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칼럼
Home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실시간뉴스

실시간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기사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가을꽃 당신
    당신 계신 곳 찾아가는 길가에 코스모스 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갑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이름 모를 가을꽃들도 고개를 살랑이며 저를 반겨주었어요. 태풍이 쓸고 갔기 때문인지 어떤 꽃들은 허리를 숙인 채 반겨주었지요. 살아생전 당신께서는 저에게 습관처럼 말씀하셨죠. 너무 뻥이 심하긴 하셨지만요. “소목사님은 50년, 1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이영수 목사님을 오래 모셨는데 소목사님의 정치력은 이영수 목사님을 능가할 수 있고 박종삼 목사님을 빼닮아 진정성과 간절함이 있어서 금방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버려요. 또한 정규오 목사님의 신학과 사상을 이어 받아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니 소목사님은 앞으로 우리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를 능히 회복시키고 세워나갈 겁니다. 그러니 빨리 총회장부터 되어야 해요.” 이런 당신의 말씀에 저는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었지요. “장로님,저는 그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작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당신을 ‘형님 장로님’이라고 불렀지요. 그러나 장로님께서는 다른 목사님들에게는 격의 없이 대하기도 하였지만 저에게는 가깝고도 멀며 멀고도 가까운 사람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아! 박정하 장로님,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고 그런 마음도 보이지 않았지만 저를 이른 나이에 총회장이 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셨습니까? 한사코 저는 아니라고, 정말 그러시면 다른 교단으로 가버리겠다고까지 하였지만 그때마다 저에게 찾아오셔서 손을 잡아주시고 이렇게 권면해 주셨지요. “소목사님은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부르짖어왔던 한국교회 생태계 보호와 공교회 사역을 반드시 하셔야지요. 이런 한국교회 위기의 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소목사님에게 눈물겨운 연단을 시켜주셨잖아요.” 박정하 장로님! 제가 이른 나이에 부총회장이 된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이제 장로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부총회장이 되어 이렇게 장로님 묘소에 찾아왔습니다. 지난 겨울에 왔을 땐 잔디가 잠들어 있더니 지금은 파릇파릇 자라있네요. 방금 전까지 내린 빗방울이 잔디에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무덤 안에 누워 계신 장로님께서 갑자기 일어나 나오실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여전히 당신께서는 흙 속에 묻혀 계십니다. 저는 장로님께 말할 수 있지만 장로님은 저에게 뭐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벨이 죽었으나 믿음으로는 말하는 것처럼 장로님도 믿음으로 말을 하실 수 있겠지요. 아니 저 영원한 천국에서 제가 부총회장이 되어 제일 먼저 장로님 묘소 앞에 와서 꽃다발을 헌화하며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시겠지요. 저를 눈물겹게 사랑해 주셨던 장로님, 당신의 묘소 앞에 부총회장의 이름으로 꽃다발을 헌화해 드립니다. 장로님! 하늘나라에서 기뻐해 주십시오. 저는 앞으로 총회장이 되더라도, 바삐 행사나 쫓아다니는 총회장은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총회의 정책을 세우고 비전을 만들어 앞으로 50년, 100년의 나갈 길을 열어나가겠습니다. 아니,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반드시 한국교회를 세우며 지키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장로님의 영혼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실 겁니다. “네가 세상에 사는 동안 내 종 소목사의 손을 잡아주기를 잘했지. 소목사를 일으켜주고 세워줬던 일들, 네가 정말 잘했던 거야.” 장로님!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총회를 섬기고 한국교회를 세워나갈 것입니다. 비가 개인지 얼마 되지 않는데 제가 헌화한 국화꽃 주변에 노란 나비가 춤을 추며 다니고 있네요. 너울너울 춤추며 다니는 노란 나비 한 마리도 하나님이 보내주셨음을 믿습니다. 내년 봄에는 장로님의 묘소 주변에 봄꽃들이 많이 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꽃을 피우는 건 꿈꾸는 나비임을 믿기에 각종 나비들이 장로님 묘소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장로님의 묘소 앞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부활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그런데도 가을 꽃잎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며 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당신 살아생전의 얼굴이 비에 젖은 가을꽃의 모습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0-06
  • [소강석 목사] 대한민국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기도
    본고는 소강석 목사가 지난 10월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저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참 가슴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정치가 너무 세 대결로 가지 않는가하기 때문이죠. 정치가 국회 정치보다는 광장 정치로 나가면서 몇 년 전 촛불 정치를 연상하게 됩니다.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요. 어쨌든 발단은 조국 장관 임명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법개혁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조국 임명으로 인해 국민을 완전히 둘로 갈라놓는 것은 정부와 여당, 청와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현 정권은 우리나라를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추석 때 북유럽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북유럽이 처음부터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그들이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네오 막시즘 사상에 기초한 사회주의를 이루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국가를 위한 종교 서비스 기관으로 전락되어 버렸어요.