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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길었지만 뜨겁고 알찬 신년성회
    저는 지금까지 33년째 직접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간 때문에 적지 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철야기도회를 하고 토요일부터 송구영신예배를 드려야 했거든요. 그리고 나서 주일예배에 이어 신년축복성회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간으로 하면 화요일 저녁까지 하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다음날이 수요일이잖아요. 그래서 수요일까지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특히 송구영신예배 다음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예전처럼 저와 부목사님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전부 안수기도를 해 드리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거고, 그러면 저만 힘든 게 아니라 성도들도 힘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송구영신예배를 1, 2부로 나누어서 드렸고 안수기도 대신 원격 축복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부예배에 예배당이 꽉 차서 “2부에는 좀 적게 오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웬 걸요? 2부는 성도들이 더 많이 온 것입니다. 순간 저는 감격하였습니다. “아, 이게 바로 우리 교회의 저력이구나.” 저는 주일1부예배 부터 5부예배까지 마치고, 저녁집회부터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토요일부터, 아니 그 전날인 금요일 저녁부터 수요일까지 낮과 밤으로 계속 참석한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요.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금요일부터 16번이나 강단에 선다고 하지만,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열정이 아니면 참으로 힘든 여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앞을 다투어 헌신을 하고 최선을 다해, 아니 어쩌면 힘에 지나도록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회를 인도하면서 성도들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전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열심으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마치 성도들이 드라마를 보고, 공연을 보듯이 그런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신년축복성회를 33년째 해왔습니다. 또한 여름에 있는 장년여름수련회도 올해로 33년째 인도할 것입니다. 사실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만 없다면 어느 정도는 목회를 할 만하겠습니다. 저는 9월, 10월이 되면 벌써부터 신년축복성회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신년축복성회가 끝나면 벌써부터 장년여름수련회에 대한 부담감을 갖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매년 다른 주제와 다른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매주하는 주일설교와 금요철야기도회 설교, 수요예배 설교도 그렇지만, 신년 초와 8월 초에 8, 9편의 부흥회 스타일의 새로운 내용으로 설교를 한다는 게 얼마나 심리적으로 압박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이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이고 두 날개입니다. 많은 분들이 “새에덴교회는 어떻게 저렇게 예배가 빨리 회복이 됩니까?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까? 또 연합사역을 하다 보니까 온갖 가짜뉴스와 악의적 인포데믹의 공격이 있는데 교인들이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당연히 그 이유는 우리 교회에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라는 두 기둥이 있고 두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분기별로 하는 ‘사명자 기도회’도 한 몫을 하고요. 그것도 모자라 저는 ‘특별새벽기도회’와 ‘특별 밤 작정 기도회’를 합니다. 저는 총회장을 하고 한교총 대표회장을 할 때도 코로나 기간이기 때문에 단 한 번도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행사 때문에 수요예배를 거의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목회에 올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는 정말 힘들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기간이 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부터 뜨겁고 알찬 집회로 느껴졌고, 우리 성도들도 어느 때 보다 더 뜨겁게 은혜를 받고 헌신하는 알찬 성회였습니다. 한 번도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마지막 날 헌신하는 숫자도 가장 많을 정도로 시작부터 끝까지 뜨겁고 알찬 성회였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이 있는 한은 제가 은퇴할 때까지 계속 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할 것입니다. 그럴 때,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는 여전히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이고 날개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결속력을 가져다주는 거룩한 본드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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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1-08
  • [소강석 목사의 신년시] 황무지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는 새에덴의 소네트여
