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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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들고 나서는 이들에게 모든 것이 허락되고 있다는 망상을 갖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힘이 더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로부터 동포를 구해낸다는 대의를 내걸었던 유대인이 그랬고,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대의를 내건 십자군이 그랬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러시아의 스탈린이 그랬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더듬어 보노라면,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항전기록은 그대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낯선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신정체제(데오크라티아)라는 대의를 기치로 내걸고 동포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일어났다는 제로타이(과격파)나 시카리오리(단도파=암살과격파)들이 동포를 약탈하고 탄압 학살한 기록 말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일은 당시 유대민족들로 하여금 과격파들이 내건 기치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게하는 안성맞춤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게 로마의 악덕 총독 프로로스였다는 사실이다. 요세푸스는 치를 떨며 그의 저서 중, <파멸의 길>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독 아르비노스의 후임으로 네로가 파견한 후임 게시어스 프로로스는 유대인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크라조메나이(소아시아)출신으로 교활하기로는 그에게 지지 않을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부임해왔다. 그가 총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네로의 애첩 포페아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었고.”
증언은 이어진다. “프로로스는 유대인에게 너무나도 악랄하게 권력을 남용했고, 그 결과 곤궁의 밑바닥에 떨어진 유대인들은 전임자 아르비노스를 은(銀)이었다고 칭찬할 지경에 이른다. 아르비노스는 적어도 악행이 드러나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줄은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로스는 마치 악덕의 쇼를 연출하기 위해서 파견된 양, 우리들 유대민족을 이것 보라는 듯이 불법으로 다루고 약탈과 불법처형을 남김없이 자행했다... 이 이상 내가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우리는 로마인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되게 한 것은 프로로스였다.”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구호를 내걸고 있는 자들이 그 구호를 위해서라면 서민들의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서민에게는 별 수없이 도적 떼나 폭력집단이 되고 만다. 투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면 은행을 털어도 좋고 인민의 지갑을 가로채도 그만인 그들.
보잘 것 없는 사건 혹은 불가항력적이던 사건이 부풀어 올라 마침내는 자신들에게 큰 박해를 불러오게 되는 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여러 번 경험해온 터.
게다가 그것이 신성과 연결되면 사건은 걷잡을 수 없어지게 마련. 사건은 가이사리아에서 터진다. 항구 가이사리아에서는 그리스인들의 이민이 많아서 유대인과의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시너고그에 인접해서 그리스인의 소유지가 있어 유대인이 매수하려했으나 소유주가 2, 3배나 되는 값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거의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좁은 길만 남겨놓고 공사를 시작했다. 분개한 젊은이들이 나서 공사방해를 했고, 법을 어겼기로 체포된다. 이에 프로로스 총독에게 뇌물을 주고 건축을 그만두게 하려했고, 총독은 협력을 약속한다.
그러나 안식일이 되어 유대인이 시너고그에 모여들자 가이사리아인들 일부가 입구에서 새를 잡아 희생제물을 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유대인이 격노한다. 그것은 곧 그들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였기에. 
분별 있는 사람들은 관헌에게 호소하자고 했으나 싸우기를 좋아하는 무리는 기를 쓰고 싸우자고 나서자 이내 충돌은 격화한다. 기병대가 나서보지만 양편의 폭력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요세푸스의 증언은 계속된다. “총독 프로로스는 마치 전쟁의 불씨를 부채질 할 의무라도 있는 듯이,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가이사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17달란트를 빼앗아갔다.” 분노한 민중이 폭동을 일으키자, 프로로스는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요세푸스는 적는다. “성전에서는 대제사장의 아들 엘리아자로스가 성전의 호위를 맡고 있다가, 외국인들로 부터의 희생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과격파의 영향은 지도계층의 자녀들에게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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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서 보는 유대전쟁의 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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