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3(목)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마 15:21~28)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지나가실 때 만나신 가나안 여자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소리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기가 알고 있는 가나안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녀는 누구에게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그 여자의 사연은 어린 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려 문제가 생긴 건 딸인데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불쌍합니다. 딸의 문제가 어머니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자가 얼마나 고통 스러운지를 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의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고통이 제자들에게는 단지 시끄럽고 귀찮은 일 밖에는 안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마 15:23)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공감 능력이 없을까요? 공감능력이 없으니 누군가의 죽을 듯 한 고통을 보고도 긍휼한 마음이 안 생깁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개처럼 무시하고 있는 가나안 여자가 소리를 지르니 시끄럽다고 합니다. “빨리 보내버리세요!” 이 장면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위해서 하늘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게다가 이런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계속 침묵하십니다.(23절)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그 침묵을 깨고 하시는 첫마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 맞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6)” 예수님이 오신 목적으로 보면 표현이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대언해서 역설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너희들의 마음의 생각이 그렇지 않느냐...” 이제 그 말에 반응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과 제자들의 저급한 행동이 비교될 것입니다. 예상대로 가나안 여인이 그 말을 믿음으로 뒤집어 버렸습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아!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먹먹해 집니다. 이 구절에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감동이 훼손될까봐 설명하기도 아까운 구절입니다. 그냥 느껴야 합니다. “내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주님” 자기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는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시라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아야 합니다. 내 딸 귀신들린 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내 딸이 귀신이 들렸는데 내가 자녀가 아니고 개면 어떻습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가나안 여자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야 내가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가 나를 살릴 것을 믿습니다. 우리 집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내게도 그 은혜를 주소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자기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변호할 필요도 없고 부당함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관계없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들 괜찮습니다. 다만 살기위해 그분이 주시는 은혜만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이방인이라고 무시했던 제자들 앞에서 이것이 큰 믿음이라고 선포 하십니다.(마 15:28) 예수님이 주시는 기적을 받는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믿음대로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대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믿었던 하나님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진짜 하나님이 맞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1-2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희년의 축복’(레 25장)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는 일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신을 찾는 종교도 시작됩니다. 사람이 먹고사는 근본은 토지인데 그 토지는 원래 하나님이 주인 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그 땅을 빌려서 임시 거주자로 동거합니다.(레 25:23) 그렇게 땅을 빌려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곳간에 곡식이 점점 쌓입니다. 쌓아지면 더 쌓고 싶은 게 인간의 욕심입니다. 한 개를 가지고 100을 채우기는 어렵지만 99개를 갖고 있으면 하나를 빼앗아서 라도 100을 채워야 합니다. 채워진 100을 보면서 그것이 내 것 인줄 압니다.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커지면 사망입니다.(약 1:15) 욕심은 이렇게 생명의 길에서 이탈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7년째를 안식년으로 정하셔서 원래 주인이신 여호와 앞에서 땅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레25:4) 안식년은 땅도 쉬고 사람도 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 인간의 욕망도 쉽니다. (희년과 복음, 장진광) 땅이 쉬면서 사람이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사람과 짐승들이 모두 먹고 삽니다.(레 25:6~7)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땅이 쉬는 동안 명령하여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정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레 25:20~21) 먹고 사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안식년의 7년을 지나고 50년째 되는 날은 희년입니다. 하나님께 공평하게 먹고 살 것을 받았어도 부자와 가난한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부자는 받은 것으로 불리고 불려서 더 많이 쌓은 사람입니다. 가난한자는 어쩌다 보니 빚을 지고 급기야는 갚을 수가 없어 자기 몸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는 지경까지 된 사람입니다. 희년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처음 자기가 받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갑니다.(레25:10) 하나님께 빌려서 살면서 쌓아놓았던 모든 걸들을 다 반납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모든 것을 다 반납하고 무로 돌아가는 희년은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은가요? 아닙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는 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지금까지 빌려 살았던 것들을 내어놓고 가야 할 시간이 옵니다. 그때는 누가 주인인지 알게 되겠지요. 희년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자유의 해로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레 25:10) 자유는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자유는 무엇일까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의지하는 것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스스로 매여 그것의 종이 됩니다. 부자가 가진 것에 매이지 않고 자기 권리를 반납하고 내어 놓는 것이 자유입니다. 가난한 자는 벗을 수 없는 종의 결박이 풀어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희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인 모든 세상 결박을 풀어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다른 것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레 25:55) 하나님의 종이 되기 싫어서 거부하면 세상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세상의 종이 되면 사람에 매이고 돈에 매이고 환경에 매여 두려워 벌벌 떨면서 삽니다. 