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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81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인이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이라는 직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천명하였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나 인간 영혼의 어떤 부분을 두고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인간, 곧 자신을 선지자같이 생각하고, 제사장 같이 느끼고, 왕같이 행하는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처럼 만물의 통치자로서의 왕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제사장이라는 역할은 카톨릭 사제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바로 이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 모든 성도들이 다 선지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다 선지자라는 것의 의미를 더 정교하게 파악하고, 강조했더라면 아마 기독교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선지자는 단순히 장차 있을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다. 그 근본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이다. 그는 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몸짓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대언하라고 하신 말씀이 장차 이루어질 예언일 수도 있지만 과거나 현재의 일을 깨우쳐 주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선지자를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입”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하여 죄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새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회복의 계획을 세우신다. 하나님의 회복은 말씀을 불순종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세상, 그리하여 적대감과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사 2:1-4; 11:1-9; 렘 31:31-34; 겔 47등).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직무를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물론 노아, 아브라함,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이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 주셔서 그것을 전하고, 해석해주시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게 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직접 언급하신다(창 20:7). 말씀을 통한 구속 역사는 모세에게 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시고 그의 말씀을 그의 입에 두겠다는 약속, 곧 대선지자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약속(신 18:18) 을 통해서 그 윤곽이 분명해진다. 모세는 70인의 장로들이 그에게 임하신 성령과 같은 성령을 받은 장로들이 예언을 하는 것을 보고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가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민 11:29)는 희망을 토로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그들의 입에 주시고,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을 실현해 가신다. 그리고 때가 되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예수께서 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사장적 직분을 감당하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 곧 새로운 왕으로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수행하게 된 것이라면, 그의 생전에 온 유다 땅을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제자들을 양성하신 일은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선지자로서의 그의 사명을 마치신 후, 그의 부활 승천 직전 제자들을 불러 선지자 임명식을 가지셨다.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으라(make a disciple maker)는 명령을 주시는 데 이 명령이 선지자 임명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이 대사명을 기록한 마 18:16-20이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소명 기사의 양식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예수께서 이들에게 주신 사명은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위로부터 말씀을 받아 가르치는 일은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을까?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당시의 제자들에게 그가 명한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선지자적 사명을 주시고, 새 언약의 선지자로 임명하셨다. 그러나 선지자는 위로는 하나님의 인증이 필요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인정이 있어야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는 일꾼들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불과 같이 갈라진 혀 모양으로 임하셔서 사도들과 제자들의 입을 터치하셨다. 이와 동시에 제자들은 각 나라 말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입에 손을 대심으로 “너는 내 입이다”라고 인을 치신 것과 같이 제자들의 입을 터치하시고 선지자로 세우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이들을 인치신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세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는 위임식이라고 할 수 있다(주: 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47-61)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신 선지자적 대 사명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초월한 명령이다. “모든 민족에게” “세상 끝날까지”라는 말씀은 이 명령이 단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나가서 앞으로 계속 이 일을 이어갈 “제자를 양성하는 제자들”(disciples making disciples) 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적 사명을 위임 받았다. 그러면 오순절 이후의 제자들은 언제 새언약의 선지자로 위임을 받는 것인가? 물세례를 받을 때이다. 우리 죄인들은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천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함께 받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예수님도 대선지자로의 사명을 개시하실 때 물세례를 받으셨고, 바로 이 때에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셨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을 때에 함께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상징이 바로 물세례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새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위임을 받는 것이다. 세례는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새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위임식이다. 세례를 받은 자는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자는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일을 계속해야 할 제자를 양성해야 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모두가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종교 개혁자들이 가르치고 천명한대로 모두가 선지자 노릇을 해야 한다. 목사가 세례를 줄 때에 세례 받는 성도에게 반드시 그가 선지자가 되었음을 공포하고, 그의 일생이 선지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세례교인의 교회에서 할 일은 십일조 내고, 주일성수하고, 공동회의에 참석하는 일 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전도하고 말씀 가르치는 일이 세례 받은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 임을 강조하고 가르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적 사명은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선지자들과 시도들을 통하여 주어진 정경적 계시, 즉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개신교회는 카톨릭 교회와 대항하여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 됨을 많이 강조하고, 우리 성도들의 만인 선지자 됨을 가르치지 않았다. 나아가서 만인의 왕 됨에 대해서도 목회자와 장로들의 왕 됨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평신도들의 왕 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우리 개신교는 이제 만인이 선지자 됨을 강조하고, 선지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에 비로서 모세의 소망(민 11:29)이나 하나님의 종말적인 비전(사 11)이 성취되며 새로운 부흥의 역사 일어날 것이다. 개신교는 이제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을 강조하는 것 보다 만인 선지자직을 더 강조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3-08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④ 복음전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옛날 우리 교회의 벽에는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서 전도하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지금처럼 유행하는 전도훈련이나 강습도 없이 글자 그대로 기도하고 나가서 전도하는 소박한 방법이었다.문제의 탐색세월이 흘러 다양한 전도기법이 소개되고 있지만 교회성장은 뒷걸음치고 있고 교회를 향한 안티그룹의 비판은 도를 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조롱받고 ‘목사’가 ‘독사’가 된 안타까운 현실이다.현대인들이 죄악으로 완악하여 전도가 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 해이해져서 전도하지 않는 것인가? 