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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현수)가슴꽃
    가슴꽃 안 재 찬나는당신이 곁에 있을 때에는빈 자리의 실상을 제대로 읽을 줄 몰라서사랑의 부피와 무게를쉽사리 가늠할 수 없다가당신이 떠나고 난 뒤에사늑골을 흥건히 적시며참뜻을 가늠하고 있습니다지금내 거칠은 마음밭에서당신의 열정과 숭고로 빚은 올곧은삶의 희열이 오롯이 자라남은가난한 영혼을 위하여몸을 던져 자신을 버리고광야의 신기루처럼홀연히 이승을 떠난당신의 순수가당신의 충정이내 가슴 속에서단 하나의 찬란한 소멸아닙니다 빛부신 소생으로영원을 둥지 틀었기 때문입니다누군가 내 곁에서 떠나버린 그 존재의 부재로 인해 비로소 그의 실체의 무게와 빈자리를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곁에 있을 때에는 몰랐지만 가버린 그 자리는 공허하기 그지 없다. 뜨거운 보혈로 나를 사랑하고 건져 주신 크고 영원한 이름인 그 분을 곁에 두고서도 몰랐던 어리석고 나약한 시인의 고백은 오히려 정직하다.왜 떠나보냈을까. 현란한 유혹과 욕망에 이끌려 다니며 눈멀고 귀멀었던 모습은 애틋하고 아리다. 눈물이 흘러 옷깃과 늑골까지도 흥건히 젖어드는 고백성사 참사랑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있었음을 본다. 그러나 그 분은 떠나지 않고 지키고 계셨음을 알았다.웬일일까? 가슴에 붉은 빛부신 꽃이 피고 있지 않는가. 다 버리고난 빈 가슴에 영원한 보혈의 이름으로 피어나는 소생의 꽃이 가슴의 꽃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12-16
  • 치유는 선교의 전인적 사역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신학자 하르낙은 그의 저서 고대 교회 선교사에서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며 초대교회 선교전도자들이 자기들의 메시지를 아주 본질적으로 “구세주와 치유에 관한 복음”이 되도록 했음을 입증하였다. 기독교선교가 계획한 것은 아니나 타종교들과의 만남에서 발생된 부산물로서 혼합주의적인 제의공동체들이 모든 비서구대륙들에서 발생했다. 이에 반기를 든 벵트 순트클러의 지도를 받고서 40년대 이래의 선교-종교학은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갖게 되었다. 이 연구 분야는 역사 자료에 대한 관심 외에도 이를 훨씬 넘어서 보다 더 근본적인 서구 신학 특히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및 전반적인 선교적 복음전달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20세기에 먼저 오순절운동이 있었고 후에는 은사운동으로 발전되어 예수 활동이나 사도들과 교회들의 사명들 속에서는 구원과 치유가 불가분리의 일치성을 갖고 있다는 그들의 확신이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종합사고에서 이른바 “온전한 복음”이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세계적인 은사운동의 도전이 거세어지고, 나아가서는 사회복음 운동의 초기에까지 연결되고 30년대와 40년대에 이해적 접근으로 알려진 에큐메니칼 선교운동의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현재 복음주의 선교에서도 구원과 복음화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가 크게 요구되고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파송명령은 교회를 총체적으로 인도하였다. 또한 직분자들을 병자에게 보내면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명하였다. 칼바르트가 올바르게 통찰한바 인간의 건강이야말로 “인간 존재됨의 원동력인 것이다. 인간에게 그 건강의 힘은 그 자체가 오로지 인간존재의 기능들과도 같은 그런 영육간의 기능들을 발휘토록 하는 능력, 강인성, 자유로서 인간에게 봉사한다.” 성경적 신앙 속에서는 인간의 육체성의 중점적으로 강조되어왔다. 특히 창조론에서, 신적 로고스의 성육신 증거에서와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속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모든 인간의 육체부활을 위한 보증인 것이다.한국에서의 조용기 목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사유의 생활에서-기적을 기대하면 성공을 지향하면서-‘적극적 사고’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의 원천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용기 목사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서 성부 성자 하나님이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힘이 흐르는 “통로”이다. 이 신적인 힘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신앙행동으로 모든 형태의 영육적 병들, 즉 폐병과 암을 포함하여 일순간에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 또한 건강과 질병에 대한 성경적 근본 전제조건은 바로 건강, 즉 혼과 몸의 강건성과 안녕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선물은 그가 선하심으로 인간에게 베푸신 것이며 그 창조의지를 따라 인간 생명이 정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호하시며 치료의 도구를 주신 것이다. 특별한 경우엔 기적적 방법으로 신적 저주의 궁극적 철회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구속사적 산물인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배제하지 않았던 사실은 각 개인의 경우에 사람의 병은 그 자신의 죄가 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인 그분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극심한 분노로 대적하고 있다. 집요한 전략을 가지고 밖에서 안으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고, 마비시키고, 비뚤어지게 하여 결국 그 전체 삶의 방향이 하나님 대적으로 왜곡시키려 한다. 이러한 죄의 산물에서 벗어나야한다.성경적 이해로서는 생명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생명의 손상은 인간의 타락 이후로 상실된 하나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금단의 열매를 먹어도 즉시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지라도 타락한 첫 번째 한 쌍의 부모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선언된 이래로 모든 그의 후손들의 생명은 불가불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질병은 산물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3중적 저주(창 3:14-19)의 표적인데 첫째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로 육체적 실존이요, 셋째로는 그 직업적 실존을 무너뜨리는 저주인 것이다. 이 저주에 기인하여 그 둘째 양상 속에서 죄인은 항상 다시 육체적 정신적 종류의 질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 자신의 힘으로는 전혀 방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신유의 은혜가 전인구원의 축복임을 이해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2-16
