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칼럼
Home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실시간뉴스

실시간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기사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고마워, 심장!
    목요일 점심, 서울의 한 식당에서 호산나선교회 임원회 후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항간에 어떤 사람이 호산나선교회와 저를 폄훼하고 왜곡된 글을 써서 퍼 날랐는데 나라를 염려하는 보수의 한 무명 논객이 썼다 생각하고 일절 대응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별히 그 자리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던 정남식 박사님도 함께 자리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심장에 관한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권위자라고 합니다. 정박사님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원장을 하시다가 정년퇴임을 하신 후 서초동에 필메디스의원이라는 심장전문병원을 오픈하셨습니다. 제가 3년 전에 주일날 갑자기 심장이 조여와서 급하게 병원에 간 적이 있잖아요. 가서 CT를 찍어보니까 심장으로 연결된 세 개의 관상동맥 중에 두개의 혈관이 하나는 50%, 또 하나는 70%가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심장 조형술을 해 보니까 스탠트를 박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별한 이상 증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다시 한 번 정밀 조사를 해봤더니 무리를 하면 혈관 경련이나 경미한 협심증 증세가 있을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바빠서 병원에 못 갔는데, 그 날 아침에 일찍 정남식 박사님께 특별진료를 받으러 간 것입니다. 저는 3시간에 걸쳐서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심장은 튼튼하였습니다. 다만 동맥혈관에 칼슘이 약간 끼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정원장님께서 운동검사를 하는 곳까지 오셔서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산나선교회 임원들이 모인 곳까지 오셔서 식사 하는 자리까지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건강과 심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죠. 그랬더니 박종구 목사님께서 “왜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하느냐, 우리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동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창가에 보이는 가로수를 보십시오. 저 공원에 보이는 포플러나무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서 함께 식사를 할 뿐만 아니라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저 나무와 잎사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가수 배호는 ‘마지막 잎새’라는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였지만 우리는 다 중년을 넘겼지 않습니까? 저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이 시리도록 푸릅니까? 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푸른 나뭇잎과 풀잎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심장이 우리 안에 뛰고 허파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랬더니 박종구 목사님이 한 술 더 떠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낭송하시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지금까지 숨차게 달려온 소강석목사, 당신이 그렇게 아름답소.)” 식사를 마치고 김찬호 장로님 장인 어르신인 최기주 장로님이 소천을 하셔서 밀양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 안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대한민국 심장 최고의 권위자인 정남식 박사님으로부터 진료를 받는 것도 감사하거니와, 여기까지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심장을 뛰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심장을 향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만큼 젊은 날부터 애끓는 삶을 살아온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20대에는 백암교회를 개척하고 새에덴교회를 개척 하느라 가슴을 조였고, 30~40대에는 우리 교회 부흥과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가슴을 애태웠죠. 또 40대 중반부터는 한국교회 연합과 생태계 회복을 위하여 애를 끓였습니다. 소쩍새가 우는 밤에 저도 긴긴밤을 함께 애를 태웠지요. 그렇게 애태운 나날들이 연속되었는데 저의 심장이 이토록 뛰어주었고 지금도 지치지 않고 뛰어주는 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심장과 함께 하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 심장! 여태까지 쉬지 않고 뛰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부디,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할 때까지 힘들더라도 뛰고 뛰어주기를 부탁해요.” 그러면서 저는 차안에서 글을 쓰고 원고를 교정하며 밀양까지 갔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28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비에 젖은 꽃잎처럼
    그 날 오전은 바람이 살랑거렸습니다. 한 여름인데도 조금씩 부는 바람 때문에 아주 덥지는 않았습니다. 하늘은 적당한 구름으로 태양을 가려주었습니다. 마치 태양도 저처럼 수줍음을 타는 듯 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니 바람에 풀잎과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월요일 오전 11시 쯤 저는 우리교단 총회 회관에 겸연쩍은 모습으로 도착했습니다. 우리 교회 서광수, 송원중, 김문기 장로님과 저를 사랑하는 몇 목사님들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어떤 기자는 1층까지 나와서 저를 환영해 주며 저에게 귀띔해 주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 전례 없이 최고 많은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만큼 소 목사님께 관심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이라 쑥스럽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마음이 조금 상기되기도 했습니다. 4층으로 올라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계 기자들이 저를 에워쌌습니다. 정말 어색하기도 하고 얼떨떨하였습니다. 