아마 이 두 가지 모두가 정답일 것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들이 요란한 이벤트에 관심이 솔리고 나가서 현장전도를 하는 일에는 외면하였다.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역에 대해 우리의 각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전도를 등한시하는 풍조속에서 전도와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자.사례의 탐구전도가 되지 않는다고 힘들어 할 때 전도를 통해 교회성장을 도모하며, 또 해외선교를 도모하는 안양 동부교회 김동권 목사를 만났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은퇴하여 대접을 받을 나이에도 현장전도를 하고 있는 김 목사는 그 교회를 개척하여 36년째 시무하고 있다.김남식(이하 남): 김 목사를 볼 때마다 ‘전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또 현장전도에 집중하고 있으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전도에 올인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김동권(이하 동) : 부족한 것이 많으나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믿고 노력하고 있다. 목회 초년시절에 전도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마음은 뻔한데 전도가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이른바 복음의 체험을 했다. 알고 있던 복음이 믿음의 고백되고 그러자 나의 메시지가 달라졌다. 사람이야 그대로 인데 메시지가 변화하니 전도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도행전적 교회 모델’을 이루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남: 그러면 전도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원시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것인가?동: 사람들마다 여러 가지 전도방법이 있겠으나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하는 방법은 삼 단계로 된다. 첫째, 현장의 이해이다. 이렇게 말하면 전도자나 전도지역에 대한 연구로 이해하기 쉬우나 나는 이것을 ‘복음의 이해와 체험’으로 본다. 전도자가 먼저 복음을 이해하고 이것을 체험해야 바른 전도를 할 수 있다.둘째, 현장 실천이다. 전도란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논리의 제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전도 대상자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 일에는 목회자가 선봉에 서야 한다.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하면서 목회자는 현장에 나가지 않는 것을 많이 본다. 이건 아니다. 목회자가 현장에서 앞장서야 한다.셋째, 현장의 확장이다. 전도라고 하면 자기 교회 부흥에 집중하는데 우리의 전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을 둔다. 그러니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남: 그러면 구체적으로 전도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 김 목사가 몸으로 실천하는 전도방법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라.동: 이건 이론화라기보다 나의 경험을 정리한 것이다. 나의 설명을 김 박사가 욧점을 정리해 준 것을 토대로 말한다.첫째, 파상의 원리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원리이다. 복음이 예루살렘→온 유다→사마리아→땅끝까지 번져가는 파상의 원리가 전도에 적용되어야 한다. 목회자→부교역자→중직자→평신도로 퍼져 나간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전도의 열정이 핵심이다.둘째, 자비량 원리이다. 우리 교회는 매월 많은 헌신자가 전국 각지에 나가 전도를 실천한다. 3박4일간 전도하는데 일체 경비를 본인이 부담하는 자비량 전도이다. 또 헌신하는 성도들이 교회 주변의 지역전도를 하고 있다.셋째, 결실의 원리이다. 우리는 전도할 때 ‘우리 교회에 오라’고 하지 않는다. 가까운 교회에 가기를 권한다. 우리 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관심을 모운다.남: 나는 동부교회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다. 2015년에 전국 각지에서 많은 결신자를 얻은 것을 알고 있다. 김 목사의 지론은 전도사역에 목회자가 앞장 서야 한다고 하는데 좀 더 이야기해 보자.동: 목회자는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의 사역을 나타낸 말이다. 나는 좀 무식하게 원리적 사역을 꿈꾼다. 목사로서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야 평신도들이 따라온다.남: 한국교회에 전도의 열의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가 복음화되고 기본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동: 한국교회의 체제를 ‘선교적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싸우고 비판하는 일을 지양하고 복음전도에 우리의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교회성장은 저절로 되어질 것이다.기본에의 회귀우리는 전도를 논하면서 전도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안양 동부교회는 여러 가지 악조건을 이겨내며 전도와 선교에 올인하여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1만여 명의 교인이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다.전도는 구호가 아니다. 전도란 ‘은혜의 선포와 정의실현’(Preaching Grace and Doing Jutice)이다(김남식 번역, 「복음전도」참조). 전도란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이며 축복이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데 있다.한국교회를 ‘선교적 교회’로 만들고, 목회자의 가방 속에 전도지가 있는 그런 소박한 교회가 되어지기를 꿈꾼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논리가 아니라 현장의 실천으로 살아있는 복음을 전하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3-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0
    예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아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여 하늘로부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성령 세례를 받으셨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린 것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때, 이는 분명 시편 2:7의 말씀과 연관된 구절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언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삼하 7:14; 시 89:26-27). 또한 그는 분명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새로운 세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새아담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다(사 7:14; 9:5-7; 11:1-3; 6-10). 따라서 예수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위로부터 예수님을 가리켜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 3:17)라고 말한 것은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에게 그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정말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새아담이라면 그는 당연히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자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 곧 메시야 되심의 자격을 검정하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복음사역을 시작하심에 있어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유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릇 모든 지도자들은 그가 위로부터 수여받는 직분을 시행하려고 할 때 인사말로 앞으로 자기가 할 일에 대한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천명하는 것은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이 해야 할 마땅한 순서이다. 예수님은 그가 받은 세 가지 시험을 통하여 앞으로 그가 메시야로서의 해야 할 일과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의 방법을 제시하는 목적도 있음을 알 수 있다.첫번째 시험은 식욕을 시험하는 것이다,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께 이 보다 더 달콤한 유혹은 없을 것이다. 이 시험을 물론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는 시험이다. 뱀도 아담에게 바로 식욕을 유혹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그 지식나무의 열매는 “먹음직 했다”(3:6)고 했다.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먹고 싶은 유혹을 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옛 속담에 “사람이 사흘을 굶으면 이웃집 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배고픔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요한 1서에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육신의 정역, 눈의 욕망, 이생의 자랑”(요일 2:15)을 들고 있는데,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라고 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탐하는 목록이고, 창세기나 요한1서에서 서로 병행되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식욕을 얼마나 조절하고 억제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의 필요성을 정제하시고 영의 양식을 더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40일을 금식한 극한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영의 양식을 먼저 찾고 먼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그의 복음 사역은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서 헐벗고 굶주린 그의 동족들에게 아무리 현실이 비참 할지라도 먼저 살기가 힘들어도 육신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먼저 구하고, 돌들로 빵을 만들겠다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땀 흘려 일하여 먹고 살려고 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첫번째 시험에서 승리하셨다.두번째 시험은 명예욕이다. 자기 과시욕이다. 아담은 유혹의 열매가 보암직했다고 했다. 