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삼손’(삿 17:28~30)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블레셋이 관할하던 시대에 단지파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없던 마노아 부부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를 보내십니다. 그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세상사는 날 동안 특별히 구별된 나실인입니다. 때가 이르러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삼손이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 행동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자로 지켰습니다. 삼손은 자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 능력으로 블레셋에 악명을 떨치고 유명한 자가 되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삼손은 블레셋 여자 들릴라를 만났습니다. 들릴라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은 자신이 사랑한 것으로 파멸하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사랑한 것의 댓가는 만족이 없는 게 진리입니다.(전 5:10) 삼손이 들릴라 에게 자기의 모든 비밀을 다 털어놓는 순간, 그곳은 구별된 나실인의 축복을 빼앗기는 자리였습니다. 들릴라와 나실인의 축복이 비교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삼손이 뒤늦게 깨닫게 되기 전까지 어리석음은 눈을 가리고 이성을 마비시켜 죽는 길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게 합니다. 들릴라에게 폭로한 비밀 때문에 삼손은 잠든 사이에 머리털이 다 밀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나실인 삼손과 그의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삼손이 어떤 방법으로든 머리가 잘려지면 그것은 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 언약을 무시한 것이지요,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 나무가 먹으면 죽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삼손이 머리를 자르지 않는 구별된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머리를 자르지 않기로 약속한 구별된 행동을 함으로써 그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하여 대우 하십니다. 머리를 자르고 언약을 깬 삼손에게서 하나님은 떠나가십니다. 삼손의 힘은 머리털에 있었던 게 아니라 머리를 자르지 않을 때 언약대로 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한 택하신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삼손은 평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특별하게 구별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삼손은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동안의 삼손이 받은 찬사와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에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 이었기 때문에 누리던 것이었습니다. 삼손 자신의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삼손에게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손, 이제 그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이 끝난 인생이야’ 블레셋 사람들조차도 더 이상 삼손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삼손의 이름은 이제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이 놀랍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삿 16:22)” 하나님은 삼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삼손을 다시 세우시는 그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머리가 자라나면서 삼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별된 자로서의 언약이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 회복 중에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삼손에게 임재 하셨겠지요. 가장 밑바닥의 처참한 곳에서 보니 삼손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들릴라도 삼손 자신도 없었습니다. 오직 삼손을 구원하신 여호와, 그분 한분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삼손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하여 절규합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마지막 주를 향해 죽기를 원하는 삼손의 인생을 다시 쓰신 하나님이 잡고 계시면 다 부서진 인생이라도 영웅이 됩니다. (삿 16:30) 마노아 부부는 삼손의 소원대로 삼천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그들과 함께 죽은 아들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2-0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오늘날엔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던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하거나 심지어 개인끼리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자 시기심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이 소경되었던 자에게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답변이 자신들의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지 바리새인들은 다시 그의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러자 그 부모는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라고 하며 직답을 회피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라.”(요9:17-22). 출교란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임을 용감하게 고백했던 그의 아들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요9:34). 얼마나 두려웠으면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슬람권 나라에서나 공산권에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신앙의 자유가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담대히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이 부끄러워서 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기독교 이미지 때문에 말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로 시인한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입으로 시인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위로 부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말씀처럼 가증한 행동을 하고, 복종하지 아니하며, 선한 일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가증한 행동이란 하나님이 밉게 여기는 행동입니다. 마7:21은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행위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입만 크리스천이지 손과 발은 크리스천이 아닌 것입니다. 행위로 시인하는 증거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벧후2:1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멸망케 할 이단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예수님의 종, 더 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노예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을 행위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지만 정말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뜻이 아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못합니다. 아니, 살아가려는 뜻조차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행위로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할 뿐 아니라 행위로도 시인해야 합니다. 요일2:20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기름부음은 성령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성령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 또한 예수님을 시인하는 행동입니다. 반대로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느낌, 성령의 감각은 우리 안에서 평안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할 때 양심이 편안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할 때 양심이 불안합니다. 이처럼 성경 안에서 양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행동입니다(잠3:6). 그것은 마치 요셉이 형님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나간 사건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인정하고(창45:8), 다윗이 시므이가 그에게 한 저주를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삼하16:11). 이와 같이 일어나는 사건들 모두를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인정하는 것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시인하는 행동입니다. 신자들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인정하면 사람과 일과 사물을 대할 때 태도가 달라집니다. 드러나는 환경이 아니라 배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읽으려고 애를 씁니다.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습니다(고전8: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하나님의 아신 바 되면 하나님나라에서는 물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은 입으로 시인하고, 행위로 시인하며,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의식하고,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허락으로 인정하며,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2-0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택하신 자들’(요 6:60~71)