지난주에는 경기남노회에서 부총회장 단독후보로 추대되자 서광수 장로님이 꽃다발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저는 서 장로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지요. “장로님, 이런 자리에서 꽃다발을 가져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서 그 꽃다발을 강단에다가 놔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임원 추대를 받은 분들이 다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그만큼 저는 아직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총회 총무와 직원이 저의 서류를 확인하는 동안 옆에 앉아 기다리는 자리가 좀 불편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스쳐지나갔습니다. “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이 백 수십 개가 된다고 하는데, 이렇게 교단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총회장을 하려고 하는 교권 싸움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러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내 모습 자체가 혹여라도 교권의 이미지로 비춰지지 않을까. 나는 정말 그것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정조절을 하고 표정관리를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식사 후 돌아오는 길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총회회관으로 갈 때는 길가의 꽃들이 방긋방긋 웃는 듯 흔들렸는데 비가 쏟아지니까 비에 흠뻑 젖어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문득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비에 젖은 길가의 꽃들이 유난히도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저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아, 내가 꼭 이 길을 고집했어야만 했는가. 나도 양보할 수 있었는데, 아니 양보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몇 분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 분들이 더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이 길은 나의 교권의 욕망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후 지금 이 순간까지 저는 오직 예수, 오직 사명뿐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에는 순교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었지요. 그러다가 교회를 개척한 이후에는 오직 목양 일념과 교회 부흥뿐이었습니다. 저는 교권의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교회 생태계 사역에 눈을 떴습니다. 그 후로 저는 불필요한 이미지 소모를 하면서도 한국교회 공적사역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부총회장 단독후보로 등록하게까지 되었네요.”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 정문에 피어 있는 무궁화 꽃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저 또한 비에 젖은 꽃잎이 되어보고 싶었습니다. 비를 맞고 끝없이 산녘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제가 총회장이 되고, 그 이상의 위치에서 한국교회를 섬긴다 하더라도 저는 항상 비 맞은 꽃잎이 될 것입니다. 비에 젖은 꽃잎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것입니다. 꽃잎에 달려 있는 물방울은 저녁 늦게까지 저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마르지 않는 한 저의 초심은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27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그 섬에 가고 싶다
    저는 사람을 좋아하는 목사입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도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교제하기를 좋아하는 아주 사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제가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저희 집 마루에만 앉아 있어도 친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끄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는 외딴 섬에 가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무인도 같은 곳에 가서 사색을 하고 명상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무인도는 그만두고라도 깊은 산속에 가서 천막을 치고 일주일이라도 지내며 깊은 묵상을 하면서 좋은 글과 시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끌었던 목사이지만 군중으로 심신이 지쳤다고 할까요? 그래서 사람을 떠나 외딴섬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반기 교역자수련회 중 둘째 날 안주봉 장로님이 개발계획을 하고 있는 무인도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무인도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습니다. 가보니 정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습니다. 물론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지만 예전에 펜션을 지어놓고 사람이 산 흔적이 남아 있어서 조금은 실망을 하였습니다. 저는 펜션도 없고 어느 누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런 무인도를 상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니까 산길에 개망초꽃도 피고 과꽃과 나리꽃도 피어 있는 것입니다. 개망초꽃은 원산지가 캐나다이고 주로 철도 가에서 피었던 꽃인데, 어떻게 이런 무인도에까지 피어났을까 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누가 심었을까, 그 씨앗이 펜션을 지을때 목재와 함께 왔을까...’ 더 신기한 것은 그곳에 산딸기가 있는 것입니다. 산딸기는 거의 재배를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외딴섬에 어떻게 산딸기가 심겨져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더 신비롭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산딸기를 따 먹으니까 이분 저분들이 더 따다 주었습니다. 무인도에서 야생의 열매요 자연의 상징인 산딸기를 따 먹는다는 것이 너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문득 산딸기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깊고 깊은 숲 속 잎새 뒤에 숨어 있는 산딸기 딸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갑니다.” 