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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원의 왕 사자 이야기
    가끔 동물원에 가서 사자를 보면 뭉툭 솟아오른 바위나 야트막한 언덕 위에 드러누워 일광욕과 함께 밀린 잠을 보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태평하게 누워 있는 사자들을 자세히 보면 틈틈이 졸린듯한 눈으로 사방 주변을 잠깐씩 응시한다. 한 두 마리가 아니라 모두가 다 규칙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사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나중에 사냥할 먹잇감이 어디에 있는지 미리미리 틈틈이 살펴두기 위함이라고 동물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사자라고 하면 백발백중 쫓아가기만 하면 뭐든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하지만 아니다. 수천만 년 동안 도망치는 것으로 살아온 초식동물들은 예민한 경계심과 뛰어난 달리기 실력으로, 그것도 안되면 무리의 힘으로 생존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자들의 수명은 열 번 쫓으면 두 세 번 성공한다고 한다. 이처럼 사냥 성공률이 낮기 때문에 생존을 잘해야 30% 밖에 안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니 명색이 초원의 제왕임에도 살아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먹음직한 먹잇감이 눈앞에 있어도 그 먹잇감을 쫓을 만한 능력이 안되면 추격은 헛수고로 끝나고, 헛수고가 계속되면 남아 있던 힘마저 소진되어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보고도 쫓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자들은 초식동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7-8시간 동안 숲속에 숨어 미행 하거나 낮은 포복으로 더 가깝게 끈질기게 접근한다. 자신의 달리기 실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는 것이다. 만일 의욕만 앞세우면 주제넘게 나서기 쉽고 섣불리 덤비다가 낭패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실로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나를 아는 것과 나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과 무턱대고 달려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입구 돌기둥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철인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실천하므로 인구 35만 명이 사는 아테네의 현인이 되었고 자주 인용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아는가? 이렇게 질문하면 사람들은 대게 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나를 아는 것 같지만 나를 모를 때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수할 때가 많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해 필자는 목회를 은퇴한 후 과거를 회고해 보면 나를 모르고 아는 것처럼 주제 넘게 살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인지 그렇게도 소원했던 익은 열매가 적은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나쁜 일일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위, 명예, 권력, 재물을 다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필자처럼 자신을 모르고 주제넘게 사는 이들이 많고, 그 결과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왜, 나라가 소란한가? 왜 교회가 분쟁하고 빛을 잃고 날로 날로 세속화가 되고 있는가? 목회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법조인들이나, 경제인들이나, 그리고 각계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알지 못한 무지한 소치가 아닐까 싶다. 한 대기업에 입사해 CEO까지 오른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들 세상이 무섭다고 하고 나도 그렇게 알았는데 한 조직을 이끌고 가는 자리에 서고 보니 사실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게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또 어느 순간에는 너무 힘들어 ‘에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면서 슬며시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는데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그는 또 “임원 때까지는 나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 이었어요. 아침마다 눈을 뜨면 항상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에 서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양 창순 박사도 말했다.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한 자기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자기 인식이 부족하다면 일단 발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정상에 오르려 하는지, 혹은 내가 놓치고 미쳐보지 못한 풍경은 없는지, 꼭 함께했어야 함에도 뒤고 두고 온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야 정상에 올랐을 때 아쉬움 없이 마음껏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앞으로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8-06-21
  • 은퇴
    요즘 직장에서 은퇴한 이들을 만나 대화를 해 보면 은퇴 후 급격한 노화 현상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는 고백을 들을 때가 있다. 이유로는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인생 제1막은 내렸고 맡은바 소임은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의미를 두고 살 만한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아 무료해지기 시작하고 소극적으로 변하며 고독하고 소외감을 갖고 종종 자존심을 잃어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직장을 은퇴한 뒤 1년 안팎으로 사망하는데 그 이유가 직장 은퇴가 아닌 인생에서 은퇴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쓸모없고 지칠 대로 지쳤으며 자존심이 꺾기고 용기와 자신감을 잃고 활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가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은퇴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우리 은퇴자들은 이러한 감정이 시대에 뒤떨어져 비과학적인 발상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약 50년 전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적인 기능이 25세 때 절정에 달하며 그 뒤로는 쇠퇴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35세 정도에 정점에 이르면 70세가 되어도 학습 능력은 17세 못지않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951년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된 ‘국제 노인학 학술 대회’에서 아이오와 주 체로키 출신의 라파엘 긴스버(Raphael glnzberg) 박사는 인간이 약 70세 정도가 되면 늙고 쓸모없기 마련이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그 나이에 이르면 갑작스런 노화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조금 더 발전된 미래가 오면 70세를 중년으로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40대를 대신해서 50대가 인생의 중년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맞고 있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세월의 흐름에서 인생 제2막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한다.30년간 정기 순회 강연을 했던 한 유명한 전문 강사가 지쳤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강연 자체보다는 끊임없는 여행에서 오는 고단함과 온갖 성가신 일, 호텔 방에서 보내는 지루한 밤 때문 이었다. 