비참하지요, 착취는 하나님 밖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면 자유가 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분에게 매여야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풀어줍니다. 하나님 한분만 섬기면 나를 착취하는 결박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옵니다. 그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들 앞에서 당당해 질 수 있습니다. 희년은 자유를 선포하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축복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자들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13:12).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있었던 시절에도 소돔과 고모라성은 타락한 곳이었습니다(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창13:13). 그래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유할 곳을 택할 때도 소돔을 피하여갔습니다(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13:11). 롯은 소돔을 택한 것이 아니라 소돔과 경계지역이었던 요단 온 들을 택하였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는 소돔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였기에 자신도 모르는 새 소돔까지 이르렀고 나중에는 소돔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이 거룩함을 향하여 점점 마음 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새 세상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지게 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유행과 풍속 습관을 따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 땐 나오기 힘든 상태로 빠져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22:54).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지 아니하고 멀찍이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18:18). 그들과 함께 쬐면서 예수님께 대한 여러 왜곡된 말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불평불만을 품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그만 물들고 만 것입니다. 또한 험악하고 살기등등한 분위기에 그만 압도당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과 멀어지면 세상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롯이 하나님을 잘 믿는 아브라함을 멀리하면서부터 소돔과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은 안 된다.”라고 말했을 때 롯은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한 발 한 발 소돔 땅에 접근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문에 앉아 재판할만큼 유지까지 됐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맹독성은 사람들이 피하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것은 사람들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신자들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선이 있어야 합니다.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선은 성경에 합당한 선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면 롯이 자신도 모르는 새 소돔 땅에 들어가 살았던 것처럼 신자들도 무감각해지고 맙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1-1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내가 그의 옷 자락을 만지면···’(막 5:25~43)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위독하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야이로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 딸을 만나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큰 무리가 따라 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치면서 갑니다. 그 무리 중에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혈루병이 그 인생에 끼어 들어오면서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 여자입니다. 12년 전 일입니다. 그동안 병을 고치려 별의별걸 다 해보았지만 결국 많은 의사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병은 못 고치고 돈은 다 날리고··· 그러다가 몸과 마음은 더 상하고··· 병으로 시작된 일이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려서 여인이 지금 있는 곳은 완전 밑바닥입니다. 그곳에서 여인은 절박하게 살기 위해 구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 바로 이 여자가 끼여 있었습니다. 무리에 떠밀려 길을 가던 예수님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시더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에워싸고 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막 5;3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그 옷자락에 닿으면서 지나갔습니다. 무리 중에서 떠밀려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것은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누군가 한사람은 군중사이로 들어와 두렵고 떨리는 손으로 절박하게 그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그가 붙잡은 그 옷자락은 하나님의 옷자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느끼셨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누가 나를 만졌느냐?”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으시려고 멈추어 둘러보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는 것을 알고 한 여인이 두려워 떨며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백 합니다.(레 15:11) 그 여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식을 듣고 에워싸며 밀치는 군중들 사이로 목숨 걸고 숨어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레15:31) 절박한 여인이 목숨 걸고 원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혈루근원이 마르면서 병이 나은 줄을 여자의 몸이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능력이 여인에게 흘러가서 혈루근원이 마르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구원입니다. 단순한 병고침만이 아닙니다. 구원은 총제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모든 인생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리중의 그 여인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겠다는 생각하나로 목숨 걸고 들어갔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기록된 게 아니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 5:28) 자기의 문제는 병고침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구원이 임하는 곳에 병고침이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으로 이 모든 일들을 받았습니다.(눅 5:34) 그 여인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에워싸고 밀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으로 만난 단 한 사람의 믿음에 하나님이 반응하셨습니다. 그때 저주인 줄 알았던 혈루병 조차도 축복이 되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손으로 하나님의 옷자락에 감히 손을 대는 한 여인의 가녀린 손과 군중들에게 떠밀려 걸어가는 제자들의 장면이 겹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까?(막 5:31)”
    • 칼럼
    • WAIC 칼럼
    2019-11-1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마8:23~27)