  •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서 보는 유대전쟁의 단초
    정의란 들고 나서는 이들에게 모든 것이 허락되고 있다는 망상을 갖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힘이 더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로부터 동포를 구해낸다는 대의를 내걸었던 유대인이 그랬고,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대의를 내건 십자군이 그랬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러시아의 스탈린이 그랬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더듬어 보노라면,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항전기록은 그대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낯선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신정체제(데오크라티아)라는 대의를 기치로 내걸고 동포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일어났다는 제로타이(과격파)나 시카리오리(단도파=암살과격파)들이 동포를 약탈하고 탄압 학살한 기록 말이다.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일은 당시 유대민족들로 하여금 과격파들이 내건 기치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게하는 안성맞춤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게 로마의 악덕 총독 프로로스였다는 사실이다. 요세푸스는 치를 떨며 그의 저서 중, <파멸의 길>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독 아르비노스의 후임으로 네로가 파견한 후임 게시어스 프로로스는 유대인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크라조메나이(소아시아)출신으로 교활하기로는 그에게 지지 않을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부임해왔다. 그가 총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네로의 애첩 포페아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었고.”증언은 이어진다. “프로로스는 유대인에게 너무나도 악랄하게 권력을 남용했고, 그 결과 곤궁의 밑바닥에 떨어진 유대인들은 전임자 아르비노스를 은(銀)이었다고 칭찬할 지경에 이른다. 아르비노스는 적어도 악행이 드러나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줄은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로스는 마치 악덕의 쇼를 연출하기 위해서 파견된 양, 우리들 유대민족을 이것 보라는 듯이 불법으로 다루고 약탈과 불법처형을 남김없이 자행했다... 이 이상 내가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우리는 로마인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되게 한 것은 프로로스였다.”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구호를 내걸고 있는 자들이 그 구호를 위해서라면 서민들의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서민에게는 별 수없이 도적 떼나 폭력집단이 되고 만다. 투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면 은행을 털어도 좋고 인민의 지갑을 가로채도 그만인 그들. 보잘 것 없는 사건 혹은 불가항력적이던 사건이 부풀어 올라 마침내는 자신들에게 큰 박해를 불러오게 되는 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여러 번 경험해온 터. 게다가 그것이 신성과 연결되면 사건은 걷잡을 수 없어지게 마련. 사건은 가이사리아에서 터진다. 항구 가이사리아에서는 그리스인들의 이민이 많아서 유대인과의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시너고그에 인접해서 그리스인의 소유지가 있어 유대인이 매수하려했으나 소유주가 2, 3배나 되는 값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거의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좁은 길만 남겨놓고 공사를 시작했다. 분개한 젊은이들이 나서 공사방해를 했고, 법을 어겼기로 체포된다. 이에 프로로스 총독에게 뇌물을 주고 건축을 그만두게 하려했고, 총독은 협력을 약속한다. 그러나 안식일이 되어 유대인이 시너고그에 모여들자 가이사리아인들 일부가 입구에서 새를 잡아 희생제물을 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유대인이 격노한다. 그것은 곧 그들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였기에. 분별 있는 사람들은 관헌에게 호소하자고 했으나 싸우기를 좋아하는 무리는 기를 쓰고 싸우자고 나서자 이내 충돌은 격화한다. 기병대가 나서보지만 양편의 폭력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요세푸스의 증언은 계속된다. “총독 프로로스는 마치 전쟁의 불씨를 부채질 할 의무라도 있는 듯이,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가이사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17달란트를 빼앗아갔다.” 분노한 민중이 폭동을 일으키자, 프로로스는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요세푸스는 적는다. “성전에서는 대제사장의 아들 엘리아자로스가 성전의 호위를 맡고 있다가, 외국인들로 부터의 희생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과격파의 영향은 지도계층의 자녀들에게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12-16
  • 어떻게 화를 다스릴까?
