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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에 대한 무감각증
    Water B. Knght의 죄에 대한 무감각증의 이야기이다. 런던에 살고 있는 네 살짜리 어린 소녀가 넘어지면서 그만 손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소녀는 엄마에게 손목을 보이면서 말했다. ‘보세요. 엄마 내 손목이 참 이상하게 구부러졌어요’ 그러나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통증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소녀의 부모는 자신들의 딸이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병원에서는 넓적다리에 금이 갔다고 했다. 이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녀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어느덧 소녀는 열네 살이 되었다. 이제는 놀다가 손목이 부러지거나 다리에 금이 갈 만큼 부주의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따금 손등에 물집이나 화상 자국이 생길 때가 있었다. 그녀는 그런 상처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는 고통에 완전히 무감각했던 것이다. 내과 전문의들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소녀의 병을 고쳐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여기에 더욱 치명적이고 위험한 질병이 있다. 오늘날 갱글리뉴로파디(ganglineuropathy)라고 부르는 치명적이고 무서운 병이다. 바로 ‘죄에 대한 무감각증’이다. 인본주의와 세속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는 죄에 대한 불감증이 만연해 있다. 눈 앞의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의 유혹을 받고 처음에 죄를 지을 때는 두근거리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 마음도 습관적으로 죄악을 행하면 마음이 무뎌져서 양심에 화인 맞는 상태가 된다.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망각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며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헌데 우리는 그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며 없는 것처럼 생각 한다. 과학 만능의 낙관론과 인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있어서 꼭 유물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물질적이고 체험적인 사실만을 고집하는 풍토가 만연되어 있음을 본다.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인식 역시 그러한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밀한 곳이나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서는 이중적인 불신앙의 모습이 드러나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심판 하신다. 헌데 우리는 지금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 나에게 없는 것처럼 죄악과 방탕함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심판은 남이 아닌 나의 일이다. 고로 항상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한다. 그리고 죄악은 처음부터 방심하지 말고 단호하게 자르고 끊어야 한다. 죄악은 조금만 틈만 보여도 이내 급속히 퍼져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죄악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죄의 결과를 보자. 역사를 보면 위대한 영웅에 의해 세워진 대제국이 순식간에 몰락하는 경우나 수많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멸망하는 모습은 죄악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잘 알려 준다. 진시왕의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은 그가 죽은 뒤 불과 20년이 못되어 그가 화려하게 꾸며놓은 수도 함양과 함께 불속으로 사라졌다.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최대의 제국 역시 그의 죽음과 함께 사분오열 되어 그가 남겨 놓은 어린 자식과 함께 단명하고 말았다. 영원할 것 같은 로마 제국도 구멍 난 자루에서 모래가 세듯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징기스칸도,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그 당당한 위세와는 달리 짧게 반짝거리다 사라져 버렸다. 미국의 한 인물을 보자. 뉴욕의 대표적 마피아 조직인 존 고티라는 자가 일리노이 연방교도소에서 수년전에 인후암으로 죽었다. 그는 16세에 마피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특유의 카리스마로 두각을 나타내다 마침내 자신의 두목 카텔라노를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알카포네 이후 가장 막강한 세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연방법원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에게 허락된 것은 흑백 TV와 고장 난 라디오와 15분으로 제한된 면회가 문화생활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에 있을 때 무시무시한 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며 잠시 쾌락과 영화를 누렸던 그였지만 결국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처럼 어두운 감옥에서 초라한 생활을 하다 마침내 암이 주는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오늘 필자가 이러한 악한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이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 인간들은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탐욕을 좇음으로써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마치 위의 고티와 같은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우리에게 잠시의 쾌락을 위해 탐욕의 유혹을 받으면 결국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공통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 칼럼
