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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①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월 10일 종교교회에서 개최한 1월 월례회 중 박종화 목사가 발표한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 창조주와 여러 피조물 사회통합의 시급성 배후에는 사회갈등과 분열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을 전례가 없는 “초 갈등 사회”로 진단하기도 한다.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안은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상황과 갈등의 성격과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전문적이고 공감되는 처방을 내어 놓고, 나아가 이를 구체적으로 사회의 통합으로 이끌어 가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기독교적 역할을 묻고 답하려면 신학적, 신앙 고백적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갈등과 통합의 현장은 인간사회이며, 그 주인공은 인간이며, 사회와 인간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세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창조주는 창조된 인간과 세계를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고, 이 참 좋은 인간세계의 모습을 “샬롬”(Shalom)이라고 성서는 증언한다. 샬롬은 “인간세계의 평화와 정의 및 자연세계의 보전, 이 둘이 합쳐진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뜻한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갈등은 샬롬을 깨뜨리는 잘못이거나 심지어 파괴시키는 죄악일 수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저주를 몰고 온다. 동시에 기독교가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작업에 나서고 동참하는 것은 창조주가 선물로 주신 샬롬을 회복하라는 사명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축복을 동반한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 앞에서 “책임지는” 결단의 행동이 기독교적 사명이다.둘째로는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의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으며, 인간사회는 이 형상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피조물끼리의 갈등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요 통합은 그 형상의 회복이다. 셋째로는 갈등과 통합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십계명 제1계명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마라.”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려는 파괴적 갈등은 거개가 갈등의 당사자 개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방을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보고 매도하거나 적대화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생긴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의 획일성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절대화요, 나아가 자신의 신격화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어느 이념이나 체제나 제도도 신일 수 없고 신격화될 수도 없다. 절대적인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신의 형상을 지닌 다양한 인격체이다. 십계명 제1계명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위한 인권선언이고, 진정한 민주사회의 성서적 근간이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마라 “중심”이 되라기독교 세계가 갈등을 극복하며 통합을 추구하면서 내세우는 원칙이 있다 (잠언 2: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개혁판),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라”(표준 새 번역판). 상식적이지만 몇 가지 주석이 필요할 것이다. 가는 방향은 좌나 우가 아니다. 방향은 앞이다. 역사의 방향은 뒤도 좌도 우도 아닌 “앞”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앞”에 계시다. 좌와 우는 방향이 아니라 앞으로 가기위한 두 날개이다. 인간의 몸은 좌우의 두 팔, 두 다리, 두 눈, 두 귀로 움직인다. 둘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건강한 몸으로 산다. 어느 한 쪽이라도 실족하면 장애자가 된다. 중풍환자가 된다. 그러면 미래의 진로를 막는다.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대안은 좌우를 통합하되 “앞으로”, “미래로”를 공동의 방향으로 수용케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방안이다. 예컨대 “선진 자유 민주사회, 선진 공정 복지사회, 선진 문화예술시대, 민족 통일과 평화시대”라는 우리 사회 미래의 비전을 공유케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보다 더 깊고 넓고 높게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라고 확신하며 실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하나 현재 우리사회의 “초 갈등” 현상은 건강한 몸을 지탱하는 건강한 두 팔과 다리의 경쟁이나 생산적 갈등이 아니라, 극좌와 극우의 극단주의가 대결하는 파괴적 갈등이다. 그것은 잠언이 경고하는 “빗나감”과 “치우침”의 전형이다. 두 팔과 다리 중 한쪽으로 빗나거나 치우치면 중풍환자가 된다. 그런 사회는 장애사회요 중풍환자 사회이다. 극단주의는 그것이 극좌이든 극우이든 사회를 경직시킨다. 좀먹는다. 파괴한다. 빈부 간에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가 그러하고, 노사 간의 처절한 극단적 갈등이 그러하고, 힘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갑과 을의 관계로 극단화되어 가는 모습이 그러하고, 잠정적으로 수그러진 모습이나 여전히 극단적 폭발성을 지닌 지역차별과 갈등이 그러하고, 때 늦고 낡은 구시대적 이념갈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념갈등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경우 신앙화로 치달아 신의 이미지도 이념화 시키는 과오를 즐겨 범하고 있기도 하다.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자기편이 아니면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진영논리를 생성해 낸다. 편 가르기에 몰두하고 증오를 신념화 한다. 또 하나 극단주의는 절대적 “자기 의”에 빠지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우를 범한다. 그것은 십계명이 경고하는 정치적 우상화 내지는 우상체제로의 일탈을 몰고 온다. 기독교 신앙의 공헌은 종교적 우상화만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우상화, 특정 이념이나 체제의 우상화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십계명 정신에 따라 모든 피조물의 “평등한 자유 민주체제”를 강조하며 그 모범적 실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셋째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공동의 바탕은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주는 일이다. 통합은 좌우갈등의 적당한 미봉책도 아니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무색무취한 “중립”도 아니다. 쌍방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현장에서의 중립이란 결과적으로는 패자를 버리고 승자에 기생하는 편파적 태도일 뿐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무관심으로 거부하거나 비겁함으로 도피하는 것은 “무작위 범죄”에 속하는 잘못이다. 중심에 서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고 정당한 자의 편을 들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예언자적 사명”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에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꾀를 부려 갈등에 개입도 안하고 무감각한 구경꾼이 취하는 “중간”도 아니다. 중간은 빈 공간이 아니라 갈등의 쌍방이 너 죽고 나죽는 공멸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상생의 광장으로 이끌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생의 광장을 제공하고 화해로 이끄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제사장적 사명”이다. 편의상 진보적인 예언자적 사명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제사장적 사명은 갈등을 정당하게 해소하거나 또는 상생의 통합으로 이끌어 주는 상호보완적 사명이다. 건강한 몸의 양 팔 내지 양 다리의 상보적 역할과 같다. 이 상보적 사명과 역할의 핵심은 몸이라는 중심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중심은 국민이 채택하고 의지하는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의 삶의 기본가치를 담은 중심이요 규범이다. 이 사실을 갈등의 현장에서 분명히 진실과 상생의 잣대로 밝혀주어야 한다. 헌법의 규범을 두고 해석과 적용에 갈등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빛에서” 이를 밝혀줌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은 한 손에 헌법규범을 다른 한 손에 성서를 들고 사회 갈등 해소와 통합노력을 경주하되, 헌법을 성서의 눈으로 해석하고 갈 길을 제시함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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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4
  • 해설 / 한국교회 연합운동 희망은 있는가?③ 한국교회연합(한교연)