그런데 저는 그냥 두지 않고 따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사색에 잠겨 보았습니다. ‘아, 이곳에서 숙식만 할 수 있다면 단 며칠만이라도 와서 살고 싶다. 아니, 정말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외딴 무인도에서 단 일주일이라도 자연인으로 살아보고 싶다. 적막한 해변에 텐트를 치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노을이 지고 밤이 깊어가고 별들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한때 미국 사회에서 40~50대 남자들이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후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사막이나 산속에 은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들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쳤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은둔을 경험하고 싶을 뿐이지, 다시 돌아와서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과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저는 교역자 수련회를 인도해야 할 시간에 서울로 장례식 조문을 다녀왔고 이어서 교역자들에게 계속 강의를 하며 사역 논의를 하였습니다. 교역자 수련회 기간에도 그만큼 바쁘게 살았다는 방증이지요.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교단의 총회장이 되면 더 바빠질 텐데, 이렇게라도 잠시나마 무인도에 가서 산딸기를 따 먹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저는 바쁠수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수록, 언제나 제 마음 속의 무인도를 꿈꾸고 그 섬에 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살 것입니다. 오직 주님과만 동행하고 주님만 바라보며 걷는 그 무인도의 해변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일정 가운데서라도, 잠시 무인도를 가고 산딸기를 따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황홀한 삶의 축복인지 모릅니다. 다시 꿈속에서라도, 가보고 싶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의 축복이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1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살아온 은혜, 살아갈 은혜
    2년 전, 저는 두 번째 성대 수술을 하였습니다. 수술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지난날의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주일 낮, 주일 밤, 수요일, 철야기도, 신년성회, 여름수련회 등에서 뿜어낸 사자후의 설교, 그리고 대부분의 원고를 흔들리는 건조한 차안에서, 또는 동굴 같이 답답한 제 방에서 구두로 불러주던 순간들... 게다가 외부집회, 특히 수만, 수십만 앞에서 화염을 내뿜은 야성의 설교들을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목이 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유럽 집회 때 설교하던 중 성대가 터져 피를 토했는데도 계속 집회를 하였고, 한국에 와서도 반동성애 국제대회에서 사자후를 토해내다가 수술을 해야 할 지경까지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윽고 수술실로 들어갔을 때, 싸늘하고 음산한 공기가 수술실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잠시 주님께 속삭였습니다. “주님, 저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겠지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저의 가족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 절대로 두렵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미련 없이 떠나겠지만 아직은 제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겠지요.” 드디어 마취약이 들어가고 잠에 빠졌지만 제 의식은 살아서 잠꼬대를 하였습니다. “그래, 나는 주님의 소명에 혼을 바치고 산거야. 나는 주님 앞에 절규의 산제사를 드리는 투혼의 삶을 산거야. 맞아. 그랬어. 그런 거야….” 그때 간호사 선생님이 저를 흔들어대며 깨웠습니다. 수술을 잘 마치고 깨어난 순간, 다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고 새로움이었습니다.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풀잎들이 신비하게 느껴졌고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수술을 잘 마친 후, 저는 변함없이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수술한 지 3주 만에 1시간 30분짜리 설교를 8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련회를 마치고 난후 병원에 가서 보니까 다행히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분초를 다투며 살았지요. 특별히 그 해에는 종교인과세를 대처하는 데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목이 컬컬하고 아플 때는 또 겁이 나서 병원에 가보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술한 후 1주년을 맞았을 때 우리 장로님들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시간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강단에서 장로님들께 고맙다고 인사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2주년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성대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해서 이번에는 꼭 장로님들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식사를 꼭 대접하지 않아도 되지만 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노심초사 기도해 주시고 섬겨주셨던 성도들 모두를 대접하고 싶지만, 저를 측근에서 도와주는 분들과 장로님들께라도 꼭 마음을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저녁에 기쁨의 식탁교제를 나눴습니다. 저는 “2년을 무탈하게 하신 하나님, 20년 이상 성대를 잘 쓰게 해 주소서”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밥을 먹었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제가 성대 수술을 마치고 말을 못 할 때 주일예배 강단에 올라가 ‘오빠 생각’이라는 노래를 하모니카로 불고, 한복을 입고 벙어리 춤을 추기도 한 기억 말입니다. 가끔 그 영상을 보면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때는 저를 염려하는 성도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또한 주님이 저를 붙들어 주셔서 여전히 건재하며 언제나 성도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천국 가는 그날까지 건재한 모습으로 성도들과 함께 사명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으로 춤을 춘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아련한 황홀함이 밀려왔습니다. 어느덧 성대 수술 2주년이 되었습니다. 더욱더 살아온 은혜, 살아갈 은혜를 붙잡고 살아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자는 은혜자끼리 뭉치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은혜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기도 때문에 성대도 건재하고 앞으로도 사역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크리스텐덤, 전성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명자요,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08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이야기 소년과 라디오