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무신론적 사회주의 성향으로 끌고가려는 움직임을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이럴 때 야당이 견제를 잘해주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야당 역시 반대와 저항만 있을 뿐이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야당 역시 대안과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기독교 17개 광역시도 연합회에서도 ‘한국교회 기도의 날’이라는 집회를 가졌습니다. 사실 17개 광역시도 기독교연합회는 제가 한 동안 섬겼고 핸드링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17개 광역시도 기독교연합회가 박근혜 정부 시절, 종교 소득과세를 종교인 소득과세로 바꾸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한국교회 기도의 날’ 집회도 취지와 성격은 정말 좋았습니다. 저에게도 순서를 맡아달라고 하였지만 저는 아주 정중히 사양을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즘은 프레임 전쟁, 이미지 경쟁의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순수한 집회를 한다 하더라도 백만 명이 넘게 모이는 우파 집회 안에 둘러싸인 채 기도회를 하면 한국교회 전체가 특정한 정파 라인에 선 것처럼 이미지 소비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저도 그분들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아니, 제가 그 집회를 주도해야 할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큰 구도를 보고 더 광대한 그림을 그리며 여야와 좌우를 소통하는 지도력을 쌓기 위해서 집회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성경적 본질을 위해서는 욕먹을 일을 혼자 다 맡아서 용기있게 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날만 아니었으면 제가 앞장섰을 것입니다. 저의 예견대로 정말 순수한 기도집회였지만 많은 언론과 유튜브에서 정파적 집회의 한 부류로 평가를 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기도의 날의 집회는 어느 정파 라인에 서서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시대를 염려하고 시국을 염려하는 기독교인들의 순정성으로 기도집회를 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성경의 순수한 가치나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라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보수적 라인은 어느 정파 라인에 소속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 말씀 안에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특정 정파 라인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 신념과 가치를 위해서 집회를 하고 기도회를 하는 것이죠. 어떻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한국교회도 연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얼마 전 청와대 어느 수석에게도 “현 정권이 너무 사회주의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냐. 정말 잘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플랫폼 정신, 나눔과 공유에는 당연히 앞장서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남북평화나 나눔, 공유의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박수를 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베네수엘라처럼 포퓰리즘으로 가면 안 됩니다. 북유럽도 기독교 사회주의로 출발했지만 네오막시즘적 통치와 문화가 편만하게 되어 버려있지 않습니까? 무신론적 사회주의는 반드시 독재정권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사도행전 2장에서도 사회주의적 평등의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지만, 거기에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사랑과 나눔, 평등 사회야 좋은, 거룩한 사회주의죠.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네오 막시즘적 사회주의는 교회를 죽이고 더 무서운 독재정권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현 정권이 잘못하면 바른 권고를 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고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크리스천 국회의원들과 각료들을 권면하고 설득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교계 지도자가 과격한 집회에 앞장서는 것을 반대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가 먼저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의협심도 중요하지만 전략을 갖고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차제에 한국교회가 어느 정파와 함께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우리의 소리를 순수하게 전달하는, 그러면서도 대표성이 있는 기도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느 정파나 라인에 서 있지 않다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며 현 정부도 비판하고, 희망을 주지 못한 야당도 비판을 하며 그러면서 대안과 희망을 제시하고 화합과 소통을 잇게 하는 기도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칫하면 어느 정파에 휩쓸리고 매몰되는 부정적 이미지 소모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가 교회 생태계를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정치인들은 이념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적 가치라는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동성애차별금지법과 종교인과세 또 NAP 제정 때 우리의 목소리를 잘 반영해주고 욕을 먹으면서까지도 도와주신 김진표 의원님을 비롯한 여당의 여러 크리스천 정치인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밤은 금요철야기도회가 있는 밤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10-0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불 꺼진 방에서의 사색