친구들은 여행이 그를 늙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일을 그만 두기 직전에 있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좋아했다. 이미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잃지 않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이즈음 그는 은퇴를 바라보고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골프에 매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중독되다시피 했다. 그는 골프를 잘 치는 편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행기로 장거리 여행을 하던 중 갑자기 새로운 목표가 떠올랐다. 그 새로운 목표는 미국 각 주의 가장 유명한 골프장에서 최소한 한 번 이상 골프를 쳐보는 것 이었다. 그는 상상의 날개를 폈다. 가장 어렵기로 유명한 페불비치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기록한 뒤 사진을 찍고 있는 자신을 떠올려 보았다. 한적한 알레스카의 골프 코스에서 진짜 러프에 처박힌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서 웃음 짓기도 했다. 혼자 곰곰이 생각하던 것이 점차 진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다음 며칠 동안 그 생각을 자주 떠올리기에 되었다. 그는 시험 삼아 10일간의 강연 여행에 골프채를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강연 일정 사이사이에 골프예약을 해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이 되자 여행을 염려하기보다 오히려 고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겨나자 한 번 쯤 쳐보고 싶은 골프장이 있는 곳으로 강연 일정을 잡기 위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열정과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는 직업 수명을 연장하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명도 연장하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금도 73세의 전문 강사 겸 골프 선수인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있다. 그러기에 인생 2막을 사는 우리들은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한다. 목표가 있어야 많은 사람들이 일을 그만 두거나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하는 나이에 새로운 흥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고 또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 즉 2막에서 막은 반드시 다시 오르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80세가 넘어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으며 괴테는 80세가 넘어 파우스트를 썼다. 발명가 에디슨은 90세가 넘어서도 연구를 계속했으며 피카소는 75세 이후에 미술계를 지배했다. 라이트도 90세 이후에 여전히 창조적인 건축가로 지목받았으며 버나드쇼는 90세에도 희곡을 창조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전직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비참할 정도로 불운하고도 불안한 임기를 보냈으며 대통령 재선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물러나야 했다. 그 뒤 침통한 모습으로 고향 조지아 주 플레인스로 돌아갔다. 하지만 현재 그는 재기에 성공해 명성, 위신, 영향력 등에서 초당파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며 많은 역사학자가 그를 ‘최고의 전직 대통령’ 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 칼럼
    • 목회자
    2018-06-01
  • 기회
    중국 주나라의 어떤 사람이 젊어서 관원이 되기를 소원 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되자 상심한 그는 통곡을 했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통곡 하나요?’ 그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늘 관원이 되기를 소원을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 기회를 놓친 것이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그럼 젊었을 때는 왜 관리가 되지 못했나요?’ ‘나는 젊었을 때 사서오경을 공부했는데 그때 왕은 나이 든 사람을 좋아 했습니다. 그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했는데 그는 무관을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병법을 익히고 무술을 닦아 장수의 표준에 도달했는데 또 왕이 죽어버렸습니다. 새 왕은 젊은 문인을 좋아했고 그때 나는 이미 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관원으로 임명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을 노력했지만 관리가 되지 못했다. 누구의 잘못일까? 왕의 잘못일까? 아니다. 오로지 노인의 잘못이다. 그가 처음부터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실천했다면 관리의 꿈을 성취했을 것이다. 이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있어 사업에 실패하면 한탄하고 좌절감을 느끼고 슬픔에 잠긴다. 기회를 놓치면 오랬동안 한탄한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사과는 왜 나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을까?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는 왜 내가 사는 바다에서는 나지는 않는 것일까? 우리는 매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듯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놓친 기회를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한탄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기회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조지엘리오트(George Ellot)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탁유 속에서 황금의 순간들은 우리 곁을 재빨리 떠나가는 것이다. 천사가 우리를 찾아와도 우리는 그들이 돌아간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기회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적극적인 공격으로 기회의 문을 두드려야한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투가 끝난 뒤 병사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 했다. 한 참모가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도시를 공격할 계획입니까? 라고 물었다. 알렉산더로스는 이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기회?’ 기회는 기다린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라네.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지. 미국의 한 신발 회사가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직원 두 명을 아프리카로 보냈다. 두 사람은 아프리카 초원과 원시부족 밀림을 두 달 동안 조사한 뒤 귀국해 상황을 보고 했는데 한 사람은 이렇게 보고 했다. ‘아프리카는 전혀 시장성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예 신발을 신지 않아요’ 또 한 사람은 얼굴에 화색을 띠면서 보고 했다. ‘우리는 무궁무진한 시장을 발견 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전혀 신발을 신지 않아요. 우리는 이곳에서 어마어마한 신발을 팔 수 있습니다’ 실제 이 회사는 아프리카에서 많은 신발을 팔았다고 한다. 기회는 성공의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성공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쇄다. 기회는 우리와 성공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기회는 정말로 기이한 물건이다. 그는 도둑처럼 찾아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기에 세밀하고 엄격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발견 할 수 있다. 