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2(토)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25.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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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활동이 시작됨
가톨릭의 오류와 성경의 올바른 진리를 깨달은 칼빈은 이제 잠잠히 있을 수 없었다. 칼빈은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단 한적한 도시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가정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였다. 가난한 집, 부잣집, 큰 집, 작은 집 가리지 않고 개혁의 복음을 전하며 진리의 증인들을 만들어 놓았다. 기쁜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고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음은 이웃에서 이웃으로 전해지고, 더 나아가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촌락과 도시까지 복음의 물결이 스며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칼빈이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파리에서는 부자들과 유식하고 유력한 사람들 사이에 성경을 연구하며 토론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와 배치되는 진리를 발견한 학자들은 가톨릭의 지지자들에게 저항하며 투쟁하는 일까지도 전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칼빈은 여전히 집집을 방문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의 도리를 전해주었다. 당시 프랑스의 황제였던 프란시스1세의 누이인 마가레트도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신앙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나중에는 왕궁을 개방하고 설교자를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까지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의 반격과 선동의 결과로 무지하고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평민들이 개혁신앙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프란시스 왕도 이에 동조하게 되므로 교황측에서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개혁자들과 그 신앙에 동조하는 자들을 화형시키는 일을 재개하였다. 칼빈도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를 체포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는데, 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파리를 탈출하여 포티어(Poitiers)라는 곳으로 가서 개혁사업을 전개하였다. 얼마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나 프랑스는 이미 개혁의 문이 닫힌 것을 감지하고 일단 독일로 들어갔다.

생지옥이 된 프랑스
이러한 와중에 개혁운동에 찬 물을 끼얹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하루 밤 사이에 로마교회의 미사 제도를 반박하고 공격하는 격문(檄文) 벽보가 전국 각처에 붙여졌다. 심지어는 왕의 거실 출입문에도 그 격문이 붙었다. 이에 격분한 왕은 개혁신앙을 가진 모든 자들을 박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개혁교도들을 체포하여 화형을 시키는 일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왕까지도 이 일에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어 그 일에 직접 참여하고 간여하였다. 개혁을 주도하던 지도자들과 개혁신앙을 동조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화형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조용한 기쁨과 관용과 용서의 정신은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 되어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많은 학자들과 부자들과 유력한 자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심중으로는 개혁 신앙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혁신앙자들에게 대한 철저한 박해가 시작되자, 자신들도 언젠가는 신분이 노출되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대학교수들, 학자들, 저술가들, 고급기술자 등 국가의 존경받고 인정받는 유력한 인물들이, 심지어는 왕궁의 신하들 중에도 프랑스를 떠나 다른 나라로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로 인해 왕과 신부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었고 개혁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징벌하는 화형장의 검은 연기가 프랑스의 하늘을 뒤덮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에게 자행된 이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행위는, 장차 프랑스 혁명과 함께 닥쳐올, 무신론자들이 가톨릭교도들에게 저지르게 될 무시무시한 단두대 만행의 씨앗이었다.

개혁사업의 거점이 된 스위스의 제네바
프랑스 종교개혁의 초기에 괄목할 만한 개혁자였던 러페브르의 제자였던 파렐은 매우 강직하고 용감한 개혁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한 때 스위스로 가서 츠빙글리의 개혁사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국의 종교개혁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프랑스의 국경 근처에서 자국의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독일의 개혁관련 서적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문서전도자들을 통하여 조국의 여러 지역에 보급하였다.
파렐은 한 때 스위스의 한적한 지역으로 가서 아동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아동들을 교육하는 과정에 성경도 함께 가르쳤고, 그 영향이 부모들에게 확대되어 부모들 가운데 개혁신앙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얻게 되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신부들이 미신적인 신앙을 하는 시골 사람들을 충동하여 파렐은 더 이상 그 사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옛날 예수의 제자들처럼 이 마을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마을로, 이 도시에서 박해가 오면 저 도시로 옮겨가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한 그의 집념과 노력의 결과로 가톨릭 신앙의 요새로 알려진 몇몇 도시들이 복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로마교회의 의식을 포기하고 우상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다. 파렐은 특별히, 제네바에 개신교의 깃발을 꽂으면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위한 개혁사업의 거점이 될 것을 예상하고 제네바로 들어가 개혁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현지 가톨릭 세력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혁의지는 여전히 제네바에 머무르고 있었고 파렐의 개혁정신은 계속 불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는 비천한 신분의 한 연약한 젊은이가 아동교육을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아이들이 그 복음을 부모들에게 전하여, 부모들이 이 프로멘트(Froment)라는 교사의 성경강해를 듣기 위하여 학교로 모여들었다. 그 수가 점점 증가하여 나중에는 교실이 차고 넘쳤다. 프로멘트는 이 과정에서 신약성경과 다량의 전도용 소책자들을 보급하였으며, 그 서적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짐으로 제네바에 개혁사업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곳에서 개신교 사업이 견고해졌다. 이 무명의 한 청년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칼빈이 바젤로 가는 길에 제네바에 들렀다. 칼빈을 만난 파렐은 하나님께서 이 젊은이를 제네바로 보냈다고 확신하여 그를 설득하여 제네바에서 자기와 함께 개혁사업을 할 것을 강권하였다. 소극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칼빈은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제네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신이 없어서 회피하려고 했지만, 파렐의 강권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이곳에서 30년간 개혁사업을 주도하였다. 그의 개혁의 목표는 첫째, 성경상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고 둘째는 전 유럽에 종교개혁을 촉진시키는 일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주도하는 개혁운동은 가톨릭의 세력을 저항하며 개신교의 원칙을 고수하는 보루가 되었고, 개혁신앙과 관련된 많은 책자들이 만들어져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그 시대에 세상이 요구하는 진리가 이곳으로부터 방방곡곡으로 펴져나갔다. 각처에서 핍박받던 개혁자들이 제네바로 돌아와서 피난처를 삼았고, 다시 힘을 얻어 각국으로 나갔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영국의 청교도들, 네델란드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이곳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에 불을 붙여서 들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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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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