요한은 안목의 정욕이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사람의 눈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전시욕에 사로잡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마귀는 예수께서 말씀으로 지혜롭게 대답하시기 때문에 자기도 말씀으로 새로운 도전을 한다. 예수께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한다. 그러면 시편 91편 11-12절에 있는 말씀대로 천사들이 그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떠받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성전은 요사이 웬만한 빌딩 10여층 정도 높이였다. 여기서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그를 받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전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쳐다보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메시야를 향하여 경배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쉽게 메시야로 인정받고, 온갖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을 것이다. 구태여 고생하며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가 없이 아주 쉽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으신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과 자신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믿기를 원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자신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정체를 스스로 밝히셨다. 우리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나치게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쉽게 성공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누릴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귀 권세나 명예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나를 지켜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세 번째는 소유욕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예수께 주겠다고 유혹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물러가라.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 하셨다.”고 응답한다. 허리를 굽혀 절 한 번만 하여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면 그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이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쿠네요”(προσυνε、ω) 라는 말은 사람 앞에 엎드려 발이나 옷에 입을 맞추거나, 상대방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땅에 입맞추는 것을 의미하나, 보통 신적 존재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자세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세는 단호하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신 것이다. 마귀와의 대화나 협상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불의한 세력을 대항하고 그들의 악을 지적하셨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고개 숙이고 악수 한번만 하셨더라도 좀 편한 복음사역을 하실 구 있었을 텐데, 계속 이들의 위선을 들추어내고, 헤롯대왕을 향하여 여우같은 간교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질타하셨다. 세상 나라를 얻기 위해 불의한 세력들과 손을 잡지 않으신 것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불의의 세력과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손을 잡는 것은 정도가 아니고 결국은 그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 넣는 것이다.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마귀의 유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끝내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 분에게서 떠나갔다.”(눅 4:13)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는 또 다시 예수님을 찾아 올 것이다.마귀의 시험은 새아담으로서 자격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이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시험은 앞으로 예수께서 하실 복음사역의 성격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도 식욕, 명예욕, 소유욕 등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고 그 욕심을 불의한 쉬운 방법으로 채우도록 부채질한다. 그러나 땀을 흘리지 않고 얻는 빵, 수고와 고난이 없이 얻어진 명예,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여 얻어진 재물은 그에게 영광을 안겨 주기는 커녕 오히려 뼈아픈 수치와 비참한 종말을 가져다 줄 뿐이다. 마귀의 유혹은 한번 이겼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 대문 곁에서 올가미를 가지고 우리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식욕과 명예욕과 소유욕을 제어하고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다. 우리 성도들은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을 배우려고 힘을 쓰는 것 보다는, 우리들의 취약점을 파고드는 마귀들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시는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려고 힘써야 한다. 그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2-23
  • 해설 / 한기총 제24대 대표회장 선거를 둘러싼 계속되는 논란
    정관·규정 무시한 선거 진행… 반복되는 파행 한기총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최성규 목사)의 초법적 행태가 점점 그 도를 지나치며,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를 또다시 파행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미 앞선 선거 파행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선관위를 향하고 있지만, 선관위는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또다시 무리한 해석과 초법적인 운영을 통해 한기총 선거를 논란으로 이끌고 있다. 상식이 무너진 한기총 선거지난 선거 파행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광훈 목사가 제기한 ‘선거실시가처분’을 법원에서 인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선관위원장 최성규 목사는 소 제기 당사자인 전 목사와 사실 확인서를 작성해 준 이용규 목사, 이태희 목사 등이 선거 파행의 주범으로 단정하고, 이에 대한 치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대다수의 여론은 한기총 선거 파행의 근본적 원인이 선관위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선관위가 법과 원칙을 무시한 선거 진행과 선관위 권한을 뛰어넘는 무리한 해석으로 선거에 대한 논란을 키웠으며, 사실상 지금 벌어지는 각종 소송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지적이다. 선관위가 이번 선거에 임하며 정관이나 선거관리규정에 없는 내용을 자의적인 판단으로 선거 진행에 이용했다. 이는 선거관리규정 제12조 1항 ‘본 규정에 명기되지 않은 사항은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의로 시행한다’는 조항에 근거한 것인데, 상식을 벗어난 운영과 판단이 난무한 상황에 과연 이 조항이 선관위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준 것인지에 대한 비난이 계속 이어졌다. 선관위의 1차 선거 파행 논란먼저 선관위는 증경 대표회장들의 출마를 막았다. 이는 정관 제19조 1항 ‘대표회장 임기는 1년, 1회 연임에 한하여 할 수 있다’에서 ‘연임’을 ‘중임’으로 한정한 것으로 즉 임기가 끝나고 곧바로 출마는 가능하지만, 회기를 건너 뛰어서 재출마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관위는 한기총의 질서 확립을 내세웠지만, 앞서 길자연 목사의 선례가 있었기에 이러한 선관위의 해석을 두고 많은 논란이 일었다. 후보등록자들에 신원조회서를 요구한 것도 문제가 됐다. 선거관리규정에서는 대표회장 후보 제출 서류로 8가지(주민등록등본·가족관계증명서, 명함판 사진, 소속교단 경력 증명서, 소속교단 추천서, 이력서, 소견서, 회비 완납필증, 발전기금 납입필증)를 요구하고 있는데, 신원조회서는 이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선관위는 신원조회서 제출의 이유로 한기총 지도자로서의 도덕성이 당연히 검증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선거규정에도 없는 서류를 요구하는 것은 권한 밖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소속 교단 문제는 1차 선거 파행의 핵심이었다. 선관위는 전광훈 목사가 소속한 예장대신 교단이 한기총의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후보 심사에서 탈락시켰다. 하지만 전 목사는 이러한 선관위의 판단이 규정에 맞지 않다며, 가처분을 제기했고, 그 결과 법원은 전 목사의 손을 들었다. 법원은 이번 가처분 판결에서 정관 제5조(본회의 회원은 본회의 목적에 동의하는 한국기독교의 교단과 단체로 한다)와 제6조(본회의 회원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를 들어 교단과 단체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했다. 이와는 별개로 선관위가 문제로 삼는 소속교단이 회원교단이 아니기에 후보 자격이 없다는 것은 선거관리규정에는 전혀 명시되지 않은 사안이다. 최 목사는 당시 판단의 근거로 ‘역사와 전통’이라고 항변했지만, 정관과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사안인지라 많은 공감을 사지는 못했다. 속행 선거에도 논란 계속1차 선거 파행으로 선관위가 다시 구성되어 선거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전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먼저 선관위원장에 최성규 목사가 다시 임명된 것에 대해 한기총 내부의 반발이 매우 큰 상황이다. 증경 대표회장들을 포함한 일부세력들은 한기총 선거가 파행된 주된 원인이 최성규 목사에 있음에도 이를 다시 임명했다며 이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이 뿐 아니라, 현재 진행되는 선거가 제24대 대표회장 재선거가 아닌, 지난 정기총회 정회에 따른 속행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선관위는 새로 꾸려졌다는 점이다. 재선거가 아닌 이상 선관위는 당연히 이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관위는 새롭게 꾸리고, 최성규 목사는 선관위원장에 다시 임명하는 매우 이해할 수 없는 진행을 했다. 후보 등록에 있어 가처분에서 후보 자격을 인정받은 전광훈 목사 뿐 아니라, 엄기호 목사에도 후보자격을 부여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에 김노아 목사는 법원에 효력정지가처분까지 제기한 상황이다. 