    한 선비가 관직을 맡아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먼저 벼슬길에 오른 친구가 말했다. ‘여보게, 관직에서 일하려면 무엇보다도 참을 줄 알아야 하네’ ‘명심 하겠네’ 하지만 친구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저 참는 게 제일 이라네’ ‘알았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친구가 또 당부했다. ‘몇 번이라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글쎄 알았다니까?’ 선비가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서 막 떠나려고 하는데 친구가 선비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해. 참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게’ 이 말을 들은 선비가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자네 나를 놀리는 건가? 도대체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하는 건가?’ 그러자 친구는 한탄을 하듯 말했다. ‘고작 네 번 말했는데 자네는 그걸 못 참고 화를 내는군’ 이라고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날 한국 사람들은 어떤 학자들이 말했듯이 ‘냄비근성이 강하고 화끈한 유목민족기질’이 있기 때문에 점점 참을성 즉 인내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다.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고 하루에도 너나할 것 없이 가정, 교회, 일터, 친지들 중에서 늘 다투기를 좋아하고 비판적이며 남을 지배하고자하는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실로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은 곤욕스럽기 짝이 없다. 달래거나 설득하려고 애써 봤자 소용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를 다스리는 요령으로 첫째, 화를 일으키는 감정을 찾으라고 한다. 즉 좌절감, 위협, 두려움, 거절감, 아픔, 질투 중에서 화를 일으키는 감정이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한다. 둘째로 경멸하는 말을 삼가라고 한다. 화를 낼 때 경멸하는 말은 사람의 자존감을 망가뜨릴 수 있다. 관계를 끊거나 일을 그만두자는 위협은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수 있다. 셋째 자신의 감정 상태를 상대에게 알리라고 한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화가 났다면 빈정거리거나 모욕하지 말고 자신의 기분을 털어놓고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거슬린다고 말하라. 넷째 몸싸움은 피하라고 한다. 절대로 때리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라도 육체적으로 학대하면 안 된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때는 그 자리를 떠나라. 가능한 빨리 자리를 피해야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다섯째 필요하면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자제력이 떨어질 때는 잠깐 산책을 하든지 아니면 앉아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라. 마음이 가라앉았으면 자신을 화나게 한 상황에 대해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라고 한다. 여섯째 운동으로 풀라고 한다. 화가 났을 때는 건설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좋다.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 않거나 화가 가라앉지 않을 때는 논의가 좋은 방법이 못 된다. 이럴 때는 육체적인 활동과 운동이 좋은 배출구가 된다. 일곱째 용서하라고 한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바로 ‘용서’ 하는 것이다.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사건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는 성품을 만들어라.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용서하라. 참고 용서하는 것이 인격의 힘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갈등은 참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고 용서하지 못하는데서 끝난다. 사람다움은 자제력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성경은 노를 어떻게 다스리라고 하는가? 먼저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쉽게 화를 내고 분을 품는 경향이 있다. 또 매사에 자기중심적 이어서 무슨 일만 생기면 서로 ‘네 탓’이라며 언성을 높여 싸우기 일쑤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하는 겸허한 자세로 분을 자제하고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야 말로 남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대방을 부끄럽게 하는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잠언을 보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12:16)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 오래 참음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실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병사들이 모여들 때 베드로가 화가 나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버렸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그러기에 억울하게 손해를 본다고 해서 화를 벌컥 내기 전 우리와 같은 죄인을 향해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벧후 3:9). 아울러 성령 충만을 기도해야한다. 성령을 힘입어 살 때만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 지라도 오래참고 인내함으로 노하기를 더디 할 수 있기 때문이다(갈 5:22, 23).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내함으로써 온전해 지고(약1:4) 장차 주님의 약속의 유업 즉 큰 상을 받기 때문이다(히10:36).