    코로나 팬데믹의 후유증이 여전히 드리운 중에도 동해의 붉은 태양은 장엄한 몸짓으로 솟구치고 황홀한 태양의 눈동자로 다시 시작하는 새해의 일출은 생명나무 꽃향기로 번지며 뉴 블레싱의 빛을 비추고 있거니 이제 우리 모두 2023년의 찬란한 일출과 함께 절망과 비난, 혼란과 분열의 비가(悲歌)를 그치고 다시 하늘순례자의 발걸음으로 신발끈을 동여매며 새벽 하얀 서리 내려앉은 강물 소리를 따라 가슴 벅찬 희망과 부흥의 행진을 시작해야 하리라 어두울수록 별은 빛이 나고 절벽 끝에 피어난 꽃은 잔인할 정도로 향기를 발하나니 지난해 거친 광야의 절망과 어둠의 시간을 이겨내고 맞은 우리의 새해는 더욱 더 눈부신 꿈으로 빛나야 하리니 주여, 2023년은 생명나무 신앙으로 팬데믹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온전한 예배 회복을 넘어 거룩한 초연결 생명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민족의 들녘에 분열을 조장하는 파괴적 외침은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세레나데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한국교회가 먼저 가슴을 치며 주의 제단에 눈물을 쏟고 신 사도행전의 아리아를 부르게 하소서 아, 2023년 엔데믹의 한계를 넘어 비상하는 눈부신 아침이여 거친 황무지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는 잔인한 생명과 사랑의 소네트여 그 한 중심에서 다시 한번 한국과 세계로 생명신앙의 빛을 확장해 갈 새에덴의 무지갯빛 약속과 푸른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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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1-0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얼마나 비우고 낮아져야 할까요?
    “... 얼마나 비워야 하겠습니까 / 얼마나 낮아져야 하겠습니까 / 얼마나 가슴 저려야 하겠습니까 /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캄캄하기만 한 밤 / 언제쯤 그 별빛을 비추어 주시겠습니까 / 평강의 왕으로 오셨던 아기 예수여 /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어두운 이 세상에 / 다시 맨살의 아기 예수로 오셔야 하겠나이다... (중략) 상처와 아픔, 분노와 증오가 가시지 않는 / 조국 대한민국에 하늘의 별을 들고 오시옵소서 / 벌거벗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 따스한 화해의 등불을 켜고 오시옵소서...” 이는 제가 국회 성탄트리 점등식에서 낭송한 시의 일부분입니다. 점등식에 앞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성탄감사예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성탄절, 대화해의 절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만큼 평화와 화해가 절실한 사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야가 대화하고 협치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한 갈등과 대치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여야 크리스천 의원들은 정쟁을 하다가도 예배실에서 기도하다 만나면 손을 잡고 함께 극한 대립의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사람이 극적 대화와 화합, 협치의 길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국회조찬기도회도 그래야 합니다. 기독 의원들이 하나 되어 예수님의 화해와 화목의 정신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김진표 국회의장님도 이런 축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맞아 우리 국회가 대립과 갈등을 넘어 대화와 타협의 국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채익 의원(국회조찬기도회 회장 국민의힘)과 김회재 의원(국회조찬기도회 부회장, 민주당)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어 국회 분수 대광장에서 진행된 성탄트리 점등식에서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여야의 국회의원님들과 성도들이 함께 모여 아기 예수의 성탄을 축하하며 사랑과 평화의 불빛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불을 밝혔습니다. 성탄절은 사랑과 평화의 구주,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성탄이야말로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러브 스토리요, 러브 레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만의 화해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 사건이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님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일 뿐 아니라, 대화해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초갈등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미움과 증오의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겨울왕국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온갖 거짓과 증오의 말들이 난무한 세상입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와 인포데믹을 남발하며 미움과 증오를 부추기고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거짓과 증오의 욕설을 쏟아내며 갈등과 분노를 부추깁니다. 여기에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제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한국교회에 불이익을 주고 공적 피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신문 신년인터뷰를 할 때 김재일 장로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시인으로서 감성이 여리고 상처 받기가 쉬우실 텐데 어떻게 이런 것을 극복하십니까?” “당연히 그런 것만 생각하면 여린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저의 마음을 주님께 연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과 연결된 아픔, 주안에서 느끼는 아픔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무를 하고 위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제 자신을 얼마나 비워야 하고 낮아져야 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꺾이지 않고 오히여 긍정에너지로 승화시키지요.” 사실, 아기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헤롯왕이 자신의 사욕과 탐욕에 눈이 멀어 무고한 아기들을 희생시켰지요. 20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거리에도 여전히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우리의 영혼을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낮아지고 비워야 할까요. 얼마나 더 가슴 저려야 할까요. 