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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첫눈은 언제 내릴까?
    우리 교회에 김포공항에 근무하는 전영모 안수집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국내선을 거의 안 타지만 가끔 제주도를 갈 때는 탑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공항에 들렀더니 손녀 현주에게 갖다 주라고 하면서 조그마한 ‘눈 내리는 관제탑’ 장난감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 선물을 보자 ‘첫눈은 언제 내릴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시가 하나 찾아와서 ‘눈 내리는 관제탑’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하얀 눈은 수신호가 없네요 아직 크리스마스가 멀었는데도 교회 종탑과 성당의 예수상 서울역 노숙자의 헝클어진 머리 위에도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비행기의 이착륙을 관장하는 관제탑엔 천사가 눈세례를 주고 있어요 외로운 관제사는 하얀 눈송이들을 보며 첫사랑의 몽상에 빠져 있어 이륙을 착륙으로, 착륙을 이륙으로 착각하여 마음대로 수신호를 해 버려요 관제사 때문에 비행기들이 더 이상 이륙도 착륙도 못하고 기체가 서로 부딪치고 얽히고 박살이 날 상황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눈송이들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마냥 행복해 하네요.” 아직 크리스마스가 멀었는데 공항에 첫눈이 펑펑 내리니까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 첫눈은 천사의 눈세례였죠. 그러니 첫눈의 눈세례를 맞고 관제사가 첫사랑의 몽상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공항이 난리가 났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눈송이들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마냥 행복해하죠. 갑자기 이런 따뜻한 시가 떠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첫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첫사랑이나 옛 시절을 추억하면서 마냥 행복해 합니다. 요즘 세상이 많이 삭막해 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첫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들뜨고 행복해합니다. 연인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다니면서 여전히 군고구마나 군밤을 사 먹고 가족들은 즐거운 외식을 하기도 합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눈이 많이 오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산에서 토끼몰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은 하늘에서 마치 축복을 해주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눈’이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의 편지가 새하얀 꽃잎이 되어 내려오네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늘은 모두들 사랑하라고 하나님의 사랑이 하얀 편지되어 꽃잎으로 떨어지는 날은 너와 나는 무조건 하나.” 저는 지금 날씨가 추워져도 서재에 있는 벽난로를 피우지 않고 있습니다. 첫눈이 오는 날 난로를 피우려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날은 벽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고 싶습니다. 만약에 첫눈이 펑펑 내려서 눈이 쌓이면 군고구마를 몇 개 싸들고 무조건 산길을 걷고 싶습니다. 평소 토요산행을 하던 장로님들과 함께 남들이 밟지 않은 눈 덮인 산을 먼저 가고 싶습니다. 아니, 한없이 다리가 아프도록 산길을 걷고 싶습니다. 눈 덮인 산길을 걸으며 옛날에 토끼몰이를 하던 일과 썰매를 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말입니다. 또 눈사람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걸을 것입니다. 제가 제일 먼저 앞장서서 하얀 눈밭 위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상상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길이 남이 가지 않는 길이었지 않습니까? 남이 하지 않은 공교회와 공적 사역의 길을 열어 왔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눈 덮인 산길에 저의 발자국을 찍으며 걷고 또 걷고 싶습니다. 과연 첫눈은 언제나 내릴까요? 토요일에 내리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일날 첫눈이 내리면 산행은 절대 불가능하겠지요. 요즘은 나이가 먹어 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더 동심을 꿈꾸게 되고 마음이 더 순수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첫눈이 오는 날 밤은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가 제 가슴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하얀 솜이불이 되어 눈부신 설원의 꿈을 꾸며 잠들고 싶습니다. 이런 하얀 꿈의 축복이 우리 모든 새에덴의 성도들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첫눈이 오는 날 이러한 행복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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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2-01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불사조 보다 중요한 것
    2주 전 주일 이른 새벽부터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것 또 요로결석이 아닌가?’ 새벽 2~3시가 되어 혼자 누굴 깨우기도 그렇고 분당 서울대병원에 간다 한들 금방 시술을 해 주는 것도 아니기에 계속 고통을 참아내다가 서울대병원의 수간호사이신 전현식 집사님의 안내로 24시간 쇄석클리닉을 하는 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거기서도 치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픈 배를 움켜잡으며 끙끙 거렸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게 불사조였습니다. 저는 젊은 날 불사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사조 같은 삶을 살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불사조는 피닉스(Phoenix)라는 상상속의 새입니다. 이 피닉스(불사조)는 세상에 단 한마리만 존재하는 것으로 아라비아 사막에서 산다고 합니다. 빛나는 진홍과 금빛 찬란한 깃털을 지녔고, 독수리만한 몸집을 지녔는데 음성 또한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 피닉스도 500~600년을 살고나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때 피닉스는 향내를 물씬 풍기는 향나무를 태산처럼 쌓아놓고 불을 지른 다음 자기의 거대한 날개로 부채질을 하여 불길을 절정에 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불길 속으로 스스로 곤두박질을 해 타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대한 몸집이 한 줌의 재가루가 되지요. 