    한교총과의 재분열 이후 재정난 심각… ‘통합 대상’ 전락 교계 연합 구도가 교회협과 한기총으로 양분되어,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던 때 등장한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권태진 목사)은 현 한국교회 연합운동 쇠퇴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물론 한교연의 태동이 기존 보수 연합단체였던 한기총의 내분으로 인한 결과물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결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허울좋은 명분이라는게 더 큰 이유였다. 한교연의 등장이 유난히 뼈아픈 것은 그간 교회협과 한기총으로 나뉘어 안정적 구도를 형성해 오던 한국교회 연합운동 전선을 완전히 깨뜨렸다는데 있다. 차라리 한교연이 기존 한기총을 완전히 흡수해 교계 보수세력의 새로운 대표자로 우뚝섰다면 모를까 한기총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에서 몇몇 주요 교단만을 앞세워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낸 것은 보수연합운동의 분열과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당시 한교연에 참여한 교단들은 한기총 내 스며든 ‘이단’과 함께할 수 없기에 새로운 단체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며 그 창립목적을 정당화 했지만, ‘이단 문제’는 그저 하나의 명분일 뿐, 실제는 주요 교단과 몇몇 정치꾼들의 권력욕과 정치의 산물이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는 한교연의 창립을 담당했던 실무자가 추후 한교연의 창립이 결코 이단만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욕심의 결과였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키도 했다. 한교연이 한기총에서 갓 분열해 나온 시점에서는 통합, 백석, 합신, 고신, 기성, 예성 등 주요 교단들이 힘을 보태며, 단기간에 한기총 못지 않게 교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분열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정부와 지자체 등의 대내외적 주요관계에 있어 여전히 대표는 한기총이었고, 한교연만의 구분된 역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터진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이라는 새로운 단체의 결성은 그야말로 한교연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사실 한교총의 분열은 애초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교단장회의가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주도하는 체 하다가, 어느 순간 통합이 미진함을 이유로 한교총을 창립했으니 말이다. 한교총의 등장은 한기총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으나, 한교연에는 직격탄이 됐다. 교계 대표성을 두고 경쟁하고 있던 한기총에 비해 역사, 명성 모두가 뒤쳐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앞선 것이 주요 교단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들 교단들이 대부분 한교총으로 넘어가며, 한교연에는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게됐기 때문이다. 사실 한교총의 분열 방식은 과거 한교연의 분열방식과 거의 흡사했다. 애초 한교연의 분열을 보며 교계가 우려했던 것은 분열의 연속성이었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시작된 분열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는 것을 한국교회는 지난 교단 분열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교연은 스스로 분열을 언제나 대비했어야 했겠지만, 이를 막지 못했고, 결국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등 3개 보수 연합단체 중 가장 최약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보니 한교연은 어느 순간 교계 연합기관으로서의 연합운동보다는 나머지 두 단체와의 통합 시도에 더 자주 등장하고 있다. 창립 이후, 한기총, 한교총 등과 통합을 시도한 것만 무려 6~7차례로 한교총과는 통합총회를 개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끝내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끝내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연합단체에 있어 회원의 존재가 중요한 것은 단체의 운영을 할 수 있는 재정적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허나 한교연도 한기총과 마찬가지로, 분담금을 낼 수 있는 주요 교단들이 떠나가다 보니, 단체 역시 재정난에 시달릴 수 밖에 없게됐다. 재정난은 사업의 축소로 이어지며, 이는 연합단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감당치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재정난의 여파는 반대로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에 특권을 안겨준다. 마땅히 회원이 중심이 되어야 할 연합단체가 대표중심의 연합단체로 바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한기총과 마찬가지로 대표자가 전체 운영비의 대부분을 감당하는 형태로, 곧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는 이는 대표가 될 수 없는 악순환을 양산한다. 단체 역시 그런 특정인에 대한 대접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교연은 대표회장 권태진 목사의 취임 이후, 권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회복지단체 성민원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직접 배포하고 있다. 한교연의 가입 단체라는 명목으로 언론 홍보를 자처하고 있지만, 한교연이 여타 단체들의 홍보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분명한 특혜임이 틀림없다.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단체를 자처하면서도, 대표가 관여하는 기관의 홍보를 맡고 있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모순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현 한교연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한교연은 현재 완전히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더 이상 교계는 한교연에 연합단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며, 한교총, 혹은 한기총 중 어느 곳과 통합을 먼저 할 것인지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차진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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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4
  • ■ 학술/ 한국교회 개교회주의 극복과 교회 공동체성 함양 방안
    본고는 지난 1월 14일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가 주최한 제1회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가 발제한 ‘한국교회 개교회주의 극복과 교회 공동체성 함양 방안’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교파주의의 역사적 유래 1) 신학적 요인교파주의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교파 분열이 없었던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선교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교파 분열이 있었던 미국 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데서 기인한다.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선교를 받은 한국장로교는 보수적인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평양 신학교는 주로 미국의 청교도 신앙을 가진 선교사 사무엘 마펫, 윌리엄 베어드, 언더우드 등을 중심으로 보수교회를 형성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를 받은 함경도는 보다 자유로운 신학의 영향을 받았고 김재준, 강원룡 등은 보다 자유스러운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 「신학지남」을 중심으로 하여 박형룡과 김재준의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해방 이후에 1948년 신사참배 반대파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 중심의 고려측이 갈라져 나가고, 1953년에 예장과 기장이 갈려지게 되었다. 1959년 에큐메니칼 운동 참여 이슈로 인하여 예장 안에서 합동과 통합이 갈라지게 되었다. 1979년에 합동측에서는 교단의 비리문제로 주류에 대항하여 비주류가 갈라져 나가게 되었다. 다시 지방색으로 인하여 호남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개혁측이 갈라져 나갔다, 개혁측은 지도자 정 목사의 소천 전 유언에 따라 다시 합동으로 되돌아 왔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3천만환 사건 이전에 이미 신학적 이슈가 있었다. 박용규의 주장에 의하면 “3천만환 사건이 이전부터 총회 안에 일고 있는 에큐메니칼측(WCC)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대립으로 인한 총회 갈등을 가속화시킨 요인이기는 했지만, 분열의 1차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당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시대적 배경과 사료들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분석한다면 주된 요인은 WCC 문제로 압축된다.”2) 파당적 요인1912년 하나의 장로교단으로 시작된 한국장로교는 딱 1백년 만에 300개 교단으로 나뉘었다. 고신, 기장, 통합, 합동, 합동과 개혁, 대신, 백석. 고신 안에서도 고소측과 반고소측 외 장로교 이름을 가진 각종 군소교단이 3백개 이상이나 된다. 이는 군소 보스(boss)를 중심으로 수십 교회 내지 수백 교회가 이합집산함에 따라 큰 교단의 노회 정도의 군소교단이 생긴 것이다. 연합운동에서도 자유로운 신학을 표방하는 KNCC운동에 반대하는 보수교회가 1989년 한기총이란 연합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북한에 사랑의 쌀 보내기운동 등 지난 23년 동안 보수교단들의 연합중심으로 사회봉사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1989년 한경직 박맹술 임옥 이성택 한명수 정진경 이봉성 김경래 등에 의해 창립된 한기총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 진보교단의 대표성을 가진 교회협(KNCC)이 빈민운동과 인권운동 및 남북통일운동 등을 추진하며 당시의 군사정부와 부딪치자 교계의 새로운 연합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보수를 지향하는 원로들이 만든 단체이다. 처음엔 각 교단 원로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곧 교단의 대표성을 가진 연합체가 되었다.정부가 교계의 대표성을 한기총에 힘을 실어 주자 대표회장 자리를 놓고 욕심을 부리는 교단 정치인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돈선거’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한기총이 흔들리고, 한국교회에 연합과 일치가 깨어진 배경에는 일부 인사들의 ‘돈질’에 그 원인이 있다. 교계 주변에서 활동하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생존 전략에 소위 지도자들이 말려 들었다. 교계에서 매달 상당한 액수의 ‘이단대책비’를 거두고 이를 나누어 먹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은 자신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한기총으로부터 위치가 흔들리자 곧바로 이단 문제를 제기하며 두 세력을 이간질 시켰다. 이와같이 하여 한기총은 지난 2012년부터 금권선거 ‘10당 5락’과 각종 부패와 권력다툼, 이단문제(다락방, 박윤식 등)의 분열 등으로 인해 비리에 반대하던 자들을 중심으로 한교연, 한교총으로 분열되어 나갔다. 