    며칠 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이자 우리 교회 연구목사님이신 신성욱 교수님의 설교학 강의에 대한 기사가 국민일보에 보도 되었습니다. 신교수님은 매주 저의 주일설교 원고를 미리 검토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지금까지 설교가 주로 명제적이고 선포적이며 가르치는 설교였다면 현대사회는 ‘원포인트의 내러티브 강해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원고를 준비할 때부터 드라마틱한 구성을 하고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설교의 테크닉은 배우고 훈련을 받아서 하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체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의 경험을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로부터 무수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유년시절의 보물창고와 같았습니다. 그 속에는 아무리 꺼내고 꺼내어도 사라지지 않는 수많은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제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이야기는 황홀한 상상의 세계였습니다. 귀신, 도깨비, 보릿고개 이야기, 6.25때 지리산 빨치산에 잡혀갔던 사람들을 구출해 준 아버지의 무용담 등 그것들은 저에게 꿈과 환상의 보물섬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저희 집에는 라디오가 있었습니다. 작은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시고 서울로 도주를 하신 후 아버지가 전답을 팔아 빚을 갚아주고 고작 가져온 것이 개 한 마리와 라디오였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라디오를 가져오신 것이 저에게는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황금심, 최희준, 남진,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며 음악적 감성을 키웠습니다. 또한 연속극 ‘옥단춘전’, ‘도무지 영감’, ‘광복 20년’ ‘법창야화’ ‘전설따라 삼천리...’ 어린이 연속극인 ‘손오공’, ‘무지개마을’ 등을 라디오에 귀를 바짝 대고 들으며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그때의 연속극은 대부분 해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그런 연속극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꾼이 되어 갔습니다. 동네에서든, 학교에서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제 앞으로 다 모여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런 일들이 중요한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스토리텔링 능력과 감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 감성과 이야기꾼 기질이 저의 어린시절부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베어든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 칼빈대학교 설교학 교수이신 김덕현 교수님으로부터 광대설교 이론까지 배웠습니다. 물론 그 이론을 배우기 전에도 이미 저는 광대설교를 해 왔지요. 제가 그런 이론을 배우지 않았어도 드라마틱한 내러티브 설교와 광대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황홀한 이야기의 세계와 문학 감성, 창조적 상상력을 익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저에게는 무드셀라 증후군, 즉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만의 황홀한 이야기와 감성의 스토리로 판을 깔아놓고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펼쳐가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습니다. 그러니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세계가 제 설교의 기본적인 판으로 깔아지게 되었고 그 속에서 제 설교는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아버지가 망한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일찍이 저를 오늘의 종으로 키우기 위한 경륜으로 역사하셨던 것이죠. 참으로 신묘막측한 섭리지요. 아무튼 저의 어린 시절에 접했던 그 수많은 이야기의 세계는 지금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좋은 글을 쓰게 하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설교할 때도 다양한 이야기 형태로 전개하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복음을 담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제적, 선포적, 연역적인 설교보다는 설교 한 편이 하나의 이야기요, 드라마가 되도록 준비합니다. 지난주는 사업차 우크라이나에 가셔서 머물고 계시는 신계범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아, 정말 보고 싶네요. 이따금씩 설교 시간에 하모니카를 불어주시는 울 목사님! 이 세상 어디에 이런 자상하신 목사님이 계실까요? …(중략)… 언제 들어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울 목사님만의 설교기법이 아닙니까?...(이하생략)” 어린 시절 라디오를 가까이했던 소년은 이야기 소년이 되었고 그 이야기는 회색빛 도시의 성도들에게 거룩한 하나님 사랑의 이야기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와 광대설교는 또 다시 라디오와 TV, 인터넷을 통하여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08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DMZ 안에 피어난 꽃
