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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생명과 평안’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산에 올라갔는데 모기들이 새까맣게 제 주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의 몸에 모여드는 모기들은 암컷들이라고 합니다. 원래 모기의 음식은 꿀과 달콤한 식물즙이면 충분하지만, 산란을 위해서는 단백질과 철분이 필요하므로 동물들에게 모여든다고 합니다. 모기들은 땀내가 많이 나는 먹잇감을 특히 좋아하고 대체로 A형보다 O형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뿌리는 모기약도 있지만, 오늘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부채로 쫓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쫓으면 그뿐이었습니다.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철분과 단백질이라는 먹잇감이 있고 냄새가 그들을 유혹하였기 때문에 모기가 저에게 달려들었던 것처럼, 마귀가 신앙인들을 공격하는 것 역시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먹잇감이 있고 또한 그들이 좋아하는 냄새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먹잇감이 무엇이며 그들이 좋아하는 냄새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뜨린 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3:14). 뱀의 음식을 흙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뱀은 개구리나 쥐와 같은 동물들을 잡아먹습니다. 흙을 먹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잘 못 말씀하신 것일까요?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은 사탄의 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생기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서 생명의 호흡이 빠지면 흙만 남습니다. 그 흙은 육신입니다. 뱀에게 ‘흙을 먹고 살라.’는 의미는 육신을 먹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육신의 속성을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 육신대로 살아가면 자신 안에 역사하는 사탄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신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 사탄은 점점 쇠약해져 힘을 못 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육신의 속성이 강하고 육신의 속성을 제어 못 하는 사람을 유혹하고 그런 사람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모기를 퇴치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모기가 싫어하는 냄새를 몸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기가 아예 접근을 못하거나 질식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육신을 추구하고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모여들지만 이런 사람이라도 돌이켜 사탄이 싫어하는 속사람 생명을 따라 살아가면 그들의 밥이 없어져서 피하고 맙니다. 사탄으로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마2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나 까마귀들이 모여듭니다. 마귀는 육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노립니다. 사람들의 육신의 속성은 그들의 밥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들은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8:5-6). 우리 자신이 육신적인 사람인지 영적인 사람인지 아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면 됩니다. 오감에 자극을 받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끌려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육적인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육신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사방이 평안해지지만 보이는 것에 지배를 받아 살아 간다면, 사방에 대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면 평안과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족하여집니다(사33:6). 영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마귀들에게는 에프킬러나 몸에 뿌리는 모기약과 같습니다. 마귀들이 끔찍이 싫어하는 냄새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냄새가 생명에 이르는 향기입니다(고후2:16).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려면 자기를 부인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썩은 냄새입니다. 아무리 냄새를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것은 고약한 악취입니다. 이러한 악취도 마귀들에게는 향기입니다. 신앙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참되다고 하였습니다. 그 속에 불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요7:17-18).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행하지 않습니다. 오직 보냄을 받아 보내신 이의 영광만 위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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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생명과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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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⓶
- 3. 하나님의 형상에는 가치의 도가 들어 있습니다. ‘가치의 도’는 ‘나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의 체(體)와 용(用)의 혼합적 의미를 말합니다. 사람의 체(영혼, 육체)도 가치가 있고, 사람의 용인 여러 가지 당위도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금은 사람과 비교 대상도 아닙니다. 우리가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실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사실입니다. 이사야 53장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지극히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세상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가치입니다. 4. 죄로 인해 상실되고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요? 로마서 5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의(하나님 형상의 회복)→하나님과 화평(하나님과 관계의 회복) 믿음이 공로가 아닌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과 관계도 회복됩니다. 이 귀한 일을 이루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도입니다. 에무나(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와 페이도(신약에서 말하는 믿음인 피스티스의 어원)의 의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칭의의 도는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씀, 우리의 공로, 우리의 경건으로 의인이 된다면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얼마만큼 힘써야하고, 얼마만큼 공로를 쌓아야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공로 주의는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결국 좌절에 빠지게 되고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믿음으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믿음의 도는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은혜입니다. 이 좋은 믿음의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5.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알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높은 자존감을 누립니다. 시편 8편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사람의 정체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입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재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식이 있으며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자존의식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긍정적이고, 밝은 정서를 가집니다. 명랑합니다. 자존의식이 있기 때문에 깊고 깊은 세계를 탐구합니다. 높고 높은 경지를 추구합니다.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알면 높은 성취동기를 갖게 됩니다. 나의 존재와 당위, 가치를 알면 나의 인생의 구현을 위하여 매진합니다. 높은 도덕성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의 도와 당위의도, 가치의 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므로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행복을 누립니다. 나의 정체를 아는 것은 행복의 조건인 지성적 조건 가운데 하나를 충족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정체를 알면 과욕을 품지 않습니다. 절대자가 되려고 한다든지, 신이 되려고 한다든지, 절대 권력자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로서 만족하고 행복을 누립니다.