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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양이 이리 가운데 사는 법’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마10:16).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제자들을 보내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양과 이리의 관계는 천적 관계입니다. 초식동물인 양이 육식동물인 이리에게 먹히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행위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아멘”하는 바이겠지만 뱀을 지혜의 상징적인 동물로 비유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외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뱀을 좋아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뱀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최초 조상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서 뱀은 사탄으로 상징되고(계12:9), 외식과 악독이 가득한 사람(마23:33)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뱀에 대한 기본적인 이미지를 깨뜨립니다. 이리 앞에 있는 양과 같은 형편에 있는 신앙인들이 대처할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뱀들이 이 말씀을 안다면 자신들의 저주가 풀렸다고 환호할 것입니다. 딤전4:4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뱀마저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선한 동물입니다. 단지 그가 사탄에게 쓰임 받을 때는 악한 동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뱀의 어떤 모습이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지혜의 모습일까요? 성경학자에 따라서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보는 주석들에 의하면 ‘신중한 분별력’을 상징한다는 견해, ‘뱀이 자기 밖에 있는 마귀의 지혜를 받아서 사용한 것처럼, 성도도 자기 밖에 있는 신의 지혜 즉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사용하라는 뜻’이라는 견해, ‘전도자가 어떤 위험한 일을 인하여 그 전하는 진리를 가리거나 구부러뜨리거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 등이 있습니다. 모두 일리가 있고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시키기 위하여 여자가 태어나면 살리고 남자가 태어나면 나일 강 하수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석 달을 숨겼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바로의 전멸 작전이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전은 미리암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가슴 졸이며 길렀던 모세는 바로의 집에 들어가 그의 어머니 요게벳에 의하여 수고비를 받으면서 길러집니다. 미리암에게 위에서 언급한 뱀과 같은 지혜가 발동한 것입니다. 저를 지도했던 안병모 목사님은 뱀의 지혜에 대하여 미7:17을 근거로 하셨습니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뱀의 티끌을 핥는 모습,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다 비둘기처럼 순결함, 곧 순수함과 정결함이 더해져야 이리처럼 사나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각각 그릇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였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의 칼날에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요한은 살아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는 사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요한처럼 세상에 존재하면서 날마다 자기 몸을 쳐 복종함으로 매일 순교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언급한적 있지만, 김현봉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도록 통지서가 배달되면, 자신만 알고 교인들에게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 번은 일본 형사가 김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김목사님은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하여 양쪽에 변을 담은 지게를 진 채 걷고 있었습니다. “김현봉” 하고 부르니 “예” 하고는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형사의 독기 서린 눈을 바라보면 자신도 마귀가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형사는 그의 하고 있는 일과 누더기 차림의 모양새를 한참동안 살펴보더니 아무 말 없이 가버렸습니다. 또 한 번은 무슨 행사를 하였을 때였습니다. 200명의 목사님들이 조선 총독부에 모여 남산에 함께 신사 참배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한 사람과 김현봉 목사님을 지명하여 준비위원으로 남으라고 하기에 ‘준비위원이 뭐야?’ 하시면서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정봉기 글에서 발췌). 습2:3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바로 공의와 겸손은 지혜이며 또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받게 합니다. 우리는 한 세기의 재앙이라고 하는 코로나19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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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3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와 모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49~5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있었던 내용입니다. 그곳 또한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환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하고 눈먼 자 속에 들어 있던 귀신을 내어 쫓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고 보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실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의 하신 일을 오염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12:24).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이라고 모독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는 “예수의 친속들이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한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삽시간에 그 지방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 누이들에게까지 그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오늘날 고쳐야 할 것입니다. 통신수단이 발달 된 오늘날에는 천리, 만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까지 삽시간에 퍼지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그 사실을 누군가 알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며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모친과 동생들이라고 지시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둘러앉은 자들”(막3:34)로 나옵니다. 둘러앉은 자들이나 제자들의 공통점은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도 거기 있었겠지만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하여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 흠을 잡기 위하여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해당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 말씀을 듣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은 그 순간 예수님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퍼뜨린 소문을 듣고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아무리 친족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세상 말, 철학과 사상에 귀를 기울인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습니다(요10:26). 예수님께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요5:25).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내려오십니다(행10:44).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기갈이 임합니다(암8:11). 어릴 적에 복사기 대신에 묵지가 있었습니다. 백지와 백지 사이에 묵지를 놓으면 글씨를 쓸 때 아래 백지까지 글씨가 복사됩니다. 영적인 기갈은 육적으로 환경으로 번지게 되어 말할 수 없이 삶이 피폐해집니다. 