    제가 꿈속에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이 찬송을 부르다가 깨었습니다. 꿈에 불렀던 것을 깬 후에도 계속 이어 마지막까지 마무리했습니다. 꿈에서 생시로 이어지는 이 기가 막힌 찬송가가 하루를 벅차오르는 감동 속에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 가사는, 1949년 1월에 편찬 된 합동찬송가 이래(이전 찬송가는 잘 모르겠음) 지금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새찬송가까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1949년 1월 육이오 전에 편찬 된, 합동찬송가에 수록 된 가사입니다. 1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노한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후렴; 주여 나를 돌아 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노한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2 권세 능력 무한하사 모든 시험이기고, 풍랑조차 복종하는 내 주 앞에 비나니 3 사망 길에 빠진 몸이 캄캄한데 헤매며, 부르짖는 나의 애원 들으소서 내주여 가사를 만든 사람과 곡을 만든 사람이 찬송가에는 모두 무명으로 되어 있지만, 가사 속에는 작사가의 심정이 아마도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절절한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이 가사는 또한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1. 작사가는 시험의 바다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칠 자신이 있었습니다.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과는 다릅니다. 폭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거기에다 방해하는 세력들이 집채만큼 밀려옵니다. 그 시험이 자신 안의 유혹이든, 아니면 시련이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환경입니다. 더 이상 헤쳐 나갈 수 없는 지경, 자기 힘이 모두 소진 된 상황,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필사적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노한 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주여 나를 돌아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 노한 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2. 말씀으로나 양심으로나 상식으로나 모든 부분에서 잘 못 된 일인데도, 부당한 권세 아래서, 중우정치 아래서 정의가 야합과 다수에 의해 묻히고 소수가 힘을 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신앙인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기 때문입니다(골2:10). “권세 능력 무한하사 모든 시험 이기고 풍랑조차 복종하는 내 주 앞에 비나니. 주여 나를 돌아 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3. 사울의 창을 피하여 도망 나온 다윗이 친구 요나단을 만나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요나단이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삼상20:3)라고 요나단에게 말합니다. “사망 길에 빠진 몸이 캄캄한데 헤매며 부르짖는 나의 애원 들으소서. 내 주여 주여 나를 돌아 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주소서.” 후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모든 찬송이 주님을 높이는 찬송이지만 굳이 나눈다면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 둘째는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이 찬송가는 두 번째 해당 됩니다. 이 찬송을 부름으로써 우린 하나님을 높임과 동시에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시험에 빠진 분이 있습니까? 주님께 아뢰십시오. 너무 기가 막혀 무엇을 아뢰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까? 이 찬송가로 대신 부르십시오.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세 번 부르면 마음이 진정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 때부터 구체적으로 아뢰십시오.
    • 칼럼
    • WAIC 칼럼
    2019-11-10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교회’(엡 4;11~16)
    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행적을 따라가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여자,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 회개하고 목숨 같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었던 삭개오, 돌로 맞아 죽을 뻔 한 간음한 여인...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교회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는 교회를 부르십니다. 교회는 마지막 주님 오실 때 까지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승리한 주님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교회입니다. 좋은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좋은 교회가 됩니다. 이렇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즉,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각자 든든히 잘 세워져야 좋은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 교회에는 나 자신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니 교회에 대한 불평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도는 교회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교회에 잘 연합하여 온 성도들과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성도는 예배의 성공이 삶의 성공이니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시험 들고 실망하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게 정상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능력이 실력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는가, 이것이 실력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주인의 부르심으로 빼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부르심입니다.(엡 4:4) 그러니 성도의 가장 큰 본분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엡 4:12) 사는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니... 세상과는 분명히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모든 계획은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중심으로 세웁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문제없는 사람이 없다면 문제없는 교회도 없는 게 맞겠지요. 평양의 봉수교회는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세운 가짜교회입니다. 그런데 봉수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진짜 성도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태영호 전 북한 영국 공사의 증언 중)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각 몸의 부분들은 머리에서 지시하는 대로 도움을 입어 서로 마디로 결합되고 연결되어 한 몸으로 자라납니다.(엡 4:15) 사람에게 실망해서 교회에도 실망할 수는 있지만, 주님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실망 중 에서도 소망이 생깁니다. 그 소망으로 몸 된 교회에 잘 붙어있어야 삽니다. 세상과 성도들은 교회를 걱정합니다. 배교한 교회에서 나오라고 외칩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교회에서 실망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좋은 교회를 잘 선택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세상을 포함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며 몸이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교회입니다.(엡1:22) 세상에서 찢겨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조금씩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세워진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르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오른 손에 교회와 목사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 소망입니다. (계 1:20) 심판 날 다 결산하실 것을 믿고 자기 신앙을 잘 지키면서 그날을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마13;29)
    • 칼럼
    • WAIC 칼럼
    2019-10-30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프로젝트’(창 39:1~5)