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알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아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감사의 도를 체득합니다. 시편 100편 3∼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 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를 존귀한 백성으로 삼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길러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됨을 감사합니다.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변함없이 진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은혜를 온전히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이귀열목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전북신학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전북 전주 완산구 서신동에 개척한 국제독립교회연합회소속 생명의빛교회는 하나님을 믿기에 행복한 성도들이 힘차게 복음 전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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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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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⓵
- 사람은 누구나 궁극적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즉 인간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의문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먹었던 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먹은 쌀이 나이고, 김치가 나이고, 상추, 쑥갓, 물, … 그런 것들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유물주의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정체를 정의합니다. 이런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성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가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돼지, 말, 토끼, 너구리, 닭, 거북이, 개구리, … 그런 것들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인과 관계에 의해서 인간을 바라보는 불교 윤회설의 입장입니다. 이런 인간관에서도 인간의 가치, 도덕성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영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란 도덕성을 가진 자연만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유학에서는 도덕성 유무에 따라서 존재의 가치를 논합니다. 유학에서 인간을 도덕성으로 이해한 것은 장점입니다. 그러나 도덕성은 인간 정체(identity)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정체에 대해서 처음부터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무한에 가까운 좋은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무한히 귀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해서 불교는 유(有)에서 환(幻)(有→幻)을 말하고, 유학은 유(有)에서 실(實)(有→實)을 말하며, 기독교는 무(無)에서 유(有)(無→有)를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따라서 인생이 전혀 다른 길을 갑니다. 성경의 인간론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가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7절). 사람의 정체를 정확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노소, 인종, 구분 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은 사람이란 유한성과 무한성을 겸비한 존재임을 계시하여 줍니다. 전인격으로서 인간은 시작은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존재의 도, 당위의 도, 가치의 도가 들어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에는 인간 존재의 도가 들어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체(體, substance)에 대한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 존재 질문에 대한 답이 ‘존재의 도’입니다. 전인격(영혼과 몸)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영혼은 지·정·의의 인격을 가진 생명체입니다. 실체입니다. 존재입니다. 영혼이 하나님 형상의 좌소(座所)입니다. 몸은 하나님 형상을 드러내는 기관입니다. 실체입니다. 존재입니다. 하나님 형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 26∼31절을 통하여 사람의 정체를 관조해야 합니다. 창 1: 26∼31에서 사람은 5가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는데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합하여 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유방식과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된 존재방식은 우리들에게 불가해한 일입니다. 우리의 이해의 한계를 초월한 영역입니다. ‘따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존유’와 ‘인간 존재’의 관계를 말합니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유하심을 따라 인간 존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죽습니다. 둘째,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은 모든 것을 다스림을 통하여 하나님을 땅위에 나타내는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신화(神化)되어 하나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창조적 지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셋째, ‘남자와 여자’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는 것입니다. 넷째, ‘복을 누리는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창 1: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복일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복을 누리는 자로 창조 받았습니다. 하늘의 복과 땅의 복,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 현재의 복과 영원한 복, …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 입니다. 다섯째, ‘심히 좋은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인간 존재의 좋음은 그 깊이, 높이, 크기, 정미함, 오묘함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본래 우리는 이처럼 매우 아름답고 좋은 존재입니다. 영혼도 아름답고, 육체도 아름답습니다. 영혼도 매우 좋은 존재이고, 육체도 매우 좋은 존재입니다. 전인격이 매우 아름답고 좋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전인격이 진·선·미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의 모습입니다. <2편에 계속> ◇이귀열목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전북신학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전북 전주 완산구 서신동에 개척한 국제독립교회연합회소속 생명의빛교회는 하나님을 믿기에 행복한 성도들이 힘차게 복음 전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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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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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먼저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회사에서의 진급이나 군대에서의 진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지 못할 때 구성원들 사이에는 불평불만이 쏟아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원칙을 깨뜨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은 사람보다 신앙에 있어서 뒤처지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이유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공회의원이면서 부자였던 한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왔지만 많은 재산을 팔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마19:21-22). 반면에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마9:9, 눅5:11). 바울 사도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빌3:13-14). 이처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의 조건은 주님을 믿는데 지장이 되는 것을 버리는 데 있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7). 예수님의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의 비유는 포도원의 품꾼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마20:1-16).