교회의 본질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하고 섬기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정상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도 이념으로 나누어지고 분열의 카르텔을 쌓으며 동질집단의 권력화를 이루고 다툼과 분열을 일으켜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트러스트화를 보이는 것은 낮아지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우리가 예수님의 비하의 탄생과 삶을 묵상하며 더 낮고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초갈등사회를 화목사회로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진실이 전해지고, 진실한 사랑으로 가득한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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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2-2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이는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에 나오는 글입니다. 류시화 시인 역시 시를 쓰는 것도 힘들 뿐만 아니라 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세월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고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세월)에 대해 꿈꾸어서는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고 하죠.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매여 살고 미래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송년을 보내며 새해를 맞을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원래는 새해를 맞는 것을 가슴 설레고 두근거려야 하는데 말이죠. 그 이유는 과거에 메어 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절대로 내일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세월)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지요.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내일을 맞는 것이 두렵습니다. 특별히 새해를 맞는 게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로지 과거만 보이고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새로운 반전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다시는 지나간 세월을 묻지 말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되새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날아가는 새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상처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픈 상처는 반드시 상흔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있는 사람은 상흔의 후유증을 앓게 되고 그 세계에 머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일이 두렵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뒤를 돌아보다 목이 꺾인 새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가 크면 클수록 상흔은 더 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흔은 생각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상흔 때문에 더 멀리, 더 높게 날아간다면 그 상흔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제 얼굴에도 저만 아는 상흔이 하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야성의 질주를 하다가 사고가 나서 왼쪽 광대뼈 위에 얼굴을 다쳤습니다. 저를 보는 사람마다 “어떻게 이렇게 피부가 좋으시냐?”고 하지만, 제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면 아직도 그때의 상흔이 있습니다. 그 상흔이 저를 저 되게 하고 겸손하게 해 줍니다. 대형교회 목사로서 제가 선택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저도 모르게 나라는 성 안에 갇혀서 안일과 나태와 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제 왼쪽 광대뼈 위에 있는 상흔 때문입니다. 그걸 볼 때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흔 때문에 계속 날아가는 것입니다. 앞장서서 일하다 보니까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상흔이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저는 그 상흔을 보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날아갔습니다. 장자는 잘생긴 나무가 먼저 죽는다고 했습니다. 잘생긴 나무는 주로 상처 없이 자라는 나무고, 못 생긴 나무는 험한 세파에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온갖 상흔을 지닌 나무입니다. 그런데 잘 생긴 나무는 먼저 다 베임을 당하고 결국은 못생긴 나무들이 산을 지킵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아니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아픔과 상처를 당한 사람일수록 요긴하게 쓰이고 미래의 영산(靈山)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의 아픔이 아무리 크고 상흔이 많다 할지라도 무조건 날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안 날아가더라도 세월이라는 바람에 떠밀려 억지로라도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떠밀려 가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날개를 펴며 미래를 향해 날아가야 합니다. 주저하면 안 됩니다. 뒤를 보면 목이 꺾입니다. 다만 바라볼 것이 있다면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우리의 상흔을 바라보며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새해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에 나에게 주실 하나님의 눈부신 축복을 기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내 삶에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오더라도, 폭풍과 맞서 싸우는 저 독수리처럼 우리는 날고 또 날아야 합니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날갯짓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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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2-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난간 앞에서 깨달은 은혜