    사람들은 건강하게 잘사는 것을 원합니다. 잘살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선이고 진리이며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병도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고 큰 무리들이 따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피하여 산으로 떠나십니다. 왜 굶주리고 병든 큰 무리들을 버리고 도망치다시피 떠나시는 것일까요? “이분을 붙잡아야 우리가 먹고 살겠구나” 오병이어를 보고 눈이 뒤집혀 예수님께 집요하게 따라 붙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실 수 있어야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무리들은 하나님이 안보이고 오천명에게 떡을 먹이시던 그 매력에 감동을 받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으러 이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리 병들고 굶주린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니 그들에게 피해서 조용히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인가? 큰 무리들 중에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는 앞으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걸러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것은 떡입니다. 예수님은 먹고 살기 위해서 떡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살기위해서 먹는 양식은 그들이 생각하는 떡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을 소개하십니다. 그 떡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십니다. (요 6:48) 여기까지 들은 무리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생각과 너무 다르니 충돌하면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내가 알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니..”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인간으로 내려온 사실 만큼 믿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계속해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은 수군거리는 그들을 뚫고 지나가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니라” 진리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갈 때 모두 진리에 부딪쳐 걸려 넘어지면서 부서지고 깨어집니다.(마 21:44) 그중에 진리 안으로 들어와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누구든지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들이 올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 예수님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다고 하시는 어마어마한 진리의 선포 앞에서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나 가버릴 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진짜 생명이 무엇이며 진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얻어야 다 얻게 됩니다. 오병이어는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를 능히 해결하시고도 남을 하나님이십니다. 오병이어에서 체험했던 분량의 떡을 가져도 다 얻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가져야 다 얻게 됩니다. 이 진리를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큰 무리들이 다 떠나버린 빈자리에 예수님이 택하신 12명의 제자들이 남아있습니다. 아! 이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택하셨군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1-2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붙드는 사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4:2-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려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손에 있던 지팡이를 던지도록 하여 뱀이 되게 하시고, 뱀의 꼬리를 잡게 하여 다시 지팡이로 회복시키는 이적을 행하게 하십니다. 또 그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여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알리도록 명하십니다. 모세는 당시 나이 80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라면 지팡이를 의지할 나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앞으로 40년을 더 살면서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도 흐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신34:7). 아마도 그 지팡이는 모세가 양을 치는데 필요한 지팡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긴하게 쓰던 지팡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땅에 던지자 뱀이 된 것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지팡이처럼 요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림받게 되면 뱀처럼 사악하게 됩니다. 1.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지팡이처럼 붙드십니까? 사42:1이하에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부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 된 사람입니다. 종이란 자신의 뜻이 없고, 오직 주인의 뜻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붙드십니다. 산 나무는 지팡이로 쓸 수 없습니다. 죽은 나무를 지팡이로 사용합니다. 주님이 붙드는 사람은 십자가로 자기를 처리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모세의 말에 권위가 있었고, 여호수아에게 능력이 있었으며, 바울을 통하여 많은 역사가 일어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의 뜻만 추구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이 누구를 버리십니까? 주님은 결코 먼저 버리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삼상15:26b). 말씀을 버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버리십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면 하나님이 버리십니다(롬1:28). 노골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기도드리는 것과, 주일 지키기를 싫어하는 행동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한 결과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됩니다(롬1:29). 교만하면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6). 하나님의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하여 겸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 곧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을 붙드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버리고,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며,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십니다.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1-2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요3:1~6)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선생이었지만 그가 아는 지식의 한계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셨다는 것을 알고 그 분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대화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거듭남이 무엇인가? 