피곤하고 지치게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과 죄수를 태우고 이탈리아로 가던 백부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다가 자신은 물론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죽을 뻔한 고생을 당하게 됩니다. 요나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타다가 큰 풍랑을 만나 내던져지고 마침내 고래 배속에서 사흘을 회개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과 지혜로 행하거나, 상책을 좇아 살아가거나,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간 결과 깊은 밤을 만나게 됩니다. 전5:1은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처럼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신4: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기도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요7:17). 뿐만 아니라 말씀에 합당한 선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벧전3:21).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장 시초는 바로 주님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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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3
  • [WAIC 데일리 기도] 김형욱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 회복을 위한 기도’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지 벌써 8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바이러스는 정복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회복되지 않는 일상도 아닙니다. 진정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거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이러스 뿐 아니라 이상 기후, 화재, 물난리, 지진 등 수많은 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내어도 그것을 하늘과 하나님과 연결 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기후의 문제요, 자연의 문제지 영적인 것이라든지, 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하늘의 하나님과 연결 되어 있음을 깨닫는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무너진 이유가 방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한번도 영원한 나라와 거룩한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이 땅의 무능함과 덧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이 말씀하는 영원한 나라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에 소망의 빛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맛을 내며 빛을 비춰야 할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히려 세상에 짐이 되어버린 것을 봅니다. 세상이 악하여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야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고집과 더러움, 죄악 됨으로 인해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고, 바른 자리를 찾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코로나 사태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회복케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회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죄를 버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가 아닌, 자신들이 선출한 아론과 함께 우상숭배하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돈이 신이고, 힘이 신이고, 성공이 신이며, 명예가 하나님인양 지금까지 달려온 교회의 모습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세상을 탓하고, 남을 탓하던 자리에서 자신의 죄악을 바라보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공예배는 어느 정도 회복의 기미가 보입니다. 그러나 주일학교와 소그룹, 함께 나누는 식탁교제 등 우리의 공동체에는 넘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복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회복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세상은 이제 코로나를 종식시키거나 극복하자고 말하기 보다는 ‘WITH 코로나’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그러한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코로나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나가며,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할 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이러한 어려움이 우리가 개혁되고, 정결해지는 기회가 되게 하옵시고 지혜롭게 나아가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울 때는 회개하는 태도를 가지려다가 조금만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강퍅해진 애굽의 바로처럼 살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1단계로 하향조정 되고, 우리의 일상이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고 또다시 하나님과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지는 교회들이 되지 않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국가는 국가의 일을 잘 감당하여 방역에 만전을 기하게 하시고, 교회는 교회의 일을 잘 감당하여 선지자적 사명과 기도하는 사명에 매진하게 하옵소서.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느끼며 가치 있는 것과 영적인 것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사회와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고통스런 현실 가운데서도 몸 된 교회를 더욱 지켜 주시시라 믿고 힘차게 살아가는 교회들이 되게 하옵소서. 교회가 먼저 회복되고, 사회가 질서를 잡으며 우리의 일상을 회복케 하실 주님을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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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습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깨어지고 일그러져 폐기처분 될 일들도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온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신 사실에 대하여 일일이 열거하려면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사업만 보더라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아예 없애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그를 믿는 만백성을 구속하시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은 자매 사이였지만 서로 야곱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다투는 경쟁 사이였습니다. 자녀 낳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경쟁 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태어나도록 하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형님들에 의하여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 되게 하여 애굽 거민들만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잔혹한 성격으로 인하여 그들의 후손을 열 두 지파에 흩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각 지파의 제사장 역할을 하게 하는 선을 이루었습니다(창49:7). 야곱의 아들 유다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며느리 다말을 거리의 창녀로 오해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쌍둥이 형제 곧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실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셔서 베레스의 후손 가운데 다윗과 예수님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게 한 다윗이었기 때문에 그의 죗값을 톡톡히 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셔서 밧세바를 통하여 솔로몬을 낳게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인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좋은 일 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자 지진이 일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바울 일행이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될 때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들은 결과 그들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 광풍은 배를 파괴하고 바울 일행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뜻 밖에 멜레데라 하는 섬에 석 달 동안 머물게 됨으로, 그 사이 거기 있는 추장과 원주민들의 병을 고치도록 하는 선을 이루었습니다. 