    저는 지난 월요일 저녁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단독후보가 되어서 무투표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수많은 꽃다발을 준비하여 가져왔지만 저는 꽃다발을 받는 것조차도 쑥스럽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 꽃다발을 다른 분들에게 드리도록 했습니다. 저녁 늦게야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일정 때문에 수면유도제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몽롱하기만하지 바로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날 있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지금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 주님 때문에 행복한가, 아니면 부총회장에 당선이 되어서 기쁜가. 아니, 내가 부총회장 자리에 집착해 온 것은 아닌가. 나의 행동의 원과 영향력의 지경으로 볼 때는 어쩌면 작은 자리일 수도 있는데...” 몽롱한 상태에서 호텔 앞에서 보았던 많은 내국인과 외국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다들 바쁘고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바삐 살아가는가. 그리고 지금은 호텔에서 잠들어 있을까. 아님 나처럼 상념에 잠겨 있을까?” 불 꺼진 방 몽롱한 상태에서 상념에 잠기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완전히 강행군이었습니다. 저는 총회에 20년 넘게 참석을 해 왔지만 한 번도 개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오직 목회밖에 몰랐기 때문에 총회 중에도 교회에 무슨 일이 있거나, 특별 심방이 있으면 바로 달려왔습니다. 또 어떤 때는 몸이 너무 좋지 않아 병원 검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도저히 좀이 쑤셔서 끝까지 못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꼼짝 없이 부총회장석에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천 수백 명이 저를 지켜보고 있고, 제가 땡땡이를 치지는 않나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편한 의자가 아니라 딱딱한 의자였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 앞에서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목요일 저녁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실제로 수요일 오전에는 얼굴이 붓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리에 앉아서 쭉 보니까 우리 총회가 너무 이너서클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떻게든지 반기독교 세력을 대응하고 차단하며 한국교회를 세울 것인가 하는 미래적이고 발전적인 내용보다는 내부의 기득권이나 주도권 경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총회니까 내부 살림을 잘하고 내적인 교통질서를 정리해야죠. 그러나 너무 이너서클화 되어 있고 우리만의 카르텔을 세우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앞자리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내년 총회는 너무 이슈화 되고 논쟁하는 부분을 피하고 총대들의 의식을 전환하면서 어떻게든지 총회를 세우고 한국교회를 세우는 정책적인 총회를 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그런데도 제가 끝까지 앉아 있을 수 있었고 총회의 장내가 싸늘하게 되는 위기의 순간에 사회석에 서서 지혜롭고 슬기롭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순발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까지 쌓아온 저의 내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요일 밤도 임원회가 늦게 끝나 한 시가 넘어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불을 끈 상태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았습니다. 강남의 수많은 차 소리가 들리고 어떤 사람은 뒷골목을 비틀거리 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또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 저 사람은 만취해 있을까? 행복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인생의 갖은 비애를 안고 걸어가고 있을까?” 창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워 지나온 저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삶은 오직 원 웨이(One way), 목양일념과 킹덤빌더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만일 제가 부총회장 그리고 총회장, 그것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저의 인내는 물거품에 불과하고 너무 허무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다짐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오로지 목양 일념과 킹덤빌더로 살아가리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와 사명만큼 달려가리라.” 제 귀에 는 벌써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저의 인생도 언젠가는 저 낙엽처럼 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길, 원 웨이를 걸어갈 것입니다. 심장이 뛰는 한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불 꺼진 방에서의 사색이 저를 더욱 저 되게 하고 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2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가을에 쓰는 편지
    “코스모스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 어느새 들녘엔 갈대꽃들이 피네 / 석양 노을빛 비추는 가을 길을 걷노라면 / 문득 곁에 있어 준 그대 생각 / 사랑은 가을처럼 그리움은 갈대처럼 / 아무리 흔들어도 꺾이지 않으리 / 비바람에 어쩔 수 없이 꺾인다 해도 / 그대 향한 촛불은 끄지 않으리” 이는 제가 작사, 작곡한 ‘가을연가’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가을이 오면 습관처럼 이 노래가 흥얼거려집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의 절대존재요, 가치이며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수호와 하나님의 킹덤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성호(聖號)를 위해서라면 광장의 검투사가 되어 언어의 검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그런 일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으며 이미지 소모를 하는 것도 괘념치 않습니다. 이럴 때 저의 모습은 남자 중의 남자요, 사나이 대장부이죠. 또한 제가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할 때는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져 본 적도 없고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이지만 또 다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요. 저에게는 시적, 문학적, 예술적 감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시를 쓰거나 노래를 작곡할 때는 소년같은 감수성을 발휘합니다. 특별히 혼자 산행을 할 때는 언제 그런 야성이 있었느냐는 듯이 시적, 문학적, 예술적 감성에 젖어듭니다.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나뭇잎들과도 교감합니다. 얼마 전 태풍이 지나간 후, 산길을 걸어가다 뿌리가 땅 위까지 올라와 넓게 뻗친 나무들에게 마음속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무야, 너는 이미 알았구나. 뿌리를 땅 속 깊이만 박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뿌리를 수직으로 1미터 내리는 것보다 옆으로 10미터를 뻗는 것이 쉽기도 하고 태풍을 잘 견딜 수 있다지. 너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나봐. 그래서 너는 태풍에도 끄떡없었구나. 길을 걷다가 가로수가 넘어진 것을 봤어. 