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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기사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당신의 소원이 무너졌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
    작년에 제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개막 기도회인 ‘런천 프레이어’에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미국 상·하의원들과 세계 각국의 대사들 앞에서 메시지를 전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죠. 강단에 서기전에는 엄청나게 긴장을 했지만 그래도 제 영어를 알아듣고 박수를 쳐 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 이렇게 한 김에 다음 해에는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메인 기도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메인 기도회에는 상·하의원은 물론이고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 특별히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메시지를 전하면 한미관계와 남북평화에 대해서 상당히 공헌을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목사가 미국 교회 목사들뿐만 아니라 정재계 지도자,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가 참석한 자리에서 스피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를 대신해서 우리 교회 영어 목사인 브라이언 조 목사님이 많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측에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사인을 주었습니다.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메인 기도회에서 메시지를 증거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뛰었습니다. 강사를 선정하는 마지막 단계에서도 -물론 저 혼자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러나 최종 3배수까지 올라갔는데 아쉽게도 탈락되었습니다. 아직 한국 목사가 하기는 이르다는 이유였습니다. 은근하게 마음에 섭섭함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스텝 중의 한 명이 직접 한국에까지 와서 저에게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들이 건네는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이번에 국가조찬기도회 강사는 안 되었지만 목사님은 미국의 영적 지도를 바꾼 분입니다. 목사님은 브라이언 조를 통해서 백악관의 신앙데스크와 미국 국무부 담당자들에게 전략적인 설명과 설득을 함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모든 공립학교로 하여금 존 에프 케네디가 금지한 기도를 자유롭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대단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지난 60년 동안 공립학교에서 종교탄압을 받아왔던 기독교가 자유롭게 기도하고 해방이 되게 하겠다고 선포를 하였습니다. 저는 강사로 서지 못했지만 이러한 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선물은 저희 기도의 어머니 정금성 권사님의 건강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다 되리라고 생각했던 꿈과 소원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너무 실망스러울 수 있지요. 그러나 그 꿈은 무너져도 더 좋은 길이 열리고 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루지 못한 소원과 꿈이 계속해서 더 반짝이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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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2-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꽃씨가 기지개를 펴고 있네요···”
    올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던 것 같습니다. 폭설이 내리고 한강이 얼지는 않았지만 겨울이 지난하게 느껴졌습니다. 초갈등의 사회 때문이었을까요, 최근에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일까요. 그래서인지 모두가 봄을 더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우한 폐렴을 제일 먼저 발견했던 리원량 의사도 그토록 봄이 오기를 기다리다 떠났지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는데도 봄을 애타게 기다렸던 개구리들이 나와 추워서 죽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올해는 우리 모두가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맘때면 꽃씨가 기지개를 펼 때입니다. 아니 꽃씨는 한 겨울에도 꿈을 꾸지요. 눈보라가 치고 온 땅이 얼어붙어 있을 때에도 꽃씨는 파란 잎의 꿈을 꿉니다. 또 붉고 화사하고 향기로운 꽃의 꿈을 꾸고요. 그 사이로 나비 떼가 날아오는 꿈, “아, 꽃을 피우는 건 꿈꾸는 나비지”라는 독백도 할 것입니다. 그런 꽃씨를 땅에 뿌릴 때 꽃씨는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초갈등 사회입니다. 모두가 내편 네편으로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분위기입니다. 지난 주 지방에서 목회를 잘 하시는 목사님이 저를 긴히 만나자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소 목사가 보수 우파인줄 알았는데 요즘은 좌파 성향을 보인다는 루머가 있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만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에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염려할게 뭐가 있습니까? 목사에게는 좌우보다 중요한 게 중심이죠. 목사님이야 특정지역에서 목회를 하셔서 잘 모르겠지만 수도권에서 목회하는 사람은 좌우를 다 품어야 할 상황이 많습니다. 자칫하다가 목사마저 진영논리로 편가르기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 생명의 꽃씨를 뿌리고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꽃씨를 뿌려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요. 그러므로 진보적이고 좌편향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으며 그 마음에 사랑의 꽃씨를 뿌려주면 스스로 시대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저도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고, 그 목사님도 저에게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가셨습니다. 