거듭남은 예수님과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 없는 의미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거듭남이라는 것은 배워 본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노인이 되는 것이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자기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3:4)” 니고데모는 물리적인 생명 외에는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육체의 순리대로 지성인답게 냉철하게 반문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유대민족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아니었던가요.. 니고데모는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과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물리적인 생명이외에 다른 생명이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다른 생명은 물과 영으로 나는 생명, 즉 죄가 씻겨 성령으로 태어나는 생명 입니다.(행 2:38) 이 생명은 살면서 하나님께 직접 받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생명은 더러운 것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받을 수 있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받으면 물리적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로운 생명이 내안에 들어와 잉태되어 자라는데 어떻게 아무 변화가 없을까요? 생명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존재가 변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이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요 3:6)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은 다른 생명입니다. 동일한 종이지만 존재는 다릅니다. 어떤 생명이 있느냐에 따라서 육체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그들은 존재가 다르기 때문에 사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사람은 물리적인 생명만 있습니다. 그는 영의 생명이 없으니 육체의 생명의 한도 안에서 살다가 죽는 거기까지만 됩니다. 영이 죽어있어 영의 생명이 없으니 보이는 육체가 즐거워하는 것으로만 만족해합니다. 육체의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다릅니다. 물리적인 생명에 또 하나 성령의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는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을 듣고 거듭남의 의미에 대해서 놀랍니다.(요3:7)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부터 원인이 되어 발생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요3:13)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고 영접하면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요 3:15) 그 외에는 천국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물리적인 생명만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물과 영으로 거듭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요 3:5)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는 이 증언을 받은 자들입니다.(요 3:11) 그 생명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가는 니고데모를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에 대한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이 충격이었겠지요, 자기가 알고 있는 메시야의 자료들을 뒤져보고 연구해 보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을까요? 고민하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고 영의 생명으로 거듭났을 것입니다. (요19:39)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있었습니다.(요 7:50)
    • 칼럼
    • WAIC 칼럼
    2020-0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말씀을 지키며 간직하라’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7:1-5) 말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빼앗으려 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밭에 떨어진 씨, 옥토에 떨어진 씨, 그 중에 가장 좋지 않는 상태는 길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씨들은 그래도 싹이라도 틔우지만 길가는 싹을 틔우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눅8:11) 새는 곧 마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하여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 길가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옥토와 같은 것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길가와 같은 마음이라면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간직할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기 때문에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됩니까? 길가는 사실 밭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밭이라면 우선 갈아엎어야 하고 돌멩이를 추려 내야하며 때때로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길가는 갈아엎을 필요가 없습니다. 갈아엎는다면 오히려 다니는데 불편한 것입니다. 이처럼 길가는 한 번도 갈아엎어보지 않는 마음입니다. 호10:12는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은 딱딱하게 굳은 땅입니다. 누구 밑에도 있지 못하고, 순종해보지 않은 자기 뜻, 자기 고집,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 완고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이 길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옥토가 되기 위하여 먼저 땅을 갈아엎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내 고집, 내 생각 부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갈아엎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십니다. 갈아엎도록 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에는 남편, 아내를 주셨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을 주셨으며 회사에는 상관과 동료들을 주셨습니다. 경작된 밭 곧 순종적인 마음밭에 성령께서 말씀의 씨를 뿌려주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 씨를 간직하게 됩니다. 간직하기 위하여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체 구조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라면 눈일 것입니다. 손이나 발에 티끌이 묻으면 예민한 사람이라면 바로 느끼겠지만 보통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아에 음식찌꺼기가 있으면 다소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말을 할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코에 먼지가 조금 끼면 딱지가 생기고 불편하겠지만 그런대로 숨을 쉽니다. 그런데 눈동자 안에 먼지나 작은 티끌이 들어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몹시 불편하여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빼내려 애를 쓸 것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눈동자가 그만큼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 신앙인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해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이 신자들을 사랑하셔서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니 우리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눈동자처럼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망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서 에덴 낙원을 잃어버렸고(창3:24), 사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버렸으므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삼상15:22-23). 아버지 다윗을 저주하였던 시므이에게 솔로몬은 그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삼 년 째 되는 해에 가드왕 아기스에게 달아난 종을 잡으러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왕상2:36-46). 이처럼 말씀이 곧 예수님이며 우리가 말씀을 놓치면 곧 생명을 놓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눈동자 같이 지키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눈동자처럼 말씀을 지킬까요? 요14:15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영, 곧 성령을 풍성하게 주시고 그 성령께서 지키게 해주십니다. 자신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키고 행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세 번째 할 일은 손가락에 매며 마음 판에 새기는 일입니다. 