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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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맞는다. 부활절이 아니라도 성경은 우리가 과연 부활 신앙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가하는 질문을 시시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서 던지며, 우리를 부활 신앙을 선택하고, 부활 정신으로 도전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조상이라고 가르치며(롬 4:12),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이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죽인 것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살리는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은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그래서 우리 신앙의 출발과 중심은 항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번제 준비를 하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으로 향하여 갔다. 그리고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그는 그의 하인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창 22:5)고 말한다. 히브리어 사본은 “우리가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하는 “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 혼자 돌아오지 않고,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것을 하인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지라도 그는 분명 살아있는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과연 무슨 뱃장이 있었기에 이런 대담한 말을 그의 종들에게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그의 아내 사라가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그의 아들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했을 때, 그는 근심이 가득하였고, 괴로워 했다고 했다(창 11,12). 살아있는 아들, 이스마엘의 손을 놓지 못해 근심하고 괴로워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니 전혀 고민하거나 주저하는 내색이 없이 이튿날 아침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번제로 드리라고 지시하신 산으로 향한다. 마치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민첩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번제란 재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하인들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따라 갔다. 사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그는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때문이다. 하갈과 그의 자식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이삭을 통해서 태어나야 네 자손이라 일컫게 될 것이다.”(창 21:12).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꼭 믿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그를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 민족은 바로 이삭을 통하여
이루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삭은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믿은 것이다. 그는 비록 이삭을 번제로 드리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살려 도로 자기에게 주실 것을 믿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삭에게서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대범하고 주저 없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서 그의 하인들에게 번제를 드리고 “우리가” 돌아온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 아브라함과 같은 용기와 결단과 결단에 따르는 대범한 행동을 할 수 없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비굴하게 인간적인 꾀를 짜내고 그리고 주저 앉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 100 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의 이름까지 이삭으로 지으라고 일러 주셨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는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그의 아내도 90 세가 되어 생리가 그친지 오래 된 상황이어서 “내가 늙었는데 참으로 아이를 낳겠느냐?”고 속으로 말하여 웃었다고 했다 (창 18:13). 이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와께 불가능한 것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그의 전지전능 하심을 믿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100 세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았다. 도저히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고목에서 꽃이 피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아브라함은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고목과 같은 자기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들 이삭을 그분께 번제로 드린다 한들 분명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를 담대하고 용감하게 한 것이다 (롬 4:17).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 믿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고 노경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말씀과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신앙을 본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이 결국 그를 우리 모두 죽은 자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게 한 것이다.
2017년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부활 신앙을 가진 자였다. 그의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천지창조의 권능을 믿었기에 그의 아들을 주저함 없이 번제로 바칠 수 있었다.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용기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헌신도, 다 부활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살리신 이에게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왜 두려운가? 왜 우리는 “아니요”라는 말을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피붙이와 우리의 소유에 대하여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집착하는가?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과 부활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 속으로 부활을 믿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의 신앙과 부활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 정신을 배우지 못하고, 훈련을 받지 못하고, 연습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 짐을 지고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우리는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빌 3:10-1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는 그는 분명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대한 자기 생각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고난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은 무리들에게 돌을 맞고 실신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내다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성읍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만일에 그가 죽음이 두려웠더라면 그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안에 들어온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여야 할 것입니다.”(행 14:22)라고 권면했다. 그는 사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도 바울과 똑같이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고, 세례를 받음으로 복음의 종으로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죽음을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롬 6: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은 믿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요, 고난에 대한 생활 철학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꼐 고난도 받아야 한다. 십자가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 진리를 수호하고, 정의를 실행하며, 자유를 지키며 부활절을 맞는 우리도 이러한 아브라함이나 바울과 같은 인생철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의 부활 신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정의를 세우고, 자유를 쟁취해야 할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류를 따라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면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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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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