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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교회’(엡 4;11~16)
    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행적을 따라가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여자,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 회개하고 목숨 같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었던 삭개오, 돌로 맞아 죽을 뻔 한 간음한 여인...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교회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는 교회를 부르십니다. 교회는 마지막 주님 오실 때 까지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승리한 주님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교회입니다. 좋은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좋은 교회가 됩니다. 이렇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즉,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각자 든든히 잘 세워져야 좋은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 교회에는 나 자신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니 교회에 대한 불평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도는 교회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교회에 잘 연합하여 온 성도들과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성도는 예배의 성공이 삶의 성공이니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시험 들고 실망하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게 정상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능력이 실력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는가, 이것이 실력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주인의 부르심으로 빼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부르심입니다.(엡 4:4) 그러니 성도의 가장 큰 본분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엡 4:12) 사는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니... 세상과는 분명히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모든 계획은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중심으로 세웁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문제없는 사람이 없다면 문제없는 교회도 없는 게 맞겠지요. 평양의 봉수교회는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세운 가짜교회입니다. 그런데 봉수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진짜 성도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태영호 전 북한 영국 공사의 증언 중)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각 몸의 부분들은 머리에서 지시하는 대로 도움을 입어 서로 마디로 결합되고 연결되어 한 몸으로 자라납니다.(엡 4:15) 사람에게 실망해서 교회에도 실망할 수는 있지만, 주님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실망 중 에서도 소망이 생깁니다. 그 소망으로 몸 된 교회에 잘 붙어있어야 삽니다. 세상과 성도들은 교회를 걱정합니다. 배교한 교회에서 나오라고 외칩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교회에서 실망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좋은 교회를 잘 선택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세상을 포함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며 몸이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교회입니다.(엡1:22) 세상에서 찢겨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조금씩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세워진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르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오른 손에 교회와 목사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 소망입니다. (계 1:20) 심판 날 다 결산하실 것을 믿고 자기 신앙을 잘 지키면서 그날을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마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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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30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프로젝트’(창 39:1~5)
    여호와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요셉의 인생을 선택 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창세기 15장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을 하십니다. 그날 언약을 체결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아브라함의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그 후 4대째 요셉에게서 그 프로젝트가 이루어집니다. 그 프로젝트는 요셉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의 소명은 자기가 그 길을 택해서 받은 것도 아니고 우연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프로젝트 였습니다. 여호와는 이 계획을 요셉에게 미리 꿈으로 알려주시면서 그 마음에 비전을 품게 하십니다.(빌2:13) 그리고, 이 계획을 위해서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요셉이니 사역을 위해 애굽의 명문대 유학생으로 들어갔을까요?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노예소년으로 들어갑니다. 요셉은 노예로 들어가서 비전을 붙들고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 삶으로 형통이 무엇인가를 증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 (창 39:2)” 애굽의 장군 보디발은 소년 노예 요셉 때문에 그의 집과 밭에 복을 받게 됩니다.(창 39;5) 복은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강한 자의 손에 있는 게 아니라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소년 노예의 손에 있었습니다. 교회의 복이 세상으로 흘러가서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 그 복이 흘러가는게 순리대로 맞습니다. 복의 흐름은 세상이 그리스도인 때문에 복을 받아야 합니다.(창 12:2)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그가 복이 됩니다. 여호와는 탁월한 요셉의 머리와 성실한 생활태도를 쓰신 게 아니라 그의 감추고 싶었던 무능한 가족의 상처를 쓰셨습니다. 요셉의 열등감을 쓰셨습니다. 야곱의 가족 중에서 그래도 가장 쓸 만한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창 37:12~17) 그저 그런 형들 사이에서 탁월한 요셉의 잘난 말과 행동은 형들의 상처를 건드리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창37:4~8) 기회가 오자 형들은 요셉을 애굽의 상인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사건은 무능한 가족구성원들이 부대끼면서 만드는 갈등과 아픔으로 일어날 일로 예견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지독하고 잔인한 상처를 쓰신 것입니다. 요셉이 후에 총리대신이 되어 여호와의 프로젝트를 완수한 후에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상처가 소명이 되었습니다. 사실을 인지하면서 요셉의 상처가 치유 되었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노예로 빼앗겨 버린 그 시간들은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을까요? 여호와는 소년요셉의 노예로 빼앗긴 시간들로 프로젝트를 실행 하셨습니다. 노예의 시간, 억울한 감옥의 시간들은 결코 낭비한 시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들에 여호와는 그분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던 것입다. 여호와의 손안에서는 노예의 시간들이 소명의 시간이 됩니다, 요셉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으로 받아서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초청하여 그들이 입성하는 장면을 봅니다. (창 46:8~27) 얼마나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장면입니까? 이 순간을 위해서 요셉은 쓰임 받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모든 진행과 결과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여호와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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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뜻을 알기까지’(삼상22:1-5)