    지난 화요일에는 미 전 연방하원의원들과 함께 5사단에 있는 DMZ에 갔습니다. DMZ는 정전 협약을 맺을 때 남북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의 각 2km를 비무장지대로 조약을 한 곳인데요, 그곳에 남쪽과 북쪽이 각자 GP(경계초소)를 세우고 서로의 동향을 관측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생전 처음 5사단 내에 있는 GP에 갔습니다. 그곳은 얼마 전에 민간인에게 공개 되었지만 그곳을 가려면 수십 대 일의 추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민석 국회의원께서 주선하고 직접 동행해 주셔서 예정된 날짜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GP에 들어갈 때는 만에 하나를 우려해 8kg무게의 방탄복을 걸치고, 2kg이 넘는 헬멧을 쓰고 갔습니다. 저도 생전 처음으로 방탄조끼를 입어 보았습니다. 물론 사성장군 출신인 이철휘 장로님도 이 무거운 방탄조끼는 처음 입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GP에 가니 북한 땅이 바로 눈앞에 보이고 북한의 GP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6.25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도 하고 있었는데 미군으로 추정되는 유해를 1구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7구가 묻혀 있는 곳이 코앞에 있는데 북한의 GP가 있는 곳이라 아직 발굴작업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협조만 있으면 발굴작업을 바로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미 전직 의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미군 전사자 유해 발굴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군에 경의를 표한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또한 미 전직 의원들이 남북한에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최전방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까지 갔으니 긴장감이 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제 마음은 고향에 온 것처럼 참으로 편안했고 심지어는 그곳에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65년이 넘도록 전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으니 야생동물의 천국이요, 원시림 그 자체였습니다. 순간, 제가 쓴 ‘원시림’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오늘에야 다시 원시림을 찾았다 / 그냥 너 자체만으로도 좋았던 때 / 욕망을 버린 사랑, 예술, 만남... / 선악이 없는 이곳에서의 모든 행위는 죄가 아니다 / 그냥 너를 사랑할 뿐이다 / 비록 나이 먹고 오래되었을지라도.” 자세히 보니 거기에도 하얀색, 노란색의 크고 작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GP에서 내려오는 길 오른쪽 언덕에 주황색 원추리나 나리꽃 같은 것들이 활짝 피어있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 저도 모르게 “아, 꽃, 꽃...” 하고 외쳤습니다. 당장 차에서 내려서 그 꽃을 자세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군사법상 차에서 내려 사사롭게 시적인 감상을 할 수가 없잖아요. 이름 없는 들꽃들이야 여기저기서 피어난다 하지만, 어떻게 그 곳에 제 고향에 피었던 원추리 혹은 나리꽃이 피었는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직접 차에서 내려서 보지 못하고 차창 밖으로만 보는 것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문득 아가서 2장에 나오는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목요일에 전직 미 연방 의원들과 함께 삼청동 총리 공관에 갔을 때 정원에 DMZ에서 본 꽃과 비슷한 꽃이 있어서 가까이서 보니까 나리꽃이었습니다. DMZ 언덕에 핀 꽃이 원추리인지 나리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만 하다면 내년 봄에 그곳에다가 꽃씨를 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리나 원추리, 백합, 튤립 등의 꽃씨들을 말이죠. 그런 꽃씨가 싹이 나고 꽃이 피면 우리 군인들이 그 꽃을 바라보며 마음의 뜨락에 꽃밭을 이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북풍이 세차게 부는 날, 북녘 쪽으로 꽃씨를 흩날리고 싶었습니다. 그 꽃씨가 싹이 나고 꽃이 피면 북한군의 마음의 뜨락에도 꽃밭을 일구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냥 시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꽃씨 시인’으로 각인 되어 있습니다. ‘꽃씨’라는 시집을 냈고 ‘꽃씨 심는 남자’라는 에세이 책도 썼거든요. 그리고 남북평화를 이야기할 때도 항상 “평화의 꽃씨를 뿌린다”거나 “평화의 꽃길을 만든다”는 표현을 많이 했습니다. 작년에는 봄이 와서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꽃송이 하나로도 봄이 오게 한다는 시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DMZ 언덕을 내려오면서 이곳에 직접 와서 꽃씨는 못 뿌리더라도 저의 시와 글과 다양한 사역을 통해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의 꽃씨를 뿌리는 사역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DMZ 안에 피어난 꽃처럼 민족의 광야에 평화의 꽃이 만발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할 사명을 더 느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6-2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아쉬울수록 추모의 마음은 깊어지다
    월요일 오후 저는 故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습니다. 장례식장엔 문희상 국회의장님을 비롯해 전 현직 장관, 국회의원들이 식당을 꽉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장례위에서 저에게 현충각에서 있을 추모식에서 교계 대표로 추모사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아직은 교계 대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그 어느 분보다도 제가 추모사를 하면 추모식을 더 감명 깊고 숙연하게 할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제가 추모사를 하면 시적이고 문학적이며 가슴을 울리는 운문의 추모사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함으로써 행여나 이희호 여사님께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희호 여사님 생전에 더 깊은 관계를 가진 분이나, 저보다 더 훌륭한 선배 목사님을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적임자가 없거나 제가 꼭 해야 한다면 그때는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장례식장에서 나온 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추모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장례위 쪽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목사님이 거절 하셔서 다른 분에게 말씀 드렸더니 흔쾌하게 허락 하셨습니다.” 그분은 진보 진영에 계신 분인데, 교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하셨습니다. 정말 잘 되었네요.” 