그 가수로는 옆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않고 수직으로만 내렸더구나. 그런데 너는 수직으로뿐만 아니라 옆으로도 뿌리를 뻗쳤으니 대단하구나.” 제가 이렇게 나무들과, 아니 풀잎들과도 교감하며 산길을 걷다가 핸드폰으로 좋은 노래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찬양을 듣기도 하고 직접 제가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 후에 책상으로 돌아와 숲속에서의 상념을 시로 쓰기도 하고 글로 정리하기도 합니다. LG자이 뒷산을 가다보면 한성CC에서 골프 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저는 아직 골프 치는 맛을 못 보았지만 그 분들과 저를 비교해 봅니다. “저분들은 산행을 하고 있는 나보다 더 즐거울까? 나보다 더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가을편지를 씁니다. “골프를 치고 있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저만큼 행복해 하시나요? 아니, 저 광화문과 충무로에서 아니, 저 강남역과 서현역에서 어디론가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대들이여,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무엇 때문에 그리도 분주하십니까? 그런데도 당신의 얼굴은 어찌 창백한가요? 또 회색빛 콘크리트 아파트 속에 계신 당신의 마음도 텅 빈 공허와 공백뿐인가요” 저는 갑바도기아의 닛사의 그레고리처럼 산행을 하면서도 나무와 대화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면서 신비로운 자연의 숲길 속에서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초월적 명상과 영성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니 이런 만족이 어디가 있을까요? 이런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요. 그래서 저는 이 시대를 사는 모든 분들에게 가을 사랑의 연서를 써 봅니다. “같은 가을하늘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여, 그대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나요? 가을이 오는 문턱에서 삶의 근원과 원형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니,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영혼의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고 있나요? 가을이 오면 우울한 이들이여, 꽃이 피지 않는 길 위를 걸으며 어디론가 방황하고 싶은 사람들이여, 예수 믿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교회로 돌아오세요. 은혜로운 교회는 아름다운 숲과 같고 신비로운 원시림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아름다운 숲과 같은 삶을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가 주님과 함께 신비로운 숲길을 걸으며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을을 사랑하는 이들이여, 가을꽃과 가을숲, 낙엽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여.”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22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낯설고 어색한 은혜
    부총회장 단독 후보 등록을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흘러 정견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경쟁후보가 있으면 간절함이 가득하고 더 긴장할 텐데 저는 긴장대신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그런 정견발표 하는 자리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상대 후보도 없고 단독 후보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정견발표에 임하였으니 얼마나 낯설고 어색한 자리이겠습니까? 그래도 시간에 맞춰 강남에 있는 충현교회로 갔습니다. 맨 먼저 총회장 후보께서 정견발표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형식이죠. 작년에 이미 부총회장 당선이 되어 올해는 자동적으로 총회장이 되지만 법적 과정과 절차에 의해서 정견발표를 하는 것입니다. 총회장 후보께서도 작년에 정견발표 하실 때는 간절함과 열정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년 정견발표의 내용을 조금 정리하거나 보완해 발표를 하신 것 같았습니다. 총회장이 되실 분이 평범한 어조로 발표하시니까 저도 오버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저도 평범한 어조로 발표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하는 부서기나 부회계 등 경쟁 상대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준비를 많이 해 오고 간절하게 발표하는지 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영상준비까지 다 해 와 가지고 정견발표를 돋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다음번에는 영상준비를 잘 해올까 하는데 몇몇 목사님들이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총회장 후보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단독 부총회장이 너무 앞서가서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다음날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내용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유창하게 잘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버벅 거려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아직도 그 자리가 낯설고 어색한 자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다른 임원 후보들은 다 총회 내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정견발표를 하는데 저의 정견발표는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세우기 위한 정견발표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보는 저의 시야와 마인드가 넓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곧 총회장이 되실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대전에서 마지막으로 발표하실 때는 목사님도 열변을 토하시죠. 그러면 저도 한 번 실력 발휘 좀 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 정견발표 때문에 북유럽 교회 그랜드 투어도 하루 늦게 가야 했습니다. 대신 이번 마지막 정견발표는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제는 저의 간절함과 진정성을 스피치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정견발표를 하는 대전중앙교회는 15년 전 개혁측과 합동측이 하나가 되었던 장소입니다. 