    지난 주일 저녁에 총남선교회 주관으로 ‘새에덴 문학의 밤’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문학의 밤이 아니라 ‘새에덴 아버지들의 밤’이었습니다. SBS 아나운서인 이동준, 차유주 집사님 부부가 사회를 보았는데 어느 방송국에 내놔도 손색없을 정도로 너무나 깔끔하고 세련된 진행을 선보였습니다. 컨설팅 전문가인 이병환 안수집사님이 총괄기획을 하고 EBS 방송작가 출신인 박소현 간사님이 진행 대본을 썼으며 진심 어린 출연자들의 무대가 어우러지면서 큰 감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종진 안수집사님의 아내에게 바치는 세레나데 연주, 송치연 간사를 중심으로 한 새에덴 아버지밴드, 이선우 안수집사님의 아들에게, 이광호 안수집사님의 딸에게 바치는 편지, 새맨파의 댄스, 시낭송과 샌드아트, 색소폰 연주 등 다채로운 순서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청소년기의 난간의 위기를 잘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군들 고민이 없고 누군들 난간의 위기를 안 겪은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난간의 위기를 극복하였기에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장애인 사랑부 최봉기 형제의 간증 편지는 뭉클한 감동을 주며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최봉기 형제는 3살 때 뇌병변 판정을 받게 되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 교회에서 기도하다 잠깐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봉기야! 나는 너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그런데 왜 너에게 없는 것들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우울해 하느냐. 사랑하는 아들아! 마음을 강하게 하고 굳세게 하고 기쁘게 살아라.”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얻어 미국에서 주립대를 졸업한 이후에 한국에 돌아와 새에덴교회에서 큰 은혜를 받으며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위대한 인간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울컥했던 것은 최진경 장로님께서 병환으로 누워계신 아버지께 바치는 편지였습니다. 최장로님께서 눈물로 편지를 낭독하자, 온 성도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최해규 장로님, 이 단어를 부를 때마다 가슴 속 깊이 밀려오는 존경과 감사의 감정으로 쉰이 넘은 나이에도 눈가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힙니다... 지금 아버지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계시지만 저는 아직도 아버지께서 벌떡 일어나서 ‘진경아~’ 하며 부르시는 상상을 합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예배 때마다 강단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놓고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의 귀에도 그 기도 소리가 들리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의 기도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들으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두 분의 기도와 사랑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평생을 살겠습니다...” 저 역시 최진경 장로님의 눈물의 편지를 들으며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마무리 기도를 할 때 제 마음이 너무 애절하고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절함이 도가 지나치고 너무 몰입한 나머지 기도하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순간 눈을 뜨고 보니까 오른발이 강단 끝 난간에 거의 반 정도가 걸쳐 있는 것입니다. 정말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한 번만 더 헛발을 내딛어버렸으면 그대로 낙상을 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적어도 코뼈나 광대뼈가 부러지든지, 아니면 제 팔이 하나 부러졌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난간 앞에서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청소년기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슬아슬한 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각자 위기가 있고 고비가 있을 텐데 이게 다 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난간에서 한 발만 헛디뎌도 시험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예수님을 떠나고 교회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시고 붙잡아 주셔서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니, 지금까지 저와 함께해준 성도들, 새에덴의 아버지들이 너무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오늘의 새에덴의 아버지들이 있도록 뒤에서 기도를 해주고 응원해준 새에덴의 어머니들이 너무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자랑스러운 새에덴의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안주하거나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선 줄로 생각하지 않고, 다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순간순간 난간의 위기나 고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천국 가는 그날까지 절대로 실족치 말고 함께 손잡고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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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2-1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간절한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열린다.”
