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들이 맹인으로 태어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 “랍비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입니까?”라고 묻는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죄가 누구 때문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다.”(3)고 대답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 죄 때문에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그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한다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고귀한 뜻을 가지고 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이 문제 많은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며 진리의 말씀인가?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났다면 우리는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하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뜻 없이 하실 리가 없고, 창조의 과정 가운데 실수나 하자가 있을 수 없다. 창세기 말씀대로 우리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아무리 맹인이라 할지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열달이 차야 출산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우리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어 우리로 그것들 가운데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2:10)
이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미리 정하시어 우리가 그 선한 뜻 가운데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 그 뜻은 갑작스럽게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만들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 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뜻 없이 태어난 자는 없다.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사람은 없다. 태어 나서는 안 될 사람이 태어난 경우도 없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이고, 우리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셨다. 눈이 안 보이고, 쌍꺼풀이 없고, 코가 낮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지으시고 기뻐하신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가 알아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시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선을 이루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또한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롬 8:28)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서로 합력하여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비록 내가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괴로운 인생을 살지라도 그것은 선을 이루기 위한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은 우리에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고, 어떤 일은 꼭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바냐 3:5에는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는다”(God never fails, , lo ne‘dal) 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글 역본에서는 (Πι’στοV ’Ο θε、οV,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를 영역본에서는 “God never fails”로 많이 번역하고 있다(고전 1:11; 고후 1:18; 수 21:45; 신 7:9). 우리 신자들은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는 실패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요한 9장에 나오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었던 것같고, 더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셨기 때문에, 선지자일 리가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고 말하고(25), 또한 예수께서 고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이 이제 눈을 뜨고 보고 걸어다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가리켜 “네가 전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고 책망한다. 이들이 보기에는 안식일을 안 지키는 예수님도 죄인이고, 맹인이었던 자는 아예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잘 못이나 불행에 대하여 그들의 부모를 탓하는 경우가 많다. 시편 51편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는 시를 쓴 가운데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한다. 마치 자기 부모들이 몹쓸 짓을 하여 자기가 태어났고, 자기 어머니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의 본문을 살펴보면 번역상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악 중에” 혹은 “죄 중에”라고 할 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비분리 전치사 “벳”()은 시간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는 의미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정점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대개의 영역본에서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악하였고, 내가 잉태할 때부터 죄가 있었습니다”(Surely I was sinful at birth, sinful from the time my mother conceived me. NIV) 혹은 “내가 출생할 때부터 죄가 있으며, 내 어머니가 나를 잉태한 순간부터 죄인이었습니다.”(I was guilty of sin from birth, a sinner the moment my mother conceived me. NET)라고 번역하고 있다. “가운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때” 혹은 “순간”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여 그의 모친의 행동과 자신와 죄인 됨의 연관성을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가 언제부터 죄인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는 이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 말하자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기의 생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서 출생하게 되었느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잉태와 출생 때부터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잉태할 때도 죄가 있었고, 그가 출생할 때도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죄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칫하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담의 연대성 안에서 계속 죄인을 양산하는 일을 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에서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말한다. 이제 “아담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게 만들어졌고, 선한 일을 하여, 결국 선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출생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임을 믿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의 부모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하나님께서 쓰신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어머니 뱃속에 내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때가 되어 그 생명이 싹을 트고 나와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게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우리 부모가 비난을 받거나 궁극적으로 책임 져야할 의무가 없다. 그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장하시고, 인도 하시고,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게 하시는 것이다.
맹인이었던 자는 그가 눈을 뜨기까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은 일을 했다. 그가 창세 이후에 맹인으로 태어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9:32), 그는 이 세상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줄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 같다. 어쩌면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까지 계속 자기는 죄인으로 알고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는 말씀과 더불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다”(9:5)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의 마음 눈을 뜨게 한 것 같다. 그는 예수께서 그의 눈에 무엇을 발랐는지 알 리가 없었겠지만 그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가서 눈을 씻었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맹인으로 태어나 죄인 취급당하고,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출생관을 바로 잡아 주셔서, 그들을 얽매고 있는 모든 어두운 운명의 사슬을 다 풀어주셨다.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주시고, 소망을 심어주시고, “내가 맹인이었다”고 외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 주셨다.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육신의 눈도 뜨게 하셨다. 예수님은 운명과 율법에 억눌려 죄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과 자유를 주신 것이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