그런데 놈은 그 재 가운데서도 싱싱하고 더 활기찬 새로운 피닉스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멋지고 활기찬 삶을 계속 삽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새를 가리켜 ‘불사조’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즉, 인간 신념과 정신력이 표방하여 상상해 낸 것이 불사조라는 새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불사조는 인간 신념의 표상이요 인간의 정신세계가 추구하는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고통의 순간에 불사조라는 새가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무리 불사조가 되어 이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하더라도 ‘오늘 주일 설교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3시간30분~4시간 차를 타고 가서 목포체육관 집회까지 감당해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신념이야 주님을 위해서라면 당장 불길 속에 뛰어 들어서 다시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는 확신이 있죠. 그러나 아무리 내가 불속에 뛰어들 용기와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주일설교를 정상적으로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사조보다 중요한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불 속에 뛰어 들어가라면 뛰어 들어가겠습니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목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벙벙 뛰면서 집회를 한다는 것은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저는 불사조이기를 포기합니다. 저는 연약한 비둘기만도 못한 종입니다. 아니 주님이 저를 놓아버리시면 저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주옵소서. 은혜를 주셔서 이 시간 요로를 막고있는 돌을 깨게 하시고 통증을 멈추게 해 주셔서 오늘 주일 설교와 목포집회를 은혜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정말 기도대로 저는 잠 한숨 자지 못한 가운데도 주님의 은혜로 주일설교를 하였고 나머지 예배는 영상으로 대체한 후 마침내 목포로 갔습니다. 그리고 목포 집회도 은혜로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사조보다 중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저의 신념과 믿음의 깡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오직 은혜, 은혜 위에 은혜를 앞세우며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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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1-2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바로 그 사람’
    저는 지난 수요일 오전 광신대학교에 가서 제13회 해원 기념강좌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 주간에는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인천낙원제일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최병현 담임목사님께서 배려해 주셔서 수요일 오전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해원은 고 정규오 목사님의 호인데요, 정 목사님은 저의 은사로 광신대학교 초대 총장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 분을 지방신학교 총장이요, 군소교단의 지도자로만 아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 교단의 신학과 영성의 근간을 이루었던 분입니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로 인해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조선신학교가 서울에서 개교 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신학교는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재준 박사는 문서설을 비롯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신학생 정규오는 ‘51인 신앙동지회’를 결성합니다. 그때 저의 믿음의 아버지였던 박종삼 목사님도 51인 가운데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51인 신앙동지회는 1947년 4월 1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33회 총회 때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사상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형용 박사가 교장으로 있고 보수신학의 산실이었던 고려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위대한 신학자 박형용 박사를 잘 보좌하고 보수신학을 지키며 세우는데 한 중심에 있었고 실제적으로 총회의 정치적 실세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천적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영수 목사님입니다. 그는 탁월한 혜안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총신대와 총회회관을 건립하는데 가장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 할 때 해원은 신앙 양심과 선지자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반대를 하였습니다. 반면 이영수 목사는 3선 개헌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영수 목사는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다보니 교단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래서 해원은 점점 정치적으로 밀리며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79년 대구총회에서 이영수 목사의 정치적 실력에 밀려 정규오 목사와 그의 사단들은 입장도 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았으면 좋았을텐데 참지 못하고 교단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측 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1982년 합동 교단 정화위원회가 태동하여 이영수목사와 그의 사단을 몰락시키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때 조금만 참고 분리 하지 않았다면 정규오 목사님의 신학과 자산은 더 넓은 바다에서 한 마리의 고래처럼 유영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교단을 분리해 서울에는 개신원을 세우고 광신대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개혁교단은 굉장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정규오 목사님 인생 황혼기에 개혁측과 합동측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당시 서기행 목사님이 부총회장이 되자, 정규오 목사님은 서부총회장님을 광주 무등산으로 불러서 눈물로 애원했다고 합니다. “자네가, 부총회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네. 총회장이 되면 개혁과 합동이 합치는 일을 하소. 개혁과 합동이 합치는 것을 봐야 내가 눈을 감고 천국 갈 수 있겠네.” 그래서 마침내 서기행 목사님은 정규오 목사님의 눈물의 부탁을 받고 개혁과 합동이 합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개혁의 첫 열매로 부총회장 단독후보가 되고 무투표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내용의 발표를 하였습니다. 