선관위는 가처분 판결대로 “정관 6조에 근거, 모든 회원은 피선거권이 있으니 엄기호 목사에게도 후보자격을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엄기호 목사의 1차 탈락 원인이 후보 자격에 대한 문제가 아닌 등록서류 미비의 문제 였기에 이러한 해석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김노아 목사와 관련한 각종 의혹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조사를 펼쳐 논란을 키웠다. 글로벌선교회 김희선 장로는 김노아 목사의 학력과 목사안수 이력 등에 심각한 의혹이 있다면서 이를 선관위가 직접 조사해 줄 것을 2차례 요청했지만, 선관위는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조사에 임하다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 장로는 김노아 목사와 관련해 한 눈에 보기에도 분명한 오류가 있는 서류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이에 대한 확실한 조사를 펼친 뒤 후보 자격을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관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혹에 대한 증거가 너무도 명확했던 터라 이를 두고도 제대로 된 조사를 진행하지 않는 선관위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제기됐다. 갑자스레 후보자 공개청문회도 취소해 논란이 되고 있다. 선관위는 이번 속행 선거에 임하며, 짜여진 일정대로 차질없이 선거를 진행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지난 19월 예정된 공개청문회를 하루 남기고 이에 대한 취소를 발표했다. 공개 청문회는 선거관리규정 제7조 선거관리위원회의 직무에 명시된 사항으로 선관위는 선거에 있어 후보자 검증을 위해 공개청문회를 1~2회에 걸쳐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선관위가 선거관리규정에 명시된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지적이 일었다. 애꿎은 후보들 피해 가중이번 한기총 선거 파행의 주된 원인이 선관위에 있음은 분명하다. 법과 원칙을 한참 벗어난 선관위의 운영은 이제는 정상으로 되돌리기 어려워 보일 정도다. 특히 이미 한번 파행으로 큰 타격은 입은 한기총이 오는 2월 27일에도 선거를 치르지 못한다면, 한기총의 정상화는 한동안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선거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다름 아닌 후보들이다. 특히 엄기호 목사는 선관위의 줏대없는 판단에 등록과 탈락을 반복하다가, 이제는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재선거 소송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애초에 선관위가 제대로 된 선거 원칙을 지켜, 선거를 진행했거나, 아니면 한번 결정한 사안을 그대로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한국교회 연합단체가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한기총이 새 대표회장을 뽑기도 전에 온갖 논란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해 한국교회 전체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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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3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③ 성경읽기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 신앙양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나가서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생활 스타일로 자리잡고 불신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로 정착되었다.문제의 탐색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성경읽기에 힘을 쏟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 이류가 어디에 있을까?첫 번째는 한국교회 설교의 변질이다. 기복주의와 성공주의를 설파하는 이른바 번영신학이 판을 친다. 강단의 변질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형태를 바꾸어 놓았다.교회에 갈 때 성경책을 가지고 가지 않고 스마트폰의 성경을 보거나 아니면 강단 위의 대형스크린에 나오는 성경 구절을 본다.두 번째는 사회 풍토의 변화이다. 책읽기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출판계나 문화계에서 아우성칠 정도이다. 일반 교양서적도 읽지 않는 판국에 성경읽기는 사라져가는 미풍양속 정도가 되고 말았다.이런 양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삶의 태도를 찾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이다. 비록 성경읽기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루터기의 새순과 같은 신자들이 있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기본자세를 지키고 있음이 소종하다.사례의 탐구말씀대로 믿고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말씀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말씀 운동을 전개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지도자를 만났다.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보통 백파라고 부른다) 소속의 한 소도시 목사이다. 그는 기독교계 고등학교와 법과대학을 마치고 미국유학을 하였다. 그 교단의 특성이 성경대로 믿고 살아가며 날마다 성경읽기에 집중하고 있기에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예수교장로회 총공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또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오늘 질문하는 것은 교단의 역사나 교리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생활인 성경읽기에 대한 것이다. 성경읽기의 필요성이 무엇이라고 보는가?이공회(이하 이) : 내가 소속된 교단은 성경 제일과 성경 전부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목회자 양성의 기본이 된다. 목회자 양성과정(신학과정을 말함)에 입학할 때 성경 20독이 원칙이며 졸업할 때까지 100독을 필수로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자는 것이다. 신앙 있는 교인들은 1년에 10독은 흔히 있고 원로 교인들은 수백 독을 하는 것이 예사이다.김: 그러면 성경읽기 운동의 실제적 모습은 어떠한가이: 초등학생은 1년 1독, 중고생은 1년 1.5독, 일반인은 1년 5독을 기본으로 지도하고 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매장에 1개 문제를 적은 연경지를 사용하도록 권하며 문제는 초등학생도 쉽게 적을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성경 본문에 집중하게 한다. 이 연경지는 일제강점기에 선교사들이 통신강좌로 교인들을 가르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문답지를 적으며 읽는 것을 ‘초등강’이라고 하고, 문답을 외우는 것을 ‘고등강’이라고 한다.목회자의 경우는 60여 가지 주제로 1주제 1독을 원칙으로 하며 40독은 자유읽기이다. 60주제는 공통 주제이며 이후 이런 식으로 성경을 평생 읽게 되면 성경 본문에 충실하게 된다. 목회자의 설교는 성경과 성경의 실행한 경험만을 전하고 다른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김: 일반 교회에서 생각지도 못할 방법이다. 그러면 오늘과 같은 번잡한 세상에서 효과적인 성경읽기의 방법이 무엇이라고 보는가?이: 많은 이들이 성경공부의 방법론에 매달리다보니 변질할 우려도 있다. 성경읽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두 가지라고 본다. 첫째,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성경일기를 권한다. 성경을 읽기 위해 기간을 특정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경우도 거부하지 않으나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속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학생은 학교공부를 하면서, 성인은 직장일을 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꾸준히 성경을 읽는다.둘째, 읽은 말씀의 실천이다. 지식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삶에 적용한다. 그리하면 심령의 변화가 생기고 생활의 성화가 이루어진다.김: 성경연구에 대한 책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 우리 교회가 어떻게 지도해야 할 것인가?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먼저 강단에서 ‘말씀한’을 바로 선포하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성경 읽는 것을 생활화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 목회자들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매일 육신의 양식을 먹듯이 영의 양식인 성경을 먹게 해야 한다. 우리는 평범한 것은 외면하고 어려운 것만 찾고 있다.기본에의 복귀그리스도인은 모든 책의 근원인 성경을 먹고 산다. 성경은 음식이 인간의 몸에 영양분을 주듯이 거룩한 공동체에 영양분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흡수한다. 그것을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 물질대사를 시켜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시원한 물을 대접하게 하며, 온 세상에 선교가 일어나게 하고, 치유와 전도를 일으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행하게 하고, 성부 하나님을 경배하며 두 손을 들어 올리게 하고, 성자와 함께 밭을 씻기게 한다(계 10:9-10).성경은 기독교 영성에서 일차적인 텍스트이다. 기독교 영성은 온전히 성경 텍스트에 뿌리박고 있으며 성경 텍스트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의 개인적인 영성생활은 자신이 좋아하는 텍스트들과 개인적인 상황의 임의적 조합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 텍스트와 일치하는 성령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 영성을 형성하는 일을 우리 자신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 안에 심겨진 계시된 말씀을 따라서 성장한다.그리스도인을 형성하는 텍스트로서 성경의 강력한 지위가 도전받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러 세기를 지나오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방침을 찾고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선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시종일관 그러한 방법들을 거부했고, 이 권위 있는 성경을 계속해서 굳건하게 붙잡았다. 오늘의 우리도 성경읽기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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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 학술/ 한복협 2월 월례회 ‘한국교회가 힘써서 하여야 할 일들은?’