손은 우리가 행동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밥 먹을 때 손이 필요하고 일을 할 때 손이 필요하며 몸을 씻을 때 필요합니다. 사람과 교통할 때 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에 말씀을 매라고 합니다. 그런 일들을 할 때 무작정하지 말고 먼저 말씀에 합당한지 그렇지 못한지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고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을 넘어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새기려면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행한 그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집니다. 새겨질 뿐 아니라 점점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 밭을 살피고, 눈동자처럼 지키며, 행함으로 마음 판에 새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1-20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우물가의 여인’(요 4:10~17)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를 통해서 지나가십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한낮 12시경입니다. 여행길에 지쳐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거기서 만나셨습니다.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 여인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인생의 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지 않는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나온걸 보니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어서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여인인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녀는 알고 보니 심히 목마르고 허기진 여자였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심한 공허함과 무엇으로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으로 결핍된 여자였습니다. 목마르고 심하게 굶주린 상태를 상상해 봅시다. 고통스러운 목마름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있으니 자기의 허기와 목마름을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가 결핍되어 있으니 잘해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가진 게 있어도 좋은 줄을 모릅니다. 누가 무엇으로 이런 여자를 만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여자입니다. 평범한 여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사는 일상을 사는 게 어려운 여자입니다. 여인의 목마름은 남편이라는 대상으로 무너지고 부서져 버린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너무나 목이 말랐지만 여인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적인 목마름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존재적인 목마름은 내 안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속으로부터 채워져야 합니다. 근원자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입니다. 존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목마름입니다. 어떤 다른 피조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생문제는 방법이 없다고 그럭저럭 체념하고 삽니다. 해결할 수 없는 곳에서 찾으려고 헤매다 찢기고 상처받고 아프니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이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와서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분명히 주십니다. 그물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자기가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도 주소서’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아픈 부분을 건드리시는가, 피하는 게 예의인데... 물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의 가장 부서지고 무너진 부분을 직면하고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남편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심한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게 남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직면하니 남편은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애통의 과정을 지나서 비로소 여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여인은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어서 바싹 말라 비틀어져서 목마르고 굶주린 여인에게 예수님으로 부어졌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부어질 때, 그 생명이 닿으면서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이 나에게 부어질 때 그때 비로소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 분명히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1-1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역대하16:1-10)
    남왕국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잘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침입하였을 때, 유다와 베냐민은 군사 오십팔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대하14장).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맛본 아사였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전략적 요충지인 라마 성읍을 건축하여 사람을 그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했을 때 전처럼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하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벤하닷에게 주며 구원병을 청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좋아보였습니다. 벤하닷이 아사의 말을 듣고 그 군대 장관들을 보내 이스라엘 두어 성읍과 국고성을 치자, 바아사가 라마 성읍 건축하는 일을 그만두고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사왕은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 그것으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기까지 하였습니다(대하16:1-6). 어떻게 보면 외교적으로 성공한 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견자 하나니가 나타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 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대하 16:7) 하나니의 이 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함으로 아람왕이 이스라엘에서 벗어난 것처럼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우리 손에 벗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돈을 의지하면 돈이 우리에게서 벗어날 것이며, 자녀를 의지하면 자녀가 우리에게서 멀어질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지혜가 점점 달아나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이며, 권력을 의지하면 권력이 달아나게 됩니다. 명예를, 가문을, 아름다움을, 학벌을 의지하면 그것들로 인하여 망신을 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만큼 달라붙습니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8절). 손에 붙이셨다는 것은 주관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9절). 전심으로 주님께 마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향한다는 것은 마음의 방향을 주님께 정하고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사왕은 이 책망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노하여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 명의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아사는 이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인간 방법을 의지하다가 발에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잘 믿었던 아사왕이 왜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스스로 잘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의 지혜로 인하여 라마성 건축하는 일이 파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스바까지 새롭게 건축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를 교만케 만든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이처럼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우리에게서 떠날 뿐 아니라 저주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7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히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8절) 신앙인들이 영원토록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막 가운데서도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어떤 환난에도 견디고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 한 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1-0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장자의 복’(창 28:10~17)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쌍둥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자 에서와 둘째 야곱입니다. 