당연히 기독교는 나라를 지키고 세우는 종교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지나치게 이념만을 가르치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목사는 먼저 성도들에게 생명의 꽃밭을 일구어주고 초갈등 사회일수록 화해의 꽃씨를 뿌려줘야 합니다. 봄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다 보니 마치 꽃씨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겨우내 꾸었던 꿈을 이루고 싶어서죠. 저는 한결같이 꽃밭을 일구며 꽃씨를 뿌리는 사역을 해 왔습니다. 세종도서문학나눔에 선정된 제 에세이 책의 제목도 ‘꽃씨 심는 남자’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꽃밭이 어떻게 일구어져 있는가요. 사방이 비난과 공격, 증오와 분열, 에덴의 동쪽의 가시들로 가득한 때에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꽃씨, 꿈의 꽃씨, 화해의 꽃씨가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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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2-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당신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지난 주 월요일 성도 몇 사람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식사 중에 지난주일 설교 시간에 권사님의 간증을 하다가 갑자기 제가 강단에 나와서 춤을 추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웃기도 하였지만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제가 춤추는 중에 뒤로 돌았을 때 저의 등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왜 저의 앞모습 보다 뒷모습에서 눈물이 왈칵 터졌느냐고 물어보니까, 제가 새에덴교회 뿐만 아니라 복음의 가치와 한국교회의 영광성을 위해 등에 짐을 지고 가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저의 어깨가 감당하고 있는 무거운 짐이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저는 근래에 다른 것은 그만두고 정권사님 일로 얼마나 무거운 짐을 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새에덴교회는 물론 한국교회를 위해 많은 짐을 지었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 안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식 사역을 할 수 있지만 교회 생태계와 공적 사역에 대한 경종을 듣고 스스로 짐을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때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 꿈은 전혀 안 꾸는데 아버지의 꿈을 꿉니다. 그것도 아버지와 정면에서 마주보는 꿈이 아니라 쟁기를 짊어지고 논으로 가신다든지, 괭이나 삽을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꿈을 꿉니다. 솔직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먹서먹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더구나 저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소리를 잘 지르셨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희생하는 이미지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아무리 뙤약볕이 비추고 비가 오는 날에도 괭이나 삽을 들고 논으로 가셨거든요. 저는 마루에 앉아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힘들 때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꿈을 꾸곤 했지요.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나도 쟁기를 들고 논으로 가야 한다. 괭이나 삽을 들고 사역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그런 저의 뒷모습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보고 느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도들의 앞모습보다도 사명의 짐을 지고 가는 뒷모습을 볼 때 더 은혜스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마치,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의 등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훗날 구레네는 십자가를 졌던 어깨와 등을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자랑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명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여러분의 어깨가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의 등 뒤가 오늘처럼 아름답고 듬직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어깨와 등을 생각하니 왠지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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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2-0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지난 월요일 저녁, 정권사님 기관지 내시경과 조직검사를 앞두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한편으로 불안하고 초초하기도 했지만 기도만 하면 평안의 감동과 확신이 왔습니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기도 1,2부를 다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오전에 권사님은 검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이 주신 감동대로 전혀 암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기침을 많이 하셔서 염증이 결석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권사님이 깨어나셨을 때 제가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에 최고의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모르셨죠? 하나님께서 생명대상을 주셨어요. 권사님, 무등산에서 저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시죠? 