 인애, 곧 “헤세드”()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는데(요한 13:1), 이때 “아가파오”라는 말을 쓰고 있다. 신약적인 말로 하자면 “헤세드”가 바로 “아가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한량없이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다. 이스라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그를 팔아먹으려고 자리를 뜨는 유다에게도 떡을 떼 주셨다. 그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 배신의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다. 사람은 변할 지라도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도 없고, 끝도 없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이고 아가페이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뒤를 따라 다녔고, 다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과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이 자기를 지키시고 자기를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자기 발걸음을 지켜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여호와께서 계신 그 여호와의 집에 그가 이르게 하실 것임을 확신하며, 그때 그는 여호와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교제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8-31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⑲ 북한교회 세우기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통일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상황 속에서 통일이 된다면 한국교회는 북한 지역에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문제의 탐색통일이통일이 된다면 정부는 정부대로 할 일이 있을 것이고 교회는 교회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중 핵심적인 것이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70년 이상의 교회없는 ‘영적 황무지’를 어떻게 다시 일굴 수 있을까 심각한 문제이다.사례의 탐구북한에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으로 기도하고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북한교회세우기연합 사무총장이며 사랑교회 원로목사인 김중석 목사를 ‘북한교회세우기’의 열망을 듣는다.김남식(이하 남): 북한교회세우기연합의 역사는 어떠한가?김중석(이하 중): 북한교회세우기연합은 1995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안에 세워졌던 북한교회재건위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에 의해 모든 대북 정보라인이 없어질 때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하여 북한교회재건위원회도 해산을 맞게 되었다. 그 후 8년이 지나 노무현 정권 말기에 다시 시작할 것을 논의하고 2006년 5월과 7월에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협의회’에 참석하여 한국교회 대북관계 연합 및 북한교회 재건 준비를 역설하였는데 여기서 열화와 같은 공감을 얻어, 17개 교단 남북관계위원장 연석회의를 누차 열게 되었고 ‘북한교회세우기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시 7개 주요교단장 연석회의를 열어 창립을 다짐하고, 2006년12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주요 17개 교단 연합체로 출발하게 되었다. 명칭을 ‘세우기’로 한 것은 ‘재건’이라고 하니까 북한에서 공연히 트집을 잡기를 ‘재건’은 영어로 Reconstruction 인데 ‘교회란 건물이 아니다’면서 지속적으로 남한의 동조자를 통하여 훼방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시작하면서 북한의 3천 교회 재건만 아니라 1만2천 교회 개척을 의미하여 ‘재건’과 ‘개척’을 아우르는 말로서 ‘세우기’로 하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12년 동안 ‘교회세우기’뿐 아니라 ‘북한기도결연운동’, 북한선교전문대학원, 사단법인 우리탈북민정착기구 등으로 발전하였다.남: 북한교회세우기 전략은 무엇인가?중: 북한교회세우기는 3대 원칙이 있다. 첫째: (연합의 원칙) 북한에 전도하고 복지화 하는 모든 기관, 단체나 개인은 하나로 연합한다. 둘째: (단일의 원칙) 북한에는 교단과 교파를 지양하고 단일기독교단으로 세운다. 셋째: (독립의 원칙) 한국교회가 도와야 할 것이나 속히 자립 자전 자치의 독립교회로 세운다. 이 3원칙은 북한교회재건위원회 시절에 한국교회 보수-진보 막론하고 공감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원칙 아래 북한 3천 교회 재건과 1만2천 교회 개척은 이단이 아닌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추진한다. 재건은 1997년에 발간된 [북한교회재건백서]에 나타난 대로 17개 교단 산하 교회들이 2105개 교회를 재건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해외한인교회 200교회가 참여하였고, 기감 388교회 기장 51교회 구세군 40교회 성공회 61교회 개인50교회 도합 2850개 북한교회를 재건할 남한 및 해외교회가 정해졌고 재건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 20년이 지나고 보니 정해진 교회에 많은 변화(교역자 바뀜. 교회명칭 주소 바뀜. 교회 형편 바뀜 등)가 생겨 재건 의지를 확인하고 재지정하는 필요가 생겨서 재지정 작업을 하게 되었다. 북한기도결연 전략이 있다. 북한의 각 시군리(노동자구) 단위를 남한의 각 시군구 단위로 기도결연작업을 수년간 실시하여 인구, 지리 역사 문화적 연계성, 향후 발전성 등을 고려한 ‘기도결연 원칙’을 작성하고 이를 전국의 지역 교회연합체에 통보하고 동의를 얻어 전국적이고 남북을 통틀어 기도결연을 완성하였다. 