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당 15만 원을 주기로 약속하고, 새벽 여섯 시에 일군을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 장터에 가보니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 역시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정오에도, 오후 세 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보니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아직 일을 찾지 못하고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오후 여섯 시가 되자 포도원 주인은 일과를 마치게 하고 일군들에게 삯을 주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뜻밖에 십오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오후 세 시에 시작한 사람과 정오에 시작한 사람, 오전 아홉 시에 시작한 사람, 새벽 여섯 시에 시작한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들에게 줄 몫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15만 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따지듯 말하였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4-15).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온 사람의 차이가 본문 가운데 드러나지 않지만 먼저 온 사람들의 말에 그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의 말 속에는 기쁨으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일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 시간만 일을 한 사람들의 태도는 다를 것입니다. 그동안 수십 곳에 서류를 집어넣었지만 통과되지 않다가 뒤늦게 그를 고용해준 주인이 너무나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이 천국에 합당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마음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과 보답하는 자세, 기쁨으로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먼저 온 자가 먼저 될 기회는 늦게 온 자가 먼저 되는 기회보다 훨씬 많습니다. 바로 많은 시간 때문입니다. 그 시간들을 허투로 쓰지 않는다면 영적인 성장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인한 교만과, 타성에 젖은 태도가 뒤처지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온 자로서 계속 먼저 되기 위해서는 나중 온 사람처럼 보답하는 자세와 겸손한 태도와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셋째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경우로는 회개 여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가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마21:28).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가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라고 대답하였지만, 곧 뉘우치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둘째 아들이 첫째 아들보다 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하고 순종한 세리와 창기들이, 말뿐이며 행함이 없는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21:3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 맺은 사람들을 먼저 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구원 얻는 사람이 적은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결론적으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13:30)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버렸는지, 겸손과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썼는지 여부가 먼저 된 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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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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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타인의 잘못 때문에’
- “시므이가 그 종을 찾으려고 일어나 그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가드로 가서 아기스에게 나아가 그 종을 가드에서 데려왔더니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에 갔다가 돌아온 일을 혹이 솔로몬에게 고한지라.”(왕상2:40-41). 운전면허를 딴 후 얼마간 장롱 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득이하게 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 한 형제로부터 연수를 받을 때였습니다. 우회전을 위하여 도로 갓길을 서행하고 있었는데 앞에 가는 차가 갑자기 정차하였습니다. 조금만 비키면 된다는 생각에 핸들을 살짝 좌로 돌려 옆 차선을 걸치려고 하자 조수석에 있던 형제가 저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앞차가 다시 갈 때까지 기다리던지, 아니면 좌측 차선을 보고 지나가는 차가 없으면 그때 옆 차선을 걸치세요. 조금만 비켜 가면 된다는 생각에 사이드미러도 보지 않는다면 접촉사고 내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왜 타인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사고를 내야 합니까?” 성경에는 타인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술에 취하여 발가벗고 장막에 드러누운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형 샘과 야벳에게 비난한 후 아버지로부터 저주의 경고를 받았습니다(창9:22,24,25). 그로 인하여 함의 아들이었던 가나안의 후손은 기브온 족속만 빼고(창9:26), 여호수아에 의하여 거의 전멸 당하다시피 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이 동족 히브리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출2:11-12). 애굽 사람은 조금 잘못했지만, 그는 가장 큰 범죄 가운데 하나인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결국 그의 살인이 애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는 애굽에 있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 동족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타인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생활할 때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며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 때문에 분냄을 인하여 그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민20:12). 본문 말씀에서 언급했듯이 다윗을 저주한 후 솔로몬으로부터 예루살렘 밖을 벗어나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시므이는, 3년 후에 그의 종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가자 그를 잡으려고 예루살렘 경계에 있는 기드론 시내를 건넜습니다. 비록 종은 잡아 왔지만 그가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는 소문이 솔로몬에게 들려왔습니다. 솔로몬은 그가 경고한 대로 사람을 보내 시므이를 죽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므이는 타인의 작은 잘못을 고치려다 자신이 사형에 이르는 잘못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왕상2:36-46).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간음한 후 밧세바가 잉태하자 우리아를 전쟁터에 죽게 하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를 책망하였을 때 다윗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삼하12:13-15). 그러나 죗값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죄가 뿌리가 되어 밧세바가 낳은 아들과 암논과 압살롬과 아도니아가 죽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받은 죗값과는 별도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삼하12:13). 그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과 계속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의 조부였던 아히도벨은 다윗을 용서하지 못하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습니다. 압살롬에게 베푼 그의 모사는 다윗이 심어둔 후세에 의하여 패하여지고, 전쟁의 결과를 예측한 그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삼하17:23). 다윗의 잘못을 복수하려다가 자신은 더 큰 죄를 짓고 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남의 잘못을 고치려다 자신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예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물타기 위하여 저의 행동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와 저의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그 상황이 전혀 같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한마디 해줄까 하려다가 하나님께 믿고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저보다 저를 잘 변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쑥 말을 꺼냈다면 죄까지는 아니겠지만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부덕을 행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고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2중, 3중, 4중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범죄도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점점 확대될 수 있습니다. 