어디 병 뿐이겠습니까? 병으로 인하여 복음을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평생 청빈과 순결로 십자가를 몸소 실천하신 김현봉 목사님(1965년 별세)께서 그렇게 하신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1938년 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 되었을 때였고, 둘째는 6.25의 피난 기간이었습니다. 신사참배가 총회적으로 가결 되자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고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인도하며 자신 역시 바르게 살 수 있을까?’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깎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습니다(그 분은 십자가의 형식보다는 몸에 녹아지는 십자가의 삶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필자 주). 목사님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6.25 때입니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장소를 늘렸습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습니다. 목사님은 삼각산에 들어가 38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회개 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는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하였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정봉기 목사 글. 윗글로 비추어 본다면 김현봉 목사님이 십자가의 삶을 직접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계기가 역설적이게도 한국사와 교회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라고 할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삶을 몸소 실천하게끔 한 계기가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가결이었다면, 교회를 부흥케 한 계기 역시 6.25동란이라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 하수에 버리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의 집에서 애굽에 재앙을 가져오고 이스라엘을 구출한 모세를 키우게 하셨듯이 이 두 사건이 김현봉 목사님이라는 한국 교회에 숨겨진 보물을 보물답게 하신 것입니다. 신사참배의 치욕과 6.25의 비극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코로나를 통하여서 분명히 한국 기독교 신자들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 신자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조건이어야 합니다. 깨어있어 기도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코로나19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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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 편에 선 사람’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5:13-15).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인 여리고성 앞에 섰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인지, 이스라엘의 대적을 위하는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도 대적을 위하는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좌편이냐 우편이냐, 보수냐 진보냐 등으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같은 소속감을 가지고 생각을 공유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합심해서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일이 발생하면 사건에 대한 객관성보다는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어느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윤리 기준도 달라집니다. 그가 속한 집단이 권력을 가진 단체라면, 현저히 드러나는 잘못된 사건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중간지점은 더욱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말처럼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의 대적도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을 옳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옳지 않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조차도 정치 이념에 빠져 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만일 그 사람이 자기들을 위한다면 그를 시험하여 역할을 분담하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맞는 활동을 지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 그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지시를 받을 위치가 아니라 여호수아를 지시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신은 발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신은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적 몸을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뜻합니다(골2:11). 또한 당시 종들은 신을 벗고 살았습니다. 자유인과 종을 분간하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곧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는 말은 임의로 행동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님편이 아니면 사탄편입니다. 요15:19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거듭났다고 하지만 그 사람이 세상을 추구하고, 육신을 추구하고, 부귀를 추구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마귀 지배 하에서 심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세상 편에 서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알 수 있습니다. 행2:14이하에는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러자 천하 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이렇게 반응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라는 말에 “아멘”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빌라도만 아니라 자신들 역시 동조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어찌할꼬”하는 탄식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양심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집사의 설교가 나옵니다. 스데반도 마지막에 강하게 책망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하니라.”(행7:51-53).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똑 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사도행전 2 장에서 마음이 찔렸을 때는 “어찌할꼬”하는 회개가 나온 반면, 7장에서는 이를 갈았다고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선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양심을 쓰면서 하나님 편에 서 있었지만 사도행전 7장에서 이를 갈았던 사람들은 양심 편이 아니라 육신 편, 사탄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양심 편에 서 있으면 말씀을 들을 때, 또 전달자가 우리에게 합당한 말을 전할 때 “형제들아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게 되지만 육신편이나, 세상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말씀 들을 때 ‘아무개가 일렀구나.’ ‘목사님이 나 들어보라고 하는 구나.’ 하며 시험에 들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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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표적’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표적이란 sign으로 초자연적인 일이 외부에 드러나 진리임이 입증되거나 묵시 되는 일을 의미합니다(디럭스바이블). 성경에서 예수님께 대한 대표적인 표적으로는 아기 예수님을 구주로 입증하는 표적(눅2:2~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표적(마12:40),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표적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요2:19).