    저는 지금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저 혼자 온 것이 아니고 12명의 일간지 기자들과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 의료목사님이신 이재훈 목사님과 또 대외 협력실장이신 박요셉 목사님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먼저 성탄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취재하기 위함이고 동시에 한국과 이스라엘 수교 60주년을 기념해서 성지순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기자들과 함께 해외를 가도 끝까지 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정상 하루나 이틀만 같이 하고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그 먼 아프리카를 갈 때도 3일 동안만 함께 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끝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날부터 늘 긴장 속에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가이드를 하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지리와 문화에 정통을 하신 분이지만 일반적으로 통상적으로만 설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는 곳마다 그 장소를 성경과 연결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성을 언급하면서 어떻게든지 예수님의 스토리를 소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 와서는 더 그랬습니다. 다른 곳도 다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을 기자들께 꼭 보여주고 설명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찾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일일이 다 보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번 SBS 다큐를 제작하고 또 CTS 다큐를 제작할 때는 미리 비용을 지불하고 특별예약을 해 놓아서 부족하지만 충분히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영상에 저의 설명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서 보니까 이번에는 그곳에 예약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노력을 다해서 특별예약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조마조마 할 수밖에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무덤교회를 찾아가니까 아니나 다를까 사람도 많고 무덤 안에서는 사진도 못 찍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애가 달았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을 갖고 현장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물론 가이드께서도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아무튼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담당자에게 사정을 하고 설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자들과 함께 무덤교회를 직접 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은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서너 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몇 팀으로 나눠서 제가 모시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장사를 지냈고 그곳에서 부활하셨는가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은 풀렸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복받쳤습니다. 저는 기자들에게 이곳이 예수님의 탄생지와 함께 최고의 하이라이트 성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남아서 기자님들과 함께 한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보람되고 가치를 느낀다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성묘교회를 다녀오고 나서 호텔에 와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천상 목사이구나.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 승천을 전하고 싶어 안달하는 목사이구나.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면 어떤 장벽도 뚫고 열 수 있구나. 간절한 마음이 없으니까 늘 핑계만 대고 자기 스스로 위무를 할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앞으로 더 간절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사명에 임해야 되겠구나.”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절제를 하고 제 자신을 컨트롤 하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본성을 어찌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기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는 분도 계시지만 믿지 않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으면 그분들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저 자신이 셀프컨트롤을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목사의 본성과 정체성이 드러날 수밖에요. 방에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이러한 저의 마음과 정열을 이해를 해주시고 수용해 주신 기자들께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를 너그러이 용인해 준 가이드 목사님께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장애를 극복하고 닫힌 문도 열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너무 긴장을 했는데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고 나니 사랑하는 성도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이제는 어서 빨리 교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속히 달려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을 사모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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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2-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우리 주변에 신덕균이 있다면...”