제가 앞으로는 더 잘 모실 테니 이제 날마다 세상을 늘 첫날처럼 살아가세요.” 이는 나태주 시인의 표현을 일부 인용한 말이기도 한데요. 정권사님을 무등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던 떠돌이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동과 응답으로 권사님께서는 저의 기도후원자가 되어 주셨고, 훗날 장모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개척 초창기부터 지하실에서 주무시면서 오직 저와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의 눈물을 쏟고 쏟아오셨습니다. 무등산의 첫날이 권사님을 그렇게 만든 것이죠. 그래서 제가 남은 세상을 무등산의 첫날처럼 살아주시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권사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새에덴 성도 모두도 살아주셔서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생명대상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 중에는 연초부터 여러 가지 시련에 봉착한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나름 가슴 설렜던 첫날이 있지요. 교회로 돌아와 잠시 서재의 문을 열어놓으니 상큼한 바람이 난초 사이를 흔들고 들어왔습니다. 그 바람은 난초 잎사귀를 흔들 뿐만 아니라 생의 찬가를 부르며 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모든 생명은 세상을 첫날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지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하면서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하루를 첫날처럼 살아간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첫날처럼 가슴 설레게 살아가고, 숨 쉬는 순간마다 생명 대상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바이러스가 우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생명대상을 받은 사람이라면 세상을 가슴 설레는 첫날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첫날은 다르겠지만 그 소중한 첫날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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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2-0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지난 주 화요일도 야간산행을 했습니다. 저의 기도의 어머니 정 권사님을 병원에 모셔두고 야간산행을 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정 권사님은 저에게 영적인 거산이요 마음의 기둥 같은 분이십니다. 아니, 신비적 존재로 느껴질 정도로 제 신앙과 목회에 대부분의 스토리를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신적 소명의 길을 가기 위해 집에서 쫓겨나온 이래 저의 영적인 스승이요 멘토가 되어주셨습니다. 더구나 권사님은 영권이 얼마나 강하시던지 귀신들린 자들을 보는 족족 쫓아내시고 수많은 환자들을 기도로 고쳐준 분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분도 사람인지라 나이를 이길 수 없고 육신이 노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작년 9월부터 기침을 많이 하셔서 서울대 병원도 가고 C.T 촬영을 해 봤지만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입원을 해서 검사를 해 보니 예후가 그리 밝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월요일, 화요일 계속해서 눈물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의사선생님이 예후가 좋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저는 또 어린애처럼 껑충껑충 뛰기도 했고요. 저는 어머니 정 권사님께 최선을 다하여 효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총회 부총회장 출마와 서울 어느 교회 화해 문제로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권사님께서 기침하실 때 손 한 번 따뜻하게 잡고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시켜 드리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이 드는 것입니다. 더 잘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한탄하며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물론 우리 권사님이 의외로 90세 이상 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 권사님과 헤어질 것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정 권사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그 영혼은 그토록 사모하고 소원했던 천국에 가시니까 얼마나 행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분의 육신은 부활 때까지 땅에 잠들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야간산행은 그냥 산행이 아니었습니다. 정 권사님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이고 우리도 이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흙을 함부로 밟을 수도 없었고 무심코 가래침을 뱉을 수도 없었습니다. 겨울바람에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는 가랑잎들도 나의 죽음 이후의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참으로 적막과 적막이 만나고, 고요함과 고요함이 만나며, 슬픔과 슬픔이 만나는 산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적막, 고요, 슬픔만으로 끝나는 산행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는 창조적 산행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기 원했던 내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정 권사님을 5년을 모시든, 10년을 모시든, 우리 권사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 당연히 우리의 삶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잘 섬기고 받은 사명을 신실히 감당하며 소중하게 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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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1-2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져선 안돼요···”