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목자들이 찬 공기를 마시며 밤중에 자기 양떼들을 지키고 있을 때 천사들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보고 크게 무서워하는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2~12)라고 말합니다. 그 때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 여러 아이가 태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아기가 구주이신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을 찾기 위해서는 궁전으로 가야 하지만, 천사들의 지시를 받은 목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선 마구간이 있는 집을 물색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깨끗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곳에 나실 수 있었을 터인데 하필 마구간이었을까요? 또 그 사건이 표적이었을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입으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삶 자체가 말씀이셨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고 가난한 모습을 보임으로 신자들 역시 그렇게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한 사람의 몸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는 상징물을 요구합니다. 이 전에도 예수님은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한센 병 환자를 고치셨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습니다.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가깝게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다시 표적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예로 들었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항상 때를 향하였습니다. 그 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을 때였습니다(요2:4, 7:6, 12:23, 17:1).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표적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입니다. 이적과 기사는 사탄도 가끔씩 할 수 있습니다(신13:1). 예수님께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탄과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은 죄인이 아닌 신분으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표적들 가운데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핵심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회,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눅9:23). 그것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게 하는 표적입니다.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하고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 십자가가 없다면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자신을 없는 자로 여깁니다(요19:15). 십자가는 순종입니다(빌2:8). 자신의 좋은 생각과 의견일지라도 접어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요2:18 이하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을 청결케 하는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는 표적입니다. 십자가가 씨라면 부활은 열매입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요즘 과일 역시 풍성합니다. 이러한 과일들은 씨를 심은 결과입니다. 심지 않고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는 수고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부활의 기쁨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받았고 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기쁨을 계속해서 맛보려면 바울사도처럼 날마다 죽는 것을 심어야 합니다(고전15:31). 날마다 죽음을 체험한 바울은 날마다 부활을 맛보고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조차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의 표적이 십자가였듯이 십자가는 영생에 소망을 두지 않고 세상 복만 추구하는 사탄의 사자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성령에게로 우리를 인도하고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갈5:22~23). 바울이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것처럼,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짊어짐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과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고후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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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갇힌 자를 생각하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13:2). 평양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다가, 탈북한지 7년 째 되는 모 권사님의 간증을 탈북인 김성근 목사님의 채널을 통하여 들은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의 할아버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 후 그 어혈로 순교하였고, 부모님은 6.25 때 폭격을 당하여 사망하고, 자신과 어린 동생이 살아남았는데 교회를 없애고 교인들을 죽이거나 멸한 상태여서 자신은 몰래 하나님을 믿어왔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데, 하루는 한 살(?) 아이가 밖에 앉아있고 엄마는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위원이 찾아왔는데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한다는 소리가 “이거 하나님이 주었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 엄마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입증되는 일이었습니다. 한 살짜리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가슴 졸이고 있는데 아이가 사탕을 쳐다보고 엄마를 쳐다보고 사탕을 쳐다보고 엄마를 쳐다보고 그렇게 반복하더니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다행히 넘어갈 수 있었답니다. 기도하다가 들키면 삼대가 멸절 당하는데, 그는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어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모란봉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모란봉에서 기도하거나 대동강 다리를 왕래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 말을 안 해도 서로를 알아본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사이 모란봉 골짜기에 들어가 울면서 실컷 기도하고 나왔는데, 누군가 그를 위하여 망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친구가 되어 자신이 기도할 때는 친구가, 친구가 기도할 때는 그가 보초를 서며 서로를 지켜주었습니다. 김일성이 죽은 후 얼마 안 있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은 하늘에 있지. 누구보고 하나님이라고 그래?’라고 혼잣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누군가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고자질하였습니다. 친구가 끌려갈 때 여섯 살짜리 딸과 아홉 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엄마 양 다리에 매달려서 가지 못하게 말렸지만 보위부 사람들은 아이 앞에서 족쇄를 채우더니 생체 실험실로 끌고 가서 죽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비대면 예배의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실물이 아닌 가상 영상에 대한 피로감도 있지만, 예수님의 지체들이 눈빛만이라도 서로를 확인하고 교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심한 피로감일 것입니다. 모닥불은 나무들이 모여야 활활 타오릅니다. 성령의 역사 역시 회중 가운데 강하게 임합니다. 