모방범죄는 두말할 나위 없지만, 문제는 잘못을 고쳐주려다가, 잘 해결해주려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 감정이 불순한 상태라면 죄를 낳을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1-2). 타인의 범죄를 볼 때 우리의 태도가 첫째는 온유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유는 격동 받는 마음 없이 성령이 함께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는 회개할 기회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자신도 시험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험은 유혹(temptation)을 의미합니다. 자신도 거기에 동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넷째는 그 사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잘못 때문에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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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타인의 잘못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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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선(dead line)을 지키라’
- “왕이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2:36-37). 며칠 전 길을 가다가 유리조각들이 길에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앙선 넘어 90도로 뒤집혀 있는 차를 보았습니다. 대형 사고였습니다. 이처럼 차는 생활 속에서 편리한 것이지만, 중앙선을 넘어서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신앙인들 사이에도 멈추어야 할 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그들의 사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선을 넘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말씀대로 영적 죽음과 에덴 낙원에서 쫓겨나는 일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창3:23-24).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에게 솔로몬은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2:37-38) 라고 말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아도니아가 죽었고, 요압도 죽고, 아비아달은 고향으로 추방당하던 때에 시므이는 떨면서 솔로몬에게 갔을 것입니다. 죽을 줄만 알았던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징벌은 뜻밖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종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과도 같았습니다. 시므이는 둘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하여 재산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죽음을 무릅쓰고 재산을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후자를 택하였습니다. 사선을 넘은 결과 종은 찾아왔지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또 “여호와께서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잠15:25)라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자의 지경 역시 하나님께서 넘지 말라고 하시는 사선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이 어려워지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안 할 텐데......’ 하며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이나 하와보다 나을까요? 만일 우리가 아담이었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하와가 권하는데도 먹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고 말합니다. 반드시는 정녕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라는 사선 앞에 서 있는 우리의 형편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앞에 서 있는 아담과 하와의 형편과 다를 것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한 번이라도 육신대로 살지 않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것처럼 우리는 수 없이 육신대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선은 육신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것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기록한 말씀처럼 흑암과 사망의 그늘, 곤고와 쇠사슬과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시107:10).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그런 일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사선이 육신인 줄을 깨닫고 신앙인들은 정신을 차려서 육신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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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선(dead line)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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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통회’
-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통회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프게 뉘우친다는 뜻이며, 히브리말로는 ‘다카’로써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잘게 쪼개어진 어떤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 말이 ‘통회하는 자’ 로 쓰일 때는 ‘상한 자’ ‘겸비한 자’란 뜻으로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신앙인들이 돌이키고 반성을 해도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는 돌이키고 반성하는 정도가 아프게 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식적이거나, 여전히 죄를 좋아하면서 단지 징계가 무서워서 하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 반성하지만, 그 반성은 그 일이 잘 못 된 것이고, 옳지 않은 것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꾸지람이나 채찍이 무서워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출5:1).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고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끝나면 “언제 약속했냐?”는 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에 더 큰 재앙을 내리셨고, 이때도 바로는 회개하는 척하였지만, 한숨 돌릴만하면 이전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애굽은 점점 더 황폐해갔고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냈습니다(출12:30-31). 바로에게 어려운 일들이 반복된 것은, 그 마음이 강퍅하여 거짓 회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아픔 때문에, 징계가 무서워서 하는 회개가 아니라, 했던 일들이 옳지 않고 선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이런 회개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함께 하십니다. 다윗은 비록 왕이 되었지만, 육신은 여느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밧세바가 벌거벗고 목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음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신하를 보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온 후 동침 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잉태하자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맹렬한 전투 앞에서 싸우게 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감쪽같이 해치운 줄 알았지만,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를 강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는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12:10-12). 다윗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하며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시 51편은 그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시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그는 비록 자신의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보고 용서하였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보고 탄식하며, 통회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사57:15).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통회하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난처하고 힘든 환경에서 풀리면 이전 죄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진심으로 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잠5:22). 