저는 해원 정규오 목사님의 수제자이거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저를 특별하게 거두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분의 가르침을 받고 신학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수혜자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계실 때는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떠난 후에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원의 신학과 업적을 기억만 할 것이 아니라 확장해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지방에서만 기념대회를 하지 말고 수도권으로도 확장하고, 전 교단으로 확장하고, 세계화를 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어쩌면 그 분은 살아서보다는 죽음 이후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분일거야. 또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제자들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떠난 후에 더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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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1-17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혼자 가는 길을 연습하다
    월요일 저녁, 서울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차가 막히지 않아 좀 일찍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시 남산을 찾았습니다. 남산에 들어서는 순간, 가을단풍의 절경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난 주 무등산 산행을 하지 못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남산 산행을 하는 사람들 모두도 가을 단풍 절경에 취해 있었습니다. 제가 이따금씩 남산에 올라가면 많은 사람이 저를 알아보는데 이번에는 두어 명만이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주변 사람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가을애상에 잠겨 가을절경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죠. 저 역시도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이쪽저쪽 무르익은 형형색색의 단풍을 바라보고 느끼며 걸었습니다. 곱게 익은 단풍의 모습이 문득 나뭇잎들의 열정과 눈물이 물든 핏방울의 결정체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버티다 못해 낙하하는 나뭇잎들은 마지막 아우성을 치며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잎새 속에 저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하였습니다. 아니, 저의 살아온 삶들이 그 단풍 잎새 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벽을 따라 남산 타워 쪽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왼쪽에 작은 갈대밭이 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보면 갈대밭은 더 이상 확장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심한 바람을 맞았는지 벌써부터 대부분의 갈대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아, 사람만 고달픈 삶을 사는 것이 아니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상처 받으며 겨울을 맞고 있구나. 그리고 겨울이 오면 모두가 앙상한 공허만을 남기고 말 거야.” 제 인생도 돌이켜보니 꽤 오랜 시간을 걸어왔던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걸어갈 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짧음을 느꼈습니다. 남산의 가을 길을 걷는 것이 이렇게 좋은데, ”나는 내년에도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남산 정상에 도착하자 벌써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계속 걷고 싶었습니다. 정말 배가 고파서 못 걸을 때까지 밤이 맞도록 걷고 또 걷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그런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더 이상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 없을 만큼 끝없이 걷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정진홍님은 47일 동안 900킬로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 환상적인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말입니다. 그러나 저 같은 형편에서 어떻게 47일 동안이나 걷는 여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단 하루라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깊은 산길을 걷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 식사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산을 내려오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남산 길을 걷는 것과는 다른 길,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까지도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남들이 걷지 않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온 것입니다. 정진홍님도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길, 사명의 길은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함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혼자 걸어가는 것이죠.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믿음과 사명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도 결국 혼자 걸어갈 때가 많습니다. 가을을 맞을 때마다 나무도 단풍도 제 자신도 늙어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절감합니다. 그러나 늙어감이란 삶의 한 과정일 뿐, 그 과정 속에 우리 모두는 혼자 걸어가야 합니다. 보통 때는 함께 걸어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홀로 걸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남이 가는 평범한 길을 가지 않고 남이 가지 않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다. 그 길은 혼자서만 가는 길입니다. 혼자 가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한 길이죠. 그리고 그 길은 올라갈수록 더 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은 혼자이고, 주님과만 걷습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 뒷산을 갈 때도 혼자 가는 길을 연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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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1-10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가을낙엽의 눈물