저는 원래는 합동을 반대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유언비어를 듣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정 권사님이 합동을 하라는 응답을 받았고, 저도 이를 놓고 금식하며 기도하다 성령님의 강렬한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합동의 기치를 들고 왔을 때 중부권의 머뭇거렸던 1500교회가 다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합동 총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박수를 받으며 총회 현장으로 들어갈 때 “아, 이제야 우리가 하나가 되는구나”하는 감격에 눈물을 흘러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의 감격과 눈물을 회상하며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랬을 때 비교적 어색하지 않고 저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에토스가 담긴 정견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합동 교단에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정치 노선에 서 본 적도 없고 정치현장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상비부 가운데도 정치부, 고시부 등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총회를 섬겼고 한국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자 안팎에서 “합동교단은 소 목사를 써 먹고 버릴 것이다. 그러니 너무 희생하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는 달리 우리 교단은 저를 수용해 주고 품어주셨습니다. 아니 저를 단독 부총회장 후보의 자리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보니 그 자리가 낯설고 어색한 자리였지만 우리 교단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만들어주신 포근한 자리요 하나님이 섭리해주신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15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그때의 눈물 지금도 주소서 2
    추석만 돌아오면 가슴이 시리고 저리도록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추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화순 백암교회 개척 중 처음으로 그곳에서 추석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마을 청년들이 남루한 개척교회에 찾아와 콩쿠르대회를 하는데 기부금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먹을 양식도 떨어져 라면으로 연명을 하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죽기는 싫어서 은행 통장에 돈이 있는데 오늘 시내 나가서 돈을 찾아와 내일 줄 터이니 내일 오라고 말해버렸습니다. 당장의 체면 유지는 했지만 그들을 보내놓고 나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내일 무슨 돈으로 체면치레를 해야 할까? 쌀이 없어서 밥 못 먹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교회 전도사가 허풍을 쳤다고 소문날 것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저 자신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는지요. 그래서 천막교회 속에 들어가 그냥 맹목적으로 엎드렸습니다. 이 어린 나이에 시골 벽촌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느냐고 하는 기막힌 생각이 들어 막 울어대기만 했습니다. 무슨 눈물이 그렇게도 펑펑 쏟아지는지 아마도 서러운 인생의 눈물보가 제대로 터져버린 모양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무작정 광주시내로 나갔습니다. 누가 오란 곳도 없고 약속한 곳도 없었지만 그냥 무작정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다녔습니다. 남들은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무엇이 그리도 기뻐서 저렇게 들뜬 분위기에 있는지.... 정말 그들의 모습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점심때가 이르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해 잠시 금남로에 있는 모 은행에 들어가 지친 몸을 잠시 맡겼습니다.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은지 저마다 통장에서 돈을 찾아 가는 모습들이 정말 부럽기만 했습니다. “주여! 천국 은행의 내 통장엔 얼마나 들어 있습니까?” 이런 마음의 기도가 다시 한 번 저 자신을 초라하게 보이게 하였고 제 눈에 눈물을 핑 돌게 하였습니다. 은행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니 눈치가 보여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제 마음과 발걸음은 성령의 분명한 이끌림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곳이 제가 잘 아는 류중룡 장로님의 세무사 사무실이었습니다. 그 곳에 이르자마자 애써 태연한척 체면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저를 보시자마자 상당히 두툼한 봉투를 하나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어제 저녁부터 괜히 소전도사가 생각이 나 자꾸 염려되는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투를 하나 준비해 놓고 오전 내내 오기를 기다리셨는데 마침 제가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후에도 제가 안 오면 저에게 연락할 참이었다니... 그 말을 듣고 그 두툼한 돈 봉투를 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눈물보가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 앞에 약한 모습 보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무실을 나와 교회까지 오면서 버스 안에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창고교회의 강대상 앞에 엎드려 바닥에 눈물을 쏟아 흘렸습니다. 그런 후에야 당장 마을 청년들을 오라고 해서 당당하게 기부금을 건네주었지요. 이튿날에는 능주시장에 가서 그 눈물 어린 돈으로 선물을 잔뜩 사 가지고 와서 교인들에게 모조리 나누어 주었습니다. 추석이 오는 길목에서 오늘도 다시금 그 때의 눈물이 생각납니다. 이번 추석에도 대통령 선물이 왔는데 매년 그렇게 해왔듯이 그 선물을 류중룡 장로님께 보내 드렸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 때의 눈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처절했던 눈물의 힘이 앞으로도 저를 강하게 하고 더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제 평생에 그 때의 눈물을 잊지 않게 하소서. 배가 부르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때에도 그때의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소서. 이 눈물이 메마를 때 저의 영성과 제 목회의 불빛이 꺼지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총회와 한국교회를 섬길 때에도 이러한 눈물로 사역하게 하소서.”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15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여름 모닥불 향기를 훔치다