다윗을 무시하고 사울의 군장 아브넬과, 이모의 아들 아마사와,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그 때마다 무사한 듯 하였지만 최후 아도니아의 반란에 가입하여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왕상2:34). 성경에 요압이 자기의 잘못을 돌이켰다는 내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자기 악에 자기가 걸리고 만 것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던 아도니아는 솔로몬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진대 그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저의 가운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왕상1:52)라고 하며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통회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아버지의 후궁과 다름없는 아비삭을 솔로몬에게 구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죄악에 걸려든 것입니다. 이처럼 아프게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꼬리가 결국 밟히고 맙니다. 자신의 죄가 자기를 적발하고 맙니다(창44: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 자신의 악이 자기를 징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회개하되 진실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통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죄를 이기고 버리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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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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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벽을 만나면’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지난 2월 7일 한국 쇼트트랙 대표 황대헌 선수, 이준서 선수가 1000미터 경기에서 무난히 결승에 진출한 듯싶었으나 비디오 판독 결과 이해하기 어려운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준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로 개최국인 중국 선수가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에 한국 선수단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CAS에 제소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판정의 부당함을 공식화해 다시는 국제 빙상계와 스포츠계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억울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황대헌 선수는 이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인스타 스토리에 글을 올렸습니다. “장애물이 반드시 너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벽을 만나면 돌아가거나 포기하지 마라. 어떻게 그 벽을 오를지 해결책을 찾고 그 벽을 이겨내라.” 이 글은 미국 농구 황제라 불리는 마이클 조던의 책에서 인용한 글이라고 합니다. 정작 자신은 편파 판정의 벽에 흔들리지 않고 뛰어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는 이틀 뒤 1,500m에서 극적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판정시비의 실마리를 없애고 세 번째 바퀴부터 선두를 유지하였습니다. 그가 1,000m 경기에서 상처를 받고 낙심했더라면 더 나아가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전 것은 잃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소원이었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편파 판정이라는 벽을 보고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벽을 넘었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벽을 만날 것입니다. 그 벽은 이기고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돌아서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탐을 다녀왔던 12명의 족장 중 10명은 가나안 땅의 벽을 보았습니다. 장대한 아낙의 후손을 보았습니다(민13:32).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벽을 본 것이 아니라, 벽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결과, 아낙 자손은 벽이 아니라 밥이었습니다(민14:6-10).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벽으로 느꼈던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들을 무시하여도 싸울 생각도, 한 마디 대꾸할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인 골리앗이 벽이 아니라, 오히려 물매를 정조준할 범위가 넓은 표적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답답한 일을 만나도, 벽과 같은 일을 만나도, 쌓이지 않는 이유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 죽인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지면 답답한 일을 이길 수 있고 넘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죽이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여러 가지 일들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임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땅에 곡식을 사러 갔습니다. 그곳에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형님들에게 자신을 숨긴 채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므온만 옥에 남겨둔 채 형님들의 각각의 자루에 곡식과 돈을 넣고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생각에는 요셉은 죽었고, 시므온은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베냐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을 보내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 하며 보냈습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하는 자세, 그것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자세입니다. 그가 잃고자 하였을 때 그는 베냐민은 물론, 죽은 줄 알았던 요셉도 베냐민도 시므온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 역시 하만이 페르시아 지방의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할 때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아하수에르 왕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유대인 모두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에4:16). 이처럼 십자가는 벽을 넘고, 벽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부르심의 상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푯대가 있습니다. 달려갈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시는 존귀와 영광과 칭찬입니다(벧전1:7).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때, 벽이 있을지라도 십자가를 몸에 진다면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그 벽을 이기고 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 대신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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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벽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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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진심으로 용서하라’