인생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지만 어떤 사람은 놓친다는 것뿐이다. 어떤 사람은 발견하지만 어떤 사람은 눈 앞 에 찾아와도 알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가 기회를 만들어 가지만 어떤 이들은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사실 기회는 만들 수 있다. 성실한 노력을 기울이면 좋은 기회가 날 것이다. 기회는 게으름뱅이를 좋아하지 않으며 늘 성실히 노력하고 부단히 개척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 기회를 잡는 방법은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고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기회가 온다. 어떤이는 ‘기회는 준비된 머리에만 호의를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잡아 성공에 오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여성이 회사에 입사 했다. 그녀는 보통의 외모에 보통의 사원 이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승진을 거듭하자 사원들은 그녀를 인사담당자가 판단을 잘못 했거나 사장과 인척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행정부서에 배치되었을 때 그곳에는 말을 잘하는 직원 대인관계가 뛰어난 직원 미모가 아름다운 훌륭한 직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분야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신중하게 일을 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숫자를 잘못 기입하면 조용히 수정을 했고 상사가 일을 시키면 지정된 시간에 해냈다. 윗사람이 칭찬 하면 공손한 자세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 했다. 물론 그녀처럼 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한 보장은 없다. 중요한 것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 칼럼
    • 목회자
    2018-05-18
  • 자살한 사람과 자살하지 않는 사람
    지난 1999년 베이징대학의 12층 건물에서 한 여자 대학원생이 투신자살을 했다. 그녀는 학업성적도 좋고 품행도 단정해 사람들은 그녀의 자살을 몹시 의아해했다.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저는 대학입시에서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지만 결국 대학에 입학했어요. 또 B형간염에 걸렸지만 고통을 이겨냈으며 집안이 가난해 학업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것도 이겨 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속박을 벗어날 용기만은 없었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녀의 고향은 가난한 농촌으로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봉건적인 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부모에 의해 옆집 남자 아이와 약혼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그녀는 오히려 대학에서 멋진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시골로 내려와 결혼을 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결국 그녀는 세속의 족쇄를 풀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여기서 필자는 그녀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논란을 벌이자는 것은 아니다. 한 여자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과 같은 이런 족쇄는 세상에 넘친다는 것이다. 지금도 지구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라고 판단해 40초 당 1명 꼴 즉 매년 100만 명이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불행히도 자살률 세계 1등 국가이다. OECD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인구 10만 명당 자살 숫자가 26.5명이며 연간 1만 3천명이 자살을 한다. 하루 평균 자살자가 37명 꼴이다. 한국의 자살은 10대~30대까지 1위, 40대와 50대는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70대 이상 남성의 자살률이 크게 높아졌다. 최근 자살률이 급격하게 증가한 원인을 세대별로 구분해 보면 청소년은 학업에서 받는 스트레스, 지나친 입시경쟁으로 인한 상대적인 열등감,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소외 문제(왕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적인 논리, 인격적 모멸감으로 인한 자존심 손상, 갈등 및 스트레스 해소 방법부재, 가족과의 갈등 등이 대부분이다. 군인들은 상급자로부터 모욕과 폭언, 동료 왕따, 부모간 관계악화, 애인의 변심 등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혼란을 군인의 신분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고 자살충동을 느낀다. 청년층은 극심한 취업난, 실직,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성공지상주의 때문에 자살을 생각한다. 중장년층은 고용불안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이 원인이다. 그렇다면 왜 자살을 하는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내 굴지 그룹의 한 회장은 그룹을 이어받았지만 자살하고 말았다. 돈은 많았지만 당시 수사 등으로 인해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1980, 1990년 당대의 최고 인기를 누렸던 한 유명 여배우가 자실한 이유 역시 인기는 최고였지만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과 인기와 명예는 충분히 갖고 있었지만 자살하는 순간 희망이 ‘0’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희망이 없으면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즉 우울증은 우울한 기분에 빠져 의욕을 상실한 채 무능감, 고립감, 허무감, 죄책감, 자살충동 등을 준다. 하지만 삶의 벼랑 끝까지 갔다가 생각을 바꾸고 다시 한 번 살아봐야겠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 한다. ‘죽으면 매우 편안해 질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골치 아픈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니까요’ 다리에서 투신 후 극적으로 생존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물에 닿는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고 한다. ‘아, 세상에서 인간이 바꾸지 못할 것이 없겠구나’ 자살을 시도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고 한다. 독일의 카네기로 불리는 에릭 레준은 1944년 뮌헨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두먼이나 회사를 그만두고 세번째로 TV안테나와 전기제품을 수출하는 전기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회사의 사장을 존경했고 자신의 우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사장은 세금계산서를 위조하면서 회사를 나락으로 끌고 갔다. 사장은 레준를 그의 파트너로 승진시켜 구조조정에 참여토록 했다. 그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계약서에 ‘만일 회사를 그만두면 향후 2년 동안 전기관련 업체에서 근무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동의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내가 살림살이를 갖고 도망 쳤으며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외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또 뮌헨고등법원이 소환장을 보냈는데 전 사장이 레준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한 것 이었다. 빚을 내 변호사를 고용했고 그 비용은 6자리수로 늘어났다. 레준은 삶이 절망으로 떨어져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종말의 다리‘ 라고 부르는 곳에 갔지만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친구 차를 빌려 외할머니가 생전에 자주 갔던 요양지 교회로 가 밤을 세웠다.