    사울에게서 도망 나온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갔다가 사울의 목자장 도엑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거기에서도 머물지 못하고 가드왕에게 갑니다. 그런데 그곳 신하들 역시 그를 경계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윗은 미친척하며 쫓겨나와 아둘람 굴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 그에게 왔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 모여 400명가량 되었습니다. 다윗은 거기에서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부모를 모시고 모압 왕 앞에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3절). 다윗이 모압왕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증조모 룻이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5절).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직접 응답하시지 않고 갓을 통하여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갓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서슬 퍼런 사울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울이 있는 땅 이스라엘로 들어갑니다. 이전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아니하고 본능으로 아는 대로 판단하다가, 가드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알기까지” 이 태도는 신자들이 매일 매 사건에서 적용해야 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여야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할꼬?”(골1:10)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알기까지 다윗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비록 시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이 연합해서 유다를 치러 왔을 때 “어떻게 행할 줄 알지 못하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라고 응답해 주십니다. 또 아삽이라는 사람은 악인이 형통함을 보고 하마터면 실족할 뻔 했는데 “어쩌면 이를 알까?”(시73:16) 생각하다가 성소에 들어가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베뢰아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을 때 “이것이 그러한가” 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다가 믿는 사람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행17:11).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줄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알리라.”입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의 올바른 분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나타납니다. 전달자나, 매일 상고하는 성경, 양심을 통하여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 한분의 뜻, 하나님 한 분의 기쁨을 구하여 매사에 올바른 분별 가운데 거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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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1
  • [WAIC 칼럼] 신성근 목사의 ‘흠과 악질 없는 제물’(신 16:21-17:1)
    본고는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 제4회 미주 안수식에서 안수 받은 신성근 목사의 설교를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였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그들은 종, 노예의 삶으로 찌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주어진 삶의 고통이 너무나 힘들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이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일찍이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사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십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아 애굽을 탈출하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좁은 새 장에 갇혀 살았던 독수리가 새 장 밖에 나온다고 갑자기 창공을 힘차게 솟구쳐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그들의 삶은 마치 새 장의 독수리처럼 인간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사를 표현할 자격이 박탈되어 하루하루 삶의 무게로 희망 없는 현실에 만족해야 하는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억압받던 백성이 이제 선민으로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이 바뀌어 졌다고 하루아침에 선민적 품위나 행실로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찌든 때를 벗겨내듯이 그들 삶의 사고방식 또한 바뀌어 져야 했습니다. 훈련과 교육을 통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세우시고 율법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숙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 선조들의 경험과 징계를 통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가르치시고 훈련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당신의 전능하신 의로운 손이 그들을 구출해 내신 분이며 당신의 백성이 세세토록 경배를 드리기에 합당하심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 곁에 어떠한 우상을 세우거나 섬기는 것도 금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의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소통을 위해 만남의 방법을 정하셨습니다. 절기마다 제사를 정하여 그 규례와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제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해 제사 때마다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 그 분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셨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성껏 준비한 정결한 제물입니다. 어둠이 빛과 공존할 수 없듯이 흠있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결의식과 제사규례를 따라 백성들이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제사에 올려지는 제물에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제물로 사용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는 인간의 더럽고 악한 죄가 전가되는 대속의 의미가 있어 흠과 악질이 없는 순결한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릴 제물의 흠은 우리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겉모습입니다. 악질인 속병은 식별이 쉽지 않아 인간의 눈으로 내면의 흠을 잘 볼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분별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드렸던 율법적 제사행위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예배자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흠과 악질이 없는 제물이 되기 해 우리 삶 속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순결한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날마다 넘어지고 연약한 모습으로 늘 죄악가운데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죄와 흠이 없으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단 한 번에 영원하고 온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그런데 매년 죄 없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형식에 치우친 구약의 제사들은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영원한 대속의 제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죄 없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십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속량하신 분이시며, 당신의 한 번의 피 흘림으로 모든 인류의 대속을 온전히 이루시고 죽음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할렐루야! 