    • 목회자
    2015-04-09
  • 자족하는 마음
    고대에 디오게네스(Doges.B.C.323)라고 불리는 스토아학파의 위대한 성자가 있었다. 그는 평생토록 짧은 바지 하나만을 걸친 채 집도 없이 산기슭에 있는 나무통에서 잤다. 한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몇 가지 소문을 듣고 이상하다 싶어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는지 보려고 그를 찾아갔다. 성자의 형편을 본 왕이 안 되었다는 듯이 ‘당신처럼 훌륭한 성자가 이토록 누추한 곳에서 지내서야 되겠소. 당신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내게 말해보오.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은 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 해드리겠소’ 라고 말하자 성자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저 있다면 지금 내 앞에 오는 햇빛을 왕께서 가리고 계시니 다만 비켜 서 주시오’ 라고 대답했다. 놀랜 대왕은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라며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왕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디오게네스와 같은 자족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사실 복잡하고 짜증나는 일이 많은 이 시대에 거창한 것이나 새로운 것만을 추구함으로써 작고 낡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무감각해지다시피 한 현대인들에게 자족하는 마음은 참으로 필요하다. 자족이란 환경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기 충족감을 의미 한다. 그런 사람은 높은 데 있다고 교만하거나 낮은데 있다고 비굴해지지 않는다. 웬만한 풍파에도 끄떡 하지 않는 내적인 만족감으로 인해 어떤 유혹이나 시련도 거뜬히 극복한다. 이러한 성숙의 개념은 어린이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어린이는 인내할 줄 모른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참지 못하며 또 단편적인 사실만 본 채 더 깊은 뜻을 모르고 부모에게 조르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치아의 건강을 위해 아이스크림이나 사탕 같이 단 것을 자녀에게 많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도무지 참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지 않는 부모의 심정을 모르고 무작정 조른다.마찬가지로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께서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셨는지 원망하는 일이 많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지 못하므로 감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개는 자기가 처한 형편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른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도 ‘조금 더, ‘조금 더’ 를 원한다. 또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처지가 못한다고 생각되면 원망하고 불평하기 일쑤이다. 고로 그런 상황에서는 감사가 나올 수 없다. 만약 우리 중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린이와 같은 것을 자초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되 현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자족할 줄 안다.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성숙한 사람이다. 감사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만일(if)’로 이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감사 하겠습니다‘ 하는 조건부 감사이다. 다음은 ‘때문에(becaus of)’이다. 돌이켜 보니 좋았던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반대로 좋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원망이나 애통이 따르는 그런 감사이다. 마지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이다. 이는 환경과 상관없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는 감사이기에 참 감사라 할 수 있다. 헌데 우리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고백하다가도 막상 애간장을 태울 만한 환경이 닥치면 곧 만족감과 감사를 잃어버린다. 오린 엘 크레인의 ‘주여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라는 기도문에 나온 내용이다. ‘마음의 평화를 주시사 물결처럼 요동하는 나의 가슴을 잔잔하게 하소서... 매일 매일의 복잡한 생활 속에서도 높은 산을 바라보며 침묵을 배우게 하소서’ 그렇다. 자족 신앙은 주어진 환경에서 배움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어느 공장의 한 노동자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비상한 기술 때문에 승진이 빨랐다. 마침내 그는 공장의 책임자가 되었다. 허나 이로 인해 전보다 더 의기양양하고 거만해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종업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종업원이 그에게 충고했다. ‘당신은 참 영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뛰어난 재주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잊고 있는 사실들이 있어요. 뛰어난 능력이 당신을 정상에 오르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정상을 유지하는 데 합당한 인격이 부족 합니다. 당신의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인정할 만큼 당신은 더 성숙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기술이 자신의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타인을 업신여기기 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력을 허락지 않으셨다면 그는 탁월한 기술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대부분 감사를 표시하는 데 인색하기 쉽다.