한국교회 개교단주의1) 한 교파 안에서도 예수교단과 기독교교단으로 갈라져 있다.한국교회 안에서는 같은 교파 안에서도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라져 있다. 장로교에서 예장과 기장, 감리교 안에서 예감과 기감, 성결교 안에서도 예성과 기성, 침례교 안에서도 예침과 기침,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는 여의도측과 비여의도측이 갈라져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의 고집, 교권, 명예욕 때문에 예수(보수측)와 그리스도(진보측)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 2) 합동측 장로교회의 분열은 소종파 의식에 근거한 것이다.1980년대 보수 장로교 합동측은 합신측, 개혁측이 갈라져 나갔다. 이들 가운데서도 다시 수많은 소종파 장로회들이 예장 간판을 달고 군소 교파를 세우고 미인가신학교를 우후죽순격으로 세웠다. 문공부에 등록된 예장 교단만 하더라도 3백 여개에 이르렀다. 종교관계를 다루는 공무원들에게 개신교는 윤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종교로 낙인찍혔다. 이성적으로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동일교파(예수교장로회) 이름을 가진 수백 개의 교단 등록을 실무자가 취급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개신교란 연합도 할 줄 모르고 서로 헐뜯는 이상한 소종파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3) 보수교회일 수록 교단이 다르면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도 전혀 교류가 없다.보수교회일수록 친구 성직자라고 할지라도 교단이 다르면 큰 장벽이 둘 사이에 끼어 있어 인간적인 교제도 쉽지 않다. 특히 ‘강단교류를 금지하라’는 교단 지시는 이러한 목회자 친구 사이를 갈라놓기도 한다. 그 예가 외국에서 신학공부 하러 가서 유학시절에는 좋은 친구였는데 한국에 돌아오면 교단의 장벽에 막혀서 그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교역자들이 이러하니 평신도들도 교단이 다르면 교회문제나 신학문제에 있어서 소통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심지어 인간 관계에도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파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고백의 기초 위에서 신앙표현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신앙적 교제가 개방되어야 한다.4) 성직자 중심, 남성 위주, 종파적 교회다.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성직자가 모든 일을 주도하고, 여성은 봉사만 하도록 하고 남성들이 교회를 운영한다. 그리고 보수주의를 지향할 수록, 신앙고백보다는 파벌적 이익에 따라 운영되어 사회적 공공성(공정성과 윤리성)이 많이 결여된 교회가 적지 않다.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아 세상에서 소외되고 실패하는 것이 좋은 신앙을 갖는 것으로 왜곡된다. 교회 헌금이 교회 자체 교역자 인건비와 교회 교육관 건립 및 기타 교회 재산 확장을 위하여 대다수 사용되며 빈민구제, 제3세계의 의료 교육 지원 등 사회봉사를 위한 사용은 지극히 미비하다. 교회 운영에 있어서는 성경보다는 가부장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5) 한국교회 안에 깊이 들어온 기복신앙은 세상성공이 신앙성공으로 오도하게 한다.교회 안에서 뿌리 내린 기복신앙은 하나님 신앙과 받는 복을 바로 세상 성공(사업, 출세, 자녀교육, 건강 등 성공)으로 평가한다. 번영과 성공이 바로 기도의 응답으로 보고, 실패와 낙방과 어려운 처지에 들어감 등이 불신앙과 예배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왜곡한다.십자가 신앙이란 이 세상의 어려움 가운데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있으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십자가 신앙은 세상사에 있어서 불의와 부정직과 비윤리와의 타협의 거절과 자기 비움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십자가 신앙이 생활신앙으로 설교되고 가르쳐야 한다.6) 목회자들의 언어가 너무 종파적이고 보편성이 없다.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회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 불신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언어와 행동이 종파적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자를 구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보편성을 지닌다. 오늘날 그리스도교회는 신앙고백은 분명히 하되 우리의 행동과 언어는 세상 불신 사람들에게 소통될 수 있도록 공공적인 언어와 윤리성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도 자체를 위한 구제나 사회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솔히 보여주는 구제나 사회봉사가 결국에는 이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연변지역의 동포들이나 이슬람 지역의 주민들에게 전도 이전에 지속적으로 보내어 주는 사랑의 구호물은 말 없는 전도로 나타나는 사실을 선교사들은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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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31
  • 해설 / 한국교회 연합운동 희망은 있는가? ②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교계연합 논의에서 배제된 채 독자 행보 지난 한 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이홍정 목사)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을 달렸다. 현 정부로부터는 교계의 대표로 인정받아 기독교의 입장을 사회적으로 대변해 왔지만, 교계 일부로부터는 대다수의 한국교회 정서를 거스르는 반기독교 단체로까지 낙인됐다. 한때 한국교회의 대표 연합기관으로 인정받았던 교회협이지만, 지난 수년간 교회협에 대한 교계의 신뢰가 그야말로 바닥을 치며, 언제부터인가 교계의 주요 이슈를 논의할 때 교회협은 당연히 배제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 그야말로 보편적 교회에서 멀어졌다는 말이 가장 적합 표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 교회협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기본적 통념과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사회적인 기독교 대표로서 언제나 교회협은 최우선에 자리한다. 이는 보수교계의 일반적 의지와 관계없이 현 정부가 기독교계의 파트너로 자신들과 정체성을 같이 하는 교회협을 지목했기에 가능한 것으로 풀이된다. 교회협의 이러한 독주가 가능해진 것은 한기총의 몰락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간 정부는 기독교를 상대할 때 교회협과 한기총 모두를 한 테이블 위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교회협과 한기총이 진보와 보수를 각각 대표하고 있었기에, 정부가 어느 한쪽만을 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년 전 시작된 한기총의 몰락은 자연스레 정부에게 한기총을 배제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나마 지난 정권까지는 어떻게든 보수교계를 끌고 가려는 움직임이 보였지만, 현 정부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매우 소극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으로까지 분열된 보수교계의 자멸로 애매한 대표성 문제가 가장 크겠지만, 정부가 굳이 적극적으로 보수교계를 포용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교회협의 정체성이다. 사실 교회협은 지난 몇 년간 대사회적인 기독교의 주요 이슈에 있어 대다수의 보수교계와 늘 충돌해 왔다. 역사교과서, 종교인 과세, 동성애 등의 문제에 있어 보수교계와 입장을 달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현 정부의 정책과 방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반기독교 정책을 조장하는 현 정부에 불만을 품은 보수교계의 화살이 교회협으로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교과서나 종교인 과세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반성경적 행위가 분명한 동성애 등의 문제에 대해 교회협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용납키 어려운 문제였다. 결정적으로 교회협이 현재 한국교회를 대표할 위치에 있느냐는 원론적인 문제도 발생한다. 물론 교회협은 역사적인 측면이나 그 위상에 있어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갖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규모에 있어서도 예장통합측을 포함해, 감리교, 기장 등의 대형교단들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문제는 교회협의 정책과 회원교단들의 정체성이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교회협의 회원인 통합측이나 감리교는 동성애를 절대 반대한다. 그들이 여타 교단에 비해 진보적 색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성애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적 진리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회원교단의 입장이 교회협에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연합기관이라는 특성상 회원교단의 입장이 모여 단체의 입장이 되어야 하지만, 교회협은 회원교단의 의지는 안중에 없고, 단체 자체만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더 이상 이들 회원교단들의 사업에 있어 교회협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통합측과 감리교가 집중하고 있는 단체는 한교총으로 이를 통해 한국 보수교계의 회복을 도모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교회의 입장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협이 현 정부에 의해 기독교 대표로 대접받는 모습은 대다수의 보수교계에 매우 불편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대다수가 현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에 절대 반대하고 있다는 호소를 교회협이 중간에 가로 막는 형국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만의 기독교로 전락하고 있는 교회협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어느 순간 반대를 위한 반대를 거듭하며, 한국교회와 소통을 거부하고 있는 교회협의 태도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난 2013년 WCC 부산총회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협은 WCC로 인해 한국교회가 다시 양분될 위기에 처했음에도 보수교계에 대한 설득이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행사를 치러냈다. 그 여파로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반WCC 운동이 강하게 일고 있지만, 교회협은 여전히 그러한 움직임에 요지부동이다. WCC에 대한 한국교회 정서를 고려한다면, 더욱 적극적인 홍보와 소통에 나서야 했겠지만, 교회협은 그러한 목소리를 스스로 단절하며 외톨이를 택했다. 이는 결국 WCC가 옳으냐 그르냐의 본질적인 문제와 관계없이 한국교회라는 큰 사회에서 교회협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교회협의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한기총의 몰락과는 의미가 다르다. 교계는 한기총의 몰락에 다른 단체들을 생성해냄으로써 대안을 만들고 있지만, 지난 90년 이상 교계 대표 연합기관을 감당해 온 교회협의 대안은 오직 교회협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협은 스스로 쌓아온 교계와의 벽을 허물고,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현 정부로부터 쌓고 있는 신뢰를 바탕으로, 보편적 교계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 교회협의 책임은 매우 막중할 수 밖에 없다. <차진태 기자>