복음화뿐 아니라 복지화를 아울러 지향하는 전략이 있다.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실 때 배고픈 자에게 떡을 먹여주시고, 병든 자에게 병을 고쳐주셨다. 전도법에도 ‘씨를 심기 전에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해야 하듯 전도할 때도 복음의 씨를 심기 전에 사랑으로 대상자의 마음을 열어 마음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한다. 북한에 문이 열리면 북한주민에게는 복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식량 의료 교육 경제발전 등 수많은 필요가 있다. 따라서 북한의 각 지역단위로 들어갈 때는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교역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의사 간호사 약사 등 의료진도 들어가고, 영어 한문 컴퓨터 등을 가르칠 교육선교사, 그 지역의 경제를 개선시킬 농업 공업 기업 사업 전문가도 들어가야 한다. 자격을 갖춘 북한선교사를 파송한다. 한 사람의 부적격한 사역자가 전 사역을 망칠 수 있다.국가와 협력관계를 형성한다. 통일 상황이 오면 남북간에 혼란을 방지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북통행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5년 시한으로 즉시 공포되고 발효될 것이다. 그리고 남북 통행하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인데 그 자격 유무는 국가에서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해당 기관에 추천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종교일꾼도 마찬가지여서 북한에 들어갈 종교일꾼이 정당한 자격을 갖추고 정당한 사유로 가며 사후 관리와 통제가 가능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므로 국가는 신뢰할 만한 종교기관에 추천을 의뢰하게 된다. 여기에 북한교회세우기연합 같은 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남: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중: 첫째: 현 상황에 휩쓸리지 말자. 시대를 보는 눈은 신문이나 방송보다도 말씀과 기도에서 온다. 북한에 대한 환상이나 남한의 여론몰이를 경계하고 남한에 대한 정확한 시각과 북한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자. 둘째: 북한의 정부와 백성을 분리해서 보자. 북한 정권은 믿지 말고, 북한 백성은 영육간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기도하고 도울 준비를 하자. 셋째: 나름대로 북한선교를 위하여 재정을 마련하자. 매달 얼마씩을 모으거나 헌금한다. 넷째: 북한선교 훈련을 받자. 여러 기관이 있는데 초보에서 전문으로 점점 심화훈련을 받자. 남: 연구서 [통일정신]을 내었는데 그 개요가 어떠한가?중: 1993년 총신대학교 교수시절 안식년을 얻어 미국 시카고 근교 휫튼대학 빌리그래함 센터에서 [교회는 통일을 대비하라]를 썼다. 20여 년을 지나 2007년 다시 쓴 것이다. 통일정신은 이승만대통령이 1904년 29세 나이로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을 빗대어 붙인 이름이다. 이승만은 나라의 독립과 유지발전은 미국같이 기독교 국가가 되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기독교립국:기독교정신으로 나라를 세운다]인데 앞으로 통일한국도 똑같이 ‘기독교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학문적이 아닌 ‘국민교과서’로써 평이하게 쓴 것이다. 그 내용은 언제 통일이 될 것인가? 왜 통일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통일한국을 세우려 하는가? 어떻게 통일을 이룰 것인가? 누가 통일을 이룰 것인가? 선결문제와 후속조치들, 로 이루어졌다.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한국은 사랑과 의, 즉 기독교적 가치관 위에 헌법헌장 헌법 각종 법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자유, 정치적인 민주, 경제적인 평등인데 여기서 평등이란 기회의 평등을 의미하고 산술적인 평등은 아니라 했다. 이념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인데 여기에 어떤 다른 것들, 특히 인민민주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주의를 섞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한 중심의 통일이 되어야 하며, 평화공세에 속지 말고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협상보다도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통일에 대한 국민의 분명한 의지를 전세계에 분명히 알려야 한다. 국제관계나 동맹의 도움도 우리 의지가 분명치 않고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한국은 아직 이념투쟁이 끝나지 않았으며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종북주의를 척결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기본에의 회귀‘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웠던 평양에 장대현, 산정현 교회들이 세워지고, 선천, 정주, 신의주, 원산에 십자가 종탑이 높이 서는 날을 꿈꾸어 본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8-30
  • 기획/귀신론 : 한국민속의 귀신·성서의 귀신