    속리산 비로산장에서의 하룻밤을 앞두고 가슴이 설렜습니다. 초등학교시절 소풍가는 날을 앞둔 마음과도 같았습니다. 국립공원에 계시는 우리 교회 안수집사님의 소개로 비로산장을 알게 되었는데 그곳은 걸어서 한 시간 반을 가야하는 아주 깊숙한 산장이었습니다. 저는 몇 분 장로님들과 함께 먹을 것을 싸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입이 쫙 벌어졌습니다. 아바타에 나오는 숲과 같은 신비로움, 아니 신성함마저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산장 주인의 말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온갖 고생을 하시며 혼자 산장을 다 지었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나그네가 숲의 향기를 즐기고 그 추억을 공유하며 추억을 다음 대로 이어가게 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동기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어서 따님이 산장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산장의 마당에서 몇몇 장로님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먹고 이야기 천국을 이루었습니다. 큰 나무가 하늘을 가려줘서 낮에는 천장 같은 그늘이 되어 주었고 저녁에는 촘촘한 잎사귀들에 가려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인이 피워준 모닥불 연기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산장에 모기도 없었지만 과거 여름밤의 운치를 자아내주기 위하여 모닥불을 피워준 것입니다. 모닥불과 여름 숲의 향기가 원시적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향기를 맡으며 이야기를 하니 동심천국이 될 수밖에요. 삶의 역질주를 한 재앙을 경험한 셈입니다. 그런 원시림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빼놓고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죄가 아닐 정도로 순수함 그 자체로 느껴졌습니다. 해지기 전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새벽 2시가 되고 3시가 되어도 ‘모닥불’이라는 노래처럼 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여름 숲과 모닥불의 향기를 몰래 몰래 가슴 속에 훔쳐 넣었습니다.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기 때문에 저 자신에게도 삶의 갈증이 있었나 봅니다. 아니 삶의 근원과 원형을 향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는 유곡수성(幽谷水聲), 즉 깊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고막을 씻겨주는 듯 했습니다. 또한 아직도 꺼지지 않은 모닥불 연기와 숲의 향기는 저의 영혼을 씻겨 주었고요. 아니 웬 축복인지 비까지 내렸습니다. 태어나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런 깊은 산장에서 빗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속리(俗離)의 은혜였습니다. 속리산이란, ‘마을과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입니다. 회색빛 콘크리트 도시에서 분주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때로는 광장에 가서 검을 휘두르는 검투사 같은 삶을 살아왔던 저는 속리산 같은 깊은 산을 그리워 할 수밖에요. 그래서 깊은 산은 저의 영혼의 근원, 혹은 주님의 품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며칠 밤을 더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아니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 연가’에 나오는 구절처럼 저 역시 속리산 숲속에서 폭우가 내리거나 긴급한 조난을 당하여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어왔습니다. 간절한 속리산 연가를 불렀던 것이죠. 그러나 저는 다음날 내려와야 했습니다. 내려올 때 여주인이 배웅을 나오는데 선광현 목사님이 주인을 위해 기도해드리면 좋지 않겠느냐 해서 산길에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나니 주인께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곳에 오셔서 기도해주신 것은 생전 처음이라면서 말입니다. 어린 시절 그곳에 태어나 자랐고 또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그곳을 지키며 떠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지... 그런 곳에 살면서도 더 깊은 삶의 갈증이나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 기도 속에 숲과 모닥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예수님의 향기가 그 분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는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장을 내려왔지만 마음의 발걸음은 산장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녁 내내 훔쳐 온 숲의 향기와 여름밤의 모닥불 향기가 제 마음에 남아 이런 깨달음을 주는 듯 했습니다. ‘너도 새에덴의 성도들과 함께 신앙의 추억을 공유하고 그 추억으로 대를 이어가게 하거라. 앞으로 총회와 한국교회에 순수의 시대를 열어 가거라. 아침이 되어 모닥불이 사그라진 것처럼 언젠가는 네 인생의 모닥불도 사그라지리니, 그때까지 주어진 사명의 길을 잘 달려가거라. 그리고 여름 숲 향기와 모닥불 연기보다 더 진한 예향(예수님의 향기)을 만리까지 전해야 하느니...’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02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눈물에 젖어야 설교가 빛난다
    저는 지난 주 대구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집회는 대구지역 초교파 여성 집회인데 매년 3천명 이상이 모이는 대집회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도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이번 집회는 성경강해적 설교가 아니라 시대를 깨우며 미래 한국교회를 세우기 위한 영적 각성 설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우리 자녀들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울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김부겸 전 행안부장관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분이 과거 국회의원 시절과 장관시절에 종교인과세나 동성애 문제에 대해 도와준 것을 칭찬하고 앞으로도 한국교회 생태계를 잘 지켜줄 것을 공개적으로 부탁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집회가 끝나고 나니까 저에게 항의를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동성애를 찬성하는 분이었는데 왜 반대로 설명을 했냐고요. 