    • 해설/기획
    • 해설
    2020-01-3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9
    2020년 새해가 되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한 단락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본문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생에는 결산의 날이 있다는 것과 그 결산을 대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이다. 이 비유에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두 종류의 종들이 등장한다. 착하고 충성된 두 사람의 종과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한 사람의 종이다. 주인은 외국에 여행을 떠나며 이 종들을 불러 가각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 한 참고서에 보면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한 노동자의 20년에 해당하는 품삯이라고 했다. 주인은 이 돈을 그의 종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하지 않았다.옛날에는 종은 주인의 소유였다. 따라서 종의 가진 사사로운 물건이나 재산도 다 주인의 것이었다. 종의 아내나 자식들도 다 주인의 것이었다. 종이 죄를 지어 집에서 쫓겨날 때는 그가 소유였던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내나 자식도 남겨 두고 홀로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종이란 자기 죄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소유는 아니다. 맡겨 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다같이 일률적으로 똑같은 금액을 주지 않았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었다고 했다(, each according to their ability). 주인은 종들의 입장에 볼 때 결코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었다고 했다. 돈을 나누어 주는 주인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혹은 그의 종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돈을 준 것이 아니었다. 이윤을 남긴 두 종은 주인이 그 돈을 자기들에게 “맡기셨다”(20, 22)고 말하고, 주인도 그 돈을 땅에 묻어 둔 자에게 “내 돈”을 이자놀이 하는 자에게 맡겼어야 했다고 말한다(27). 주인은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주었지만 그 돈은 여전히 주인의 소유였다.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 줄 때, 구체적으로 그 돈으로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지만 주인은 주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고,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 분명 아무런 뜻 없이 준 것이 아니었다. 돈을 받은 종들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의 반응은 같다. 이들은 “즉시” 나가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이 복음서의 저자는 “즉시”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계산을 해보거나 저울질을 하지도 않고, 손에 돈을 받자마다 일을 시작한다. 그들은 평소에 주인의 뜻을 헤아려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주인에게 무엇을 해드려야 주인에게 유익하게 되고,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나름대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시키고 명령하지 않아도 주인을 위한 일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손발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즉시”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이들은 이 일을 기쁨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들과 너무나 다르다. 그는 주인이 준 돈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는다. 고민이 생긴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장사를 한다고 하드라도 반드시 이익을 남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그에 따르는 보장이 생각나지 않은 것 같다. 그 경우에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다. 그가 생각한 주인은 엄한 분이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데서 모으는 자, 말하자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는 사람이다. 어쩌면 피눈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 깍쟁이요 구두쇠이며, 냉혈한이다. 이러한 주인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최소한 본전은 까먹어서는 안 된다고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 돈을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땅 속에 묻어두자는 것이다. 그의 지혜는 거기까지였다.여러 해 후에 주인이 돌아왔다. 19절에 보면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계산을 하였다.”고 했다. 계산의 주체가 주인이다. 종들이 먼저 주인에게 나와서 “주인님, 제가 그동안 사업을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보고 한 것이 아니다. 주인이 앞장서서 주도적으로 이들의 실적 보고를 받은 것이다. 자기 돈을 남에게 맡기고 그것을 점검하거나 결산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산은 주인의 권리요, 의무이며, 사명이다. 결산을 하지 않는 주인은 주인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나와서 그들이 받은 돈으로 갑절의 이익을 남겼다고 보고 했다. 주인은 이들에게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게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내가 네게 많은 것을 맡길 것이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라.”(21,23). 여기서 주인은 칭찬과 더불어 상급을 준다. 주인은 이들이 착하고 충성되다고 칭찬한다. 성경에서 “착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하나님의 창조활동이나 치유활동에 있어서 “살리는 것을 선하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한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시면서 “선한 일”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3:4). 선을 행한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창조하고 살리는 일이다. 특히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데 좋았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토브”()를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살리는 일이야 말로 아름답고, 선하시고, 기쁜 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하인들도 각각 주인이 맡긴 돈으로 원금의 배를 남겼는데 주인은 이들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한다. “충성되다”는 말은 변함없이 꾸준하다는 의미이다. 오락가락하거나 중단하기를 거듭하지 않고 꾸준하게 한 길을 가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다.주인은 이윤을 남긴 이 둘을 향하여 이들이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앞으로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 주인은 분명 앞으로 많은 일군이 필요한 사명을 띠고 돌아왔음을 암시하며, 이를 위하여 앞으로 그가 함께 일할 인물을 시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종들은 주인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충성했겠지만 이들은 앞으로 주인이 믿고 쓸 수 있는 더 큰 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은 이들에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라”고 말한다. 그 주인이 여는 파티에 초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주인이 그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개의 종이 감히 주인의 파티에 초대되어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주인의 인정을 받고, 주인과 함께 앉아,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돈이나 건강이나 자녀나 사회적 지위보다 더 귀한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종에게 주인의 반응은 차겁고 준엄했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다(26), 그리고 30절에는 “무익한 종”이라고 명명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대조적으로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그에게 노를 발한 것은 그가 그를 악평한 것에 대한 되치기라기보다는 종의 생각대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첫째로 주인은 종이 자기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종의 주인이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곳에서 모으는 사람으로 알았더라면 그는 자기의 돈을 이자놀이 하는 자들에게 맡겨 그 이자라도 받을 수 있게 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한 일 이 없다. 그의 생각이 악하고,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니 게으른 자이고, 손해를 끼쳤으니 그는 무익한 자이다. 