    지난 목요일 기흥 CGV에서 한국 기독교 최초 뮤지컬 영화인 ‘머슴 바울’을 보았습니다. ‘머슴 바울’은 사람의 머슴에서 주님의 머슴으로 거듭난 한국교회 제1호 목사인 김창식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일사각오 주기철’을 연출한 권혁만 감독님이 만든 것인데요. 저는 너무 바쁜 일정을 보내느라 겨우 도착하여 첫 컷은 지나고 두 번째 컷부터 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제임스 홀 선교사 부부와 동역을 하는 김창식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 김창식은 처음부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하여 삶아 먹는다는 괴소문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올링거 선교사 부부의 머슴으로 들어갔다가 선교사 부부의 사랑과 친절에 감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 평양 선교 사역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평양 선교의 길은 온갖 고난과 박해가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급기야 평양 기독교 박해사건으로 김창식은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다 거반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평양 관아의 비장(조선시대 감사·절도사 등 지방장관이 데리고 다니던 무관) 신덕균이라는 자는 “이래도 예수를 믿겠느냐”고 겁박을 합니다. 그러자 김창식은 “나를 사형을 시킨다고 해도 예수를 믿고 전할 것이오.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악으로 대한다 해도 나는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을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신덕균은 김창식의 말에 오히려 더 격분하여 잔인하게 고문을 가합니다. 급기야 김창식이 풀려난 이후에도 사람들을 조종하여 김창식에게 돌팔매질을 하게 할 정도로 분노하고 증오를 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김창식은 제임스 홀 선교사를 도와 평양 선교 사역을 하다 마침내 다른 6명의 목사와 함께 대한민국 제1호 목사가 됩니다. 그 후로 길 위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김창식 목사는 서북지역에 48곳의 감리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115번의 명설교를 하였습니다. 어느덧 김창식 목사에게 인생의 겨울이 오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한 노인이 찾아옵니다. 김창식 목사와 의사가 된 아들 김영진이 전염병이 창궐 할 때 고쳐준 한 아이의 할아버지라고 소개하면서 너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는 바로 평양 기독교 박해사건 때 김창식을 모질게 고문했던 신덕균이라는 자였습니다. 김창식 목사도 사람인지라 순간 몸이 경직되고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에 사랑과 용서의 꽃을 피우며 자신을 변화시켰던 성경을 선물로 줍니다. 김창식 목사의 끊임없는 사랑에 감복한 신덕균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그 후로 더 이상 관아에서 교회를 핍박하지 않도록 보호를 하였고 스스로 자녀와 손자까지 교회를 데리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제 머릿속에 이런 영화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은혜가 은혜를 부르리니 사랑과 용서의 꽃이 피리라.” 아니, 그런 대사를 넘어서 이런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부르고, 용서가 용서를 부르리니 마음에 사랑과 용서의 꽃이 피리라” 훗날 김창식 목사의 아들 김영진과 홀 선교사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은 의사가 되어 해주 구세병원에서 재회를 하여 결핵 환자 치료에 뜻을 모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이 영화는 사랑과 용서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구원을 풍성하게 한다는 메시지를 준 것입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 주변에 신덕균과 같은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난날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도 그렇고, 서울에 올라와 가락동에서 새에덴교회를 처음 개척할 때도 미워하고 증오해야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김창식 목사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처음에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삶아 먹는다는 인포데믹, 가짜 뉴스를 들었던 것처럼, 저도 얼마 전까지도 말도 안 되는 인포데믹, 가짜뉴스를 유포한 신덕균과 같은 사람 때문에 시달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은혜가 은혜를 부르고 사랑이 사랑을 부르고 용서가 용서를 부르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쳐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제 마음에 사랑과 용서의 꽃을 피우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까지 저의 꿈이 길 위에 잠들지 않은 것처럼, 한국교회 연합사역과 공적사역의 꿈이 잠들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내 안에도 사랑과 용서의 꽃이 계속 피어나게 하옵소서.” 다가오는 12월, 크리스마스 씰을 사는 마음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나 친구들과 함께 가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줄 ‘머슴 바울’ 영화를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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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1-2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수능생을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들
    해마다 수능이 임박해 오면 저희 교회는 100일전부터 금요일마다 수험생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청지기로서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하고 기도해야 할지 훈련받는 시간을 갖고 특별기도회를 합니다. 특히 지난 한 주는 온 교인이 수험생과 자녀를 위한 특별새벽기도로 함께 격려했고, 주일예배 시에는 수험생들을 위한 안수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수능 당일에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수능 시험 시간표와 동일한 시간대에 수험생들과 한 마음으로 온 교회가 함께 금식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온종일은 못하지만 아침 금식을 하고 기도회에 합류했습니다. 물론 저희 집사람은 하루 종일 기도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교역자들은 틈이 나는 대로 본당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특별히 저는 3층 본당에 나와서 300여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니까 옛날 제 아들, 딸이 수능시험 볼 때처럼 가슴이 애처로워지고 눈물이 핑 도는 것입니다. 저는 수능생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최상의 컨디션을 주시고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점수를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도회를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수능은 상대가 있어서 경쟁하게 되는데 자기 자식들이 남의 자식들을 이겨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런 주장이 옳다면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전혀 기도를 안 할까요. 자녀들이 수능시험을 보는데 잘 보든, 못 보든 자기 운명에 맡기면서 부모는 기도도 안 하고 자기 일만 보겠습니까.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승진 심사가 있을 때 항상 남에게 양보만 하겠네요. 먼저 상대가 잘 되도록 하고 자신은 영원히 말단에서 근무해야 할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말하지만, 간절함이 있으면, 그 간절함은 자신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돌파구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이 없으면 핑계만 대고 남을 비판하고 공격을 일삼습니다. 