    지난 화요일 늦은 밤에 교회 뒷산을 혼자 산행을 하였습니다. 진짜 오랜만에 하는 저녁산행이었습니다. 나 홀로의 저녁산행은 봄철 이후 처음으로 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봄철이라 저녁에도 진달래가 보이고 철쭉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겨울저녁에 홀로 산행을 하면서 보니까, 꽃은커녕 풀잎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낙엽이 가랑잎이 된지 오래 되었고, 그 가랑잎도 밟혀서 짓이겨져 있었습니다. 모든 산들이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멀리 흐르는 강물들도 귀를 막고 있었겠지요. 달도 숨을 죽이고 별 몇 개 떠서 하늘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지난 늦가을 여의도 한강변에 심겨진 갈대와 억새 숲 사이를 걷던 생각이 났습니다. 바람이 스쳐가는 갈대밭 사이로 서 있었는데, 그때 인생은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는가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다시 꽃으로 만날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산행을 했습니다. 모든 산들이 숨을 죽이자 산새 한 마리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저 혼자 걸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지만 또 수많은 사람이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몰려왔을 때는 꽃으로 만난 것 같지만, 어떤 이유든지 간에 우리 교회를 떠날 때는 갈대로 헤어졌던 것입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며 제가 이런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해도 /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J 난 너를 못 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 길을 / 난 이 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몇 달 있으면 적막한 겨울산도 봄을 맞이할 것이고 그때 다시 봄꽃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봄철에는 혼자 저녁산행을 해도 야화(夜花)를 만날 것이며 달도 환하고 별들도 총총하겠지요. 겨울밤에 꽃 없는 산을 가니까 꽃이 그리운 것처럼, 저에게도 떠난 성도들이 있기에 그들이 더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남아 있는 더 많은 성도들이 고맙기 그지없고 그들이 얼마나 저에게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송구영신예배 때 본당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비전홀과 교육관에서 예배드린 그분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또 그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꼈습니다. 봄이 오면 갈대는 사라지고 다시 꽃으로 만나는 것처럼, 저의 목회현장도 갈대로 헤어졌지만 꽃으로 다시 만나는 날이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따금씩 지방에 가도 이렇게 인사하는 분들을 봅니다. “아, 저 옛날에 새에덴교회 다녔습니다. 저는 대학강사였는데 지방대로 임용이 되어서 왔습니다.” 심지어는 해외에 가서 집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저 옛날에 새에덴교회 다녔었는데 이민을 왔네요.” 이 역시 순간순간 꽃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꽃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도 갈대로 헤어지지 말고 순간순간 꽃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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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1-1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새해 첫 아침이 지나고 벌써 우리는 두 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 특별새벽기도회로 이어지는 말씀과 은혜의 잔치 속에서 웃고, 울고, 가슴 치고, 새롭게 희망을 다짐하며 새해를 맞았습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어느새 레일 위에 들어섰고 서서히 달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차가 흔들리지만 저는 그 안에서 잠 좀 푹 자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송구영신예배에서부터 신년특별새벽기도회까지 너무 피곤하게 달려왔기 때문이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축복의 이면에 고난이 있고, 영광의 뒤편에 쓸쓸한 외로움과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축복과 고난, 영광과 절망의 낯선 간이역들을 스쳐지나가는 기차여행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축복보다는 고난을, 영광보다는 절망의 순간들을 더 오래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감사보다는 상처를,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가슴에 간직하며 상처받고 아파합니다. 하지만 고난도, 절망도, 사실은 우리를 축복과 영광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쓰라린 고통과 상처일지라도 사랑으로 껴안으며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 정말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너무 당황하여 두려운 행복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예고도 없이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처럼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의 소식들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전화기를 붙들고 웃고 울고 소리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너무도 당황하여 말 한마디 못하고 전화를 끊을 때도 있고, 많은 말을 하고서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길을 다시 찾을 수 있고, 말을 잃었기에 정말 하고 싶은 사랑의 말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선택한 이후에 생명나무의 소중함과 가치를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고, 실낙원 이후에 에덴의 축복을 평생 잊지 않고 그리워하였을 것입니다. 인도 속담에 “잘못 탄 기차가 때론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그 잃어버린 것 때문에 주저앉아 울고 있지는 않나요? 그러나 잃음이 없었다면 소중함도 모르고 그것을 찾기 위한 그리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더 위대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는 별이 되어 빛나고, 꽃이 되어 피어날 것입니다. 2020년 새해, 그 꽃과 별을 가슴에 품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 함께 걸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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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1-1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혼자 있으면 춥지만···”