주인은 그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고 그를 바같 어두운 곳에 내쫓아 내어 거기서 이를 갈며 통곡하게 하라고 명한다. 주인의 말대로 가진 자는 더 풍성하게 되었지만 갖지 못한 자는 그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었다. 종의 신분도 빼앗겼다.이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입성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며 주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처럼 그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이후 재림까지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다. 그동안 제자들은 종들처럼 주께서 주신 복음을 가지고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첫째, 예수님의 재림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주신 능력대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셋째는 다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성과에 대한 결산을 하시고 상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특히 열심히 일하여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주시고, 헛생각하며 게으름 피우다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적극적으로 주인의 유익을 위하여 일한 사람들이다. 선함과 충성된 자는 주인에게 이익을 남긴 자이다. 주인은 이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다. 앞으로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맡기시겠다는 것이고, 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주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격의 없는 관계성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이다. 주인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그의 생각에 구두쇠요 냉혈한인 주인의 횡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자이다. 종은 주인 생각을 먼저하고, 주인의 유익을 위해 지혜를 짜야지,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유익을 위한 꾀를 짜내기에만 골몰하면 안 된다. 그는 결국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종이 되어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는 본전을 까먹더라도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 손발을 움직였어야 했다. 손해에 대한 변상의 문제는 주인의 긍휼에 달린 문제이다. 아무것 안 한 것이 문제이다. 악인이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자이다. 결국 그는 그 집에서 추방당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달리 그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며 우는 모습이 처량하다. 2020년 새해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있다. 하나님서 우리가 부르실 때에 우리는 그의 결산대 앞에 나아가 우리가 선악간에 우리가 우리 몸으로 행한 바를 모두 저울에 달아보게 될 것이다(히 9:27; 고후 5:10).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1-17
  • 해설 / 한국교회 연합운동 희망은 있는가? 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법과 원칙 무시된 ‘난장판’ 전락… 미래 불투명한기총의 대표성 상실로 한국교회의건강한 보수와 진보의 균형 무너져 새해 벽두에서 한국교회의 한 해를 기대하는 중심에는 언제나 연합운동이 있다. 십수년 전부터 계속된 교단 분열의 아픔이 오늘날 300개 교단 시대라는 처참한 현실을 만들어 낸 상황에, 한국교회가 기대할 것은 오직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운동에 있기 때문이다. 그 연합운동의 중심에는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이홍정 목사)가 있다. 한국교회라는 거대한 수레의 양 축을 맡아온 두 단체는 각각 보수와 진보를 이끌며, 서로간의 적당한 견제와 협력을 통해 건강한 발전을 도모해 왔다. 하지만 한기총의 몰락 이후 이러한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한기총은 정치적 이권을 앞세운 구태의연한 이단시비로 한교연과 갈라진 이후, 끝 모르는 추락을 지속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중에 겪은 지난 2019년은 한기총에 있어 역사상 최악의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년 전 정기총회에서 전광훈 목사라는 희대의 트러블 메이커를 대표회장에 선출할 때 이미 어느 정도의 혼란은 예상이 됐으나, 그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을 정도로 더욱 처참했다. 전광훈 목사는 한기총 대표회장에 오른 직후, 그 취임식을 일반 청중들까지 동원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대적으로 가지며,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예고했다. 기독당의 국회 입성을 위해 2020년 4월 총선을 겨냥한 행사라는 의심이 짙었지만, 전 목사는 이에 아랑곳 없이 자신의 취임식을 유튜브로 생중계하며, 원색적인 정치적 발언을 펼쳤다. 그리고 이어진 삼일절 행사에서 전 목사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하야 요구와 노골적인 욕설을 내뱉으며, 단숨에 극보수 진영의 관심을 샀고, 이러한 인기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에서 정점을 찍으며, 현재는 웬만한 정치인 이상의 영향력을 갖는 거물 인사가 됐다. 하지만 전 목사가 개인적으로 이러한 엄청난 한 해를 누리는 동안 한기총은 그야말로 난장판 그 자체가 됐다. 대표회장 재임 초기부터 법과 원칙을 무시한 전광훈 목사의 운영과 이후 한기총을 내버려둔 방관은 한기총을 대립과 갈등, 혼란 그 자체로 몰아넣었다. 가뜩이나 군소교단들의 집단으로 몰락한 한기총을 그나마 버텨주던 기하성 여의도측(대표 총회장 이영훈 목사)이 행정보류를 선언해, 사실상 한기총은 군소교단 연합체로 전락했고, 내부의 인원들은 전광훈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갈려 끊이지 않는 잡음이 계속됐다. 여기에 전 목사는 자기를 반대하는 인사들을 거침없이 제명, 징계했을 뿐 아니라, 소속 교단에 특정 인사에 대해 목사 면직을 하라는 압력을 넣으며, 한기총이 교단들의 연합기관이 아닌 소속교단들 위에 군림하는 교단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전 목사는 애초 정치적 행보를 시작할 때 한기총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앞세워, 1000만 한국교회가 한기총과 함께하고 있다고 홍보했지만, 정작 교계 내부에서는 한기총이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갖지 못한다는 비난은 물론이고, 더 이상 기독교를 욕먹이지 말고 당장 해체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요구에 직면하기도 했다. 재정난은 더욱 심각했다. 애초 재정이 부실한 군소교단들의 단체로 전락하다 보니, 걷히는 회비가 극히 미비했고, 과거에 들어오던 한기총의 후원금은 끊어진지 오래가 됐다. 그나마 전 목사는 한기총의 이름으로 주최하는 행사의 후원금마저 자기가 총재로 있는 타 단체로 걷어들이며, 고발까지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할리 만무했다. 한기총은 지난 1년 간 정치적 보수 집회나 세미나 외에 기존에 이어오던 신학적, 교회적 활동은 아예 할 수 없었다. 수개월 동안 사무실 월세가 밀린 것은 물론이고, 직원들의 월급도 주지 못했다. 결국 한기총은 현재 단 한명의 직원을 제외하고, 모든 직원을 권고 사직시키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그마저도 올해는 한기총의 사무실을 전광훈 목사가 시무하는 사랑제일교회 내부로 이전할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어, 앞으로 정상적인 교계 연합기관으로서의 한기총의 회복은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되어, 개인의 건강이나 신상에 특별한 문제가 없음에도, 자신의 정치적, 외부 활동을 위해 직무대행을 세우는 초유의 발상은 한때 교계 대표기관으로 군림했던 한기총을 식물단체로 만들어버렸다. 애초 대표회장의 유고라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직무대행을 세워, 대표회장과 직무대행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직무대행의 권한이라는 것이 존재할리 만무했고, 결국 이도 저도 하지 않은 1년이 지나가게 됐다. 특히 현재 직무대행인 박중선 목사는 한기총의 사무총장까지 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직원의 범주에 속하는 사무총장이 임원회를 주도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버렸다. 이미 한기총은 끝났다고 보는 시선이 강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래도 한국교회의 보수가 한기총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한기총의 미래는 없다고 보는 비관론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 전광훈 목사가 다시 한 번 한기총의 대표회장 후보에 단독으로 올랐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당선이 확실시 되기에, 교계의 우려는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물론 집행유예 중인 전 목사를 선관위가 ‘도덕성’을 문제 삼아 후보에서 탈락시킬 것이라는 예측도 있지만, 현 선관위원장이 전 목사를 적극 지지하고 있는 길자연 목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딱히 이를 기대키는 어려워 보인다. 오는 4월은 전 목사가 그토록 기대하고 고대하던 총선이다. 만약 전 목사가 대표회장 연임에 성공하게 된다면, 한기총의 이름은 지난해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정치적 다툼에 휘말릴 것이다. <차진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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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2020-01-17
  • 학술/ 한국교회 위기극복: 새로운 교회연합방안 모색