    • 칼럼
    • 목회자
    2018-05-11
  •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한 사람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폴스톨츠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역경의 지수’에서 역경에 대처하는 모습을 3가지로 표현했다.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그냥 등반을 포기하는 겁쟁이, 장애나 어려움을 만나면 적당히 안주하는 야영자, 역경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등반가. 폴스톨츠 박사는 역경을 만나면 혼신을 다해 맞서라고 주장했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한다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했다. 도전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경신 따위에 맞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싸움, 정면, 어려운, 맞섬 등 녹록치 않은 단어들이 쓰이는 것만 보아도 도전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 수월하고 싶다면 도전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곡선하나 없이 반듯한 직선으로 만 이루어진 ’도전‘ 이라는 글자에서도 타협 없는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인지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낸 인물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답답할 정도로 우직하다. 하지만 그 우직함이 꿈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성공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실례로 232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혼혈아였고 소위 말하는 결손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 2년 만에 어머니와 오바마를 하와이에 남겨 둔 채 하버드로 떠났고 결국 오바마가 2살 때 이혼 했다. 10세 때 아버지를 본 것이 마지막이다.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하면서 오바마는 4년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지만 어머니의 재혼도 파경을 맞았다. 오바마는 고등학교 시절, 흑인과 결손 가정이라는 숙명 때문에 방황 하면서 담배와 술은 물론 마리화나도 피우고 코카인에도 손을 댔다. 하지만 그는 크게 깨닫고 좌절과 절망을 극복, 하버드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높은 수입과 성공이 보장된 길을 포기하고 시카코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오바마는 급기야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혼혈, 결손가정 등의 숙명에 사로잡혀 실망과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면 오늘 날의 오바마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싫어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좌절과 절망은 분명히 고통스럽지만 그것들을 수용하고 신앙으로 지혜롭게 극복한다면 과거에 가질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 극복하지 못할 큰 역경 즉 어떤 좌절과 절망이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강하게 떨어질수록 더 높이 튀어 오른다고 한다. 고통이 크다는 것은 이룰 것도 크다는 메시지이다. 오마바가 그것을 보여 주었다. 오마바 대통령에게 큰 역경이 없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코 전문 이한용 평강한의원 원장이야기이다. 그는 한의 대 시험에서 무려 8번을 떨어지고 9번째 합격한 그야말로 8전9기를 몸소 보여줬다. 그는 말했다. ‘너무 가난 했습니다. 어떻게 말할 수가 없을 정도 였습니다. 매순간 고통의 연속 이었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 고통이 제 인생의 자산 이었습니다. 그것을 몰랐더라면 아마 제 인생은 반쪽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6.25참전 용사로 전쟁 중 큰 부상을 당했다. 오랜 투병 중 이 원장의 나이 3살 때 돌아가셨다. 큰누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했다. 당시 이 원장이 살던 동네는 피난민이 모여 사는 서산의 농장마을 이었다. 그가 중학교 때 농장마을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 원장도 서울로 전학을 했다. 어렵게 공부하던 중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받다가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원광대, 동국대, 경희대, 대전한의대 등 입시에 도전했지만 8번 낙방했다. 그는 재수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집도 나왔다. 그의 주머니에 있었던 돈은 3천원. 그 돈이 떨어지면 굶어야만 하는 상황 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무면허 의료행위를 시작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한의원과 지압원에서 습득했던 침술과 지압을 친구들의 어머니에게 시술하며 받은 돈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그리고 학원의 영어지도원 친구, 수학지도원 친구, 지도부장 사모님을 치료해 주고 전 과목 강의를 무료로 듣게 됐다. 그리고 9번째 당당히 동국대 한의대에 합격했다. 그때 나이 28세. 당시 ‘최다 재수’의 기록이었다. ‘초점을 맞추면 강철도 뚫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 원장은 반드시 한의대에 가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몰입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전했다. 8번의 실패에도 그의 무릎을 꿇릴 수 없었다. 한 번의 실패도 인내하기 힘든데 8번의 실패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도전한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목적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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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1
  • 공상가와 실천가