    • 칼럼
    • 목회자
    2015-04-02
  • 금은보화 속의 죽음
    마카페이의 독본에 있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집 지하실에 아무도 모르는 커다란 방을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 많은 금은보화를 감쳐두고 매일 밤마다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즐거워했다. 그는 보물들을 만지며 ‘오! 사랑스러운 나의 금은보화여 세상에 너희들 외에 무엇이 내게 기쁨을 주겠느냐’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비밀 지하실에 들어가 있는데 문이 닫혀 버렸다. 그 문은 닫혀지면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었고 안에서는 열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집이 헐렸을 때 한 인부가 지하실에서 많은 금은보화와 함께 한 해골을 발견했다고 한다. 재물을 그렇게 의지 했건만 도리어 그것으로 자신이 죽게 된 어리석은 부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실로 사람은 먹고, 입고 거주할 곳이 있어야 생활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재물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재물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재물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해로운 것인가 하는 차이는 무엇일까? 재물을 잘 사용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사람은 재물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먼저 헛된 재물을 의지하지 말자.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은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고, 재물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재물은 자신의 영원한 소유가 아니고 금방 없어지는 것이다. 즉 절도나 강도나 사기로 빼앗기가 쉬어 많이 쌓아 두었다 해도 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 또 재물을 모으면 모을수록 그 탐욕이 더하여져서 결국 아무리 재물을 모으더라도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좀 더 모으기 위하여 또한 모은 자라 하더라도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그리고 좀 더 모으기 위하여 또한 얻은 재물을 잃을까 근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심각하게 대두되는 인간 경시 풍조를 조장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 사상이다. 잘 사는 기준이 영적인 부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풍족하게 물질을 소유하고 사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하지만 재물은 자신을 재앙에서 지켜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기에 재물은 절대로 어느 한 사람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 주인이 바뀌면 당장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오늘 밤 당장 하나님께서 영혼을 찾으시면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자기 재물의 많음을 자랑하거나 없는 자를 조소해서는 안된다. 현실은 어떠한가? 신문이나 방송을 보자. 많은 정치인이며 고위 공직자며 사업가들이 불의한 돈을 사랑하다가 평생 힘들게 쌓은 명예를 하루 아침에 잃었는가? 불의의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비단 명예만 잃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영원히 망하게 한다. 고로 우리는 불의의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또 불의의 삯을 위해 일하지도 말아야한다. 다음으로 재물에 대한 헛된 욕망을 버려야한다. 사람의 동기와 욕망은 하나가 아니라 중충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 욕망을 따라 사는 삶에는 만족함이 있을 수 없다. 어릴 때는 과자와 장난감을 좇다가 청소년기가 되면 애인을 찾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재물 권력 명예 등으로 대상이 바뀌며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찾아 헤메다 결국 빈손으로 무덤에 들어간다. 너무도 불행한 것은 사람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안간 힘을 써도 거기에는 참된 안식과 평안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안정된 삶에 대해서는 오직 이 땅의 재물만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흔히 먹고 살만해 지면 삶이 안정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경제적으로 풍요해 질 때 경제적으로 풍요해질수록 만족시켜 주어야 할 욕망도 따라 늘어나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난할 때는 다정한 부부가 재물이 쌓이면서 불화가 심해지는 것, 낮은 지위에 있을 때는 성실하던 사람이 출세하면서 점점 타락하여 패가망신까지 이르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물을 선용하자.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재물이 많고 적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재물을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고로 우리는 재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또한 적으면 적은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 재물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는데 만족해야한다.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03-18
  • 다시 한 번
    독일의 시성 괴테가 지은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다시 한 번’의 이야기이다. 파우스트는 청춘을 되돌려 받는다는 조건으로 일생을 바쳐 쌓아 올렸던 연구 성과와 진리의 상아탑을 악마에게 반납한다. 그 후 그는 24년간 온갖 영광과 향락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진정한 만족과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회의, 허무, 속절없는 기만뿐이었다. 뒤늦게 깨달은 파우스트는 신의 긍휼과 용서를 구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악마는 그리스의 미인 헬레나를 그의 가슴에 안겨 주면서 마음을 흔든다. 미인 헬레나의 미모는 파우스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다시 타락한 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시 눈앞의 행복과 편안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영원한 것 하나님의 은총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구하기보다는 지상의 행복과 자신의 욕구를 위해 살았다.
