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연속이다. 안식일에 자기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끈질지게 주장한 사람을 출교한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목자가 아니라 강도요, 절도요, 도적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참 목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치신다.
고대 근동 세계의 사람들은 거의가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양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고대의 대 제국의 통치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목자”로 칭한다. 바빌로니아 제1왕조 6대왕(1792-1750 BC)이었던 함무라비는 그의 법전 서문을 “엔릴의 부름을 받은 목자, 나 함무라비는 부요함과 풍성함을 다같이 모으며...”라고 시작한다. 또한 법전 후기에도 “나는 진실로 평화를 가져오는 목자”라고 쓰고 있다. 함무라비 이전에 우륵의 왕, 엔메르카르, 라가쉬의 엔시, 세계 최고 오래된 법전을 만든 우루-남무, 이쉰의 리피트 이쉬탈 등도 다 자기를 목자로 칭하고 있다. 심지어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디그랏 빌리셀, 아수르 바니팔, 에사르하돈, 앗수르 바니팔 등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누비던 왕들이 다 자기를 “목자”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아멘호텝 3세(1411-1374)도 자신을 “선한 목자요 모든 백성을 위하여 불침번을 서는 자”라고 칭하고, 세티 1세(1313-1292)는 “선한 목자요, 그의 군사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왕들이 자기를 목자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도 목자의 역할과 왕의 역할의 유사성 때문인 것 같다. 양들은 물과 목초와 그들을 지켜주는 목자가 필요한 존재이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그들을 지켜 보호해줄 왕이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왕들은 그의 백성들이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하여, 왕과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은유의 대상이 다르다. 양떼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자기 소유의 양떼들을 위하여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을 그의 목자로 고용하여 그들을 먹이고, 돌보며, 보호하고, 지키도록 양떼를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자기 살기 위하여 오히려 양떼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며, 유기하고, 흩어버렸다. 양들이 흩어지면 당장 포식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목자들을 하나님은 삯군 목자요, 강도요, 절도요, 도적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부터 목자의 직분을 빼앗고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다(겔 3:10).
겔 34:15-16에 보면 “내가 내 양을 치며, 내가 그들을 눕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으며, 그 흩어진 것들을 돌아오게 하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며, 병든 것을 강하게 할 것이며 ... 정의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이다. 영역본 ESV나 한글판 개역에서는 “양을 치다”는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꾸어 “내가 내양의 목자가 되며”(I myself will be the shepherd of my sheep)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다.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가운에 지도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겔 34:23-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다윗은 에스겔보다 이미 500년 전에 유다 나라의 왕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다윗은 실제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사울을 이은 2대 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목자”라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다윗은 어떠한 목자였기에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사무엘 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이 사울 왕 앞에 나가서 자기가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자청하며, 자기가 어떠한 목동이였는가를 진술한다(17:34-37). 다윗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비록 아비의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 했지만 그가 맡은 양 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아비의 양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정신과 책임감과 열정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골리앗을 타도하도록 일어나게 하였으며, 결국 그는 목숨을 걸고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양떼들을 보호하고 지켰다. 아버지의 양떼를 맹수들로부터 지킨 사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을 골리앗으로부터 지켰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 놉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자 그는 아둘람 굴로 피난 갔는데, 이때에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다니며 떠돌이가 된 400명 가량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계속 생사를 같이한 동역자드로 삼았다(삼상 22:1-2). 세상에서 발붙이기 어려운 인생들을 받아주고 안아주고 생사의 고락을 함께 나누는 목자였다. 올데 갈 데가 없는 인생들을 받아 주고, 품에 안아, 상처를 싸매고 위로하며,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생명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였으며, 세상에서 쫓겨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도망 다니는 인생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어 이들을 살리는 일을 했다. 참으로 위대한 목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내 양떼 곧 초장의 양떼이다. 너희는 사람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겔 34:31).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목자가 되시고, 또한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주셔서 그의 백성을 모으고, 먹이고, 돌보고, 지키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근동세계의 목자에 대한 문화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 9장에 이어 10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10장 서두에 아주 직설적으로 자기가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비교하신다. 삯군 목자는 절도요 강도요 도둑들이라서 양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파괴할 뿐 아니라 포식자들이 나타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도망간다는 것이다. 양떼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둘째 치고, 책임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양들은 다만 자기들이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다. 삯군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살 길을 찾는 자들이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를 희생하여 양떼들을 살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다윗이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사자와 곰들과 싸우고, 골리앗과도 싸운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하나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 놓는다. 나는 목숨을 내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18). 이 세상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이고, 자기의 목숨을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자신이 가졌음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신과 같은 신적인 목자,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인간 목자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바로 예수께서 그 약속의 하나님-목자임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목자이시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하나님, 곧 선한 목자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는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자 하나님-다윗과 같은 목자가 바로 자신임을 목숨을 걸고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증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다윗과 같은 목자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