    테레사수녀가 인도 ‘뭄바이’에서 열리는 ‘기아 방지 회의’에 초청되었다. 그녀가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 한 굶주리는 남자가 거의 죽을듯한 몰골로 회의장 바깥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회의장에서 기아 방지에 관한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고 있을 때 테레사는 이 굶주린 거지를 노숙자 쉼터로 데리고 가 음식을 주고 휴식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었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수천만의 사람들을 모두 생각할 수는 없지만 내 눈앞의 한 굶주린 사람에게는 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 날 사람들에게 한번뿐인 인생을 ‘공상가’로 살지 말고 ‘실천가’로 살라는 간절한 충고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공상가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가이다. 공상가는 말, 상상, 가정만 하는 사람이고 실천가는 생각이 드는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공상가들은 왜 행동을 하지 못할까? 주로 세 가지 원인 때문이다. 첫째 주의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객을 방문할 때 마음속으로 ‘문전박대’를 당하면 어떻게 할까? 라고 고민하는데 이러한 생각을 빨리 버려야한다. 둘째 부정적 행동의 관성이다. 만약 신바람을 내며 ‘나는 성공 할 것이다! 나는 성공할 것이다!’ 말한다면 절로 흥이 날 것이고 결국 당신은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성공은 멀리멀리 도망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의 행동의 관성을 바꾸어야 한다. 셋째 바로 ‘언어적 관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매번 ‘나는 건강하다, 나는 건강 하다‘라고 말하다 어느 날 갑자기 ‘휴, 오늘은 배탈이 나 죽겠어‘ 라고 한다면 그 언어 관성 때문에 행동의 동력이 상실되는 것이다. 공상가에서 실천가로 살려면 어떻게 할까? 첫째 인생의 목표를 세워야한다. 예전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목표와 효과의 관계에 대한 조사 연구’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생에 대한 목표의식이 얼마나 확고한지의 여부가 실제로 그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알아보자는 것이 연구의 기본목적이었다. 25년간 추적조사를 벌인 결과 놀라운 사실이 입증되었다. 인생의 목표가 없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에 머물러 있었다. 목표가 다소 모호한 사람들은 블루컬러 계층이, 목표가 상대적으로 명확한 사람들은 화이트컬러 계층이 되어 있었다. 나아가 목표가 크고 원대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목표는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의지와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둘째 정신을 집중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에 어떤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싶고, 돈 벌고 싶고 , 인간관계가 좋기를 원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 재일교포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소프트뱅크라는 굴지의 기업을 이룬 손정의씨의 미담이다. 그는 1981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1천만 엔(1억여 원)으로 일본소프트뱅크를 설립해 소프트웨어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년 반이 넘도록 실적도, 사회적 명성도, 돈도 없었다. 더구나 그는 공공연하게 차별을 받는 재일교포였다. 그렇다고 그는 기가 죽지 않았다. 대출을 받으러 간 은행에서 ‘과거 3년간의 영업보고서’와 ‘대차대조표, 손익 계산서를 제출하라’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담보도 없습니다. 오지 열정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프라임 레이트(최고 우대 대출금리)로 빌려 주십시오’ 다른 업체에 거래 제안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과감한 제안에 반신반의하는 업체들이 그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어려운 조건을 내걸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해 보겠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 이었다. 그런데 사업이 막 궤도에 올랐을 무렵인 1983년 당시에 불치병인 만성간염 판정을 받았다. 하루 24시간을 뛰어다녀도 모자라는 상황에 갑자기 닥친 고난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 병세는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 앞에선 그에게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는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결국 그가 다다른 것은 삶의 의미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단 한번 뿐인 삶인데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뭔가 돌파구를 찾아나서야 할까? 설사 새봄을 맞이한다고 해도 이런 몸으로 닥쳐오는 고난을 어떻게 헤쳐 나간단 말인가? 그는 침대에 누워 울면서 모든 분야의 책 3천권을 읽으며 인생계획을 짰고 미래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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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30
  • 개썰매 경기에서 우승한 어린이 이야기
    추운 1월 어느 날 아침 위스콘신주 북부의 슈페리어호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 났던 일이다. 해마다 호수 얼음 위에서 열리는 개썰매 경기가 시작됐다. 1마일 거리의 코스는 작은 전나무들을 꽂아 마련됐다. 호수 옆에 있는 언덕은 높아서 그 위에 서면 코스 전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청소년들의 경기였다. 참가팀은 여러 마리의 개가 끄는 커다란 썰매를 탄 덩치 큰 청소년들부터 달랑 작은 개 한마리가 끄는 자그만한 썰매를 가진 여섯 살짜리 어린이까지 다양했다. 출발신호가 울리자마자 모두들 앞다투어 달려 나갔지만 그 꼬마는 눈에 띄게 뒤쳐졌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팀과 너무 멀리 떨어져 혼자 달리는 듯했다. 한편 나머지 팀들은 코스를 반쯤 지날 때까지 잘 달렸다. 그런데 2위로 달리던 팀이 선두를 추월하려고 다가가자 밀착된 양 팀의 개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각 팀들이 도착하면서 다른 팀의 개들도 싸움에 휘말렸다. 아무도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고 곧 경기는 난장판이 되었다. 개들은 서로 물어뜯고 짖어대며 나뒹굴었고 썰매와 선수들도 서로 뒤범벅이 되었다. 선수들은 그 난장판 가운데서 개들을 떼어 놓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소년들은 알래스카 특유의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대고 호각을 불며 있는 힘껏 말렸다. 그 광경은 말 그대로 선수들과 썰매와 개들의 소용돌이였다. 그때 작은 개가 끄는 썰매를 탄 어린이가 그들을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어린이는 가볍게 개를 몰아 그 난장판을 지나갔다. 