구약의 제사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도의 예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 오늘도 예배를 통해 경배와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떠나 살지 않도록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은 곧 마귀에 속하여 멸망의 길로 갈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기 위해 흠이나 악질이 없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를 깨닫고 우리도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날마다 삶 속에서 죄를 멀리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며 거룩한 예배자의 길에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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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묵상’(눅 16:19~30)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누리면서 살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비싸고 멋진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골라 먹는 미식가 였습니다. 부자니까요. 반면, 나사로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 부자의 상에서 남은 것을 얻어 먹고 사는 거지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몸은 종기 투성이로 고통받는 그를 보는 것만도 불편했습니다. 어쩌다 인생이 저렇게 무너졌을까... 그런데 멋진 부자도 불쌍한 거지 나사로도 언젠가는 다 죽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은 후가 문제입니다. 죽을 때 영적인 존재가 데리러 오면 그때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끌려서 가야 합니다.(눅 16:22) 부자는 음부로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그때 음부에 있던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눅 16:24)” 음부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입니다. 이 구절에서 멈추어서 심각하게 고민해 봅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자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인 것 같은 데...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구원의 기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간 부자에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로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 진다고 설명합니다 (눅 16:25) 그러면 이땅 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천국과 지옥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땅 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의 내용들로 내가 받은 구원이 증명된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나의 구원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받은 구원이 진실이라면 천국을 알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육체의 일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갈 6:7~8) 내가 받은 구원이 진실이면 더욱더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고전 3:11~15) 성경은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으며 사람이 한번 죽은 후에는 둘 중 한곳으로 가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른 이유는 음부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가 보이니, 불타는 곳에서 고통 받는 자신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모금만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살았을 때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얻어 먹으며 도움을 받았으니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의 요구는 거절당합니다. 이유는 음부에서 낙원이 보일 수는 있지만 음부와 낙원 사이에 오갈 수 없는 깊은 구덩이가 있어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낙원이 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일까요? 살아 있는 동안만이 기회였는데, 이제는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구나... 부자는 한번 음부로 들어가면 긍휼함을 받을 기회조차도 다시는 없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부자는 자기의 형제 다섯을 사랑했었나 봅니다. 그 가족이 지금 자기처럼 살다가는 음부로 들어 올텐데 어떻게 하면 막을 수가 있을까? 비로소 음부에 직접 가보니 세상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구원인 것이 깨달아졌겠지요.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혹시라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 천국과 지옥을 간증한다면 믿고 회개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거절 당합니다. 성경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간증하는 것, 그 이상의 다음 세상에 대한 말씀이 충분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받겠다 안 받겠다의 문제입니다.(눅 16:31) 천국과 지옥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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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쁨의 나무’(요15:1-2)
    얼마 전 새벽, 저는 자주 오르는 산에서 기도 하였습니다. 후두둑 후두둑 가끔씩 알밤 떨어지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들짐승의 발자국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가을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다 마친 후 먼동이 터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놀랍게도 주변은 여기 저기 하트모양의 알밤들로 차려 있었습니다. 솔직히 전 어지간하면 알밤을 잘 줍지 않고 다람쥐에게 양보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밤나무가 이렇게 저에게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의 친구가 되어준 당신께 뭔가 선물을 드려야겠기에,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 무릅쓰고 맺은 열매입니다. 저의 성의를 받아주십시오.” 물론 제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삿9:8이하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 알밤을 통하여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포도나무 역시 나무들이 자신에게 왕이 되라고 할 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하며 거절합니다(삿9:13). 자신의 존재 이유가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기쁨의 나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자신을 포도나무로, 신앙인들을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짓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1-2). 주님은 기쁨의 나무이고 우리는 기쁨의 가지인 셈입니다. 기쁨의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 기쁨의 가지가 된 신앙인들이 기뻐하며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라고 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까? 물론 위 말씀처럼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9). 사랑할 때 기쁨이 오고 기뻐할 때 힘이 생깁니다(느8:10).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옥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바울이 오히려 그를 염려하는 형제들을 위로하며 기뻐하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바로 기쁨은 너그러운 용서 가운데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 꽁한 마음, 혐의를 품을 때 성령과 교통이 끊어짐을 신앙인들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용서 받지 못하는 죄’는 ‘용서하지 않는 죄’인 것입니다. 