그러나 전화를 끊고 보니까 사람 마음이 왜 그런지,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이미 원고를 써 놨기 때문입니다. 그때 쓴 원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의도의 푸른 바람을 맞으며 겨울 광야에 눈물로 피어난 한 송이 인동초가 있었지요. 그 인동초 곁에 한 아내이자, 가슴 시린 정치적 동반자요, 시대의 아픔을 심장에 품고 평화의 꽃씨를 뿌리며 꽃길을 여셨던 어머니 이희호 여사님, 한국교회 장로님! 님의 영혼은 저 소망의 동산인 천국으로 가셔서 하나님 품에 안식을 하고 계시지만, 어머니의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 마음은 황망하기 그지없고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님은 대한민국 1세대 여성 운동가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사회운동가요, 민족의 갈등과 분열을 통합의 길로 이끄는 평화의 선구자이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병석에서 혈압이 떨어져 추위와 싸울 때, 털실로 손수 짜신 벙어리장갑과 양말을 신겨주셨다지요. 그리고 여사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으니, 그 애달픈 소망과 그리운 사랑을 가득 안고 하늘나라에 가셔서 예수님께는 인동초의 새하얀 향기를 바치시고 김대중 대통령님께 달려가 손을 꼭 잡아 주세요. 이희호 여사님 그리고 우리의 어머님, 아니 한국교회의 위대한 장로님이시여, 이제 모든 짐, 모든 고통, 그 모든 시련의 상처는 이 땅 위에 다 내려놓으시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 그리고 하늘 인동초 곁에서 다시 사랑과 평화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우리도 국민과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시겠다는 장로님의 유언을 받들어, 국민통합, 남북화해, 이념과 계층의 통합을 꽃 피우며 평화통일과 선진대국을 이루어가겠습니다. 그 모습 지켜봐주시며 천국에서도 기도해 주세요. 아, 이희호 여사님이여, 우리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장로님이시여, 그리고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히 겨울 인동초로 피어날 사랑과 평화의 이름이시여. 존경하며 사랑합니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꽃을 드리며 추모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희호 여사님이 없는 김대중 대통령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숱한 시련의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칠 때마다 김 대통령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과 신앙의 동반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작은 교회 목사였기에 존재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저에게 추모사까지 부탁하고 장례식장을 나오는 길에 KBS에서 인터뷰까지 요청한 걸 보면 저도 어느새 교계 중진 목사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비록 추모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고인의 추모식에 조금이라도 누가될까 싶어 양보하려고 했던 저의 마음을 스스로 격려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양보의 미덕을 세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양보와 섬김의 정신이 없으니 교계는 여전히 치킨 싸움을 하며 리더십이 표류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 마음이 아쉬울수록 가슴 깊이 애도하는 추모의 마음이 더 깊어갔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6-16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13년
    벌써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3년째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7년 1월 15일, LA에서 마틴 루서 킹 국제평화상을 수상하기 전날 전야제에서 ‘레리 레딕’이라는 흑인 노병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가 한국인임을 알고 다가와 더듬거리는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허리의 총상 흉터를 보여주면서 전쟁 후 한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울먹였습니다. 한국에 다시 가보고 싶은데 초청해 주는 분이 없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 분께 절을 하며 “제가 꼭 한국으로 초청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백악관 직속 평화봉사단 특별정책기획실장 폴 진의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백악관기독신우회 몇 명과 군 장성 출신 모임에 참석하여 말씀을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미국 사람들이 TV에서 한국의 시위대가 성조기를 찢고 불태우는 장면을 보고 한국의 반미 감정에 대해 매우 섭섭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조기를 불태우는 모습이 한국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우호를 위해서는 정부차원의 외교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교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바로 2007년 제1차 6.25 참전용사 초청 행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정부기관 차원에서나 할 수 있는 대규모 행사입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는 1회부터 12회까지 비행기 티켓, 숙박료, 체류 비용 등 모든 경비와 선물까지 적게는 3억~4억원에서 많게는 8억원 이상을 지출 하였고 한국으로 초청할 뿐만 아니라 미국에 가서 인서비스를 같이 할 때는 10억원 가까운 경비를 지불하면서 행사를 계속해 왔습니다. 이런 우리 교회의 진정성 있는 섬김에 감동을 받은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미국 내에 친한파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컨대, 한일 간에 독도 영유권 논쟁이 촉발되었던 민감한 시기에 참전용사들이 미국 백악관에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적시한 서한을 보내고 항의 방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 한국전 참전 용사들은 살아생전에도 우리 교회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홍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시면서 까지도 가족과 이웃들에게 대한민국과 새에덴교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국 내에 새에덴교회의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대한 아름다운 미담과 감동의 스토리가 전해지고 전해져서 마침내 저는 한국교회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미국 국가조찬기도회(International Luncheon Prayer)에서 메시지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의회까지 전달이 되어 13년 째 해 온 우리 교회의 수고와 헌신을 미 연방의회 의사록(Congressional Record)에 영구히 기록 보존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한국교회와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미 연방의회 의사록에 영구적으로 보존이 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을 뒤늦게 알고 미 연방 하원 3선을 지낸 김창준 장로님과 제니퍼 안권사님이 귀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만. 