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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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 사는 한 어부의 이야기이다. 산티아고란 이 노인은 홀아비였다. 어느 날 그는 고기를 잡기위해 멀리 멕시코만까지 갔다. 어찌된 일인지 84일이 되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드디어 ‘말린’ 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를 잡게 된다. 말린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셌으며 사나웠다. 산티아고와 배는 말린에 의해 넓은 바다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때부터 산티아고와 물고기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다음날도 물고기의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생고기와 고등어를 먹어가며 고독과 피곤을 이겨야 했다.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지친 물고기는 수면으로 떠올랐다. 노인은 물고기에 작살을 꽃아 배 옆에서 끌고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물고기가 흘린 피는 상어 떼를 불러들였다. 밤새도록 상어 떼와 필사의 싸움을 하면서 새벽 포구에 도착한 노인은 오직 물고기의 앙상한 뼈만 발견할 수 있었다. 지친 그는 침대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케 했으며 영화로도 제작된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소설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지향점은 바로 ‘허무주의’ 이다. 인생은 그 어떤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어느 날 엽총으로 자살을 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허무주의가 문학, 음악. 사회, 경제, 종교 등에 깊이 침투하여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행사하며 기독교 진리를 왜곡 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허무주의가 우리의 청년, 청소년, 초등학생은 물론이거니와 기성세대도 심각할 정도로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할뿐더러 이 세상의 모든 삶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역동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절망의 늪에 잠겨 있는 것이 더욱 편한 것이라 생각하며 심지어 자살이라는 엄청난 죄악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 허무주의 빠지면 자아가 상실 된다 자아(Ego)란 인간의 의식적인 부분을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깨어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 알고 있다. 또한 기억력이 있으며 확실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직접 인식하고 항상 ‘나’ 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자아’ 라고 말하다.
 물론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의식적인 면’ 만을 자아라고 한다.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그런데 명예, 권력, 물질, 쾌락 때문에 자아가 상실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일까?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 는 자아 상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자아 상실이란 자아 결정의 중심의 상실이며 인격 통일의 붕괴이다. 통일 될 수 없는 분열의 충동에 의한 중심적 자아의 붕괴이다. 유한한 인간이 어느 것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렇다. 인간이 물질을 포함한 피조계에 대하여 스스로 중심됨을 주장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면 결국 그 속에 예속되어 영혼 없는 물질과 같이 되어버린다. 심각한 것은 오늘 날에도 자아를 상실한 사람들이 많다. 심한 말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즉 물질, 명예, 권력, 성욕, 쾌락, 술, 도박, 게임, 인신 매매, 폭력, 이단 등으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인간의 모든 생활은 감각 기관, 호기심에 의해 끊임없이 유혹을 당한다. 그렇다고 하여 정신 나간 상태 즉 물질이나 어떤 것으로 인한 자아 상실의 상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맛있는 생선일수록 날카로운 가시와 치명적인 독이 있는 것처럼 이 땅의 영화와 사치 역시 생선과 같다. 즉 맛있는 생선에 가시와 독이 있는 것처럼 눈에 보기 좋은 이 땅의 영화와 사치에는 고난과 애통이라는 형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를 주의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가시와 독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허무주의에 빠져 자아를 상실할까? 그것은 인생의 목적 즉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짐승처럼 맹목적으로 살면서 동물적 본능에 의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좇게 된다. 고로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짐승처럼 산다면 결국은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바른 목적을 분명히 가져야한다. 또 인생의 바른 목적을 모르고 사는 자들에게 그것을 부지런히 가르쳐할 본분과 사명이 있다. 도대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맨 초두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묻고 그 답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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