    여호와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요셉의 인생을 선택 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창세기 15장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을 하십니다. 그날 언약을 체결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아브라함의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그 후 4대째 요셉에게서 그 프로젝트가 이루어집니다. 그 프로젝트는 요셉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의 소명은 자기가 그 길을 택해서 받은 것도 아니고 우연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프로젝트 였습니다. 여호와는 이 계획을 요셉에게 미리 꿈으로 알려주시면서 그 마음에 비전을 품게 하십니다.(빌2:13) 그리고, 이 계획을 위해서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요셉이니 사역을 위해 애굽의 명문대 유학생으로 들어갔을까요?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노예소년으로 들어갑니다. 요셉은 노예로 들어가서 비전을 붙들고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 삶으로 형통이 무엇인가를 증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 (창 39:2)” 애굽의 장군 보디발은 소년 노예 요셉 때문에 그의 집과 밭에 복을 받게 됩니다.(창 39;5) 복은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강한 자의 손에 있는 게 아니라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소년 노예의 손에 있었습니다. 교회의 복이 세상으로 흘러가서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 그 복이 흘러가는게 순리대로 맞습니다. 복의 흐름은 세상이 그리스도인 때문에 복을 받아야 합니다.(창 12:2)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그가 복이 됩니다. 여호와는 탁월한 요셉의 머리와 성실한 생활태도를 쓰신 게 아니라 그의 감추고 싶었던 무능한 가족의 상처를 쓰셨습니다. 요셉의 열등감을 쓰셨습니다. 야곱의 가족 중에서 그래도 가장 쓸 만한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창 37:12~17) 그저 그런 형들 사이에서 탁월한 요셉의 잘난 말과 행동은 형들의 상처를 건드리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창37:4~8) 기회가 오자 형들은 요셉을 애굽의 상인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사건은 무능한 가족구성원들이 부대끼면서 만드는 갈등과 아픔으로 일어날 일로 예견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지독하고 잔인한 상처를 쓰신 것입니다. 요셉이 후에 총리대신이 되어 여호와의 프로젝트를 완수한 후에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상처가 소명이 되었습니다. 사실을 인지하면서 요셉의 상처가 치유 되었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노예로 빼앗겨 버린 그 시간들은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을까요? 여호와는 소년요셉의 노예로 빼앗긴 시간들로 프로젝트를 실행 하셨습니다. 노예의 시간, 억울한 감옥의 시간들은 결코 낭비한 시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들에 여호와는 그분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던 것입다. 여호와의 손안에서는 노예의 시간들이 소명의 시간이 됩니다, 요셉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으로 받아서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초청하여 그들이 입성하는 장면을 봅니다. (창 46:8~27) 얼마나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장면입니까? 이 순간을 위해서 요셉은 쓰임 받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모든 진행과 결과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여호와가 하셨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0-2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뜻을 알기까지’(삼상22:1-5)
    사울에게서 도망 나온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갔다가 사울의 목자장 도엑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거기에서도 머물지 못하고 가드왕에게 갑니다. 그런데 그곳 신하들 역시 그를 경계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윗은 미친척하며 쫓겨나와 아둘람 굴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 그에게 왔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 모여 400명가량 되었습니다. 다윗은 거기에서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부모를 모시고 모압 왕 앞에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3절). 다윗이 모압왕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증조모 룻이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5절).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직접 응답하시지 않고 갓을 통하여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갓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서슬 퍼런 사울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울이 있는 땅 이스라엘로 들어갑니다. 이전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아니하고 본능으로 아는 대로 판단하다가, 가드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알기까지” 이 태도는 신자들이 매일 매 사건에서 적용해야 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여야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할꼬?”(골1:10)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알기까지 다윗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비록 시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이 연합해서 유다를 치러 왔을 때 “어떻게 행할 줄 알지 못하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라고 응답해 주십니다. 또 아삽이라는 사람은 악인이 형통함을 보고 하마터면 실족할 뻔 했는데 “어쩌면 이를 알까?”(시73:16) 생각하다가 성소에 들어가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베뢰아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을 때 “이것이 그러한가” 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다가 믿는 사람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행17:11).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줄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알리라.”입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의 올바른 분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나타납니다. 전달자나, 매일 상고하는 성경, 양심을 통하여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 한분의 뜻, 하나님 한 분의 기쁨을 구하여 매사에 올바른 분별 가운데 거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0-21
  • [WAIC 칼럼] 신성근 목사의 ‘흠과 악질 없는 제물’(신 16:21-17:1)
    본고는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 제4회 미주 안수식에서 안수 받은 신성근 목사의 설교를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였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그들은 종, 노예의 삶으로 찌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주어진 삶의 고통이 너무나 힘들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이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일찍이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사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십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아 애굽을 탈출하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좁은 새 장에 갇혀 살았던 독수리가 새 장 밖에 나온다고 갑자기 창공을 힘차게 솟구쳐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그들의 삶은 마치 새 장의 독수리처럼 인간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사를 표현할 자격이 박탈되어 하루하루 삶의 무게로 희망 없는 현실에 만족해야 하는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억압받던 백성이 이제 선민으로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이 바뀌어 졌다고 하루아침에 선민적 품위나 행실로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찌든 때를 벗겨내듯이 그들 삶의 사고방식 또한 바뀌어 져야 했습니다. 