    • 칼럼
    • 목회자
    2016-12-16
  • (경현수)구름과 놀고 싶다
    구름과 놀고 싶다 신 규 호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보면불러서 함께 놀고 싶다목마 타듯 훌쩍 올라타고서녘으로도 가 보고가다가 심심하면양떼구름이나 만들다가밤이 되면 별을 불러동방박사의 점이나 보면서아주 가난하고 누추한마굿간 찾아 기웃거리며천사가 나타났는지누가 또 태어났는지알아보고 싶다찾아보고 싶다한해의 결실을 끝낸 가을은 쓸쓸하다. 알곡을 거둬들인 드넓은 벌판은 비어있고 하늘은 높고 흰구름 멀리 떠 있어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가보고 싶어진다.모든 일상을 벗어 놓고 시인은 소년과 같이 꿈을 꾼다. 구름과 함께 구름목마를 타고, 순한 양떼 구름을 거느리고 초원의 목동이 되기도 하고 구름피리도 부르며-헬만 헤세는 “그 하얀 구름의 자취를 따라 / 감미로운 향수를 느끼는 도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은하의 별들을 불러 동방박사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도 한다.낮고 낮은 곳에서는 아기 예수의 체취와 광채를 만나보고 싶어진다, 무한한 우주의 신비도 알 것만 같은 구름과 함께하는 여행, 방랑자인 시인과 구름은 참으로 닮았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12-07
  •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위
    촛불 시위가 광화문을 뒤덮고 있다. 서슬이 퍼렇던 세상권세에 대한 민중들의 자그마한 샘물이 봇물이 되어 대하를 이루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번쯤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시간의 한계로 인하여 머뭇거리다 시간만 흐르는 기분이다. 이러한 시기에 박 대통령 하야(下野)에 대한 홍정길 목사의 글을 읽었다. 필자 에게는 CCC선배 간사님이 되시는 홍 목사님께서 보수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도 꺼려하는 대통령의 하야를 당당하게 꺼내셨다는 글을 읽고 매우 흥분된다. 홍 목사님 본인의 주장대로 “평생 공개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한 기억이 없다”는 글 속에서 고심 끝에 글을 쓴 것 같다.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최선의 길은 박대통령께서 하야(下野)하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분의 글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일로 국가의 격이 무너지는 일이 생길 염려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격은 민주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리고 북한에 가서 관리들과 대화하였던 부분을 예로 들었다. 그는 ‘남북나눔운동’의 이사장으로 대북 교류 관계를 23년 동안 해 왔다. 이 일을 하면서 북측의 한 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을 받게 된다. “홍목사님, 남녘이 민주화, 민주화하는데 뭐가 민주화요?” 그때 그는 “국가 최고 책임자라 할지라도 잘못했으면 감옥 가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권세를 가진 수령이 최고 권력자인 북한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국가의 격에 대한 차별성을 말한 것 같다. “둘째, 아버님께서 하신 그 모든 일들이 이제는 치욕으로 바뀌고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 있다는 염려”에 대한 이야기 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를 오늘의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던 1등 공신이라는 데는 대부분이 공감한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공을 자녀가 까먹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갖지 말라고 충언하는 듯하다. 홍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이끄셨던 김준곤 목사와의 대담을 소개하고 있다. 김준곤 목사님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담을 홍 목사님께 들려 주었다고 한다. 김준곤 목사님은 박정희 대통령께 “왜 일본에서 버리는 공해산업인 폐기물을 한국으로 받아들입니까? 이것이 이 민족 장래를 향해서 바른 일 아니지 않습니까? 산업폐기물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그 때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 공해는 내가 다 마실 테니 우리 백성이 배만 굶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때에 김준곤 목사님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을 보았는데 두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았다고 한다.“셋째, 대국민 담화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는가?”라는 근거로 박 대통령의 하야를 호소하였다. 홍 목사님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식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인간의 가진 권력의 한계점을 말한 것 같다. 