물론 자기 자녀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중에 잘 되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남을 섬기며 살도록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무조건 자녀가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는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 이웃을 섬기며 세상을 섬기도록 가르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또한, 요셉처럼 하나님의 복이 그를 통하여 흘러가도록 기도합니다. 저는 그런 마음으로 자녀를 위해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숭고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도는 정말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숭고하고 존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더 애절한 마음이 생기고 수험생의 이름들이 제 가슴을 문지르는 것 같아 더 애절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물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모든 수험생들이 다 시험을 잘 보리라고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기 때문이죠. 애절하게 기도한다고 해서 바라는 점수대로 다 나올 수는 없습니다. 저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 너무 교회 생활에 빠지다 보니 학교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제가 공부한 만큼 실력을 거둘 수밖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점수가 낮게 나오더라도 기도한 만큼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계획과 플랜을 이루어간다는 건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점수가 높게 나오건 낮게 나오건 하나님께서 모든 걸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오늘의 소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수가 잘 나오건 못 나오건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능생 부모님들이 기도한 그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이번 기회에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의 씨를 심고 기도를 축적한 것입니다. 이번 수능시험 점수에 상관없이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할 뿐만 아니라 수능 시험 이후에도 그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역사에 기필코 작용을 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왔던 수험생 부모들의 기도는 아름답고 위대하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흘린 눈물의 기도의 씨앗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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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1-2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남산의 추억을 재발견하다
    지난 목요일 오후에 서울 장충교회에서 있었던 서울지구 장로회 정기총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후에 몇 분이 저에게 주변 호텔 커피숍에서 면담 시간을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답답한 실내보다는 남산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산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는 도중에도 무슨 전화와 문자가 많이 오는지, 또 저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때 같이 동행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총회장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이렇게 많이 연락이 옵니까? 남산에서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분들이 있으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분과 첫 번째 면담을 끝내고 또 한 팀을 만났습니다. 그분들과는 남산 타워 앞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들을 보낸 후에 잠시 남산 벤치에 앉아서 가을 단상에 젖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워서 단풍잎이 떨어질 때마다 “가을 엽서 한 장 한 장이 떨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삼십 수년 전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개척 멤버 한 명도 없이 맨손, 맨몸으로 교회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광주에서 개척을 한다면 조그마한 땅에서 조립식 건물을 짓고 시작하자는 문정남 장로님의 말씀도 계셨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있고 감동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서울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맨 처음에 목동을 돌아보고 상계동도 다녀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예배처의 임대료가 너무 비싼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남산 타워에 올라갔습니다. 남산 타워를 몇 바퀴를 돌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갈 곳은 어디입니까? 어디라고 지명은 안 해주셔도 동서남북 중에 한 방향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서 서울의 동서남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제게 왔던 감동은 “동서남북이 다 하나님의 땅이고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니 네가 기도하고 마음이 다가오며 형편에 맞는 곳으로 가거라.”라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정말 그때를 회상하니 너무 서글프기도 하고 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잔잔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결국 남산 타워에서 결정하지는 못하고, 서울 시내를 다 다니다가 제일 임대료가 싼 가락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차 부흥을 해서 분당으로 가게 되었고, 마침내 지금의 프라미스 컴플렉스를 건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남산 정상을 한 바퀴 거닐다 보니까 하나님께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어디 가서 교회를 지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겠습니까? 저는 총회장이나 한교총 대표회장 같은 직책은 다 끝난 사람이지만 여전히 한국교회의 공적 사역과 연합사역을 생각하면 마음에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는데, 제가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연합기관의 통합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을 단풍도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 건물만 보였습니다. “이쪽에는 어느 교회가 있지, 저쪽에는 어느 교회가 있지. 그런데 이 모든 교회들이 연합해서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습니다. 