장자는 집안의 기업을 이어가는 맏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별거 아닌 것처럼 무시했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한끼 배불리는 죽 그릇의 가치보다 못한 것으로 계산 했습니다. 오히려 둘째 아들 야곱은 장자권을 빼앗아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 탐냈습니다. 야곱의 눈에는 장자권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정말 탐이 날정도로 가치가 있으면 갖고 싶겠지요,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투자합니다, 재능, 시간, 돈, 나의 목숨까지도...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나라에 걸 수 있는 사람이 기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사냥 잘하고 강하고 힘 있는 것만 가지고 기업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무시하면서도 장자의 복은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히 12:17) 에서는 장자의 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장자권에 대한 가치를 모르니 그 복이 어떤 복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장자권과 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장자권이 복 그 자체 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집안의 기업을 맡기시면서 주신 말씀에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땅을 주겠다, 너에게 준 복을 통해서 온 민족이 그 나라를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겠고 나는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이 내가 너에게 준 복을 통해서 함께 그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2:2~3)‘ 보통 복이 아닙니다, 어마 어마 합니다. 이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야곱은 막연하게 생각했던 장자의 복을 벧엘 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날 밤, 두렵고 외로운 그 밤에 돌 베게를 베고 자는 데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야곱은 땅에서 부터 세워진 사다리를 보았는데 그 위가 하늘 문 까지 닿아 있었습니다.(요 1:51) 하늘의 문이 열어집니다. 영적 존재들이 하늘과 땅으로 오가는 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 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기업을 잇는 자인 야곱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천국을 주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받은 축복에 들어와서 함께 네가 받은 복을 얻을 때 천국에 함께 들어갈 수 있다. 이일을 이룰 때 까지 널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여기 계시는 것을 나는 몰랐구나,’ 하늘의 하나님이 여기에 임재하십니다. 이곳이 성전이며 하늘의 문이 열리는 곳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예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는 영원한 언약이 확인됩니다. 야곱은 이 하나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았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 기업을 이어가는 장자의 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복을 보았습니다. 장자의 복이 어찌 에서의 죽 한그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온 세상 중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가는 장자입니다. 온 세상은 교회의 복에 들어와 함께 그 복에 참여하여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받게 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1-0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기업’(창 25:27~34)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을 해서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리브가의 태속에서 부터 서로 밀쳐내면서 싸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리브가의 태 안에 다른 두 민족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육으로 난 생명과 성령으로 난 생명이 한 태안에 함께 들어있습니다. 때가 차서 리브가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서가 장자이고 후에 야곱이 나왔습니다. 큰아들 에서는 사냥을 잘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온 고기를 먹으면서 큰아들이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집안의 대를 이어 기업을 맡겨도 안심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든든한 큰아들을 사랑했습니다. 한편, 야곱을 보니 소심하고 겁도 많고 조용한 기질로 하루 종일 집안에만 박혀 있으니 걱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야곱이 더 강하고 담대해서 오히려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 이라고 예정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릅니다. 야곱과 에서가 살면서 무엇을 선택하는 가를 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더 확실해 집니다. 어느날, 야곱은 언제나처럼 집안에서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하다 왔는지 무척이나 피곤해서 들어왔습니다. 심하게 허기가 져서 곧 죽을 것만 같습니다. 때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으니 빨리 먹고 싶었겠지요, 그때 야곱은 자기가 만든 죽을 에서의 장자명분을 받고 팔겠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그까짓 장자명분이 뭐가 중요해, 빨리 죽이나 내놔라” 야곱은 에서의 맹세를 받고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탐이 나서 빼앗고 싶을 정도로 흠모하는 장자의 명분이 에서에게는 별 게 아니 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선택이 하나님의 예정을 더 분명하게 합니다. 장자의 명분은 집안의 기업을 잇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통틀어 놓치면 안 되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이것을 겨우 죽 한 그릇의 가치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에서는 지금 당장 배가 고파 죽겠는데 그깟 장자의 명분은 먹고 사는 것에 별 유익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자를 하나님은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히 12:16) 우리는 살면서 자기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야곱은 천국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탐이 나서 빼앗고 싶을 정도로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욕심입니다. 야곱은 세상에서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천국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알아서 그것이 탐이 난 사람 이었습니다. 그 인생이 완전해서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이어가십니다. 야곱은 무너지고 부서진 시간 속 에서도 천국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알고 그것을 붙잡고 놓치지 않았던 인생이었습니다. 에서는 기업을 잇는 것 보다 한 끼 배불리 먹는 게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의 핵심신념은 이땅 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서는 기업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계가 있습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 온 우주의 왕이 자기 나라를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나라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리 이 땅의 강하고 능력 있는 자라도 그 나라를 모르면 이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교회입니다. 내 인생이 아무리 깨지고 부서졌어도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갑니다. 이 존재감을 잊지 맙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2-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