    오랫동안 푸른 잎을 보여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거리에 나부끼는 우리들의 모습이 추하게 보이지는 않는 건가요. 그러나 우리는 병든 잎사귀가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떨어져 거리에 나부끼고 있는 이유는 여름과 같은 작렬한 햇살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한 결과이지요. 햇살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가을날에도 눈부신 햇살이 비추지만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태양과의 거리가 멀어져 땅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아직도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푸른 잎사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언젠가는 못내 아쉬워하고 서러워하면서 우리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열정을 태우다가 일찌감치 장엄하게 떨어졌을 뿐이죠. 혹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드시나요? 여러분의 인생도 낙엽이 될것이라고, 우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나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가을을 맞는다고 어찌 여러분의 마음이 흩날리는 낙엽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폴 베를렌은 ‘가을의 노래’라는 시를 썼다지요. “가을 날 바이올린의 / 긴 흐느낌 / 끊이지 않는 우수로 / 내 마음 괴롭히네 / 종소리 울릴 때 / 창백하고 곧 숨막혀 / 옛날들 기억나 / 눈물 흘리네 / 그리고 / 휩쓸어 가는 모진 바람에/ 이끌려 가네/ 여기저기로 / 낙엽처럼” 왜 우리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쓸쓸함과 비애를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을 밟고 지나갈 때 얼마나 낭만적인 마음이 드시던가요? 산길을 걸으면 바삭바삭하는 소리, 사뿐사뿐 뛰어 다니는 다람쥐와 고라니의 발자국 소리까지 내어주는 이 가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가을 낙엽을 보면 나뭇잎의 눈물이 느껴진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오히려 가을낙엽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죠. 또 하나의 눈물이 있다면 우리가 가을바람에 나뒹굴다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와 겨울에 내리는 눈을 맞고 흙 속에 묻힌다는 걸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는 내년 봄에 피어날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하여 아낌없이 자양분이 된 후에 따사로운 어느 봄날 여린 연둣빛 사랑으로 다시 올 테니까요. 그것을 생각할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더 이상 비애와 쓸쓸함,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내년 봄에 다시 연두빛으로 태어날 소망의 눈물입니다. 꼭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결코 가을낙엽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물론 인간의 삶도 육신으로만 보면 우리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 푸르던 나뭇잎이 어느새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듯 인간의 육신도 후패하는 잠깐의 삶에 불과한 것이죠.(고후4:16) 아니, 겉사람이야말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리는 장막집과도 같지요.(고후5:1) 그러나 인생은 겉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도 또 그 계절이 수십 번, 아니 백 번 이상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고후4:16) 더구나 예수님을 믿는 삶은 죽어도 다시 산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것을 성령께서 보증해 주셨고(고후5:5) 그걸 믿는 것이 믿음이지요. 그 믿음의 눈으로 우리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세요. 땅에 떨어진 모든 낙엽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내신 가을엽서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를 바라보며 쓸쓸하고 우울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여러분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초대장으로 여기시며 부디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가세요. 그리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져 보세요. 그냥 낙엽 밟는 낭만에만 빠지지 마시고 가을에 받은 사명의 길을 걸어가시면 더 좋겠습니다. “주여,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더 많은 영혼을 추수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십자가를 지고 낙엽이 쌓인 길을 걷게 하소서.” 가을낙엽의 눈물, 곧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부디 올해는 낙엽을 밟을 때마다 우리 안에 새겨진 사랑과 눈물, 그리고 아직 잎새에 남겨져 있는 생명의 신비를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환희의 찬가를 부르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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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0-27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갈등 후에 느낀 보람
    지난 주 수요 오전예배는 저의 부총회장 취임 감사예배로 드렸습니다. 사실은 취임감사예배를 드릴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어색하여 안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노회원들과 저를 성원했던 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세요. 반드시 드려야지요. 이것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감사차원이요, 총회와 목사님을 성원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지 말자고 한 분들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기로 했지만 조용히 하려고 초청장을 한 장도 찍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총회 목사님과 장로님들만 해도 400명 이상이 오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많은 분들이 “역시, 소목사가 대세는 대세구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취임예배를 앞두고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의논하여 저에게 부총회장 취임 축하금을 준다고 하면서 전날 순서를 마련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보고를 받고 절대로 그런 순서를 갖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돈을 제가 받지 않고 요즘 어려운 총신대에 기부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총회장 취임도 아니고 부총회장 때라 조심스러웠습니다. 