    어느 민족이나 영적 세계를 말할 때 귀신(鬼神)의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그 귀신이 무엇인가 하는데 대한 견해는 각기 다르다. 아예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귀신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문화전통에 따라 각기 그 견해가 다르다. 그러면 귀신은 무엇인가에 대해 한국 민속에서의 귀신관과 성경의 귀신관을 살펴본다.Ⅰ. 한국 민속에서의 귀신관먼저 한국인의 귀신관을 살펴보자. 한글사전에는 귀신을 죽은 사람의 혼령,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화복(禍福)을 내려 준다고 하는 정령(精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 귀신의 생성동양인의 귀신관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어떤 사물이 변하여 귀신이 된다고 믿는다. 그 중에서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 관념이다.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은 세 종류로 분리된다. 즉 혼(魂) 귀(鬼) 백(魄)으로 나누인다. ‘혼’은 양기(陽氣)의 응집으로 청명한 하늘로 올라가 신명(神明)이 되고, ‘귀’는 음기(陰氣)의 응집으로 공중에 떠 구천(九天)에 존재하고, ‘백’은 본래 흙에서 왔으므로 땅으로 귀의(歸依)한다. 그리고 공중에 있는 ‘귀’는 ‘백’이 땅으로 들어간 후 ‘위패’나 ‘지방’에 붙어 신주(神主)로서 영접되어 인가(人家)로 들어온다. 이와 같이 사람은 죽어서도 그 생명이 천·지·인에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이 셋 중에 ‘귀’와 ‘백’이 살아있는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진다. ‘백’은 풍수상 자손들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귀’는 1년에 한 번씩 자손 4대까지 제사를 받는다. 그런데 ‘귀’가 살아있는 후손으로부터 충분한 조위(弔慰)를 받지 못하면 원한을 가지고 그 음기(陰氣)가 흩어지지 않고 구천을 떠돌며 귀신(鬼神)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2. 귀신과 신명그러면 신명(神明)은 무엇인가? 신명은 말하지면 선한 귀신인데, 대체로 ‘귀’와 상반되는 성질의 소유자이다. ‘귀’는 음(陰)에 속한 것으로 어둡고 컴컴한 것을 좋아하지만, ‘신명’은 양(陽)에 속한 것으로 청정하고 밝은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신명은 하늘에 있다. 여기에서 하늘과 공중은 다르다.귀신은 사람에게 집힐 때 무엇인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사람과 교섭을 하지만, 신명은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고, 또 예(禮)가 아닌 것에는 응답하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신명은 부정(不淨)을 싫어하여 부정한 제사에는 강림하지도 않는다. 귀신은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존재이지만, 신명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동양의 기론(氣論)에 의하면 모든 물질에는 반드시 기(氣)가 있다.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의 힘으로써,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있다. 그 기가 응집된 것을 정(精)이라 하고, 그것이 발현(發顯)하는 것을 영(靈)이라 한다. 양기의 정령(精靈)을 신명이라 하고, 음기의 정령을 귀신이라 한다. 어떤 사물에 음양의 조화가 깨져 그 기물이 파손되면 양기가 부족하게 됨으로 귀신이 되는 것이다.3. 귀신의 거쳐귀신은 그 성질이 유음(幽陰)을 좋아하고, 파괴하는 것을 좋아함으로 음기가 많은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음습한 곳, 울창한 숲속, 어두운 동굴, 오래된 우물, 옛연못, 성터, 폐허된 절간, 허물어져 가는 누락, 고목나무, 산언덕, 바위틈, 계곡 등에 살고, 집안에는 파손되었거나 낡아빠진 물건 등에 깃들인다고 믿는다. 이것들은 모두 양기가 부족한 곳이기 때문이다.사람도 어떤 어러운 일에 휘말려 고민에 빠졌거나, 건강이 허약해졌거나, 근심에 쌓여 마음이 약해져 그 속에 음이 승할 때 귀신이 들어온다는 것이 한국 민속의 귀신관이다.Ⅱ. 성경의 귀신관성경에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천국복음 사역 중 귀신을 쫓아낸 기록이 복음서마다 자주 등장한다. 사도들의 행적에도 귀신 쫓은 기록이 많다.1.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마 10:1),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눅 8:29). 예수님의 지상사역 중에 귀신을 쫓아낸 역사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더러운 영’(프뉴마 아카달톤)으로 설명했지만, 그 귀신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힌 바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인간의 죽은 어떤 존재가 귀신이 된다는 말은 없다.2. 인간을 해롭게 하는 악령들성경에서 인간을 해롭게 하는 악한 존재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첫째는 ‘사단’이다. 그러나 성경도 사단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힌 곳이 없다. 다만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이사야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하나님의 뭇 별위에 보좌를 높여 지극히 높으신 자와 비기리라 하다가 음부 구덩이에 빠치운 자’(사14:12-17)라고 했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성산에서 왕래하였던 기름부움 받은 그룹이었지만 범죄함으로 추방된 자’(겔 28:14-19)라고 했고, 사도 요한은 ‘하늘의 전쟁에서 사단이 그의 사자들과 함께 추방되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7-10)라고 했다.또한 사단은 많은 악령들을 거느린 우두머리로 등장한다(마 8:28, 9:34).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요 8:44),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힌 자요(마 13:19), 예수님을 증오하여 유다의 마음을 건드려서 배신하게 한 자(요 13:27)이며, 귀신들의 왕이다(마 9:34).둘째는 ‘마귀’이다. 성경에서는 사단과 마귀는 언제나 단수로 표시되어 하나의 세력을 나타내고 있다. 마귀는 사단의 다른 이름이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9).