    • 칼럼
    • 목회자
    2015-02-28
  • 공의로운 지도자
    공의로운 지도자 고대 그리스의 힐루카 왕의 공의의 이야기이다. 당시 미성년자들의 음행이 성행했다. 나라에서는 사회질서의 회복을 위해 그들을 엄벌하기로 하고 음행 하다가 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빼어버린다고 공포했다. 헌데 불행하게도 젊은 왕자가 음행을 하다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다.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는다는 것도 그렇고,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은 법대로 집행할 것을 명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히는 것을 본 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왼쪽 눈을 뽑아버렸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공의로운 통치인가? 자신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위해 탈법은 물론 인권을 탄압하고 생명을 경시하기 일쑤인 탐욕에 물든 요즘 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그야말로 온몸으로 공의를 실천한 왕이 아닐 수 없다.공의로운 지도자가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할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 기준을 삼아야 한다. 국가의 지도자로 뽑힌 이들은 저마다 통치 원리가 있으며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판가름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인간이 만든 통치 체제나 사회 제도로 국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교만이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때문이다. 또 자신과 인척들의 부귀와 영화만을 추구하는 지도자가 끝내는 국민의 심판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는 경우도 본다. 그럼 지도자의 마음 중심에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할까? 우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다. 바로 자신의 모든 권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리임(삼상 8:6)을 명심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로 공의롭게 판결했던 솔로몬처럼(왕상 3:28) 그 어떤 작은 판결이나 선택을 해야 할 때 우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대리자로써 공의를 실현해야한다.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느냐 못 다스리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평안과 안정이 결정 되고 공의가 무너질 때 나라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에도 공의를 굳게 지키면 그 나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굳건히 설 수 있다. 고로 지도자들은 자신을 유혹하는 악한 생각과 행실을 끊어야한다. 그리고 온갖 불법과 부정한 행위들에 대해 엄한 처벌을 내려야한다. 이러한 지도자를 국민은 원할 것이며 그 권위를 존중할 것이다. 지도자는 그 어떤 권모술수나 강압적인 폭력으로 자리를 지키지 못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오직 공의만이 자신의 보좌를 굳게 할 수 있는 방법임을 명심해야한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또 어떤 모임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있다면 무엇보다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공의이다. 공의를 포기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진정 공의는 내가 속한 단체나 나라를 든든하게 세워 줄 것이다. 공의를 무시할 때 타협과 거짓과 제도까지 고치는 악을 행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사악한 위정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면서 그러한 위정자를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내게 허락하시고 부여하신 위임된 권한을 잘 이행해 하나님의 공의의 대변자로서 추호도 부끄럼 없는 정결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는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헌데 이 공주가 아끼는 노비 한 명이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하고서는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인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에게 벌을 주라고 주청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당초에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 오랜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한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칼럼
    • 목회자
    2015-02-16
  •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한 상인이 천막 속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 세워 둔 낙타가 너무 추워 견딜 수 없으니 머리만이라도 천막 속에 넣게 해 달라고 간청 했다. 주인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자리를 좀 내주었다. 낙타는 기분 좋게 머리를 집어넣고 있다가 또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앞발이 시려서 죽겠어요. 그래서 낙타는 앞다리와 어깨를 천막 속에 들여놓게 되었다. 주인님, 다리가 얼어버리면 짐을 싣고 걷지도 못하니 제발 들여놓게 해 주세요. 마음이 약한 주인은 도저히 낙타의 간청을 무시 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그 부탁 마져 들어 주었다. 결국 뒷다리와 몸 전체를 들여놓은 낙타는 뒷발질로 주인을 쫓아내고 천막을 완전히 차지해 버렸다. 처음의 ‘머리 정도야’하는 생각이 결과적으로는 낙타 몸 전체를 천막에 들여 놓게 했고 자신은 내쫓김을 당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작은 죄를 하찮게 여겨 허용하게 되면 나중엔 그 자신이 죄 속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처음의 ‘머리 정도야 이정도’라는 생각이 결과적으로 낙타 몸 전체를 천막에 들어놓게 했고 자신은 내쫓김을 당한 것이다.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우리 마음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결국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으로 끌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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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ecumenicalpress.co.kr/article_list.html?section_code=column&category_code=column_5
    • 칼럼
    • 목회자
    20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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