이 일로 화요일 밤은 정말 잠이 안 와서 얼마나 뒤척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총장님을 초청 안 했지만 만약 총장님이 오신다면 총신대에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총신대 총장님이 제일 일찍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배장용 장로님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좋은 헌신 소식을 전해오셨습니다. 그래서 “아, 이게 하나님 뜻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또 어렵게 공부했던 광신대도 생각이 나고, 강단에서 보니까 기독신문 사장인 이순우 장로님도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결단을 하고 이종민 목사님께 부랴부랴 연락을 해서 총신대학교, 광신대학교, 기독신문에 후원금을 전달하는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제가 전달하지 않고 총신은 재정위원장인 권용관 장로님이, 광신은 배장용 장로님이, 기독신문은 손정완 장로님이 전달해 드렸습니다. 배장용 장로님은 손 장로님에게 도전을 받아서 더 큰 헌신을 하기로 했고, 손 장로님도 갑자기 나오라고 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자원해서 기독신문 후원금을 담당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두 장로님들의 헌신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사실은 갈등하지 않고 미리 결단을 했더라면 잠 못 자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컸기에 보람도 컸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교회가 아무리 힘들어도 선한 일을 할 때는 단 한 번도 못 한 적이 없었습니다. 구미동에서 예배당을 지은 후 IMF가 와서 힘들었지만 제 아들 학원은 못 보내도 해외 선교사 후원은 단 한 번도 미룬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부교역자 사례비를 못 준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단과 한국교회를 섬기는데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힘들었지만 단 한 번도 못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작년에는 30주년 비전헌금과 임직자 헌금도 있었지만 올해는 특별한 헌금명목이 없어서 아무래도 작년보다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고자 하는 것은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장로님들의 후원과 성도들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또한 요즘 저는 정 권사님의 눈물의 기도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난 주 같은 살인적 일정도 행복하고 거뜬하게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면서 1년 동안 잘 배우고 준비해서 우리 총회를 화합하고 견고하게 세워가는 총회장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총회가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서 반기독교적 시류와 풍조를 차단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세워가는 일에도 앞장서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고통의 강이 길고 갈등의 골짜기가 깊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 강을 건너고 골짜기를 지나 보람과 행복의 산을 오를 것입니다. 그것도 저 혼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오르고 싶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0-20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눈물이 길을 내리라
    요즘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극한 대립을 하고 광화문과 서초동 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사회는 해방 이후 극한 이념 싸움을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단초는 먼저 대통령이 제공했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물론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대통령은 아주 온유하고 겸손하며 경청을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사적으로는 동성애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소외 계층을 잘 품겠다고 하셔서 선정을 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대구 집회에 갔을 때, 문재인 하야 천만인 서명을 하고 있는 분들이 교회까지 들어와서 저에게 종용을 할 때도 기독교인들이 너무 앞장서면 덕이 안될 수 있다며 완곡하고 정중하게 거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들은 온라인에서 저를 완전히 좌파로 몰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대가 절박하다는 증거지요. 그러나 세상에 저를 좌파라고 하다니요. 저는 누구보다도 이슬람, 동성애, 종교인과세, 난민의 부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앞장서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국전 참전용사를 13년째 초청해 온 목사입니다. 그러니까 꼭 진영을 구별한다면 저는 우파라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파적 우파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와 기독교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순수한 종교적 신념에 선 우파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요즘은 저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국민을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면서까지 조국 장관만을 검찰개혁의 적임자로 세워야 했을까요? 게다가 지금의 정부는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데 -물론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것도 네오 막시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베네수엘라처럼 우리나라도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난번 광화문 집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선약된 집회가 있었고요. 그런데 광화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저의 생각과 일치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들어댄다든지, 한미동맹 약화,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저도 결사반대할 것입니다. 