예배의 전면적인 제제가 다소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비대면으로 드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상들을 겪으면서 예배가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신앙인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 것인지, 신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조금이나마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18:18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천하 만민이 자신들로 인하여 복을 받도록 하는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을 제외한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심지어 요나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그를 보내어 회개시키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다시스로 피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이방인들에게까지 그 은혜가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받았던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 오는 복마저 끊기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부흥에는 6.25를 기점으로 신실하고 영력 있는 북 출신의 신앙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에서 터를 닦고 교회를 개척한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80·90년대 교계를 대표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행동할 때입니다. 북한 인권을 위하여, 북한 지하교회를 위하여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뜨겁게 기도하여 그들이 양심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 보좌를 움직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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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택하심’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삼하5:11-12). 고아들의 아버지 죠지 뮐러와 관련 된 말씀입니다. 뮐러 선교사님은 옷을 차려 입고 300 명의 원생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는 아무런 음식이 없었습니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죠지 뮐러에게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급해주시는지 알게 해주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뮐러가 기도한지 몇 분 안 있어서 밤새 잠을 못 잔 제빵장사가 고아원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고아원에 빵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세 바구니나 되는 빵을 밤새도록 구웠던 것입니다. 조금 후에는 우유장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손수레가 고아원 앞에서 고장 난 바람에 우유가 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는 뮐러에게 우유를 모두 주었습니다(오늘의 양식). 죠지 뮐러는 이 전부터 하나님께 이런 공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 고아원을 운영하게 하셨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도 이미 오래 전부터 그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선하신 것과 왕으로 삼으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제야 다윗이 안 것처럼 나와 있습니다. 아니 왜 다윗은 지금 아는 것처럼 표현했을까요? 우리의 신앙은 한 번 믿었다고 해서 그 신앙이 끝까지 계속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로 믿음이 더욱 강해질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다윗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사울의 핍박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택하신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왕궁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백향목과 뛰어난 목수와 석수가 필요한데, 건조한 이스라엘 땅에는 자랄 수 없는 나무들인지라 고민하고 있을 때 두로왕 히람이 그를 위하여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침 식사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고아원에 식사 기도가 마치자 몇 분 안 되어서 빵과 우유가 배달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도 가끔씩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택하신 것이 맞을까?’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쩔쩔 맬 때는 ‘목사 될 만한 은사가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말씀 준비에서만큼은 더욱 그렇습니다. 금요일부터 준비해서 토요일 저녁까지 말씀을 연구해도 도무지 말씀의 실마리를 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원래 성경 지식도 짧고, 이해력 또한 모자라서 성경을 깊고 넓게 분석할 능력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마24:45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말씀은 때를 분간하는 능력과 거기에 합당한 말씀을 찾아 전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저에게는 둘 모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여기저기를 탐색해보아도 도무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주일을 맞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구하고, 부끄럼 당하기로 작정하고 단 앞에 서면 보이지 않던 말씀이 환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죠지 뮐러에게 고아들의 식사를 공급하신 것처럼, 저의 지식이 모두 바닥났다고 생각되는 그 날, 주님의 양들을 위하여 풍성하게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주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택하심이 분명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때는 사라의 태가 닫히고 자신 또한 죽은 자와 방불했던 때였습니다(히11:12). 모세를 쓰실 때 역시 모세 자신이 직접 언급한, 강건한 자가 죽는 때라고 말했던 80세 때부터였습니다(시90:10). 아론의 죽은 살구나무 지팡이에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맺힌 것처럼(민17:8~9)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다 소진 되어 죽은 자와 같을 때입니다 그러면 누가 약하게 됩니까? 고전2:3이하는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말합니다. 그토록 똑똑하고 야무지며 강했던 바울이 어떻게 약해졌습니까?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탄의 사자라고 말하였습니다(고후12:7). 육체의 가시가 신자들을 약화시킵니다. 우리의 약점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기회가 됩니다. 환난은 사람을 약화시킵니다(고후1:8). 우리에게 문제는 약해서 오는 것보다, 강하기 때문에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오는 것이 많습니다. 강한 자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의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실수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약해져서 자신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자신이 약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에 자신을 보면 미천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의뢰하게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자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뢰할 때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로 확증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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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2). 제가 자주 가는 산 길 우측에는 신축 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는데, 거기에는 제가 볼 때마다 촛불을 켜 놓은 집이 있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면 향을 태운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뒷길이어서 그 집 간판을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무당이나 박수집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애써 외면하고 지나가지만 냄새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집에서 우상을 빨리 치워주시든지, 아니면 저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생각해보니 저의 기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순전히 저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의 입장으로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도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오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 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들이 몰라서 저런 가증한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감동시키셔서 예수님을 믿고 돌아서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출4:1 이하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미적거리며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쥐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땅에 던지자 뱀이 됩니다. 