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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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부흥사들의 말라기 4장 2절의 설교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을 통한 진료나 암 같은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특별한 광선, X-Ray와 같은 것을 예비하신다는 말과 같이 들린다. 이 같은 해석과 설교는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을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같은 번역과 해석은 본문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라기는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주고 받은 6개의 논쟁으로 구성된 책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온갖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1:2),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1:6), “우리가 어떻게 괴롭혔습니까?” “공평한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2:17),  “우리가 어떻게 돌아갑니까?”(3:4),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도적질하였습니까?”(3:8), “우리가 무슨 말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까?”(3:13) 등의 질문으로 여호와와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의 마지막 부분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선포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날을 정하실 것이다. 그 날은 특히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며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며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불경한 자들, 스스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않았다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들과는 달리 진정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기념책이란 아마도 하나님 앞에 있는  생명책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은 나의 소유가 되겠고,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끼듯이 나도 그들을 아낄 것이다.”(3:1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가리켜 “소유”라고 말하는 경우는 노예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쓰는 말이다. 혹 자녀에 대해서도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하여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하여는 명시적으로 소유라고 말한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이다. 소유이지만 물건이나 남녀의 종과 같은 소유가 아니라 특별한 소유이다. 물건이나 남녀의 종들은 팔고 살 수가 있고, 심지어는 마음에 맞지 않을 때는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내는 팔아서도 안되고 죽여서도 안되는 특별한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정한 날에 그들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한 날에 그의 아내와 같은 소중한 존재로 삼을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해도 된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들처럼 소중하게 아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들을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 곧 아내나 자식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가장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가족과 같은 관계를 갖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용광로처럼 불이 타오르는 날이 될 것이다(4:1). 교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은 이 날에 지푸라기처럼 불에 타서 뿌리와 가지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무서운 심판의 날이다. 이와 달리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의로운 태양”이 그들 위에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번역에 이견이 많다.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의로운 해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떠오를 것이며, 치료가 그의 날개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여러 역본들은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치료하는 광선”이다. 히브리어 “우마르폐 비크나폐이하”()는 명사문장으로 동사가 없다. 따라서 “그리고 의의 해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에게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날개 안에 치료(가 있을 것이다.)”가 문자적인 번역이다. 이 경우 “그의 날개 안에 치료가 있을 것이다”라고 영어의 be 동사가 생략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은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의 태양”이란 신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시편 84:11은 “여호와는 태양이시고”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운 해를 직접 하나님이라고 지칭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의로운 해는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떠오를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로운 해”는 신적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삼하 233-4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를 태양이 떠올 때의 아침빛으로 묘사한다. 태양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23:5-6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의로운 왕을 일으키실 것인데 그는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여호와는 우리의 의” (The Lord is our Righteousness)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왕, 예수님을 예언하는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치료가 그의 날개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날개 안에”라고 번역하고 있는 “비크나페이하”는 “안에”라는 뜻의 “벳”()과 날개라는 뜻을 가진 “카나프”()라고 하는 여성 명사 복수형에 삼인칭 여성 단수 어미가 붙어 있다. 따라서 “그의 날개 안에”라고 할 때 날개를 여성 복수로 쓰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날개가 누구의 날개인지 분명치 않다. 어떤 번역자들이나 주석자들은 이를 태양의 날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 세계에서 태양은 항상 남성이며, 각 몸의 지체는 대개 여성이다. 따라서 앞의 태양과 뒤의 날개를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태양의 날개”라는 식의 번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양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햇빛을 테양의 날개로 생각하고 이를 광선, 곧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의의 태양”은 신적 존재, 다시 말하면 다윗의 줄기에서 나와서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왕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날개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성경에는 하나님의 날개에 두 가지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독수리 날개이다. 예레미야 48:40, 49:22에는 여호와께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모압을 심판하는 내용을 기술하며, 여호와 자신을 독수리에 비유하여 “보아라 그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모압 위에 자기 날개를 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날개를 편다는 말은 그 땅을 점령하고 그의 거처로 삼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결국 심판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시편 91:4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호와의 날개를 피난처와 치유에 대하여 말한다.
“참으로 너를 사냥꾼의 덮과 지독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다. 주께서 너를 깃으로 덮으시고 네가 그 분의 날개 아래에 피할 것이니 그 분의 진실하심이 방패와 손방패가 될 것이다. 네가 밤의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둠 가운데 퍼지는 전염병과 한 낮에 황폐하게 하는 파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깃과 날개는 전염병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지키는 피난처와 방패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출 15:26). 여호와께서는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시 103:3),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그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이시다(147:3. 신 32:39). 따라서 하나님은 치료자이시고, 그의 날개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치유의 도구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의로운 태양의 치유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사선과 같은 치료하는 광선이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게 하는 세상을 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해가 더 이상 낮에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이 우리를 위하여 빛을 비추어 밝게 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빛이 되시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네 해가 다시는 지지 않고, 네 달이 다시는 기울지 아니 할 것이니, 이는 여호와가 영원히 네 빛이 되시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사 60:19-20). 이 예언의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한 의로운 태양으로 오셔서 세상의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인생들,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날개를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오실 때, 그 때는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가 마치 병아리나 독수리처럼 그의 날개 안에서 치료를 받고, 슬픔을 거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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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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