기뻐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염려는 기쁨은커녕 오히려 영과 육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4:6-7). 어떻게 하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주 안에서 사랑하며 살고, 관용해야 하며, 염려를 주께 맡길 때 비로소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새 달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뻐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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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0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에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를 부르며 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 지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만물의 주인으로 그 보좌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그 관계에서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사실로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믿으라고 설득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는 너무나 확실한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빛이 있어라” 자존자의 말씀 따라 빛이 있었습니다. 누가 창조주의 말씀을 거역하겠습니까? 창조주가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천지는 창조가 이루어 지고 창조된 모든 만물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만물은 축복을 누립니다. 땅과 우주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함께 연합할 때 창조의 질서대로 우주가 유지되듯이 사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살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실 능력이 있지만 모든 기도는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 져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께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기도를 들으십니다. 아버지의 의무로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또 아버지이기 때문에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리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근엄하신 능력인 거룩으로 존재 하십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만의 영역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피조물은 거룩에 닿는 순간 소멸해 버립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합니다. 거룩 앞에 서면 그 뜻에 벗어나는 인간은 거룩의 불로 소멸되어 버리고 맙니다.(레 10:1~2)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설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주셔서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에서 죄인인 나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르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을 받은 자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아버지로 나타내셨습니다.(요 17:6)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셨습니다.(요 17:26) 거룩하신 여호와, 죄는 그 앞에 서면 소멸되는 거룩하신 하나님, 그분을 우리에게 아버지로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교회는 아버지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알리시고 아버지께 기도할 때 예수 이름의 사용권을 주셨습니다.(요 16:23~24) 우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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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01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을 잘 묵상해 보면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 더 명확해 집니다. 먼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 6:5) 위선자는 겉으로 보여 지는 행동만 선한 체 하는 사람입니다. 위선자는 행동이 자신의 인격이 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게 가능한 사람입니다. 위선자는 남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큽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기도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들은 기도의 댓가로 자기들이 원하는 인정을 보상으로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 없습니다.(마 6:5) 예수님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곳은 아무도 없는 곳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는 사람이 그곳에 갑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그곳에 오십니다.(마6:6) 그리고 은밀한 중에 기도를 들으시고 갚아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요 17:26)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실체가 분명합니다.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이방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 주십시오’ 반복하면서 영혼 없이 중얼거립니다. 그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받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구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받는 것입니다. 인격이 없는 관계는 댓가를 치르고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점원이 친밀하고 사랑하는 깊은 관계 때문에 나에게 물건을 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물건 값을 지불했으니 주는 것입니다. 인격 없이 구하는 내용에서 친밀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에게 자기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겠지요, 그 기도는 내가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 주십시오’ 를 반복하면서 의미 없는 말을 계속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만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보다 가장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어찌 영혼 없는 ‘주십시오’ 를 반복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댓가를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라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이지요, 크게 말하든 작게 말하든 많이 말하든 한마디만 하든...말하는 내용이 두서가 없어도 들으십니다. 그분에게 말하기만 하면 작은 신음소리까지 들으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구하기 전에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 이시기 때문입니다.(마 6:8) 아버지와는 대가로 주고 받는 거래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마땅히 구하는 것이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안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에 안주시면 기다리고 아버지의 뜻이 절대 아니면 포기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얄팍한 기도와 비교 해 보십시오, 수준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이런 수준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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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기도’(마 6:5~8)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기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초신자 때에는 정말 기도하는 게 막연하지요, 그래서 무조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생겨나고 직분을 받게 되면서 기도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기도를 더 깊이 알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왜 내 기도는 응답이 안될까? 