아무도 못한 일을 한 어린이가 해낸 것이다. 기자가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어린이는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냥 계속해서 달렸어요. 또 개가 싸우지 않게 잘 달랬어요.’ 그렇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에 몇 시간 안에 결과가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조금 늦었다고 해도 문제될 게 없다. 승패는 경기 후반에 결정되므로 마라톤 선수처럼 열심히 뒤쫓아가면 된다. 체력을 비축해두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 처음부터 체념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인생을 사는 이유도 없어 질 것이다. ‘인생’이라는 경주에 참가한 이상 포기하는 것보다 힘들어도 앞을 보고 달리는 것이 훨씬 더 즐겁다. 그런데 삶의 절반에 도달하게 되면 ‘이제 나도 한 물 갔구나’ 하고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낙담한다. 하지만 인생의 절반에 이른 현실에 실망하기 보다는 이제부터가 승부를 띄울 시기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KBS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은 많은 시청자들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으로 알려져있다. 야생 동물들의 생태를 다른 이 프로그램에서는 동물들이 사냥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필자도 언젠가 육식동물에게 쫓기는 초식동물이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는 장면을 보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이처럼 연약한 초식 동물이 사자나 표범의 추격을 따돌리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발이 느린 초식동물은 없다. 하긴 발이 느리면 벌써 멸종되었을 것이다. ‘누’ 라는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떤 목표가 설정되면 주위의 사정을 보지 말고 계속 달려가는 것이다. 그것이 승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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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2
  • 한 청년의 왕위에 오른 이야기
    옛 아일랜드에 한 왕이 후계자가 없어 고민하던 중 전국에 방을 붙이도록 했다. 자질 있는 모든 젊은이는 왕이 될 수 있다는 것. 단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백성을 사랑하고 있으므로 도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워낙 가난해서 왕을 만나러 갈 옷이 없었다. 이에 일부는 빌리고 또 막일을 해서 적당한 옷을 장만했다. 옷이 갖춰지자 그는 길을 떠났다. 그런데 가는 도중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와 마주쳤다. 거지는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채 그에게 동정을 구했다. ‘제발 도와 주세요.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거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그는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주머니에 있는 몇 푼의 돈마저 모두 주었다. 그는 남루한 옷때문에 망설였지만 왕궁을 향했다. 궁궐에 도착하자 왕이 웅장한 거실에 않아 그를 맞았다. 그는 감히 왕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했다. 왕이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했네. 고개를 들고 나를 보게!’ 일순간 그는 너무 놀라 쓰러질 뻔했다. ‘당신은 며칠 전 그 거지...?’ ‘그렇게 놀랐는가?’ 왕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떻게...?’ 젊은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내가 거지로 변장한 것은 왕이 되겠다는 사람이 정말로 백성, 특히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네. 내가 지금처럼 왕의 모습으로 만났으면 자네가 백성을 진정 사랑하는지를 알 수 없겠지. 그래서 머리를 썼다네. 자네가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으니 내 후계자가 되어주게. 이제 이 왕궁의 주인은 자네일세’ 우리는 언제 어떠한 기회를 만나 성공할 지 모른다. 그러니 늘 진실된 마음을 표현하며 살아야한다. 예화속의 주인공 청년도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기에 나라를 이끄는 왕의 자리를 얻게 됐다. 불쌍한 사람, 딱한 사람을 만나면 무관심 하거나 바쁘다고 피하지 말고 선을 베풀어야 한다. 어떻게 선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양식이 필요하면 양식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사랑과 관심 어린 마음을 가지고 선을 실천해야한다. 마음에도 없는 물질을 베푼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값싼 동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라도 마음에 사랑의 향기를 품고 관심의 눈빛을 지니며 선을 행해야 한다. 선행과 구제는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예배)이기 때문이다(히 13:16). 주님께서는 소자에게 선을 베풀 것을 명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있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셨다. 그러기에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요일 3:18) 오직 선행과 구제로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사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빌 4:18). 이는 참으로 그분이 기뻐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비록 선행과 구제가 너무 빈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러한 것들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예배행위로서 받으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항상 선행의 제사를 드리도록 애써야한다. 이는 단순히 주일, 혹은 공적인 예배에만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일상의 모든 곳과 모든 때에 드려져야 할 제사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것을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야 한다. ‘나눠주다’란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다’는 말이다.