셋째는 ‘귀신들’이다. 귀신들은 악령이다(마 12:43-45). 사단의 심부름꾼들이다(마 12:26,27). 귀신은 사람과 짐승 속에 들어가 그것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항상 그 대상을 찾는다. 귀신들은 더럽고 음침하고 사악하다. 귀신들은 사람의 몸에 질병을 일으킨다.3. 사단의 목적사단은 처음부터 그 목적이 하나님과 비기리라는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노린다. 인류의 조상을 유혹할 때도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자신이 인간을 부리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자기만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조종한다.사단은 어둠의 세상 주관자로서(엡 6:12), 우는 사자같이 교회를 삼키려고 덤비고 있다(벧전 5:8).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 사단은 각 민족의 풍속을 이용하여 문화전통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박한다. 귀신은 그 사단이 부리는 악령들이다.그런데 근래에는 신학교 교수들 중에도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가 70년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떤 교수 한 분이 일본 동경 신학교에 연구교수로 잠깐 있다가 돌아와서, 성경에서 예수님이 내어쫓았다는 귀신이란 옛날 미개한 사회에서 정신적 질병을 두고 말한 것이지 실재로 귀신은 없다고 주장했다. 귀신론은 아직도 미정립된 분야라고 봄이 옳다.<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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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30
  • 기본으로 돌아가자-18- 탈북민 선교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한반도를 중심한 평화 논의는 세계의 관심사다. 통일의 염원과 함께 북한을 이탈하는 ‘탈북민’들을 어떻게 돌보고 복음을 전할 것인지가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문제의 탐색탈북민 문제는 한국사회가 안아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또 교회는 이들을 돌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데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과제이다. 사례의 탐구탈북민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헌신하고 있다. 그 중 기독교세계관을 바탕으로 교회와 학교를 이끌고 있는 고신대학교 부총장 임창호 박사를 만났다.김남식(이하 김):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민의 숫자와 그들의 실상은 어떠한가?임창호(이하 임): 2018년도 6월 현재,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의 숫자는 총 31,827 명이다. 여성이 22,776명이고, 남성이 9,051명으로 여성비율이 72%에 해당한다. 10세에서 19세까지의 초중고생에 해당하는 청소년이 3,599명이며, 9세 미만의 어린이가 1,262명이다. 만 7세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학령기 아동 및 청소년은 약 4,000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교육부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17년 12월 현재 대안학교를 포함하여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탈북청소년 학생들은 2,538 명으로서, 약 1,500여명의 학생들이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재학하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있다. 김: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임: 탈북민들은 이 땅에 미리 들어온 통일이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요, 통일의 자원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통일을 준비시키시려고 통일연습 파트너로 이 땅에 미리 보내주신 자들이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동시에 한국사회와 문화와 풍습을 떠나 70여년을 전혀 다른 체제 아래서 살다가 왔다는 점에서 우리와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여정가운데 중국과 제3국을 거치면서 심신에 말할 수 없는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정부도 나름대로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정책적으로 애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갈수록 복잡해지는 탈북민들의 가족 상황을 충분히 뒷받침 하기에는 역부족인 실정이다. 예를들어, 최근 국제결혼 성격의 가족형태를 지닌 탈북민들 입국이 증가하면서, 가정 내에서 세대간, 나라간, 체제간 가치관이나 문화충돌이 빈번해지고 있으나, 이들 가족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컨텐츠나 프로그램이 부족해 가족해체나 범죄 등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출생의 비보호아동을 동반한 탈북여성들의 입국이 증가하고 있어, 비보호아동에 대한 문화적 충격 완화 및 제도권 교육체계로 편입시키는 방안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이에 대한 법적 대책마련도 충분하지 못한 형편이다. 김: 탈북민들의 문화적 충격을 완화할 제도적 마련은?임: 첫째로 이들은 남한 사회에서 상당히 외로움을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 풍습이 다르고, 고향과 가족과 친척 친구를 떠나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해 늘 죄책감을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것을 경험해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늘 죄책감을 갖고 산다. 