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1903년부터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자녀 교육에 정성 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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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의 도시 하와이는 우리에게 역사를 되돌아 보게하는 장소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시작된 한국인의 이민은 오랜 세월 속에서 동화와 정체성의 유지라는 갈등 속에서 지나왔다.
하와이의 한국인 이민이 미국 신대륙을 처음으로 찾은 필그림들의 자취에 못지 않는다. 기도하면서 찾아온 하와이 이민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역사의 현장을 탐색한다.

알로하 스테이트
북태평양의 동쪽에 있는 하와이 제도(별칭 샌드위치 제도)로 구성된 군도는 137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지만 큰 섬은 8개 정도이다.
하와이 여행에서 처음 배우는 인사는 ‘알로하’인데 하와이는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으로 인해 ‘알로하 스테이트’(Aloa State)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와이에는 이른바 ‘알로하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내려온 전통이다. 하와이 사람들은 외지인들에게 항상 관대해야 하며,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어야 하며, 하와이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하와이(Hawaii)라는 단어는 하와이어로 ‘작은 고향’이라는 뜻이지만, 폴리네시아어로는 ‘신이 있는 장소’라는 뜻이다. 약 2천8백년 전 화산 폭발로 생겨난 화산섬으로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산 덩어리이다.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州)로서 한국에서 방영되는 미국 수사드라마 ‘하와이 파이브-오’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하와이는 미국의 일부이므로 영어가 공식 용어이지만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원주민어를 비롯하여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스페인어를 들을 수있다.
하와이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하와이어이다. 음률감이 강한 하와이어는 말레이 폴리네시아 어족(語族) 폴리네시아 어파(語派)에 속한다.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나며,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하와이어는 13개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전문가가 아니면 ‘알로하(안녕하세요)’ ‘마할로 누이로아(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도의 인사말만 한다.
‘알로하 스테이트’에서 ‘알로하 정신’을 삶의 철학으로 여기는 이들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하와이의 한국인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들을 이기고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하와이 제도에도 약 2만5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유학생이나 주재원들을 합하면 그수가 4만명 정도로 본다.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주는 우리나라의 국가 정세와 연결된다. 19세기 말 조선의 정세가 약화되자 많은 사람들이 뿌리를 잃고 그들의 고향을 떠나야 했다.
1778년 영국인 선장 쿡(Cook)에 의해 처음으로 유럽과 접촉한 이후 하와이는 미국인 선교사, 고래 사냥꾼, 커피 재배자,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었다. 1835년경 사탕수수가 커피를 대체하여 하와이 섬의 주된 농작물이 되었다.
처음 하와이의 백인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계약 고용제로 하와이 원주민들을 고용하였으나 설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다른 나라에서 노동자를 수입하였다. 그 결과 33개 국에서 온 약 40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충원되었고,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한국인 7천명도 이민대열에 들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계획에는 한국의 최초의 미국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G. Allen)이 개입하였고, 인천 감리교회의 존스(George Jones) 목사의 설득으로 인천 내리감리교회 신도 중 50명과 인천항 부두 노동자 등이 이민신청을 하였다.
하와이로 가는 배 안에서 내리감리교회의 홍승하 전도사가 선교사로 동행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배 안에서 이민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로인해 하와이의 한국인들은 기독교와 관계를 뗄 수 없을 정도였고, 지금까지 교회는 이들의 신앙의 바탕이요 삶의 근거지가 되었다. 오늘도 하와이 구석구석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하와이의 사진 신부들
1903년 1월 13일 처음으로 한국 이민선이 호놀루루 항구에 도착했다. 101명이 일본 고베항을 출발하였으나 호놀루루에서의 신체검사에서 15명이 탈락하여 최종적으로 86명이 상륙허가를 받았다.
이들 대부분의 한인 노동자들은 남자들로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 원하였으나 한인여성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당시 동양인과 미국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시행 중이라 현지인과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결혼하러 다녀오는 것은 거리나 경비면에서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사진결혼’이다.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을 교환하고 이 사진을 들고 아가씨가 남편감을 만나러 하와이로 건너왔다. 이런 식으로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왔다.
최초의 ‘사진 신부’는 ‘사라 최’라는 여성으로서 1910년 11월 28일9혹은 12월 2일) 호놀루루에 도착했다. 그녀의 남편은 하와이 국민총회장을 지낸 이래수 씨였고, 2호는 신랑 백만국(당시 39세) 씨와 의주 처녀 유명선(당시 23세) 부부였다.
기록에 이하면 1910년부터 1924년까지 하와이에 951명, 미국 본토에 115명의 ‘사진 신부’가 입국했다. 그러다보니 늙은 신랑과 어린신부가 만나고 평균 나이차가 15세 정도였다.
이들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 살아갔고 그들의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위해 자식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또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쌈짓돈을 모아 해방되기까지 3백만 달러를 송금하였다. 슬픈 새댁들의 한이 조국과 자녀 교육의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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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의 현지탐방 / 호놀루루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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