지금까지 홍정길 목사님께서 박 대통령에 하신 하야에 대한 호소문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필자는 이제 몇 가지 현안을 진단해 보고 선교적 관점에서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박 대통령은 종교 혼합주의자 였던 최태민과의 만남이다. 최태민은 영세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갖고 활동을 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딸인 최진실의 사주에 의해서 국가의 권력이 집행 되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과 최태민의 만남은 사령에 의한 친분관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종교혼합이 가진 영적 혼돈이다. 결국 정신세계로부터 문제의 발단은 키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종교혼합은 현대 기독교가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하는 판단 능력을 흐리게 만들어 정책을 잘못 수립하고 집행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둘째는 최순실의 부친되는 최태민은 단돈 10만원을 주고 목사직을 샀다고 국민일보에 보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목사라고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가 정상적인 신학교 체계 속에서 공부를 한 것이 아닌 사람으로 판명되었다. 비 신학적인 교육 체계 속에서는 바른 기독교교리를 유지할 수 없음을 기독교교회사는 말하고 있다. 결국 최재민은 기독교를 망가뜨리는 데 앞장선 기분이다. 결국 박 대통령의 하야의 소리는 세상권세의 한계와 영원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비교해 주는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2-07
  •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다시 읽기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게 아닐까 싶다. <리어왕>은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를 다룬 연극. 우리가 “안다”하고 말할 때, “안다”가 무엇인지를 여러 장면과 대사들을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서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성서 컨커던스(Concordance)>가 필요불가결의 자료이듯, 셰익스피어 감상자에게는 <셰익스피어 컨커던스>가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에서 “I Know +***”을 뒤질라치면 20개 항을 얻을 수 있다는데, 모두가 <리어왕>에서 얻을 수 있다니, 그래서들 <리어왕>이 “사람을 알게 하는” 연극이라 말하는지도 모른다. 작품은 두 부자관계, 리어왕과 세 딸(고너릴, 리건, 코디리어) 및 그로스터와 두 아들(에드거, 에드먼드)를 그리고 있는데, 양쪽 부친이 모두 자식에게 배신당한다. 한 쪽은 정신이상, 다른 쪽은 고문으로 실명하는데, 고유명사가 주어진 등장인물 14명 중 8명이 비명으로 죽게 되는 <리어왕>은 곧 “안다”가 잘못됨에서 오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감상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들자면, “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너의 이름은 글로스터”(I Know thee well enough, thy name is Gloucester)가 아닌가 싶다.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리어왕은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한다. 그것은 리어가 세 딸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 여든을 넘긴 리어왕이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애비를 가장 생각하는 딸에게 큰 선물로 주겠다.” 하고 나선자, 장녀 고너릴이 “아버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하고 말하고, 둘 째 리건도 비슷한 말을 토해낸다. 그러나 셋째 코디리어는 아버지에 대한 사려가 깊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자, 화가 치민 아비는 막내를 추방해 버린다. 이를 만류하는 충신 켄트백작마저도... <리어왕>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왕은 두 딸의 입에 발린 말만 곧이듣고 속내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막내의 진정어린 말뜻에 대해서는 알아보려하지도 않았다. 아첨과 과장 덕택으로 많은 영토를 차지한 두 자매와 빈손이 된 막내가 이별하는 장면에서, 막내가 언니들에게 말한다. “I Know you what are you”하고. 언니들의 정체, 미사여구로 늙은 아버지를 호리는 두 언니의 본성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일까. 그리고 이 대사가 연극 전체의 프로세스를 예고한다. 막내 코디리어가 사라지자, 둘 째 리건이 아비에 대해서 말한다. “He hath ever but slenderly known himself(자신에게 대해서는 조금도 아시지 못했지)”하고. “안다”고 하는 말은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도 포함한다는 뜻일까. 4막7장 리어가 추방한 막내와 재회하는 장면에는 추방당했던 충신 켄트가 함께 한다. 