    본고는 지난 2월 9일 영동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2월 월례회 ‘한국교회가 힘써서 하여야 할 일들은?’에서 정현구 목사가 발제한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I. 온전한 복음의 재발견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온전한 복음이다. 한국교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복음의 깊고 온전한 내용을 총체적으로 잘 이해하고 전해야 함에도, 도리어 복음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심지어 왜곡하기도 했다. 그 결과 교회는 한편 한국사회 속에서 깊이가 없는 종교로 각인되고, 이단들이 생겨나는 토양을 만들었고, 교단분열을 야기시켰다.복음에 대한 기복주의적 이해는 시대의 우상을 간파하기보다는 도리어 그것에 굴복하게 만들었고, 구원을 개인구원과 인간구원으로 축소 해석함으로 사회 변화에 대한 책임과 자연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간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복음의 세상 변혁적 비전과 역동성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교회는 마치 이스라엘 왕의 비위를 맞추었던 궁중예언자처럼 되었고, 교회는 변화되어야 할 세상을 도리어 유지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복음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대안, 대조적 비전을 잃어버림으로 복음이 좌우의 진영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도리어 양 진영의 우산 속으로 초라하게 들어가 갇혀 버리는 안타까움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단순한 인간화나 휴머니즘으로 왜곡하는 자유주의적 이해는 십자가 대속의 진리를 약화시키기도 했다.세상의 여러 잡음과 소음의 소리는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교회가 복음의 원음을 회복하고, 그 원음이 주는 감격과 감동을 경험하게 해주지 못한다면 소망을 찾기 어렵다. 복음의 온전하고 총체적 이해를 회복하고, 그것을 강단에서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도 온전한 복음의 발견에서 이루어졌듯이, 지금 교회의 회복도 복음의 재발견에서 이루어질 것이다.II. 교회의 신뢰 회복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신뢰도 회복이다. 교회의 신뢰도 하락과 복음에 대한 불완전한 혹은 그릇된 이해는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 메시지가 얕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수준을 뛰어 넘는 깊고 높은 차원임을 보여줘야 한다.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슈들에 대해 교회는 설교나 강의를 통해서 기독교적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세상보다 더 성숙한 관점 보여줄 수 있다면, 적어도 상식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교회는 신뢰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 균형을 잃어버린, 피상적인, 얄팍한, 독선적인 주장들은 복음의 수준을 떨어뜨리게 했다. 목회자들이 복음과 성경적 관점에서 시대의 이슈들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여러 수단을 통해 돕는 것이 필요하고, 시대의 여러 이슈에 대해서 다수의 교회가 성숙한 견해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교회가 세상보다 높고 성숙한 견해를 표명할 뿐 아니라, 더 고상한 윤리적 삶을 보여줌으로 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신뢰도를 잃어버리면 작은 전투들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결국 큰 전쟁에서는 질 수 밖에 없다. 교회라고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만날 때마다 세상과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면, 그런 위기들은 오히려 교회의 참 모습을 세상에 보여줌으로 교회를 살리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세습, 설교표절, 성적 문제, 재정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수준 낮은 반응들은 그런 기회들은 대부분 위기가 되게 만들었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그것을 다시 끌어 올리는 것이 매우 힘들고 긴 시간을 요구한다. 지속적으로 삶의 어려 문제에 대해 복음적으로 대응하고, 더 높은 견해와 성숙한 삶을 보여줌으로 신뢰도를 다시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III. 왜곡된 신앙의 관습의 갱신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교회 안에 고착된 비성경적 행태들을 찾아내고 고치는 것이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십일조와 헌금을 복을 받기 위한 하나님을 향한 투자(?)로 가르치고, 술·담배하지 않는 것이 곧 좋은 신앙인의 표지처럼 이해되고, 예배는 주일 예배당에서 드리는 것으로 축소되고, 제자가 된다는 것이 교회 안의 좋은 구역장이 되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등의 교회생활에 관한 잘못된 개념과 습관이 매우 뿌리 깊게 박혀 있다.이런 그릇된 관습들은 신앙생활을 주일과 교회당이란 종교적 시간과 공간영역으로 국한시키고, 영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구분짓는 복음의 이원론적 이해에서 나왔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고, 신앙은 사적 종교생활의 한 영역에 갇히게 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복음이 종교가 아니라 삶과 세계를 포괄하는 세계관임을 알게 해줌으로 교회 문화에 대한 전반적 갱신이 필요하다.IV. 교회 지도자의 각성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교회 지도자의 각성이다. 교회의 문제의 핵심은 결국 교회 지도자다. 지도자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교회는 세워질 수 없다. 교회의 사활은 어떤 지도자를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그런데 교회 내의 지도자인 장로와 집사들이 바로 세워지고 있는가? 그들이 그 직분의 의미를 얼마나 바로 이해하고 있는가? 직분을 명예나 권세로 생각하거나, 하나의 호칭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가? 직분자를 세울 때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과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의 구조는 너무나 해묵은 숙제다. 직분의 직임이 무엇인지를 성경과 종교개혁을 통해서 회복된 교회 직제를 통해서 바르게 가르쳐야 하고 그릇된 관행과 제도는 과감히 고쳐야 한다. 건강한 정관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무엇보다 목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지금 교회의 문제의 핵심에 바로 목사가 있다. 초대교회에는 목사가 된다는 것은 목숨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사가 되는 것에 대해 경건한 두려움을 별로 갖지 않는다. 목사의 직임과 책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중대형교회 목사들의 깊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바른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기에 신학교를 세웠지만 신학교가 오히려 질낮는 목회자를 양산함으로 문제의 온상이 되고 있다. 무자격 의사를 배출하는 것이 죄악이라면, 무자격 목회자가 양산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명분은 목회자 양성이지만 실제 목적은 학교 유지와 학위장사로 학교를 키우는 것이 되어 버린 신학교가 실제로 많다. 좋은 목회자를 바로 양성하지 못하면 오늘날교회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신학교 정비와 목회자 수의 축소와 목회자 후보생의 철저한 교육과 양육에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힘써야 한다.그런데 이 문제가 쉽지 않다. 신학교 문제 뒤에는 악질적인 교단분열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원죄와 같은 교단분열이 해결되지 않으면 신학교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신학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좋은 목회자 양산이 막힘으로 교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악순환 고리에 걸려 있다. 교회와 교단이 주도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지 않으면, 결국 세상과 시장이 이 문제에 손대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뿌리 깊은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고쳐가고, 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힘쓰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한국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써가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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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8-02-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9
    잠언 1:7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다”고 가르친다. 물론 여기서 시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레시트”()를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머리”라는 뜻의 연계형이. 우두머리, 첫 걸음,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모든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특히 성경에서 선과 악에 대한 메리즘으로서 지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따먹은 과일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나온 열매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 나무를 가리켜 2:17에 보면 “선과악의 지식의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한글 번역은 “지식”이라는 히브리어 명사형 “다아트”를 동사형 “알다”로 번역하고 있어서 그 의미를 추측하는 데 도움은 되나 지식이라는 말이 선과 악의 합성어로서 “모는” 혹은 “전체”를 의미하는 메리즘(merism)을 이루어 “지식”이라는 뜻을 가진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금하신 것은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지식의 나무 열매이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선과 악에 관한 모든 지식을 아는 첫 걸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경외하다는 말은“이르아”()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fear)는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 모든 피조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심판자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뿐 아니라 반대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고. 그 앞에서 조심스럽고 그의 뜻을 거스릴 수 없는 마음 가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어려워하고 예의를 지키고, 한 마디 말이라도 더 귀담아 듣고, 빠뜨리지 않고 순종하려고 하며,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마음을 쓰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afraid 라는 말과는 구별하여 사용한다. 흔히 성경에서는 경외한다는 말과 반대되는 의미로 “오만하다”(scoffer), “경멸하다”(scorn)는 말을 사용한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자를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오만하다는 말로 히브리어 “레츠”() 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고,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들이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오만한 자들이다. 