훈련과 교육을 통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세우시고 율법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숙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 선조들의 경험과 징계를 통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가르치시고 훈련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당신의 전능하신 의로운 손이 그들을 구출해 내신 분이며 당신의 백성이 세세토록 경배를 드리기에 합당하심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 곁에 어떠한 우상을 세우거나 섬기는 것도 금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의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소통을 위해 만남의 방법을 정하셨습니다. 절기마다 제사를 정하여 그 규례와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제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해 제사 때마다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 그 분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셨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성껏 준비한 정결한 제물입니다. 어둠이 빛과 공존할 수 없듯이 흠있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결의식과 제사규례를 따라 백성들이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제사에 올려지는 제물에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제물로 사용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는 인간의 더럽고 악한 죄가 전가되는 대속의 의미가 있어 흠과 악질이 없는 순결한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릴 제물의 흠은 우리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겉모습입니다. 악질인 속병은 식별이 쉽지 않아 인간의 눈으로 내면의 흠을 잘 볼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분별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드렸던 율법적 제사행위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예배자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흠과 악질이 없는 제물이 되기 해 우리 삶 속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순결한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날마다 넘어지고 연약한 모습으로 늘 죄악가운데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죄와 흠이 없으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단 한 번에 영원하고 온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그런데 매년 죄 없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형식에 치우친 구약의 제사들은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영원한 대속의 제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죄 없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십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속량하신 분이시며, 당신의 한 번의 피 흘림으로 모든 인류의 대속을 온전히 이루시고 죽음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할렐루야! 구약의 제사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도의 예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 오늘도 예배를 통해 경배와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떠나 살지 않도록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은 곧 마귀에 속하여 멸망의 길로 갈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기 위해 흠이나 악질이 없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를 깨닫고 우리도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날마다 삶 속에서 죄를 멀리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며 거룩한 예배자의 길에 서야 할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0-1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묵상’(눅 16:19~30)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누리면서 살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비싸고 멋진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골라 먹는 미식가 였습니다. 부자니까요. 반면, 나사로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 부자의 상에서 남은 것을 얻어 먹고 사는 거지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몸은 종기 투성이로 고통받는 그를 보는 것만도 불편했습니다. 어쩌다 인생이 저렇게 무너졌을까... 그런데 멋진 부자도 불쌍한 거지 나사로도 언젠가는 다 죽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은 후가 문제입니다. 죽을 때 영적인 존재가 데리러 오면 그때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끌려서 가야 합니다.(눅 16:22) 부자는 음부로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그때 음부에 있던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눅 16:24)” 음부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입니다. 이 구절에서 멈추어서 심각하게 고민해 봅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자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인 것 같은 데...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구원의 기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간 부자에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로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 진다고 설명합니다 (눅 16:25) 그러면 이땅 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천국과 지옥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땅 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의 내용들로 내가 받은 구원이 증명된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나의 구원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받은 구원이 진실이라면 천국을 알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육체의 일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갈 6:7~8) 내가 받은 구원이 진실이면 더욱더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고전 3:11~15) 성경은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으며 사람이 한번 죽은 후에는 둘 중 한곳으로 가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른 이유는 음부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가 보이니, 불타는 곳에서 고통 받는 자신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모금만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살았을 때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얻어 먹으며 도움을 받았으니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의 요구는 거절당합니다. 이유는 음부에서 낙원이 보일 수는 있지만 음부와 낙원 사이에 오갈 수 없는 깊은 구덩이가 있어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낙원이 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일까요? 살아 있는 동안만이 기회였는데, 이제는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구나... 부자는 한번 음부로 들어가면 긍휼함을 받을 기회조차도 다시는 없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부자는 자기의 형제 다섯을 사랑했었나 봅니다. 그 가족이 지금 자기처럼 살다가는 음부로 들어 올텐데 어떻게 하면 막을 수가 있을까? 비로소 음부에 직접 가보니 세상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구원인 것이 깨달아졌겠지요.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혹시라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 천국과 지옥을 간증한다면 믿고 회개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거절 당합니다. 성경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간증하는 것, 그 이상의 다음 세상에 대한 말씀이 충분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받겠다 안 받겠다의 문제입니다.(눅 16:31) 천국과 지옥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0-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