딸이 아비에게 묻는다. “Sir do you know me?” 이미 제정신이 아닌 리어는 “영혼이로군. 알고 있지. 어디서 죽었지?” 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그대도 이 사나이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하고 말한다. 이렇게도 서글픈 모습이 되고서야 그나마 충신과 막내딸 그리고 아버지는 서로의 진정성을 이해하게 되다니. 5막에서는 “I Know...”라는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남편을 잃은 리건과 아직 남편이 있는 고네르리의 사이가 험악해져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너댓의 인물이 죽어가는 장면이 대신 비극의 동기를 일깨워준다. 작품 중 최고의 악당 에드먼드는 첫째와 둘째 모두와 정을 통한다. 이 삼각관계로 해서 첫째는 둘째를 독살하고 자신도 자살한다. 에드먼드도 죽고. 한편 리어왕과 막내는 브리튼군의 포로가 되는데, 에드먼드의 지령으로 막내가 교살 당하자, 딸의 유해를 안은 리어가 절규한다. “왜 너는 숨을 쉬지 않지? 이젠 돌아오지 않으리. 다시는, 다시는,...다시는...” 그리고 절명한다. 장송곡이 울리고... 올해가 셰익스피어(1564-1616)서거 400주년. 4대 비극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리어왕>을 더듬으면서 좀 더 자상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주인공 리어왕의 마지막 절규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면 그나마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12-07
  • 비관주의자 대신 낙관주의 자가 되라
    미국의 한 연구자가 신입 보험 세일즈맨들을 대상으로 낙관주의 자와 비관주의 자를 검사 한 후 1,2년 사이의 평균 계약 실적을 분석했다. 낙관적인 성향을 가진 사원은 처음 일 년 동안 3,087달러 계약을 한 반면 비관적인 성향을 가진 사원은 1,962 달러를 계약해 약 60%의 차이를 보였다. 입사 2년 차에는 차이가 더 커졌다. 낙관적인 사원은 비관적인 사원보다 무려 638%나 많은 계약 실적을 올렸다. 비관주의 자는 고객을 방문해 한두 번 거절당하면 낙심하고 포기 하지만 낙관주의 자는 한두 번 거절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영업은 거절당하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믿는다. 낙관주의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밝은 표정을 하며 행운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비관적인 사람은 직장 상사로부터 질책을 당하면 ‘성격이 고약 하네 허구한 날 저래’라고 생각하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 조금 있으면 풀리겠지’라고 말 한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할 때 긴장하는 순간에도 비관적인 사람은 자신이 너무 겁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식은땀을 흘리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대중 앞에서 긴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곧 자신감을 갖고 말하기 시작 한다. 급할 때 택시가 잡히지 않으면 비관주의 자는 ‘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하면서 지속적인 불쾌감을 드러내지만 낙관주의 자는 ‘오늘은 택시잡기가 힘드네’ 라고 하며 일시적인 상황탓이라고 생각 한다. 시험 성적이 안 좋을 때 비관론자는 ‘난 공부체질이 아닌가 봐 하고 전반적인 생각을 하는 반면 낙관론자는 ‘이번시험은 망쳤네 다음에는 더 분발해야지’하며 제한적으로 생각 한다. 우산이 없는데 비가 오면 비관주의 자는 ‘우산을 안 갖고 나오면 꼭 비가 온다 말야’하며 자신 탓을 하지만 낙관주의 자는 ‘날씨가 변덕스럽군’하며 날씨 탓을 한다. 비관적인 사람이 될 것인지 낙관적인 사람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으며 인간관계, 일, 자신의 태도,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모습까지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필터가 결정된다. 낙관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맑고 투명한 필터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의 걱정거리나 문제점을 보는 동시에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가능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비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어둡고 흐릿한 필터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무얼 보든 간에 모든 것이 절망스럽게 보인다. 더 나쁜 것은 인생의 긍정적인 면조차 전혀 보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낙관적인 생각은 질병을 낫게 한다고 한다. 