뱀을 보고 모세가 피하자 하나님께서 이제는 뱀을 손으로 잡으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뱀을 손으로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편 우리는 그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팡이를 손에서 던지자 뱀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버리면 뱀과 같이 됩니다. 사악해지고 우상 숭배자가 되고 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그런 예라 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뱀을 잡으니 뱀이 지팡이가 된 것처럼 아무리 사악하고 교활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지팡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붙잡힘 받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모세는 그가 하나님께 올린 기도문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가 말한 강건한 자도 죽는 나이(80세) 때부터 무려 40년이나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노예들을 데리고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고동락을 합니다. 그러다가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가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두 아들과 전 재산을 잃은 나오미를 붙좇을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던 하나님께 붙잡혔기 때문입니다(룻1:14). 바울 역시 달려간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되었기 때문입니다(빌3:11). 주님은 어떻게 그들을 붙잡았습니까?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주님께서는 무궁한 사랑으로 신앙인들을 붙잡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사랑에 강권함을 받습니다(고후5:14). 강권함을 받는다는 것은 끌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붙잡습니까? 사42:1이하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종을 붙듭니다. 종은 자신의 주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순전히 주인 한 분의 뜻을 따릅니다. 주님이 오라하면 오고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주인이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종에게 성령을 주셔서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종은 꼭 말씀 전하는 사람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 모두가 주님의 피 값에 팔린 종입니다(고전6:20).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것으로 살기보다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죄의 종은 사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롬6:12). 사욕이란 자신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종을 쓰시지 않습니다. 죄의 종을 쓰지 않습니다. 자신의 종을 쓰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무슨 일을 만나면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해서 무조건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지 멀리하는지 정도는 분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이 없이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주관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결코 복을 주지 못합니다. 본문말씀처럼 하나님께 잡힌바 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원하는 심령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자원하는 심령이란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처럼 느껴지는 마음입니다(빌2:13). 하나님 한 분의 뜻만 바라는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의 사랑에 붙잡힌바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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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9
  • [WAIC 데일리 기도] 조주만 목사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로 인하여 지난 9개월동안 온 나라와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까지 저희를 인도하여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저희들의 부주의함과 지혜 없음으로 인하여, 다시 코로나 19가 재확산이 되는 어려움 가운데 한국 사회가 처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의 재확산을 빠르게 막지 못하면, 수많은 서민들과 소상공인의 고통은 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긍휼이 여겨 주시옵소서. 재확산의 국면이 신속히 진정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한 마음으로 코로나 19의 재확산을 막는데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코로나 19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이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방역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는 많은 의료진들 또한 기억하셔서,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주님 기도하옵기는, 코로나 19가 하루 속히 종식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개발이 되고 있는 치료제와 백신도 조속히 개발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 특별히 기도하옵기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서, 수많은 교회들이 영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 기도모임 등, 교회의 소모임이 금지가 되었고, 예배 또한 약화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코로나 19로 인하여 신앙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교회의 여러 부족함과 연약함, 감추어 왔던 부끄러운 민 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 기도하옵기는, 한국 교회가 이 시간을 회개의 기회로 삼고, 지금까지 놓쳤던 본질, 잃어버렸던 십자가를 다시 찾고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그리하여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한국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지금 한국 교회가 겪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가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교회가 교회 다워지도록,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본질을 회복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마지막으로 지금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세대가, 이 나라와 민족이 더 깊은 영적인 어두움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이 법을 무산시켜 주옵소서. 이 법이 통과되면, 더 이상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없게 되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미 성적으로 타락하여,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을 정도로 타락한 이 세대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여! 차별 금지법의 법 제정을 막아 주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 성적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세상을 물려주지 않기를 소원 하오니, 주여! 차별 금지법의 법 제정을 막아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여! 코로나 19로 인하여 많은 것이 멈추어 있고,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옵기는, 코로나 19를 통하여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도 남김 없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서,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며, 유일한 소망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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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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