세부 통합 결의까지 다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계속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삼십 수년 전 소강석은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위해서 물었다면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의 저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가야 할 방향성을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남산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저의 질문은 저녁 식사 약속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계속되어졌습니다. 삼십 수년 전 남산에서의 추억이 현재 한국교회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으로 재발견되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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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1-1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간절함이 없는 자리, 핑계뿐”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집회와 세미나를 해왔습니다. 어쩌면 저만큼 많은 연합집회와 목회자 세미나를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흰돌산기도원에서 4천 명이 모여 2박 3일 동안 했던 목회자 세미나, 또 양수리수양관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한신목회세미나에는 단골 강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각 교단과 신대원에서 하는 세미나나 특강을 셀 수 없이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2,500여 명의 목회자들이 모인 생명나무 목회 컨퍼런스를 몇 번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600여 명의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위드 코로나 세미나를 하며 1인당 백만 원 이상을 드리며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갖고 강의 원고도 제가 다 작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부교역자들에게 돌리고, 몇 분의 전문가에게 보내서 보완할 것 있으면 보완의 의견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보완해 준 부분도 있지만, 손볼 데가 없을 정도로 원고 내용이 충실하고 원고만 봐도 가슴에 전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원고를 보고 또 보면서 부족한 부분은 빨간펜으로 내용을 보완하였습니다.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내용인데도 원고를 또 보고 또 보았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가장 어려운 때 성도들의 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헌금으로 컨퍼런스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500명이 넘는 미자립 교회에 100만 원씩 지원금을 준다는 것이 보통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행정비, 광고비 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제가 간절한 마음을 안 가질 수가 없지요. 또 미자립교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코로나 후유증을 극복하고 초토화된 예배를 회복하며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런 기대감을 갖고 온 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생각하니까 간절함이 안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이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목사님들이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거의 한 사람도 꿈쩍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을 하였습니다. 자립교회 목사님들도 교회 세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강의 초두에서 이 세상에 새로운 교회는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는 진정한 모델 교회도 없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모델 교회는 어뉴 처치(Anew Church), 즉 성경적 원형교회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새에덴교회도 모델 교회가 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성경적 원형 교회로 가기 위해 새에덴교회가 어떻게 최선을 다했고 몸부림 쳤는가를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팬데믹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함께 우리의 공적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가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함이 있으면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길이 보이고 방법이 보이고, 얼마든지 하이 콘셉트를 가지고 창의적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맨날 핑계만 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코로나 팬데믹 때 얼마나 간절함을 가졌었던가요. 지금도 얼마나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가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성도를 향한 간절함, 교회 세움을 향한 간절함이 얼마나 있는가요.” 제가 목사님들께 묻고 되물으면서 찬양과 기도도 인도했습니다. 원래 강의를 맡긴 부교육자들에게는 약 30분씩 강의 시간을 주기로 했는데, 제가 워낙 마음이 좋아가지고 “여유를 갖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정해진 시간을 넘겼습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제가 강의를 마무리 할 때는 시간에 쫓긴 것입니다. 제가 넉넉하게 마무리를 하고 자세히 강의를 해야 되는데 시간에 쫓겼습니다. 그렇다고 저녁 늦게까지 붙들어 둘 수도 없는 것이고요. 제가 만약에 3, 40분만 더 활용했더라면 마지막에 찬송도 하고 기도회도 하면서 목사님들의 눈이 눈물로 흠뻑 젖어 흐르도록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박주옥 음악목사님도 목사님들 앞에서 노래를 한 곡하기를 원해서 그 희망도 들어주고, 또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 시간도 준 것입니다. 결국 제 강의 시간을 다 할애해 준 것이죠. 물론, 아쉬움이 있는 만큼 저는 강의에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마치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내고 입술에 모터를 단 것처럼 긴박한 강의, 간절함이 넘치는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강의 시간이 축소되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이 다 전달됐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것들은 다 알아들었다고 위로를 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곳은 길과 방법이 보이고 간절함이 없는 자리에는 핑계뿐이라고.” 부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교회 세움을 향하여 헌신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참석한 모든 목회자들에게 간절함의 나비 효과가 더 크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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