우리 뇌에는 의학이나 약학 분야에서 유명한 ‘플라세보효과’라는 작용이 있는데 인체에는 무해하고 아무런 효과가 없는 약 포도당과 가짜 약을 환자에게 투여하면 환자가 그것을 ‘진짜 약’이라고 믿고 복용할 때 정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뇌에서 약의 효과에 반응하는 호르몬이 대량으로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속담처럼 정말로 좋은 기분 즉 낙관적인 생각의 힘으로 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실례로 제1,2차 세계대전 중에 부상병이 급증하자 의약품이 턱 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의사들은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을 처방해 주면서 ‘특효약’이라며 환자들을 속였다. 그랬더니 가짜 약을 먹은 환자들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특효약을 먹었으니 좋아질 것이라는 환자 스스로의 자기 암시에 의해 나타나는 치료 효과였다. 이를 위약 효과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의사 에밀쿠였다. 의사로서 위약의 효과를 확인한 그는 1922년에 발간된 에세이집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에서 상상의 힘은 의지보다 강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아 이미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항상 ‘어차피 나는 못생겨서 인기가 없어 그렇게 큰일은 나한테는 무리야’ 등의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미인이고 능력이 있더라도 무엇 하나 얻을 수 없다. 고로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개발해야한다. ‘나는 소중해 나는 나를 사랑해, 나는 할 수 있어’라고 기도해야한다. 사람들이 요즘 어떠세요? 라고 물으면 ‘ 너무 좋아요’라고 기분 좋게 대답해야한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95%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에게 하는 말에 결정된다고 주장 한다. 그러기에 자기가 원하지 않고 의심하고 겁 네는 일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자기를 훈련하고 통제해야한다.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에 빠질 때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갖 걱정거리들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정적인 마음을 현실적인 낙관주의, 실천적인 낙관주의 자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2-07
  • (경현수)사시나무 숲에서
    사시나무 숲에서 엄 원 용늦가을 공원 사시나무 숲속을 거닐어 보았다.수피가 은백색인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세월을 다 이기고 머리 희끗 희끗 날리는 노인들이 꿋꿋이 서 있는 것도 같고, 재질이무르고 가벼워 가구재나 성냥개비 젓가락 등에 쓰인다는데, 나이들어 가벼워지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름답게 물들인 낙엽처럼 한때 곱게 물들었다가 지상에 떨어져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리라.참으로 정갈한 은백색, 그 위에 노랗게 물들인 낙엽을 보면서 인생도 이렇게 아름답게 저물어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만추의 숲속은 황홀하게 쓸쓸하다,온갖 색채와 음향들이 적나라하게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겸손하게 내려놓고 적신으로 서 있는 나무와 나무, 울울했던 지난 계절의 찬란했음을 결코 말하려 들지 않고 있다.가을날 더군다나 사시나무 숲은 어떨까, 잎 보다 꽃을 더 성급하게 피우던 사시나무, 넘쳐나는 생명력의 분출로 쉼없이 팔랑 팔랑 온 몸으로 전율하며 춤 추었다, 활엽수인 백양나무 잎들은 그들의 본향인 흙으로 내려앉는다. 아주 조용히-은백색의 수피는 노년의 시인의 모습과도 닮았다, 잎을 떨군 백양나무와 정갈하고 가볍게 숲을 거니는 시인의 동질성이 놀랍다.사시나무는 희고 부드러운 재질로 무엇인가 담길 상자로, 혹은 불꽃을 만드는 성냥개비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다시 또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고… 그래서 숲은 잠들지 않나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11-24
  • 교회 치유사역의 선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이로써 인류를 그 제자가 되도록 부른다. 전인을 향해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표적과 기사로 이를 확증해 주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복음이 증거된다. 이런 전인적 치유사역은 초기기독교에서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일찍이 시작되어 체계화된 사랑의 사역이었으며(행 2:44이하, 4장 32-35절, 6장 1-6절 참조), 다른 하나는 기적을 통해 영적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도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역시 은사적 재능을 갖춘 교회 성도들을 통해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첫째로 기적의 신유사역은 사도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교회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오순절 운동이 발생한 이래로 그리고 뒤따라 발생한 다양한 은사적 “성령의 물결” 이후로 “치유기적”이라는 주제에 복음적 기독교의 일부에서는 점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운동에 반대하여 곧장 개혁주의와 경건주의 쪽에서 진지하게 유보적 입장을 올바르게 천명하였다.