사실 그 집회를 주도한 분들이 저와 개인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지나치게 정파적이고 극단적인 주장과 더불어 막말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솔직히 단순한 진영논리로만 보면 저는 그곳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복잡하고 미묘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우리 사회는 우파 진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중도에 속한 사람도 있고, 진보 진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우리의 선교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자칫하면 프레임에 말려들게 되고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소비될 것 같은 염려도 들어왔습니다. 더구나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더 신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진영논리가 아니라 종교적인 가치와 신념, 명분이 더 크다면 과거보다 더 앞장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저에게는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종교인 과세문제로 한국교회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 온갖 오해를 받으며 이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던 김진표 의원님을 비롯하여 여러 크리스천 국회의원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은 기독교에 있습니다. 유물론적 사회주의를 막고 동성애 운동을 막는 힘도 한국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파적 이념 논리가 아닌 한국교회만의 순수한 목소리를 내야 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시대를 아파하며 통곡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화합과 희망의 메아리를 외치는 집회 말이지요. 저는 평정심을 갖고 균형을 잃지 않으며 넓게 멀리 보는 한국교회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물론 그 어떤 경우에도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배격하고 성경의 가치와 정신이 살아있는 자유민주주의를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수의 침묵하고 있는 한국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정파적 외침, 극단적 막말의 함성이 아닌, 균형있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성과 대안을 제시하는 목소리를 말입니다. 분노는 넘치지만 눈물이 없는 시대에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먼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침묵하고 있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과 국민들이 함께 모여 통곡의 눈물을 쏟을때 그 눈물이 강을 이루고 그 강은 마침내 길을 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한국교회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고 결국은 우리 민족에게 화해와 통합과 반전의 길을 열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0-13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가을꽃 당신
    당신 계신 곳 찾아가는 길가에 코스모스 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갑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이름 모를 가을꽃들도 고개를 살랑이며 저를 반겨주었어요. 태풍이 쓸고 갔기 때문인지 어떤 꽃들은 허리를 숙인 채 반겨주었지요. 살아생전 당신께서는 저에게 습관처럼 말씀하셨죠. 너무 뻥이 심하긴 하셨지만요. “소목사님은 50년, 1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이영수 목사님을 오래 모셨는데 소목사님의 정치력은 이영수 목사님을 능가할 수 있고 박종삼 목사님을 빼닮아 진정성과 간절함이 있어서 금방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버려요. 또한 정규오 목사님의 신학과 사상을 이어 받아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니 소목사님은 앞으로 우리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를 능히 회복시키고 세워나갈 겁니다. 그러니 빨리 총회장부터 되어야 해요.” 이런 당신의 말씀에 저는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었지요. “장로님,저는 그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작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당신을 ‘형님 장로님’이라고 불렀지요. 그러나 장로님께서는 다른 목사님들에게는 격의 없이 대하기도 하였지만 저에게는 가깝고도 멀며 멀고도 가까운 사람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아! 박정하 장로님,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고 그런 마음도 보이지 않았지만 저를 이른 나이에 총회장이 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셨습니까? 한사코 저는 아니라고, 정말 그러시면 다른 교단으로 가버리겠다고까지 하였지만 그때마다 저에게 찾아오셔서 손을 잡아주시고 이렇게 권면해 주셨지요. “소목사님은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부르짖어왔던 한국교회 생태계 보호와 공교회 사역을 반드시 하셔야지요. 이런 한국교회 위기의 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소목사님에게 눈물겨운 연단을 시켜주셨잖아요.” 박정하 장로님! 제가 이른 나이에 부총회장이 된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이제 장로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부총회장이 되어 이렇게 장로님 묘소에 찾아왔습니다. 지난 겨울에 왔을 땐 잔디가 잠들어 있더니 지금은 파릇파릇 자라있네요. 방금 전까지 내린 빗방울이 잔디에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무덤 안에 누워 계신 장로님께서 갑자기 일어나 나오실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여전히 당신께서는 흙 속에 묻혀 계십니다. 저는 장로님께 말할 수 있지만 장로님은 저에게 뭐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벨이 죽었으나 믿음으로는 말하는 것처럼 장로님도 믿음으로 말을 하실 수 있겠지요. 아니 저 영원한 천국에서 제가 부총회장이 되어 제일 먼저 장로님 묘소 앞에 와서 꽃다발을 헌화하며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시겠지요. 저를 눈물겹게 사랑해 주셨던 장로님, 당신의 묘소 앞에 부총회장의 이름으로 꽃다발을 헌화해 드립니다. 장로님! 하늘나라에서 기뻐해 주십시오. 저는 앞으로 총회장이 되더라도, 바삐 행사나 쫓아다니는 총회장은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총회의 정책을 세우고 비전을 만들어 앞으로 50년, 100년의 나갈 길을 열어나가겠습니다. 아니,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반드시 한국교회를 세우며 지키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장로님의 영혼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실 겁니다. “네가 세상에 사는 동안 내 종 소목사의 손을 잡아주기를 잘했지. 소목사를 일으켜주고 세워줬던 일들, 네가 정말 잘했던 거야.” 장로님!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총회를 섬기고 한국교회를 세워나갈 것입니다. 비가 개인지 얼마 되지 않는데 제가 헌화한 국화꽃 주변에 노란 나비가 춤을 추며 다니고 있네요. 너울너울 춤추며 다니는 노란 나비 한 마리도 하나님이 보내주셨음을 믿습니다. 내년 봄에는 장로님의 묘소 주변에 봄꽃들이 많이 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꽃을 피우는 건 꿈꾸는 나비임을 믿기에 각종 나비들이 장로님 묘소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장로님의 묘소 앞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부활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그런데도 가을 꽃잎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며 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당신 살아생전의 얼굴이 비에 젖은 가을꽃의 모습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0-06
