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복되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바룩”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같이 사용되고 있다. 이 어휘는 칼 수동 분사형(Qal. Pass. Pts)으로 “복되다” “혹은 ”복을 받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룩 아도나이”를 번역한다면 “여호와는 복되시다.” 혹은 “여호와께 복이 있으시길!”하는 기원의 의미이다.
영역본들은 “Blessed be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수동 분사형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마치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복을 받는 것 같아 우리의 이해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복되다고 말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것은 의미가 맞지 않다. 그래서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송축하다” (be praised. 창 24:27; 왕상 10:9; 시 72:18; 144:1; 145:1 등)라고 번역하고 있다. 시편 1편에“복이 있다”(how happy)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아쉬레”라는 항상 사람에게 사용되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이 히브리어를 “마카리오스”로 번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행복한 상태(the state of happiness)를 기술하는 말이며, 영적인 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이 산상복음은 결코 그 해석이 쉽지 않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을 정의하시며 반복해서는 쓰시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3, 10),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8),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9),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12) 등이다. “호티”(왜냐하면) 로 시작하는 부사절에서 복이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 데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 팔복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은 없을지라도 복 있는 이유가 다 하나님과 하나님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됨과 연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번째 복, “온유한 자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온유한 자가 왜 땅을 상속받게 될 지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다. 형제간에 재산 싸움이 있을 때에 온유해야 유산을 많이 상속받는다는 의미인가? 그래서 형제간에 서로 우애를 다지고, 싸우지 말라는 말씀인가?
우리는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부터 정확한 의미 파악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헬라어 “프라우스”라는 말은 흔히 “온유하다”(meek)라고 이해하고 번역하고 있지만 “겸손하다”(humble)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기술하며, 왕으로 오시는 이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슥 9:9). 이때 겸손하다는 뜻으로 “프라우스”를 쓰고 있는 데 이는 히브리어로 “아나브”, 곧 “겸손하다”라는 의미이다(마 21:5). 왕으로 오시는 분이 온유하여 나귀를 탔다고 한다면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다. 왕이 보통 전쟁에 승리하고, 말을 타고 수 많은 그의 군대를 대동하고, 그의 왕도에 입성하는 그 위풍당당하고, 근엄하고, 오만하고, 거만한 왕과 달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도로 입성하시는 왕을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조에 있어서 잘 어울리지 않은 말이다. 그 보다는 “겸손하다”고 해야 옳다 (ESV, RSV, 한글개역, 바른성경). 따라서 마 5:5의 경우도 “온유하다”는 말보다는 “겸손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땅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을 생각해볼 팔요가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여호와 네 하나님이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 것이다.”(출 20:12).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와 땅을 연계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예수께서는 겸손한 자와 땅을 연계해서 말씀하신다. 모세의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왕과 백성이 되는 관계를 맺고, 이 관계가 쉽게 깨어지지 않는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 서로 목숨을 담보하는 피를 뿌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시내산 언약을 성경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부자 관계를 맺는 사건으로도 해석하는 것도 그 하나이다.(손석태 저, 「목회를 위한 구약신학」(서울 CLC, 2006), 289-335.참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며,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맏아들이다. 내가너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을 보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였으나 네가 보내기를 거절하니, 보아라 내가 네 아들, 네 맏아들을 죽일 것이다.”(출 4:22-23)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을 아들로 입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내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들의 유업으로 주겠다. 나는 여호와이다.”(출 6:8)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유업”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소유”(possession)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소유는 자손 대대로 이어받아 소유할 땅이기 때문에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라샤”라는 말을 “유산”(heritage, KJV, ERV, JPS )이라는 말로도 번역하고 있다. 레위기 20:24에서는 히브리어 “야라쉬”를 “상속받다”(inherit)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ESV, KJV, ERV, JPS, RSV, 바른성경).
개역성경은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신명기 4:38에서는 “너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그것을 유업으로 네게 주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느니라.”(신 4:38)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유업이란 말은 “유산”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는 “나할라”라고 하는 보다 분명한 유산의 의미를 가진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어 아들로 삼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유산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이스라엘에게 주신 유산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모를 잘 공경하면 그 유산의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여기서 부모는 그들에게 땅을 주신 하나님도 되겠지만,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이다.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당시 고대 근동의 관습을 따라 입양 관계를 파기하고 그 아들을 그의 집에서 내쫓아 다시 노예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 겸손치 못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복종하지 않고, 육신의 아비의 말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아들과 땅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의 다른 설명이고 해석이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산상수훈을 생각해보면 겸손한 자가 땅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에 대한 해석의 열쇠가 풀릴 것 같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5에서 겸손한 자(온유한 자)는 땅을 상속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데, 땅을 상속하고, 상속받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기서 “상속하다”는 말은 헬라어 “클레로노메오”를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히브리어 “나할”(상속하다)이라는 말을 LXX에서 번역한 말이며, 이를 마태복음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시내 산의 언약의 말씀과의 관계성을 간과할 수 없다. 산상 수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9).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땅을 상속받을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땅을 상속 받을 자는 겸손해야 한다. 그의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공경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반드시 생명을 걸어놓고 지켜야 할 계약이다.
하나님의 언약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가 바로 아담이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심이 그를 망하게 한 것이다. 모세가 겸손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 불평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때문이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께서 바위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하셨는데, 백성들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하고 바위를 친 사건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20:1-13). 이것은 온유한 자세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엇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겸손의 극치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그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었다.
겸손한 자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땅을 상속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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