    본고는 지난 1월 14일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가 주최한 제1회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 총장)가 발제한 ‘한국교회의 위기극복: 새로운 교회연합방안 모색’을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의 연합과 교회분열의 역사에 관한 성찰 1) 초기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연합운동 초기 한국교회는 장·감·성을 중심으로 교단의 전통과 역사는 달랐지만,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연합하고 협력하여 복음전파를 힘썼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 당시 지역 분할 등으로, 복음전파(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립되었고, 다시 그 연합기관은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와 더불어 조선기독교는 탄압을 받게 되었고, 모든 조선 땅에서의 기독교 활동들이 정지된다. 이러한 일제 식민통치의 핍박 가운데서,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는 연합하고 있었다고 본다. 심지어 국가의 위기와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타종교와도 연합하여 독립선언문발표와 독일운동에 동참하였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문 발표는 전체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8.15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건 기에 벌써 1946년 9월 ‘한국기독교총회’가 시작되었고, 그 총회의 대표들이 1948년 8월에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WCC 세계총회에 참석하여 세계적인 개신교 연합운동에 참여하는 열성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남북분단과 함께 6.25 전란을 겪으면서, 북한 공산당이 종교자유를 보장하지 않았고, 기독교를 핍박함으로써 북한에 있던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종교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대거 이주해왔었다. 그것이 대한민국(남한)에서의 복음전파를 더욱 왕성하게 하였고,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크게 부흥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해방 후, 한국교회의 재건운동과 함께 먼저 신사참배에 굴복한 자들의 회개가 촉구되면서, 동시에 이전에 잠재해 있던 신학 사상에 관한 논쟁이 발생되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는 벌써 초기에 진보와 보수의 뼈아픈 교회분열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2) 1950년대의 한국교회 보수와 진보의 분열역사1950년대에 이르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성경관의 차이로 인한 신학 논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교단이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것이 한국기독교장로회(1953)의 분리사건이다. 물론 그보다 더 일찍 1946년 부산/경남지역의 장로교회들이 신사참배(참회)문제를 제기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독립된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WCC 회원가입 문제가 논쟁되면서, 또다시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된다. 그 당시 WCC가 공산화된 소련에 러시아정교회를 회원으로 받으면서, WCC가 용공주의적인 입장을 가졌다는 소문이 퍼졌고, 특히 공산주의 사의 대립으로 남북이 전쟁을 치르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 사이에 이미 1946년에 분리독립 했던 고신교단과 예장합동교단은 1960년에 서로 합동하게 된다. 그러나 1963년 9월 다시 예장 고신교단이 환원함으로써 원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들 두 교단은 신학 사상적으로는 분리해야 할 명분이 없다. 60년대에 불어닥친 보수와 진보 사이의 신학적인 갈등은 결국 성결교회와 감리교회에도 영향이 미치게 되어, 성결교회는 기독교 성결교단과 예수교 성결교단으로 분리되었고, 또한 감리교회도 분리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 다시 합동하게 된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크게 진보교회와 보수교회로 나누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진보교회는 초기부터 8개 교단(기장, 감리회, 통합, 기성, 복음교회, 구세군, 성공회, 정교회, 순복음회연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물론 1997년 여의도순복음 교단은 한기교협(KNCC)에 회원으로 뒤늦게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보수교회는 이렇다 할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물론 세계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분리되는, 특히 미국교회의 흐름에 따라 한국의 보수교회, 즉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미국의 극단적인 근본주의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연합운동(ICCC)과 연결하여 진보교회의 연합운동과 대결하였지만, 역시 열세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한국교회 내에서의 보수교회들은 연합운동을 포기한 채, 개별적인, 그리고 개 교회적으로 복음전도운동을 전개하면서, 개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집중하였다. 3) 진보와 보수로 분열된 각각의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실상에 관한 성찰 현재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교회로 분리되어 각각의 교회연합기관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먼저 진보교회 연합운동 역사는 1946년에 출발한 한국기독교연합회의 발족에서 시작된다. ”한국기독교협의회”란 이름으로 활동해 오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아마도 교회의 존재와 중요성이 인식되었는지, 협의회의 명칭에다 ”교회“를 삽입하여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로 불리게 된다. 특이하게도 이 연합기관은 주로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 즉 복음전파의 사명실천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교회의 외적인 일, 즉 사회적이며, 국가 정치적인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치단체와 같은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다. 지난 70~80년대로 오면서도 NCCK는 한국의 산업화와 현대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특히 그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였고, 정권이 저지른 인권침해문제를 비판하며,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으며, 1987년 정치적인 민주화가 선언된 이후 그 연합기관은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보수교회들은 오히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 세우며, 이때까지도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활동의 연합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 국민을 향한 그리스도복음의 전도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수적으로 크게 성장된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생각하면 이것이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진보교회는 매우 정치비판적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사회개혁을 전제하여 인간을 섬기는 사회운동의 방향으로 질주하였으며, 보수교회는 개인의 영혼구원을 중히 여기고, 오직 개 교회로 모이게 하는 복음전도운동의 방향으로 질주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한국교회의 다수인 보수교회와도 마땅히 나누어야 할 성도의 교제는 전적으로 외면한 채, 독자적인 행보를 지속하고 있는데, 오히려 타 종교와 더 어울리며,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를 보일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기독교신앙의 정체성이 매우 진보적이어서, 한국보수교회 신학자들의 비판적인 논쟁을 유발시키고 있으며, 진보와 보수사이는 오늘날 그 틈새는 더욱 벌어진 모습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 정말 진보교회연합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간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인권문제를 그토록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비판하며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북한의 3대 독재정치 체제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탄압문제에 대해서는 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그간 한국 보수교회들의 연합기관으로 역할 해 온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오늘에 이르러 한계에 직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원래 한기총의 태동역사는 KNCC가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문”을 발표한 것에서 동기를 부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선언문은 분단된 남북한의 통일문제를 신학적인 주제로 삼아 한국교회에 통일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로 평가되지만, KNCC가 이렇게도 중대한 남북통일선언문을 한국 보수교회지도자들과는 한마디 상의 없이 저 북한기독교대표(조선기독교연맹)들과 수년 전부터 해외에서 서로 만나 협의하고 논의하여, 1995년을 남북통일의 해로 못 박아 선언한 일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태도가 분명하며, 이미 지나치게 저 북한 통치이념에 동조한 것 같은 의구심을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 통일선언문의 요지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희년개념을 끌어와서 1995년을 남북통일의 해로 목표하여 해석 적용한 모습은 마치 지난 1992년 12월말, 시한부종말론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해로 정하고 그것을 기다렸던 모습과도 흡사함을 피할 수가 없다고 본다. 결국 진보연합체의 행위는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남북통일과 북한선교의 과제를 기독교적인 과제로 인식하는 통일의식을 일깨워 주었으며, 또한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결속하여 한기총(CCK)이란 연합체가 태동하는 게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90년대에 이르면서, 한기총은 극심한 기근으로 굶주림에 처한 북한동포를 돕는 중요한 섬김의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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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2019년 10대 뉴스