저는 인증서를 받으러 갈 시간도 없었는데,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는 미 연방 전직 국회의원들이 인증서를 액자에 담아 가져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3년째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릅니다. 왜냐면 그 분들이 다 돌아가셔서 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시기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 교회는 목회적 대형교회로서 대사회적 환원 차원으로 한미 우호증진을 위한 민간외교 사역을 해 온 것입니다. 요즘은 사회적 가치, 공유경제, 플랫폼 교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작년 30주년 행사 때도 우리 교회만의 과시적 행사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적 섬김과 공유, 나눔을 실천하는 행사를 하였습니다. 참전용사 초청행사 역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나누는 사역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사회적 섬김과 나눔의 교회로 갈 것입니다. 이 일에 뜻을 같이 모아주시고 헌신에 동참해 주신 장로님들과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만큼 전도와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도 드물지만, 동시에 목회적 대형교회로서 사회적 섬김과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6-0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시든 꽃은 가슴에서 핀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경조증이나 강박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소풍 가는 날이나 운동회 하는 날을 앞두고는 너무 좋아서 전날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글짓기대회나 웅변대회를 나가기 전날은 잠을 못 이뤘어요. 글짓기대회에서 어떤 제목을 줄 것인가, 내가 웅변을 하면 청중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너무 설레서 잠을 못 이뤘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처음 나간 날부터 모든 하루하루가 새로웠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토요 2부 순서 때 유행가를 부른 후 노래를 잘한다는 목사님의 칭찬을 듣고 당장 찬양대 연습을 하고 다음 날 주일에 찬양대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날 밤, 기숙사에서 잠을 못 이루고 거의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교회를 간다는게 도대체 꿈인가, 생시인가. 더구나 내가 찬양대에 서게 되다니...’ 그때부터 하루하루가 새로웠고 눈이 부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믿는다고 쫓겨난 후 가슴 설레는 날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생전 처음 주일날 양복을 입고 교회를 간다든지, 생전 처음으로 주일학교에서 설교하는 일을 앞두고 설레서 잠을 못 이뤘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개척할 때도 토요일만 되면 입이 타오르고 쉽게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교인이 몇 명이나 올까, 아무개 아무개 성도가 꼭 교회에 와야 할 텐데, 내일 설교를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을 못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강박증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정도 부흥했으면 자유함도 있을 수 있고 내 삶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을 텐데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염려하고 목회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으로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로가 되는 것은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잠 못 이루며 기도하셨지요.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회 걱정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5월부터 9월까지는 교단의 선거법 때문에 저의손과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물론 사적인 만남을 많이 갖기는 하지만요. 그래서 요즘 더 설교에 신경을 쓰고 일찌감치 장년여름수련회 말씀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미리 준비해놔야 7월부터 총회를 위한 지방 순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간 못 보던 책들을 보면서 주제도 짜고 메모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정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묵상하며 집중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그렇게 했더니 또 옛날에 느꼈던 탈진 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장과 폐장을 약하게 했는지 가슴이 답답하고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중단을 하고 교회 뒷산에 갔습니다. 산에 가서 맑은 공기를 쐬면서 머리를 식히니까 그 증세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 가서 보니 이미 진달래는 다 져 버렸고 꽃은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꽃잎대신 잎사귀가 무성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저 그늘진 응달 구석에 다 시들어버린 철쭉꽃이 몇 송이 보였습니다. 그 시든 꽃을 보면서 저의 젊은 날의 초상이 생각났습니다. 