그들은 다 망했다(창 11장)예레미야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지런히 가르쳤으나 그들은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바빌로니아에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33).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한 오만한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그들의 언약의 주,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고 경홀히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리의 도를 버리고 시류를 따라 떠 다니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들이나 나라들은 절대로 그 생명이 길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혹독한 벌을 내리렸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그들의 땅으로 불러 들여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36). 새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3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새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에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는 전혀 다른 새언약을 맺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두시겠다는 것이다.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돌 판에 새겨 주셨지만 새 언약을 맺을 때는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 판에 새겨 넣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렘 31:33). 사람이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특단의 장치를 마련하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그의 말씀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으시며, 그를 존경하고 그를 가까이 하는 그의 벡성에게 복을 쏟아 부어 주시고 싶은 분이시다(41). 그들 뿐 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기쁘게 복을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사람의 마음에 말씀을 새겨 놓아도 마음 속에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두신다는 것이다(40).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 가운데는 말씀이 새겨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약속이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한 15:4)라고 말씀하신다. 또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 것이다.”(요한 14:16-17, 20).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며,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우리 인생들과 함께 하셨으며, 또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 일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실 일이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2-15).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머므르시며, 우리 속에 그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순종하며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 있게 하심으로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를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능력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난 자라야 네 씨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고(창 21:12), 메마른 고목과 같은 100 세가 된 자기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반드시 이삭을 도로 살리실 것을 믿었다(창 22:5)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가서 그를 번제단에 올려놓고 그를 잡으려고 했다. 순간 천사가 칼을 잡은 그의 손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말씀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고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을,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까지 않으니, 이제 나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았다.”(창 22: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를 향한 경외심을 인정하신 것이다. 롯과 그의 가족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은 경외심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경외심은 다만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 아니다.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고 계신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 주신다는 것은 밥을 차려 주시며 밤을 먹으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밥숟갈로 밥을 떠 먹여 주시는 것과 같다. 사랑하고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배우고 가르쳐야 첫번째 일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하나님께 합당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2-09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② 주일성수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주일성수’는 추억의 단어인가? 주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는 하나의 꿈이 되어 가고 있다. 주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인가, 아니면 놀고 쉬는 날인가?문제의 탐색소속된 교회에 따라 주일에 대한 이해도가 달라졌으나 지금은 주일성수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교회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어느 교회의 주일낮예배 설교를 한 후 그 교회 목사와 장로들이 강사라고 차에 태워 어느 식당으로 가려고 한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필자는 그 교회 목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주일에 식당에 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식당이 있는 듯한데 거기서 점심을 먹지요”. 나를 쳐다보는 느낌은 ‘고루한 율법주의자’를 보는 것 같았다. 장로들은 자기네끼리 수근 대다가 모두 함께 교회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것은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부족함이 많지만 어릴 때부터 주일성수를 배우고 실천하였기에 늙어도 그 가르침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주일성수’의 한계가 어디까지냐? 라는 질문에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다. 주일성수를 주장하면 지금은 복음의 시대이니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고, 또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과 주일이 다르다고 해박한(?) 신학이론을 전개하는 이도 있다. 과연 그럴까? 다원화된 사회일 수록 성경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사례의 탐구많은 교회에서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있으나 ‘재건교회’는 주일성수와 바른예배를 그들의 신앙적 푯대로 삼았다. 그들의 엄격함이 일부 교회에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순수한 신앙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유치부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재건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재건교회의 목사가 되고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재건신학원 원장으로 있는 정정민 목사(재건부평교회)에게서 주일성수의 방안을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 재건교회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어떤 이들은 극우파나 심지어는 이단 정도로 생각하는 이도 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그 노력을 소중히 여긴다. 정 목사에게 성경이 가르치는 주일성수가 어떤 것인지 묻겠다.정정민(이하 정) : 재건교회에 대한 이해 부족은 지금까지 피부로 느껴왔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신약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한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날 즉 ‘안식 후 첫날’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주일에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이다. 이것은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김: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재건교회에 대한 오해들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무지의 산물이라고 본다. 내가 알기로는 재건교회는 철저한 예배와 주일성수를 강조하여 왔다. 재건교회의 주일성수 운동에 대해서 말해달라.정: 재건교회는 일제하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수난 당한 수진성도(守眞聖徒)들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들은 주일예배와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온 힘을 바쳤다. 초창기 지도자들은 목숨을 걸고 이것을 지켰다. 여기에 문제점들이 생겼다.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다가 보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경우가 있었다.또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 전에는 주일에 차를 타지 않고 두세 시간을 걸어서 교회당에 갔으나 버스나 차를 이용하게 되자 주일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하여 일종의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라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도록 가르치고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김: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주일성수를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문제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정: 주일성수의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실행지침을 만들면 율법적 규정이 될 위험성이 있고, 그런 규정이 없으면 사람들이 자기 욕심과 편리대로 나갈 것이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기에 예배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예배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김: 내 경험에 의하면, 나는 미국 남부지방의 보수적인 남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그들의 주일성수 방법을 유심히 보았다. 