    1. 보수교계, 반정부 시위 주도 현 정부의 반 기독교적 정책에 맞서 보수 교계가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특히 지난 10월 3일 개천절 공휴일에는 서울 광화문 시청에 무려 35만명(주최측 추산)의 인파가 모여 반 정부 시위를 벌여 눈길을 끌였다. 이날 광화문에서 열린 여러 집회에 그 정치적 색깔이나 내용에 관계없이 한국 기독교의 보수교회가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보수 교계는 그간 상시적으로 현 정부에 대한 반 시위를 드문드문 계속해 왔으나, 조국 법무부 장관 논란을 기점으로 대대적으로 봉기하며, 이 날의 역대급 인파를 만들어 냈다.이를 두고 한 교계 관계자는 “한국교회 내에서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 세력의 발호는 현 정부의 독단과 권력 남용에 대한 한국교회의 지엄한 경고”라며, “정부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반드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교계의 봉기는 올 2020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 정부의 반 기독교적 정책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불안과 안보불안은 보수계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 2. 전광훈 목사 정치 행보 논란2019년 가장 핫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1순위에 오를만큼 여러모로 주목을 받은 인물은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이다. 전 목사는 반정부 보수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매주 광화문 보수집회를 이끌고 있다. 이미 그의 인기는 교계를 넘어 사회 전체로 뻗어 있으며, 특히 60세 이상 노년층들의 지지를 한 몸에 얻고 있다. 무엇보다 총선이 코앞에 다가온 현재, 그가 평생을 숙원하던 기독당의 국회진출이 매우 근접하다는 추측이 지배적일만큼 이번 그의 행보는 확실히 예전과 다르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평가와 달리 교계 내부에서 바라보는 전 목사에 대한 모습은 상당히 문제가 심각하다. 목회자의 입에서 결코 내뱉을 수 없는 온갖 막말과 욕설은 교계가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여기에 최근 “하나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신성모독적 발언은 오만이 극에 달한 전 목사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를 지지하던 교계 인사들조차 망설케 될 수 밖에 없었다. 3.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 결정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린 가운데, 이에 대한 교계의 반발이 매우 거세게 일고 있다. 헌재는 재판관 9명 가운데 ‘헌법불합치’ 4명, ‘단순 위헌’ 3명, 그리고 ‘합헌’ 2명으로, 결과적으로는 ‘낙태죄’가 ‘위헌’(헌법불합치)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헌재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 금지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 처벌하도록 한 현행법 조항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교계는 태아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로, 이를 결코 인간이 함부로 해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권태진 목사)은 이번 결정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우선시된 잘못된 판단이라고 밝혔다. 특히 “생명 말살과 사회적 생명경시 풍조의 확산을 도외시한 지극히 무책임하고 편향된 판결”이라고 비난했다.4. 3.1운동 100주년 기념대회 2만명 운집 3.10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고,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기 위한 한국교회 성도 2만여명이 삼일절 당일인 3월 1일 서울 시청 인근에 모였다.한국교회 성도 2만여명은 ‘3.1운동100주년한국교회위원회’가 개최한 ‘3.1운동 100년 한국교회 기념대회’를 통해 한반도 민족 복음화와 750만 디아스포라의 세계 선교 사명을 다할 것을 결의했다.‘진리와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에 나선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100년 전 3.1 운동에서 참된 자유를 향해 부르짖은 함성과 정신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진정한 독립만세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것은 바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날 발표된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 선언문’에는 “우리 한국교회는 선배들의 선언과 목숨을 바친 희생 위에 얻어낸 이 땅의 독립과 자유와 평화를 소중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5. 명성교회 사태 수습안 통과 세계 최대 장로교회의 ‘목회세습’이라는 논란으로 지난 수년 간 교계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이 쏟아졌던 명성교회 사태가 지난 9월 총회를 통해 마무리 됐다. 총대들은 명성교회와 서울동남노회가 그간 총회 재판국의 판결을 거부한 것에 대해 공식사과토록 함과 동시에 2021년 1월 이후 김하나 목사의 재청빙을 가능토록 한 수습전권위원회의 수습안을 전격 받아들이며, 명성교회 사태의 종지부를 찍었다.지난 3년간 한국교회 세습 문제를 전 사회적 문제로 부각시켰던 명성교회 사태가 드디어 끝을 맞은 것이다. 허나 명성교회 사태가 남긴 상처는 꽤나 컸다. 일부 세속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한 앞 뒤 없는 자극적인 기사들은 어느새 국민들에 한국교회 목회자 대부분을 돈과 권력에 눈 먼 시장패들로 만들어 놨다. 여기에 한국교회 부흥의 상징이자 자랑이었던 몇몇 대형교회들은 마땅한 사실확인 없이 그저 크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의 직격탄을 맞아야 했다. 그렇기에 명성교회 사태의 종식을 선언한 예장통합측의 지난 9월 총회는 한국교회 차원에서도 매우 반가울 수 밖에 없다.6. 안양대, 대순진리회 매각 의혹 고봉 김치선 박사가 설립한 안양대학교(구 대한신학교)가 신흥종교인 대순진리회 성주방면에 매각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 한 해였다. 특히 안양대학교 학교법인인 우일학원의 이사회에 대진성주회 관련 인사들이 급격히 유입되며 우려는 현실화 됐다. 우일학원은 먼저 지난 2018년 8월 17일 이사회에서 대진성주회 관련 인사들 2명을 이사로 선임한 바 있다. 이들 중 A씨는 대진교육재단 관계자이며, B씨는 대진교육재단에서 운영하는 경북 상주 소재 호텔 관계자로 알려졌다. 이 뿐 아니라 지난 2018년 12월 17일에는 2명의 이사를 추가로 교육부에 교체를 요청했는데, 이들이 대진교육재단이 운영하는 중원대학교 전 대학원장과 총장직무대행으로 확인되며, 안양대학교가 대진교육재단으로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신빙성을 더했다. 이런 사실이 지난해 초 본격적으로 알려지면서, 재학생 및 동문, 교수 및 대신교단이 대대적으로 반발했다. 이들은 비대위를 꾸려, 교육부에 직접 탄원을 넣기도 하고, 중원대학교를 직접 찾아 시위를 진행키도 했다. 7. 백석-대신 대통합 ‘원점’예장 백석대신측이 결국 ‘백석’으로 완전히 회귀했다. 지난 2018년 대신측과 통합이 와해된 이후, 지난 총회에서 백석대신측으로 ‘백석’의 이름을 되살렸던 동 교단은 제42회 정기총회를 통해 ‘대신’이란 이름을 완전히 버리고, 교단 명칭을 ‘백석’으로 확정했다2015년 한국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신-백석 통합이 결국 완전히 와해된 것이다. 허나 이러한 결과는 애초에 예견됐다. 통합 당시부터 거짓 논란이 거세게 일었던 대신 총회장 전광훈 목사로 인해 이미 상당수의 대신세력이 합류하지 않았으며, 이후 결국 통합 결의가 무효라는 법원의 확정판결까지 받게 된다. 문제는 이후 대신의 분열이 매우 가속화됐다는 것이다.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대신 복원을 선포하며, 총회를 열고, 강대석 목사를 총회장으로 세웠다. 유충국 목사 등의 세력은 유만석 목사측과 손을 잡고, 백석대신으로 총회를 이탈했다. 2015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유일의 자생교단이었던 ‘대신’이 사분오열되는 씁쓸한 한 해였다. 8. 법원, 바른성경 판매 및 전시금지, 전량폐기 명령원문에 가장 가까운 성경이라는 자부심으로 한국성경공회가 발행한 바른성경이 대한성서공회의 개역개정판을 일부 무단으로 베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서울중앙지법 제26민사부는 지난 2월 18일 성서공회가 성경공회를 상대로 지난 2014년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에 대해 일부 원고 승소 판결했다. 성경공회의 바른성경이 성서공회의 개역개정판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성경공회를 향해 바른성경을 복제, 제작, 반포, 판매, 전시, 소지하여서는 안된다고 했을 뿐 아니라, 각 사무실, 공장, 창고, 판매점포에 보관, 전시, 진열 중인 완성품, 반제품, 시작품, 부분품 모두를 폐기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성경 원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표현이지만, 개역개정판에서 번역자의 판단에 따라 추가된 부분, 성경 원문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개역개정판에서 번역자가 의도적으로 제외한 부분은 독자적인 창작적 표현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며 “피고들은 … 개역개정판과 동일하게, 원문에 존재하지 않는 부분을 추가 번역했다”고 밝혔다.9. 사랑의교회, 7년분쟁 완전 종식 사랑의교회(담임 오정현 목사)가 성탄을 앞둔 한국교회에 매우 의미있는 소식을 전했다. 오랜기간 한국교회를 염려케 한 교회분쟁을 완전히 끝낸 것이다. 교회측은 지난 12월 23일 서울 반포동 쉐라톤팔레스호텔에서 갱신위원회(대표 김두종 장로)와 만남을 갖고 분쟁 종식을 골자로 한 합의각서에 최종 서명했다. 결코 끝이 보이지 않던 양측의 대립이 급작스럽게 해소된 바탕에는 예장합동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중재가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양측은 그간 소 목사의 중재로 총 5번의 만남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던 중 세상적 판단에 기댄 그간의 다툼이 양측 모두에 있어 결코 이득이 되지 않음을 절감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와 성도의 치유 회복에 전력키로 했다. 사랑의교회는 교회로부터 권징을 받은 갱신위 소속 성도들을 이유불문 전원 해벌키로 했으며, 반대로 갱신위 역시 오정현 목사에 대한 사과와 함께 추후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양측은 이유를 불문하고 상대방에 대해 제기된 소송 및 신청사건 등 일체의 법적 쟁송을 취하키로 했다. 10. 기하성, 연금법인 해산 결의 기하성 여의도측과 재단측이 지난해 교단을 통합한 이후 첫 정기총회를 열고, 연금법인의 해산을 결의했다. 연금법인의 손실금은 무려 39억원, 법적인 책임 문제가 심각히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 향후 엄청난 파장으로 예고하고 있다. 연금법인은 여의도측 뿐 아니라, 기하성(신수동측), 광화문측, 예하성 등 순복음 산하 대다수 교단이 가입되어 있는 것으로, 이사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연금 중 39억여원이 재단법인 소유 통장으로 들어간 것이 발견되며, 이에대한 책임소재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빚은 바 있다. 특히 기하성, 광화문측, 예하성 등의 3개 교단이 연대해 손실금 보전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기도회를 개최키도 했었다. 이후 연금법인 사태와 관련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한 채 금번 총회에서 여의도측이 연금법인 해산을 결의한 것이다. 이에 타교단들은 거세게 반발할 테세다. 무엇보다 적립된 연금액이 수십년을 버티기 거뜬한 상황에 단순히 손실금 문제를 무마시키기 위해 연금법인을 해산시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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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6
