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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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는 이 땅에 여자의 후손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으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우리 모든 피조물들의 왕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다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도록 지도하는 일을 맡기신 것이다. 특별히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잘 지키고, 또한 피조물들이 창조의 질서를 잘 지키도록 감독해야 할 사명을 받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왕이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반역자로 몰아넣었다. 아담은 타락한 왕이 되었다.
아담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봉왕이다. 창조의 질서 가운데 아담 위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대왕으로 계신다. 그 대왕이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통하여 자신의 하나님 되심, 창조주 되심, 대왕이 되심, 그리고 언약의 주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권위와 능력을 동반한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존엄성을 선언하신 것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아담이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죽음의 선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 실과를 따먹었다. 결과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권위와 존엄성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반역자의 죄목으로 죽음을 선고했다. 아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죽음을 선고하셨다. 아담의 교만이 그를 타락과 파멸의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하나님께 대한 교만심이 그를 망하게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대왕으로 원치 않은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동등하게 되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종하였지만 결국 반역자가 되고, 반역의 괴수가 되고 말았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의식하지 않은 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른 체하며,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며,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갈 모든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아담에게 심판과 죽음의 저주를 내리시고,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아담을 세울 계획을 세우신다.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새로운 그의 대리통치자, 새로운 왕이 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새 아담이 새로운 왕이 되려면 아담이 실패한 끝이 없는 겸손과 철저한 복종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겸손이라 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그의 낮아지심(humiliation)을 말하는 것이고, 복종이라 함은 아담의 속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놓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겸손과 복종에 대하여 빌립보서 2:6-8에서 잘 가르쳐 준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왕이지만 왕의 형상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도리어 그는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자기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종의 형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종의 형상으로,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담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갚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새 아담 예수께서는 “예”하고 순종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 이 순종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시여, 원하신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눅 22:42) 라고 기도하셨으며, 그 기도하는 동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까지 했다고 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으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만큼 되었을까?  아마도 온 몸을 다 쥐어짜서 기도를 하신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대로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새 아담으로서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은 아담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달래기에 충분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여전히 죄와 죽음의 사슬에 메어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살리시고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을 새로운 왕으로 높이 올려놓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복종이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새 아담, 곧 새로운 왕으로 높이 오르게 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새 아담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시편 2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선지서는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아들에 대하여 그가 다윗의 가문에서 낳게 될 것이고 신적 존재임을 고지하고 있다. 이사야 9:6-7에서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될 한 아기는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섭리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고,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한 섭리자, 영존하시는 아버지 등은 그가 하나님을 지칭하고, 그의 신적 속성을 의미하는  말이고, 평강의 왕이라는 말은 그의 인간적인 본성과 그의 사역의 성격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를 가리켜 “위대한 상담자”라고 하는 말은 사전적 번역이고, 문맥을 살펴보면 “위대한 섭리자” 혹은 “위대한 전략가”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인간 왕들과는 구별된 특별한 왕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사 11:1-5).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역한 아담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왕, 쉽게 말하면 즐겁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왕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오게 될 새 아담은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시는 정의로운 재판장,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반역의 세상을 판결하는 심판의 주로 오신다는 것이다.
때가 되어 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왕이 이 땅에 오셨다. 새 아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는 왕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축사에서 태어나셨다. 사람이 사는 집안의 방이나 모텔이 아니라 양들이 먹고 싸는 축사에서 태어나 요람 대신 구유, 여물통에 뉘었다. 유대인들은 몰랐지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 땅에 새로운 왕이 태어난 것을 별의 징조로 깨닫고 찾아와서 경배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그는 나귀를 타셨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이다.” 스가랴서 9:9의 말씀대로 자신이 왕이심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왕이라고 칭하고 있는 예수님은 당시의 왕들처럼 말을 타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록 나귀를 타셨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 길에 깔아 양탄자를 대신했고, 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다. 무리들은 나귀를 탄 예수님을 뒤 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 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 21:9)하며 외쳤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웠더니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새 아담, 예수님은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 전쟁 영웅이나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처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고, 내일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이지만 그에게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연호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를 달았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표지였지만 그것은 사실로 들어났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선언하셨다(마 28:16). 그는 온 우주의 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분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만물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대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거역했다. 그리하여 타락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은 겸손하여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온 우주의 왕, 곧 새 아담이 되셨다.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내어 주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참된 왕도를 보여주셨다(막 10:45). 이방의 현자들, 동방박사들이 축사의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었다. 왕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다.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게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새 아담의 왕도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갈수록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왕도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신분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새 아담, 예수님과 같은 왕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왕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죽기까지 복종해야 할 왕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을 배우고, 왕도를 따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귀를 탄 왕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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