예수께서는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그가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고, 출교 당한 그를 찾아가 그를 그의 제자로 받아 주심으로 그가 바리새인들과 다른 선한 목자이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고 한 목자 밑에서 한 떼가 될 것이다.”(1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받아 선한 목자 예수님의 우리 안에 함께 들어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에게 그의 양을 치도록 목자로 세우신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라는 부탁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만큼 간절하게 부탁하신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목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양들,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며, ....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벧전 5:2-4)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목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목자장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목자가 되라고 명하셨고, 이제 베드로는 그의 양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제 목자가 되어야할 차례이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신 명령이 그의 양을 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우리가 순종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있는 양이라면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고대 근동 세계의 사람들은 거의가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양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고대의 대 제국의 통치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목자”로 칭한다. 바빌로니아 제1왕조 6대왕(1792-1750 BC)이었던 함무라비는 그의 법전 서문을 “엔릴의 부름을 받은 목자, 나 함무라비는 부요함과 풍성함을 다같이 모으며...”라고 시작한다. 또한 법전 후기에도 “나는 진실로 평화를 가져오는 목자”라고 쓰고 있다. 함무라비 이전에 우륵의 왕, 엔메르카르, 라가쉬의 엔시, 세계 최고 오래된 법전을 만든 우루-남무, 이쉰의 리피트 이쉬탈 등도 다 자기를 목자로 칭하고 있다. 심지어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디그랏 빌리셀, 아수르 바니팔, 에사르하돈, 앗수르 바니팔 등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누비던 왕들이 다 자기를 “목자”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아멘호텝 3세(1411-1374)도 자신을 “선한 목자요 모든 백성을 위하여 불침번을 서는 자”라고 칭하고, 세티 1세(1313-1292)는 “선한 목자요, 그의 군사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왕들이 자기를 목자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도 목자의 역할과 왕의 역할의 유사성 때문인 것 같다. 양들은 물과 목초와 그들을 지켜주는 목자가 필요한 존재이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그들을 지켜 보호해줄 왕이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왕들은 그의 백성들이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하여, 왕과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은유의 대상이 다르다. 양떼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자기 소유의 양떼들을 위하여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을 그의 목자로 고용하여 그들을 먹이고, 돌보며, 보호하고, 지키도록 양떼를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자기 살기 위하여 오히려 양떼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며, 유기하고, 흩어버렸다. 양들이 흩어지면 당장 포식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목자들을 하나님은 삯군 목자요, 강도요, 절도요, 도적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부터 목자의 직분을 빼앗고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다(겔 3:10).
겔 34:15-16에 보면 “내가 내 양을 치며, 내가 그들을 눕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으며, 그 흩어진 것들을 돌아오게 하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며, 병든 것을 강하게 할 것이며 ... 정의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이다. 영역본 ESV나 한글판 개역에서는 “양을 치다”는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꾸어 “내가 내양의 목자가 되며”(I myself will be the shepherd of my sheep)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다.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가운에 지도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겔 34:23-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다윗은 에스겔보다 이미 500년 전에 유다 나라의 왕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다윗은 실제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사울을 이은 2대 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목자”라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다윗은 어떠한 목자였기에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사무엘 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이 사울 왕 앞에 나가서 자기가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자청하며, 자기가 어떠한 목동이였는가를 진술한다(17:34-37). 다윗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비록 아비의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 했지만 그가 맡은 양 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아비의 양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정신과 책임감과 열정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골리앗을 타도하도록 일어나게 하였으며, 결국 그는 목숨을 걸고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양떼들을 보호하고 지켰다. 아버지의 양떼를 맹수들로부터 지킨 사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을 골리앗으로부터 지켰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 놉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자 그는 아둘람 굴로 피난 갔는데, 이때에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다니며 떠돌이가 된 400명 가량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계속 생사를 같이한 동역자드로 삼았다(삼상 22:1-2). 세상에서 발붙이기 어려운 인생들을 받아주고 안아주고 생사의 고락을 함께 나누는 목자였다. 올데 갈 데가 없는 인생들을 받아 주고, 품에 안아, 상처를 싸매고 위로하며,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생명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였으며, 세상에서 쫓겨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도망 다니는 인생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어 이들을 살리는 일을 했다. 참으로 위대한 목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내 양떼 곧 초장의 양떼이다. 너희는 사람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겔 34:31).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목자가 되시고, 또한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주셔서 그의 백성을 모으고, 먹이고, 돌보고, 지키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근동세계의 목자에 대한 문화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 9장에 이어 10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10장 서두에 아주 직설적으로 자기가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비교하신다. 삯군 목자는 절도요 강도요 도둑들이라서 양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파괴할 뿐 아니라 포식자들이 나타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도망간다는 것이다. 양떼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둘째 치고, 책임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양들은 다만 자기들이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다. 삯군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살 길을 찾는 자들이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를 희생하여 양떼들을 살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다윗이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사자와 곰들과 싸우고, 골리앗과도 싸운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하나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 놓는다. 나는 목숨을 내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18). 이 세상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이고, 자기의 목숨을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자신이 가졌음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신과 같은 신적인 목자,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인간 목자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바로 예수께서 그 약속의 하나님-목자임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목자이시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하나님, 곧 선한 목자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는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자 하나님-다윗과 같은 목자가 바로 자신임을 목숨을 걸고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증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다윗과 같은 목자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
예수께서는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그가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고, 출교 당한 그를 찾아가 그를 그의 제자로 받아 주심으로 그가 바리새인들과 다른 선한 목자이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고 한 목자 밑에서 한 떼가 될 것이다.”(1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받아 선한 목자 예수님의 우리 안에 함께 들어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에게 그의 양을 치도록 목자로 세우신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라는 부탁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만큼 간절하게 부탁하신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목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양들,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며, ....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벧전 5:2-4)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목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목자장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목자가 되라고 명하셨고, 이제 베드로는 그의 양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제 목자가 되어야할 차례이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신 명령이 그의 양을 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우리가 순종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있는 양이라면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