  • [소강석 목사] 대한민국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기도
    본고는 소강석 목사가 지난 10월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저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참 가슴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정치가 너무 세 대결로 가지 않는가하기 때문이죠. 정치가 국회 정치보다는 광장 정치로 나가면서 몇 년 전 촛불 정치를 연상하게 됩니다.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요. 어쨌든 발단은 조국 장관 임명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법개혁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조국 임명으로 인해 국민을 완전히 둘로 갈라놓는 것은 정부와 여당, 청와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현 정권은 우리나라를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추석 때 북유럽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북유럽이 처음부터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그들이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네오 막시즘 사상에 기초한 사회주의를 이루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국가를 위한 종교 서비스 기관으로 전락되어 버렸어요.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무신론적 사회주의 성향으로 끌고가려는 움직임을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이럴 때 야당이 견제를 잘해주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야당 역시 반대와 저항만 있을 뿐이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야당 역시 대안과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기독교 17개 광역시도 연합회에서도 ‘한국교회 기도의 날’이라는 집회를 가졌습니다. 사실 17개 광역시도 기독교연합회는 제가 한 동안 섬겼고 핸드링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17개 광역시도 기독교연합회가 박근혜 정부 시절, 종교 소득과세를 종교인 소득과세로 바꾸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한국교회 기도의 날’ 집회도 취지와 성격은 정말 좋았습니다. 저에게도 순서를 맡아달라고 하였지만 저는 아주 정중히 사양을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즘은 프레임 전쟁, 이미지 경쟁의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순수한 집회를 한다 하더라도 백만 명이 넘게 모이는 우파 집회 안에 둘러싸인 채 기도회를 하면 한국교회 전체가 특정한 정파 라인에 선 것처럼 이미지 소비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저도 그분들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아니, 제가 그 집회를 주도해야 할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큰 구도를 보고 더 광대한 그림을 그리며 여야와 좌우를 소통하는 지도력을 쌓기 위해서 집회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성경적 본질을 위해서는 욕먹을 일을 혼자 다 맡아서 용기있게 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날만 아니었으면 제가 앞장섰을 것입니다. 저의 예견대로 정말 순수한 기도집회였지만 많은 언론과 유튜브에서 정파적 집회의 한 부류로 평가를 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기도의 날의 집회는 어느 정파 라인에 서서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시대를 염려하고 시국을 염려하는 기독교인들의 순정성으로 기도집회를 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성경의 순수한 가치나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라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보수적 라인은 어느 정파 라인에 소속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 말씀 안에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특정 정파 라인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 신념과 가치를 위해서 집회를 하고 기도회를 하는 것이죠. 어떻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한국교회도 연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얼마 전 청와대 어느 수석에게도 “현 정권이 너무 사회주의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냐. 정말 잘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플랫폼 정신, 나눔과 공유에는 당연히 앞장서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남북평화나 나눔, 공유의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박수를 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베네수엘라처럼 포퓰리즘으로 가면 안 됩니다. 북유럽도 기독교 사회주의로 출발했지만 네오막시즘적 통치와 문화가 편만하게 되어 버려있지 않습니까? 무신론적 사회주의는 반드시 독재정권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사도행전 2장에서도 사회주의적 평등의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지만, 거기에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사랑과 나눔, 평등 사회야 좋은, 거룩한 사회주의죠.