따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 내에서 다른이들에게 좋은 것을 나눠줌으로써 마땅히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엡 2:10) 또 고명한자 즉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며 그 고귀한 일을 펼치며 살기 때문이다(사 32:8.) 뿐만 아니라 긍휼을 행지 않는다면 긍휼 없는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약 2:13). 이는 분명 행한 대로 갚으며 뿌린 대로 거두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갈 6:7)의 반영이다. 항상 이웃에 대해 무정하고 냉혹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경고임과 동시에 사랑과 긍휼을 풍성히 베푼 자에게는 기대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두려운 날이 될지,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될지는 오직 우리의 태도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항상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한다. 세상에서 무정하고 냉혹하게 행동했던 모든 자들이 두려워 떨며 심판대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의 칭찬과 함께 영광의 부활로 나아가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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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08
  • 억만장자 찰스 월리의 이야기
    그는 20세 청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 때 한 지방 신문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게 됐다. 그는 자신이 그 직업에 관심이 많음을 강조하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력서를 써 광고문에 게재된 사서함으로 보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다시 편지를 보냈지만 감감 무소식이었었다. 그는 그 지역의 우체국을 찾아가 사서함의 회사를 알려했으나 우체국 직원은 거절을 했다. 우체국장에게도 물어봤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는 생각 끝에 자명종 시계를 5시에 맞춘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들고 우체국으로 갔다. 그리고 사서함이 있는 곳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8시간, 해가 질 무렵이 되자 한 사람이 나타나서 사서함의 편지를 수거해 갔다. 청년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증권회사 지점이었다. 그는 지점장을 면담해 자신이 3번이나 이력서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점장은 그에 대한 답변보다는 어떻게 주소를 알았느냐 부터 물었다. ‘우체국 사서함 부근에서 종일 기다리다 귀사의 직원이 우편물을 수거하러 왔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자 그 지점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인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회사에 잘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이는 인내심으로 성공한 억만장자 찰스 월리의 이야기이다. 인생을 편히 즐기며 사는 사람들은 재난과 고통 그리고 실패를 참고 이겨낸 이들이다. 이들은 완고하지 않고 정서적으로도 쾌활한 편이다. 어느 정도의 역경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인 힘과 성숙한 인격을 얻을 수 있다. 어느 조사 결과를 보면 성공자들의 4분의 3이 바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 이었다. 젊은 시절 가난과 비극과 무능력과 좌절감에 빠졌지만 그 어려움을 참고 극복했던 것이다. 이 조사 대상자는 정상에 오른 금세기 4백 명의 남녀들 이었다.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토마스 에디슨, 엘레노 루스벨트 등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처럼 고난을 참고 극복하면 좋은 보상이 따를 것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48세 때 불행하게도 정부로부터 게르세이 섬으로 추방돼 근 2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그의 형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며 더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다. 즉 세계적인 명작 ‘레미제라블’을 저술했다. 위고는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자신에게 유익한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절망을 바꾸어 소망으로 만들었다. 만일 그에게 게르세이 섬의 귀양살이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 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위대한 문학 작품들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인생에 늘 평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나 고난이 닥칠 때가 있다. 하지만 인간적인 희망과 능력과 가능성의 모든 것이 소멸될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곧 우리의 잘못에 의한 것이든 그렇지 않는 것이든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들 속에서 낙심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내려는 의지를 가져야한다. 어렵고 힘든 상황아래서 힘이 없어 처져있는 우리의 손과 다리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내와 의지에 달려있다. 남이 아무리 격려하고 권면해도 정작 우리의 귀를 막고 몸부림 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는 이상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 신실하시고 우리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받아 대역전의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대역전의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가능성과 희망이 끊어져 버린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기에 그 안에서 희망과 힘을 가질 수 있다. 우리를 품고 계신 주님으로 인해 가능하다. 예컨대 사울과 다윗을 보자. 사울은 본래 블레셋과의 전투에 앞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무엘이 정한 시간에 오지 않고 지체하자 다급한 마음에 인내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반면 다윗은 실로 인내의 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이후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사무엘을 통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하지만 다윗은 그날 당장 왕이 된 것이 아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인내했다. 그 결과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되었다. 사울의 보좌가 이내 무너진 것과 달리 그의 보좌는 수백 년을 거쳐 이어졌고 그 보좌가 일시적으로 단절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영원히 이어지게 되었다. 참으로 다윗은 인내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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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8-02-23