젊을 때는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었던 심장과 폐장이 이제는 조금만 무리해도 조여드는 것을 보며 마치 시든 꽃이 나의 모습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 순간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저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지도자라면 다 이런 강박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박은 많은 사람을 살려내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젊을 때의 경조증이 목회에 더 열심을 내게 하였고, 그 경조증은 강박증으로 이어져서 더 사명에 홀릭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저는 장년여름수련회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스트레스가 제 마음을 누릅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은혜가 넘치고 생명이 넘쳐야 하는데...” 저는 산에 오를 때마다 시든 꽃 대신 푸른 잎사귀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젊은 날 제 가슴에 피었던 청춘의 꽃과 열정들은 강박에 의해서 시들어졌지만, 그 꽃들은 성도들의 가슴에서 다시 피어나리라.” 이번 수련회는 제가 더 강박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은 만큼 성도들 가슴 속에서 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나뭇잎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의 꽃이 시들수록 성도들의 가슴 속에는 더 아름답고 눈부신 꽃들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6-0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감탄사가 감탄의 삶을 만든다
    옛날 어린 시절에 글을 쓸 때는 문장에 감탄사 부호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글이 아주 매끄럽고 세련되기는 하지만 문장에서 감탄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도 감탄하고 감격하게 하는 이야기보다는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정죄하는 분위기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감탄스럽게 하는 글도 많이 쓰고 그런 말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제 외손녀 ‘현주’ 때문입니다. 현주가 아주 어려서 낯을 가릴 때는 아무리 제가 사랑해 주어도 저에게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엄마하고 외할머니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사랑하고 축복을 하고 모든 장난감을 마련해 주는데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울어버릴 때는 섭섭하기도 하고 상처 받고 시험에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위로가 되는 것은 지 아빠를 봐도 그런 것입니다. 아빠가 서울 있다가 주말에 오니까 낯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물며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얼마나 낯을 가렸겠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약간 말을 알아듣고 의사소통을 하려고 할 때부터는 자꾸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현주를 볼 때마다 단 10~20분이라도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아이에게 감탄의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꽃이 필 때 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현주야, 이게 꽃이야. 목련이야, 진달래야, 개나리야. 야, 너무 아름답다. 아니, 너의 이름이 꽃이고 너도 꽃처럼 아름다워. 야아~ 와우~” 현주가 알아듣건 모르건 꽃을 보고 감탄을 하게 해 준 것입니다. “현주야, 너도 목련꽃처럼 눈부시게 자라라. 꽃처럼 살아라. 너의 마음이 철쭉꽃처럼 화사할 뿐 아니라 네 삶을 감격하며 살아라. 감탄사를 많이 외치며 살아라. 그래야 네 주변에 사람이 많이 따른단다. 야아~ 와우~” 이런 말이 얼마나 아이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는지 이제는 저만 보면 바깥에 안 나갔는데도 바깥으로 손을 가리키며 “와우~”하는 것입니다. 이제 돌도 안 지난 애가 자기 스스로 감탄하면서 할아버지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지금은 시든 꽃을 봐도 나뭇잎만 보아도 “와~” 하기도 하고 “꽃, 꽃” 하는 것입니다. 과연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의 내용이 어린 손녀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요즘은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는 순간부터 “와~” 하고 감탄의 언어부터 내지릅니다. 그러다가 강아지를 보면 더 감격하며 “머-엉 머-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현주의 감성을 긍정적으로 자극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감성이 현주의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이 될 것이고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된 좋은 감성은 반드시 나중에 좋은 추억과 감정만을 기억하는 ‘무드셀라 증후군’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어찌 제 외손녀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감탄사를 쓰고 스스로 감탄을 하는 사람은 감탄 인생, 감격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도 감탄의 꽃이 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꽃밭 여행자’라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까? “꽃밭을 여행했으면 사막으로 가라 / 사막을 다녀왔으면 다시 꽃밭으로 가라 / 꽃밭의 향기를 사막에 날리고 / 사막의 침묵을 꽃밭에 퍼뜨리라 / 꽃밭에는 사막의 별이 뜨고 /사막에는 꽃밭의 꽃잎이 날리리니.” 꽃밭 여행자는 사막으로 가서 감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막으로 갔으면 다시 사막의 침묵과 별빛을 가지고 꽃밭으로 와야 합니다. 그럴 때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선순환을 일으키고 순기능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은 더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칭찬하고 감격하고 감탄할 때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감탄 인생을 넘어서 감탄 신앙을 이루고 그 신앙들이 모여서 감탄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감탄하는 표현을 잘해야 합니다. 물론 그 표현은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칭찬과 격려를 넘어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을 잘할 때 스스로 감격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감탄의 교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5-2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