하나님의 날이기에 온 식구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고 제일 좋은 음식을 주일에 먹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고, 제일 좋은 날’이라는 인식이 심어지는 것을 보았다.정: 우리도 실제적인 방안을 만들고 이것을 가르쳐야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사역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기본에의 복귀필자는 모르는 성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문의사항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인데 자기 교회 목사는 오늘의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입었으니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며 주일예배 후에 장로들과 골프를 치러가고 같이 술을 먹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필자는 대답하기를 “우리는 복음의 자녀이다. 그러기에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율법폐지론자들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반대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지키도록 해야 한다.”장시간의 전화를 통해 교회에 침투해 있는 이른바 ‘반율법주의’ 또는 ‘율법폐지론’의 주장을 실감하였다.주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다. ‘일요일’이 아니다. 일부 교회 주보나 기관 광고에 버젓이 ‘일요일’로 표기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날을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신앙적 노력이 절박한 시대이다. ‘주일성수’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 삶이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2-0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8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11 제자를 만나 이들에게 주시는 명령이다. 사명의 말씀이다. 이 명령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라는 자기 소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 (Disciple Maker), 제자 삼으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세개의 분사, 즉 가라, 세례를 주라, 그리고 지키도록 가르쳐라,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사명 가운데 주 동사는 “제자 삼으라”이다. 그리고 제자 삼는 방법을 설명하는 세개의 동사 (가라, 세례주라,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모두 분사형으로 제자 삼으라는 동사를 수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대사명의 핵심은 제자들에게 Disciple Maker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소명기사”(Call Narrative)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예수께서 신 18:18에 약속하신 대선지자로 오셔서, 제자들을 양성하시고, 이제 새언약의 선지자들을 세우시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1. 예수님의 정체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가 단지 종교 세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의 권위가 미친다는 말씀이다. 내 인생, 내 가정, 내 교회, 내 학교, 직장, 나라, 그리고 온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그의 권위와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시던 예수께서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선포하신다.구약성경의 선지자 소명기사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의 정체를 밝히시듯이 예수께서도 그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것이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신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예, 아니요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 명령임을 인지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순종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명령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거기에는 나의 생사가 달린 명령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신 제자 삼으라는 명령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2. 예수님의 명령 :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예수께서 주신 대사명의 핵심은 제자를 삼는 것이다. 제자 양성하는 자를 양성하는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의 이 대사명의 말씀을 “선교 명령”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전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도 되지만 이 말씀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 제자 삼는 것은 전도, 양육, 교육, 훈련 등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새로운 제자를 양성하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라.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딤후 2:2)라고 가르친다. 사실 바울은 디모데를 그렇게 Disciple Maker로 길렀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대사명은 Disciple Maker가 되라는 것이다. 대중 집회 해서, 대중 세례 주면 마치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전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길가에서 예수 천당 외치고, 사람을 교회로 데려 온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다. 제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Disciple Maker가 될 수 있는가?첫째는 가야 한다. 교회에 가만히 앉아서 제자를 양성할 수 없다. 어디든지 가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있는 어장을 찾아가야 하듯이 사람을 낚으려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찾아가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한다. 서로 소통이 되어야 복음 증거가 되고,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킬 수 있다. 둘째는 세례를 주어야 한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했음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의식이다. 우리 신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정식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세상에 선포한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세상에서 살지만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된, 연대성을 가진 새사람이라는 신분상의 변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받는다. 선지지란 하나님을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해주고, 가르치는 자를 말한다. 세례를 받음으로 Disciple Maker로서의 사명을 받는 것이다.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주는 것은 “모든 족속에게”(땅끝까지, 행 1:8) “세상 끝날까지” 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주신 이 대사명은 당시의 열한 제자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예수께서 그의 열한 제자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시는 말씀이라면 모든 족속이라는 공간적으로 무한대한 대상에게, 무한대한 시간을 두고 제자 삼으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세례란 복음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례 받는 자가 없으면 그 교회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셋째는 말씀과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세례는 신앙 생활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신자로서, 혹은 제자로서의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씀의 생활화이다. 말씀이 몸에 베어야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확고한 말씀 중심의 철학이 세워져야 한다. 말하자면 기독교 인생철학이 확립되어야 말씀을 지키고 행할 수 있다. 성경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이 확립되지 않고는 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세속의 파도, 시류를 거슬려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교육과 훈련과 연습이 없으면 시류에 휩쓸려버리고, 파묻혀 버린다. 따라서 전도한답시고 사람을 설득해서 교회에 데려와서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마치 아이를 낳고, 밥을 안 주거나 교육을 안 시키고, 들나귀처럼 버려 두는 것과 같다. 개역성경은 본문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그렇지 않다. “지키도록 가르치라”(teaching them to obey, teaching them to observe(Matt. 28:20 BGT) )라고 되어 있다. 목적어를 인도하는 부정사를 쓰고 있다. 가르치는 것은 방법입니다. 그 목적은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다. 가르치기만 하면 안되고, 가르치는 목적은 지키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교육할 수 있는 Disciple Maker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양을 칠 수 있는 목자로 양성하는 것이다.3. 예수님의 약속 :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세워 보내실 때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이 앞으로 Disciple Maker로서 살고 일하는 데 결코 순탄한 일 만이 있지는 않을 것임을 전제한 말씀이다. 생명에 대한 위험이 없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잘 이루어져 간다면 구태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약속을 주시고, 이들을 안심시키고, 격려하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방치하거나 무관심하게 버려 두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항상 지켜 보시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항상”이라는 말도 중요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해도 좋을 것인데, 여기에 “항상”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순간순간마다 그의 눈을 우리에게서 떼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또한 세상 끝 날 까지라는 말도 중요하다. 세상은 끝이 있다.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내 인생도 끝이 있고, 정권도, 나라도, 세상도 끝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제자 양성 사역은 중도에 그쳐서는 안될 일이고 하나님께서 끝을 맺으시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2-03
  • 새해기획 / 한국교회의 도전과 응전 (2) : 한국교회가 왜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는가?