    제 서재에는 벽난로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 벽난로에 장작을 쌓고 불을 붙이면 화르르 불이 타오릅니다. 불이 주는 따뜻함은 전기히터나 난로가 주는 따뜻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불은 몸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안아주는 따스함이 있습니다. 사람은 모닥불을 보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원시적 감성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벽난로 앞에 앉아 성경을 묵상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모임, 일정을 보내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깊은 밤, 홀로 벽난로 앞에 앉아 불을 쬐고 있노라면 내 영혼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고 영혼의 깊은 따스함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아무리 오랜 시간동안 회색빛 콘크리트 도시에서 목회를 하더라도, 마음은 언제나 모닥불 가에 앉아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목가적 목회를 할 것만 같습니다. 벽난로 앞에서 추운 몸을 녹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있으면 춥지만 함께 있으면 춥지 않겠구나. 장작들도 함께 모여 있으니까 활활 타오르고 있잖아. 나도 누군가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장작이 되어야지...”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딘가에서 홀로 추위에 떨고 있는 분이 있나요? 상처와 아픔 때문에 울고 계신 분이 있나요? 혼자 있으면 춥지만 함께 있으면 춥지 않습니다. 새에덴 안에서 함께 따뜻하게 살아요. 제가 쓴 ‘불의 사연’이라는 시를 새해 첫 인사로 드립니다. “홀로 타오를 수 없습니다 / 장작개비가 되어 내 곁으로 와 주세요 / 나는 당신을 품에 안고 / 바람을 기다립니다 / 당신은 / 바람이 불면 재가 될 줄 알면서도 / 내 품에 안긴 채 / 바람을 기다립니다 / 나는 불 / 당신은 어느 겨울 숲에서 꺾여 / 내게로 온 장작개비 / 난 당신의 차가운 몸을 껴안고 / 바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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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0-01-0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힘이 있어야 선(善)도 행한다
    한해가 저물어 올해 마지막 목양칼럼을 쓰게 되었습니다. 올해 같은 해가 또 있었을까요? 수많은 사람이 천지개벽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급박함을 가지고 집회를 하고 시위를 했지 않습니까? 양 진영이 촛불을 들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서로가 공의를 실현하겠다고 소리친 한해, 종교마저도 이념으로 나뉘어져 버린 아픔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니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를 뽑았겠습니까?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둘인 새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다 그만 독초를 먹고 둘 다 죽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정말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절단나지 않나 생각도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뿐만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핵을 가지고 위협하며 미사일을 쏘아 왔고, 중국과 일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저 멀리 미국의 트럼프는 말폭탄을 매일 터트려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과 정부는 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강대국의 강성 지도자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대통령부터 성품이 모질지 못하니 정부도 그럴 수밖에요. 그러나, 착함은 자칫 무능함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세계는 국가이기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에게 도움이 될 듯싶었던 미국마저도 자국의 이익에 함몰되어 한반도를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우리 정부가 미국에 신뢰를 잃은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이런 것을 볼 때 결국 선하고자 하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됩니다. 약한 선은 언제든지 짓밟힐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도 더 큰 힘을 길러야합니다. 저는 연말이 되면 정신이 없습니다. 누군들 빡빡한 일정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8개의 신년축복성회의 말씀을 준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31일날 저녁 10시부터 송년집회를 합니다. 한 해 동안 묵은 심령의 때를 벗기고 말씀과 기도로 새마음을 준비하여 새해를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새해 0시가 되면 영신예배를 드리고 신년소원예물을 드리며 교역자들의 안수기도와 함께 약속의 말씀을 뽑아갑니다. 그런데 갈수록 이런 일을 하기에 힘이 듭니다. 성도들이 공평하게 부교역자들에게 안수를 받고 가면 좋을 텐데 저에게 몰려드니 말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한 번도 못해본 적이 없습니다. 