셋째, 대부분의 탈북민들은 정서적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며, 병리적으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비슷한 불안을 체험하고 있다. 넷째,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열등감,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 괴리감, 의사소통의 스트레스와 두 개의 공존할 수 없는 감정, 생각, 인식, 충동이 동시에 한 사람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심리적 갈등상태인 양가감정 등의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탈북민은 남한사람도 못되고 북한사람도 아닌, 특별한 사람이면서 보통사람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탈북민들이 내적으로 치유되어가며, 힘있게 이 땅에 정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행정적 정책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을 가까이에 서 있는 민간차원의, 또한 교회차원의 적극적이고도 인간적인 돌봄이 더욱 요청되어 지는 것이다.김: 탈북민의 복음화율은 어떠한가?임: 전체 탈북민들의 기독교 신자율은 35% 정도로 보고 있다(2015.7.17. 기독일보 참고). 35%는 전체 탈북민 가운데 11,200명이 기독교인이라는 말과도 같다. 한국 기독교인을 전체 인구 20%로 보는데, 탈북민들의 기독교 복음화율이 한국사람들 보다 더 높은 셈이다.김: 탈북자 선교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임: 2003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한인장로교회 담임으로 사역하던 중, 탈북여성을 만나 교회에 간증집회를 초청하면서 북한선교는 탈북민을 복음화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같은 뜻을 품은 캘리포니아 얼바인베델한인교회 손인식 목사님과 2004년 9월 북한자유를 위한 통곡기도회(KCC)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역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15년 째 이 사역을 섬기고 있다. 김: 탈북민을 위한 부산장대현교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은?임: 2006년 2월, 10년 동안의 이민목회를 접고 한국 고신대학교 교수로 재부임하게 되었다. 2007년 1월 첫 주부터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을 중심으로 개별적 상담과 돌봄을 시작하였다. 모임이 발전되고 수도 늘어나게 되자 2007년 7월 1일, 한 식당건물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당시가 마침 평양장대현교회 부흥 100주년 기념의 해여서, 교회이름을 부산장대현교회라고 지었다. 개척당시 성인 6명 아이들이 3명이었다. 이것이 부산장대현교회의 시작이다. 올해로 설립 11년이 되었으며, 현재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매주 90여명이 출석하고 있다.김: 탈북아동을 위한 장대현학교도 운영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 현황은 어떠한가?임: 장대현교회 성도들의 일부 청소년자녀들이 한국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여 등교거부를 하고 집에 은둔하거나, 어떤 아이들은 서울 경기지역의 탈북대안학교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에 거의 밀집되어 있는 탈북학교를 보면서, 지방에도 탈북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기회가 닿는대로 방송국과 각 교회에서 계몽하고 다니던 중, 2012년 9월, 집사님 한 분이 양로원으로 사용하던 현재의 건물을 무상으로 기증해 주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정부로부터 재단법인을 허가받아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장대현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시설로 리모델링하고 교사를 모집하고, 장대현교회 성도들의 자녀들이 중심이 되어 첫 입학생 12명이 들어왔다.현재는 22명 전원 무상으로 학업을 받고 있으며, 학교 기숙사에서 기숙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전임교사가 10명이고, 이 중 4명이 원어민 영어교사이다. 두 명은 3년 째 장대현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한 원어민 선교사 부부이고, 한 명은 미 국무성 풀브라이트장학재단에서 1년간 파견한 원어민 영어교사, 나머지 한 명은 개인적으로 장대현학교에 1년간 자비량으로 자원하여 온 원어민 영어교사이다. 그 외에 40여명의 자원봉사자 시간제 교사들이 방과 후 수업을 맡아 탈북학생들에게 눈높이 맞춤교육으로 헌신하고 있다. 북한동족을 사랑하는 교사들이 자원하여 매일 방과 후 봉사를 하고 있다. 2016년도에는 8명 모집에 54명의 학생들이 지원하였고, 올해 현재도 6명 모집에 80명넘는 학생들의 입학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중이다. 향후 50명 수용 가능한 기숙사를 학교 옆에 증축하기 위하여 기숙사 부지를 확보해 둔 상태이다. 이 역시 북한선교에 헌신된 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으로 세울 것을 목표로 기도 중에 있다.기본에의 회귀북한 선교의 중요한 영역인 탈북민 선교에 대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헌신자의 노력으로 희망의 빛이 보인다. 이 불씨를 살려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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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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