그러나 이 분들이 잘 모르고 오해를 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김 전 장관은 2017년도에 보좌관의 실수로 ‘혐오차별금지법’을 발의한 부분이 있었는데 저 뿐만 아니라 대구지역 교계의 항의를 받고 바로 철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발의를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철회한 기사까지 찾아서 잘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녁집회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주최측에서 “오늘 저녁에는 그 말씀을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단에 올라가니까 또 제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와서 더 적극적으로 시대 각성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중국의 온주가 어떻게 다음 세대를 지켰는가를 이야기하고 영국과 미국교회가 어떻게 반기독교 세력의 사상전, 문화전의 공격에 넘어갔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교회 생태계를 잘 지켜내기 위해서 기독교 정치인들을 키울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설득을 하고 격려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김 전 장관에 대한 언급을 다시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너무 편협한 생각이나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한국교회의 미래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부터 울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실제로 뜨거운 눈물이 제 가슴과 눈동자를 촉촉이 적시며 저의 에토스(진정성)를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항의를 했던 분들도 감동을 받고 저에게 “목사님, 정말 잘 하셨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쫓겨나 겨울 눈보라 속을 걸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이라 양복이 없어 설교를 할 수 없을 때도 예배실 바닥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가락동에서 개척을 한 후에도 토요일이면 설교연습을 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억센 전라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원고를 교정하고 네다섯 번 이상 강단에 서서 음독으로 연습했습니다. 내일 누가 올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눈물을 흘리며 설교연습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지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눈물로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오죽하면 토요일 저녁에 빈 의자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면서 기도를 하였겠습니까? “주님, 이 빈 의자에 내일 사람을 앉혀 주세요. 지나가는 거지가 되었든, 넝마주이가 되었든 사람을 앉혀 주세요.” 그 눈물은 결코 비관과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눈물은 도전과 희망의 눈물이었으며 제 영혼을 살리는 꽃씨가 되고, 영혼을 사르는 불덩이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 땅의 불덩이를 넘어 절망과 어둠의 밤을 밝히는 꿈의 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마음 아픈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편협한 사고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편협한 사람들을 보면 또 눈물이 나지요.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아프고 편협한 시대를 위해 울고, 미래의 역사를 바라보며 울고 또 운다면 한국교회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는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 역시 매주 눈물을 담아 설교를 준비하고 눈물의 에토스를 전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8-2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기억의 강을 걷다
    자박자박 빗소리를 따라 잠시 오크밸리 교회 쪽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수련회 이튿날, 아침부터 내리는 비였지만 왠지 언짢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빗속에서 버스도 달리고 기차도 달리며 KTX도 비 사이를 헤쳐 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비가 오면 저는 까닭 없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비 구경을 하느라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지금은 드라이를 한 머리 때문에 우산을 쓰고 빗길을 걸어야 하지만요. 지난 주간엔가도 혼자 LG자이 뒷산을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중산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를 맞으며 길을 걷노라면 저는 항상 기억의 강을 건넙니다. 이번에는 가락동 개척 교회 시절 강원도 하진부에서 있었던 여름수련회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토록 개를 잡거나 소주를 마시는 일이 없도록 신신당부하였건만, 남전도회 회원들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게 준비를 했느냐면, 개고기 상에 소주를 사이다병에 넣어 놓고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만 현재는 장로인 김창환 집사님이 저에게 사이다를 따라 준다는 게 모르고 소주를 따라 주어서 들통이 난 것이죠. 젊은 혈기에 제가 어떻게 발끈하였겠습니까? 그러자 그날 밤, 김창환 집사님은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시고 저에게 와서 온갖 추태를 부리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결국은 옥수수밭으로 가서 말할 수 없는 해프닝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과거 새에덴교회 여름수련회는 그런 아픔도 있었습니다. 지나온 길마다 엉겅퀴와 찔레덩굴이 저의 두 발과 다리를 얼마나 찔러 상하게 하였는지 모르죠. 그런 엉겅퀴와 찔레숲을 지나 오늘의 장년여름수련회라는 화려한 꽃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장년여름수련회는 규모와 은혜의 질적 차원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수련회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데, 제가 봐도 대단한 수련회였습니다. 매일 시간마다 자리가 없어서 의자를 더 가져다가 배치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회비만 가지고는 운영이 불가능한데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외부에서 온 몇몇 분들도 수련회의 규모와 영적 분위기를 보고 감탄에 감탄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새에덴교회 장년여름수련회는 우리 교회 전통과 문화로 자리매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수련회 문화의 모델로 제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다음의 교회세대에 물려줄 거룩한 유산이 되어줄 것입니다. 목요일 오후, 저는 손녀 현주와 함께 그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화요일 오전은 비에 젖은 꽃잎들이 슬퍼하는 모습처럼 보였는데, 목요일 오후는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꽃잎들이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오늘의 이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나기까지는 목마른 고통도 이겨야 했고, 비바람에 흔들리는 아픔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 장년여름수련회가 그랬지요. 