  •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라
    당대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유종원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인을 데리고 영주 땅으로 갔다. 점심때 쯤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힘들고 배고파 앉아서 좀 쉬려고 했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음식을 얻어 오라고 했다. 하지만 하인은 마을에서 음식을 구하지 못했다. 그곳에 심한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 망설이고 있을 때 한 마리 비쩍 마른 개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하인은 개를 죽여 유종원 앞에 갖고 와 야생 개를 잡았다고 말했다. 유종원은 그 말을 사실로 믿고 한참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한 백발노인이 그들 앞에 와서 화를 내며 욕하기 시작했다. ‘이 강도 같은 놈들, 밝은 대낮에 내 개를 잡아먹다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이놈들!’ 유종원은 갑자기 마음속에 뭔가 북받쳐 올라왔고 그때서야 자기가 하인에게 속은 줄 알게 되었다. 바로 화를 내려다 다시 생각해보니 하인을 탓할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그 노인에게 ‘정말 미안 합니다. 우리가 야생개인 줄 알고 잘못 죽였으니 돈으로 배상 하겠습니다’ 하며 용서를 빌었다.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개가 죽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밥으로 먹을 수도 있는 것도 아닌데!’ 하며 탄식을 했다. 유종원은 사방으로 수소문해 개를 한 마리 사서 노인에게 전해주고 백배사죄한 뒤 그곳을 떠났다. 이처럼 일이 닥쳤을 때 용감하게 책임을 지는 사람은 ‘용사’이며 도피하거나 책임을 저버리는 사람은 ’겁쟁이다‘. 어떤 사람은 책임지는 행위는 체면을 깎아 먹는 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용감하게 책임을 다하면 존경을 받을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조조가 전쟁을 하러 나갈 때 밀을 수확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조조는 병사들에게 절대로 밀을 밟지 못하도록 명하였고 밟는 사람은 목을 자른다고 명했다. 하지만 어느 날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밀밭 옆의 작은 길로 가다가 조조의 말이 놀라 옆에 있는 밀밭으로 떨어져 많은 농작물을 망쳐 놓았다. 사람들은 이 일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지만 조조는 자신이 법을 어겼기 때문에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칼을 들어 자살하려고 할 때 사람들이 급히 막으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조조는 ‘나는 법을 위반했음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하지만 내가 만약 죽으면 황실을 보위할 수 없으니 먼저 내 머리카락을 베어 벌로 대신 하겠다’라고 말하면서 칼을 들어 머리카락을 베었다. 당시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전쟁에서 적에게 머리카락이 잘리는 것은 머리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치욕으로 생각했다. 병사들은 조조가 이렇게 책임지고 군기를 수호하는 것을 보고 더 신중하게 군율을 따르게 됐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조조가 정말로 자살하려고 했는지를 평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책임을 지려는 그 기개를 높이 평가해야한다. 반대로 명예나 이익 앞에서 다투고 책임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해야한다. 책임과 기회는 쌍둥이 형제와 같다. 책임을 저버리는 것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다는 아니지만 어떤 전직 대통령들, 정치인들, 교회 지도자들, 기업인들, 공직자 등을 보면 안타깝게도 작은 이익을 위해 책임을 포기 한다. 책임을 회피한 뒤 심지어 득의양양해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도 불행해지고 마는 것이다. 고로 절대로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결심만 하면 어떠한 일에서도(불법적인 일은 제외하고) 모두 책임을 질 수 있고 타인들 보다 더 출중하게 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하는 습관이 없다면 조건이 만들어져도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 그러기에 책임을 지고 의무를 다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상징이다. 책임에 관해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책임지려 하지 않지만 이익이 풍부한 일에는 남의 공을 가로채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책임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이 바로 우리 사회의 건강한 초석이 될 수 있다. 권력과 책임은 정비례 관계에 있다. 즉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클수록 부담해야 할 책임이 크다. 만약 용감하게 책임지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지도자나 권력을 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조직을 운영하려는 계획도 세우지 말아야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한 뒤에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부끄럽게도 끊임없는 변명을 하다. ‘나는 몸이 아파서, 나는 잘했는데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운이 없어서’ 등 핑계를 찾는 습관이 생기면 일할 때 성실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근무의 분위기를 망치게 된다.
    • 칼럼
    • 목회자
    201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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