  • 2019년 교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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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기획
    • 특집
    2020-01-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8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는데, 팔이 무거워지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와 모세를 앉게 하고, 자신들이 모세의 양팔을 떠받쳤는데, 결국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모세가 아론과 훌의 부축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결국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본문에서 모세가 기도했다는 말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가 왜 손을 들고 서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 산을 향하여 광야 길을 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하는 기적을 통하여 이집트 군대가 더 이상 추격할 수도 없고, 이스라엘도 이집트 되돌아 갈 수 없도록 완전하게 과거와 차단을 시키셨다. 이스라엘은 이제 해방되어 자유민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당장 먹고 살아야 문제가 있었고, 점차 그들이 거주할 땅이 필요했고, 새로운 정착지에 사는 동안 그들을 외적으로부터 지켜 보호해줄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이들과 언약을 맺어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들의 이러한 민생문제도 해결해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과 언약을 맺기 위해서는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언약의 주로서의 능력을 보여 주셔야 했다. 따라서 홍해로부터 출발하여 시내 산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출애굽으로부터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기까지의 여정은 언약을 맺기 위한 준비 기간이며, 여호와의 자기소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한 피차 상대방의 선택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 기간에 이스라엘에게 마라(15:22-27)와 르비딤에서는 물을 공급해주시고(17:1-7), 만나와 메추라기로 식량을 주시고(16:1-36), 이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싸우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다(17:8-16). 말하자면 아말렉 사건은 이러한 배경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손석태『출애굽기강의』(서울:ESP, 2005), 118-122).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나오게 한 물로 그들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는 동안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다. 아말렉은 그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창세기 14:7에 처음 언급되고 있다. 엘람왕 그돌라오멜이 소돔과 고모라를 칠 때에 가데스로 가서 아말렉 사람의 모든 들판을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36:12에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아주었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들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들은 에서의 후손들이다.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 그의 쌍둥이 형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병사들을 모집하여 출전하도록 지시하고 자기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게 하고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붙잡았다. 해가 질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들을 칼로 쳐서 무찔렀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 일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들려주어라. 내가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겠다”(14)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의 기(깃발)”라고 부르고,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 맹세하시기를 대대로 여호와께서 싸우시겠다고 하셨다”라고 하였다(16).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 처음으로 치른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한 전쟁이 아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병사들이 전투를 하였지만 그 배후에는 여호와가 계셨다. 여호와께서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내리거나 눈에 보이는 어떤 이적을 보이신 것은 없다. 그러나 모세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참여하고 계심을 이스라엘이 보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후에야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이 전쟁에 참여하였음을 확인시키며, 그날의 전투를 책에 기록하여 역사에 남게 하라고 지시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여호와 자신이 대대로 아말렉을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하신다. 이 전쟁은 출애굽 때 여호와께서 이집트의 바로와 싸우실 때와 유사점이 많다. 여호와께서는 이때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출 7:4; 12:7,41)이라고 부르시고, 모세를 앞장세워 바로와 그의 신들과 싸우고 심판하시며(출 12:12), 재앙을 퍼부으셨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쓰신 무기가 바로 10 재앙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바다를 가르라고 명하신다(14:16). 모세가 “그의 손을 내미니 여호와께서 큰 돌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셔서 바다가 마르고 물이 갈라졌다.”(21)고 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을 위해서 싸우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축제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는 용사이시며,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이시다. 그분이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가 택한 장교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은 곳에 내려갔다.”(출 15:3-5)고 노래한다. “용사”()라는 말은 전쟁에 능한 장수를 일컫는 말이다. 여호와를 그들을 위해서 싸우신 용사로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나 홍해를 건너는 작전은 다같이 “여호와의 전쟁”(YHWH’s War, 혹은 Holy War)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친히 전투에 앞장서 그의 백성들을 승리로 이끄시는 전쟁으로 이때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직접 싸우지는 않는다. 다만 전쟁이 끝나갈 때, 전리품을 거두는 일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수아가 야전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에 앞장서서 싸웠을지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분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명심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아말렉과의 전쟁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홍해를 건너 시내 산에 광야의 행진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하시고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는 언약을 맺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 됨을 알리고 체험토록 한 사건들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계속하여 아말렉에 대한 이름을 하늘 아래서 없애버리겠다고 선언하시며(14), 나아가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시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하셨다. 그래서 모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와의 기,” 곧 여호와의 깃발이라는 의미로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갈 때면 신상을 대신하여 여호와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가게 될 것이다. 이후 여호와께서는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바밸론을 포로로 잡혀간 중간사 시대에 유대인 에스더와 아말렉 족속 하만과의 목숨을 건 갈등 대결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에스더가 승리하고 아말렉 후손인 하만 망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대대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방패가 되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용사가 되셨다.이상을 살펴볼 때,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의 전쟁에서 모세의 역할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계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알리고 보여주는 표적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신적 전사(The Divine Warrior)로서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돕는 일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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