주님은 내 기도를 들으실까? 성도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는 가요?’ 라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도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6:5, 7) 무조건 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걸러서 들으신다고는 하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무엇일까? 를 알고 기도하면 더 좋겠지요,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치신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 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에서 강연한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내용만 따로가 아니라 산상수훈의 내용과 연결되어 집니다. 산상수훈은 제자들의 삶을 강연하신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불신자들이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하면서 그 말씀의 깊이에 빠져드는 말씀 들입니다. 아무나 쉽게 따라서 할 수 없는 수준의 삶입니다. 그 삶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대단히 수준이 높은 믿음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그만큼 놓은 수준의 기도이니 초신자가 할 수 있는 수준의 기도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초신자들도 믿음이 생겨나고 신앙의 연륜이 생기면서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렇게 기도해야 맞습니다. 먼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준비된 마음입니다. 얼마나 갈급한 마음인가,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인가, 얼마나 순종하는 마음인가...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자, 화평케 하는자,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를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살 때 그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으로 준비된 자들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진실합니다. 주기도문은 내용 이전에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준비되어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는 그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로 증명됩니다. 주기도문은 이렇게 기도의 깊은 본질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내용을 잘 묵상해 보면 거기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가 더 명확하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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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1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회심한 삭개오’(눅 19:1~10)
    여리고에는 삭개오라는 부자 세리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직업이 새리장인 삭개오를 죄인 이라고 했습니다.(눅19:6절) 그 당시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로마에 파견된 총독의 주된 임무는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이었습니다. 총독은 세금을 걷어 들이는 사람을 지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주민을 뽑아서 위임을 해서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세금을 걷게 했습니다. 그들이 세리입니다. 세리장은 세리를 고용해서 세금 징수권을 주는 사람입니다. 세리장이 세리를 고용할 때에는 얼마만큼의 세금을 걷어서 주겠다는 입찰을 거치는 데 가장 높은 금액을 쓴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줍니다. 세금 징수권을 따낸 사람은 자기몫을 더 챙겨야 했기 때문에 입찰한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했습니다.(이스라엘 따라걷기) 세리는 규정된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하니 여러 가지 각종 명목을 끌어 붙여서 세금을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세리장과 세리는 주민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당시에 세리는 동족들에게 로마인 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는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었으면 예수님 당시의 죄인을 세리와 창녀라고 했는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삭개오는 어려운 시기에 살아보려고 바둥거린 것인데... 동족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신세가 되어 그들 속에 함께 살고 있으니 그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마음은 더욱 편지 않았겠지요, 부자여도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면서 소외되어 살다보니 사는 기쁨이 없었겠지요,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죄책감과 외로움으로 갈급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신 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갈급한 마음에 얼마나 주님을 만나고 싶었으면 뽕나무에 올라갔을까요? 오직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김없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묵어야 하겠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눅 19:7)” 무리들이 수군거립니다. 율법에서는 죄와 정결을 철저하게 구분해서 공동체에서 제거하여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돌로 쳐서 죽이는 죄인도 있습니다. (신 21:21) 그러니 죄인과는 당연히 가까지 하지 않는 걸로 알았겠지요,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교제하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런 못된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했습니다.(눅 19:6)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빛이 삭개오 안의 어두움에 비추이니 어둠속에 숨겨졌던 자기안의 모든 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라 잃고 근근이 살아가는 같은 민족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후비면서 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했구나.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임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갑자기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삭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칩니다. “주님,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우리민족을 위해서 쓰겠습니다.” 아, 이것은 율법을 다 지킨 부자 청년도 못했던 일입니다. (눅 18:22) 할렐루야! “주님, 내가 누구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출 22:1)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는 삭개오가 그동안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자기의 욕심에 묶여있던 어둠의 결박이 풀려납니다. 삭개오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아! 이제는 살 것 같습니다. 하늘도 나무도 바람도 꽃도 이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웠던가?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의 떠들고 우는 소리가 이렇게도 사랑스러웠던가? 나를 미워하던 이웃사람들이 이리도 가슴에 저미도록 측은 했던가? 삭개오는 구원받았습니다. 못쓸 인간 삭개오, 그도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구원받은 삭개오를 보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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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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