    개교회주의 관행 극복하고 성경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다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강물같이 흐르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한다. 즉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교회가 그 사회로부터 불신을 당한다면 어떻게 그 존재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작금에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불신 당한다는 말을 듣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한국기독교가 복음에 대한 소명감도 없고, 열정도 없는 목회자들로 인해 수준 미달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교회당은 마을마다 골목마다 경쟁하듯이 늘어나 지금 한국교회에는 안수받은 목사가 16만여 명에 이른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수준 미달의 목회자가 갑자기 늘어났다. 여기에는 수백 개로 갈라진 장로교단이 한몫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교단 간판 아래 늘어선 교단 신학교에서 배츨되는 목회자들의 문제도 심각하다. 이들 중에는 제대로 된 커리큘럼도 없는 신학교에서 한두 학기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개척교회 간판을 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갈갈이 찢어져 있는 현재의 한국기독교로서는 이를 통제할 기능이 어디에도 없다.둘째, 일부 목회자들의 윤리 도덕성의 상실이 전체 교회를 불신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의 도덕성이 사회로부터 의심받고 있다. 거기에다가 여타 세속적 종교들과 차이 없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며 기복신앙을 팔고, 세속적 물량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교회에서도 우대하며 중용한다. 심지어 돈을 좀 많이 가졌다고, 또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다고 하여 교회에 얼굴을 내밀자 말자 집사로, 장로로 세운다. 신앙논리에 따라야 할 교회의 직분이 돈과 팔려 좌지우지 되고 있는 것이다.셋째,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심이 지나쳐 교회 안에서조차 교회지도자들이 불신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대도시의 일부 목회자들은 그 신분을 망각하고 터무니 없는 호화생활을 한다. 그러다보니 거기에 못미치는 다른 목회자들에게 상대적 빈곤감을 안긴다. 심지어 목회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어떤 인사들은 은퇴위로금이라는 이름으로 ‘퇴직금’을 수십억원씩 챙겨서 교회를 떠나므로 교인들을 크게 실망시킨다. 이런 교회의 모습은 고스란히 세상 사람들에게도 비친다.넷째, 소위 ‘교회세습’으로 교회의 본 모습이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교회세습은 선대(先代)가 목회하던 교회를 그 자녀가 이었다고 하여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수천명 수만명씩 모이는 대형교회 중심으로 교회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체 한국교회에서 볼 때는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얼마되지 않지만 세습되는 그 교회들이 지역사회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한묶음으로 매도되고 있다. 이들 세습교회들은 “교인들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한국교회가 불신당하는 원인 중 하나임엔 틀림없다. 교회분열의 원인 제공이런 이유들로 인해 교회가 지닌 고유한 도덕성이 상실되어 그 권위가 불신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도 목회자의 권위나 교회의 치리를 불신하여 분쟁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사회도 교회의 권위를 우습게 본다. 거기에다 빈기독교 집단들이 끊임없이 교회의 이런 모습을 확대 재생산 하여 세상에 까발리며 공격한다. 여기에 일부 상업주의 언론과 ‘교회개혁’을 앞세운 교회 내의 엔티들이 마치 기독교를 부패한 집단인양 매도한다.결론적으로 한국기독교는 이같은 세속적 도전을 언제까지 방치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도전에 응전하여 교회의 본디 모습을 사회 앞에 내보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첫째, 다시 강조하거니와 가장 급선무가 교회의 강단에서 기복주의적 신앙을 추방하는 일이다. 기복주의자들은 성경의 ‘축복신앙’을 왜곡하여 기복과 기독교 신앙을 혼돈케 만든다. 그리하여 목회자의 제사장적 권위를 강요하고, 교인들을 우민화 하여 신앙과 삶을 유리시킨다. 기독교 신앙은 소시민이 잘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고,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어 그의 신앙과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도록 하는데 있다. 따라서 그의 신앙고백과 그의 삶은 하나여야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둘째, 교회에서 물량주의적 성공주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크고 화려한 교회당을 짓고 이름난 감투를 쓰는 것만이 목회 성공이 아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으로 복음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치관을 교인들에게 바르게 주입시키는 목회자는 모두 성공자이다. 따라서 교계에서 돈있다고 우쭐거리는 목사들은 오히려 멸시하고 멀리해야 한다.셋째, 기독교의 개교회주의의 관행을 극복해야 한다. 흔히 가톨릭교회는 교황 중심이어서 하나로 결속되어 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개교회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는 틀린 생각이다. 개교회주의는 교회들의 연대와 사귐이라는 교회의 고유한 원리를 허구화 시킨다. 마치 자본주의 논리마냥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먹어도 되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먹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교회를 이기주의 집단으로 전락시킨다. 교회는 ‘하나’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70%가 장로교회이다. 장로교회는 개교회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기독교 언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을까?성경은 초대 예루살렙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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