예수와 그 사도들의 모범을 볼 때 그런 유형의 치유는 전혀 신학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도 구원론 중심적 신앙이 이런 유형의 치유나 혹은 기적 행함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나가 무시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이른바 등한시된 구원론의 붕괴와 기만적인 인위조작 외에도 또 다른 제 삼의 위험성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집회이다.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의 밀교적 능력을 통한 은밀한 혹은 의식적인 이방화(異邦化)이다. 육체 치유는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강요됨이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값없이 주는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생각은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치유가 복음선포와 동반될 가능성은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그런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최우선적으로는-우리들이 아닌!-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은혜를 자랑하려는 뜻을 가져야 한다.둘째로 교회는 은혜수단인 치유 사역을 활용하였다. 근동 문화사의 영향을 받아 의사들의 의료행위가 제사장 단독의 직무를 통해 대체되었을지라도 양자 사이에는 종교적 유대관계가 유지되었다. 의사도 그 치료활동 속에서 기대되는 치유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본 바로는 예수의 천국복음은 육체적 치유의 표적에 의해서 입증이 되었고 예수는 그 사도들을 처음으로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복음 선포 위임과 함께 치유관세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신체심리학적 치유는 영적 직무의 과업으로서 교회의 사역에 내포되어있다. 이는 초대 기독교에서 여러모로 인증된 것이다. 교회의 축복 사역 아래 안수가 예수님 자신의 명령에 근거하여 처음부터 한 의미심장한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상이한 목적들을 위해 실행되는데 그중 하나는 병자 치유이다. 마가복음 6장 13절에 따른 사도적 선교에 대한 서술에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편지에서 이 관계가 하나의 예수전승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밖에도 초대교회의 병자치유 실제가 보충 설명되고 있다. 즉 기름을 부음이 연관되어 있다.셋째는 치유 공동체로서의 그리스도인 교회사역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치유 기능은 세 가지 양상 아래서 고찰될 수 있다. 먼저는 기독교적 사랑(헬:아가페, 라틴어:카리타스)의 관점이다. 다음으로는 신앙인들의 만인사제직의 관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관점이다. 이 모든 세 가지 양상들은 물론 서로서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특수하게 기독교적이며 교회가 그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간적 고통에 대한 실천적 대답을 주었던 그리고 아직도 주어야 하는 그런 특별한 헌신을 잘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교회와 그 지체들은 그 실존을 하나님의 후원에 의존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세계를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세상을 위해 죽음에 내어 주사 역사적이며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려 하시며 영생을 당신으로부터 하사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파괴된 그분과의 관계를 고치사 감사히 그 사랑에 응답하여 나아가서 동료인간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하셨다. 물론 그 제도화된 기관들은 그 주변세계에 기독교적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 고유한, 원래의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과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 사명은 성경적 신앙의 교회론적 근본노선에서 실행되는바 봉사에 민감한 복음선포와 지도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고 또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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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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