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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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새로운 비전 가운데,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며 새 출발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연말이 되면 우리는 모든 일이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고 주저앉아 자책할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이 해마다 반복되면 우리는 연말연시가 두렵기까지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신 말씀을 한번 되새겨 보면 마음이 놓인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과 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역사의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잠언 기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하나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16:9) 라고 말하고, “사람이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결국 성취되는 것은 여호와의 뜻이다.” (19:21)라고 가르친다. 시편기자도 “여호와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즐거워하신다. 비록 그가 넘어져도 엎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시기 때문이다.”(시 37: 23-24)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하던 일을 계속 하나님께 맡기며 사는 믿음과 지혜가 더 필요하다.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눈에 띄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속사람이 성숙하도록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스승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을 그의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버렸다고 했다. 빌립보서 3:8의 “내 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지식”이라고 읽고 있다. 대개의 영역본들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것”(knowing Christ Jesus my Lord)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한글 역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명사, “그노시스”와 그의 동사형 “기노스코”(알다)를 이중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지식”이라고 하거나 영역본에서 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대한 지식이란 의미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탄생,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과 같은 사실에 대하여 아는 바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헬라어로 “기노스코” 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알다”(know)라는 의미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이성적이고 지적인 이해(intelligent comprehension)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서로 친하다” (be acquaintance with), “동침하다”(have sexual relation)는 의미이다. 히브리어로는 “야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헬라어와 같은 의미이다. 창세기 3:1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했다고 했을 때 “알다”는 의미의 “야다”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마태복음 1:25에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 여자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도 “동침하다”는 말로“기노스코”라는 말을 쓰고 있다. 말하자면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다같이 “안다”는 말을 쓰고 있는 데 이들은 관계어이다. 사람 사이의 가장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부부 간의 성관계를 두고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식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울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관계성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러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값있는, 고상한 일이라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것을 위하여 힘써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연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견고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첫째,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에게 유익한 것을 버렸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민 손을 붙잡기 위하여 다른 것은 다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가치관이 분명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전 생애를 다 바쳐 따르고, 배우고, 추구해야 할 최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밭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어느 품팔이군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일이 있다. 밭갈이를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그 사람은 그것을 흙으로 덮어놓고 가서 자기 집을 팔아 그 밭을 통째로 사서, 결국 그 밭에 감춰진 보화를 자기 소유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사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바울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내민 손을 놓지 않고 붙잡는 것을 그는 가장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항상 관계성 문제를 강조하시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 있으라는 말씀은 (요한 15:7; 17:21) 예수님과의 뗄려야 뗄 수 없는 성령을 통한 밀접한 연합관계를 나타내는 신비의 말씀이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약적 관계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진영으로 나뉜다.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옛 사람과 새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새 사람이다. 새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새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로 아담의 죄 값을 치르고, 새로 지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아담에게 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 아담에 붙은 사람이 있다. 우리 신자들은 믿음으로 새 아담,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새 왕국의 백성이 된 자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따라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죽음에 이르는 역사의 열차를 탄 사람이나 새 아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는 생명 열차를 탄 사람이다. 내가 어느 열차에 몸을 실려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정체성 문제이다. 소속이 불분명한 사람은 예수께 속한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립이란 없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로마 시민권을 버렸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의 동족과 더불어 “노예”의 길을 택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를 바란 것이다.
셋째, 바을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산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보려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간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셨으니 자기도 죽고 부활해 보고 싶다는 욕심과 목표를 가지고 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따라서 바울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도 죽고 부활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Imitator of Christ)을 살기 위해서 발버둥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면 자기도 해보고 싶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가르치셨으니 자기도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자기도 십자가를 지고 그의 고난의 길을 걸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 세계를 떠돌며 굶주리고, 병마에 시달리며,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죄수가 되어 순교했다. 그리스도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 자기의 생명을 바쳐 죄인들의 생명을 살리셨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라고 하셨다.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아 선을 행하려고 했다는 것이다(막 3:4).
결론적으로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식,” 곧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더 견고히 하고,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그것이 가장 고상하고,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셨다. 우리도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힘쓰고,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식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지식이다. 어떤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생명을 바쳐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더 넓고 더 깊이 알기 위해 힘쓰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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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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