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네오 막시즘적 사회주의는 교회를 죽이고 더 무서운 독재정권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현 정권이 잘못하면 바른 권고를 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고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크리스천 국회의원들과 각료들을 권면하고 설득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교계 지도자가 과격한 집회에 앞장서는 것을 반대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가 먼저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의협심도 중요하지만 전략을 갖고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차제에 한국교회가 어느 정파와 함께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우리의 소리를 순수하게 전달하는, 그러면서도 대표성이 있는 기도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느 정파나 라인에 서 있지 않다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며 현 정부도 비판하고, 희망을 주지 못한 야당도 비판을 하며 그러면서 대안과 희망을 제시하고 화합과 소통을 잇게 하는 기도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칫하면 어느 정파에 휩쓸리고 매몰되는 부정적 이미지 소모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가 교회 생태계를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정치인들은 이념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적 가치라는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동성애차별금지법과 종교인과세 또 NAP 제정 때 우리의 목소리를 잘 반영해주고 욕을 먹으면서까지도 도와주신 김진표 의원님을 비롯한 여당의 여러 크리스천 정치인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밤은 금요철야기도회가 있는 밤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0-0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불 꺼진 방에서의 사색
    저는 지난 월요일 저녁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단독후보가 되어서 무투표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수많은 꽃다발을 준비하여 가져왔지만 저는 꽃다발을 받는 것조차도 쑥스럽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 꽃다발을 다른 분들에게 드리도록 했습니다. 저녁 늦게야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일정 때문에 수면유도제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몽롱하기만하지 바로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날 있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지금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 주님 때문에 행복한가, 아니면 부총회장에 당선이 되어서 기쁜가. 아니, 내가 부총회장 자리에 집착해 온 것은 아닌가. 나의 행동의 원과 영향력의 지경으로 볼 때는 어쩌면 작은 자리일 수도 있는데...” 몽롱한 상태에서 호텔 앞에서 보았던 많은 내국인과 외국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다들 바쁘고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바삐 살아가는가. 그리고 지금은 호텔에서 잠들어 있을까. 아님 나처럼 상념에 잠겨 있을까?” 불 꺼진 방 몽롱한 상태에서 상념에 잠기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완전히 강행군이었습니다. 저는 총회에 20년 넘게 참석을 해 왔지만 한 번도 개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오직 목회밖에 몰랐기 때문에 총회 중에도 교회에 무슨 일이 있거나, 특별 심방이 있으면 바로 달려왔습니다. 또 어떤 때는 몸이 너무 좋지 않아 병원 검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도저히 좀이 쑤셔서 끝까지 못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꼼짝 없이 부총회장석에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천 수백 명이 저를 지켜보고 있고, 제가 땡땡이를 치지는 않나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편한 의자가 아니라 딱딱한 의자였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 앞에서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목요일 저녁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실제로 수요일 오전에는 얼굴이 붓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리에 앉아서 쭉 보니까 우리 총회가 너무 이너서클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떻게든지 반기독교 세력을 대응하고 차단하며 한국교회를 세울 것인가 하는 미래적이고 발전적인 내용보다는 내부의 기득권이나 주도권 경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총회니까 내부 살림을 잘하고 내적인 교통질서를 정리해야죠. 그러나 너무 이너서클화 되어 있고 우리만의 카르텔을 세우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앞자리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내년 총회는 너무 이슈화 되고 논쟁하는 부분을 피하고 총대들의 의식을 전환하면서 어떻게든지 총회를 세우고 한국교회를 세우는 정책적인 총회를 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그런데도 제가 끝까지 앉아 있을 수 있었고 총회의 장내가 싸늘하게 되는 위기의 순간에 사회석에 서서 지혜롭고 슬기롭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순발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까지 쌓아온 저의 내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요일 밤도 임원회가 늦게 끝나 한 시가 넘어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불을 끈 상태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았습니다. 강남의 수많은 차 소리가 들리고 어떤 사람은 뒷골목을 비틀거리 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또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 저 사람은 만취해 있을까? 행복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인생의 갖은 비애를 안고 걸어가고 있을까?” 창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워 지나온 저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삶은 오직 원 웨이(One way), 목양일념과 킹덤빌더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만일 제가 부총회장 그리고 총회장, 그것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저의 인내는 물거품에 불과하고 너무 허무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다짐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오로지 목양 일념과 킹덤빌더로 살아가리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와 사명만큼 달려가리라.” 제 귀에 는 벌써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저의 인생도 언젠가는 저 낙엽처럼 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길, 원 웨이를 걸어갈 것입니다. 심장이 뛰는 한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불 꺼진 방에서의 사색이 저를 더욱 저 되게 하고 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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