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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주국제학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근거있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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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향하는 중국 정주국제학교(대표 이후진, 교장 이수아)가 올해도 최고의 입시 명문임을 증명했다. 정주국제학교는 올해 졸업생 전원 중국 명문대 합격이라는 쾌거를 거뒀음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 정주국제학교는 지난 7월 6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온사랑교회 비전센터에서 가을학기 입학설명회를 열고, 중국에 대한 미래 비전과 정주국제학교의 성공 가능성을 어필했다.
올해 졸업생들이 입학한 대학은 북경대, 칭화대, 인민대, 복단대, 상교대, 복사대, 절강대 등으로 중국 뿐 아니라 아시아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곳이다.
중국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객관적인 대학 순위를 비교할 때, 사실 중국의 수준은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 더욱이 전 세계 중 유일하게 미국과 견줄 수 있는 나라로 독보적인 G2로 분류되고 있다.
정주국제학교 역시 매년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관심과 인식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지금은 중국을 빼놓고는 세계를 논할 수 없는 시대, 학부모와 학생들은 일찍부터 중국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생각에 정주국제학교의 입학설명회를 찾았다.
이수아 교장은 “오늘 이 자리는 단순히 학교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을 넘어 우리 학생들이 앞으로 걸어가게 될 소중한 배움의 여정의 첫걸음을 함께 시작하는 뜻깊은 자리”라며, “저희 학교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을 존중하고, 지적 성장뿐 아니라 인성, 영성, 국제적 감각까지 균형 있게 키워가는 교육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 중국에 대한 편견을 미처 벗지 못한 이들을 위해 정주국제학교의 재학생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나서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정주국제학교가 정말 좋은 학교임을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증언했다. 실제 정주국제학교를 아예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까 한 명이라도 아이들을 보낸 학부모라면, 대부분 둘째 셋째까지 보내게 된다. 본인의 자녀가 한 명이라면, 주변 친척과 이웃에게까지 적극 홍보한다. 그만큼 정주국제학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박호인 학부모 회장도 두 명의 자녀를 정주국제학교에 보냈고, 현재 모두 복단대에 재학 중이다. 박 회장은 "정주국제학교는 학부모가 함께하는 학교다. 정주국제학교의 모든 재학생과 졸업생은 우리 모두의 자녀이자 가족이다"며 "아이들을 위해 우리 학부모들이 해 줄 수 있는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고 약속했다.
역시 자녀 모두가 정주국제학교를 졸업한 서병우 장학회 회장은 정주국제학교가 단순히 입시만 잘하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성과 영성 형성에 매우 적극적임을 어필했다. 서 회장은 "정주를 만난 아이들은 다르다. 부모님들은 정주를 통해 완전히 달라진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이며, 남을 배려하며, 믿음이 깊은 아이들이 바로 정주의 아이들이다"며 "우리 아이들이 여호수아, 모세와 같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해달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정주국제학교 제7회 졸업생 오승엽 동문과 14회 졸업생 김두진 동문은 △중국어를 아예 한마디를 몰라도 학습에 전혀 지장이 없는 커리큘럼 △학생들에게 따뜻하고 관심 갖는 공동체 △각종 장학금, 교내 프로그램 △한국에서는 알 수 없는 색다른 경험 △도전이 된 중국 유학, 소중한 학창시절, 학문만 추구하지 않은 점 △인격적 만남을 통한 더불어 사는 법 등 실제 학교를 다니며 느꼈던 점과 필요했던 것들에 대해서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조언했다.
이후진 이사장은 학부모들을 향해 믿고 보내 달라는 자신있는 호소를 했다. 비교가 불가능한 최고의 캠퍼스, 최고의 교육, 최고의 환경에서 아이들을 최고로 키워내겠다는 근거있는 자신감이다.
정주국제학교가 속한 중국 정주중학은 1997년 개교해 27년 된 공립학교로써 교육과 문화, 역사의 도시인 중국 하남성 정주시 최고의 학교로 인정받고 있다. 2019년 6월에 완공한 신 캠퍼스는 현대식 유럽풍 학교 건물 모습으로 눈에 띄며, 이곳에서 학생들이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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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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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두려운 영광, 설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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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오후에 황순원문학관 소나기마을에서 ‘영혼을 담은 시 쓰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백일장대회에 가는 것만큼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시를 쓰는 것은 시상을 갖고 순간순간 시가 찾아올 때 쓸 수 있지만 시 창작 강의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저명한 시인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지만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한 분은 못 봤습니다. 그냥 자기 시 몇 편을 소개하고 삶의 이야기로 마감하는 걸 봤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할 수가 있죠. 저에게도 많은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회에 ‘시는 무엇이고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 정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적지 않는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의안을 준비해도 왠지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도들이나 일반인 앞에서 강의를 한다면 그렇게 두렵고 떨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고 스트레스였습니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큰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꼭 두려움과 불안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영광스럽고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였습니다. 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국문과나 문창과를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소나기마을 촌장이신 김종회 교수님께서 어느 정도는 저의 필력과 구술력을 인정하셨기에 저를 강사로 부르셨지 않나 싶어 더 가슴이 뛰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엿장수, 사탕장수의 이야기로 시작하였고 상여의 만가 소리를 시연하며 시 강의를 접근 했습니다. 결코 녹록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앉아서 할 수도 없고 일어서면 강의안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원고가 보이고 안 보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원고를 이미 그림 언어로 거반 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무슨 꽃으로 내 가슴을 문질렀는지 땀이 눈속으로 들어 갈 정도였습니다. 종교적 언어, 신앙의 언어를 쓰지 않아도 시는 에덴을 향한 원형 혹은 근원을 향한 향수적 갈망이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이미지 언어로 쓰는 것이 시라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어느 누구도 저항을 하거나 반발을 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설교를 하는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억양이나 설교의 이미지가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마저도 강의 흐름 상 모두 수용하고 용납하는 듯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김종회 교수님께서 “이곳이 대학 강의실이라고 한다면 교수로서도 99점을 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나도 그 설렘이 싹둑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련과 아쉬움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준비한 내용을 절반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1시간 40여 분 동안 강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많은 시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준비한 내용을 절반도 못했습니다. 아쉬움은 미련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두려움과 설레임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하기만 합니다. 좀 더 잘할 수도 있었다 싶었는데 저희 장모님이자 기도의 어머니이신 정금성 권사님이 오셔서 부담감이 더 커져 갔습니다. “아니 지금 젊은 연세도 아니신데 왜 여기까지 오시는가...”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계기를 통해 저의 시가 한 단계 더 발전하고 다 하지 못했던 저의 시론이 활자화 되기를 바래 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김종희 교수님, 참석해 주신 주민들, 그리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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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