지금은 김종대 장로님을 비롯하여 200명의 준비위원들과 100여명의 교역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고 빈틈없이 준비를 하고 있지만, 옛날 여름수련회는 제가 다 북 치고 장구를 쳐야 했습니다. 저렇게 화려하게 피어난 꽃잎들도 아픈 기억이 있고 슬픈 추억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오늘의 장엄하고 은혜가 넘치는 장년여름수련회에도 찔레와 엉겅퀴의 가시들로 찢겨진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렇고 보면 아픈 기억과 화려한 축제 사이의 경계는 성난 바다처럼 거칠고 드넓은 것 같습니다. 그 날 비가 오는데도 매미 한 마리가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 매미 소리는 저의 귓전에 이런 메시지를 던져 주는 듯 합니다.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하리라, 성을 쌓으면 정녕 망하리라...” 이 말은 징기스칸이 한 말이죠. 징기스칸이 가는 곳마다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했다면 어찌 그 넓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 역시 여기서 안주하면 안 되지요. 끝없는 도전과 응전 속에서 더 나은 수련회, 더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수련회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성이 아닌 하나님의 성을 쌓고 세상을 바꾸는 홀리 체인저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저는 이따금씩 비가 올 때 마다 기억의 강을 걸을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8-1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불면, 도전과 응전의 밤
    지난 월요일 저녁은 1시 반 가까이에 잠이 든 것 같은데 3시 반에 잠이 깨버렸습니다. 아무리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중요한 약속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성경을 보다 새벽기도를 인도하러 나갔습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비슷했습니다. 요즘은 이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불면의 밤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소풍 가기 전날 밤 너무 가슴이 설레어 잠 못 이루었고, 글짓기 대회나 웅변대회를 앞두고도 밤새 뒤척이곤 하였지요. 또 여름밤엔 유난히도 은은한 달빛에 마음을 빼앗겨 가슴 설레는 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서 별빛까지도 유난히 반짝이던 밤에, 지붕에 덮인 하얀 박꽃이 그 빛들을 되받아내고 있는 정경을 보며 상념에 잠겼지요. 신학교 시절에는 기도원에서 철야기도를 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저녁 내내 밤이슬을 맞으며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마침내 안개 자욱한 기이한 아침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온 무등산을 운해로 만들어버린 그 서정적이고 영적인 풍광 앞에 저는 내달리는 영혼의 감성을 발현하며 더 목청껏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저의 영적 갈망이 안개 덮인 무등산에서 더 강렬하게 발휘된 것입니다. 세월은 저를 무드셀라 증후군의 기억 속에 가둔 채 그렇게 흐르고 흘렀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땐 저의 서정성 때문에 불면의 밤을 경험했고, 젊은 시절에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 때문에 밤을 많이 새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교회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잠을 못 이룹니다. 제가 한국교회 연합과 생태계 복원, 그리고 부흥운동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회개운동과 개혁운동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여전히 혼돈과 공허의 블랙홀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정치, 문화, 사회에서는 기독교 패싱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맴돌 때는 저는 잠을 못 이룹니다. “아, 왜 이 시대에 나는 목회를 하고 있는 걸까? 더구나 이 시대 한국교회 지도자로 부름을 받고 있단 말인가? 그냥 성장주의적 개교회 목회에 심취할 때가 행복했었는데...” 물론 저는 불면증 환자는 아닙니다. 모처럼 교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할 때는 꿀잠에 빠지거든요. 아니, 해외에 나가면 완전히 꿈나라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현실을 바라보면 불면과 싸워야 한단 말이죠. 다행스럽게도 저는 총회 선거에 단독후보로 출마를 하게 되어 선거운동에 관한 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죠. 그렇지만 교계 현실을 바라보면 마음이 심란하기만 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뛰어도 별로 이루어진 일도 없고 허탈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제가 부총회장과 총회장이 되어 총회와 한국교회를 섬기게 되면 뭔가 달라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해 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난세에 하나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셔서 공적 직분을 주시고 그 공적 직분을 통하여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세우실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도 가져봅니다. 그런 설렘 때문에 잠 못이루는 밤을 지낼 때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 선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단을 개혁하고 한국교회를 세울 수 있는가를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만나게 되면 그것이 빈 무덤을 쌓는 허망한 만남이 될 수 있지만 진심과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시린 가슴을 감싸주고 교회까지 세우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어떤 만남은 서로의 아픈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 정도로 가슴이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런 아픔 속에서 신뢰와 존경과 사랑의 싹이 트기도 하구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불면의 밤들이 오늘의 저를 성숙시켜 온 것 같습니다. 늘 걱정 없이 밥만 잘 먹고 잠을 자왔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쯤 교계의 적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 없는 문화와 역사는 사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불면의 밤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기회였고 더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8-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