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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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기독교 복음은 전도자의 설교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의 설교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에 맞추어져 있었다. 사도들은 이를 증거하기 위해 예수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곧 인류 구원을 위해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 독생자요,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선재(先在)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인류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설교였다.
여기에는 어떤 개인의 경험이나 철학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모두 에덴에서 타락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밝히 알게 하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와 인도가 강조되고, 거기에 부름을 받은 공동체의 경험이 강조될 뿐, 개인이 잘 먹고 잘 살고자 현세적 욕망을 채우려는 기복(祈福)이 개재될 공간은 없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유대교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로마사회에서 ‘비합법적 종교’로 박해받던 기독교가 313년 로마사회의 하나의 ‘합법적 종교’로서 자격을 얻고, 나아가 황제의 종교가 되고, 또 로마의 국교(492년)가 됨으로써, 로마사회 내에 있는 온갖 민족의 종교적 문화적 관습들이 기독교로 습합되기 시작했다. 이제 로마사회에서 어떤 민족적 문화적 전통이든 기독교를 외면하고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민족의 문화적 관습 기독교에 습합돼
이때부터 다양한 민족의 문화적 관습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개인의 종교적 신비적 체험이 강조되고, 성경해석과 신학은 그리스 플라톤 철학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설교도 변질하기 시작했다. 온갖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은유가 성경을 해석하는데 이용되었다. 수많은 위경과 외경이 등장하게 된 이유가 이런데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설교의 통일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4세기 이후 수 차례에 걸쳐 공의회를 열고 교리를 통일했다. 그것을 우리는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부른다. 기독교는 325년 니케아회의부터 787년 니케아회의까지 교회사에서 니케아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에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등을 통일했다. 이 통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단이 되었다. 교회의 모든 행사는 이 통일된 의전(儀典)에 따랐다.
설교에서 통일성이 강조되자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전에 따른 교회의 가르침은 획일화 되고, 이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모두 이단(異端)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거나 교회의 허락을 받지 않은 평신도는 성경을 읽거나 전도하는 것까지 금지되었다. 복음을 잘못 증거하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이단설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기독교는 교권주의가 교리를 대신하고, 신비적 이교문화가 복음의 자리를 대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교화(宗敎化)가 된 것이다. 교회는 교권주의를 떠받치는 성직주의가 강화되고, 설교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주의와 내세주의로 변해갔다.

중세 종교개혁은 다양성 회복운동
중세의 종교개혁은 이 왜곡되고 변질된 통일성만으로는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양성을 역설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설교를 통해 나타났다. 종교개혁 이후 설교는 획일화를 벗어나 다양화 되었다. 개혁주의자들은 처음에 그들의 주장대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강조되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여기에도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교에 개인의 경험이나 신비주의적 철학이 개재되어 제 멋대로 성경이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기독교를 부정하는 또 다른 이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교회에서 이단운동이 두더리지게 나타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단과의 논쟁의 역사이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교회력을 따르지 않는 교파가 많다. 그 가운데 장로교가 대표적이다. 그 주간에 설교자가 어떤 성경을 본문으로 읽고, 어떤 주제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교단 차원의 지침이 없다. 설교자가 그때그때 자신의 감흥이나 영감에 따라 본문을 정하고, 설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 과연 그것이 설교인지, 만담인지, 단순한 종교적 강화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고, 심지어 무당의 점괘인지, 철학관의 예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온갖 세속적 잡소리가 섞여 나온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설교가‘삶의 복음’을 빙자해 소시민의 종교적 심성에 야합하려는 심각한 기복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기복주의는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바로 서려면 설교에서 기복주의를 몰아내야 한다.

기복주의 설교가 교인들의 신앙을 우민화 하고, 신앙과 삶을 유린시킨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강단은 무속적 기복주의에 점령당한 상태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 에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한갓 축복의 신으로 전락시키고 그 이름을 팔아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 한다. 그리하여 교인들 가운데는 ‘점복’이든 ‘기도’이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행복하게 된다는 이기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이 나타난다. 한국교회 주변에 예언기도제단이 크게 번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교회가 이같은 반성경적 비복음적 기복신앙을 과감히 떨쳐버리지 못하면 21세기 민족구원의 주체가 되기는 난망하다. 기복주의자들의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원은 불교에도 민족종교에도 있고, 심지어 무속에도 있다. 굳이 교회에서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면 설교가 분명해야 한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 14:8).  
<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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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2 기복주의에 잠식당한 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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