-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3). 마18:15-35는 용서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용서했다고 하지만 그 형제를 보면 다시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다면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했을까요? 오늘은 중심으로 용서하는 법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용서’하면 우리는 자신이 용서해야 할 사람은 많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나 형제들에게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나 타인에게 지은 죄들이 많다고 하십니다.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들이 많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비유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예입니다(마18:21-35). 일만 달란트를 오늘날 환산하면 최소 10조가량 됩니다. 임금에게 10조 빚진 종이 빚을 독촉하는 임금에게 싹싹 빌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그 종에게도 천만 원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0조에 비하면 천만 원은 지극히 적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에게 천만 원 빚진 동관을 탕감하기는커녕, 다 갚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노하며 그 악한 종에게 이전 탕감해주었던 것을 모두 갚도록 하였습니다. 악한 종은 오늘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소탐대실이라고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 못 한다면,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탕감받은 우리의 죄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제가 이십 대 때의 일입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가끔 인사하는 정도의 형제에게 “살 좀 빼시죠.”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비싼 밥 먹고 찐 살인데 당신이 뭔데 빼라 마라 해?” 저는 그런 말이 그렇게 실례되는 말인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이런 말은 제 사촌 누이에게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가 버럭 화내는 것을 보고 비로소 제가 동생에게도 실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례는 단지 드러난 일일 뿐입니다. 그 형제처럼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 말이나 무례함으로 인하여 속으로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흔히 “아직도 장가(시집) 안 갔어? 총각(처녀)으로 늙을 거야?” 등도 실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하는 말이지만 예민한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친 관심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허물 많은 우리가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들이 훨씬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심정으로 형제를 너그럽게 대하여 줄 것입니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긍휼을 조금만 심었는데, 거두는 열매는 100배 많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용서를 심어서 용서를 거두어야 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백번 천번 잘 대해주다가도 한번 잘 못 하면 토라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섭섭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섭섭한 면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과거에 우리에게 한 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 섭섭한 일들에 대한 상처를 지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탕감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형제에게 무례가 많이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형제로부터 받은 은혜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등이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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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진심으로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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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합심기도 왜 드려야하는가’
-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합심 기도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힘을 합하여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악한 영들과 죄는 꽁꽁 묶도록 기도하며, 성도들은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을 얻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하고 바른길로 들어서도록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며, 넓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범사에 합심 기도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두세 사람의 의미는 교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힘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합심 기도와 그 능력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생활 중 제일 먼저 마주한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섰고 여호수아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지만,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출17:8~16).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놓고 그 위에 모세를 앉게 한 후 둘이 양편에 서서 모세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의 손은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전쟁터에 있는 여호수아와 군인들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습니다. 모세가 손을 든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세 혼자서 할 수 없는 기도를 아론과 훌이 도왔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말렉을 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전방에 있는 사람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한 엘리제사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을 때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고 합심하여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런 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시 침입했을 때 이스라엘은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삼상7:11).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왕이 꾸었던 꿈을 알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단2:17~18). 그 결과 왕이 놓쳐버렸던 꿈이 다니엘에게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단2:29-35). 예수님 승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행1:12-14). 그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었습니다(행2:4). 또 헤롯이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그를 옥에 가두었을 때 형제들은 마가의 집에 모여 그를 위하여 일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천사가 베드로 곁에 와서 쇠사슬을 풀어주고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마가의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행12:5,7). 점하는 귀신 들린 여인의 귀신을 쫓아주고도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예수님께서는 왜 합심 기도를 강조하셨을까요?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기름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부어 주시는데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연합하여 몸이 된 형제들에게까지 성령의 기름이 흘러 내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연합한 곳에서 강하게 임합니다. 곧 교회의 최소 단위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합심하여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복을 명하십니다. 성령은 개인적으로 임하기도 하지만 가장 강하게 임할 때는 신앙인들이 교회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11, 17, 3:29, 6, 13, 22)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성령이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면 정성을 다하여 예배에 참석할 뿐 아니라 몸의 지체로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합심 기도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뜻을 합하여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합심기도는 사욕을 제어합니다. 합심 기도하면 사욕을 좇는 기도보다는 서로의 목표를 위하고 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합심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중보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심정을 갖게 합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라고 말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닙니다. 셋이 될 수도 있고 넷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은 혼자서는 탈 수 없습니다. 모여야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산술적으로 둘이지만 실제는 셋도 되고 열도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할 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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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합심기도 왜 드려야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