올해는 10시 반부터 시작하고 싶었지만 버스 사정 때문에 또 10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으로만 끝나면 또 얼마나 좋겠어요. 1월 1일부터 3일까지 계속 신년축복성회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영육간의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영육 간에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약한 선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가 이만하니까 정부와 사회와 교계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제법 큰 역할도 할 수 있었잖아요. 세상에선 나약한 선이 통하지가 않습니다. 힘이 있어야 선도 행할 수 있고 복을 받아야 더 큰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년 새해가 되면 신년축복성회를 합니다. 여름이 되면 장년여름수련회를 합니다. 이제 주일을 보내고 이틀만 있으면 새해를 맞게 됩니다. 저부터도 신년소원예물을 얼마 해야 할까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작년보다는 더 많이 할 것입니다. 아니, 성령의 감동 안에서 내년의 축복을 위해 작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이 심을 것입니다. 저도 내년에는 더 많은 복을 받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하기 때문이죠. 여러분도 더 많이 복을 받고 더 큰 사명을 감당하시면 좋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2-2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잠 못 드는 밤의 연서
    지난 2019년 6월에 경기도 한 도의원이 성평등조례 개정안을 발의하였습니다. 내용인즉, 성평등위원회를 공공기관 및 사용자, 즉 민간단체까지 설치하도록 개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성평등위원회는 양성평등이 아니라 젠더로서의 사회적 성평등을 의미하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할 시에는 운영비 전액과 사업비 일부를 도비로 지원하도록 개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기총(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은 성평등이라는 용어에 동성애 및 제3의 성이 포함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수차례 그 법을 발의한 도의원을 설득하고 문제되는 조항을 삭제, 수정하도록 요청 하였지만 결국 개정 원안대로 통과 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경기총은 31개 시군연합회와 긴급 모임을 갖고 7월 28일 출범식과 함께 1차 도민규탄대회를 도청 앞에서 실시하였습니다. 또 8월 25일에 2차 도민규탄대회를 하였습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도 앞장을 섰지요. 그 이후로도 계속 1인 시위, SNS, 영상 홍보 등을 통하여 성평등 조례의 문제점을 알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의회 대표단과 7차에 걸쳐 재개정을 위한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성평등 조례를 전부 개정하자는 안과 경기도 의회가 개정할 수 있는 최대치로 개정하자는 견해죠. 그러나 전부를 원하는 견해가 더 강하여 7차 간담회가 결렬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경기총 대표회장과 증경회장들이 나서서 현실적인 대화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번에 완전 개정은 못하더라도, 성의 의미를 생물학적 성으로 정의하고 사용자에 종교단체는 제외하며 강제조항으로 보이는 “하여야 한다”를 “할 수 있다”로 고쳐 종교와 교육, 기업까지도 자유를 준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어느 일간지에 보도되니까 아주 원론적인 분들이 강력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내부에서만 반대 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을 동원해서까지 반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의원들이 기사 내용을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부결시켜 버린 것입니다. 물론 강성인 분들의 주장대로 총선을 앞에 두고 최대한 압박해 우리의 의견을 100% 수용하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는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선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리와 목표는 같지만 방법은 다를 수 있잖겠습니까? 만약 이번에 경기도 성평등 조례를 어느 선에서라도 개정 했으면 다른 조례도 유보되거나 철회 됐을텐데 말입니다. 또 어느 선까지 개정하고 그 다음에 더 완벽하게 개정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가치는 훌륭하지만 우리끼리 순교하겠다고 소리치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일이 조금이라도 되게 해야지요. 더 큰 화를 막아야지요. 현장의 사역은 관념적인 생각과 구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직선적으로만 가면 될 일도 그르치고 오히려 피해를더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개정할 수 있으면 저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종교인 과세 대처 때도 우리끼리 관념적이고 원론적 구호만 외치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일단 둑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둑이 무너지면 배를 건조해 그 안에서 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되겠지요. 둑은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과거에는 교회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외부의 세력을 차단하고 막는데 급급했다면 지금은 우군끼리의 조율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더 우선순위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말 밤은 깊고 갈 길은 먼데, 목회하랴, 교계 안에서는 우군끼리 소통하고 설득을 하랴, 밖으로는 교회 생태계 지키랴, 잠 못 이루는 나날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요즘은 저를 주사파라고 공격하는 코미디까지 연출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길이 보이고 깊은 밤이 지나 아침이 오리라 믿습니다. 그 아침을 기다리며 잠 못 드는 이 밤도 아픈 기도와 연서를 띄웁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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